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05.22.자 진천군 성석리 이팝나무길.한반도지형전망대.김유신탄생지.송강 정철유적지 관광기.
(관광계기)
핸드폰에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보니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붕어마을과 한반도지형전망공원이(한반도지형전망대) 볼만하다는 소개글이 있었다. 또 동시에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 이팝나무 가로수길 이팜나무 꽃길도 아릅답다는 내용도 같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와 진천읍 성석리 이팝나무 가로수길 주소지를 메모해 두었다. 이팝나무꽃은 금방 시들 것 같아서 가장 빠른 시일로 관광 날짜를 잡고 관광길에 나선 것이 2021.05.22.일 토요일이었다. 5.22일 전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였다.
(관광지 행로)
2021.5.22.일 아침 05시10분경에 아파트 단지를 출발했다. 조수석에는 집사람을 태웠다. 진천군 진천읍 성석리를 내비에 입력하고 출발했다. 성석리 이팝나무 꽃길을 먼저 들리고 그다음에 초평면 한반도지형전망대와 붕어마을을 둘러볼 계획으로 출발했다.
중부2고속도로-진천ic를 빠져나와 성석리에 도착했다. 내비는 성석리 대표장소까지만 안내했다. 진천읍 성석리내의 세부 지번주소는 게시자가 애초에 등재를 않했으니 인터넷 검색창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성석리까지만 입력시키면 성석리 대표장소까지만 안내해 주는 것은 차량 내비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계된 탓이었다.
이팝나무꽃길의 정확한 지번을 알 수가 없어서 묻고 또 물어서 이팝나무 가로수 꽃길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07시경이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주행거리는 113km였고 소요시간은 1시간 50분정도 걸렸다.
(성석리 이팝나무 가로수 꽃길)
도착해서 보니 진천읍 근방에는 백곡저수지가 있고 이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진천읍내를 관통해서 흐르는 백곡천이라는 강물이 있다. 이 백곡천의 동쪽 뚝방길 좌우측변에 이팝나무 가로수가 약 2km이상 쭉 뻗은 직선길로 잘 가꾸어져 있다. 이 뚝방길 폭은 약2미터쯤 되어 보였다. 우측에는 백곡천 고수부지와 강물이 흐르고 좌측에는 이제 모를 심은 농경지였다.
아쉽게도 뚝방길 좌우측 이팝나무는 꽃이 다 떨어져버린 모습의 이팝나무 숲길이었다. 수많은 이팝나무중에 오직 한 그루의 이팝나무가 그래도 마지막 가는 이팝나무꽃을 달고 있다. 성석리 이팝나무 가로수길을 걸으면서(왕복4km정도) 주변 구경을 잘 마쳤다.
차량으로 돌아와서 휴대해간 김밥으로 집사람과 같이 차속에서 조식을 때우고 시간을 보니 08시10분이었다. 이팝나무길을 산책하면서 구경한 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됐다.
(진천읍 성석리 이밥나무꽃 가로수길 모습)(이팝나무꽃이 잔득 피어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꽃이 모두떨어져버린상태였음.)
(이팝나무꽃길 가로수중에 그래도 아직까지 꽃을 달고 있는 유일한 나무 모습)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한반도지형전망대와 붕어마을)
이렇게 이팝나무가로수길 산책후 조식을 마친 우리는 다시 진천군 초평면 한반도지형 전망대로 향했다. 이팝나무 가로수길에서 08시10분에 출발했다. 진천읍 성석리에서 34번 국도를 타고 증평쪽으로 달리다가 초평면 화산리 붕어마을에 도착하니 시간은 08시45분경 이었다. 35분이 소요된 거리였다. 이 붕어마을에는 “초평 붕어마을”이라는 안내 간판이 붕어조각과 함께 커다랗게 설치돼 있다.
