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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금정(聽琴亭)》이라는 정자는 두류봉의 직계 17대조 할아버지이면서
박사공(博士公) 10세인, 금재공(琴齋公; 諱-漢)선생이 낙향(落鄕)하여 후
학(後學)을 가르치며, 은둔(隱遁)한 곳으로 여러 시인 묵객(詩人墨客)과
문인(文人)들과 어울리며 여생(餘生)을 보낸 곳이다. 두류봉은 어제 5월
25일(陰四月九日)에 거행된 "금재공 춘계추모제향(琴齋公春季追慕祭享)"
에 다녀왔다.
이곳은 두류산(頭流山) 동북쪽 기슭인 산청군(山淸郡) 금서면(今西面)
동의보감촌(東醫寶鑑村) 아래인 특리(特里) 979번지에 있다. 동네이름
이 독특한 특리(特里)인데, '특별하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인 특리가
아니고, 풍수지리(風水地理)에서 '소(牛)가 엎드려있는 와우형(臥牛形)
마을' 이라는 뜻이다.
▲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 청금정(聽琴亭)
우리가 "特"자를 낱자로 공부한 사람은〈특별한-특(特)〉자로만 알고 있지
만, 천자문(千字文) 4자 1구의 제 225구와 제 226구에 나오는 문장을 살
펴보면,〈나귀-려(驢)〉〈노새-라(騾)〉〈송아지-독(犢)〉〈수소-특(特)〉〈놀랄-
해(駭)〉〈뛸-약(躍)〉〈뛰어넘을-초(超)〉〈말뛸-양(驤)〉으로 구성된 "驢騾犢
特(려라독특)이, 駭躍超驤(해약초양)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나귀와 노
새 및 송아지와 수소는 놀라서 날뛰며, 훌쩍 뛰어넘어 달린다"는 뜻이다.
▲ 금재 강한 선생 유허비 琴齋姜漢先生遺墟碑 01
▲ 금재 강한 선생 유허비 琴齋姜漢先生遺墟碑 02
여기 特이라는 글자는〈특별하다〉는 뜻의〈특(特)〉이 아니고,〈수소-특(特)〉으로
쓰였다. [*암소 반대는 o수소, x숫소]. 特자는 牛(소-우)+寺(관청-시)가 합쳐진
글자인데, 수소(牡牛)는 고대(古代)에 신(神)에게 바치는 제물(祭物)로 쓰였다.
그런데 수소(牡牛)는 우량(優良)한 유전자(遺傳子)를 가진 튼튼하고 강건(剛健)
한 한 마리만 있으면, 암소 (牝牛) 여러 마리와 교배(交配)를 통해 새끼를 번식
(繁殖)할 사명(使命)을 부여(附與) 받아 특별(特別)한 관리(管理)를 받았다.
여기서〈특별한-특(特)〉이라는 훈(訓)이 파생(派生)되었다.
▲ 동의보감촌 아래 마을 이름이 특리(特里)라는 것을 밝혀 두었다
이 청금정(聽琴亭)은 조선 성종(成宗 : 생애 1457~1494, 재위 1470~1494)
때 금재 강한(琴齋姜漢 : 1454 ~ ?) 선생이 연산군(燕山君)의 화(禍)를 예견
(豫見)하고 이곳 두류산(頭流山) 동북쪽 기슭으로 내려와 후학(後學)을 가르
치며 소요한 곳이다. 금재(琴齋) 선생은 조선 초중기(朝鮮初中期)에 남명 조
식(南冥曺植: 1501~1572)과 금재(琴齋)선생의 손자인 개암 강익(介菴姜翼:
1523~1567 -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우리나라에서 제2의 賜額書院인
남계서원 蘫溪書院 설립)을 포함하여 두류산(頭流山)을 중심으로 그 이름을
떨친 3대 학자로 일컫는다.
