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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Thomas Stearns Eliot( T. S. 엘리엇 1888- 1965)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활동하였다.
20세기 모더니즘을 이끈 대표적인 시인으로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방식의 시적 기교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펼쳐 나갔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T. S. 엘리엇은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20세기 시와 비평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1922년
그의 시 〈황무지〉가 출판되었을 때,
이 작품은 '새로운 시'의 동의어로 여겨졌고,
그 '새로운 시'의 의미가 '모더니즘'을 지칭하게 되었을 때는
모더니즘 시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대시를 지배했다.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은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은 사업가였으며,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스는 시인이었다.
엘리엇이 태어났을 때 부부는 40대였고,
엘리엇 위로 4명의 누나가 있었다.
시인이었던 어머니가
아이들 양육보다 문학이나 자선 활동과 같은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었던 탓에
늦둥이였던 토마스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토마스가 자라면서
조숙하고 남다른 지적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어린 아들에게
역사와 문학, 철학 등의 책을 읽히고
시를 쓰도록 독려했다.
모자는 문학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있었고,
토마스는 평생 어머니와 편지를 나누고, 어
머니에게 시를 바치는 등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인정받지 못한 시인이었던 어머니의 시극 《사보나롤라》에
서문을 붙여 출간해 주기도 했다.
유년 시절에는
세인트 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와 뉴잉글랜드의 밀턴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906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불문학을 전공했다.
4년의 학부 과정을 3년에 마쳤으며,
이때 프랑스 상징주의, 특히 라포르그에 심취했다.
졸업 후 1년 만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에는 프랑스의 소르본 대학,
독일의 마르부르크필리프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프랑스어, 독일어, 산스크리트어, 인도 철학, 독일 철학, 그리스 철학 등을 공부했으며,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15년,
시인이자 비평가인 에즈라 파운드의 추천으로
〈포이트리〉 지에
〈앨프리드 프루프록의 연가〉(이후 〈프루프록의 연가〉)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는
노년의 화자 프루프록의 내적 독백을 통해
현대 문명의 잔인성과 메마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자아의 상실과 회복을 위한 자아 성찰을 그린 작품이다.
엘리엇은 비평가로서 '객관적 상관물'의 개념을 공식화시켰는데,
객관적 상관물이란
'어떤 특정한 정서를 나타낼 때 공식이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이런 시적 방법론과 시인으로서의 주요 관심사와 정서는
초기 시인 〈프루프록의 연가〉에서부터 이후의 시들에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엘리엇은 1915년
비비언 헤이우드와 결혼했으며,
런던에서 교직 생활을 하면서
서평을 잠시 쓰다가 이듬해 로이드 은행에 입사했다.
그는 약 9년간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에고이스트〉 지의 부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프루프록의 연가〉를 보고
'최초의 현대적 작품'이라고 일컬었던 에즈라 파운드는
엘리엇이 시에만 몰두하기를 바랐고,
그를 후원하는 인물들을 모아 생활을 후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엇은
은행 일과 시작(詩作)을 병행하는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내성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에
신경쇠약 증상까지 있던 엘리엇에게
이 두 생활을 양립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현실 생활과 문학 생활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1922년 10월
엘리엇은 계간지 〈크라이테리언〉을 창간하고 편집을 담당했으며,
이 잡지에 〈황무지〉를 발표했다.
433행의 이 장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황무지로 상징화한 것으로,
라틴어, 희랍어, 산스크리트어 등 6개 언어를 사용하고,
셰익스피어, 단테, 보들레르 등 고전 시구에 대한 암시와 인용을 비롯해
J. S.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J. L. 웨스턴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 등에서 나타나는
제의, 성배 전설 및 신화와 종교적 관점, 성경 등을 토대로 한 수많은 상징으로 뒤덮여 있다.
역사와 문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화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로 재편성하는
엘리엇의 작품 세계가 확립된 작품이다.
또한 엘리엇은
낭만성을 제거하고
철저하게, 병적일 만큼의 정확성과 논리성, 지적인 태도를 지니고
언어와 다양한 자료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시를 썼는데,
이는 그의 비평론적 태도이기도 하며,
이후의 소설, 희곡, 예술 비평의 주요 방식이 된다.
〈황무지〉가 발표되었을 당시
평론가들은
시의 난해함과 새로움에 당혹해 마지않았으나,
젊은이들은 오히려 엘리엇의 시에 담긴 염세적인 정서와
새로운 시적 기교에 열광했으며,
현대의 정신을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엘리엇을 '시대의 대변인'으로 추앙했다.
1925년에
엘리엇은 로이드 은행을 그만두고,
파버 앤드 파버 출판사의 이사로 일했다.
1927년에는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고 영국으로 귀화했다.
