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절에서 11절까지의 진술을 다시 실제의 삶에 적용하는 주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 혹자는 성도가 성령께 빚진 자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도록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장차 받게 될 모든 축복과 비교할 때 성도가 빚진 자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빚진 대상'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게 된 것은 그 대상을 바울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런데 본절의 '빚진 자'를 '성령'께 빚진 자로 해석하게 되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다. 오히려 성도는 구원의 전과정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께 빚진 자다. 특히 1:14에서 바울은 자신을 복음에 대하여 빚진 자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하여 빚진 자라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본 구절은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다. 그리고 이 제안은 13절과 14절에 의해 더 보충되고 있다. 본 구절만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바울의 이 제안은 다시 7장과 같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냐하면 7:24의 절규는 성도가 육신대로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7:24과 같은 비참한 경험후에 성도가 자포 자기하여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를 그만두는 것과 관련된다. 성도는 현실 삶에서 죄와의 투쟁 가운데 절망을 겪지만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 절망을 극복하셨으므로 그에 의해서 극복된 축복을 소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성도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보장된 승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고 그토록 심각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에 예수 믿기를 포기하면, 이것은 곧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사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육신에게 져서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망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구원을 성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엡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롬 8: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롬 8:15"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비슷한 의미로 딤후 1:7에서는 '두려워하는 마음'(프뉴마 데일리아스)이 언급되고 있다. 성도를 두렵게 하며 속박하는 것은 율법이다. 성도는 율법에서 해방됨과 동시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과 속박에서 벗어났다.
결국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성도를 정죄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신분이므로 결코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보다 왕과 백성의 관계로 더 많이 이해되었다
.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가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언급되었을지라도 신약 시대처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양자(養子)의 원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그 근원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마 6:9;막 14:36). 그리고 바울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친다.
성령께서 성도 가운데 거하심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으로 인쳐 주시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예레미아스는 '아멘 아멘...'의 형식과 함께 '아바 아버지'란 용어가 '예수의 고유한 언어 구사 방법'라고 주장한다...29 주제 강해 '예수의 언어 사용에 나타난 자기 계시' 참조).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바 아버지'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는데,
이는 (1)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철저한 복종과 긴밀한 관계, (2) 아들로서의 권위를 나타낸다. 예수는 이와 같은 용어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는데 이 용어는 신약 시대의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대변해 준다. '아바'는 어린아이의 언어에서 유래되었다. 탈무드에 언급된 "어린이가 젖을 떼면서 밀맛을 볼 때에 '아바'와 '임마' 곧 '아빠'와 '엄마'란 말을 배우게 된다"란 구절이 그 사실을 잘 암시한다.
그리고 탈굼역도 사 8:4을 "어린이가 '아바'와 '임마'라고 부르기를 배우기 전에"로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바'는 매우 친밀한 언어로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만 알았던 유대인들은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없었으며 기도 형식의 문헌에조차 결코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부자관계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아바'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친히...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본절은 성도가 '양자의 영'을 받은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즉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거받는다.
이에 대해 칼빈은 말하기를 ,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차 있을 때에만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롬 8: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자녀이면...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 혹자는 '자녀'와 '후사'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자녀'는 가족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며 '후사'는 상속과 관계되는 용어이다. 바울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성도의 권세를 본절에서 강조하고 있다. 성도는 하나님과 가족 관계에 들어가 그 가족의 구성원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하나님의 후사로서의 권세도 동시에 가진 신분이다.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이 고난은 마음의 법과 죄의 법이 서로 투쟁함으로써 비롯되는 내적인 고난일 수도 있으며 의를 인하여 필연적으로 받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받는 고난일 수 있다. 어떤 의미의 고난이든 그것은 잠시 동안 받게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성도에게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