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왕릉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다. 기원전 277년에 나라를 세운후 668년까지 945년간 존재한 고구려는 지난날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동명왕은 고구려의 첫 수도를 오늘의 중국 환인지방인 졸본에다 정하고 거기에서 첫왕을 지냈으며 죽어서 그 고장에 묻혔었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수도를 옮길 때 시조(나라를 세운 왕)의 무덤을 함께 옮기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시조왕인 동명왕의 무덤을 함께 옮겨왔던것이다.
그때 고구려는 지금과 같이 위치좋은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무덤구역을 크게 정하고 울창한 수림을 조성하였으며 《진주못》도 파고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정릉사도 지어 숭엄한 분위기를 돋구게 한 다음 동명왕릉을 옮겨왔다. 그리고 그 일대에는 동명왕의 건국과 왕권강화, 고구려를 보위하고 강성하게 하는데 이바지한 《충신》들의 무덤들을 배치하여 하나의 무덤떼를 이루게 하였다.
왕릉은 남향한 돌칸흙무덤이다. 무덤무지는 방대형으로 생겼는데 현재의 총높이는 8.15m이다. 무덤의 밑부분은 돌밑단으로 되여있으며 그 한변의 길이는 22m, 높이는 1.5m 이다. 무덤둘레에 는 약 5m 너비로 강돌을 깐 묘역시설이 있다.
무덤간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안길밖으로 무덤바깥길이 이어졌다. 무덤간은 석회암과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것이며 안칸천정은 꺾음식으로 되여있다. 안길좌우밑부분에는 감실 같은것이 있다.
안칸의 천정과 벽면들에는 벽화가 있다. 여기에는 련꽃무늬들이 질서정연하게 그려져잇다. 모두 641개로 짐작되는 련꽃무늬가운데서 지금 알아볼수 있는것은 104개이다. 동명왕릉에는 유물이 많았을것이나 일제침략자들이 이미 도굴하여 무덤내부와 그 주변에서 100여개의 금 또는 금동제품이 나왔을뿐이다.
평양에 동명왕릉을 옮겨만들 당시에는 고구려에서 무덤벽화로 여러 인물들과 생활풍속을 형상한 그림을 많이 그리던 시기이다. 그런데 이때에는 동명왕이 죽을 당시의 그의 용모와 생활을 알수 없었기때문에 련꽃무늬로 대치한것으로 보인다. 동명왕 사망당시에는 고구려에서 아직 벽화무덤관습이 없었던것이다.
동명왕은 후세에 가면서 계속 숭상되였다. 그리하여 동명왕릉앞에는 고려시기와 그 이후시기에 만들어놓은 돌구조물들과 비석, 건물들이 있다.
동명왕릉은 오늘 우리 당의 옳바른 문화보존정책에 의하여 더욱 잘 꾸려지고있으며 그 주변에는 인민의 유원지가 마련되여 사람들의 발길이 그칠새 없다.
정릉사는 고구려때의 절간이였는데 오랜 세월 내려오는 과정에 절간건물을 없어지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 동명왕릉앞에 있다. 정릉사는 원래 동명왕릉을 오늘의 중국 환인지방에서 이곳으로 옮겨올 때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던 절간이다.
정릉사터 뒤에는 동명왕릉이 있고 서쪽의 낮은 곳에는 《진주못》이 있다.
정릉사터는 1974년에 대규모적으로 발굴되였는데 그때 발견된 질그릇에 새겨진 《정릉》,《□릉사》등 글자들에 의하여 그 이름이 밝혀졌다. 이글자들은 이곳의 큰 무덤이 동명왕의 무덤이며 정릉사는 왕릉을 위하여 지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원래 무덤앞에 절간을 짓는 법은 없었으나 후세의 봉건왕들은 왕의 무덤에 한하여서만은 무덤앞에 절간을 짓고 무덤주인공의 《명복》을 빌도록 허용하였던것이다. 정릉사터에서는 18채의 집자리와 10개의 회랑터가 발굴되였다. 발굴된 모든 건축터들은 건축에서 어렵고 복잡한 기술적문제들을 능란하게 풀어나간 사실을 엿볼수 있게 한다.
발굴결과는 우리 민족이 고구려때는 물론 그 이전시기부터 훌륭한 건축술을 지니고 빛내여온 긍지높은 민족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장군무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국내성(길림성 집안현)부근 대왕촌 비석거리 뒤산중턱에 있는 고구려의 왕무덤이다.
장군무덤은 계단모양으로 쌓아졌는데 그 단수는 7단이다. 평면상으로 보면 한변의 길이가 34m에 달하는 커다란 정방형이며 무덤의 높이는 13m에 달한다.
1단은 화강석을 잘 다듬어 4층으로 포개여 쌓았고 2단부터는 3층으로 포개여 쌓았다. 매 층의 돌들은 웃턱을 지어 그우에 놓인 돌들이 밀려나지 않게 되여있으며 1단 둘레에는 매 면마다 큰 자연석으로 3개씩 버팀돌을 세워 무덤을 견고하게 하였다.
무덤무지 맨우에는 1.3m정도의 높이로 강돌과 석회를 섞어다져 마감하였다. 무덤무지우에는 기둥구멍들이 있고 기와쪼각들이 널려있는데 그것은 여기에 지붕을 이었던 흔적이다.
무덤간은 4~5단사이에 냈는데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다. 안칸은 한변의 길이가 5.3m인 정방형으로 생겼다. 주검을 안치하는 안칸 바닥에는 물이 고여도 빠져나갈수 있게 되여있다. 주검을 놓는 관대는 2개이다. 무덤두리에는 3m너비의 판돌을 깔고 그에 이어서 30m너비로 강돌을 폈다. 그밖으로는 한변의 길이 500m가 넘는 흙담을 둘러 묘역시설을 하였던 흔적이 있다. 흙담안에는 제사를 지내던 집터가 있고 흙담밖에는 8기의 달린무덤이 있다.
장군무덤은 비록 왕의 무덤으로서 《왕권》을 시위하기 위해 크고 웅장하게 만든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고구려인민들의 발전된 건축술과 돌다루는 기술이 안받침되여 있는것으로 하여 당시의 기념비적존재로, 가치있는 유산으로 되고있다.
집안다섯무덤의 5호무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가 있던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벽화무덤의 하나이다. 집안에는 세칸무덤, 씨름무덤, 춤무덤, 마선구1호무덤, 통구12호무덤, 사신무덤, 다섯무덤의 4호, 5호무덤 등 고구려의 벽화무덤들이 많이 분포되여있다.