안내판 게시글에 따르면 초평저수지는 해방이후 축조된 것을 1985년 증설한 저수지며 전국에서 낚시터로 유명하다. 얼음낚시와 붕어낚시로 잘 알려져 있다. 주변에는 진천 향토음식인 붕어찜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붕어찜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진천군 초평면 화산리 소재 붕어마을 안내판 모습.여기서 한반도지영전망대로 올라가는샛길의 입구가 있음.진입로 안내표시판이 없어서 초행자는 헷갈림)
붕어마을에서 한반도지형전망대는 다시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붕어마을 입구에서 한반도지형전망대로 진입하는 표시판이 없어서 한참을 헤맸다. 이른 아침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다. 안내도면에는 분명히 붕어마을 입구에서 한반도지형전망대의 진입로가 있지만 진입표시가 없으니 헷갈렸다. 조그만 샛길로 타고 들어가서 보니 깊숙한 굴다리를 지난뒤에 한반도지형전망대 진입로 표시가 나와서 아하 이 길이 맞구나 하고 안심이 되었다. 그 길을 타고 산속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이 길은 한반도지형전망대까지 자동차 교행이 불가능한 1차선 단선길이라서 조마조마 하면서 산길을 타고 올랐다. 다행히 군데군데 차량이 교행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다. 한반도지형전망대 공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간은 08시55분이었다. 진천읍 성석리에서 여기까지는 승용차로 45분 걸린 거리였다. 서울에서 이곳 한반도지형전망대 주차장까지의 주행거리는 128km였다.
한반도지형전망대는 나선형으로 중심에 큰 주탑을 세우고 이 주탑주위를 빙빙 돌면서 꼭대기까지 완만한 데크 산책길로 만들어졌다. 꼭대기에서 북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초평호수는 낚시군들의 놀이터였다. 낚시터 좌대가 무척 많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호수 북쪽으로 보이는 산이 마치 한반도 모양을 닯은 모습이다. 남한 땅은 꼭 닮은 모습이다. 북한 땅은 국경선을 넣어서 그리면 한반도 전체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래서 진천은 통일 한반도를 기원하는 곳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오전 이른 시간이라서 아직 초평호수와 건너편 한반도 지형에는 구름이 깔려 있다. 사진상으로는 선명한 모습이 촬영되지 않은 점이 흠이었다. 그렇다고 구름이 거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초평면 화산리 동쪽 산위에 설치된 한반도지형전망대 모습. 초평호수에 떠있는 듯한 한반도모양의 육지를 조망할 수 있음)
(초평호수상에 떠 있는 듯한 한반도 모양.이것은 안내간판을 촬영한 것임.현지에서 사진
으로 촬영한 것은 구름이 낀 날이라 한반도 모양이 선명치 못해서 게재 못함.)
(김유신장군 탄생지 구경)
이렇게 한반도지형전망대까지 구경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09시37분경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아서 김유신장군 탄생지를 핸드폰에서 검색했더니 주소지가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로 나왔다. 내비에 입력시키고 출발했다. 상계리 탄생지에 조착하니 시간은 10시32분이었다. 서울서 김유신장군 탄생지까지 주행거리는 153km였다.
김유신장군 탄생지라고 해서 어떤 모습일까 하고 궁금했는데 가서 보니 탄생지이었던 터만 그냥 풀밭 즉 잔디밭으로 남아 있다. 그 터에는 담안밭이라 적힌 안내판만 하나 서 있다.
담안밭이란 태수의 (지금 군수의) 사무실 주변에 쌓았던 큰 담이란 뜻이라고 했다. 지금 진천군의 옛이름이 만노군이었는데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지금의 진천군) 태수였다(지금의 군수). 김유신은 자기 아버지가 일하던 집무실에서 태어났다. 그 집무실 주변에 큰 담이 처져 있어서 이곳을(김유신장군의 탄생지 터) 담안밭이라 불렀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 탄생지 모습. 이 잔디탑 앞에 안내판 하나가 서 있고 이 안내판에는 이곳이 담안밭이라는 설명이 있음.)
그리고 탄생지인 담안밭 옆으로는 다시 김유신의 이력과 태실에 대한 안내문이 게시되어 있다. 이곳 계야마을은 김유신이(595-673년)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다. 장군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화랑이 되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또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 자주성을 지키는데 공헌하였다.
김유신은 신라역사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고려 때까지는 국가가 주관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탄생지 일대는 당시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 연보정이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이다. 김유신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다.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했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와 역대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 남아있는 태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형식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안내문의 요지였다.
