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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14
▣ 부가적 연구-고린도전서 12-14장-
이 부분에서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칠 때에 보이는 방언과 성령에 관한 주장을 검토해 보려 한다.
“구원을 받은 후에 성령의 세례(침례)가 있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1장과 누가복음 1장 49절을 근거로 내세워,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능력받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령의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 점은 육적인 고린도인들에게조차도 사실이다. 회심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데,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나(엡 5:18), 이것은 성령의 세례(침례)를 받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디 성경연구원의 전 교장이었던 토레이(R. A. Torray)박사는 임종에 앞서서, 그의 가르침과 저서에서 “세례(침례)“와 “충만함“이라는 용어를 혼용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세례(침례)는 회심 때의 단 한 번이며, 자신을 매일 하나님께 양도할 때에 충만함은 많이 경험한다.
“이 세례(침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그 세례(침례)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2:10/12:30), 12장 13절은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오순절주의자들의 논리가 맞다면 그들 모두는 방언을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침례)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으나 방언을 말하지 않았고, 시대를 통해 내려오며 위대한 성도들도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방언의 은사는 영성에 대한 표시이다.“
고린도 교회는 전혀 영성이 없었다. 이 교회는 바울이 다룬 교회들 중에서 가장 육신적인 교회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젖먹이였다(3:1-4). 방언은 심원한 영적인 삶의 표시가 되는 대신,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에게나 교회 전체에는 극히 가치가 적은 열등한 은사이다.
영적인 은사를 받고도 영적인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일은 가능하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보유하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는가 하는 것이다. 방언은 미성숙의 표시이며 열등한 은사이다.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다.“
몇몇 은사들이 임시적인 것이라는 증거는 많다. 예언, 방언, 지식(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진리를 전함)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지나갔다. 고린도전서 13장 8-13절은 이러한 은사들이 지나갈 것이며, 더이상 필요치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것들은 교회의 “어린 시절“에 소속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생명과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도행전 20장 17-38절을 읽고 이상적인 신약 사역의 모습을 찾아보라. 방언에 대한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자는 방언하는 것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들은 단 한 명의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다(12:7). 이 장들에서는 어떤 은사가 신자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허락된다는 암시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14장 13-15절에서 바울은 방언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명백히 언급한다.
만일 통역이 있다면 신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또 그래야만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축복도 없다.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편지와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는 신자들을 서로 결속시킨다.“
순복음 사업기관, 오순절 운동은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온 교파에 스며들게 하고 있다. 그들의 잡지에 많은 교파들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간증을 싣고 있으며, 이 간증들은 “성령의 세례(침례)“를 통해서 놀라운 축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들을 규합시키는 표어들 중의 하나는 “성령의 세례(침례)가 신자들을 단합시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Evangelical Christians) 사이에 일어나는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인 것이다. 그들은 “당신은 근본적인 신앙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세례(침례)는 모두를 위한 것이며,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추종자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른바 “성령의 세례“(침례)가 고린도에서 신자들을 단합시켰던가? 교회는 네 방향으로 분열되었다(고전 1:10-13). 그 곳 신자들 모두가 성령의 세례(침례)를 경험하였다!(12:13) 교회에 불협화음과 분열과 논쟁이 있었으며, 또한 방언의 은사도 있었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방언은 교회를 단합시키기는 커녕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었다. “방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성령의 세례(침례)를 경험하는 한, 그 용어가 어떻든 아무 차이가 없다“
이것은 사단의 그럴 듯한 거짓말이다. 성경의 단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전 2:9-16). 성령의 세례(침례)와 성령의 충만함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들을 분리시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기초로 삼아야하며,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의 단어들과 용어들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무지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는지 살펴보라. 14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깨닫는 데에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사단과 그의 마귀의 세력들이 얄팍한 그리스도인들을 삼키기 위하여 “영적인 경험“을 흉내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곳에서는 활동할 수가 없다.
현대 방언 운동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운동이 교파의 경계를 넘어 휩쓸고 있으나, 교회에 덕을 세우거나 성도들을 연합시키지는 못한다. 어떤데에서는 성공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될 때에는 영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근자에 이르러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새롭게 강조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가 우리의 삶을 시험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교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해야 하겠다. 우리가 성령과 그 능력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며, 성경과 모순된 정서적인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다."
