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도(納島)의 아름다운 추억
납도, 통영시에서 748억 들여 ‘창작예술섬’ 조성!
봉도(쑥섬)에 ‘치유숲체험장’과 ‘해수온천 스파 체험장’ 조성!
그리고 납도, 봉도, 국도, 갈도, 내초도, 연화도 등 섬 해상 관광지 조성!
요즘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욕지도 개발에 관한 기사이다.
내가 욕지도와 인연을 맺은 건 지금부터 38여 년 전 도서벽지 점수를 많이 획득하면 승진에 가산점을 주는 매력에 빠져서 교사로서 특별한 재주가 없던 나로선 몸으로 때워 점수 따기를 작정하고 오지의 섬 욕지도에 전 가족이 상주하며 5년간 섬 생활을 한 인연 때문이다.
지금이야 교통도 편리하고 문화시설도 확충되어 동경의 섬이지만 그때만 해도 전기도 없고 물도 귀한 원시의 섬이었다.
1977년 3월에 노대도에 첫 발을 디딘 후 5년간 욕지도에서 우리가족 5명이 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납도(納島)에서의 3년간은 내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아름다운 섬 생활 이었기에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름다운 자연
납도하면 떠오르는 게 2일에 한 번씩 다니던 불편한 교통편(여객선) 이지만 가장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 때 묻지 않은 자연조건이다.
섬 전체가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동백나무 숲에 골목마다 아름드리 터널을 이루던 후박나무 숲이며, 농작물이라고는 1960년대 우장춘 박사가 권장해 심었다는 밀감나무 밭이 생각난다.
섬 크기라야 해안선이 2Km도 되지 않은 큰 군함만한 조그마한 섬에 울타리도 없이 열 두 가구가(우리집 포함)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다운 섬이었다.
겨울이면 아름드리 동백나무에 빨갛게 꽃이 만개하고(특히 아름드리 흰 동백꽃 한그루가 있었음) 가을이면 온 밭이 밀감으로 노랗게 물드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통영에서 2시간을 배를 타야 닫는 외딴 섬이라 봄이면 물 반 고기반이랄 정도로 각종 바닷고기가 잘 잡히는 섬 이었다.
특히 잡히는 주 어종은 자연산 도다리였는데 도다리가 알을 낳는 1월 초에는 그물(자망)에 도다리가 하얗게 달려오던 것이 생각난다. 나도 100m의 그물을 마련 하여 동리 이장 배 그물에 연결하여 반찬을 해결했는데 어떤 때는 우리 식구만으로는 처분을 못해 육지 친구에게 보내던 생각이 난다.
5,6월경 볼락이 알을 낳는 철에는 볼락이 발갛게 물위로 떠오를 때가 있는데 이때는 한 낚싯대에 가짜미끼(닭털낚시) 3개씩을 달아 넣어도 3마리가 다 물어 올 때도 있었다.
새벽 5시부터 8시까지 3년간 이장배의 그물을 당기는 어부로도 일을 했는데(배의 인부가 3명이 필요한데 이장부부 외에는 일군이 없어서) 일 삯을 안 받는 대신 아침마다 달려올라오는 어종 중 전복 한 마리, 소라 한 마리, 해삼(붉은 홍삼)한 마리를 먹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물발이 센 사리 때는 온 동네가 뱃일을 모두 쉬는데 먼동이 트는 새벽 때 낚싯대를 들고 나가면 손바닥만 한 시커먼 볼락을 20여수씩 낚아오던 생각이 난다.
한 여름의 태풍이 올 때면 파도 속에 팔뚝만한 농어가 잘 낚였는데 그때 그곳 학생과 나누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철호야 파도에 휩쓸릴라 조심해라”
“선생님 파도에 쓸려 가면 어쩔 거여요?”
“어쩌긴 밖으로 빨리 기어 나와야지”
“에구…, 그러면 우리선생님은 죽었다”
이유인즉 바위가 많은 이곳 섬은 파도에 휩쓸리면 바다 속으로 헤엄쳐가 배가 와서 건져야 살지 밖으로 나오려다가 바위에 몇 번 쏠리면 살점이 모두 벗겨져 죽고 만단다.
2. 이상한 학제의 학교
“선생님은 국가와 국민이 만나는 최말단의 현장입니다. 국가의 녹을 받는 대신 국민을 위해 헌신 봉사해야 합니다. 특히 섬의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 님은 더 그래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교사의 사명감과 소명의식에 대한 글이 가슴에 와 닿아 항상 되새기는 나의 교원신조이다.