(김유신장군 이력과 탄생지 및 태실과 우물 등이 존재한다는 게시글이 기록됨)
(송강 정철의 사당과 묘소 등 )
이렇게 김유신 장군 탄생지 등을 구경하고 나니 시간은 10시46분경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31번지 송강 정철의 사당 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철 사당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20분이었다. 김유신 탄생지에서는 34분이 소요된 거리였다. 서울에서 여기까지의 누적주행거리는 170km였다.
(정철의 사당 관리사무소 앞 안내문 내용)
이곳은 조선시대 정치가이자 문인인 송강 정철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경내 건축물은 사당과 내삼문(충의문으로 추정) 외삼문(문청문으로 추정) 유물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의 묘소는 원래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동에 있던 것을 현종 6년(1665년) (인조-효종-현종-숙종순)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묘소를 환희산 자락으로 정하고 후손 정양이 이장하여 사우가(사당) 건립되었다. 이후 신축정화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는 것이 사당 입구에 있는 안내문요지였다.
송강 정철이 사망한 것이 1593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 2년차 전쟁중이었으니 죽은 후 73년만인 현종 6년 1665년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신원동에서 이곳 진천군 문백면 봉축리 531번지로 이장한 셈이다. 이장을 결정한 배경은 무엇인지 전혀 언급이 없으니 알 길은 없다. 어쨌든 송강은 대단한 금수저 출신이라는 점이다.
(정철 송강사당 관리사무소 앞에 있는 안내문 모습.)
(송강 정철의 신도비 안내문 내용)
사당 입구 우측에는 송강 정철의 신도비가 있고 그 앞에는 신도비에 대한 안내문이 또 있다.
정철은 기대승 김인후 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명종17년(1562년) 진사시와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지평을 거쳐 율곡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의 (=휴가를 얻어 독서당에서 공부함) 영광을 누렸다. 당쟁 때문에 여러차례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된 이후 전라도 함경도 관찰사를 거쳤다.
천부적인 문재를 발휘하여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지었다. 그 뒤 대사헌이 되었다가 고향에 돌아와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이 신도비의 글은 문정공 송시열이 지었고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수종이 전서하고(글 받아서) 글씨를 썼다.(비석에 새겼다의 뜻 같음). 이 신도비는 거북받침 위에도 글을 새긴 비 몸을(=비석 몸통) 올리고 그 위로 팔삭지붕 형태의 비 머리를(=비석 뚜겅) 올린 구조이다. 선생의 묘소는 이곳 사당의 서쪽에 능선에 있다. (직선거리로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음).
(사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우측에 위치한 정철의 신도비와 그 안내문 모습)
(정철 사당 관리사무소 맞은편의 시비 등)
관리사무소 맞은 편에는 정철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시비 하단에는 “산사에서 밤을 읊는다”라는 한시가 적혀있다. 원래는 한시인데 이 시의 내용을 한글로 풀어 쓴 것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 우수수 지는 나뭇잎 소리
성글은 빗소리인 줄 그릇 알고서
동자승 불러 문밖에 나보랬더니
시냇가 남녘 가지에 달만 걸렸다나.” 라고 읊펐다.
이 시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하고 들려서 큰 비가 오는 소린가 해서 동자승에게 밖에 나가 비가 오는가 확인해 보라고 보냈더니 비는커녕 냇가 나뭇가지에 달만 떠 있어요 라고 한다는 시이다. 착각 상태를 유머스럽게 한시로 표현한 것이니 역시 정철은 문학적 재주가 뛰어난 문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비의 상단에는 ‘관동별곡“의 일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사미인곡“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1968년에 한국국어교육학회와 청주국어국문학회에서 세운 송강 시비라고 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좌측에 설치된 송강 정철의 시비 모습.한시 한수와 관동별곡 및 사미인곡의 일부가 새겨짐)
(정철의 묘소 )
이 시비에서 서쪽인 우측으로 정철 묘소 가는 길이었다. 산속 언덕길로 약 300미터쯤 올라가야 했다. 묘소에 도착해서 보니 산등성이에 2기의 묘가 보였다. 안내판을 보니 앞에 있는 묘는 정철의 아들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은 정철의 묘라고 했다. 안내판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이 묘소는 정철(1536-1593)(1592년 임진왜란2년차에 사망) 선생과 부인 문화유씨를 합장한 곳이다. 본래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신원동에 있었다. 현종 6년(1665년) 손자 정양은 송시열과 상의하여 지금의 자리를 정하고 이장하였다.(왕통: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순)
문인석 망부석과 묘지가 있고 밑에는 아들 종명의 묘소이다. 단지까지한 (손가락 절단) 효자라 유훈에 따랐다. (정철의 유훈에 따라서 이곳에 묘소를 만들었다.)
