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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16 송광사와 효봉대선사
자유인 조동화는 오전내내 따뜻한 아랫목에서 둥굴둥굴 누워서 망중한하며 쉬다가, 국립철도학교 동기생 오랜친구 정용회의 초청으로 송광사를 답사한 기억이 생각 나 송광사의 큰 스님이셨던 1966년 입적한“효봉대선사” 이야기를 해 볼까 혀.
조동화는 스마트디지털 세상을 항해하며 효봉스님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다.
인생이 뭐여.
자기 신념데로 살다 가는거여.
시대의 아픔을 걸머지고 출가한 효봉스님!
속세에서 아내와 아들딸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풍요롭게 살수도 있었던 효봉스님은 고행을 낙 삼으며 출가한 사연 궁금하구먼.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 셋을 버리고, 출가했을까?
세속의 우러러 보는 판사직을 던지고,
화려한 세속의 권력과 명예, 아내와 어린 세자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하여 오직 수행에 정진한 효봉 스님의 삶 들어볼만 하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천명(天命)이라네.
하늘에 달려 있는거여.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마치 죽지 않을것 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100세시대에 행복을 느끼며 추억 여행하자구.
그도 인간이기에 나이가 들어 78세에 사망하였지.
오후가 되어 노상 하던 습관데로 모현공원에 운동을 나가 모현공원 트랙 두바퀴, 헬스 운동기구 있는곳에서 훌라후프 3000회 역기내리기 30회씩 2회하여 천연보약으로 두어시간 운동하고 집에오니 몸이 홀가분하니 좋았다.
훌라후프는 실내, 실외 할 것 없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장기능 향상, 체내 노폐물 배출, 변비 예방, 심폐 강화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하네요.
조동화의 벗님들!
누죽걸산이란 말이 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뜻의 줄임말"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노후의 건강은 집 이서 누워서 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몸을 귀찮게 움직여 땀 흘리는 것이 최고의 건강비법입니다.
건강합시다.
행복합시다.
감사합시다.
<오랜친구 국립철도학교 동기생 정용회 조동화 송광사 일주문에서 기념사진을 남기었다.
송광사 일주문에는 ‘조계산대승선종송광사(曹溪山大乘禪宗松廣寺)’와 ‘승보종찰조계총림(僧寶宗刹曹溪叢林)’ 편액이 걸려 있어 송광사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선종사찰이며 승보종찰 조계총림을 말해주고 있다.
순천 송광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승보 사찰로 유명하고, 삼보사찰(三寶寺刹)은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셋을 가리킨다.
순천 송광사는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승보사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내와 어린 세자녀를 버리고 출가한 효봉스님 이야기
“인생은 왜 사는가?
모두가 자기만의 인생이 있기 때문에 바쁘게 살아가는거여.
조동화는 효봉스님의 삶을 조명해보았제.
효봉스님은 왜 스님이 되었는가?
1888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여,
1966년에 표충사에서 입적한 효봉스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신동소리를 들어가며, 화려한 세속의 권력과 명예, 아내와 어린 세자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스님이 된 이야기 들어볼만 하제.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과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을 지내셨던 효봉스님은, 한국인 최초의 판사 생활을 하였으나 인생에 대한 회의를 절감하고 출가 하시었다.
38세 늦깎이로 삭발 출가하여 우리나라 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신 효봉(曉峰)스님은 구산(九山)스님과 법정(法頂)스님의 은사로 잘 알려져 있다.
효봉스님은 1888년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출생. 속명 이찬형(李燦亨). 법명은 원명(元明). 법호는 효봉(曉峰).
1966년 10월 15일 세수 78세, 법랍 42세로 입적.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시었다.
1966년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서 입적(사망)하였는데, 입적 당시 32개의 사리가 나왔다.
영결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졌고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과 해인사 가야총림의 방장을 지내셨던 효봉스님은, 한국인 최초의 판사 생활을 하였으나 인생에 대한 회의를 절감하고 수행의 길에 올라 일생을 오직 철두철미하게 수행정진에만 전념하셨던 근세 한국불교의 거봉이다.
파란만장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드높이 숭고한 정신의 세계를 보이셨으며, 해방 이후 흔들리는 불교계를 바로잡아 정화와 중흥불사의 기반을 이룩한 효봉스님의 삶은 구도자의 영원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효봉스님은 와세다대학 법학부 졸업, 10년간 법관 생활 중 부귀영화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아내와 어린 세자녀에 말도 없이 속세와 단절, 3년간 엿장수 변신 방황하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된 이야기다.
효봉 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부 진향리 54번지에서 수안 이씨(遂安 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김씨를 어머니로, 5형제 중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찬형(燦亨)
어려서부터 유달리 영특해서 이웃 간에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열두 살 때까지 선비인 할아버지로부터 <사서삼경>배웠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에게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귀여워했던가는 다음 일을 미루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스님이 열세 살 되던 정월 보름날, 동무들과 밖에서 연을 날리다가 집에 돌아와 인절미 세 개를 먹은 것이 그만 갑작스럽게 체하여 빈사의 지경에 빠졌다. 의원들이 와서 보고 최후의 수단으로 정수리에 쑥을 뜨고 했지만 깨어나지 않았다.(스님의 정수리에 그때 쑥으로 뜬 흉터가 남아있다.)
집안에서는 울고불고 하던 끝에 아주 죽은 줄 알고, 이불에 말아 한쪽에 치워놓았다. 귀염둥이 손자가 죽은 것을 보고 상심한 할아버지는 홧김에 폭음한 나머지 그 길로 돌아가셨다. 집안이 온통 뒤집혀 있는데, 그때 마침 밖에 나갔다 돌아온 삼촌이 부득부득 조카의 시체를 보겠다고 이불을 헤졌다. 그러자 죽은 지 스무 시간이 넘은 몸에 맥이 돌고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스님은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래도 그때 할아버지의 운명을 대신 받고 살아난 것 같다.’
열네 살 때, 연례적으로 평양감사가 베푼 백일장이 있었다. 사방에서 모인 수많은 재동(才童)들이 글재주를 겨루는 마당. 이때 스님은 어린 소년으로서 장원급제의 영광을 차지했다고 한다.
☛아내와 아들딸 셋을 두고 세속의 우러러 보는 판사직을 던지고 출가(出家)하다
스님은 평양고보를 나온 뒤, 개화의 흐름을 따라 청운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안팎 어려운 한말(韓末), 젊은이의 꿈은 인간사회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법에 관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세속적인 출세의 첩경이라고 부모들은 인식했으리라.
스물여섯 살에 와세다를 졸업하고 귀국, 이로부터 서른다섯 살까지 10년간(1913~1923)을 법관 생활로 보낸다.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에서, 그리고 평양의 복심법원(지금의 고등법원)에서 한국인으로서는 드문 판사직에 종사하였다.
이때는 일제의 잔악한 식민지정책이 날로 그 이빨을 드러내던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는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뜻있는 인사들은 방방곡곡에서 일제에 항거, 민족 독립의 기치를 들었다. 그러자 일제는 사상범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 무렵 젊은 법관은 같은 겨레로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사상법을 다루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양심의 소리가 움트기 시작했다. 그러한 하루하루의 생활은 누구에게 입 벌려 말 수도 없는 잿빛 고뇌였다. 한국인의 처지에서 그 당시 법관의 자리는 실로 화려한 지옥이었다.
1923년 나이 서른여섯 살 때, 법관 생활 10년째 되던 해. 스님은 하나의 절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판사가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증오의 눈으로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던 사형수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법관으로서 최초로 내린 사형 선고! 어떤 사건의 결과, 그 자료와 증거에 의해서 직책상 사형을 선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한 인간의 눈에 대고 사형을 선고한 그 순간부터 자신의 처지를 회의하고 나아가 인간의 사회 구조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가 있는가? 범부인 내가 어떻게 같은 인간을 벌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가.
지난날 찬란하던 청운의 꿈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스님은 꼬박 사흘 동인 이 인간적인 자책 앞에 식음을 전폐하고 밤을 새워 고뇌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가장 깊은 내심에서 우러나왔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입은 옷에 맨주먹으로, 물론 직장에 사표를 내던질 여유도, 어린 세 자녀를 거느린 아내에게 작별을 알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대개 출가의 경우가 그렇듯이, 일단 마음이 작정되면 한시도 더 치제하기가 어렵다. 출가에 대한 생각뿐. 그 밖의 일들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때의 사형 선고는 결국 자신에 대한 선고이기도 했다.
부귀영화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엿장수로 변신하여 3년여를 떠돌다가 나이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삭발 출가하였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들고 참구했던 효봉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너나 잘해라 스님’등
별명도 많았는데,
별명 마다에는 다 그만한 사연이 있다.
첫 번째 얻은 별명
‘엿장수 중’은 효봉스님이 평양에서 잠적, 가족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은 체 서울로 내려와 양복을 벗어서 판돈으로 엿판을 마련하고 엿장수가 되어 정처 없는 방랑길을 걷다가 나중에 엿판을 짊어진 체 금강산에 들어가 삭발 출가해 얻은 별명.
스님은 출가 당시 당신의 학력과 과거 행적을 완전히 숨기고 오직 ‘못 배운 엿장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으므로 모두들 스님을 ‘엿장수 중’으로 불렀다.
그 후 같은 법원에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절에 왔다가 우연히 스님과 조우, 그동안 숨겨왔던 판사 전력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스님은 ‘판사 중’으로 불리게 되었고 사찰의 법률문제만 생기면 효봉스님을 찾게 되었다.
이에 스님은 이 일이 번거로워 금강산을 떠나 남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그 덕택에 남북분단 후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은, 수행을 했다 하면 절구통처럼 꼼짝하지 않고 철저히 했으므로 엉덩이가 짓물러 깔고 앉은 방석이 엉덩이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독한 수좌라는 뜻에서 절구통 수좌로 불렀다.
☛효봉스님 일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얽힌 세속을 끊고 뛰쳐 나온 스님에겐 생사의 고뇌에서 해탈하는 일만이 지상의 과제였다. 용맹심을 일으켜 화두를 타파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화두란 옛 조사들의 말에서 이뤄진 것으로, 참선하는 이가 참구해야 할 과제를 말한다. 스님은 ‘조주 무자’로서 평생 화두를 삼았다. 그리고 남에게 화두를 일러줄 때도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이 무자 화두를 일러주곤 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를 통해서 이 무자 화두만큼 공부하는 이의 눈을 많이 띄워준화두가 없다고 하였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에서 안거에 들어갈 때 스님은 미리 대중에게 알렸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 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은 할 수가 없습니다. 입선, 방선도 경행(徑行)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서 배기겠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통고하고 나서 스님은 꼬박 한철(석달) 동안을 아랫목 뜨거운 자리에 앉아 정진했다. 한번은 공양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엉덩이에 무언가 달라붙는 게 있어 돌아보니 엉덩이 살이 헐어서 진물이 흘러 가사와 방석이 달라붙어 있었다. 살이 허무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에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히 위법망구의 정진이었다. 목욕할 때면 그때의 흉터가 커다랗게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은 그 뒤부터 더운 방을 싫어하였다. 스님과 함께 방을 쓰면 제자들은 늘 추워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효봉 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선원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용맹스럽게 수행을 계속했다. 밤에는 눕지 않고 앉은 채 공부하고, 오후엔 먹지도 않았다.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때부터 ‘절구통 수좌’라고 별명이 생겼다.