고전 12:1-20
▣ 성령의 은사들-고린도전서 12장-
본 장은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토론(12-14장)의 시작인데, 오늘날 교회와 교파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강조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주제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 장을 연구함에 있어, 분열과 부도덕함과, 영적인 성장을 방해받고 교회 내에 혼란이 있는 등, 고린도교회에 문제들이 있었다는 견지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는데, 성령은 몸의 지체인 여러 성도들에게 영적인 은사들을 베푸신다. 13장은 사랑에서 솟는 그리스도인의 미덕들이 굉장한 은사들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14장에서는 교회의 예배를 주관할 원리들을 진술한다.
1.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12:1-20)
분열은 고린도 교회의 주요한 문제거리였다(1:10-16/6:1-8/11:18-22). 각 그룹은 각자가 선택한 인간 지도자들을 따랐고, 은사들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였으며, 몸 전체의 건강이나 사역을 돌보지 않았다.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풍성하게 받았으나(1:4-7), 영적인 미덕(성령이 그리스도인 안에 이루고자 하시는 성품)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은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나타내거나 영적인 성숙의 표가 되는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 신자들은 육신적이었으나 놀라운 은사들을 행사하였다.
우리는 같은 고백을 나눈다(1-30절)-로마 제국의 시민은 일 년에 한 번 제단에 향을 피우고 “시이저는 주님이시다!“(Caesat is Lord!)고 말하도록 되어 있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가 없으며, 그리스도만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참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정확한 시험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있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길뿐이다(롬 10:9-10).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4-6절)-인간의 몸도 그렇지만 교회는 통일성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의 지체는 다 다르지만, 몸의 건강을 위하여 함께 일한다. 영적인 몸에 있어서,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은사들을 받아(4절) 같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5절), 같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일을한다(활동함, 6절).
우리는 같은 몸을 세워나간다(7-13절)-바울은 이제 성령의 은사들을 열거하며, 이들이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지 개개 그리스도인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우리는 다음의 사항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이 주시는 산물(Spiritual Gift)-이것은 구원과 동시에 받은 성령 자신이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들(Spiritual gifts)-이것은 자연적인 능력이나 재능만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직임(Spiritual offices)-이것은 지교회에서의 책임 위치를 말한다(벧전 4:10/고전 12:28/롬 12:4)
-성령이 주시는 미덕들(Spiritual grares)-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갈 5:22-23/고전 13:4-7).
바울은 각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선물(Gift)을 받았으며(12:3), 성령의 은사(gift)를 최소한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음을 매우 명백히 밝혔다(12:7).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주시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주시는 미덕들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은 이적적인 은사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 8절에서 볼 때에 초대 교회들에 주어진 은사들 중에는 결코 영속되어지지 않는 은사들이 있음이 명백하다. 교회가 유아기에 있을 때(13:11), 즉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이러한 은사들을 필요로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같은 세례(침례)를 나눈다(14-20절)-성령의 세례(침례)는 회심하는 순간에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몸(Boby)의 새로운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에 관련된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는 세례(침례)를 받았고(행 1:5/행 2:1-) 이방인들은 고넬료의 집에서 처음으로 그러한 세례(침례)를 받았다(행 10:44/행 11:15-16). 그 이후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몸(Boby)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성령은 그가 보시기에 적합하도록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 신자들의 위치를 정해 주신다. 그런데 몸의 각 지체는 성취해야 할 중요한 사역이 있다. “한 몸의 많은 지체“, 이것이 현 시대에 주어진 프로그램이다."
고전 12:21-25
2.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12:21-25)
눈부신 은사들을 소유한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몸의 각 지체가 교회의 생명과 건강과 성장을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4장을 읽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사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돕게 하시며, 그들로 다시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지 살펴보자.
은사를 적게 받은 형제에게 “나는 네가 필요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없다. 사실 우리 몸에서 가장 덜 중요하게 보이는 부분들이 가장 유익을 끼친다. 또는, 이들이 적절히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면 가장 큰 문제들이 야기된다. 의사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100개의 기관들 또는 지체들을 열거해 오고 있는데, 오늘날에는 그 목록이 훨씬 줄어들고 있다. 초라한 편도선과 충양돌기(맹장)도 몸의 건강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고전 12:26-31
3. 우리는 서로 영향을 끼친다(12:26-31)
몸에는 아무 분열(분쟁)이 없다(25절).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같은 생명을 나누어 받기 때문이다. 분열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서로를 돌보아야만 하며 교회를 세우고 몸을 튼튼히 하도록 해야만 한다. 인간의 몸에서 한 지체가 약하거나 아프면 다른 지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신령한 몸(spiritual Body)인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지체가 고난을 받으면 모두가 괴롭고, 한 지체가 힘이 강하여지면 모두들 도움을 받는다. 이것은 각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지체가 되어야 할 책임을 지워 준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몸의 각 부분이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공헌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몸(Body)을 강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을 명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특정한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며, 또한 선택하신 대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들의 위치를 설정하신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도들이 없는데 사도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반드시 보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9:1/행 1:21-22).
