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시장 14 (1권 5. 김홍신. 펌글)
"여기저기 성치 못한 것 같아서요."
유박사는 청진기를 내 가슴에 대고 눈과 혀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쪽이 아픕니까?"
진찰대에 뉘어 놓고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면서 물었다.
"진찰하시고 알아맞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유박사의 낯빛이 약간 굳어졌다.
청진기를 떼고 다시 옆구리께를 눌렀다.
"여긴 괜찮아요?"
"힘껏 누르면 아프고요..... 살짝 누르면 아플 리가 없지요."
유박사는 잠시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긴 병원입니다. 농담이나 장난하는 곳이 아닙니다. 진찰 받으러 왔으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얘길 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유박사의 표정은 근엄했다. 나는 여전히 웃었다.
"술이나 담배를 많이 하나요?"
조금 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박사님, 아프니까 온 거 아니겠습니까? 유명한 박사님이니까 진찰해 보시고 병줄을 알아맞힌 뒤에 처방 주는 게 원칙 아닙니까?
환자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 줄 알면 병원에 왜 오겠습니까. 모르니까 온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유박사가 청진기를 떼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 사람이 왜 이래. 젊은 사람이 보자보자하니까......"
몹시 언짢은 목소리였다.
"사실이 그렇잖습니까? 박사님이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고 하니까,
또 제일 유명한 분이니까 용한 줄 알고 찾아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절 실망시키지 마시고 어디가 어떻다든자, 무슨 약을 먹으면 낫는다든지....
아무리 약을 써도 뒈질 수 밖에 없다든지.... 말씀해 주세요."
유박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간호원, 김간호원."
밖에다 대고 이렇게 소리질렀다.
간호원이 뛰어와 유박사 옆에 섰다.
"이 사람 내보내. 어서!"
노염이 풀리지 않았는지 간호원에게 큰소리를 했다.
"잠깐만요, 박사님. 설마 이대로 내쫓지는 않겠지요? 진찰받으러 온 사람인데요. 진찰권도 끊었고....."
"어서 내보내!"
유박사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거, 놔요, 난 아직 진찰이 끝나지 않았단 말예요. 진찰 받다 말고 나가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간호원의 손을 뿌리치고 이렇게 대들었다.
"여봐, 젊은이. 보아하니 돈 사람 같지는 않은데..... 신성한 병원에 와서 그런 법이 어디 있나?"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제가 이 신성한 병원에 와서 행패부린 게 뭣니까? 아프니까, 유명한 박사님이니까, 찾아온 거 아닙니까.
오장육부 안 아픈 곳이 없이 모두 아프니까 온 겁니다. 그런데 저보고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니....
그걸 알면 왜 옵니까? 약방에 가서 약이나 사 먹지요. 박사님처럼 유명한 사람도 모르는 걸 낸들 어떻게 압니까?
안 그래요? 그걸 알면 내가 의사 노릇하지 여길 뭐하러 와요."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진찰대에 늘어붙어 앉았다.
유박사의 표정이 험해졌다.
"당장 나가! 어서 썩 나갓!"
진찰실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나라가면 못 나갈 것도 없지요. 의사가 박사님 한 사람만은 아니니까요. 히포크라테스가 웃겠습니다."
나는 진찰대 옆에 걸어 놓았던 웃옷을 걸치고 진찰대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
"진정한 의술은 환자 곁에서만 존재하는 겁니다. 유명하신 박사님."
더 얘기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유박사가 내 목덜미를 낚아채어 밖으로 내던졌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사나이라서 힘도 센 것 같았다.
하긴 우리 나라를 통째로 대표하는 인물이니 힘도 세어야겠지 뭐.
문을 밀고 나와서 간판을 다시 쳐다보았다.
류금동 의원이란 간판이 나보다 훨씬 컸다. 간판이 너무 크다 싶었다.
'류'자를 쳐다보는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런 양반은 아무개여사배 쟁탈전 전국 무슨무슨 대회가 있으면 만사를 제쳐 놓고 출전할 것 같았다.