출가한 지 다섯 해,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스님은 초조했다. 자신의 두터운 숙세의 업장과 무능을 한탄했다.
대중이 여럿이 거처하는 처소에서는 마음껏 정진하기가 어려웠다. 스님은 고심 끝에 토굴을 짓기로 결심했다. 금강산 법기암 뒤에 단칸방의 토굴을 짓고, 한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을 뚫어 밖으로 내고, 밥이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창문 하나만을 내었다. 그리고 스님이 방에 들어 앉은 뒤 밖에서 벽을 발라버리도록 일렀다.
1930년 늦은 봄, 스님의 나이 마흔세 살 때,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다시는 토굴 밖에 나오지 않으리라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갔다. 그것은 결사적인 각오였다. 그,때 가지고 들어간 것은 입은 옷에 방석 석 장뿐, 하루 한끼 공양을 들여보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제 스님에겐 기쁨도 슬픔도, 현하고 괴로움도, 먹고 입고 자는 일도 다 아랑곳 없었다. 오로지 무자 화두를 타파하기 위한 용맹정진이 있을 뿐이었다. 일체 인간의 풍속권 밖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암자와 토굴과의 움직임은 하루 한끼씩 공양을 토굴 안으로 들여주는 일, 그날 빈 그릇을 챙기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주는 일뿐이었다. 인기척 없는 토굴 안, 그 전날 밥그릇이 비어 있는 걸 보고 살아있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 밖에서는 토굴 안의 동정(動靜)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지나갔다. 그리고 새 봄. 하루는 시자가 공양을 가지고 가니 그 전날 놓아둔 공양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
이 소리에 스님은 비로소 어제의 공양이 창문 입구에 있는 것을 의식했다. 그 전날부터 공양이 온 줄도 모르고 선정삼매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1931년 여름, 비가 개인 어느 날 아침. 드디어 토굴벽이 무너졌다. 1년 6개월 만에 토굴에 들어갔던 스님이 벽을 발로 차 무너뜨리고 나온 것이다. 필사적인 정진 끝에 열린 바가 있었다. 더 의심할 것 없이 이만하면 나가도 되겠다는 신념이 생긴 것이다.
토굴 밖으로 나선 스님은 한 발자욱도 떼어 놓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1년 반 만에 걷는 걸음이라 어린애처럼 비틀비틀 걸음마를 해서 나왔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하고 손톱과 발톱은 길대로 길었다. 그새 세수 한 번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만은 환하게 빛났었다고 전한다.
그 때의 심경을 노래한 오도송은 이러했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海底燕巢鹿抱卵]
타는 불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火中蛛室魚煎茶]
이 집안 소식을 뉘랴서 알랴[此家消息誰能識]
흰 구름은 서족으로, 달은 동쪽으로[白雲西飛月東走].
<효봉 스님 법어집> 중에서
효봉 스님과 손자의 만남
효봉 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머리를 깎으면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본명과 속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낸 적이 없는데, 찬형이라는 본명과 두 아들 영발이와 영실이의 이름까지를 대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형이라는 본명은 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두 아들의 이름까지를 부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이 무슨 도깨비 같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게야. 대체 내게 무슨 손자가 있다고 그러는 게야.”
“방장스님의 큰 자제분 영발이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해서 보성수좌가 급히 데리러 갔습니다. 하오니 조만간 만나보게 될 것이 옵니다, 스님.”
그러나 효봉 스님은 순간 표정을 바꾸며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런 잠꼬대는 그만 해라. 다 지난밤 꿈같은 전생(前生)의 일, 꿈을 깨야지. 꿈을…”
효봉 스님은 돌아눕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자화두를 거듭 거듭 외었다. 제자들은 스님이 판사를 하다가 늦깎이로 출가했으므로 세간에 아들과 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 이름 ’이찬형’은 몰랐다. 호적이 있기는 했으나 거기에 적힌 이름은 이원명(李元明)이었으므로 그 이름이 속가의 이름인 줄로 알고 있었다.
이원명을 호적에 올리게 된 것은 금강산 여여원에 있을 때이다. 여여원에 양로원을 설립할 때 고성 면장이 찾아와서 효봉 스님에게 이사로 취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사로 등록하려면 호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적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이사에 취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고성면장이 생각다 못해 호적을 만들어주면서 도장을 달라했다. 스님은 이때 이원명이라 새긴 도장을 주어 호적에 올리고 주소는 평양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하숙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나 스님의 부인하는 태도는 수도인의 의지를 보인 것일 뿐 내심으로는 혈육의 정을 끊지 못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미래사에 있을 때 하루는 해인사 주지를 지낸 금담(錦潭)스님이 문안을 왔다. 두 노장스님은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에 쌓였던 회포를 풀면서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법담(法談)은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또 출세간으로 넘나들다가 원효대사를 만나고 있었다.
“방장스님, 설총은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영각(靈閣)에 초하루 보름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배를 했다면서요?”
“그런 말이 있지. 설총이 원효 대사 영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는 거야.”
“도인(道人)도 혈육은 못 속이는 모양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방장스님도 속가에 아들을 두고 왔다던데 아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응, 보고 싶어. 할멈은 안 보고 싶어도 아들은 보고 싶어.”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금담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효봉 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방장 스님, 저에게 도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대개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모든 것을 초탈한도인인 체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상례인데 효봉 스님이 솔직히 말해주자 금담스님은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감사하여 큰절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마음 속을 솔직히 열어 보이지 않고 전생(前生)의 일이니 잠꼬대 하지 말라며 돌아누운 것일까. 스님이 지금 보이는 도의 끝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서울로 가족을 만나러간 보성 스님이 손자 이인목과 손자며느리, 증손자를 데리고 표충사에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러나 스님이 속가에 대해 비밀을 지키려고 애써왔고, 속명이 탄로 났음에도 혈손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제자들은 굳이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싫은 상혼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족을 대면시킬 때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마치 스님을 존경하는 표충사 신도의 가족이 병문안 온 것처럼 가장(假裝)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손자 이인목은 스님을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제가 손자 인목이옵니다.”
효봉 스님은 큰절을 올리는 낯선 젊은이가 혈육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뭐 ? 영발이의 아들이라고?”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돌아누워 버렸다.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출장 가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전라도 광주에서 사시다가 2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인목이의 할머니, 바로 세속에서 인연을 맺은 부인이 2년 전에 작고했다는 말을 듣자 스님은 눈을 감았다. 실로 운명은 기구했다. 부인이 살았다는 광주와 송광사는 같은 전라도 땅이고, 그것도 바로 이웃이 아니던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이 차로 불과 한 시간 남짓 달려가면 되는 송광사에 스님이 되어 있었다니….
얼마나 한 맺힌 삶이었을까. 하루아침에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 가버린 남편. 작은 아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 때였고, 큰아들도 코흘리개 철부지였으니 전쟁 통에 남편도 없이 두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날을 한숨과 눈물로 지셨던가.
부인은 가끔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너희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기는 하실 터인데…”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행여나 행여나 하며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집 떠난 날을 제삿날로 잡아 제사는 지내면서도 문득 남편이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환상을 얼마나 그렸던가. 이러한 부인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스님은 어느 해부턴가 집을 떠나온 날은 해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님이 날짜를 챙겨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 날은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태어난 날과 이 날이었다. 시자들은 이 날을 무슨 날인지 궁금했다.
“방장스님, 오늘이 무슨 날인데 새 옷을 갈아입으십니까?”
“응, 내가 속가를 떠나온 날이야. 꿈을 꾸었는데 내가 속가에를 갔더라구나. 가서 보니 커다란 상에 음식을 골고루 장만했어. 대접을 잘 받고 왔지. 아마 내가 떠난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야.”
이렇게도 세속 인연은 질긴 것인가. 손자를 눈앞에 두고 돌아누운 효봉 스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것일까. 오랜 수행을 했으니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마음에 아무런 물결도 일지 않을까. 스님은 ‘무(無)라, 무(無)라’만을 부를 뿐 그 이상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손자며느리는 서울에서 내려오며 스님에게 잠옷을 만들어주려고 융으로 싼 옷감을 가지고 왔다. 몸의 크기를 모르니 재어보고 만들어 주려는 생각이었다. 이 당시 융은 보드랍고 따뜻해서 스님도 솜옷의 안쪽에 융을 댄 옷을 즐겨 입었다. 손자며느리는 그날 밤 꼬박 밤을 새워서 잠옷을 지었다.
손자와 손자며느리 그리고 증손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스님은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어 부쩍 무(武)자 화두를 쉬지 않았다. 그러나 기력은 마지막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물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님은 하루 한 끼 드시는 공양마저 거추장스러운 듯하였다. 오직 무(無)자 화두를 들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스승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구산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스님, 이제 곧 큰아들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일본으로 급히 연락을 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셔야지요, 방장스님!”
“공연한 소리들 하는구나. 때가 되면 가야지…”
“방장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남기셔야죠.”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하련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스님의 표정이 밝아지며 어린아이 같은 맑은 웃음이 잔잔히 입가에 돌았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다 군더더기
누가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이것이 스님의 마지막 열반송(涅盤頌)이다
“나 오늘 갈란다.”
서기 1966년 10월 15일 음력으로는 9월 초이틀 새벽 세시. 예불모실 시각에 스님은 이승과 저승의 문턱에 서 있었다.
“얘! 거기 누구 없느냐 ? 나 좀·일으켜다오.”
밤새 곁에 었던 시자가 부축해서 일으켜드리니 평소에 정진하던 자세로 가부좌를 툴고 앉았다. 그리고는 구산스님을 찾았다.
“나 오늘 갈란다.
지긋이 눈을 감고 바른손에는 손때 묻은 호두알을 천천히 굴렸다.
따르록, 따르록, 따르록…~
호두알 굴리는 소리와 화두 드는 소리가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였다.
“무라, 무라, 무라…”이렇게 시간은 무겁게 흘렀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오고갔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어서도 가부좌를 튼 자세는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전 열시. 문득 호두알 굴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졌다.
효봉스님은 이렇게 열반에 들었다. 세속의 나이 일흔 아홉, 법랍 42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신 것일까. 천황산 골짜기에서 108번의 열반종소리가 하늘로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날따라 사명대사의 추제(秋祭)가 있는 날이어서 밀양 읍내는 물론 원근의 많은 신도들과 유지들, 그리고 학생들이 표충사 추제를 시작하는 종소리로 알았으나 효봉 스님의 열반종소리임을 뒤늦게 알고 모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출처 : 효봉(曉峰) 스님 이야기(불일출판사)
*** 효봉 대종사(曉峰大宗師) 행장(行狀)과 연보(年譜) ***
* 스님의 본적은 평안남도(平安南道) 양덕군(陽德郡) 쌍용면(雙龍面) 반성리(盤城里) 금성동(錦城洞)이며,
수안 이씨(遂安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경주 김씨(慶州金氏)를 어머니로,
1888년 무자년(戊子年) 음력 5월 28일에
5남매 중 3남(三男)으로 태어나다.
* 스님의 법명(法名)은 학눌(學訥)이요,
법호(法號)는 효봉(曉峰)이며,
별호(別號)는 "엿장수 중 ", "절구통 수좌 ", "판사(判事) 중 ", "무(無)라 노장 "이라 하고,
속명(俗名)은 이찬형(李燦亨)이다.
* 1925년(乙丑年) 음력 7월 8일. 금강산(金剛山)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 보택(石頭寶澤) 선사를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지하다.
