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마
사람에 따라 어떤 이는 어머니를 엄마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엄마를 어머니로 부른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대개 나이가 들어도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들은 성년이 되면 엄마라는 말보다는 어머니라는 말로 바꾸어 부르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러나 다 큰 남자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덜떨어진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도 어린 시절에는 엄마라고 불렀으나 내가 결혼한 후에는 어머니라고 불렀다.(어머니의 축약어인 엄니로 불렀는데 이는 충청도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엄마라는 말속에는 무한한 사랑과 친밀감이 내재되어 있다. 엄마라는 말은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입에 인이 박힌 말이다. 인이 박힌다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배도 인이 박히면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삶에는 인이라는 각자 고유의 생활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 인이 박힌 틀은 마치 나무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쉽게 빠지지 않고,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운명이 된다. 엄마라는 말도 그렇다. 어릴 때부터 인이 박히게 불러온 엄마라는 호칭을 어머니라고 바꾸어 부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호칭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호칭이란 상대와의 관계를 설정한다. 상사와의 관계에서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다. 또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저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그 미묘한 관계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느낌만으로 서로가 그 친밀도를 인식한다. 호칭이란 서로 간의 관계의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서로 어긋나게 인식을 하게 되면 호칭의 왜곡이 온다. 호칭의 왜곡이 오면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친하다고 생각하여 형이라고 불렀는데 상대는 버릇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관계는 틀어지고 만다.
내가 엄마를 어머니라고 바꾸어 부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라는 단어에는 젖비린내가 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빨기 시작할 때 아기들이 처음 배우는 말이 엄마이다. 그러니 엄마라는 말은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언어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단 어린아이의 말이라는 유치함이 내포되어 있다. 성장한 남자가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스스로 미성숙, 유치함을 들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엄마를 버리고 어머니로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엄마에서 어머니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머니라고 부를 때마다 항상 마음의 불편함을 느꼈다. 마치 물살을 거슬러 배를 저어가는 것처럼, 인이 박힌 내 삶의 습관을 역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엄마와 어머니(엄니)라는 말은 아주 근소한 자음과 모음의 교환일뿐인데 그 차이는 마치 우주처럼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다. 30여년 간 내 입술이 간직해오고 인이 박힌 엄마라는 근육의 익숙함을 거부하고 어느날 갑자기 낮설고 생경한 근육의 움직임을 연습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을 때 엄마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어머니의 삶 속에서도 수십 년간 들어왔던 엄마라는 익숙한 말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사랑하는 아들이 어머니라고 불렀을 때 어딘지 모를 어색함과 약간의 배반감까지 느끼지는 않았을까. 마치 엄마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자애와 사랑을 거부하고 어머니라는 표준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모자간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려고 대드는 아들의 도전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덧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 지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불렀으니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 정도의 세월이면 이제는 어머니라는 말의 어색함이 사라졌어야 할만도 한데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머니라는 말이 왠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렇다고 다시 엄마라고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니 나는 엄마라는 유치함과 어머니라는 성숙함 사이에서 호칭의 방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엄마라는 말은 마치 우리 삶의 뿌리와 같다. 엄마의 모태에서 우리의 삶이 시작되었듯이 엄마라는 말에서 우리의 언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뿌리와 같은 원초적 언어를 제거하고 새로운 언어를 이식하는 것은 마치 우리 몸에 내 자신의 세포조직이 아닌 다른 세포조직을 생체이식하는 것과 같이 어색하다. 많은 경우 생체이식은 거부감을 동반한다.
얼마전 박창근이라는 가수가 아침마당에 나와 ‘엄마’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왠지 가슴이 뭉클했다. 그 노래의 마지막 부분에서 엄마!라고 호소하듯 노래하는 그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엄마!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이름인가. 나의 원초적 언어인 엄마. 나의 엄마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과 그리고 그리움이 가슴속에서 물밀듯이 밀려왔다. 엄마에게 잘 해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엄마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얼마나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내 삶의 뿌리와 같은 엄마를 어머니로 바꾸어 부른 것을 후회하고 있다.(그러나 내가 계속 엄마라고 불렀더라도 역시 항상 내 자신의 유치함을 느꼈겠지만 말이다.) 혹시 엄마가 어머니라는 호칭의 불편함을 돌아가실 때까지 느끼시지는 않았을까.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이라도 엄마라고 불려 드려야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나 후회막급이다. 만약 그랬다면 엄마는 좀 더 마음이 따듯해지지는 않았을까. 게다가 살아생전에 내가 엄마에게 잘해드리지 못했으니 그 후회는 더욱 커진다. 지금 생각하니 엄마가 살아생전에 내가 자주 했어야할 말이 있다. 그 말을 나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렇게도 흔한 말이고, 그렇게도 좋은 말인데도 말이다. 옛날 시골에서는 남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나도 그런 말을 잘하지 못했다.(지금은 다르지만) 마음만 있었지 입술로 직접 표현하지는 못했으니 너무나 후회된다. 이제야 엄마 없는 허공에 대고 늦게나마 말해본다. 엄마, 사랑해요!
