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스님의 생애와 한국 선의 세계화/ 전현자
구산스님을 떠올리면 누구라도 서양인 제자들이 떠올려 진다고 할만큼 현대 한국 불교에서 최초로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하시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스위스 그리고 아시아 국가등 여러나라에서 불법을 찾아온 이들에게 ‘이 뭣꼬’ 화두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지도하셨던 스님께서 열반하신지 30년(12월 15일이고 음력으로는 11월13일)을 맞이하여 그 뜻을 되새기어 현재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취지로 국제 학술 대회를 법련사에서 열기에 취재하게 되었다. 법당 안을 가득 메운 스님들과 외국인 제자들이 스님을 추모하는 의례를 마친후 구산 큰스님의 수제자인 현호스님과 버스웰 교수가 인터뷰를 허락해 주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기자 이 시대의 수행자들에게 구산 큰 스님을 대신해 해 주실 말씀이 있다면?
현호스님 스님께서는 "자기 양심을 속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는 승려 생활, 인간관계를 하라는 것이다. 자신을 비추어 볼 때 부끄럼 없는 삶을 살라는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기자 스님께서 한마디로 구산스님을 말씀하신다면?
현호스님 구산스님은 구산스님이시다
기자 한국 송광사에서 스님으로 살았을때 간화선 수행을 했을때 구산스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셨는가?
버스웰 구산스님께선 그의 제자들을, 특히 서양사람들을 아주 구체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 스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라고 물어봤고, 사람들은 여러가지 답들을 했다: 세계 평화, 사랑, 등등. 스님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마음을 어떻게 찾느냐? 그것이 간화선의 핵심이였다. 간화선은 마음을 다시 발견하는 기법이다. 마음을 모른다면, 마음이 무엇인지를 의문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는 화두, 즉 의문의 주제를 가진 수행에 집중하는 것이다.
기자 구산스님의 가르침은 당신의 수행과 인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버스웰 매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아주 젊었을 때 한국으로 처음 왔는데. 21살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성장을 했다고 느낀다. 현월스님 그리고 다른 송광사 스님들을 진정으로 나의 형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구처럼 느끼는 나의 개인적인 감정을 갖고 성장한 것보다 비할 수 없는 큰 영향은, 구산스님께서는 내가 교수로써 학문의 경력을 쌓고 활동 할 수 있게 한 장본인 이다. 스님은 내가불교 공부를 처음 시작했을 때 무자의 화두, 즉 조주의 화두를 주셨다. 조주는 개에게 불성이 있냐? 라는 질문에 왜 “무”라고 답했을까? 저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선불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라서, 이 질문에 그야말로 꽉 막혀 버렸다. 질문 자체만이 아니라,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에도 매우 의문스러웠다. 이것이 어떻게 불교적인가? 그리고 선불교는 어떤면에서 다른 방식들의 불교들과 연관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어떻게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 진화했나? 이런 질문들이 저의 학문적 연구의 시작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처음 연구한 많은 자료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화선 수행방법의 원인과 개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구산스님은 또한 지눌스님의 글을 번역하는 것을 권하여, 처음으로 출판한 책이 보조국사의 글을 번역한 것이었다.
기자 구산스님 이후의 한국불교의 상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버스웰 나는 사실 어떤 면에서 한국 불교가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한다. 그중에 하나는 스님들의 전문화(직업의식)가 생겼다는 것이다. 법당과 강의실에서 더욱 규칙적이고 구체적인 수행의 체계가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스님들이 전보다 훈련이 좀 더 잘 돼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송광사에 살았을 때는 이런 체계가 아주 조금 진행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도 어떤 스님들은 수행과 교학적 훈련이 굉장히 잘 되었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은 훈련이 잘 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전반적으로 거의 모든 스님들이 훈련이 더 잘 돼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스님들의 전문화로 한국불교의 균일화가 생겨 버린 것이다. 만약 성철스님과 경봉스님,그리고 구산스님을 가르침을 보면, 다 한국선의 스승이였음에도, 또한 자신만의 독득한 가르침의 방법이 있었다. 지금은 스님들의 훈련이 표준화 된것으로 한국불교가 균일화 됐다고 생각한다.
기자 왜 한국 불교를 선택 했는가?
버스웰 사실 한국불교가 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에는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졌고, 태국에서 먼저 출가를 했습니다. 하지만 태국에서 거해스님과 일타스님에게서 구산스님에 대해 들게 되었을때 매우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스님들은 구산스님과 한국불교의 기본적인 것에 대해 말해주었고 그때의 나는 스님으로써 태국에서 사는게 굉장히 힘들었는데 특히 육체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홍콩에서 1년간 지내면서 그 스님들께서 했던 구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고 한국에 한번 가보면 어떠할까 생각하다 그래, 한번 가보자로 결심하고 한국에 갔었고, 한국이 나에게는 그야말로 딱 맞았다.
기자 최근에 사전을 출판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전인지?
버스웰 사전이 총 120만 단어인데 지금까지 영어로 된 사전 중 가장 큰 사전이다. 용어가 5000개가 넘는다. 영어사전이긴 하지만, 티벳어,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많다. 처음으로 한국 불교의 용어와 불교적 설명이 일본, 중국, 그리고 심지어 인도 불교만큼 설명된 것이다.