▲ 동의보감촌 아래 북쪽으로 흘러 내리는 금탄계곡
강한(姜漢)의 본관(本貫)은 진주(晉州)이고, 자(字)는 종지(宗之) 또는 종우
(宗于)이며, 호(號)는 금재(琴齋) 혹은 청금병수(聽琴病叟)다. 아버지는 군
위현감(軍威縣監)을 지낸 강이경(姜利敬)이며, 함양박씨(咸陽朴氏)와 결혼
하였다. 직계후손(直系後孫)은 주로 함양(咸陽)을 비롯한 두류산 주위에 많
이 거주하며, 진주강씨(晉州姜氏) 추원재(追遠齋)는 함양군(咸陽郡) 유림면
(柳林面) 국계리(菊溪里) 12번지에 위치한다.
▲ 계곡 아래쪽에서 바라본 청금정 聽琴亭
▲ 옛날에는 바윗돌 위에 비석을 세워 잘 봉합해 두었다. 처음 세워진 유허비
▲ 바위에 붙여진 유허비 - 거리를 두고 촬영
강한(姜漢)의 선조(先祖)는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지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통일신라(統一新羅)를 거쳐 고려시대(高麗時代)
이후 대대로 벼슬이 이어져 오던 집안이었지만, 아버지 강이경(姜利敬)이 군
위현감(軍威縣監)으로 있을 때, 남이(南怡) 장군과 함께 화(禍)를 당하자 어
머니 거창신씨(居昌愼氏)를 따라 경상도 함양(咸陽)지역으로 옮겨와 어린 시
절을 보냈다.
▲ 청금정(聽琴亭) 아래 계곡
1468년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한 후, 이시애의 난(李施愛之亂)을 평정(平
定)하고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토벌(討伐)에도 큰 공(功)을 세운, 젊은 적개
공신(敵愾功臣) 남이(南怡: 1441~1468)장군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서 해
임(解任)되었다. 류자광(柳子光: 1439~1512)의 고변(告變)으로 남이(南怡)
는 역모혐의(逆謀嫌疑)를 받아 화(禍)를 입었고, 그와 함께 북방정벌(北方
征伐)에 공을 세운 영의정 강순(康純: 1443~1468)도 추국(推鞫)하다가 죽
였다. 또한 군위현감(軍威縣監)에 제수(除授)되었던 강이경(姜利敬)은 남이
(南怡)와 함께 계(契)를 만들고 활쏘기를 하였다고 억울하게 연좌(連坐)되어
죽임을 당하고, 형제들은 먼 산골에 안치(安置)되었다.
▲ 금탄계곡의 바윗돌 위에 얹혀있는 명옥탄(鳴玉灘)이라 새겨진 바위
♣ 참고 : 류자광이 고변하여 남이장군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한 시
〈北征歌〉 - 南怡 -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어지러운)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나를 대장부라 칭하리오?
*셋째 구절 未平國을 살짝 未得國으로 류자광은 조작하여 고변한다.
즉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고쳤다.
▲ 명옥탄(鳴玉灘) 새겨진 바윗돌 - 아래에는 금재강선생구거지(琴齋姜先生舊居地)
남이장군(南怡將軍) 역모사건(逆謀事件)에 연루(連累)되어 처참(處斬) 당한 강
이경(姜利敬)의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부인인 거창신씨(居昌愼氏)는 노
비(奴婢)로 내쳐졌으나, 예종(睿宗)이 임금에 오른지 14개월 만에 승하(升遐)하
고 성종(成宗)이 즉위(卽位)하자, 노비에서 풀어주고 신분(身分)을 복원(復元)시
켜 강보(襁褓)에 싸인 아들 강한(姜漢)을 데리고 모두 함양(咸陽)으로 유배(流配)
를 보냈다.
▲ 금탄계곡의 벼랑바위에는 여러 문구가 새겨져 있으나 내용을 알기가 어렵다
이때 거창신씨(居昌愼氏)가 아들 강한(姜漢)을 강보(襁褓)에 싸서 데리고
와서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 함양군(咸陽郡) 휴천면(休川面) 목현리(木峴
里) 나무골이다. 이곳에서 함양군의 다른 곳으로 가려면 오도재(悟道嶺)
나 지안재를 넘어야만 갈 수 있다. 어릴때부터 영특(英特)했던 강한(姜漢)
은 예모(禮貌)가 뛰어나고 필법(筆法)이 정묘(淨妙)하여 붓글씨를 정말 잘
썼다.