사도들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가져가 교회를 설립하고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는 특별한 대사들이었다. 선지자들은 아마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대로 말하는 설교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성경처럼 자세히 해설하지는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교회에 직접적으로 전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지는 못하였던 것은 신약 성경이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3장 8-13절은 초대교회가 그 “아동기“에 소유했던 눈부신 은사들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가르친다. 그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하늘(Heaven)이 보낸 신용장이었다(히 2:3-4).
방언이 은사들의 목록에서 가장 끝에 나온다는 점에 유의하자. 분명히 고린도 신자들은 방언을 남용하고 있었으며, 정도가 심하여 공식 예배에 혼란이 일어났던 것 같다(14:23-). 실제로 방언하는 신자들은 이런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똑같은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상기시킴으로 끝맺고 있다(23-30절).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뇨?“ 그렇지 않다! 아무도 방언의 은사가 특별한 영적인 능력이나 성품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 이러한 은사는 바울이 “육신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격인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오늘날 많은 교파들이 있지만, 성령이 내주하시는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몸의 지체들이다. 획일성이 없다고는 해도 통일성은 있을 수 있다. 획일성을 목표로 하여 “세계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귀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획일성을 위하여 기도하신 일이 없었으며, 다만 주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영적 통일성을 위하여 기도하셨다(요 17:20-23)."
고전 13:1-3
▣ 신자가 갖는 미덕의 삼위일체-고린도전서 13장-
세상이 본 장과도 같은 부분을 하나 취하여 기독교적인 참된 의미에서 분리시켜 사용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만약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이러한 사랑에 대해 경험한다면, 대리석 조각상이 할 수 있을 정도 만큼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일상 생활을 통하여 이와 같은 종류의 성품을 행하려면 우리의 생활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며, 그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바울이 여전히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여기서 미덕이 없는 은사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의 열매들은 기적적인 성령의 은사들보다도 더욱 중요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거룩함과 성품보다는 기적적인 경험들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분열과 혼란과 육신적인 점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1. 사랑은 필수적인 것이다(13:1-3)
“자비“란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을 뜻한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도달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비“(박애, Cha-rity)라고 하면 대체로 헌옷을 나눠 주거나 구호기관에 물품을 전달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행동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될 수 있지만, 바울은 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바울이 12장 8-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 중의 몇을 들어,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그것들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에 유의하자. 사랑에서 멀어진 방언은 시끄러운 소리가 될 뿐이며,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이다. 사랑이 없는 예언은 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또한 지식과 믿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사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그리고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사랑이 없다면 개인에게나 또는 교회에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일 뿐이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는 데까지 이르더라도 사랑에서 떨어져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사랑에서가 아니라 경쟁심으로 그들의 은사와 직분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교회는 분열되고 교회를 세워야 할 바로 그 은사들이 유익보다는 해를 끼침으로 인하여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사랑이 없는 설교는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는 기도는 공허한 연설에 불과하며, 사랑이 없는 헌금은 의례히 행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
고전 13:4-7
2. 사랑은 효력이 있다(13:4-7)
만일 사랑이 없다면 은사들은 교회 생활에서 영적인 효력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말한다. 사랑의 자질을 살펴보자.
사랑은 인내하며, 온유하다-사랑은 하찮은 것들을 초월하며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한다. 사람들이 사랑스러울 때는 “사랑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상처를 줄 때 사랑하기란 어렵다. 한 실례로서,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고 범죄하였을 때 그리스도께서 인내하신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집히는 바가 있을 것이다. 사랑은 잘못된 일들을 인내로 견디는 것만이 아니라, 친절한 행동을 하는 데에도 적극적인 자세가 되게 한다.