첫댓글 상호 호칭은 중요한가 봅니다.
간혹 육사후배장군들이 나를 선배님
이라고 부르더니 어느날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다해서 그래라고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명수 형님이라고 부
르니 보다더 친근감을 느꼈지요
엄마, 어머니에 대한 사랑, 추억, 그리움은 그 누구에게나 아마도 가장 각별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백강이 자책하는 것처럼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른 것을 후회할 것 까지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서 결코 서운해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누구나에게 엄마라는 이름과 존재, 엄마의 자식이라는 관계는 호칭에 관계없이 서로가 가장 가깝고도 원초적인 형태로 남아있을 것이이기 때문입니다. 엄마를 그 무엇으로 호칭한다고 하더라도요.
어머니라는 호칭이 친밀감이 떨어지는 듯하고 또 다소간의 격식이나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이는 오히려 어머니를 한 자식의 엄마이자 한 사람의 사회적 인격체로서 존중하여 부르는 호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경우에는 다 장성해서도 어머니를 엄마와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고쳐 불렀지만,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도 보통은 응석만 부릴줄 알았지 어머니를 한 사람의 자연인 또는 사회적 인격체로서 보다 깊이 이해하고 존중해 드리지 못하지 않있나 하는 아쉬움을 느껴고 있습니다~
소인은 엄마와 대화하거나 부를 때 어머니가 아닌 엄마라고 호칭했으며 제3자의 경우 나보다 연상이거나 점잖은 자리(사돈과 같은)에선 어머니라고 호칭했고 친구들과 얘기할 땐 '울엄마'라고 불렀지요. 나이가 들어도 엄마가 좋아요. 돌아가신지 17년이 되었네요. 백강의 엄마 얘기에 가슴이 얼얼합니다.
백강의 생각을 읽으며 어머니가 보기에도 그 효심이 갸륵하고 기특하다고 칭찬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 어릴 적에 엄마 호칭을 부른 기억이 없어요. 연속극 볼 때 엄마 호칭은 늘 어쩐지 어색했고 내 자신이 어린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애들한테는 ' 네 엄마가 어쩌고 저쩌고 ' 하며 말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철 들기 전에는 엄마라고 불렀던가 봅니다. 백강의 고심을 생각하며 '아 풍수지탄---'
아무리 효자였더라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불효한 것만 생각나지요.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처럼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다 읽을 수가 없지요. 자식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면, 나도 부모님께 그랬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오늘아침에 다시한번 박창근의 엄마라는 노래를 들으니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갈헌의 말처럼 자식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면 나도 부모님께 그랬으려니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틀림이 없을겁니다. 부모님도 나 때문에 서운했던 일이 많았을 겁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이제는 풍수지탄일 뿐이지요.
엄마...
목이 메는 이름입니다
저는 엄마라고 불리기 전 엄마의 딸이었고
지금은 딸들이 저를 엄마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불러도 지겹지 않은 그 이름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으로 파고들어 와 심장을 찔러대는 그 이름
이제 부를 수 없는 그 이름
지구가 망해도 이
이름 하나는 남아있을
것만 같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고
엄마엄마 불러보고 싶습니다
모두에게 아픈 이름으로 남아있는 엄마입니다
붕 떠 있던 마음이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니 차분해집니다
오늘은 열대야가 없으려나 봅니다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합니다
편한 저녁 되세요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얼핏 생각이지만, 만약 사회적으로 구실을 못하는 나이 든 아들이 엄마라고 계속 부르면 복장이 터질 테고, 제대로 앞길 잘 꾸려가는 사람이 엄마라고 부르면 한 없는 정감을 느끼리란 생각이 듭니다.
아들이 나이를 먹으면 부모도 하게를 했던 우리의 풍습이 있지요. 호칭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부모 자식인 걸요.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이 늙어가는 모습도 아픔이지요. 천륜의 바닥은 아픔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