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오늘, 무등산에서 첫눈 폭설을 맞다
눈보라속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듯, 아, 그 날!
2013년 11월 18일(일), 광주에 내려가 하룻밤을 지낸 후 광주에 사는 시인들과 다음날 무등산 산행에 나섰다.
무등산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광주광역시의 진산(鎭山)이자 모산(母山)이다. 광주광역시 동쪽 가장자리와 담양, 화순에 걸쳐 우뚝 솟은 산으로 산세가 유순하고 둥그스름한 모습이다. 산 정상은 천왕봉(1,187m)을 비롯, 지왕봉, 인왕봉 등 3개의 바위봉으로 이뤄져 있다.
무등산 정상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실타래처럼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증심사 쪽 또는 원효사 쪽에서 오른다. 원효사 근처 공원사무소에서 출발, 늦재삼거리-늦재-동화사터-중봉-목교-서석대 전망대-서석대 정상(1,100m)-장불재-임도-원효사 코스로 원점 회귀했다. 평상시의 보행속도로는 약 5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인데 산행 중 폭설을 만나 조심스럽게 오르내리다 보니 무려 7시간이나 걸렸다.
이번 산행에서는 특히 한국의 대표적 시인들인 이근배 회장(전 한국시인협회장, 신성대 석좌교수,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오세영 교수(전 한국시인협회장, 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임원식 회장(시인, 전 전남일보 사장, 현 광주예총 회장), 백수인 교수(시인, 조선대 명예교수), 임윤식 시인(필자, 월간 오늘의 한국 회장) 등 5명이 함께 했다.
이근배 회장, 오세영 교수,임원식 회장께서는 당시 이미 연세가 70세가 넘은 분들이라 당초에는 무리하지않게 3-4시간 정도 비교적 가벼운 코스로 오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원효사에 도착하자 날씨가 심상치 않다.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산행에 참가한 5명 모두는 조금도 동요하지않는다. 오히려 무등산에서 첫눈을 맞는 감회에 서설(瑞雪)이라고 좋아한다.
눈보라 속에서 9시 50분에 원효사 쪽 공원사무소를 출발, 늦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공원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좌측으로 무등산옛길 오르는 입구가 보인다.
늦재까지 초입은 시멘트길로 된 평지산책로이다. 좌우로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걷기에 정말 좋은 길이다. 앞에서 이근배 회장, 오세영 교수, 임원식 회장, 백수인 교수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S자 길로 접어든다.
길에는 낙옆이 붉게 깔려 있고 가로수터널에는 하얀 눈꽃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붉은 색과 힌색이 함께 뿌려진 화폭. 경치가 환상적이다. 카메라 셔터를 계속 누른다. 하얀 겨울 숲으로 들어가는 시인들. 그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며 걸어가고 있을까? 마치 순례의 길을 떠나는 성직자들 같다.
등산로를 따라 울창한 숲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눈발이 장난이 아니다. 사진을 찍기 힘들 정도로 눈이 휘몰아친다. 일행들은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얼어 꼼짝못하겠다고 야단들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장갑조차 없어 사진을 찍다 보니 손이 꽁꽁 얼어붙는다. 동상에 걸리지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이다. 몇십미터 앞조차 보이지않는다. 온 산이 백색천지. 미끄러질까봐 땅만 보고 걷고 또 걷는다.
늦재삼거리에서 약 1시간 정도 오르니 동화사터에 이른다. 지도상으로는 중간에 전망대가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폭설 속 불과 몇 미터 앞도 안보일 정도여서 전망대는 아예 지나친다. 필자 일행은 서석대 정상까지 오를 예정이기 때문에 중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눈보라 속 숲길을 약 5분 정도 가면 갈대밭이 나오기 시작하고 30분 쯤 후 MBC 송신탑 도착, 다시 갈대밭 능선을 30분 더 가면 중봉(910m)이다.이제 서석대까지는 1km.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 온다.