그러나 납도에서의 3년은 학생은 몇 명 안 되지만 6개 학년이 모두 존재하고 교사라야 나 혼자서 전교생을 다 가르쳐야하는 실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섬에 설치된 단급분교(교사 1명의 분교)들은 편법이지만 2년에 한 번씩 입학생을 뽑는 격년 모집을 한다.
그래서 한해가 1,3,5하년, 그 다음해엔 2,4,6학년이 된다.
내가 근무할 당시의 납도 분교는 이상한 학교였다.
전교생이 10명인 초 미니학교지만 학년은 모두 있고 더 우스운 일은 전교생 10명 중 7명이 납도 섬의 학생이고 3명이 우리 집 애들이었다.
우리 집 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육지의 애들보다 더 열심히 가르쳤다. 교실을 3등분하여 칸막이를 설치하고(지도교사 쪽은 모두 보이게) 2개학년은 자습 및 복습을 하고 1개 학년은 직접 수업을 하는 식으로 했다.
그때 예습과 복습에 많이 도움 된 교재가 교육개발원에서 발행한 『배움책』이었다.
배움 책으로 요즘한창 유행하는 자기주도적 학습을 미리 실시한 셈이다.
섬의 학생은 마땅한 놀이터가 없다.
바다에 나가지 않으면 대개의 학생이 학교에서 생활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생활하는 전일제 수업을 실시했다.
1학년도 6학년 수업을 배우고 6학년도 1학년 공부를 같이하는 무학년제에 아침 9시부터 해질녁 까지 학교에서 같이 생활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전기가 없는 이곳 섬에서 호롱불을 켜 놓고 밤에도 공부하는 『호롱불 아래의 공부방』을 개설한 일이다.
저녁 먹고 할 일이 없는 섬에서 동 회관에 학교의 칠판을 걸어 놓고 학교에서 미진한 공부를 밤에 보충한 것이다.
전기가 없어 TV도 볼 수 없는 이곳에서 마땅한 소일거리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문화 혜택을 못 받는 섬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아이들의 학업실력도 늘어 갔고 특히나 섬 주민 전체가 호응을 많이 해 주었다.
그 결과 그해 150명의 욕지중학교 입학생 중 4명의 납도 입학생이 전교2위, 여자 1위를 하는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덕택으로 우리 집 애들도 그 후 전국 최고인 s대학에 입학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3. 전교생 10명이서 운동회를...
그때 만 해도 운동회는 동네의 잔치였다.
그래서 동민들과 의논하여 10명인 학교에서 동네잔치인 운동회를 열기로 했다.
시기는 10월 중 물발이 세어 바다 작업을 안 하는 사리 때로 하고, 참가대상은 동민 전체로 했다.
섬 전체를 양쪽으로 주민 수를 고려해 골목으로 나누고, 학생이 청군이면 전 가족 모두 청군, 학생이 백군이면 가족 전체가 백군이 되었다.
그리고 점심을 마련하러 주민이 집에 가면 운동회가 안 되므로 아침에 미리 점심준비를 해 와서 전 동민이 같이 먹고 잔치처럼 했다.
그때는 도시와 농촌의 자매결연이 많았는데 납도는 부산 충무동의 한 단체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다. 그 단체에서 섬 구경 겸 운동회에 참석 했는데
그들도 청백으로 나누어 운동회에 참가하고 이웃섬인 본교가 있는 노대도에서 6학년이 운동회에 참가해서 같이 운동회에 동참했고 외지 참가자들을 위한 점심은 아침에 각 집에서 두 그릇씩 더해 와서 해결 했다.
섬 이라 물고기 위주의 반찬이라 너무나 푸짐했고 맛있었다.
운동경기의 진행은 학생 1종목, 아버지 1종목, 어머니 1종목, 자매결연팀 1종목으로 진행했는데 무용도하고 줄다리기에 농악도 해서 흥겨운 동민잔치 운동회가 되었다.
집집마다 꼭 하나씩 돌아가야 할 상품이 있는 경기는 부부 경기로 했고…
특히 나의 주특기인 농악놀이는 최고의 인기였으며,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섬 전체가 들썩일 정도 였다.
농기에 달린 줄에는 수 만원의 농악 채가 꽂혀서 학생들 학용품 구매에 사용했다.