그리고 영국 국교도로서의 종교적 시각을 투영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재의 수요일〉(1930), 〈사중주〉(1943) 등이 그것이다.
또한 엘리엇은 이 시기부터 무대 상연을 고려한 시극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시들은 시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가 된다.
〈바위〉(1934),
〈대성당의 살인〉(1935),
〈칵테일 파티〉(1950) 등이 대표적이며,
이 작품들은 연극으로도 공연되었다.
비평 분야에서도
엘리엇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문학적 취향을 재규정했다.
예술에 있어 낭만성을 배제하고 고도의 지적 사유를 좇으며,
존 던과 같은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칭송한 그의 비평론은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모호성과 도덕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대 고전주의의 비평 체계를 수립했다.
비평집으로는
《단테론》(1929),
《시의 효용과 비평의 효용》(1933),
《고금 평론집》(1936) 등이 대표적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엘리엇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당시 그는 시극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하면서
시극 〈가족의 재회〉가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고,
전쟁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전후의 혼란스런 상황,
정신질환 성향이 있던 아내와 불화 끝에 결별을 한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3
0년 전부터 지녀온 유럽 문명에 대한 회의,
미래에 대한 염세적인 관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계속 시를 써 나갔고,
말년의 걸작 〈사중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전쟁 후 그는 엄청난 명성을 누리며 행복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해 영국의 문화훈장인 메리트 훈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의 시극들은 계속 무대에 올려졌고,
특히 말년의 대표작 〈칵테일 파티〉가
브로드웨이에서 200회 이상 공연 기록을 세우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1947년 아내 비비언이 세상을 떠난 뒤,
1957년에는 8년간 비서로 일하던 29세의 발레리 플레처와 재혼했다.
1965년 1월 4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유해는 고향 이스트 코커의 성 마이클 교회에 안장되었다.
2년 후 영국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구역에
엘리엇의 기념석을 놓았다.
44. André Malraux (앙드레 말로 1901- 1976)
반식민운동과 중국 혁명운동, 반나치스 운동에 참여하여
지성과 행동의 결합을 추구한 행동주의 작가이다.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반식민운동과 중국 혁명운동, 반나치스 운동에 참여한 혁명가, 정치가이기도 하다.
《인간의 조건》,
《희망》,
《왕도》,
《예술심리학》 등이
대표적인 저술로,
말로는 자신의 행동 원리를 작품을 통해 표방하면서,
프랑스 '행동의 문학'의 표본으로 꼽힌다.
앙드레 말로는 1901년 11월 3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르낭 말로는
은행가로, 프티 부르주아 계층에 속했다.
아버지의 여성 편력 때문에 부모는 그가 4세 때 별거를 시작했고,
앙드레는 어머니를 따라
파리 교외의 봉디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외가에서 자라났다.
독서와 몽상으로 하루를 보내는 등
유년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그는
"내가 아는 작가 대부분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사랑하지만, 나는 너무도 싫다."
라고 말할 만큼 자신의 성장 과정에 대해 밝히기를 꺼렸다.
17세 때
콩도르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입학자격고사에 실패했는데,
재도전하지 않고 아예 대학 입학을 포기했다.
이후 2년간 독학했다고 하는데,
어떤 공부를 어느 정도로 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 때
말로는 라 코네상스(La Connaissance, 지식)라는 책방 겸 출판사를 들락거리면서
고서적을 수집하고,
주인인 르네 루이 두아용이 창간한 잡지 〈라 코네상스〉에 참여했다.
이 잡지에 〈입체파 시의 기원〉이라는 상징주의에 관한 첫 비평을 실었으며,
이후에도 〈악시옹〉이라는 좌파 성향의 비평지에 비평을 게재하면서
문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이런 활동과 라 코네상스를 통해 문인, 예술가 들과 교제했다.
1921년,
클라라 골드슈미트와 결혼하고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또한 이 무렵에 말로는 동양 고미술품을 주로 관리하는 기메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 등지에서
동양학 관련 강의를 듣고,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할 정도로 동양 고미술 연구에 관심이 컸다.
1923년,
아내 클라라와 함께 북라오스 고고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가기도 했다.
이곳에서 그는 조사단과 헤어져 독자적으로 크메르 문화 유적을 발굴했는데,
그 과정에서
신상 부조 몇 점을 떼어 내어 도굴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징역 3년형을 받았으나
클라라가 파리로 먼저 돌아가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앙드레 지드, 마르탱 뒤 가르, 앙드레 브르통, 가스통 갈리마르 등의 지식인들이
구명에 힘을 보태 간신히 석방되었다.
판결이 내려지는 동안
말로는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에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석방 후인 1925년 1월,
말로는 자신의 석방에 도움을 주었던 변호사 폴 모냉과 함께
사이공에서 〈랭도쉰느(L'Indochine, 인도차이나)〉를 창간하고,
인도차이나 현지에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을 도우면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시작했다.