6세기 말 7세기 초에 쌓은 집안다섯무덤의 5호무덤은 무덤간이 안길과 안칸으로이루어진 외칸무덤이다. 안길앞으로는 무덤바깥길이 나있다.
이 무덤벽화에서 주되는 그림은 사신도이다. 사신도는 네방위를 지킨다는 이 세상에 없는 동물 즉 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린것이다. 사신들은 몸체의 균형이 잘 잡히고 날쌔고 기운차게 생겼다. 여기의 사신도는 방위신으로서의 용맹성을 잘 형상한 걸작품이다. 5호무덤의 사신은 련꽃 및 불꽃무늬 바탕에 그려져 대상의 성격이 더욱 부각되고있다.
이 무덤 천정돌에는 서로 엉키여 싸우는 룡과 범이 그려져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생동하다. 특히 나무를 사이에 두고 웃도리는 사람, 아래도리는 룡처럼 생기고 두손으로 머리우에 해와 달을 이고 있는 그림은 인상적이다. 천정에는 이밖에도 소대가리를 가진 춤추는 신선, 둘이 마주서서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선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하늘에 날아다니며 사는 사람 즉 신선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때문에 무덤의 벽화나 전설에 신선이 많이 나오는것이다. 고구려사람들에게 있어서 쇠를 벼르고 수레를 만드는 일은 중요한 수공업분야였다. 여기에는 악기를 연구하며 하늘을 나는 비천들도 많이 그려져있다.
안길에는 문지기가 앉아서 활에 화살을 메우는 모습이 또한 생동하게 묘사되여있다.
이 무덤은 고구려의 발전한 건축술과 회화술,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 신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있다.
롱오리산성과 바위에 새긴 글자
평안북도 태천군 룡상리 산성산에 있는 롱오리산성안에는 이 성과 관련한 굴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글은 바위의 앞면을 높이 70㎝, 너비 50㎝정도로 평평하게 쪼아다듬은 거기에 세줄(22개의 글자)로 내리새겨져있다.
글의 내용을 보면 《을해년 8월 전부에 속한 소대사자 어구루가 성을 684간 쌓았다》는것이다. 여기서 전부란 고구려 5부에 속하는 관노부(남부)이며 소대사자는 고구려의 고유한 벼슬이름이다.
을해년이란 롱오리산성을 쌓은 년대이며 어구루는 성쌓는 공사를 감독지휘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 글자를 통하여 롱오리산성이 고구려의 성이라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게 되였다.
이 성은 기름진 벌을 끼고 수륙교통이 편리한곳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잘 리용하여 쌓아졌다. 성은 광주리를 기울려놓은듯한 지형에 쌓았는데 성벽의 둘레는 2020m에 달한다.
성벽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으며 중요한 지점들에는 치를 설치하여 성벽에 다가오는 적을 치기 좋게 하였다.
유리한 위치에는 성문들을 두고 높은 봉우리들에는 남장대, 서장대, 북장대 등 여러 장대들을 설치하여 적들에 대한 감시와 전투지휘를 보장하게 하였다. 이 성에는 길게 삐여져나가면서 둘러 쌓은 철성도 있다. 롱오리산성은 총체적으로 볼 때 산봉우리와 릉선을 잘 리용하여 쌓았기때문에 적이 공격하기에는 힘들고 아군이 적을 치기에는 유리하게 쌓은 성이다.
수도 평양을 방어하는 중간방어계선에 해당하는 위치에 견고하게 쌓은 롱오리산성은 고구려의 발전된 성쌓기기술과 성방어체계가 어떻게 되여있었는가를 보여준다.
안악3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우뚝 자리잡고있는 안악3호무덤은 고구려 고국원왕의 무덤이다. 357년경에 쌓은 이 무덤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고구려벽화무덤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벽화무덤가운데서는 제일 큰것에 속한다.
무덤은 언덕우에 있는데 동서30m, 남북 33m, 높이 약 6m나 되는 방대형의 무덤무지는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한다.
무덤간은 문칸, 앞칸과 안칸, 동, 서의 두 곁칸, 회랑 등 여러칸으로 이루어졌다. 무덤칸은 판돌로 쌓고 고구려에서 전형적인 평행3각고임천정을 얹었다. 무덤간은 거기에 그려진 벽화들과 결부하여 볼 때 왕의 살림집을 방불케 한다.
문칸의 돌문은 한짝이 반톤이 넘는것이지만 그것이 손가락으로 밀어도 쉽게 여닫기게 되여있다. 회랑벽에는 길이가 4.68m나 되는 판돌을 썼는데 그 높은 돌다루기기술에 감탄을 금할수 없다. 무덤간의 실물기둥이나 두공 같은것은 력학적타산밑에 정밀하게 가공한것이다.
무덤간 거의 모든 벽과 천정에는 벽화들을 가득 그려놓았다. 문칸에는 문지기장수들, 앞칸에는 기발을 든 군사와 춤추는 장면, 씨름장면을 배치하였다. 서쪽곁칸에는 왕과 왕비를, 동쪽곁칸에는 부엌, 육고, 우물, 방아간, 외양간, 마구간, 차고 등 경리시설을 그렸다. 안칸에는 가면을 쓰고 춤추는 그림을, 회랑에는 대행렬도를 배치하고 천정에는 련꽃과 해와 달을 그렸다.
벽화에서 250여명이 등장하는 대행렬도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림은 왕의 소수레 앞부분만 현상한것인데 그 뒤부분까지 합치면 이 행렬의 인원은 500여명이나 된다.
주인공은 왕을 상징하는 기발인 《성상반》을 달고 나아간다.
주인공의 형상은 당시 인물화형상수준이 매우 높은 단계에 이르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주인공 부부 그림에는 그들의 성격과 사치하고 부귀한 생활이 잘 반영되여있다.
여기에는 수박회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태권도의 연원이 멀리 고구려에 있다는것을 시사하여준다.
안칸의 탈춤그림은 흥미있게 그린것인데 그것은 우리 나라 탈춤의 력사가 매우 오래다는것을 보여준다. 행렬도안에 그려진 교예장면들에 대해서도 같은것을 말할수 있다.
이 무덤의 벽화들은 우리 나라 회화의 높은 발전수준과 채색화전통의 오랜 력사를 중시하여준다.