* 1932년(壬申年) 음력 4월 8일.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동선 (東宣) 화상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하다.
* 1966년(丙午年)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오전 10시.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에서 입적(入寂)하니,
스님의 세수(世壽)는 79세요,
스님의 법납(法臘)은 42년이다.
** 1888년(戊子年: 1세)
* 스님은 1888년 음력 5월 28일 해시(亥時).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반성리 금성동에서 황 해도(黃海道) 수안 이씨(遂安李氏) 병억(炳億)을 아버지로, 경주 김씨(慶州金氏)를 어머니로 5형제 중 3남(三男)으로 태어나다.
** 1900년(更子年: 13세)
* 스님은 화목한 대가족(大家族)이었던 부농(富農)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부터 남달리 영특해 신동(神童)이라 총애를 받으며 유년기(幼年期)를 보내다.
* 어린 시절부터 선비이신 할아버지께 한학(漢學)과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우다.
<* 스님의 나이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린 찬형은 정월 보름 날 평소 좋아하던 찰떡을 급 히 먹다가 관격(關格)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뜻밖에 귀여운 손자(孫子)가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본 할아버지는 몹시 애통해 하다 그만 홧김에 술을 마시고 그 길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별안간 할아버지와 손자가 동시에 변을 당하자 온 집안은 야단이 났다. 이웃 동네에 사는 삼촌이 신동이라며 늘 자랑하던 조카가 죽고, 집안의 어른까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급히 달려왔다. 귀여운 조카의 얼굴이나 한번 더 보고 매장을 하자며 우기는 바람에 다시 관을 열어 보니, 이게 어인 일인가!
숨을 거둔지 이미 20여 시간이 지났다는데도 몸에 따뜻한 온기가 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죽은 줄만 알았던 어린 찬형이 뜻밖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에 온 집안 식구들이나 친척들은 너나 없이 할아버지가 손자 대신 돌아 가셨다고 하였다. 조손(祖孫)간에 서로 바꾼 목숨이라며 또 한번 야단법석이 났다. 희비쌍곡선이란 이걸 두고 하는 말일까?
* 스님은 출가 입산(出家入山)한 후에도 가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씀하기를 그것은 필시 조손(祖孫)간에 서로 뒤바뀐 목숨이라며, 매년 이날(음. 1월 16일)을 기해 조부모(祖父 母)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재적본사인 조계산 송광사에 조부 수안 이씨 이창근 영가(祖父 遂安 李氏 李昌根靈駕)와 조모 밀양유인 박씨 영가(祖母 密陽 朴氏 靈駕)의 제위답(祭位畓) 까지 마련하여 해마다 기제(忌祭)를 모셨다.>
** 1901년(辛丑年: 14세)
* 평양감사(平壤監司)가 개최한 권학백일장(勸學白日場)인 과거시험(科擧試驗)에 응시하여 장원급제(壯元及第)하다.
<* 그때 과거시험의 시제(試題)에 "出門에 見張子房하고 問今日事가 如何오? " 라는 글제가 나왔다고 회고하면서, "子房子房 吾子房아 天地天地 誰天地냐… "라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였다 한다. 자방(子房)은 중국의 한(漢)나라를 창업한 3걸(三傑)중 한 사람인 장양(張良)의 자(字)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었다.>
** 1908년(戊申年: 21세)
* 신학문(新學文)을 수학하기 위하여 평양 소학교와 평양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일본(日本) 관선유학(官選留學) 시험에 합격하다.
<* 그 당시 일제식민지(日帝植民地)하에서 관선유학 시험이란 첫째는 출신가문(出身家門)을 보고, 둘째는 본인의 인물(人物)의 됨을 살펴보고, 셋째는 본인의 사상(思想) 등을 점검하고 선발하는 어려운 관문이었다.>
** 1913년(癸丑年: 26세)
* 일본 와세다 법과대학(早稻田 法科大學)을 졸업하고 귀국하다.
<*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 유학 길에 오른 지 5년 만에, 와세다 제 일고등학교와 와세다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 1914년(甲寅年: 27세)
* 평양 복심법원(覆審法院)에서 한국인 최초의 "판사(判事) 생활 "을 하다.
<*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서울과 함흥 등 지방법원(地方法院)에서 법조인(法曹人) 생활을 시작으로, 지금의 고등법원격인 평양복심법원에서 10여 년 동안 조선인 최초의 판사 생활을 하였다.>
** 1919년(己未年: 32세)
* 함흥의 지방법원에 근무할 때, 기미년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 만세사건이 일어나다.
<* 서울 지방법원에 재직 당시 "사이토 총독 "의 저격사건이 발생하는 등 곳곳에서 조선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나자, 일본 경찰들은 독립 투사들을 색출하고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때 조선인(朝鮮人)으로 일제하의 판사 생활이란 한편 호화로운 것 같지만 서도, 민족의 독립투사들을 같은 동족인 조선인 판사에게 판결토록 하였기 때문에 내심으론 하루 하루가 고뇌에 찬 나날이었다.>
** 1923년(癸亥年: 36세)
* 10년 간 법관생활 중, 가장 고뇌에 찬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내리다.
<* 법관생활 10년 세월 중에 가장 고뇌에 찬 순간이 다가 왔다.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 이 사형선고는 스님의 생애를 통해 가장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사건의 정황으로 봐선 부득이하게 내린 사형선고였지만, 젊은 조선인 판사는 이때부터 심한 갈등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시대적인 불운만을 탓할 수도 민족적인 울분을 터트릴 수도 없었다. 3일이 지나도록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직장인 법원에도 떳떳이 출근할 수도 없었다. 그 당당하고 패기만만한 젊은 판사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 사형선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였다. 인간의 회의와 갈등 속에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과 좌절의 늪에 빠지고 있었다. 인간의 고뇌와 현실에 대한 모순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다니? 그것도 같은 동족으로써, 민족의 독립투사 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 고뇌에 찬 세속의 집에서 뛰쳐나가고만 싶었다.>
* 3년 동안 팔도강산(八道江山)을 방랑하며 "엿장수 생활 "을 하다.
<* 젊은 판사는 마치 싯달타 태자가 왕국의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하 듯, 온 집안 식구들이 고이 잠든 사이 집을 나와 평양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서울 동대문시장에 들려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엿판 하나와 한복 두 벌을 구했다.
그리고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오갈 때 없는 고아(孤兒)로써 스스로 엿장수임을 자처하며, 3년 간 정처 없이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방랑(放浪)하기 시작했다.>
** 1926년(乙丑年: 38세)
*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이르러 "금강산 도인(道人) "을 찾다.
<* 3년 간의 엿장수 생활과 팔도강산의 방랑생활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은 길이요, 구도행 각(求道行脚)이었다. 가는 곳마다 독립투사들을 색출하려는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가면서 갖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야만 했고, 인연 따라 맺어지는 많은 일화와 잊지 못할 사연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하고많은 일화들이 인간의 삶에 대한 많은 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인간이 가야할 길과 올바른 길을 나름대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기에 기회 있을 때마다 인생의 올바른 길을 깨친 참다운 "진인(眞人) "을 만나기 위해 명산대찰(名山大刹) 등을 찾아 다녔다.>
*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에서 석두 선사(石頭禪師)를 상봉하다.
<* 마침내 엿장수의 발길은 금강산에 이르게 되었다. 유점사에 찾아드니 큰 제가 들었는지, 스님들은 모두 법당에 올라가고 후원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엿장수는 그만 배가 고픈 김에 우선 허기부터 달래야만 했다.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밥을 세 그릇이 나 비웠다하니,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 "이란 옛말이 실감이 났다.
어떤 스님이 엿장수가 이 깊은 산사(山寺)에 무엇 하려 왔느냐는 물었다. 금강산에 도인(道 人)스님이 있다고 하여 찾아 왔노라 대답하고, 이 절에 도인스님이 계시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금강산 도인이라면 신계사 보운암에 석두 선사가 계신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은가!
엿장수 나그네는 그 길로 단숨에 외금강 신계사를 찾아갔다. 유점사에서 신계사까지는 80여 리가 족히 되었다. 신계사에 도착하자 날이 저물어, 다음날 일찍 보운암을 찾아갔다. 보운암 큰방에는 스님들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낯선 나그네가 엿판을 짊어지고 산사에 찾아온 것이 하도 신기했던지 한 스님이 엿장수에게 물었다.
"이 깊은 산골에 엿장수가 무엇 하려 왔소? "
"금강산 도인, 석두 스님을 찾아뵈려 왔습니다. "
"어디서 왔소? "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소? "
" …… "
엿장수는 엿판을 질며 진 채, 곧장 큰방에 들어가 한 바퀴를 삥 돌고서,
"이렇게 왔습니다 " 하였다.
큰방에 있던 스님들이 한바탕 웃으며
"10년 공부한 수좌(首座)보다 낫네 " 라고 하였다.
이렇게 묻던 스님이 바로 석두 스님이었다.
이리하여 스승과 제자는 서로 만났다. 스승을 찾던 제자의 마음과 제자를 기다리던 스승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이다.
돌이켜 보니 지나간 모든 것이 다 몽중사(夢中事)였고, 전생사(前生事)였다.
엿장수 나그네는 3년이란 긴 방랑생활이 이로써 그만 멈추게 되었고,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었다.>
* 음력 7월 8일.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보택(石頭寶澤) 선사를 은사(恩師)로 사미 계(沙彌戒)를 수지(受持)하다.
<* 스님은 화려한 세간(世間)의 판사라는 법복(法服)을 훌훌 벗어버리고, 출세간(出世間)의 부처님 법복(法服)을 갈아입고 오로지 철두철미한 수행 정진에 매진하게 되었다. 이때 스님 에게 은사스님이 준 불명(佛名)은 원명(元明)이요, 법호(法號)는 운봉(雲峰)이었다.
그러나 훗날(1938년), 스님은 조계산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고봉(高峰)국사의 몽중법문(夢中 法門)으로 인해, 불명은 학눌(學訥), 법호를 효봉(曉峰)이라 개명하였다.>
** 1926년(丙寅年: 39세)
* 하안거(夏安居)에는 남방의 선지식(善知識), 용성(龍城) 대선사를 친견(親見)하기 위해서 경남 양산의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까지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
* 동안거(冬安居)에는 북방의 선지식인 수월(水月) 대선사를 친견하기 위해, 만주(滿洲)땅 북간도(北間道)까지 운수행각을 하다.
<*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 머나먼 운수행각 끝에 다시 금강산에 돌아왔다. 천근만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심신(心身)이 경쾌했다. 오직 진아(眞我)의 발견(發見)과 완성(完成)을 위 해 매진하기로 다짐하였다. 대장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하기 위한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었다. 그 간 눈 밝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뵙는 것도 오로지 견성성불(見性成佛) 만을 위함이었다.>
** 1927년(丁卯年: 40세)
*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彌勒庵)에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다.
<* 스님에게는 "엿장수 중 "으로 늦게 출가 입산(出家入山)했기 때문에 "늦깎기 중 "이라는 별명(別名)이 생겼다. 예나 지금이나 늦깎기로써 여법히 수행 정진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공부(工夫)는 스스로 자성자오(自性自悟)하고,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 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스님은 금강산으로 돌아와 용맹정진하기를 거듭 다짐하였다.>
** 1928년(戊辰年: 41세)
*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장좌불와(長坐不臥) 용맹정진을 하다.
