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동림호 선원 신명구씨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여전히 빨갱이 소리를 들을까 걱정하며 카페의 구석에서 조심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
ⓒ 변상철 | 관련사진보기 |
전라남도 여수시의 작은 섬 적금도가 고향인 신명구씨는 현재 여수에서 살고 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17살 때부터 배를 탔다는 신씨는 겨울에는 여수에 나와 막노동을 하고, 날이 풀리면 다시 바다로 나가 일하며 생활했다고 한다. 어려서 부모님 모두를 잃고 일찍 결혼한 친형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신씨는 납북 사건 이후로 가정생활이 모두 파탄 났다고 했다. 결혼 전 국가보안법 전과가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것이 결혼 생활을 어렵게 만든 화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내는 제가 이북 갔다 왔는지 모르고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디를 갈 때마다 경찰서 정보과에 보고를 해야 했거든요. 그래도 아내 모르게 경찰 감시나 보고하는 것을 잘 숨기고 살았는데, 한번은 제가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무릎이 너무 아팠거든요. 그래서 처갓집에 가서 요양을 하고 있는데 그때 여수경찰서 형사라는 사람이 처갓집이 있는 영광까지 찾아왔더라니까요. 당시 아내의 큰아버지가 고흥의 면장을 보고 있었는데 그 일을 알고 발칵 뒤집어졌죠. 네 남편 뭐하는 사람이냐고."
결국 신씨는 들켜버린 과거로 인해 아내와 아이들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은 저인망배로 생계를 이어가던 신씨에게 배가 몰수되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국가에서 저인망 배 면허를 헐값에 몰수하는 일이 벌어졌고, 그 당시 신씨는 저인망 면허를 몰수 당해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적지 않은 금액을 대출받아 구입했던 저인망 배도 더 이상 몰수 없었다. 헐값의 보상금으로는 선박구입 당시 받았던 대출금을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빚만 잔뜩 안은 채, 파산신청을 해야 했다. 결국 신씨는 가족도 경제력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1972년 동림호에 승선하며 시작된 불행이라고 했다.
이북 배가 들어와서 납치
당시 동림호의 선장이었던 신평옥씨는 신명구씨의 먼 친척이었다. 17살 때부터 연안 배에서 식사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화장'으로 선원 생활을 시작해 그물질을 배웠다. 연평도 같이 멀리까지 조업하는 것은 1971년 5월 동림호가 처음이었다.
"처음에 흑산도 쪽으로 생선을 잡으러 갔는데 조업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올라가자고 한 것이 연평도까지 가게 된 것이죠. 사실 우리 같이 나이 어린 평선원들이 어디가 연평도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 처음 가는 곳인데요. 연평도에 가서 작업을 하는데 우리 함대가 다가오더라고요. 다가와서 하는 말이 조업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슨 서류를 쓰더니 그물 걷어서 덕적도로 들어와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선장이 알겠다고 하고 곧바로 그물을 걷었죠. 그때 안개가 무지하게 끼어서 코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 됩디다. 그런데 그 함대가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이북 배가 들어와서 납치를 했어요."
오후 2시경 납치된 동림호가 밧줄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북한 순위도라는 곳이었다. 신씨는 당시 저녁 해가 질 때쯤이었으니 오후 6시나 7시쯤이라고 기억한다고 했다. '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보이는 건물에 들어가니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섭고 긴장한 탓에 제대로 밥을 먹는 선원은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 뒤 해주로 이동해 해주여관이라는 곳에서 약 한 달간 머물렀다고 한다.
"해주 시내를 들어가기 전에 냇가에서 얼굴을 씻게 해주더라고요. 그때까지 씻지도 못한 것이죠. 그리고 해주여관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자기들 좋다는데 데리고 다니며 관광을 시켜주더군요. 특별한 교육은 없었고, 지금 민방위 교육처럼 모아놓고 강의를 하더라구요."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시 평양의 석암휴양소라는 곳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동림호 선원은 한 건물에 수용되었고, 방마다 여러 명의 선원이 함께 묵었다고 한다. 당시 석암휴양소에 억류되어 있던 남한 선원들은 동림호 뿐만 아니라 목포 선적의 중선배 1척, 그리고 동해에서 납치되어 온 10척의 배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배별로 건물에 배치되어 식사 시간에만 잠깐씩 얼굴을 보았다고 한다.
동해에서 왔던 배 중에 협동호라는 배가 기억난다고 했다. 협동호는 1972년 5월 10일 귀환한 동해 선박 2척 중 한 척으로, 함께 귀환한 창동호는 최근 속초법원으로부터 재심 무죄를 선고받았다.