안악3호무덤은 웅장화려하고 발전된 구조형식과 다양하고 풍부한 벽화내용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덕흥리벽화무덤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있는 덕흥리벽화무덤은 408년에 만든 무덤으로서 고구려의 강대성을 직관적으로 뚜렷하게 보여주는 무덤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1978년 2월 12일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돌아보시면서 덕흥리벽화무덤은 영락18년이라는 절대년대가 씌여있는 아주 귀중한 무덤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영락이란 고구려 광개토왕의 년호이며 영락 18년은 408년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80여기의 고구려벽화무덤들이 알려졌지만 이 무덤처럼 쌓은 년대가 명백히 밝혀져있는것은 아직 없었다. 600여자의 글자가 씌여있는 이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고구려벽화무덤들의 년대를 가늠해볼수 있게 되였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고구려의 유주에서 자사라는 벼슬을 지낸 《진》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여러가지 벼슬을 지내다가 77살에 죽어서 이 무덤에 묻혔다.
덕흥리벽화무덤은 두칸짜리 돌칸흙무덤이다. 무덤간은 안길, 앞칸과 안칸 그리고 사이길로 이루어져있다.
무덤간은 돌로 쌓고 회죽으로 미장한 다음 그 벽면과 천정면에 벽화를 가득 그렸다. 벽화의 주제는 사람들의 생활을 주로 형상한 그림이다. 그때 사람들은 육체는 죽어도 령혼은 살아있다는 《령혼불멸》의 관념에 사로잡혀 죽어서도 생전에 누리던 부귀영화를 그대로 연장할것을 바라며 무덤안을 집처럼 꾸미고 거기에 벽화돌을 그렸던것이다.
안길 량쪽벽에는 문지기괴물을 그리고 이 두덤의 문을 409년 2월 2일에 닫았다는 내용의 글이 씌여있다. 길이가 1.54m이고 높이가 1.43m인 안길을 지나 앞칸에 들어서면 마주치는 북쪽벽 정면에 무덤주인공의 략력이 씌여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은 《진》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고구려의 유주지방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이였으며 벼슬살이를 하다가 나이 77살에 죽어 기원408년 12월 25일 여기에 옮겨묻었다고 하였다.
앞칸벽화는 유주자사였던 무덤주인공의 공적생활과 관련되는 장면을 그린것이다. 즉 주인공이 방안에 앉아 관리들과 시중군들을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장면, 13개의 군 태수들이 한줄로 줄지어서서 《진》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거나 지시를 받는 장면, 수레를 탄 높은 급의 관리, 문관, 무관을 포함한 갑옷입은 말탄 무사들의 대행렬속에서 꽃수레를 타고가는 주인공이 생동하게 묘사되여있다.
앞칸과 안칸의 사이길 좌우벽에는 주인공부부의 나들이장면이 그려져있다. 진의 안해는 가마수레를 타고 그 뒤로는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녀자들이 따르고있다.
안칸에는 주로 주인공의 개인생활과 관련한 그림들이 그려져있다.
이 무덤의 벽화에서 가장 재미있는것은 말타고 활쏘기경기를 하는 장면이다. 방금 내달릴듯한 기마수들, 말을 타고 앞뒤의 과녁을 쏘는 선수들, 엄한 표정을 한 두 심판원과 우스운 표정을 지은 기록원 등 그림들은 매우 흥미를 끈다. 이것은 고구려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조국의 방위를 위해 일상적으로 무술을 단련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무덤에는 이밖에도 주인공이 타는 큰 말, 여물을 먹는 말과 소, 작두로 여물을 써는 아이들, 수레 등이 그려져있다.
덕흥리벽화무덤은 고구려가 한때 북중국에 진출하여 광활한 지역에 유주를 설치하였다는것을 밝혀주고있다. 고구려의 유주소재지는 오늘의 베이징이였다. 그만큼 고구려는 강력한 나라였다.
약수리벽화무덤
이 무덤은 남포시 강서구역 약수리의 경치좋은 태성호반에 자리잡고있는 4세기말~5세기초의 고구려벽화무덤이다.
약수리벽화무덤은 두칸짜리 돌칸흙무덤이며 고구려의 인물풍속 및 사신도무덤에서 대표적인것이다. 고구려에서 인물풍속 및 사신도무덤은 인물풍속도무덤 다음에 성행한 무덤이다.
무덤간은 안길과 앞칸, 안칸 및 사이길로 이루어져있다. 안칸의 동서벽에는 작은 감이 하나씩 달려있다.
무덤간은 돌로 쌓고 겉면에 회죽미장을 매끈하게 하였으며 그우에 벽화들을 그렸다.
앞칸에는 큰 규모의 행렬그림과 사냥그림, 그리고 주인공의 실내생활도와 성곽, 마구간, 방아간, 외양간, 부엌과 문지기장수 등이 그려져있다.
안칸에는 주인공부부의 실내생활과 네 방위를 지킨다는 상상동물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져있다. 여기의 인물들은 봉건적인 벼슬등급법에 따라 신분이 높은 주인공부부는 크게 그리고 시중군들은 신분이 낮다 하여 작에 그렸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제도를 반영한것이다.
이 무덤의 행렬그림은 행렬의 앞부분(전배), 가운데부분(중배),뒤부분(후배)이 다 구색에 맞게 그려져있어 가치가 높다. 여기에서 고구려군사들의 당당한 기세를 엿볼수 있다.
이 무덤의 사냥그림은 고구려사람들의 용감성과 락천성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사냥터로 향한 행렬, 몰이군, 산봉우리와 골짜기사이를 누비며 활을 쏘는 사냥군, 화살에 맞은 짐승, 이 모든것은 마치도 생동한 사냥장면을 직접 보는듯 하다. 고구려사람들은 조국방위를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고 무술을 배우는것을 남자들의 의무로 여겼으며 민간오락과 경기들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 무덤의 성곽도에서 네모난 성벽에 성문들과 각루들을 배치하고 성안에 기와집들을 그린 모습은 마치도 안학궁을 옮겨그린듯하다.
약수리벽화무덤은 무덤간의 독특한 구조형식과 다양하고 풍부한 벽화내용은 고구려인민의 슬기와 재능, 나라가 강대하였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천왕지신무덤
평안남도 순천시 북창리에는 천왕지신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실물활개가 많아 구조가 독특한것으로 하여 알려진 고구려의 벽화무덤이다. 무덤은 5세기초중엽에 만든 두칸짜리 돌칸 흙무덤이다.
무덤간은 안길과 앞칸, 안칸 그리고 그 사이길로 이루어져있다.
앞칸의 평면은 동서로 긴 장방형으로 생겼는데 그 좌우끝은 중간부분과 구분하여 각각 하나의 칸처럼 꾸몄다. 그 이전단계에 성행한 감 또는 곁칸이 있는 여러칸무덤구조의 잔재를 반영한것이다. 앞칸의 천정은 5개의 보를 건너대고 6개 구획으로 나누었으며 그중 중간의 3개 보우에는 큰 실물활개를 올렸다.
안칸의 평면은 큰 장방형으로 생겼는데 그 천정구조가 특이하다.