<* 피나는 용맹정진 끝에 견처(見處)가 있었다. 이를 은사스님에게 말씀드리자, 은사스님의 환한 미소와 점두로 "운봉(雲峰) "이라는 법호(法號)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좌전송(師佐傳頌) 을 받았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간에 서로 전수한 "전법게(傳法偈) "다.>
* 西來密旨
不傳受法 示雲峰元明禪師
春至百花爲誰開 東行不見西行利
白頭子就黑頭父 兩個泥牛戰入海
봄이 오니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면 서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리
흰머리 아들이 검은머리 아버지께 나아가니
두 마리 진흙 소가 다투다 바다에 들어가네.
世尊應化 2555年(1928年) 戊辰 1月 15日
金剛山 神溪寺 普雲禪院 恩法道友 林石頭 說
** 1929년(乙巳年: 42세)
* 금강산 온정리(溫井里) 온천인근의 과수원에 "여여원(如如院)선원 "을 마련하고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하다.
<* 스님은 가는 곳마다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였다. 좌선 중에는 한번 앉으면 절구통 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절구통 수좌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스님에게 하루는 뜻 밖에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좌선 중에는 결코 미동도 하지 않던 스님에게 하루는 이변이 생 긴 것이다. 어간에 앉아 창 밖을 향해 정진하던 스님이 갑자기 자리를 옮겨 돌아앉아 면벽 한 것.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평소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과수원 속에 있는 선원이라, 스님은 늘 창 밖을 향해 앉아 정진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출입금지 구역인 선원에 갓 결혼한 듯한 신혼부부가 나타나 이리저리 서성거리지 않은가! 의아한 생각에 다시 한번 처다 봐도 어쩐지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8년 전, 집에 두고 떠나온 장남 (長男)의 모습이 분명하였다. 스님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른 새 그만 벽을 향해 돌아앉았다.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것일까!
여여원 선원은 북간도(北間島) 용정(龍井) 사람인 일허(一虛) 김현(金玄)거사가 금강산을 참 배하려 왔다가 금강산 도인이라던 석두 선사를 친견한 후, 공부하는 선객을 위해 지은 토굴 이었다. 김현 거사의 이모님은 독립투사의 부인으로 불심이 장한 신도였다. 그는 여여원 뒤 편에 독립투사들이 은밀히 오갈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 보살피면서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염원했던 숨은 독립투사였다.>
** 1930년(庚午年: 43세)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法起庵) 뒤에 무문관(無門關) 토굴을 마련하고 "3년결사(三年結社) " 에 들어가다.
<* 제방의 선지식을 친견해 봐도, 대중처소인 선원에서 대중들과 함께 정진해 봐도, 스님의 마음은 결코 시원치가 않았다. 이 일은 부처님이나 보살이라 해도 결코 나를 대신할 수가 없고, 설혹 스승이나 부모형제라 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절친한 도반이나 눈밝은 선지식이라 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었다. 하기에 재출가(再出家)하는 마음으로 재 발심(再發心)하여 용맹정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님은 은사스님께 이 같은 간절한 뜻을 말씀드리고, "3년결사(三年結社) "에 들어가기를 다짐 하였다. 신계사 법기암 뒤 양지바른 곳에 토굴터를 잡았다. 아담한 통나무 단칸방을 마련하 였다. 함석지붕으로 풍우를 피하도록 하고, 하루 한끼 공양으로 바리때만 드나들 수 있는 창 구와 방 한쪽 구석에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구멍만을 내놓았다. 토굴에 들어 간 후, 그 출입 문마저 흙으로 발라 버리도록 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꼭 막힌 "무문관(無門關) " 토굴이었다. 깨닫기 전에는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나오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로 무문관 토굴에 들어간 것. 입은 옷에 좌복 3개뿐, 가지고 들어간 살림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마저 저버린 필사적인 용맹정진이 시작되었다. 마치 싯달타 태자가 6년 고행 중 보리수 나무 밑 금강보좌(金剛寶座)에서 맹세했던 것처럼, 스님도 금강과 같은 결심으로 대용맹심을 발한 것이다.
그때 은사이신 석두 스님께서는 신계사 법기암에 전답(田畓) 30두락을 사들여 놓고, 그 당시 법기암 암주(庵主)였던 임대원(林大願) 비구니스님에게 부탁하여 3년 결사기간 동안 스님의 하루한끼 공양을 극진히 시봉토록 주선하였다니, 제자를 위한 스승의 그 큰 은혜를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으랴!>
** 1931년(辛未年: 44세)
* 일일일식(一日一食)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계속하다.
<* 깨닫기 전에는 죽은 한이 있더라도 결코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피나는 정진이 계속되었다. 사시공양으로 하루 한끼만 먹고 자리에 눕지 않은 1일1식 장좌 불와 용맹정진이었다. 오로지 장부의 일대사인연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키 위한 일념 뿐. 하루 하루가 지나고, 달이 바뀌며 춘하추동 사계절이 변하여 갔다. 춥고 더운 것도 잊는 지 이미 오래었다. 다만 하루한때 사시공양이 들어오는 창구가 밝아지면 날이 새였나 싶었 고, 어두워지면 밤이 되었나 여겼다. 이렇게 또 해가 바뀌고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온 산천에 단비가 포근히 내린 어느 여름 날 아침!
마침내 토굴 벽이 무너졌다.
이젠 그만 나가도 되겠다는 확신으로 토굴 벽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
천근 만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심신이 가벼워졌다.
온갖 것들이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1년 반 동안 자란 텁수룩한 머리와 바싹 여인 몸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걷은 걸음걸이라 어린애 마냥 비틀거렸다.
그러나 안색만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한 폭풍과 같은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다.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였다.
이렇게 스님은 법희선열(法喜禪悅) 속에 밝은 빛으로 다시 태어났다.>
* "오도송(悟道頌) "을 읊다.
海底燕巢鹿抱卵 火中蛛室魚煎茶
此家消息誰能識 白雲西飛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 겨울 안거는 만공(滿空) 선사를 조실(祖室)로 모시고 금강산 유점사에서 입승(立繩)소임을 보며 지내다.
<* 그 당시 남방의 선지식으로는 용성(龍城) 선사와 해월(海月) 선사를, 북방의 선지식으론 수월(水月) 선사를 존경하였으며, 중앙의 선지식으로는 덕숭산 수덕사의 만공(滿空) 선사와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漢岩) 선사 등을 존경하였다. 스님은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참방하고 그 회상에서 안거하며 줄곧 오후불식과 장좌불와로 수행정진하면서 탁마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 1932년(壬申年: 45세)
*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東宣)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 (具足戒)를 수지하다.
** 1933년(癸酉年: 46세)
* 여름 안거는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 선원에서 지내다.
* 겨울 안거는 내금강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만공 선사를 모시고 지내다.
<* 스님은 7일간 용맹정진 중, 화두삼매에 들어 그만 시간을 망각하고서 시간을 묻자 이에 만공 선사께서 다음 게송으로 스님의 정진을 찬탄하였다.>
* 七日精進中 雲峰和尙 時間忘却 問時次忽出詩
七日精進衆 佛唱三昧中
忽惺無我佛 萬事意自在
佛紀2960年 癸酉 9월 19日
鏡虛門人 滿空 漏
<*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 선원에서 안거하고 있을 때, 평양 복심법원 시절 동료였던 일인 (日人) 판사를 우연히 만났다. 정말 뜻밖의 만남이라 스님은 자신의 과거 신상에 대한 일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러나 일인(日人) 판사는 스님이 조실부모한 "엿장수 "가 아니라, 조선인 최초의 판사인 아무개 판사였다는 사실을 유점사 주지스님에게 발설하고 말았다. 그 후 스님에겐 "판사 중 "이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고, 그만 스님의 과거 전력(前歷)이 드러나고 말았다.>
** 1934년(甲戌年: 47세)
* 하안거에는 금강산 온정리 여여원 선원에서 지내다.
* 동안거에는 금강산 신계사 미륵암에서 지내다.
<* 조실부모한 엿장수가 아니라 조선인 판사였다는 과거 전력이 밝혀지자, 스님은 금강산도 이젠 떠날 인연이 다 되었나 싶었다. 이 때 유점사에는 산판 관계로 소송이 벌어졌다. 그러 자 유점사 주지스님은 산판 소송관련 서류를 갖고 와 소송진행을 스님께 묻고 의뢰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과거전력에 대한 풍문은 온 산중에 알려지고, 제방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 1935년(乙亥年: 48세)
* 금강산을 떠나 남방으로 운수행각을 떠나다.
* 하안거에는 설악산(雪嶽山) 봉정암(峰頂庵)에서 동산(東山) 스님, 청담(靑潭) 스님과 함께 지내다.
* 동안거에는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청량선원에서 한암(漢岩) 조실 스님을 모시고 지내다.
** 1936년(丙子年: 49세)
* 오대산 월정사의 상원사 선원에서 한암 선사로부터 다음 게송과 함께 "포운(泡雲) " 이란 법호와 인가(印可)를 받다.
* 一句子
以泡雲號之 贈元明禪師仍示以一偈
茫茫大海水中泡 寂寂深山峰頂雲
此時吾家無盡寶 灑然今日持贈君
世尊 應化 2936年 丙子 10月 11日
蓬萊 釋漢岩 書于 五臺山 上院 室中
* 여름 안거는 태백산(太白山) 정선(旌善) 정암사(淨岩寺)에서 범어사의 동산(東山) 스님과 수덕사의 혜암(惠菴) 스님과 함께 지내다.
<* 이 때 정암사 도량 중심으로 흐르는 계곡 물을 미리 잘 관리토록 하여 병자년 대홍수인 병자수파(丙子水敗)를 면했다 한다.>
* 겨울 안거는 덕숭산(德崇山) 수덕사(修德寺)의 정혜사(定慧寺)선원에서 만공(滿空) 선사를 모시고 지내다.
** 1937년(丁丑年: 50세)
* 덕숭산 정혜사 선원에서 만공 선사로부터 다음 게송과 함께 "선옹(船翁) " 이라는 법호와 인가를 받다.
* 西來家風
爲 船翁法子
無偏正道理 今付船翁子
駕無底船 隨流得妙也
佛紀 2964年 丁丑 陰 正月 日
湖西 德崇山 金仙洞 小林草堂
滿空月面 漏
* 승보종찰(僧寶宗刹)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를 참배하다.
1937-1947 효봉스님 10년간 머문 곳이 순천 송광사(松廣寺)다.
송광사16국사중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을 꿈에서 만나 “이 도량을 빛내 달라”며 내린 법명 ‘효봉’을 받는다.
<* 그 당시 제방선원에서 추앙 받던 선지식이었던 만공 선사와 한암 선사에게 두루 인가를 받고 난 후, 운수행각의 발길은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스님은 마침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의 근본도량인 승보종찰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렀다. 처음 온 곳인데도 모든 것이 낯설지가 않았다. 전생에 많이 살던 도량인양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스님을 반기는 것만 같았다. 마치 옛 고향에 찾아 온 것처럼 신심(身心)이 무척 안온했다고 스님은 그 때를 가끔 회고하였다.>
*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인 송광사 삼일암(三日庵) 선원에 주석하다.