또한 중국 공산당과도 관계를 맺으면서,
공산당과 연계하고 있던 국민당 정권에 협력했다고도 하는데,
이 부분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당시 그의 홍콩행은 활자를 사기 위한 것으로 광둥 혁명, 상하이 쿠데타와는 무관하다고도 한다).
〈랭도쉰느〉는 결
국 정부의 탄압으로 11월 폐간되었으나
인접한 중국의 민족 해방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26년,
귀국한 말로는 〈중국 청년으로부터의 편지〉(그해 단행본으로 보완되어
《서양의 유혹》으로 출간되었다)를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발표했다.
한 중국인과 프랑스인이 주고받은 서간 형식을 취한 문명론적 작품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느낀 서유럽 지성의 한계를 문제 삼고 있는 작품이다.
1928년에는
광둥 혁명을 배경으로 한 소설 《정복자》를 출간하여
그해 최고의 책,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일컬어지며
대중적 인기와 평단의 찬사를 동시에 얻었다.
1930년에는
크메르 유적을 찾으면서 겪은 자신의 모험담을 모티프로 한
두 번째 소설 《왕도》를 출간했으며,
이 작품으로 앵테랄리에상을 받았다.
그리고 1933년
《인간의 조건》이 출간된다.
이 작품은 1927년, 장제스가 공산당을 이용해 상하이에서 북방 군벌을 몰아낸 직후
공산당을 축출한 상하이 쿠데타를 배경으로 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견딜 수 없는,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고뇌와 허무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인간 조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 군상을
독립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컨대 테러리스트 첸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장제스를 죽이려 하고,
카토는
혁명에, 메이는 연애에, 지조르는 아편에 취하는 것이다.
이 작품으로
말로는 공쿠르상을 수상하면서 문
단에서 확고하게 지위를 굳혔으며,
행동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게 되었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나 숙명론적 사상,
선과 우주 합일 사상 등에서
이 작품은 동양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데,
이를 통해 말로가 동양 문화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보였으며,
1931년 클라라와 함께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데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33년 1월 30일,
독일에서 히틀러의 국가사회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말로는 3월,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모임인 작가예술인연맹에서
독일 파시스트에 대항하고 전쟁을 막고자 모든 수단을 불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에는
혁명 작가로 초청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수용소 생활을 다룬 《모멸의 시대》를 출간하기도 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그는 클라라와 함께 스페인으로 간다.
공화파에 가담해 국제의용군 항공대 비행대장으로 참전했는데,
르포르타주 문학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희망》은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쓰인 것이다.
1939년에
독소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자
말로는 공산당과 절연하였으며,
1940년 5월에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전차병으로 참전했다.
6월에는
독일군에 포로로 억류되었으나
동생 로랑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탈출해 남부 자유 지역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사르트르, 보부아르, 클로드 부르데 등과 교류하고,
《천사와의 싸움》(《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 제1부, 이후 집필 중단),
《절대의 악마》, 《예술심리학》 등을 집필했다.
또한 이 시기에 애인인 조제트 클로티와의 사이에서
아들 피에르 고티에와 뱅상을 낳았다.
1942년 무렵부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알자스-로렌 부대의 지휘를 맡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부상을 입고 독일군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처형 직전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둘째 동생 클로드는
레지스탕스 운동 중 독일군에 체포되어 처형되는 비극을 겪는다
(이듬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헌신하던 동생 로랑 역시 나치 수용소에서 처형당한다).
또한 그해 애인 클로티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했다.
알자스 전선에서
드골의 신임을 받게 된 말로는
1945년 종전 후 드골이 집권하면서 정치가의 길로 들어선다.
드골 내각에서 정보상으로 활동했으며,
1946년
드골 퇴진과 함께 정계에서 물러났다.
프랑스국민연합 창당 때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정신의 자유〉 지를 창간했고,
갈리마르 사의 〈형태의 세계〉 시리즈를 기획했다.
또한 〈르 라상블르망〉에 사설을 쓰고,
《예술심리학》을 출간하는 등
집필 및 예술 연구 활동 역시 활발히 했다.
1958년
드골이 알제리 문제로 다시 정계에 복귀하자
이듬해 제5공화국에서 문화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69년 3월
드골이 하야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베리에르 르 뷔송에 은거하면서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67년
자서전인 《반회고록》 제1부를,
1971년에는
드골에 대한 회고집 《쓰러진 떡갈나무》 등을 발표했다.
1974년
뉴델리에서 네루 평화상을 받았다.
1976년 11월 23일,
폐병으로 파리 교외의 앙리 모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초 장례는 개인장으로 치러졌으나
루브르에서 국가적 추모 행사가 거행되었으며,
1996년 사후 20주년을 맞이하여 유해가 국립묘지인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