네벽면 모서리 도리밑에 실물활개를 하나씩 뻗쳐 천정이 도리부터는 8각으로 되게 하였다. 천정의 두번째 8각부분을 다시 4각으로 좁히고 그우에 삼각고임을 한단 올린 다음 마감돌을 덮었다. 천정 맨우에는 두쌍의 실물활개를 +형으로 엮어놓아 마감돌의 중심을 지지하게 하였다.
실물활개와 그림활개, 실물두공과 그림두공을 잘 배합하면서 무덤의 천정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그리고 견고하게 꾸민것은 당시 건축술의 높은 발전수준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천왕지신무덤은 구조적으로 째였을뿐아니라 그 벽화내용도 흥미를 끈다.
안칸에는 전면에 걸쳐 거북잔등모양으로 6각형무늬를 놓고 그안에 련꽃을 옆에서 본것처럼 그려넣었다. 그리고 북벽 웃부분에는 따로 네모테두리를 하고 거기에 주인공부부의 실내생활장면을 그렸다. 주인공부부는 기와집안에 꾸린 장방안에 들어앉아있는데 그 곁에서 시중군들이 서성거리고있다.
도리부분에는 구름무늬를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괴상한 그림들을 배치하였다.
천정부분에도 그림이 가득한데 거기에는 《천왕》이라고 쓴 신선과《지신》이라고 쓴 신선이 그려있다. 이 신선들의 이름을 따서 이 무덤은 천왕지신무덤이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진파리4호무덤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는 진파리4호무덤이라고 불리우는 고구려의 벽화무덤이 있다. 발굴당시의 지명과 순서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이 무덤도 일체침략자들이 도굴하여 값진 유물을 다 가져갔다.
이 무덤의 봉토(무덤무지)는 방대형으로 생겼다. 그 한변의 길이는 23m, 높이는 약6m이다. 무덤간은 무덤안으로 들어가는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칸의 네벽은 옹근한장씩의 판돌로 되여있는데 그우에 회죽미장을 하고 벽화를 그렸다. 큰 판돌을 잘 가공하여 벽체로 세운 고구려인민의 돌다룬 솜씨는 참으로 놀랍다.
벽화는 안길 좌우벽과 안칸의 네벽, 안칸 천정돌에 그려져있는데 그림내용을 보면 대체로 자연풍경과 상상동물들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련꽃무늬, 별그림 등이다. 특히 무덤안칸으로 들어가는 3.15m의 길이를 가진 안길 좌우벽에 그려진 풍경그림은 고구려의 다른 벽화무덤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훌륭한것이다.
그 그림의 한 장면을 보면 잔잔한 물결이는 련못을 중심으로 높낮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섰는데 거기에는 나무들이 우거지고 산밑은 절벽과 바위들로 둘러쌓였다. 련못에는 크고작은 련꽃들이 만발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동방식정원의 원형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고구려 풍경화의 높은 발전수준을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 특징적인것은 여러가지 색갈과 함께 금분을 많이 써서 벽화를 눈부시게 그린것이다.
강서세무덤
강서세무덤은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다. 고구려의 돌칸흙무덤인 이 3기의 무덤은 한군데 몰켜있기때문에 강서세무덤이라 부르며 삼묘리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된것이다. 세 무덤가운데서 남쪽의것이 큰무덤, 북쪽의 2기가운데서 서쪽의것이 중무덤, 동쪽의것이 작은무덤이다. 큰무덤과 중무덤에는 벽화가 있고 작은무덤에는 벽화가 없다.
이 세무덤은 모두 한칸으로 되여있는 외칸무덤이고 무덤간의 크기도 비슷비슷하다.
무덤간은 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정밀하게 쌓았다. 큰무덤의 무덤간만 보아도 벽면은 2~3장의 길게 네모난 판돌을 포개여쌓고 그우에 평행고임돌과 삼각고임돌을 놓아 천정을 형성한것인데 모두 종이 한장 끼워넣을 틈도없이 정확히 맞물리였다. 그리고 팔요한 선들에는 가벼운 곡선을 주고 사람의 시선이 잘 미치는 고임면들에는 약간 경사지게 변화를 주어 무덤간안이 아늑해보이게 하였다.
큰무덤과 중무덤의 벽화는 벽면과 천정면 돌우에 직접 그린것이다.
이 무덤벽화의 주제는 사신도이다. 사신도란 4방을 지키는 방위신을 형상한것인데 동쪽방위신은 청룡으로, 서쪽방위신은 백호로, 남쪽방위신은 주작으로, 북쪽방위신은 현무로 표현되였다. 사신도무덤은 고구려벽화무덤에서 후기에 속한다. 강서세무덤은 7세기의것으로 보고있다.
강서세무덤에서는 특히 큰무덤의 청룡과 현무, 강서 중무덤의 백호와 주작이 잘 형상되였다.
큰무덤의 청룡은 주어진 화면에 대각선으로 배치하면서 대가리를 쳐들고 크게 벌린 아구리에 눈을 부릅뜨고 네다리를 펼쳐 방금 달려나올듯한 자세이다. 물기도는듯한 몸뚱이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듯 하고 비늘가득한 몸뚱이에는 5색을 아롱지게 칠하여 립체감까지 난다.
중무덤의 백호는 앞을 쏘아보는 부릅뜬 눈, 크게 벌린 아구리, 날카로운 이발, 탄력있게 생긴 날씬한 몸뚱이, 우로 꿈틀거리면서 들어올린 긴꼬리, 균형잡힌 네다리 등 어느하나 나무랄데 없이 세련된 솜씨로 그려졌다.
큰무덤의 청룡이 격조높은 약동감을 나타낸다면 중무덤의 백호는 놀랄만한 박력감을 느끼게 한다.
이 무덤들에는 벽면가득한 사신도외에 천정에 넝쿨무늬 등 장식그림들과 비천, 신선, 산악, 여러 짐승들도 실감있게 그려져있다. 그중에서 특히 큰무덤의 비천(하늘에서 살며 날아다닌다는 사람)은 날띠를 휘날리며 미소머금고 피리를 불며 날고있는 모습이 아주 생동하다. 그리하여 강서세무덤의 벽화들은 당시 세계미술사상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강서세무덤은 고구려건축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줄뿐아니라 힘있고 아름답고 고상한 필치로 그려진 벽화들은 조선화의 유구한 전통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대성산성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에 있다. 이 성은 3~5세기에 쌓은 산성으로서 고구려의 가장 큰 산성들가운데 하나이다.
대성산성은 둘레가 7076m, 성벽의 총길이가 9284m에 달한다.