<* 드디어 승보도량인 조계산 송광사에 이르러 운수행각의 발길은 멈추게 되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간 스님은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 주석하면서 운수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牧牛家風)과 정혜쌍수(定慧雙修),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오늘날에 계승하고 재현하려는 원력을 세웠다. 이는 이 시대에 필요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제2의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전개하여 침체된 한국불교의 중흥(中興)과 선풍 진작(禪風振作)을 위한 원력이었다. 조계산 송광사를 옛날의 해동제일도량답게 장엄하고, 16 국사를 배출한 승보도량답게 중흥키 위한 염원으로 운수행각의 길을 멈추고 송광사에 주석 (住錫)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 회주(會主)인 조실(祖室) 화상에 추대되다.
<*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에 안거하고 있을 때, 남원골에 산다는 한 처사가 찾아 와서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다.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날인 불탄절(佛誕節)을 맞아 제자를 삼으니, 그가 곧 수련(秀蓮)이란 법명으로 수계 득도한 맏상좌인 구산(九山) 스님이었다.>
*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대종사(大宗師) 법계(法階)를 품수하다.
** 1938년(戊寅年: 51세)
* 보조국사 제16세 법손(法孫)인 고봉국사(高峰國師)로부터 몽중수기(夢中受記)를 받다.
<*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한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스님은 불일 보조국사의 사상을 흠모 하면서 스님의 사상과 수행가풍을 새롭게 정립하고 조계선풍을 진작하기 위한 원력으로 지 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너무도 신기한 꿈을 꾸었다. 보조국사 제16세 법손인 고봉국사께서 꿈에 나타나 몽중법문과 게송을 새로운 법호(法號)와 함께 스님에게 전해주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금강산에서 은사스님이 주신 운봉 원명(雲峰元明)이란 법명과 법호를 사용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뜻밖에 고봉국사께서 효봉학눌(曉峰學訥)이란 이름과 함께 다음 게송을 일러 주신 것이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었고 법문이었기에 스님은 꿈을 깨자마자 바로 그 게송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보조국사를 비롯 16국사의 법은(法恩)이 지중함을 절감하고 법명과 법호를 이내 효봉 학눌이라 개명하고, 송광사 승보도량의 전통인 목우가풍과 조계선풍을 크게 진작 하리라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 示 三日庵 曉峰法子
煩惱盡時生死絶 微細流注永斷滅
圓覺大智常獨存 卽現百億化身佛
佛紀 2965年(1938年) 4月 28日 曉
普照國師 第十六世 法孫 高峰 說
夢裡聞說 覺後記得
** 1941년(辛巳年: 54세)
* 금강산 여여원 선원 이사장(理事長)에 취임하다.
<* 금강산 온정리에 있는 여여원 선원의 설립공덕주인 일허 김현 거사의 청으로 재단법인 여여원 재단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시자로 일청(一淸)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은사 석두 스님을 모시고 안거하다.
<* 금강산에서 은사스님과 해어진 후, 스님은 오랜만에 은사스님을 송광사 삼일암 선원에서 모시고 살았다. 그 후, 석두 선사는 송광사 부도전에 4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한 보살선원을 개설하고 안거타가 조국의 해방을 맞이하였다.>
** 1944년(甲申年: 57세)
* 금강산 신계사와 여여원 선원을 참배하다.
<* 스님은 마음의 고향인 금강산을 다시 한번 참배하였다. 그런 이듬해엔 일제치하로부터 조국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38선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꿈에 그리던 금강산을 다시 찾지 못하였다.>
** 1945년(乙酉年: 58세)
* 8월 15일! 드디어 36년 간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조국이 해방되다.
<* 스님에 있어서 조국의 해방은 남달랐다. 스님의 출가동기가 말해 주듯, 그토록 고대하고 갈망하던 조국의 광복이 찾아 온 것. 그러나 조국이 해방되었다지만 사회 각계각층엔 일제 치하에서 변질된 것이 너무도 많았다.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조선불교 교단 역시 크게 변모 되어 한국불교는 이미 대처승화(帶妻僧化)되고 세속화(世俗化)되여 있었다. 하니 불교교단의 정화불사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있어 정화작업을 해야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한국불교 정화운동을 위한 일이 시급했다. 당시 조선불교 교단에서는 한국불교의 유구한 전 통을 되살리고 여법히 수행정진 할 수 있는 총림 도량을 가야산 해인사에 건립하기로 결정 하였다.>
** 1946년(丙戌年: 59세)
* 동안거를 기해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가야총림(伽倻叢林)이 설립되고, 초대 방장화상 (方丈和尙)에 취임하다.
委 囑 狀
李 曉 峰
朝鮮佛敎 伽倻叢林 祖室和尙을 委囑함
佛紀 2973年(1946年) 11月 6日
朝鮮佛敎 校正 朴 漢 永 印
<* 음력 10월 15일. 드디어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대작불사로 가야산 해인사에 종합수도 원인 가야총림이 개설되었다. 스님은 가야총림의 조실스님인 초대 방장화상으로 추대되었다. 스님은 종단정화와 도제양성이라는 큰 꿈을 안고 10여 년 동안 안주했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 가야산 해인사로 이석(移錫)하게 되었다.
이때 시자로 원명(元明), 명성(明星)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심경으로 다음 게송을 읊다.
我來松廣今十年 國老懷中安食眠
曹溪一別緣何事 欲作人天大福田
<* 한국불교의 내일을 기약하고 선풍진작과 도제양성을 위해 10여 년 동안 머물던 조계산 송광사를 떠나는 법문을 하면서 스님은 법상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 후, 스님은 6.25동란과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로 인해 그토록 그리던 금강산과 송광사를 다시 한번 찾지 못하고 입적하고 말았다.>
** 1947년(丁亥年: 60세)
* 계정혜 삼학(戒定慧三學)을 근수하기 위해 습의산림(習儀山林)을 실수하고 구족계를 중수 (重受)하다.
<*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선양하고 조계선풍을 널리 고취하며 여법히 수행정진하기 위해선 오로지 계정혜 삼학을 근수해야 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해인사 가야총림의 대중이 50일간 습의산림을 실시하고, 음력 3월 29일에 상월화상(霜月和尙)을 계사로 구족계를 중수하였다. 이 때 함께 정진했던 총림 대중스님들이 훗날 한국불교 정화불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근세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주역들이 되었다. 그때 구산(九山) 스님은 원주와 도감 소임을 번갈아 맡아보고, 일각(一覺) 스님이 입실(入室)했으며, 시자로 원명, 보성(菩成)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0년(庚寅年: 63세)
*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사변으로 인해 가야총림이 해산되다.
<* 6월 25일!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설립된 지 5년이 되던 해, 조국 광복의 기쁨 속 에 한국불교의 중흥을 꿈꾸며 설립된 가야총림이 해산되다니 실로 기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찌하랴!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족상잔의 6.25 참극으로 인해 전 국토가 전운(戰雲)에 휩싸이고 말았으니, 수행 정진하던 산사(山寺)인들 어찌 조용할 수가 있겠는가? 하기에 가야총림 대중들도 각기 인연 따라 흩어지고 스님 역시 피난길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겨울 안거를 부산 동래 금정산(金井山) 금정사(金井寺)에서 맞이하다.
<* 피난길에 오른 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금정산 금정사 선원에 이르러 가까스로 행장을 풀었다. 대구 팔공산 지역과 낙동강 전투는 극히 심하였지만, 부산 지방은 아직 참혹한 전운이 미치지 않았기에 그나마 겨울 안거를 할 수가 있었다.
이 때 구산 스님은 은사스님을 금정사에 계시도록 주선해 드리고, 진주 응석사(凝石寺) 선원 에서 금오(金烏) 선사를 모시고 겨울철에 용맹정진을 할 작심으로 스승 곁을 떠났다.>
** 1951년(辛卯年: 64세)
*동안거 해제일을 맞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전법게(傳法偈) "를 전하다.
<* 음력 정월 보름!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던가! 혹독한 추위를 견뎌 낸 이른봄 매화는 코를 찌르는 향취를 내고, 밤이 깊으면 먼동이 트인다고 했다.
천신만고 끝에 맞이한 조국의 해방이었지만, 다시 동족상잔의 참화에 휩싸인 현실에서 뼈를 깎는 듯한 정진 끝에 구산 스님은 큰 깨달음을 얻게 된 것. 한없는 선열 속에 다음 게송을 은사스님께 바쳤다.
大地色相本來空 以手指空豈有情
枯木立岩無寒暑 春來花發秋成實
이에 은사스님의 환희에 찬 미소와 점두(點頭)로 구산 스님은 다음의 전법게를 받았다.>
裁得一株梅 古風花已開
汝見應結實 還我種子來
한 그루 매화를 심었더니
옛 바람에 꽃이 피었구나
그대 열매를 보았으리니
내게 그 종자를 가져오너라.
<* 이 전법게는 스님께서 손수 쓰신 불보함(佛譜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석가세존(釋迦 世尊)후, 면면히 계승되어온 제78대(曉峰學訥)와 제79대(九山秀蓮) 법손(法孫)에 해당된다. 이로써 불조심인(佛祖心印)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오늘날까지 계계승승 전래한 것이다.>
* 경남 통영 미륵산(彌勒山) 용화사(龍華寺) 도솔암(兜率庵)에서 여름 안거를 맞이하다.
<* 산사(山寺)에 살던 사람이 어찌하다 도심 속에 살다보면 무척 산사가 그리워진다. 스님 역시 문도와 제자들의 주선으로 한려수로(閑麗水路)의 중심인 경남 통영의 미륵산 용화사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크게 전화를 입지 않은 곳이라 승속(僧俗)을 막론 많은 피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비좁은 용화사 도솔암 선원이었지만 제방에서 많은 스님 들이 운집하여 신고를 같이하며 함께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시자로 활연(豁然)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2년(壬辰年: 65세)
* 미륵산 상봉아래 "효봉대(曉峰臺) " 란 토굴을 짓고 안거하다.
<* 도솔암 선원은 많은 스님들이 운집하여 정진함으로 장소가 비좁은 탓에 스님은 용화사 뒤, 미륵산 상봉아래에 아담한 터를 잡아 삼간 토굴을 짓고서 안거하였다. 이때 일관(一觀) 스님이 출가득도하고 시봉하였다.>
** 1954년(甲午年: 67세)
* 통영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가 창건되고, 양지토굴에서 안거하다.
<* 그 당시 미륵산 용화사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기에 용화사 암자인 도솔암이나 용화 사 뒤 토굴에서 살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용화사 뒷산 넘어, 편백나무 숲 속에 절 터를 새로 잡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제자인 구산 스님 등 문도들의 주선으로 은사 스님인 석두(石頭) 선사를 모시고 안거하기 위해 미륵산에 걸맞은 미래사를 창건한 것이다.
어느 날 일월광명이 환히 밝은 것처럼 방광(放光)이 충천하는 곳을 찾아가 보니, 다도해의 섬들이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었다. 스님은 그곳에 조촐한 삼간 토굴 을 짖고 안거하게 되었으니, 훗날 스님이 좌선하던 곳이라 하여 "효봉대(曉峰臺) " 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미래사의 좌우 청룡과 백호 산자락 아래 음지와 양지토굴을 마련하고, 은사 석두 선사를 모시고 문도들과 함께 주석하였다. >
* 음력 4월 24일. 은사 석두(石頭) 선사께서 입적하다.
<* 스님은 은사스님과의 지중한 법연(法緣)을 생각하고 이곳 미래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살고 싶었지만, 은사스님께서는 세연(世緣)이 다해 그만 입적하셨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일어나다.