▲ 오늘날의 목현리 마을 - 현재는 휴천면 소재지이다
▲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구송 - 천연기념물 제358호
열 여섯 살 때 이웃 사람이 상소문(上疏文)을 좀 써달라고 해서 대필(代筆)
을 하였는데, 성종(成宗)이 그 글씨를 보고 너무 감탄(感歎)해하면서, 이 글
을 쓴 사람을 찾아서 궁궐로 데려오라는 어명(御命)을 내렸다. 글쓴이를 찾
았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가마를 보내 궁궐로 불러들여서 성종(成宗)임금이
강한(姜漢)을 친견(親見)하시고 종이와 붓을 주며, 글을 써보라 하심에 눈물
을 뚝뚝 흘리며 글을 썼다. 성종이 그 연유를 물은 즉, "소인은 함양(咸陽)시
골에 사는 강한(姜漢)이라는 놈인데, 저의 아비 강이경(姜利敬)은 군위현감
(軍威縣監)으로 있다가 남이(南怡) 장군과 함께 무고(誣告)에 의하여 역적
(逆賊)으로 몰려 죽었습니다." 라고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여, 신원
복원(伸冤復元)되었다. 성종(成宗)은 강한(姜漢)에게 중국 사신(中國使臣)
을 접빈(接賓)하는 역할(役割)(=布衣로서 使臣接伴使에 從事)을 맡기기도
했다.
▲ 물이 마른 금탄계곡 - 현재는 특리천 이라고 부른다.
연산군(燕山君) 2년(1496) 43세의 늦은 나이로 병진증광사마시(丙辰增廣司
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급제하여 관리(官吏)가 되어 지례(知禮; 知禮縣
은 1895년 知禮郡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金泉郡에 병합되었
다), 고산(高山; 高山縣은 1914년 全州郡에 병합되어 없어진 縣으로, 1935년
全州邑이 全州府로 승격되면서 全州郡이 完州郡으로 개칭되었다.) 현감(縣
監)을 지냈다. 중종(中宗) 13년(1518) 1월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3월
에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 청금정(聽琴亭) ; 들을-청(聽), 가야금-금(琴), 정자-정(亭)
▲ 聽琴亭 액자 -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쉬는 정자
이후 연산군(燕山君)의 폭정(暴政)에 시달리며, 모친상(母親喪)까지 겹쳐 벼
슬을 버리고, 두류산(頭流山) 동북쪽 산음현(山陰縣=現산청군) 필봉산(筆峰
山: 해발 858.2m) 아래에 청금정(聽琴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며 서재(書齋)
를 금재(琴齋)라 이름짓고, 가야금과 글쓰기로 여생(餘生)을 보냈다.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 1478~1543)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
을 때, 강한(姜漢)을 찾아와 교유(交遊)하다가 강한(姜漢)의 덕을 흠모(欽慕)
하고 존경(尊敬)하는 의미로 강한(姜漢)의 서재(書齋) 뒤 문필봉(文筆峰; 지
금의 필봉산)을 강한(姜漢)의 성(姓)과 마지막 관직(官職) 재임지(在任地)인
고산현(高山縣)에서 명칭을 따서 강고산(姜高山)이라 불렀다. 이후 계속 후
학에 힘쓰자 세인(世人)들도 그산을 강고산(姜高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
강고산이 지금은 필봉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685m 높이의 봉우리를
조금 변한 이름으로 "강구산"이라 부르고 있다.
▲ 필봉산 858m 표시가 있고, 오른쪽 이름없이 높이 685m만 표시한 산이 강구산이다
*▲ 이 지도에는 필봉산, 강구산이 모두 표시되어 있고, 정자표시(청금정)도 있다.