대성산성은 높이 274m의 을지봉을 중심으로 소문봉,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의 6개 봉우리들을 련결하고 그안의 2개의 넓고 깊은 골까지들을 끼고있다. 산성안에서는 식량창고터와 무기고터, 병실터, 장대터, 문터 등 많은 집터들과 못자리들이 발견되였다.
성벽은 4각추형으로 다듬은 돌로 봉우리들에서는 대체로 외명쌓기방법으로 쌓고 골짜기를 넘어 서는곳들에서는 량면쌓기방법으로 쌓았다. 중요한 대목에는 2중, 3중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벽우에는 톱날식으로 낮게 쌓은 담장인 성가퀴들이 있었으며 요소마다에는 치도 설치하여 성의 방비를 강화하였었다.
대성산성안에서 발굴된 못자리와 시설물들은 고구려사람들이 이미 성이 방어에 유리하며 싸움에서 오래동안 견디여 내려면 지형지세가 묘하고 물원천이 풍부해야 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특히 대성산성에는 물원천이 풍부하였는데 전설에도 99개의 못에 9마리의 룡이 살고있으면서 가물이 들어 못의 물이 마르게 되면 조화를 부려 언제나 물이 차있었다고 한다.
대성산성은 견고하고 훌륭한 방어시설을 갖춘 성이였기에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믿음직한 성새로 되였다.
고구려의 왕궁 안학궁터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는 고구려시기의 왕궁이던 안학궁터가 넓은 면적은 차지하고있다.
안학궁은 고구려가 오늘의 길림성 집안에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오면서 건설한 왕궁이였다. 그때 안학궁은 왕이 일상 거주하면서 나라 일을 보던곳이고 대성산성도 유사시에 왕이 들어가있을 성이였다.
안학궁터는 토성벽으로 둘러막혀있다. 네모나게 생긴 궁성벽 한변의 길이는 622m이다. 그리하여 궁터의 면적은 약 38만㎡나 되며 그안에 총건평 3만 1458㎡에 달하는 52채의 궁전들이 서로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궁성 성벽밖으로는 해자(큰 물도랑)를 째서 성의 방비를 강화하였었다.
성문은 남쪽성벽에 3개, 동, 서, 북쪽성벽에 각각 1개 있었다. 성안의 궁전들은 남북중심축을 따라 배치되여있었다.
성안의 궁전들은 외전과 내전, 침전, 동궁과 서궁의 5개 건축군으로 나누어져있었다. 외전은 국가적인 큰 행사를 하던 정전이고 내전은 왕이 일상적으로 정사를 보던 정전이며 침전은 왕의 생활거처였다. 동궁에는 다음 왕자리를 이을자(세자)가 살고 서궁에는 궁전에 복무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경리시설들이 집중되여있었다.
궁성안에는 크고작은 못들과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산이 있는 정원들이 꾸려져있었다.
안학궁터는 당시의 우수한 건축술을 능히 가늠해볼수 있게 한다. 고구려의 이러한 궁성제도는 당시 동족의 나라들인 백제와 신라에 전해지고 이후 우리 나라 봉건왕궁들에 계승되였다.
평양성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평양은 우리 인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의 도시입니다.》
오늘 우리 조국의 수도 평양은 고구려의 옛도읍지로서 1500여년의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유서깊은 도시, 문화의 도시이다. 고구려가 수도를 오늘의 중국 길림성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갓 옮겨왔을 때의 위치는 대성산성과 안학궁을 포괄하는 일대였다.
고구려는 국력이 더욱 강성해짐에 따라 수도를 외래침략자들로부터 더 잘 지켜내기 위하여 552-586년사이에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현재의 성안으로 다시 옮겼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대에 평지성의 우점과 산성의 우점을 종합하여 평산성형식으로 쌓은 평양성의 둘레는 약 16㎞에 달하였으며 성벽의 총연장길이는 약 23㎞나 되였다. 고구려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 수도의 주민호수는 21만 508호에 달하였다.
이 수자는 호당인구를 5명정도로만 보아도 평양이 인구 100만이 훨씬 넘는 대도시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중세기초 이만한 대규모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었다.
평양성은 금수산과 그 남쪽의 평지를 둘러막아 쌓았다. 그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최승대가 있는 봉우리)을 북쪽끝으로 하고 을밀봉(을밀대), 만수대의 마루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통강안을 따라 서남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보통강과 대동강의 합수목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동북쪽으로 대동강을 거슬러올라가 대동문, 청류벽을 타고 전금문, 부벽루를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르렀다.
평양성안을 내성, 중성, 외성, 북성의 4개 부분성으로 나누었으며 북성에는 철성을 붙였다.
고고학적유물과 옛기록에 의하면 내성은 만수대언덕과 그 남쪽 대동문을 포괄하는 평지대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궁전들이 있었다.
중성은 보통문과 오늘의 중성동일대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고구려 중앙정부의 관청들이 자리잡고있었다.
외성은 오늘의 중앙우편국계선의 남쪽부터 평천구역일대를 차지하였는데 이곳은 주민지대로 되여있었다.
북성은 을밀대와 최승대사이를 차지하였는데 여기에는 영명사 등 절을 두고 궁성(내성)의 북방방위시설들을 두었다.
철성은 모란봉에서 북으로 무봉을 감싸면서 120m가량 내쌓았다.
성벽은 산지대에서는 돌성벽을 쌓고 평지대에서는 돌과 흙을 섞어쌓았다. 성벽밖에는 일부 황을 파고 대동강과 보통강을 해자로 삼아 방어력을 높였다.
성벽우에는 성가퀴를 쌓고 성벽의 곳곳에 치를 두었다.
평양성에는 크고작은 성문들을 두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문들인 대동문(내성의 동문), 칠성문(내성의 북문), 보통문(중성의 서문), 전금문(북성의 남문), 현무문(북성의 북문)은 당시의 모습을 돌이켜볼수 있게 한다.
지금까지 평양성에서는 성벽쌓기를 담당한 지방과 구간(길이), 감독자의 직위와 이름 등이 밝혀진 글자새긴 고구려성돌이 4개 발견되였다.
평양성과 같이 고구려인민들이 창조한 평산성형식의 대규모수도성은 우리 나라 봉건도성의 전형으로 널리 전습되였다.
평양성은 축성이래 이 성을 지켜싸운 우리 인민들의 가지가지의 투쟁이야기를 많이 전해주고있다. 특히 일본침략자들을 쳐물리치기 위한 임진조국전쟁시기 우리 인민들의 전투무훈담은 감격스럽다. 적들에게 일시 강점되였던 평양성탈환전투 때 김응서장군을 도와 적장 《소서비》의 목을 베도록 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계월향의 의로운 행동, 수천의 승군을 이끌고 평양성탈환전투에 달려온 서산대사의 애국적소행 등은 다 이때의 이야기이다.