정철은 조선중기의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호는 송강이며 본관은 영일이다. 명종 17년 문과 장원급제하고 지평을 거쳐 승지에 이르러 동인과 불화로 사직하였다. 다섯달 후 다시 기용되어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는 동안 천부적인 문체를 동원하여 관동별곡 등을 지었다. 그후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공격으로 물러나 담양에서 사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선조 23년 (1590년) 좌의정에 올랐으나 다음해에 건저의 일로 임금의 미움을 받고 탄핵되어 강계에 위리안치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풀려나 체찰사 직을 맡았다.
그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다시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임종을 맞았다.(1593년). 죽은 후에 관직과 품계를 빼앗겼다가 인조 2년 (1624년)에 복직되었다. (선조때 사망,인조 때 복권됨) (중종-인종-명종-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순으로 왕통이 이어짐)
시호는 문청이다. (사당내의 문청문은 이 시호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송강가사를 남기는 등 국문학사상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는 것이 묘소앞 안내문 내용의 요지다.
(송강 정철의 묨소 앞에 설치된 묘소 안내판 모습)
(송강 정철의 묘소 모습. 앞의 묘는 그 아들 묘이고 뒤에 있는묘가 정철과 그 부인 문화 유씨의 합장묘라고 함)
정철의 묘소는 풍수지리학의 명당 요건인 (1)정수리 산정과 주능선 (2)좌청용능선과 실개천 (3)우백호능선과 실개천이란 3대 요건중 (2)와 (3)의 요건은 갖추지 못했는데도 이곳을 명당이라고 판단하고 정철의 묘 이장 장소로 정한 당대 사람들의 속뜻에는 고개가 갸웃둥 해진다.
(정철송강사당 구경)(약칭은 송강사=정철의 영정을 모신곳)
이렇게 송강사당 입구의 안내문, 신도비, 시비, 묘소까지 구경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송강사당을 구경했다. 송강사당은 입구에 있는 관리사무소와 홍살문을 지나면 문청문이 나온다. 문청은 송강의 시호가 문청인데서 따온 듯 했다. 문청문 내부의 우측 마당에는 정철의 유품전시관이 있다.
(문청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정면의 충의문과 우측의 유품 전시관 모습임.)(문청문과 충의문을 통과해야 사당이 있음)
(정철의 유품전시관과 송강연보내용)
유품전시관 내부에는 정철이 소지했던 유품들이 진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서찰이나 글씨들이다. 그리고 정철이 사용했던 붓과 벼루 등이 진열되어 있다. 진열된 유품중에서 송강연보라는 안내문이 있다. 이것은 송강의 일생을 요약해서 연령대별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송강 정철은 조선 중종 때 태어나서 선조 때인 1593년 임진왜란 전쟁 2년차에 사망했다.
(1)조선 중종 31년 12월6일 장의동(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형 셋과 누나 셋을 둔 막내로 태어남. 본관은 영일. 아버지는 돈령부 판관 정유침이며 어머니는 죽산안씨로서 대사간 안명수의 딸이다. 10살이전의 유년시절 맏누이가 인종의(중종-인종-명종-선조) 후궁인 귀인이고 막내누이가 계림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의 혼인으로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훗날의 명종인 당시 경원대군과 소꼽동무로서 정분이 두터웠음.(중종-인종-명종-선조순의 왕통이 이어짐)
(2)정철이 10살 때인 인종 1년(1545년)인 명종 즉위년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집안이 사화에 연루되어 참혹한 화를 입음.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에서 생활하였음.
(3)정철이 16살 때인 명종 6년 왕자가 태어나 (훗날 선조)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남. 이때 송강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부사를 지낸 큰 아버지 정유심이 퇴임후 자리잡은 담양군 창평면의 당지산 기슭으로 옮겨와 살게됨.