아무개여사배 쟁탈전을 배 위로 올라가는 대회로 착각할지 모르니까.
저런 별종 양반네들만 탓할 건 아니다.
화장품 이름과 과자이름과 술이름, 장난감과 의상, 음식과 생필품 이름이 모두 국적불명인 판에,
그래도 외제 성씨를 선택하지 않은 것만 봐도 기특한 일이지.
이럴 바에야 차라리 우리 나라의 국어를 없애고 일본어나 영어를 국어로 채택하는 용단을 내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후세에 그 이름이 찬연히 빛나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나는 병원을 두 바퀴나 돈 뒤에 천천히 병원 옆의 다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유박사가 나를 내쫓은 것에 대해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유박사는 한 마리 작은 생쥐이고, 나는 발톱 긴 고양이일 수밖에 없었다.
생쥐의 목에다 나는 예쁜 방울을 매달아놓고 나온 셈이었다.
유박사 자신이 자신의 목에 방울이 매달려졌다는 걸 아마 곧 알게 될 것이다.
의료법에 분명히 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면 구속, 벌금 또는 의사면허증을 박탈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걸었다.
간호원인 듯한 여자가 세 번이나 끊었다.
네번째 전화에 유박사가 불쾌한 목소리로 등장했다.
"여봐, 학생. 더 장난하면 경찰을 부를테니 그런줄 알아!"
"경찰요? 제발 좀 불러 주십쇼. 부탁합니다."
"이놈 자식...... 정말."
식식거리는 표정이 선하게 떠올랐다.
"진정하시고 들으세요. 조금 전에 분명히 유박사님은 환자의 진료를 거부했습니다.
난 보사부와 경찰에 고발하겠습니다.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라는 걸 아세요?
신문, 텔레비전 뉴스가 좀 볼 만하겠군요. 경찰을 빨리 부르세요.
옆 건물 다방에서 고발장을 쓰면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전화를 딸깍 끊었다.
생쥐가, 방울 달린 생쥐가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오르겠지.
나는 생쥐를 좋아한다.
특히 목에 작고 예쁜 방울, 소리가 숨으려고 하면 할수록 방울 소리가 더 예쁘게 나기 때문이다.
"여기 쌍화차 두 잔 더 주세요."
나는 차를 더 시켜 놓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생쥐의 목에 방울을 매달아 놓은 고양이의 여유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차값과 담배값은 생쥐가 계산할 테니까 진찰권 끊은 값은 되돌려 받게 되는 것이다.
생쥐가 올라왔다. 상기된 얼굴이 귀여웠다.
그는 안경을 벗어 건성으로 닦고는 내 앞에 무겁게 앉았다.
살찐 생쥐, 방울 소리도 예쁜 생쥐, 더구나 유명한 생쥐. 이럴 때 고양이는 마음이 후해야 한다.
어차피 생쥐는 고양이의 노리개인 것이다.
초조한 것은 생쥐이지 고양이가 아니다.
관용을 베풀지 못하는 강자는 강자가 아니다.
"학생. 이럴 수가 있나? 이렇게 사람을 골탕 먹일 수가 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운 사람이....."
"박사님, 진료를 거부한 건 박사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저는 환자일 뿐입니다.
내 몸 속의 어디가 썩었는지 곪았는지 모르는 가련한 환자입니다."
"이 사람아. 누가 환자가 아니랬나? 신성한 병원에 와서 진찰하는 의사를 그렇게 약 올릴 수가 있느냐 말야.
배운 사람 아닌가.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 그리고 진료 거부니 고발이니 하면 어쩌자는 건가?
설사 내가 화가 나서 그랬다손치더라도.... 배운 사람이면 이치적으로.... 마구 몰아붙여서야 쓰나? 안 그런가?"
유박사는 목청을 낮추고 얘기했다.
나는 느물스럽게 웃었다.
도대체 내가 대머리를 싫어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가 대머리였기 때문에 나도 대머리가 될 확률이 많겠지만 어쨌든 싫었다.
나는 싫은 것도 많았다.