한편 평양성을 지켜싸울 때 대동문이나 전금문을 드나들면서 강건너 왜적을 기습한 우리 군사, 모란봉일대에 허수아비들을 많이 세워놓아 대병력이 있듯이 가장하고 적들을 혼란에 빠뜨린 우리 군사들의 지혜 등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평양성은 오랜 력사의 증견자로 오늘도 그 자태를 어엿이 자랑하고있다.
황룡산성
황룡산성은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오석산에 쌓은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황룡산성은 당시 수도 평양성을 지키던 위성들중의 하나이다.
봉건사회때 나라마다 수도방위시설을 둔것은 사실이지만 고구려처럼 사방에 다 위성들을 쌓고 수도보위에 만전을 기한 나라는 드물다. 동쪽의 흘골산성, 서쪽의 황룡산성, 남쪽의 휴류산성, 북쪽의 청룡산성 등은 그 대표적인 위성들이다.
황룡산성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교통에도 편리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황룡산성은 고구려시기에 많이 쌓은 고로봉식산성이다. 고로봉식산성이란 고로봉형지형에 쌓은 산성을 말한다. 고로봉형지형이란 고리짝처럼 네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막히고 안에 골짜기들이 있어 물원천도 풍부하고 많은 인원을 수용할수 있는곳이다. 고로봉식산성은 안에서 방어하기에는 유리하고 적이 공격하기에는 불리한 점을 가지고있다.
황룡산성은 둘레 액 6.6㎞나 되는 큰 산성이다.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그 높이는 낮은 곳이 4~5m, 높은 곳이 10~11m이다.
성의 동, 서, 남, 북 네면에는 모두 큰 성문이 있는데 특히 정문인 남문의 문루는 2층짜리 웅장한 문루였다. 성문들에는 그 앞에 성문을 지키기 위하여 쌓은 옹성이 있었다. 지금도 남문앞에는 ㄱ형으로 성문앞을 감싼 옹성이 남아있다.
황룡산성에는 톱날형식으로 낮은 담장처럼 쌓은 2877개의 성가퀴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있는것을 보면 높이 1.1~1.6m정도이다. 이 성에는 성벽에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며 옆으로 쏘기 위한 치도 4개소에 있었다.
이 산성에는 동, 서, 남, 북 봉우리마다에 군사 지휘처인 장대가 있었으며 북장대인 오석봉에는 불을 피우거나 연기를 올려 련락을 하던 신호수단인 봉수터도 남아있다.
이 산성에는 물원천이 풍부하였으며 성안 여러 곳에서 수많은 무기고와 식량창조, 병실들의 터가 발견되였다. 남문부근에 남아있는 수구문에는 물길을 따라 적들이 기여들지 못하게 세운 기둥(은주)자리가 남아있다.
고구려시기 수도 평양성의 위성으로서 관문노릇을 다한 황룡산성은 고려시기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고려 서북방방위의 중요한 거점으로 리용되였으며 리조시기에도 여전히 방위거점으로 유지되였다.
우리 인민의 오랜 투쟁경험과 발전된 축성기술에 토대하여 건설된 황룡산성은 우리 인민의 슬기를 자랑하며 거연이 솟아있다. 그 옛날 여기에는 《황룡국》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다.
국내성(통구성)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였던 집안에 있는 왕궁성이다. 성은 압록강중류 자강도 만포시의 대안인 중국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있다. 그 이름을 통구성이라고도 한다. 고구려는 기원 3년에 수도를 졸본으로부터 이곳 국내성으로 옮기였으며 그후 427년 평양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기전까지 여기에 수백년동안 수도를 정하고있었다.
국내성은 네모나게 쌓은 평지성이다. 성의 동쪽벽의 길이는 600여m이고 서, 남, 북쪽벽의 길이는 각각 700여m이며 총 둘레는 2832m이다. 지금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5~6m, 성밑부분의 너비는 10m정도이다. 성벽은 잘 다듬은 4각추모양의 돌로 튼튼하게 쌓았다. 성벽의 밑부분은 계단모양으로 단을 지으면서 큰 돌로 쌓았으며 우로 올라가면서 차츰 작은 돌로 쌓았다.
성벽의 시설물로는 성문, 옹성, 치 등이 있다. 문터는 동, 서, 남벽에 각각 하나씩 남아있고 북족벽에는 원래 있었던 문을 후에 막아버린 흔적이 있다. 성밖에는 넓은 해자를 둘렀는데 서쪽면은 통구하를 해자로 리용하였다.
성안은 남과 북, 동과 서의 성문을 련결하는 도로로 정연하게 구획되고 거기에는 왕궁과 관청이 자리잡고있었다. 성안에서는 잘 다듬어진 커다란 주추돌들이 드러났고 고구려의 기와쪼각들이 수많이 나왔다.
이 성에서 서북쪽으로 약 4㎞ 떨어진 험한 산성자산에는 수도를 방어하는 위나암성이 있었다. 고구려통치배들은 평시에는 왕궁성인 국내성에 있다가 유사시에는 위나암성으로 들어갔다.
국내성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후에도 전반적성방어체계에서 중요시되여왔다.
국내성은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랜 고구려의 도성으로서 견고한 성벽축조기술, 옹성, 치 등의 구조물, 그밖에 일련의 성곽시설물을 가지고잇는것으로 하여 초기 고구려도성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수산리벽화무덤
5세기후반기의 고구려벽화무덤이다. 무덤은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에 있다.
수산리벽화무덤은 인물풍속도가 그려져있는 외칸으로 된 돌칸흙무덤이다. 무덤은 무덤안길과 하나의 무덤간으로 이루어져있다.
무덤무지는 동서 약 26m, 남북 약 25m, 높이 약 4m의 방대형으로 되여있다. 무덤간은 동서 3.2m, 남북 3.2m, 높이 4.1m정도이며 무덤안길의 길이는 4.5m이다. 무덤간은 반지하에 위치하고있는데 동쪽으로 약간 치우친 남향이다.
무덤간의 바닥에는 석비레를 다져깔았고 벽은 납작납작한 돌로 쌓았으며 천정은 평행삼각고임천정이다. 벽과 천정에는 회를 곱게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안길의 두곳에 돌문을 달았고 마지막에 막돌로 무럼을 막았다.
무덤의 벽화를 보면 안길의 벽에는 량손에 무기를 든 문지기장수가 그려져있고 무덤간 네벽모서리마다에는 흘림기둥과 련꽃치레를 한 두공, 련꽃 봉황, 등의 무늬를 새긴 도리, 힘장수가 받들고있는 활개를 그렸다.