▲ 필봉산 최고봉 표지석
그의 문하(門下)에서 확계 정옥련(蠖溪鄭玉堅 : 1450~1526), 수헌 권오복
(睡軒權五福 : 1467~1498), 호음 정사룡(湖陰鄭士龍 : 1491~1570) 등이
배출(輩出)되었다.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독실(篤實)하였으며 예모(禮
貌)가 뛰어나고, 붓글씨 솜씨가 정교(精巧)하여, 당대(當代) 문필가(文筆家)
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존경(尊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강한(姜漢)의 저서
로는 아동교육용(兒童敎育用) 수신서(修身書)인《동몽수지(童蒙須知)》가
있다.
▲ 지금은 강구산이라고 부르는 봉우리
▲ 강구산 최고봉에는 우거진 수풀로 인하여 표지석이 없다
강한(姜漢)의 묘소(墓所)는 함양군(咸陽郡) 휴천면(休川面) 목현리(木峴里)
나무골이다. 인근에 묘전(廟殿=위패를 모신 사당)과 재실(齋室=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은 집)인 사성재(思成齋)가 있다.
숙종(肅宗) 때 유림(儒林)들이 구천서원(龜川書院)을 건립하여, 그곳에 금재
(琴齋)를 배향(配享)하였다. 함양군(咸陽郡) 유림면(柳林面) 국계리(菊溪里)
화장산(花長山: 높이 585.2m) 아래에 있는 진주강씨(晋州姜氏) 재실인 추원
재(追遠齋)는 강한(姜漢)을 비롯한 강씨문중(姜氏門中) 선현(先賢)들을 모시
기 위하여 지어졌지만 퇴락(頹落)하여 근래에 새로 중건(重建)되었다.
▲ 追遠齋 ; 慶南咸陽郡柳林面菊溪里 산 3-4 금재공의 부친 군위공 묘소 아래
▲ 추원재 정문 탈원문(脫寃門) : 남이장군 역모혐의에 연좌처형 당한 억울함을 벗어나다
▲ 함양읍내에 있는 함양군 진주강씨종회회관 건물
▲ 오도재에 세워져 있는 두류산책 시비(詩碑)
頭流山色吟窓裏 (두류산색음창리)
鳴玉灘聲醉枕間 (명옥탄성취침간)
自有林皋娛歲月 (자유림고오세월)
更無魂夢到塵寰 (갱무혼몽도진환)
두류산 고운 경치 창가에서 읊조리니
명옥탄 여울물소리 베개속에 젖어드네
임고의 세월을 이렇 듯 즐기고 있으니
다시는 꿈속에라도 세속으로 나갈소냐?
♣ 林皐 <수풀-림><언덕-고, 못(저수지)-고> = 산간 숲속
林皐幸卽(림고행즉)의 준말 =부귀(富貴)할지라도 검소(儉素)하여
산간(山間) 수풀에서 편히 지내는 것도 다행(多幸)한 일이라는 뜻

첫댓글 조상의 가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 잘 읽었습니다. 세세히 설명해주시느라고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두류봉의 글에 첫댓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재 강한(琴齋姜漢), 남명 조식(南冥曺植), 개암 강익(介菴姜翼) - 이 세 분은
두류학맥(頭流學脈)의 선구자이면서 창시자입니다. 이 세 분 중 두 분이 두류봉
문중 직계 어른입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산청군 금서면을 답사는 못해봤지만 공기맑고 산천 좋은곳이란 것은 익히 알고있으나
주신자료에서 마음가득 힐링해 봅니다.
소가 엎드려있는 와우형마을 이라는 깊은뜻도 새삼알게 되였구요...!
시인이셧던 선조님의 자손이라서 그런지 글도 잘쓰시고 참 훌륭하신 자손이십니다.
산청군(山淸郡) 금서면(今西面)에는 우리나라 유일한 전통의약인 동의보감촌(東醫寶鑑村)이
있는 곳입니다. 지리산에서 채취한 풍부한 여러 약재와 이런 풀을 먹고 자란 흑돼지 등 가축으로
만든 약용음식이나 전통의약품은 너무 유명합니다. 이런 산수 환경에서 배출된 우리의 선조들 중에서
유명 학자들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