(4)17세부터 정철은 벼슬길에 나가지 전까지 10여년 동안 이곳에서(담양군 창평면에서) 송순임.임억령.김윤제.양응정.기대승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으며 김성원.고경명.율곡 이이.우계 성혼과 교우의 도를 정함. 또 17살에 김윤제의 주선으로 문화유씨여인과 결혼하여 부부의 연을 맺음,
(5)27세 때인 명종 17년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감. 명종 임금의 사촌형 경양군의 옥사사건을 맡아 처리하면서 명종의 부탁을 거절함으로써 수년동안 요직에 나가지 못함.
(6)45살 때인 선조 13년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음. 이 무렵 관동별곡. 훈민가 등을 지었음.
(7)50살 때 당쟁에 휩쓸려 벼슬을 그만두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여 4년여 동안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지음.대표작이 사미인곡임.
(8)54살 때인 선조 22년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됨.
(9)55살 때인 선조 23년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3월에는 다시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함. 희생을 줄이기 위해 갖은 애를 씀.
(10)56살 때인 선조 24년 2월에 세자책봉 문제를 건의하다가 이산해의 모해로 사직서를 올리자 해임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거처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처진 곳에서 유배살이를 함.
(11)57살 때인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계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체찰사 직을 맡았음.
(12)58살 때인 1593년 선조 26년 5월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탄핵을 받아 체직되어 강화도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임종을 맞음.
(13)정철은 죽은 후에(1593년 임진왜란 2년차의 전쟁중에 사망) 다시 관직과 품계를 모두 빼앗겼다가 인조 2년인 1624년에 복권됨. 죽은지 31년만에 다시 복권됨. 복권과 파직이 반복된 삶을 살았으니 성격이 원만치는 못했던 것 같다. 금수저 출신이라서 주변에 적이 많았던 사람 같았다.
정철은 송강연보에서 보듯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국문학사에서는 빼어 놓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정철의 유품전시관내에 비치된 송강연보 모습. 여기에는 정철일생의 삶이 연령대별로 잘 기록되어 있음.)
(정철의 유품전시관내에 비치된 정철의 유품 모습 일부 )
(정철의 송강사=정철의 송강사당=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
이 유품전시관을 둘러본 다음 돌계단을 타고 다시 오르면 충의문이 나온다. 이 충의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오르면 정철의 영정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다. 사당 입구문 상단에는 송강사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정철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란 뜻으로 보인다. 사당 내부에는 영정이 단정하게 모셔져 있고 그 앞에는 깨끗하게 정리 정돈된 제단이 있다. 이 제단에다 제물만 올려놓고 제사 행사가 진행되는 것 같다. 제사는 종손이나 문중에서 주관하는 지 아니면 관에서 주관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충의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송강사당인 송강사 모습.내부에는 제단과 영정이 단정하고 깨꿋하게 비치되어 있음.)
(송강사당 내부에 비치된 정철의 영정과 제단 모습)
(맺는 말)
이렇게 해서 진천읍 성석리 이팝나무 가로수길, 초평면 붕어마을과 초평호수 및 한반도지형전망대, 김유신장군 탄생유적지 일대, 송강 정철 유적지(사당,유물전시관,신도비,시비, 묘소 등)까지 구경을 잘 마쳤다.
구경이 끝난 뒤 정철 유적지 주차장 차속에서 집사람과 같이 휴대해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정철 유적지를 출발해서 귀경에 올랐다. 귀경길은 증평ic를 이용해서 중부고속도로를 탔다.(내려올 때는 진천ic를 이용함). 정철유적지(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31번지) 출발시간은 12시 46분이었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니 시간은 15시 28분이었으니 귀경시 소요된 시간은 2시간 42분이었다. 왕복 주행거리는 306km였다. 진천군 일대를 잘 둘러본 여행이었다. 끝.
************************************************
왕복주행거리 306km
평균연비 24.8km/리터
휘발유값 306/24.8*1,509원=18,619원
고속도로통행료 6,900원
조식용깁밥 3,000원(2줄*1,500원)
꿀꽈배기2봉지+새우깡1봉지=3,000원+1,300원=4,300원
비용 계=18,619원+6,900원+3,000원+4,300원
=32,819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