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卽)한 순간에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각성은 평화를 잃지 않는다.
“내가 방 청소를 했는데 형이 또 청소를 할 때 화가 났다.”
“친구가 자기 생일 파티에 초대해 주지 않아 서운했다.”
“남편이 ‘당신 친정 식구들은 한 결 같이 저질이야’해서
오만 가지로 속이 상했다.
”이런 식으로 크고 작은 불유쾌 정서〔瞋〕를 반복, 반복,
또 반복하면서 반성도 없이 사는 것이 중생 놀음이다.
세상 사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상의 평화를 지향하는
종교인이 자신의 마음 평화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불화의 삶을 당연한 듯이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이다.
경전을 통해서, 법사나 목회자를 통해서 많은 가르침의
내용을 머리에 지니고는 있으나
말씀 따로, 생활 따로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산승은 이를 관념 불교, 관념 종교라 하여 엄히 지양코자
활불교(活佛敎) 운동, 활종교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즉한 순간에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각성은 평화를 잃지 않는다.
각성은 깨어 있는 힘이 길러진 만큼
그 명징성(明澄性)이 높아진다.
깨어 있음이란 쓰이기에 따라서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탐·진·치 삼독에 휘말려들지 않는 상태의 마음으로 보면 무난하다.
친구가 생일 파티에 초대 안 했다고 서운해진 것은
깨어 있음의 차원에서 보면 유치한 일이다.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되지 않은
사실을 안 순간 깨어 있는 자는 “구나”한다.
즉 “친구가 자기 생일 파티에 나를 초대하지 않았구나”하고
그 사실을 그냥 바라다본다.
‘바라다보는 힘 기르기’란 수도의 중대한 맥이다.
이 힘이 약한 자는
자신이 쌓아온 삼독의 업장에 휘둘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순간 화가 났더라도, 서운해졌더라도, 분노가 치밀어 올랐더라도,
그 진심(瞋心)이 일어나게 된 상황을 되짚어서 ‘
바라다보는 힘 기르기’의 공부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일거 삼득(一擧三得)의 공덕이 있다.
과거의 업을 정화하는 이익, 미래의 업을 덜 짓게 되는 이익,
깨어 있는 힘의 탄력을 얻어가는 이익이 그것이다.
탐·진·치 제거가 불교의 길이요,
깨어 있음 공부가 불교일진대 진심이 일어났을 때
그 자체를 수도 소재로 직접 삼는다는 것은 천만 번 지당한 일이다.
‘이뭣꼬’ 화두 하나만, ‘아미타불’ 명호 하나만
주(主)바라밀로 들고 있으면 될 뿐이라는
애매하고 막연한 환상 속에 있는 수도인이 적지 않으리라 본다.
물론 주 바라밀은 평생 테마로
마음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세워야 할 것임은 당연하다.
보다 효과적으로 주 바라밀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도
경계에 휘말려드는 희생을 극소화해야 한다.
그 좋은 방편이, 즉한 순간에 ‘구나· 겠지· 감사’하는 것이다.
작성자 : 정혜선원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