<* 음력 8월 17일. "불법엔 대처승(帶妻僧)은 없다 " 란 기치아래 종단 정화운동이 일어났다. 스님은 제자인 구산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이듬해 9월까지 서울 종로구 안국동 소재 선학원 (禪學院)에 주석하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정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큰집이 무너지려 하니 여럿의 힘으로 붙들어라(大廈將崩 衆力扶持) "라는 유시를 내리고, 화합적인 승가정신에 입각하여 종단정화불사를 주도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法頂) 스님이 통영 미래사에서 수계득도하고, 서울 선학원에는 조명(照明) 스님 등이 시봉하였다.>
** 1955년(乙未年: 68세)
* 종단 정화불사가 일단락 되어가자, 다시 미래사 토굴에서 안거하다.
<* 비구 대처간의 종단분규와 정화불사가 일단 마무리되어지자, 종단 정화불사는 모든 종도 들이 여법히 수행 정진하는 것만이 진정한 화합승가를 이루는 올바른 길이라고 역설하면서 서울을 떠나 다시 미륵산 미래사 토굴로 내려 오셨다. 스님은 금강산에서부터 15여 년 동안 줄곧 오후불식과 장좌불와 등 수행자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여름철과 겨울철 안거의 결제와 해제를 철저히 준수하면서 후학들에게 수행의 규범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 1956년(丙申年: 69세)
* 여름 안거는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육조정상탑전(六祖頂上塔殿)에서 안거하다.
<* 스님은 육조 혜능대사의 사상과 조계선풍을 선양하고,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고취하기 위해 "정진제일 효봉선사(精進第一曉峰禪師) "란 별칭을 들을 만큼 철저한 수행정신으로 일관 한 삶이었다. 가는 곳마다 육조 혜능대사의 영정(影幀)과 불일 보조국사의 진영(眞影)을 모 시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예배드리고 그분들의 사상을 실천하며 몸소 생활 속에 구현하였다.
또 한편으론 대한불교 조계 종단의 원만한 정화불사를 염원하면서, 육조 혜능 대사의 정골 사리가 안치된 지리산 쌍계사 탑전 선원에서 조용히 안거하였다. 이때 시자로 법정 스님이 시봉하였다.>
* 11월. 네팔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 " 에 참석하다.
<* 한국불교의 정화불사와 유구한 전통을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알리고 또한 그 당위성을 널리 천명하기 위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개최된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동행한 동산(東山) 스님, 청담(靑潭) 스님과 네팔, 인도(印度) 등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던 도중, 귀국 길에 안내자가 그만 행방불명이 된 탓으로 불적지(佛跡地)를 어렵게 순방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때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던 스님들은 귀국 후, 젊은 승려들에게 현대교육과 영어공부를 하도록 주장하고 종비생(宗費生)을 양성하였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회의장(宗會議長) "에 추대되다.
** 1957년(丁酉年: 70세)
* 1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總務院長) "에 추대되다.
<* 서울 조계사 경내에 총무원 청사로 "정화기념회관(淨化紀念會館) "을 건립하고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천명하였다.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잔치에 청와대로 초대된 자리에 "생불생 (生不生) 사불사(死不死)라! 본래 생사(生死)가 없는데 어디에 생일(生日)이 있습니까? 라고 하여 이대통령을 크게 감동케 하였다.>
** 1958년(戊戌年: 71세)
* 대한불교 조계종 제3대 종정(宗正)에 추대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종단 정화불사 이후 제1대 종정에는 설석우(薛石牛) 스님, 제2대 종정 엔 하동산(河東山) 스님이 추대되었으며 제3대 종정엔 이효봉(李曉峰) 스님이 추대되었다.>
* 여름 안거는 경기도 양주(楊州) 흥국사(興國寺)에 종정실(宗正室)을 마련하고 주석하다.
* 겨울 안거는 대구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 금당선원(金堂禪院)에서 주석하다.
<* 이때 동화사에서 시자로 법흥(法興) 스님이 수계 득도하였다.>
** 1960년(更子年: 73세)
* 여름 안거 결제부터 3년 간 미륵산 미래사 토굴에서 주석하다.
** 1962년(壬寅年: 75세)
* 4월 11일.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 "에 추대되다.
<* 드디어 비구. 대처간의 오랜 분규가 종결되고 새로운 통합종단이 탄생되었다. 사찰관리 법에 의해 새로운 종단등록을 마치고 대한불교 조계종의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계종 전국신도회 총재(總裁)에 추대되었다. 이때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 에는 송광사 출신이었던 임기산(林綺山) 스님이 취임하였다.>
** 1963년(癸卯年: 76세)
* 10월. 대구 팔공산 동화사가 종정 주석사찰로 선정되어 금당선원으로 이석하다.
<*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本寺)인 동화사가 종정스님의 주석사찰로 선정되고 스님 의 제자인 구산 스님이 동화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통영 미래사 효봉대에 계신 종정스님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으로 모셔와 조실스님으로 추대하고 금당선원의 미소실(微 笑室)에 모셨다. 그 후 1966년 5월 13일, 밀양 표충사로 이주할 때까지 구산 스님은 극진한 효순심으로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 스님은 노환(老患)으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곁에 계봉(溪峰) 노스님을 비롯하여 시자로 현호(玄虎), 달진(達眞), 지진(智眞) 등 손상좌(孫上佐) 와 청신녀 정보경화(鄭寶鏡華) 등이 시중을 들였다.>
* 말년엔 "무(無)라 노장(老長) "이란 별명이 생기다.
<* 스님에게 "무라 노장 "이란 별명이 생겼다. 항상 화두일념인 일행삼매(一行三昧)중에 자나 깨나 늘 "무 "라! "무 "라! 하면서 선정 속에 살고 계셨기 때문. 누가 무슨 이야기를 묻더라도 항상 "무라, 무라! " 하였다. 스님은 간혹 "무라, 무라! " 하면서 손을 흔들며 춤을 추기도 하고 "무라, 무라! " 하면서 노래를 부르듯 흥겨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시봉하던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노스님께서 "무라, 무라! " 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
"조주(趙州) 스님한테 가서 물어보아라.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조주 스님도 몰랐는데 내가 알 턱이 있나? "
"노스님! 무슨 말씀인지 더욱 모르겠습니다. "
"너, "이뭣고 노장 " 아니? "
"잘 모르겠는데요. "
"옛날에 "이뭣고 노장 "이란 스님이 있었다. 그 노장이 바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산대사(西山 大師)의 제자로 편양언기(鞭羊彦機) 선사인데, 한평생을 "이뭣고, 이뭣고! " 했었지. 그 누가 무어라 하고 묻던 간에 항상 "이뭣고, 이뭣고! " 했거든. 그래서 이뭣고 노장이란 별명이 생 기게 된 거야. 그 노장이 "이뭣고, 이뭣고! " 한 뜻을 네가 분명히 알 때 내가 "무라, 무라! " 한 뜻을 알 수 있어. 알겠느냐? "
" …… "
이렇게 스님은 노년에 이르러 "무라, 무라! " 하면서 일상삼매(一相三昧) 중에 마치 어린 아이 처럼 천진난만하게 소요자재 했다. 누구든 이 "무라, 무라! " 한 뜻을 분명히 알 때에,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 때에 조주 스님을 알 수 있으며, 조주 스님을 알 때에 부처님 법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씀하였다.>
** 1966년(丙午年: 79세)
* 5월 14일.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이석하다.
<* 3월에는 구산 스님이 대구 동화사 주지직을 사임하고 금당선원에서 은사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5월에는 은사스님을 모시고 밀양 표충사 서래각으로 이석! 그때 표충사 주지에 석정(石鼎) 스님이 취임하고, 총무에는 원명(元明) 스님이 소임을 맡았다.>
* 제자 구산 스님에게 승보종찰 송광사를 중창하길 부촉하다.
<* 동족상잔인 6.25사변으로 인해 북녘 땅 출가본사(出家本寺)인 금강산 신계사에도 가지 못하고, 또 대처 비구 종단분규로 인하여 재적본사(在籍本寺)인 조계산 송광사에도 가지 못 함을 스님은 가끔 스스로 자탄하였다. 그러면서도 제자인 구산 스님에게 불법승 삼보(三寶) 가운데 승보(僧寶)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승보종찰인 조계산 송광사를 중창하여 대진선풍 (大振禪風)하길 간곡히 당부하였다.>
* "병상(病床)의 효봉 스님 " 이란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고 뜻밖의 편지가 오다.
<* 9월 29일. 조선일보 신문에 "병상의 효봉 스님 "이란 기사를 읽고 보냈다는 뜻밖에 편지가 표충사로 날아왔다. "표충사 석봉(石峰) 스님 존하 " 란 한 통의 편지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님의 출가 전 가족관계와 함께 많은 사연들이 담겨져 있었다. 이는 실로 충격적인 편지였다. 왜냐면 스님은 출가 이후, 스님 스스로 과거에 대한 사실을 좀체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지금까지 본적은 "평양부(平壤府) 진향리(眞香里) 54번지 "요, 스님의 본명은 "이원명 (李元明) "이라 하였다. 그리고 스님의 출가전 이야기들은 다 전생사(前生事)요, 몽중사(夢中 事)라며 입밖에 담지 않았다. 하기에 스님의 별명들이 말해주듯 스님은 일찍이 조실부모한 고아로써 줄곧 "엿장수 중 "이라 했으며 "절구통 수좌 "니, "판사 중 "이니, "무라 노장 "이니 하는 별명들이 생겼다.
스님은 일찍이 한국인 초대 판사로써,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조실 스님으로써, 해인사 가야 총림의 방장스님으로써,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정으로써 근세 한국불교 중흥에 있어서 많은 공적을 남겼지만, 주위에 사람들은 스님을 그런 존칭보다도 더욱 친근하게 "엿장수 중 " 이니, "판사 중 " 이니, "무라 노장 " 이란 별명으로 통칭해 왔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스님의 출가전의 내력을 자상히 알 수 있는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든 것. 이는 정말 상상 밖의 일이었다.
* 훗날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사료되어, 그 편지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편지 앞면>
* 除禮하옵고
生面不知의 사람으로부터 書信을 받게되어 의아하게 生覺하실 것입니다.
多忙中이라 思慮하와 要件만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九月 二十九日字 朝鮮日報에 보도된 "病床의 曉峰스님 "을 읽고 小生의 祖父님과 一致하는 点 이 있어 아뢰오니 다음 事實을 參考하셔서 確認해 주시면 大幸이겠습니다.
一. 曉峰스님께서 四十三年前에 두고 떠났다는 두 아들의 姓名이 李永發(長男), 李永實(次男) 이 아닌지요?
二. 小生의 本貫이 黃海道 遂安(稀本)입니다.
三. 李炳億氏는 小生의 曾祖父이시며, 曉峰스님이 李炳億氏의 五男妹中의 三男이라 하셨는데 혹 五兄弟中의 三男이 아닌지요?
四. 曉峰스님의 俗名이 "李燦亨 " 氏가 아닌지요?
五. 李永發氏는 (尙今在日中) 小生의 父親이며 어렸을 때 記事內容과 같은 祖父님의 말을 자 주 들었습니다.
六. 平壤覆審法院에 계셨다는 말도 一致합니다.
七. 祖母님은 二年前에 別世하셨는데, 今年 八十一歲가 되며 이름은 "朴賢 "입니다.