드디어 서석대(瑞石臺) 전망대 도착.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병풍바위에 하얀 눈꽃들이 피어 있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린다 하여 ‘서석의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리우는 곳. 이 때문에 무등산을 ‘서석산’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11월 중순의 갑작스러운 폭설인데도 나무가지에는 상고대가 맺혀 있다. 그냥 눈 만 온 게 아니라 기온 역시 급강하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상고대의 사전적 의미는 ‘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다. 안개(霧)가 얼음(氷)이 되었다고 해서 상고대를 ‘무빙(霧氷)’이라 부르기도 한다. 겨울철 나뭇가지에 나타난 상고대는 마치 눈꽃이 핀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해발 1,100m에 위치한 주상절리대인 서석대는 한 면이 1m 미만인 돌기둥들이 약 50여m에 걸쳐 동서로 빼곡이 늘어서 있다. 서석대, 입석대로 대표되는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2005년 12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전망대에서 약 200m 더 오르면 서석대 정상. 정상에는 ‘서석대 1,100m'라고 쓰여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무등산 정상은 천왕봉(1,187m)이지만 특별히 개방되는 날을 제외하고 일반등산객들은 이곳 서석대 정상까지 만 오를 수 있다.
눈보라 속을 산행하다보니 원효사-늦재-동화사터-중봉(915m)을 거쳐 서석대 정상 표지석(1,100m)까지 무려 3시간 40분이 걸렸다. 바로 앞이 천왕봉인데 시야가 전혀 보이지않는다.
이제부터 하산이 걱정이다. 눈이 올 것을 당연히 예상치 않았기에 아무도 아이젠을 가져온 사람이 없다. 자칫 바위길에 넘어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13시 30분에 하산 시작. 하산길은 장불재 방향이다. 등산로 정상에서 장불재까지는 900m거리이다. 하산길 중간 500m 아래에 입석대가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장불재의 KBS송신탑과 뒤로 백마능선도 보이는 데 오늘은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거의 제로이다.
미끄러운 비탈길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바위길이라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정상에서 약 7분 정도 내려가면 이무기가 승천하였다는 승천암을 만나고, 곧 입석대 돌기둥들을 연이어 만난다.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는 입석대는 또 다른 모습이다.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돌기둥들, 마치 써커스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아슬아슬하다. 자연의 오묘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입석대 기암괴석들에 취해 정신을 팔다 보니 어느 새 장불재(900m)다.
입석대에서 장불재 사이에는 광활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어 또 다른 장관을 보여준다.
장불재에 도착하여 잠시 배낭을 풀고 가져온 김밥 등을 먹는다. 혹한 속에서 먹는 점심식사. 마치 한 겨울에 토벌대에 쫒기는 빨치산 모습들 같다.
장불재에 도착하니 이미 시간은 2시 20분.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차디찬 김밥을 벌벌 떨면서 입에 넣는다. 김밥, 돼지고기 등 임원식 회장 사모님이 정성껏 준비해주신 음식이다. 혹한 속에서 앉지도못하고 서서 먹는 식사가 그래서인지 별미이다.
2시 40분, 하산을 위해 장불재를 출발한다. 임도는 장불재에서 원효사까지 이어진 차도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이 계셔서 내심으로는 솔직히 걱정이 된다. 제일 연장자이신 이근배 회장은 시인협회나 각종 문학행사에서 자주 뵙지만 함께 등산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괜찮으신지 다소 염려가 된다. 하실 만 하겠느냐고 여쭤보니 문제없다고 자신감을 보이신다. 대단한 체력이시다.
다행히 하산길 임도는 계속 평탄한 내리막길이라 산책하듯 여유있게 내려간다. 약 2시간의 길고 긴 하산길. 오후 4시 반 경 드디어 원효사가 보인다. 다 왔다는 안도감에 발길이 더욱 경쾌하다. 눈보라와 추위 속 히말라야 정상을 오른 것 같은 7시간 산행이 드디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아뭇튼 본의는 아니지만 어른들을 모시고 아이젠 등 겨울산행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않은 채 폭설 속에 1,100m 높이의 무등산 정상능선을 올랐다는 게 아찔하다. 11월에 이런 폭설과 추위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는 핑계도 있을 수 있지만 사고란 늘 그런 변명 속에서 생기는 법이다.
고산 등산을 할 때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절실히 실감한 산행이었다. 11월 이후 높은 산을 오를 때는 사전에 꼭 일기예보를 체크하고, 방한복은 물론 눈이 올 것에 대비, 아이젠, 장갑 등을 꼭 준비하는 게 좋다. 또, 아프거나 길을 잃을 경우에도 대비, 비상약, 랜턴, 간단한 비상식량 등도 배낭에 넣고 다닐 필요가 있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