사랑은 질투로 끊어오르지 않는다-시기심은 지독한 죄이다. 가인은 자기 형제를 시기하여 죽이기까지 하였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갖지 못한 축복이나 혜택을 누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시기심의 불꽃이 피어나도록 방치해 두고는 결국은 끓어오르게 할 것인가?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다-“우쭐하다“는 것은 자부심에 대한 내적인 감정이며, “뽐내다“는 말은 자부심을 외적인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무례하거나 이기적이지 않다-세상이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과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에 대한 미덕이 여기에 있다.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이 오직 유익하기만을 구하며, 이타적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연출된 이러한 사랑을 볼 수 있는가?
사랑은 성내거나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다-“쉽게“라는 단어는 여기 속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육신이 하는 대로 노여움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은 사람들이 저지른 악행이나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록해 둔 장부를 보관하지 않는다. 실상, 사랑은 다른 이들이 악에 관여되어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않으며, 항상 다른 이들이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
사랑은 승리를 안겨 준다-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하여 어떠한 형편에서도 견딜 수 있고 믿음을 가지며, 계속해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윌리암판 성경에서는 7절이 “사랑은 어떤 일이든지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준다“로 번역되어 있다. 사랑은 언제나 승리로 인도한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죄행을 점잖게 꾸짖고 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서로에 대해 참지 못하고 있었으며(14:29-32)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성령의 은사들을 시기하였고(14:1), 교만하고 비판적이었다(12:21-26). 그들의 행동에는 겸손이나 덕스러움이 없었으며(12:2-16),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을지언정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있었다(8-10장). 이들은 쉽게 성내고 서로를 고발하기조차 하였으나(6:1-8), 죄를 마땅히 심판해야 할 때는 죄를 즐기고 있었다(5:1-13).
이 구절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표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본 장에서는 “사랑“이란 말대신 “그리스도“란 단어로 대치해도 된다."
고전 13:8-13
3. 사랑은 영원하다(13:8-13)
고린도 사람들은 젖먹이와 같은 영적인 아이들이어서, 임시적인 일들을 위해서는 분투하면서도 영원한 것들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속되는 그리스도인의 성품 대신 지나가고 말 영적인 은사들을 원하였다. 사랑은 결코 세력이나 권위를 획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은사들은 지나가 버릴 것이다. 예언적인 발언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대신하며, 방언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지식의 은사는 말씀으로부터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으로 인해 제쳐질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사랑이 산출하는 미덕들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바울은 이 은사들이 교회의 “유아기“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성령의 특별한 표시들이 사도들의 신용장이었다(롬 15:18-13). 하나님은 그의 진리를 입증하는 데에 언제나 기적을 사용하지는 않으셨으나 종종 사용하시는데,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에서 성령은 말씀을 능력있게 전파하는 데에 자신을 나타내셨다(살전 1:5-6).
11절에서 바울은 어린 시절의 일에서 간단한 예를 들고 있다. 우리는 어린이가 어린이다운 말을 했다고 그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아기의 말을 사용한다면 비난한다. 사도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너희 갓난아이들이 성장하여 성인과 같이 말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방언과 다른 특별한 표시는 영적인 어린 아이의 일에 속한다. 성장하라!“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임시적인 성령의 은사들을 영적으로 심원한 상태에 대한 표시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14장 20절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방언에 대하여 논의하며, 성장하여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을 그만두라고 다시 말하고 있다.
교회에는 언제나 성장의 여지가 남아 있다.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알고 있으며 불완전하게 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고린도는 금속거울로 유명한 곳이었으므로 바울은 거울을 예로 사용하는데, 구리 거울로는 거기에 비친 실제 인물의 희미한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이는 마치 우리가 오늘날 희미한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그가 우리를 알고 계시듯 우리도 그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완전에 더욱 가까와지도록 성장한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사랑 가운데서 진리를 고수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한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분담해야 하는 사역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고전 14:1-25
▣ 교회 내에서의 질서-고린도전서 14장-
먼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본 장을 죽 읽어 나가며 “알지 못하는“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줄을 그어 지우는 일이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선의적이지만 혼동을 일으킬 번역자들이 첨부시킨 말들이다. 성경에서 방언이란 말이 사용되는 곳들은 언제나 알려진 언어를 가리킨다(행 2:4/행 2:6/행 2:8/행 2:11).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은 그들 각자의 통용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행사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통역이 필요치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10, 21절에서 바울은 그가 알려진 언어에 대하여 논하는 것임을 분명히 언급한다. 이상한 “영적 지껄임“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언어가 아니다.