以上 參考로 말씀드리오며 事實이기를 仰望하는 小生의 마음 초조하오니 힘써 도와 주시 면 감사합니다.
一九六六年 十月 四日
서울에서 小生 李仁穆
表忠寺 石峰스님 尊下
<편지 후면>
(遂安李氏)
李 炳億 - 1
- 2
- 3 李燦亨 _ _ 李永發(57歲) _ _ 李仁穆(本人: 36歲)
(曉峰스님?) _ 李善穆
_ 李永實
_ 女息(姓名未詳)
- 4
- 5
<* 이상과 같은 편지내용이었다. 편지 뒷면에는 가족의 관계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가계표 (家系表)까지 첨부하여 있었다. 이 뜻밖의 한 통의 편지로써 스님의 출가전 일들에 대해서 추측만 난무했던 사실들이 분명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뒷날 친지들에 의해 알게된 일이지만 스님의 형제들의 이름은 준형(遵亨: 장남), 만형(萬亨: 차남), 춘형(春亨: 4남), 여동생은 탄실(誕實)이었고 5남매(五男妹)중 3남(三男)이었다.>
*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혈육인 장손(長孫)과 상봉하다.
<* 그 당시 조선일보를 보고서 편지를 발송한 날이 10월 4일이요, 이 편지가 밀양 표충사에 도착한 날이 10월 10일이니, 스님이 입적하기 5일전의 일이었다. 이 뜻밖의 편지를 받아 본 구산 스님은 편지내용들을 확인하기 위해 보성 스님을 급히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이틀 후, 10월 12일 밤. 스님과 꼭 닮은 장남 이영발 거사의 사진을 들고 스님의 장손이라며 이인목 (李仁穆)거사와 그 가족들이 표충사에 찾아 왔다. 생면부지의 손자와 손부(孫婦), 증손(曾孫) 까지 데리고 와 할아버지를 찾아뵙게 된 것. 스님은 출가 입산 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혈육 간의 극적인 상봉이 이루어지게 된 셈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뜻밖의 상봉으로 긴장된 하루 밤을 보낸 이들은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을 취한다고 10월 13일 아침 일찍 상경하였다.
스님의 장손 가족들이 왔다 간 후, 더욱 기막힌 사연들이 가슴 아프게 하였다. 스님은 출가 이후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에 살았고, 장남인 이영발(李永發: 覺幻) 거사는 남북전쟁인 6.25사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곧 바로 월남하여 송광사와는 지척인 전남 광주(光州) 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광주와 송광사와는 지척인데도 그 오랜 세월동안 서로 모르고 살았 다니,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리고 모친께서는 2년 전 광주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치고 별세하였다니, 이 어찌 한편의 비극이 아니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스님은 입산 후, 평생을 두고 스님의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 등 세속적 인 것에 대해선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세속을 저버린 승려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어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이런 스님에게 출가 전 본적과 성명, 가족관계들이 상세히 밝혀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는가! 스님도 깜짝 놀랬고, 제자들도 모두 놀랬다. 이는 한 막의 비극인 동시에 엄연한 현실이었다. 6.25사변으로 인한 민족분단의 역사와 함께 남북 이산가족의 한 맺힌 희비쌍곡선이었다.
지난 날 금강산 온정리 과수원 밭 여여원 선원에서 우연히 신혼여행 온 듯한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정진하던 자리를 옮겨 면벽하던 때는 도심(道心)이 인정(人情)을 등진 듯하더니만, 오늘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서 뜻밖의 장손과의 상봉은 도심과 인정이 하나임을 보여줌인가?
손자와의 극적인 상봉이 있고 난 후, 스님의 안색은 상기된 모습이었지만 더욱 밝아 보였다. 하지만 세연(世緣)이 다한 듯한 예감을 곁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 시자의 간청에 의해 임종게(臨終偈)를 읊다.
<* 할아버지 스님 곁에서 하룻밤을 보낸 장손들은 조부님의 상봉소식과 조부님이 생존해 계신다는 사실을 일본에 체류중인 아버지에게 급히 연락해야 한다면서 아침 일찍 떠났다.
하지만 꿈과 같은 혈육의 상봉으로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심경인양 스님은 더욱 자주자주 "무라, 무라! "를 되새기곤 하였다. 이를 곁에서 지켜본 시자가 노스님께 조용히 여쭈었다.>
"노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안 하시렵니까? "
"난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하련다. "
"왜요? 노스님! 그래도 한 말씀 하셔야죠? "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
" …… "
<* 스님은 손에 들고 있던 단주를 굴리면서 한참이나 "무라! 무라! 무라... " 하더니, 조용히 게송을 읊었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어린애 마냥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하지만 이것이 스님 의 열반송(涅槃頌)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吾說一切法 都是早騈拇
若問今日事 月印於千江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가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
* 10월 15일(음력 9월 2일) 새벽 3시. 문득 제자인 구산 스님을 찾다.
<* 새벽 3시. 도량석 목탁소리가 재약산 골짜기에 은은히 울러 퍼지고 있었다. 이때 스님은 시자실에 있던 시자를 찾았다.>
"거기 누구 없느냐? "
"예, 노스님! 여기 호랑이 있습니다. "
"응, 그래. 너희 스승 모시고 오너라. "
"예, 노스님! 스님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
<* 평소 스님은 손상좌인 시자를 애칭으로 "호랑이 "라고 즐겨 불렸다. 이때 시자는 노스님의 옆방 시자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노스님의 행장과 연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왜냐면 전날에 잠시 출타하였다가 향곡(香谷)스님 회상인 월내 묘관음사(妙觀音寺)에 들렸는데, 노스님께서 입적하는 생생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하도 기이하고 생생한 꿈이었기에 급히 표충사로 달려와 은사인 구산 스님께 지난밤 꿈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시자실에서 노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자는 노스님을 편한 자세로 앉도록 부축해 드리고, 건너 방에 계시던 은사 구산 스님께 노스님께서 찾으신다고 말씀드렸다. 이내 계봉(溪峰) 노스님과 은사스님, 그리고 시봉들이 다 모여 노스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곁에서 보기에도 노스님께선 이미 세연(世緣)이 다 한 듯 싶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스님께서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나, 오늘 갈란다. "
"예? 스님!
언제쯤요? "
"오전에 가지! "
" …… "
<* 스승과 제자인 구산 스님간에 짤막한 문답이 오고갔다. 형언할 수 없는 침묵이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싸늘한 새벽공기가 무거운 정적과 함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숨소리조차도 멈추어 버린 고요함 그 자체였다. 적정삼매(寂靜三昧) 속에 잠겨 있는 듯한 은사스님께 제자 는 가끔 여쭈었다.>
"스님! 화두(話頭) 들리십니까? "
"응, 응... "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던 스님의 모습.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제자는 조용히 다시 묻는다.
"스님! 지금도 성성(惺惺) 하십니까? "
"무라, 무라, 무라! "
" …… "
<*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스승과 제자와의 대화만이 오고갔다.
이 엄연한 꿈과 현실! 어떤 것이 꿈이고 어떤 것이 현실인지? 지난밤 꿈에 생생히 지켜봤던 노스님의 임종 장면이 엄연한 현실로 재현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이 하나되어 생생하게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스님이 계시던 서래각엔 새벽부터 정적만이 계속 엄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충사 종무소엔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 효봉 대종사의 임종 소식을 알리기 위한 문도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10월 15일(음. 9월 2일) 오전 10시 정각! 입적(入寂)하다.
<* 새벽 3시부터 줄곧 가부좌하신체 앉아 계시던 스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 다. 스님의 고개가 약간 옆으로 기울러졌다. 바로 그 순간!
가부좌하신체 정진하던 자세로 그만 입적하신 것이다.
마치 생전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요히 선정삼매(禪定三昧) 속에 정진하고 있는 듯한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둥 둥 두~웅…….
108번 열반종소리가 표충사 도량에 울려 퍼졌다.
효봉 스님의 입적 소식이 108번의 열반종소리와 함께 재약산 골짜기를 넘고 넘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때마침 이 날은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추계재향일(秋季祭享日)! 구국성사인 사명대사의 진영을 모신 밀양 표충사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밀양군의 군관민과 종립학교 학생들이 함께 추모법회를 거행하는 날이었다. 오전 10시 정각, 108번의 열반종 소리가 도량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도량에 운집했던 많은 사람들은 사명대사의 재향 법요식이 시작되는 종소리인줄로 알았다. 그러나 뜻밖에 효봉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열반종이라고 하니, 법당 앞 광장에 모인 사부대중은 먼저 효봉 스님 입적에 대한 묵념부터 올렸다.
이렇게 스님은 가신 것이다. 본래 오심 없이 왔다가 가심 없이 가신 것이다.
파란만장한 80생애를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와 함께 살다가 가신 것이다. 청산유수(靑山 流水)와 청풍명월(淸風明月)처럼 그렇게 살다 가신 것이다. 집착 없이 살다 자취 없이 가심 이 스님의 생애(生涯)였고,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인연 따라 소요자재하게 살다 가심이 스님 의 행장(行狀)이었다.
스님의 생애와 행적이 모든 종도(宗徒)들의 귀의처가 되고, 모든 불자(佛子)들의 귀감이 되 어 영원히 상주불멸(常住不滅)하리라.
지금도 스님의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자용(慈容)이 눈에 선하고, 스님의 입적을 알리는 밀양 표충사의 열반종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이때 스님의 세수(世壽)는 79세요, 법납(法臘)은 42년이었다.>
* 10월 21일(음력 9월 8일).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종단장(宗團葬)을 봉행하다.
<* 스님께서 입적한 후, 문도들은 산사(山寺)에서 조용히 입적하신 스님이기 때문에 영결식 (永訣式) 역시 산사에서 조촐하게 거행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총무원 임원스 님들은 한사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스님의 영결식이기 때문에 서울 조계사 총무원에서 성 대히 거행해야 한다고 서로 주장하였다. 결국 이틀 후, 서울 조계사로 운구하여 7일 종단장 으로 거행하게 되었다. 조계사의 법당 앞 광장을 전국에서 운집한 사부대중으로 꽉 메운 가 운데 장엄한 영결식을 봉행하였다.
영결식이 끝난 후, 장례행렬 역시 서울 종로 네거리를 길게 누비는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다비식(茶毘式)은 서울 수유리 도봉산 화계사(華溪寺) 뒷산의 다비장에서 사부대중의 애도 속에 엄숙히 봉행하였다.
다비식을 밤 새워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밤하늘을 찬란히 수놓으며 방광(放光)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법력(法力)에 다시 한번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종단의 원로스님과 문도들이 함께 습골(拾骨)하여 사리(舍利)를 수습하니, 오색 영롱한 쇄신사리(碎身舍利) 55과(顆)와 전신사리(全身舍利)가 한 되(一升) 가량 출현하였다. 조계사 법당에선 스님의 사리 친견법회 등을 개최하고 스님의 거룩한 생애와 사상이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 사회 각계각층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당시 침체된 한국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재도약의 활력소가 되었다.>
* 스님의 인연터 마다 사리탑(舍利塔)과 행적비(行蹟碑)를 건립하다.
<* 밀양 표충사에서 스님의 49재 법요식을 봉행한 후, 표충사 서래각 뒤편 산록에 자연거석 (自然巨石)을 옮겨 와 스님의 사리탑으로 천진보탑(天眞寶塔)을 건립하였다.