기자 부처님의 수행방법이 여러 나라와 스승들에 의해 변화된 방법으로 가르쳐 지고 있는데 한국의 간화선 수행법이 변하지 않은 면이 있다면, 한국 불교의 발전에 좋은 일인가, 아닌가?
버스웰 내가 생각하기로는 변하지 않았다는게 아니라 간화선 전통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본다. 한국 간화선은 송대의 훈련 방법을 유지를 하려고 한다. 스님들의 수행, 그리고 절들은 송대와 비슷하게 구조되어 있고, 비슷한 일정을 따른다. 그리고 또한 간화선 수행 자체가 송대의 대혜선사의 가르침과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기자 그래서 좋은 것인가, 안 좋은 것인가?
버스웰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송대의 전통인 대혜선사 간화선 수행방식대로 정진을 하고 싶은 수행자가 있다면, 와야 할 곳은 일본이나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다.
기자 불교를 잘 모르는 젊은이나 불교를 안다고 해도 간화선 수행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어떻게 하면 간화선 수행을 잘 지도할 수 있는지?
버스웰 쉽지도 않지만,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의심을 일으키면, 사실 굉장히 쉬워진다. 하지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문제는, 어떤 질문들이 현대인들한테 유용하는가라는 것이다. 조주의 개에게 불성이 있나, 없나 라는 화두를 현대인들한테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불교에 대한 기본 바탕이 없는 서양인들한테 더욱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본성은 무엇인가, 아니면 당신은 누구인가, 그런 질문들이 의심과, 의정을 일으킬 수 있는 좋은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의심이라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의심이 뜻하는 깊은 의미는 의정, 즉 우리 존재의 중심을 뚫는 깊은 의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들이 사람들한테 매우 흥미로울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에서 몇 가지 간추려보면;
1)동국대 교수인 고영섭은 [구산의 살림살이와 사고방식]이란 주제로 구산스님의 26세에 병으로 만난 처서에게 들은 "몸은 마음의 그림자이며 사람마다 누구나 원만히 갖추어 있는 자성자리는 본래 청정하거는 어디에 병이 있느냐?”라는 말에 출가하신 것부터 송광사에서 효봉선사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제자가 되었고 가야산의 법왕대에서 정진하여 심안이 열려 지은 선시를 소개하며
앞면을 보니 어둑어둑 어둡지만
뒷면을 보니 또렷또렷 밝도다
앞면은 본디 뒷면과 나뉠 수 없고
뒷면 또한 앞면과 나뉠 수 없네
앞면을 보니 앞면이 아니고
뒷면 또한 뒷면이 아니네
앞면과 뒷면을 하나로 꿰뚫으니
진여는 크고 둥근 거울이네.
그 뒤 정화불사의 주도자로써의 구산스님의 행적을 발표하면서
오백자의 혈서로써 이승만 정부에 탄원서를 작성해 비구 대처의 대립을 해소하는 정화불사의 속도를 가속시켰다는 것과 국제포교의 선구자 역할과 지눌과 효봉의 조술자로써의 역할과 정혜쌍수의 실천자등의 역할을 발표하였다.
2) 현재 명상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화두선과 현대의 만남]이란 주제로 발표한 마틴 베출러는 구산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스님께서 묻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에 베출러는 “두 사람이 마주보고 미소 짓는 것”이라고 답했을 때 구산스님께서 “나쁜 대답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고 래리라는 젊은 미국인과 만났을때는 스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고 물은 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셨다는 것을 시작으로 구산스님의 말년에 함께 산채하면서 하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기에 마지막 숨이 멈출때까지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바탕으로 마무리 했다.
3) 키토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르노 네우바우는 [한국불교와의 인연]이란 주제로 발표하면서 자신이 아직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일반인으로써 그러나 운 좋게 이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구산 큰스님과 같은 몇몇 깨달은 스승들로부터 귀중한 영적 가르침을 받은 특권을 누린 범부의 입장에서 발표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에콰도르의 수도 퀴토 근교의 불교명상센터 즉 불승선사에서 영적 수행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안내해왔으며 한국 불교와의 숙명적인 인연에 대해 말하였다. 한국 도착 후 처음 간 곳이 범어사였고 그곳에서 광덕 큰스님을 뵙고 인생의 최초로 머물은 사찰에서의 체험은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있는 것과 같았고 구산큰 스님을 뵙고는 평상심시도의 화신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후 스위스로 돌아가 불승사를 건립해 6년간 포교 했으며 지금은 남미의 에콰도르에서 포교하고 있는 이유는 천주교가 라틴 아메리카 전반에 퍼져있음에도 토착문화가 유지되고 있고 남방불교와 티벳불교 그리고 중국불교가 들어와 통불교적인 상황에서 한국불교를 전하는 것은 그곳이 중생들에게 많은 이익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결의와 함께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아직도 진행중인 불승선사의 불사에 도움을 주시어 이 세상에 법을 유지하고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며 발표를 마치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