1. 방언의 열등함(14:1-25)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우월한 영성의 표시이며, 우리가 이러한 은사를 소홀히 하는 한 교회는 결코 영적일 수 없다고 믿게 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가르친다! 그는 방언이 왜 열등한 은사인지에 대하여 세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방언은 교회에 유익하지 못하다(덕을 세우지 못함, 1-19절)-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들이 신자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12:7). 은사들은 일을 위한 것이지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매우 명백하게 밝힌다. 방언하는 사람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에게 아무 개인적인 축복을 가져오지 못한다(14-15절), “방언 운동“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를 개인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실행을 정죄한다.
첫째로, 내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는가? 둘째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그 일을 통하여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육신과 마귀도 이러한 은사들을 흉내내어, 연약한 신자를 굳건한 이해와 믿음에로 인도하는 대신, 편협한 감상주의적인 종교로 이끌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다.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서, 설교와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기록된 말씀을 통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조점들을 눈여겨보자.
예언 방언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
위하여 말함(3절) 말함(2절)
이해할 수 있음(2,5절)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함(2, 5절)
교회에 유익을 줌(3-4절) 자신에게 유익이 됨(4절)
보다 큰 은사(5, 19절) 보다 낮은 은사(5절/ 12:10)
방언은 신자에게 유익하지 못하다(20-21절)-어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과 보다 심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 였으며 “육신적“이었다(3:1-4). 그들은 자신들의 “영성“(8:1-2/10:12)을 자랑하였으나 바울에게서 경고를 받아야만 했으며,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배워야 했다.
13장 8-13절에서 바울은 은사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인 열심이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표시임을 설명한다. 성숙한 신자는 성령과 말씀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를 받쳐 줄 정서적인 “버팀대“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디한(De-Han)박사는 14장 22절에 대해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할 흥미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믿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하며, 「믿지 않는 자들」이란 깊은 신앙이 없는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을 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감정적인 징표들을 주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는 자신의 생애를 정서적인 경험이 아니라 말씀 위에 건설한다.
방언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지 않는다(22-25절)-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표시가 되었으며, 이사야 28장 11-12절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에서 네 번 방언을 보게 되는데, 그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사도행전 2장-방언은 오순절에 모인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다.-사도행전 8장-성령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임하셨음을 유대인 신자들에게 증거하였다.
-사도행전 10장-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셨다는 증거를 보였다.
-사도행전 19장-에베소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언으로 인하여 믿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와 같이 방언에 대한 혼동을 일으킬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또하나의 바벨(Babel)이었다! 믿지 않는 방문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을 듣고 그리스도를 향해 결심하는 편이, 이해할 수 없는 혼란한 멧세지를 듣는 편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고전 14:26-40
2. 질서의 중요성(14:26-40)
방언(26-28절)-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세 사람만 순서대로 할 것이다.
예언(29-33절)-두세 선지자가 말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멧세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사단에게서 왔는지를 시험할 일이다(12:10 의 “분별의 영“이라는 은사를 눈여겨보자). 말하는 이들은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할 것이며 적절한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만일 말하는 자가 “도취된다면“ 이것은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일하신다면 절제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의 여성(34-35절)-이 구절들을 11장 5절 이하, 디모데전서 2장 12절과 연관시켜 생각하라. 아마도 여인들이 자기들의 은사들을 남용하며 위치를 떠나서 이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여인들에게는 영적인 은사가 없다거나, 또는 여인들은 남성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들이 교회에서 자기의 위치를 떠난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대신 교회를 파괴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또한 남자들이 아내들에게 영적인 진리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을 지운다. 이 일은 가정에서 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는 가정이 너무도 많다!
말씀에 순종함(36-40절)-“만일 너희들이 신령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증명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게 역사하는 법이 없으시며, 이러한 은사에 관한 영역보다도 이 원리가 더 절실히 요구되는 곳도 없을 것이다. 방언과 감정적인 경험들을 강조하는 많은 교회들은, 성경의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무시하고 단지 영적인 것만을 주장한다!"
신령한 예배를 위한 조
3. 신령한 예배를 위한 조언
이제 바울이 교회에 일러 준 신령한 예배의 근본 원리들을 살펴보며 본 장을 마치기로 하자.
말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설교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다.
교회는 덕을 세워야 한다.
불신자들 앞에서 간증을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절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며, 예의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권위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축복을 받기 이전에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집회는 어떤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피해야 하는 한편, 열광하는 것도 역시 피해야 한다. 계획된 예배라고 해서 그 예배가 신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배 자체를 인도하실 수 있듯이 이보다 앞서 계획하는 과정을 인도하실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