무덤안은 마치 땅우의 목조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기위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렸다. 무덤간 북쪽벽에는 주인공부부가 장막을 친 화려한 방에서 남녀시중군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실내생활도를 그렸으며 동쪽벽에는 아래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웃부분에는 검은 모자를 쓰고 누른 겉옷을 입은 남자들을, 아래부분에는 악대를 앞세우고 수레를 타고가는 주인공의 행렬도를 그렸다.
서쪽벽에는 아래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 우에는 주인공부부가 남녀시중군들을 거느리고 교예를 구경하는 장면을, 아래에는 남자시중군들과 말을 그렸다. 서쪽벽웃단북쪽에는 조용히 걸어가는 녀주인공을 그렸는데 깃과 소매끝에 붉은 천을 달아 만든 검은색저고리와 색동치마를 입었다.
남쪽벽에는 서쪽부분에 누른 겉옷을 입은 주인공이 ?! 瀯遠? 쓰고가는 장면을, 동쪽부분에는 누른 겉옷을 입은 인물이 양산을 쥐고나가는 장면을 그렸다. 벽화들은 섬세하고 우아하며 색갈이 선명하다.
1972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벽화무덤인 다까마쯔무덤은 이 무덤과 공통점이 많다. 벽화에 그려진 녀인들이 긴저고리에 색동치마를 입은 것을 비롯하여 전반적인 벽화배치와 벽화내용, 그림솜씨 등에서 공통성을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수산리벽화무덤은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연구하는데서뿐아니라 고구려문화가 일본문화에 준 영향을 보여주는 의의있는 무덤이다.
장수산성
황해남도 신원군 아양리 황해금강이라고 불리우는 장수산의 동쪽끝에 자리잡은 장수산성은 고구려시기의 중요한 산성이다.
장수산성은 하니봉과 동장래를 감싸면서 크고작은 봉우리들을 련결하여 쌓은 큰 산성으로서 그 둘레는 약 10㎞에 달한다.
장수산성은 고구려산성일반이 그러하듯이 내성과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서쪽의 작은 골안을, 외성은 동쪽의 큰 골안을 둘러막고있다.
장수산은 가파로운 산이므로 우리 선조들은 자연절벽을 교묘하게 리용하면서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다. 곳에 따라 량면쌓기를 한데도 있고 외면쌓기를 한데도 있으며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리용한데도 있다. 외성남문 안쪽으로는 겹성도 쌓았다.
장수산성에는 내성과 외성의 남문터 그리고 외성의 북문터가 남아있는데 외성의 남문터는 신원벌로 통하고 북문터는 재령벌로 통하고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험준한 지형에 쌓은 장수산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산성의 사방에는 전망이 좋은곳들에 장대를 두엇었는데 그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서장대(하니봉)와 동장대였다.
성안에는 수원이 풍부하였는데 옛날 수원이던 하니폭포는 지금도 마를줄 모른다.
고구려시기에 축성된 장수산성은 리조시기까지 나라의 중요한 방위거점으로 자기의 사명을 다하였다.
수양산성
황해남도 해주시 수양산의 험한 산봉우리를 둘러막은 수양산성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쌓고 리조시기까지도 계속 쓰인 귀중한 유적이다.
수양산성은 북쪽에 높이 솟은 장대산을 배경으로 하고 그 남쪽의 골짜기와 넓은 대지를 안에 넣고 둘러선 봉우리와 릉선을 따라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8020m에 달하는데 현재 남은 성벽들가운데는 후세에 쌓은것이 많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효과적으로 리용하면서 외면쌓기와 량면쌓기를 배합하여 쌓았다.
성벽에서 적들이 다가오기 쉬운 지점들에는 치를 설치하였다.
성문은 동, 서, 남, 북에 다있다.
수구문은 남문동쪽 옆골짜기에 나있다. 수구문밖은 곧 절벽이 되여 이곳으로 모여흘러내리는 물은 곧 폭포를 이룬다. 그것이 수양폭포이다.
14세기후반기 왜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애국적군인들과 인민들은 퇴각하는척하면서 놈들을 유인하여 동쪽문으로 끌어들였다. 성안으로 쓸어들어온 왜적들은 유인매복에 걸려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전쟁때나 1636년 청나라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도 수양산성은 조국방위에 크게 기여하였다.
광개토왕릉비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적》을 찬영하여 그 릉앞에 세운 비석이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길림성 집안현)에서 동북쪽으로 6㎞떨어진 대왕촌에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그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웠다.
비석은 비몸들과 대돌의 2개 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대돌은 화강암을 가공한것인데 길이 3.35m, 너비2.7m, 두께 약 0.2m의 판돌이다.
대돌우에는 웅회암으로 만든 높이 6.34m, 너비 1.43~1.9m, 두께 1.53m의 큰 비몸돌을 세웠다. 매끈하게 가공한 비몸돌 4개 면에는 가로세로 줄간을 치고 새긴 글자가 빼곡히 차있다. 개 글자의 크기는 대체로 12㎠이다.
비문은 모두 44줄로 내리새겼는데 1면에 11줄, 2면에 10줄, 3면에 14줄, 4면에 9줄이다. 글자는 줄마다 41자씩 새겨 모두 1802자(1면 6줄만 39자여서)인데 그가운데서 알아볼수 있는 글자는 1530여자이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3개 부분으로 나누인다. 첫부분에는 고구려의 시조전설로부터 광개토왕의 즉위와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경위가 개괄되여있다. 둘째부분에 기본내용이 서술되였는데 광개토왕이 고구려의 령토를 넓힌 《무공》을 자세히 밝히고있다. 셋째부분에는 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의 정원수, 그들이 지켜야할 사항 등이 새겨졌다. 이 비문에는 세 나라의 통일을 위한 고구려인민들의 투쟁과 념원이 일정하게 반영되여있다.
지난 시기 일제어용학자들은 이 비문을 악용하여 《미마나 미야께》설을 조작한 일이 있으나 이 반동적인 협잡행위는 여지없이 폭로되였다.
지금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는 광개토왕릉비가 실물대로 만들어져 진렬되여있다.
광개토왕릉비는 우리 선조들이 남긴 비석가운데서 가장 오래고 가장 큰것으로서 그 내용의 풍부성으로 하여 고구려사와 세 나라 호상관계사 및 우리 나라 대외관계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되고있다.
중원 고구려비
충청북도 중원군(충주)가금면 룡전리에 있는 고구려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고구려가 번창하던 5세기후반기 나라의 남쪽 국경을 확정하여 세운 척경비이다.