일테면 예수의 턱이 뾰죽하게 나왔다든지 불상의 눈매가 길게 찢어졌다든지,
돌하루방처럼 턱살이 넓적하다든지 마치 먹는 대로 살찌듯 뚱뚱하다든지 하면 무조건 싫었다.
"어쨌든 저는 진찰받으러 갔다가 거절당한 사람입니다. 그건 분명하잖습니까?
의사의 진료 거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거죠. 저는 학교에서 불의를 보고 지나치는 건 비겁한 거라고 배웠습니다."
"이 사람아. 오죽하면 내가 자네 말마따나 진료 거부를 했겠나. 한번 바꿔 놓고 생각해 보게.
배운 사람이 이래서야 쓰겠나. 나도 배우는 자식이 있고....."
"박사님은 불의를 보고 참으라고 가르치십니까?"
"누가 그렇게 가르치겠나.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우리 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간호원이 그 옆에서 다 들은 걸세."
"그래서 진료 거부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게 어째서 진료 거부인가, 이 사람아."
"결론만 말씀하세요. 진료 거부였는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어쩔 텐가?"
유박사는 역정의 빛이 뚜렸했다.
나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로 나오진 않을 것 같았다.
더러워도 달래 놓고 보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의사의 진료 거부는 의료법에 따라 우리 나라 법대로 처벌받아야겠지요."
"이 사람이..... 우리 나라 법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아나?"
"왜 이자리에선 저희 나라라고 하지 않으시죠?"
유박사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말문을 열었다.
"나를 고발하겠다는 건가?"
"그럴 생각입니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여봐, 학생, 뭘 원하는지 알겠네. 그렇게 내가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아나? 어림도 없는 소리 말게. 어디 해 볼 테면 해 보게.
학생의 행위는 잘못이 없고 나만 잘못했다고 할 줄 아는가? 어디 한번 해 보게. 뜻대로 되는지. 이 사람아.
의사생활 몇십 년에 자네 같은 공갈사기꾼을 한두 번 치른 줄 아나? 어디 해 봐!"
"빽이 좋으신 모양이죠?"
"그런 건 없어. 그러나 자네 같은 사람 잡아 넣는 건 문제도 아냐. 당장 연락해서 뿌리를 뽑을 수도 있어."
"뿌리요? 알렉스 헤일리하구 킨타 쿤테하고 말입니까?"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
"의료사고 판례집도 봤고 의료법도 봤고 법의학도 봤습니다. 또 진료거부에 대한 판례도 봤구요.
법대생이 그쯤은 알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어려서 법정에 서는 공부는 못해 봤습니다.
경험 삼아 법정에 서는 공부 좀 해 보겠습니다."
나는 일어섰다.
물론 그가 붙잡으리란 걸 짐작하고 있었다.
"여봐, 학생."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러나 비굴한 음률이었다.
"얘기는 끝났잖습니까?"
나는 느물스럽게 대답했다.
느물스럽지 않은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닌 것이다.
먹이를 놓고 그것을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건 쥐새끼의 생리이지 고양이의 생리는 아니다.
"잠깐 일루 앉아 봐."
"명령입니까?"
"글쎄, 잠깐 앉아서 얘기 좀 해 보자니까 그러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나는 못 이기는 체 주저앉았다.
유박사가 아주 어여쁜 처녀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았다.
아니 다혜였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울 달린 생쥐라고 표현하지 않고 나무꾼에게 날개 옷 빼앗긴 선녀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자네, 정말 나를 고발하려고 이러나?"
"어른한테 장난하려고 이러시는 줄 아셨습니까?"
"앞뒤 재어 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이러면 무슨 해결이 있을 거 같은가?"
"좋은 해결, 판례집과 신문, 방송에 기삿거리를 주게 되겠지요."
"내가 그렇게 물러 보이나? 자네를 그냥 둘 줄 알아? 당장이라도 손 쓸 데가 없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자네의 잘못된 생각을, 그런 공갈배나 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자네를 일깨워 주려고 그러는 거야.
어따 대고....사람 봐 가며 공갈 치구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