2인삼각(발 묶어 달리기) 때에는 한 나이라도 젊은 색시였던 우리 집사람 조에 동리 청년이 다 모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운동회가 있는 날 저녁엔 동민 노래자랑 잔치를 열었던 기억이 새롭고…
4. 형제보다 따뜻했던 섬 사람의 인정
가구 수라야 섬전체가 우리 집을 포함하여 12집에 불과한 조그만 섬이라 3년을 같이 지내니까 한 가족이 되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윈 나로서는 애들 셋을 포함한 다섯 가족이 섬에 이사 왔으므로 일요일이나 방학 때도 섬에서 생활했고 심지어 출장으로 육지로 나왔다가 늦어서 배가 떨어지면 배를 대절 내어 섬으로 곧장 들어가곤 했다.
뭍으로 나갔다가 들어 갈 땐 꼭 빠지지 않고 사 가는 것이 있었다.
마트나 구판장이 없는 섬의 실정이라 외지에 나가지 않으면 구경 못하는 술이다.
고된 뱃일에 모두 술을 좋아 했지만 술을 못 팔게 했다. 간혹 술에 취해 실수를 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지로 나갔다가 들어 갈 땐 꼭 술을 준비해 갔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도 있지만 주민들과 유대를 갖는 데는 술 이상 좋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술이 눈에 보이면 바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습성 때문에 석유처럼 스피어깡(기름통)에 담아 위장을 하여 가지고 갔다.
그래도 눈치를 채고는 밤 2시고 3시고 우리 집 방문을 두드렸다.
배가 아프다는 구실로 배 아픈 데는 술이 특효약이라고 핑계를 대고는…
가을 밀감 철이면 밀감 따는 일에 전 동민이 매달렸다.
우리 집사람도 일군이라고 서로 데려가려 예약을 할 정도이고 나 또한 농촌 출신이라 지게를 질 줄 아는 상 일군이라고 서로 데려가려 했다.
이곳은 길이 험해 리어카도 다닐 수 없어 지게로 운반해야하기 때문에 더욱 더…
덕택에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밀감을 하루 50여개씩이나 먹었다.
어느 집에서 제사를 모셨던지 생일이 있을 때면 꼭 방송을 하여 동민을 모두 모아 같이 나누어 먹었다.
나도 우리 가족 생일날에는 동민을 모두 모아 정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섬의 임기 3년을 채우고 진주시로 발령이 났다.
한창 고기가 잘 잡힐 때라 만류를 했지만 그날 하루는 섬 전체가 배 작업을 않고 우리 집 이삿짐 배에 모야를(배를 묶는 작업)해서 삼천포로 올라왔다. 모든 배에 만선 깃발을 달고 농악풍물을 울리며…
헤어지는 삼천포 뱃머리에서는 모두들 부등켜 안고 헤어지는 아쉬움에 통곡을 했었다. 나는 내 친구와, 집사람은 집사람 친구와, 우리 애들은 자기 또래 친구를 부등켜 안고…
지금 납도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이다.
전기도 넣을 수 없고 물이 귀해 갈수기에는 육지에서 배로 실어 와야 해결되는 자연조건 때문에…
그러나 지금도 아름드리 동백나무에 빨간 동백이 만개하고 후박나무 숲엔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하는 자연 그대로의 섬이다.
이젠 40년 전의 추억이지만 정이 그리울 땐 납도가 생각난다.
첫댓글 아름다운 섬입니다.
동백나무 아래에 서서 납도의 바다풍경은 이미 파라다이스 입니다.
잔잔한 감동의 추억이 담긴 글임니다~ 일생을 신실하게 교육에 전념하신 스승님들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감사함니다 ^^
선생님의 납도분교 사진 올려두었습니다.
@bluewave 무인도에 폐교가 되었군요 저희 고향 학교도 폐교된지 오래 되었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니다
선생님 ! 글이 넘 아름답습니다~~
납도 공부하다 납도분교 선생님의 납도추억의 글이 있어서(펌)
맘편하게 잘읽고 옛생각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선생님~이셨군요.^^ 어쩐지 올리시는 글의 문장력이ㅎ....납도~꿈에 그리는 곳입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가까운 미래에는 추억이 아름다운 납도를 만들 예정입니다.
진정한 선생님 이셨네요. 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슴이 뭉클ㅠㅠ 납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납도 가실여정 이시면 연락주십시요.
한편에 동화를 읽은듯 합니다..납도에 아름다움이 그림처럼 스치움니다^^ 아름다운글 감사히 읽고갑니다^^
진정한 섬마을 선생님 이셨군요
한편의 소설과 드라마를 보는듯이 빠져들며 읽어보았습니다.
지금도 가끔씩은 추억으로 생각이 간절 하시겠습니다.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