아직은 그때가 아니다.
예레미야 29:1, 4~7(창조절 일곱 번째 주일)
살다 보면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드는 생각은 ‘어서 빨리 이 힘든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터널과도 같은 상황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거의 본능적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 힘든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야만 할 때가 잦습니다. 고치 안에서 숨죽이고 겨울을 난 후에도, 꽃샘추위가 온전히 지나간 후에야 나비로 변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비가 되고 싶다고 알에서 곧바로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알에서 애벌레로 변신하고, 다시 고치에서 침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나비가 될 수 있습니다.
■ 예레미야 29:1, 4~7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1차와 2차에 거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강대국을 의지하던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완전히 패망합니다. 완전히 패망하기 전인 기원전 605년과 597년에 2차에 거쳐 포로로 끌려간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 편지를 쓴 시기는 시드기야 왕 초기였고 아직 예루살렘이 완전히 패망하기 전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3차 바벨론의 침입으로 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것을 알았기에, 이미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들에게 70년을 채우고 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니 바벨론 땅에서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이 평안해야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도 평안할 터이니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터를 잡고 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신앙을 지키고 거짓 예언자의 말을 믿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러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예언자 중 ‘스마야’라는 이가 있었는데, 예레미야의 편지를 공개하고 반역자 예레미야, 친바벨론자 예레미야를 처벌하라고 촉구합니다. 스마야를 비롯한 거짓 예언자들은 ‘조속한 시일 내에 포로귀환이 이뤄질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달뜬 소망으로 포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예레미야의 예언보다는 거짓 예언자들의 예언이 달콤했을 것이고, 믿고 싶은 예언이었을 것입니다. 포로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예레미야의 예언은 반역자의 예언이거나 자신들을 저주하는 예언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포로 생활이 생각보다 길 것이고, 머지않아 유다는 망하게 될 것이니, 그곳에 적응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조속히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왜 북왕국 이스라엘에 이어 남왕국 유다도 망할 수밖에 없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 새롭게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읽은 말씀의 시대적인 상황입니다.
■ 병행본문(시 66:1~12, 딤후 2:8~5, 눅 17:11~19)
이번 주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공통점은 이렇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주기도문’으로 불리는 시로, 이스라엘이 어떤 ‘국가적인 구원’을 체험했을 때 지은 시로 알려졌습니다. 시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하신 이들을 향해 각기 소원을 두고 행하시며, 그것을 반드시 이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뤄가시는 과정에서 불과 같이 시험하시고, 은과 같이 단련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불로 시험하시고, 은과 같이 단련을 시키시고, 어려운 짐을 감당하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출애굽 사건(6)과도 같은 역사를 이뤄주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4절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를 연상시키는 말씀입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은 더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혀서 고난을 겪지만, 참고 견디면 주님과 함께 다스릴 때가 올 것임을 믿고 참고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갇혀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갇히거나 매여있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신 계획대로 모든 것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에게 권고합니다. 고난의 때에 인내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합니까?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다(인성).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신성).’ 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지만, 지금은 고난의 때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깁니다. 10명의 나병환자가 은혜를 입었지만, 단 한 사람만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님께 나아와 병은 물론이고 구원도 받습니다. 그는 당시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요, 사회로부터 격리당해 살아가던 나병환자였습니다. 은혜를 아는 그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살아가던 나병환자 한 사람이 병뿐만 아니라 온전히 구원에 이르는 때, 그때는 바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을 때였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예수의 발 옆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인데 발 위도 아니고 발 옆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는 것은 한없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교회력 성서일과 내용요약
네 본문을 연결해서 축약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어떤 까닭에서든 고난의 때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고난의 시간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난 중에 처해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역사를 이뤄가시기 위해 그물에 걸리게도 하시고, 불로 시험도 하시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고난의 과정, 연단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 고난의 시간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를 훈련하고 연단하시는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아직은 그때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이런 의미에서 붙인 것입니다. 아직은 포로생활을 견뎌야 할 시간이고, 아직은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시간이고, 아직은 불 속에서 연단 받아야 하는 시간이고, 아직은 나병환자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단축하려고 하지 말고 묵묵히 견디되,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말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태권도 유단자가 되려면 하얀 띠에서 노란 띠, 파란 띠, 검정 띠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속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꾸준히 한 계단씩 올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고난의 때를 살아갈 때에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고 과정이다. 속히 이 시간이 지나가길 원하지만, 아직 그때가 아니라면 묵묵히 견디자.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며, 아직도 나를 더 연단해야 할, 예수님 발 옆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던 나병환자만큼 더 겸손하게 낮춰야 할 것이 있다.’
■ 은혜와 감사와 예배
지난주,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복음서의 본문을 공부했습니다. 그때에는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사소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고, 감사는 그의 행동을 변화시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하며, 그 감사는 예배로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나병뿐 아니라 대부분의 질병완치 여부는 제사장이 판별해 주었습니다. 당시에는 육체의 질병을 죄와 관련지어 생각했기 때문에, 질병의 치유는 죄사함과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나병 치유 사실을 공인받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까지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아직 나병이 낫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병이 나은 것은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길을 가던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자리에서 나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왜 굳이 길을 가던 중에 낫게 하셨을까요? 아직은 그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 영역이라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영역, 미래에 성취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장 히브리서 11장에서도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성취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짧은 때도, 때로는 긴 시간이 요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들에게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소망은 자신들의 소망일 뿐,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소망을 반영하여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언했던 스마야 같은 예언자들이 거짓 예언자인 까닭입니다.
■ 아직은 그때가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아직 그때가 아닐 뿐입니다. 2018년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고, 북미정상회담이 이어질 때에만 해도 곧 평화통일이 올 것 같은 생각으로 흥분된 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직은 그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아직도 이념 갈등이 거리마다 넘쳐나고, 아직도 빨갱이, 좌파, 사회주의자 딱지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평화통일 혹은 남북경제협력과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려면 아직 우리 사회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불로 연단되어야 하고, 은처럼 단련되어야 하고, 감옥에 갇힌 듯한 우리의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레미야 선지자는 침략국가인 바벨론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지만, 우리의 기도는 그보다는 한결 쉽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념이나 정치적인 성향, 사실 이런 것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치유를 받은 후에 예수님께 돌아와 겸손하게 감사를 한 그 한 사람처럼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의 기자가 고백한 대로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불로 시험하시고, 은과 같이 단련을 시키시고, 어려운 짐을 감당하게 하시지만, 결국에는 출애굽 사건(6)과도 같은 역사를 이뤄주시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 과정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 때문에 분노하지 마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할 길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반드시 한 번쯤은 겪고 지나가야 할 홍역 같은 것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여러분의 일상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평온하게 지켜가십시오. 이것이 믿음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