이듬해인 1967년(丁未年) 4월 15일! 하안거를 기해 스님의 부촉과 유훈에 따라 구산 스님을 비롯하여 많은 문도들이 승보종찰 송광사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송광사의 주지였던 취봉(翠峰) 스님의 간곡한 청원으로 구산 스님은 취봉 스님과 뜻을 같이하여 송광사를 옛 동방제일도량인 승보종찰답게 중창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스님의 유훈과 가풍을 계승하리라는 문도들의 간절한 발원으로 스님의 승적 본사인 조계산 송광사를 비롯해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에 각각 스님의 사리탑을 세우고 행적비를 건립하였다.
* 스님의 유촉에 따라 승보도량 조계산 송광사에 조계총림(曹溪叢林)을 설립하다.
<* 1969년(己酉年) 4월 15일! 마침내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하여 승보종찰인 송광사에 종합수도원인 조계총림이 설립되었다. 가야산 해인사에 설립된 대한불교 조계종 제1총림인 해인총림(海印叢林)에 이어 제2총림으로 조계총림이 설립된 것이다.
전국 수좌 모임인 선림회(禪林會)의 노력으로 중앙종회의 의결을 거쳐, 조계총림 설립위원장에는 청담(靑潭) 선사가 추대되고, 초대 방장화상에는 구산(九山) 선사가 추대되었다.
이는 이 시대에 걸맞은 당당한 현전승보(現前僧寶)를 양성하고 조계선풍(曹溪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기 위함이었다.
또한 스님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늘 부촉하던 승보도량 송광사를 중창하고, 한국불교를 크게 중흥하여 불일 보조국사의 목우가풍을 드높이 선양하라는 스님의 유훈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佛紀 2539年(1995년) 乙亥年 8월 일
曉峰法語集를 增刊하면서
송광사 조계총림 서울분원 法蓮寺 白雲山房에서
後孫 迷衲 玄虎는 노스님께 九拜하옵고 삼가 기록하다.
☞출가사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조선 동포란 동포들이 한마음으로 동참했지만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동참자가 아니라 동포의 심판자였다. 일제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단죄를 조선인인 그에게 맡겼다. 고등법원격인 평양 복심법원에서 그는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동포를 죽이는 짓을 하고 말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같은 인간임에도 그는 자신만의 살 길을 좇았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독립투사의 그런 의연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의 시작이었다.
그는 양심이 점화시킨 열기를 못 이겨 집을 뛰쳐나갔다. 판사직을 던지고, 어머니와 아내, 세 자녀까지 뒤로한 채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막 걸음마를 떼고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아빠, 빨리 와요”라고 재롱 부리던 막내딸의 모습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엿판을 등에 메고 3년간 하릴없이 길을 헤맸다.
37살에 출가한 효봉은 늦깎이 출가를 만회하기 위해 수행에 정진했지만 여전히 가슴속에서 타는 불 때문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해 다시 만행 길에 나섰다. 간도까지 ‘숨은 도인’ 수월 선사를 찾아갔고, 다시 남하해 경남 양산 통도사 내원암의 용성 선사에게 법을 구했다. 그러나 위대한 스승도 내면의 불을 꺼줄 수는 없었다. 효봉은 2년간의 만행을 뒤로하고 다시 신계사로 돌아왔다. 그는 선원에서 참선 중 쉬는 시간조차 거부한 채 용맹정진했다. 제자 고은 시인은 “큰스님은 엉덩이가 짓물러 방바닥에 눌러붙을 만큼 처절히 수행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효봉선사’가 1937-1947 10년을 머문 곳이 순천 송광사(松廣寺)다.
송광사에서 스님은 꿈에서 16 국사 중 마지막 국사인 고봉화상을 만나 “이 도량을 빛내 달라”며 내린 법명 ‘효봉(曉峰)’을 받는다.
효봉의 운수행각이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로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유점사에서 과거 판사의 신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효봉은 부인은 물론 어린 세 자녀도 모르게 집을 나왔다.
그런데 평양 복심법원에서 함께 근무한 일본인 판사 와타나베가 유점사에 놀러왔다가 효봉, 아니 이찬형의 모습을 알아본 것이다.
와타나베는 효봉의 신분을 주지에게 알렸다. 효봉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효봉은 1937년 금강산과 작별을 고한다.
발길이 머문 곳은 송광사였다. 송광사 삼일암 조실로 십년을 머물렀다.
송광사 창건 및 연혁
송광사(松廣寺)는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12번지 조계산(曹溪山)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松廣山)에서 비롯되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광사에는 3대 명물이 있는데, 이는 사찰의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인 전남유형문화재 19호 능견난사(‘보고도 못 만든다’는 뜻), 4,000명이 먹을 밥을 담을 수 있다는 비사리구시, 800년 된 향나무 두 그루가 얽힌 쌍향수이다.
불교에서는 귀하고 값진 세가지 보배 불(佛), 법(法), 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합니다.
한국 불교에는 이 삼보를 상징하는 삼보사찰(三寶寺刹)이 있으니,
양산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佛寶寺刹),
합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모시고 있어 법보사찰(法寶寺刹),
순천 송광사는 한국 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어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합니다.
조계산은 조동화가 걷고 싶은 산이다.
여지껏 한번도 찾지 않았던 조계산자락에는 효봉스님이 10년간 수행한 송광사가 있어 효봉스님의 발자취를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는곳이여.
순천의 조계산을 동행할 친구가 있을까?
누가 조동화를 알아.
조계산 정기를 받고 오자.
순천 조계산 (曺溪山 888m)
조계산은 전남 순천시 송공면과 주암면 일대에 걸쳐 있는 해발 888m의 산으로 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
원래 이름은 송광산이었는데,고려 희종 때 조계산 으로 바뀐것으로 송광사라는 이름에서 옛 산 이름의 흔적을 찿을 수 있다.
조계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부드러운 산으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울창한 숲,폭포와 약수등이 있어 경관이 아름답고 봄철의 벚꽃이 대단하고 가을철의 단풍이 유명하며, 한반도 남단에 있다 보니 단풍이 늦게 들어 10~11월에 인기가 많다.
전국3대 사찰(해인사,통도사,송광사)중 하나인 송광사와 고찰인 선암사가 주능선을 중심으로 동서에 자리하고 있으며,선암사 계곡을 흐르는 동부계곡은 이사천으로, 남부계곡은 보성강으로 흘러들고 있고 만수봉과 모후산이 송광사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장군봉,깃대봉,일월석등이 줄지어 솟아있다.
송광사에서 3.4km 떨어져서 마루에 있는 천자암에는 천연기념물 제88호인 쌍향수(곱향나무)가 있는데, 두 그루가 나란히 쌍으로 자라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며 높이 12m에 수령이 약8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표충사(表忠祠)
경상남도기념물 제17호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혼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에서 명명한 절이다.
1715년(숙종 41)에 중건한 사실이 있으나 1926년에 응진전(應眞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 문화재 및 건물로는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을 비롯하여 보물 제467호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석등(石燈) ·표충서원(表忠書院) ·대광전(大光殿) 등의 지방문화재와 25동의 건물 사명대사의 유물 300여 점이 보존되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원래 이곳에는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 있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퇴폐된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한편으로 관찰사 조태억(趙泰億)에게 보고하여 조정에 계(啓)를 올려 나라에서 제수(祭需)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사당을 다시 세워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한 기허당(騎虛堂)의 영정을 모셨다. 그리고 한 전각을 사당 왼쪽에 지어 사명대사가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간 원불(願佛)을 대구 용연사(龍淵寺)에서 가져 와서 봉안하고, 동서쪽에 요사(寮舍)를 지어 수호하는 승려가 살 수 있도록 하였다.그 뒤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남붕이 총책임을 맡고, 연초(演初)·취안(翠眼)·최심(最心)·상현(尙玄) 등이 도왔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또한, 원불전(願佛殿)·노전(爐殿)·예제문(禮制門)·의중당(義重堂)·자하문(紫霞門)·명인루(明禋樓)를 세웠다. 사당의 좌우에 선원(禪院)과 교당(敎堂)을 세웠는데, 향교와 서원의 동·서 재실(齋室)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1742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사명대사의 비석(密陽表忠祠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다. 이렇게 모든 사우를 정비하여 다시 세웠기 때문에 중흥사(重興寺)라 하였다.그러나 향례(享禮)를 지낼 때마다 바람과 비를 만나게 되고, 산세가 옹색하고 길이 험하여 살고 있는 자나 제향에 참여하러 다니는 사람 모두 이를 병폐로 생각하여 불편함이 많았다. 이에 남붕이 옮기려고 뜻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38년(헌종 4) 사명대사의 8세손인 천유(天有)가 예조에 보고하여 부사 심의복(沈宜復)의 도움으로 1839년에 영정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당시 영정사는 이미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백팔번뇌(百八煩惱)
百 일백 백, 힘쓸 맥
八 여덟 팔
煩 번거로울 번
惱 번뇌할 뇌
불교(佛敎)에서 나온 말로 인간(人間)의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에 걸친 108가지의 번뇌(煩惱), 즉 사람의 마음속에 엄청난 번뇌를 이름.
인간이 지닌 108가지의 번뇌. 6근(根)에 각기 고(苦)·락(樂)·불고 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이에 탐(貪)·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과거·현재·미래로 각각 풀면 108가지가 됨. 일반적으로 인간의 마음의 엄청난 번뇌를 말함.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가지는 108가지 번뇌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중생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감각기관이 사물을 접할 때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의 세가지가 서로 같지 않아서 괴로워하며 또한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과 관련이 되어 6x3=18에 다시 18을 더해서 36이 된다. 거기에 36개의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를 가지기 때문에 36x3=108이 된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늘 느끼게 되는 108가지의 느낌을 의미한다.
실제 인간의 번뇌가 108가지라기보다는 그만큼 많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될 듯 하다. 불교에서는 108개의 알로 염주를 만들어 돌리면서 삼보를 생각하면 108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하며 혹은 본래적 자신의 마음인 일심의 회복을 강조하기도 한다. 비단 염주 뿐만 아니라 종종 절에서 행하는 특수한 기도법인 '108배' 또한 바로 이 108가지 번뇌를 순환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다. 기도라는게 은근히 고통스러운 행위이고 따라서 108개의 번뇌를 해소하려면 기도를 108번 올려서 그 고통으로 108개의 번뇌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상쇄한다.[1] 뭐 이런 개념으로 보면 된다.
===나무위키===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경남 양산 통도사 경남 합천 해인사 전남 순천 송광사
삼보사찰로 꼽히는 이 세 사찰은 가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산의 통도사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 불보사찰이 되었고, 합천의 해인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경전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어 법보사찰이 되었습니다. 또 순천의 송광사는 고려 말 16명의 국사를 연이어 배출함으로써 승보사찰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 (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 깊은 고찰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 혜린선사에 의해 창건되어 송광산 길상사라고 하였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9년 동안의 중창불사를 통해 절의 규모를 확장하고, 정혜결사를 통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근본도량으로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을 포함해 16분의 국사가 주석했던 선종사찰로, 오늘날까지도 승보종찰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사찰로 여겨지고 있다. 그 동안 정유재란 및 임인년(현종 8년 : 1842년)의 대화재,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8차례의 대규모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송광사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목조삼존불감(국보 42호), 고려고종제서(국보 43호), 국사전(국보 56호), 금동요령(보물 179호), 하사당(보물 263호) 소조사천왕상(보물 1467호)등을 비롯해 총 8천여점의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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