이 비석은 높이 1.44m, 앞면 너비 0.49~0.55m, 옆면 너비 0.37~0.38m이다. 두툼하고 전반적으로 탐탁한것이 고구려 광개토왕비처럼 생겼다.
비문은 네면에 다 새겨져있다. 1면의 비문은 총 10줄에 230자인데 18자가 보이지 않고 2면의 비문은 7줄 101자인데 67자를 알아볼수 있으며 3면과 4면의 비문은 전혀 알아볼수 없게 되였다. 글자의 크기는 3~5㎝정도이다.
비석의 앞면 맨우에 새긴 《고려 건흥 4년》이라는 글에 의하여 건흥이라는 년호(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라는 뜻)가 고구려의 년호이라는것과 비석의 내용이 건흥 4년(475년)경의 사실을 전하여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비문에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사이의 관계가 반영되여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고구려의 령토가 당시 중원(충주일대)까지 포괄하고있었다는것과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취급하고 있었다는것을 더욱 명백히 알게 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한자를 가지고 자기식의 리두문을 쓰고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중원 고구려비는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고구려의 력사, 삼국호상간의 관계사를 해명하며 고구려의 강대성을 증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가치를 가진다.
나무다리유적
평양시 대성구역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암동을 련결하는곳에서 고구려의 대동강다리유적이 발굴되였다. 이곳에 큰 다리가 놓이게 된것은 당시 고구려수도였던 평양의 중심이 안학궁과 대성산성이였기때문이다.
고구려는 이 다리를 통하여 남쪽으로 나가는 길을 열어놓았것이다. 다리의 총길이는 375m이고 너비는 9m로서 대단히 큰 나무다리였다. 이렇게 큰 규모의 나무다리가 발견된 일은 아직 그 어디에도 없다.
발굴된 유적유물에 기초하여 이 다리의 구조와 형식을 복원하여보면 다리의 입구부분은 나무를 부채살모양으로 깔았고 본체부분은 널판을 가로세로 깔았으며 량옆에는―란간을 세웠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다리의 기둥은 물이 닿지 않는 첫부분에는 큰 각재우에 튼튼한 모기둥을 세웠고 물이 흐르는 대목에는 사개물림방법으로 귀틀을 짜고 그안에 돌을 가득 채웠었다.
대동강나무다리에서는 다리를 건느는 사람들을 밝혀준 등불대자리도 발견되였다. 다리의 입구 동쪽의 잘 다진 바닥우에 길이 154㎝, 너비 12㎝의 크기로 귀틀모양으로 짜올렸던것이다. 대동강다리는 고구려사람들의 훌륭한 건축술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위력하였던 고구려의 강대성을 보여주고있다.
고구려의 석각천문도
고구려에는 5세기말 또는 6세기초에 만들었다고 하는 석각천문도(돌에 새긴 별자리그림)가 있었다. 고구려에서 만든 석각천문도(세로 약2m, 가로 약 1.2m)는 당나라 군대가 침입하였을 때 강물에 빠뜨려 없어졌는데 그것을 대본으로 하여 종이에 찍어냈다고 하는 천문도가 리조초기에 한장 발견되였다.
이 천문도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천상렬차분야지도》가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1395년에 만들어진 《천상렬차분야지도》는 고구려시기에 만든 천문도의 기본형태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약간의 수정과 보충을 가한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통해서 고구려의 석각천문도의 기본내용을 알수 있다. 이 천문도에는 당시의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져있던 1467개의 별들이 282개의 별자리들에 표시되여있고 적도원과 북극원, 황도원과 함께 경도선이 밝혀져있으며 은하수도 그려져있다. 이 천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성표의 하나이다.
중흥사 당간지주
고구려시기의 유적인 이 당간지주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인흥1동에 있다.
당간지주란 기발대의 지지기둥을 말한다. 대체로 2개의 돌기둥을 쌍지어세우고 그사이에 기발대를 끼워세우게 되여있다. 절간에 흔히 세웠다. 중흥사 당간지주는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당간지주가운데서 가장 오랜것이며 또 큰축에 속한다.
중흥사는 고구려 광개토왕때(391-412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393년 평양에 세웠다고 하는 9개절의 하나였다고 인정된다.
중흥사는 큰 절간이였으며 고려시기, 리조초기까지도 있었다. 고려시기 평양에서 묘청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관군들이 이 절간에 주둔하였었다고 한다.
중흥사 당간지주는 바닥돌우에 세운 2개의 돌기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높이는 4m나 된다. 돌기둥에는 기발대를 회전시키거나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들이 나있다.
대동강과 보통강사이에 자리잡은 평양성은 마치 배처럼 새겼는데 이 당간지주는 그 배를 매여두는 기둥인듯이 이야기하는 전설이 잇다.
녕변 철옹성
평안북도 녕변군의 약산동대를 품에 안고있는 녕변 철옹성은 규모가 크고 견고한 고구려의 산성이다.
녕변읍을 고리짝처럼 둘러막은 산봉우리들을 따라 쌓아진 철옹성의 둘레는 14㎞나 된다. 철옹성은 이름그대로 쇠로 만든 독처럼 견고하여서 지난 시기 한번도 함락되여본 일이 없다고 한다.
성은 본성과 그안을 구분하여 쌓은 약산성, 신성, 북성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시기 약산성은 내성에 해당하고 본성은 외성이였으며 신성과 북성은 리조시기에 덧쌓은것이다. 철옹성은 고구려 때부터 리조시기에 이르기까지 나라의 방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철옹성의 약산성은 약산을 둘러막고 본성은 약산성을 이어서 북쪽의 진망산, 동쪽의 모란봉, 남쪽의 남산을 거쳐 다시 약산성에 가닿았다. 북성은 본성의 서북쪽을, 신성은 본성의 서남쪽을 갈라 쌓았다.
본성의 동, 서, 남, 북 네면에는 큰 성문들을 두었다. 지금 그 남문에는 문루까지 잘 남아있다. 이 문루는 1789년에 고쳐세운것이다. 철옹성 남문은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있는 문루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의 하나이다.
철옹성에서는 수구문이 유명하였다. 강을 가로질러 4개의 무지개문을 내고 그우에 문루를 세운 기발한 형식의것이였다.
전망이 좋은 남산과 약산동대, 진망산과 모란봉에는 각각 장대를 두고 사방을 감시도 하고 군사지휘로 하게 하였다.
11세기 초 거란침략자들은 여러차례 녕변 철옹성앞에서 섬멸적타격을 받았다. 1236년 삭주를 거쳐 녕변에 기여든 원나라침략군도 철옹성에서 참패를 당하였으며 1636년 청나라 침략자들도 이 성을 감히 다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