"보통 납치되어도 6개월이면 나온다고 그곳 사람들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동림호 기관장이 북한에서 맹장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수술한 곳이 낫지를 않더라고요. 그래서 늘 소변기를 달고 살았어요. 기관장 몸이 회복이 안 되니까 차일피일 귀환을 미루다가 결국 1년이나 그곳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 기관장은 귀환해서도 소변 주머니를 달고 살았어요."
구타와 고문
동림호 선원들은 납북된 지 1년이 지난 1972년 5월 10일 한국으로 귀환될 수 있었다. 동림호를 타고 귀환한 선원들은 모두 해양경찰에 인계되어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다시 차량을 이용해 어느 여인숙 4~5층 건물에 감금되었다고 한다. 복도를 중심으로 방 하나당 선원 한 명이 들어갔으며, 수사관 3명이 돌아가며 조사했다고 한다.
조사 첫날부터 수사관들이 신씨에게 북한에서 받은 지령내용을 실토하라고 강요했다. 신씨가 지령받은 것이 없다고 하자 수사관들은 신씨가 '골수분자' 교육을 받아 자백하지 않는다며 각목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구타로도 자백하지 않으면 오금 사이에 굵은 각목을 끼워 꿇어앉히고는 수사관이 허벅지에 올라타 짓밟았다. 무릎이 성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도 말을 안 하니까 세면장으로 데려가더니 얼굴에 수건을 올리고 눕혀서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붓더만요. 수사관 둘이 어깨를 잡고, 머리를 잡고 해서 꼼짝도 못 하고 물을 받아야 해요. 우리 선원 중에 강봉환씨라고 있는데 그 사람은 수사관들이 뜨거운 물을 코에다 부어서 코에 화상을 입었더라니까요. 구치소에 가서 저한테 코를 보여주는데 코가 익어서 뻘겋더라고요."
그렇게 물고문에 셀 수 없는 구타를 당하며 고문을 당했다. 일주일간 조사를 받고 나니 여수경찰서에서 온 수사관이 인계를 받아 여수경찰서로 이동했다. 여수에 도착해 여수로터리 위(지금의 이순신광장 부근)에 '반도여관'이라는 곳에 다시 감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곳에서 한 사람씩 여수경찰서 정보과로 불려가 역시 북한의 지령 내용을 실토하라며 고문을 당해야 했다.
"경찰들이 조사할 때 어디 어디에서 어떻게 접선하기로 하지 않았느냐며 알려주듯이 물어봐요. 그러면 그 고문 피할라고 허위로 '네, 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잖아요. 순천구치소로 넘어가서 검사 조사받을 때도 무서워서 무조건 '네네' 하는 거예요."
엉클어져 버린 인생
|
▲ 지난 10월 24일 순천지원 앞에서 열린 동림호 납북귀환어부 재심신청 기자회견 |
ⓒ 변상철 | 관련사진보기 |
그렇게 재판에 넘겨진 신씨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법률 지식이 없는 신씨는 무죄가 되어 풀려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법률적 지식이 없는 선원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항소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변호인의 조력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풀려나긴 했지만 신씨는 그 뒤로도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어디가나 여수경찰서 정보과 담당 수사관이었던 형사가 따라다녔고, 그 형사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했다. 심지어 경찰에서 친구를 포섭해 신씨의 행동을 모두 감시하며 보고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큰 딸이 삼성회사에 합격이 되어서 취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신원조회에서 제 범죄경력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입사가 취소되어버렸어요. 작은딸도 순천에 있는 대학을 나왔지만 어딜 들어가지 못하더라고요. 딸들은 말은 안 해도 늘 저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제가 고의적으로 월북한 것도 아니고 벌어 먹고 살다 보니 납북사건 같은 것이 생긴 것인데, 그것이 평생의 족쇄가 되어 버렸어요."
그는 1974년경 다시 군산경찰서로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간첩 혐의가 조작되어 징역 5년형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그 모든 것이 납북사건에 기인한다고 했다. 모진 악연의 시작이었던 납북귀환 사건을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엉클어져 버린 자신의 인생을 풀어낼 수 없다고 했다. 가정의 파괴도, 망가진 미래도, 간첩으로 조작되어 수년간 옥살이를 한 것도, 망가진 몸도 모두 납북사건으로 인한 국가의 폭력 때문이었다.
지난 10월 24일 신씨를 비롯해 1972년 귀환한 동림호 선원과 유가족이 납북귀환사건으로 처벌받은 사실에 대해 억울함을 다뤄달라며 순천지원에 재심을 신청하였다. 이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신씨는 '고통스럽게 조사받고 억울한 삶을 살았던 과거가 밝혀지길 바란다'며 눈물을 흘렸고, 고문 피해자로 함께 고생했던 신평옥씨와 고 최형도 선원의 딸 최길심씨 역시 '납북귀환어부로 인해 감시받고 처벌받았던 억울함을 국가가 하루빨리 구제해'달라며 눈물로 하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