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카페 2
틈만 나면 들린다. 집에 오고 가는 길목이라 자주 찾는다. 어쩌다 이른 아침에 가보면 산기슭에 구름이 장관이다. 밤새 구름이 이곳저곳에서 몰려와서 쉬고 있다. 하나 아침 햇살을 받으면 잠에서 깨어나 뿔뿔이 떠난다. 구름이 떠난 텃밭 끄트머리에 하얀 농막이 오도카니 홀로 서 있다. 그 농막을 보며 마음속으로‘구름 카페’라고 나도 모르게 뇌까린다.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물이 애인처럼 반긴다. 바질과 당귀, 그리고 무화과 등이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로 유혹이다. 싱그러운 초록의 물결 앞에서 모든 걸 까마득히 잊고 옅은 미소 짓는다.
하지만 그건 잠시다. 마주하는 현실은 버겁다.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 시비를 걸어온다. 흙 묻은 장갑부터 찾고 호미를 들고 잡초와 씨름하기 바쁘다. 사실 텃밭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만만치 않다. 길이가 일백여 미터에 이르는 비닐하우스가 두 동이나 된다. 서너 시간 남짓 풀을 뽑다 보면 속옷이 땀으로 흥건하다. 속옷을 갈아입으려고 비닐하우스를 나와 농막 앞에 서니‘세심정(洗心亭)’이라고 쓴 기다란 서각이 눈길을 끈다. 퇴직할 무렵 공방을 운영하는 이가 찾아와 텃밭을 둘러보고 새겨준 이름이다. 그러나 내 주제에‘세심‘이라니 언감생심이다. 그 이름 앞에 설 때마다 쑥스러워진다.
사실 초보 농부라서 모든 게 낯설다. 먼저 짓던 이는 농사로 잔뼈가 굵은 이라 사시사철 채소를 재배할 수 있도록 온갖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심지어, 겨울에도 농사를 안전하게 지을 수 있도록 보온용 수막시설까지 해 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부지런하지도, 농사에 능숙하지도 못하다. 이웃 농가를 돌아다니며 귀동냥과 눈동냥으로 농사를 짓는다. 이른 봄 비닐하우스 안에 땅을 파고 축분을 뿌린 뒤, 주위에서 권하는 작물을 거의 다 심었다. 주제 파악도 못 한 채 욕심껏 들여놓은 것이다.
작물마다 각기 다른 생육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뜻밖의 벽에 부딪히고 나서다. 기존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로 한꺼번에 물을 주었다. 어떤 작물은 물을 충분히 주어야 잘 자라고, 어떤 작물은 수분이 지나치면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 보니 오이나 상추, 그리고 무화과는 물을 듬뿍 주어야 잘 자란다. 하지만 수박이나 고추는 물을 많이 주면, 꽃의 수분(受粉)이 어렵고 달리더라도 열매가 제대로 맺지 못해서 떨어뜨리기 일쑤다. 한쪽의 웃음 뒤에 다른 한쪽은 눈물이 흐른다.
이웃 농부들이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상추면 상추, 수박이면 수박. 한 가지만 심어야지….”
맞는 말이다. 먼저 농사짓던 이는 상추만 심었다. 그리고 그 특성을 살펴서 토양을 바꾸고 비료를 주고 물과 햇빛을 조절했다. 반면 나는 욕심부터 앞세웠다. 이것저것 길러 보고 싶은 마음에 온갖 작물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던 거다. 그리고 모든 작물이 내 뜻대로 자라 주길 바랐다. 그러니 농사가 뜻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물을 주는 일 하나만 보더라도 작물마다 좋아하는 것과 견디는 것이 다 다르다. 같은 밭에 뿌리는 내리고 살아가면서도 저마다의 각기 다른 고유의 특성과 생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농사지으며 처음 알았다.
문득 사람 사는 세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저마다 다른 성정과 취향을 품고 살아간다. 양고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한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을 수는 없다. 사람마다 성정이 다르고 취향 또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나 방식만이 옳다고 여기며 상대를 그에 맞추려 한다면, 결국 서로를 지치게 한다. 오히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에게 필요한 물과 햇빛을 누리게 하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지 싶다.
오늘도 구름 카페로 향한다. 몸은 잡초를 뽑고 작물에 물을 주느라 고단하지만, 마음만은 이상하리만큼 평화롭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매달린 무화과 열매를 보며 미소 짓고, 쭉쭉 뻗어나간 넝쿨에 쩍쩍 갈라진 커다란 수박을 바라보며 자신을 되돌아본다. 농사를 지으러 갔다가 사람 사는 법을, 한 수 배운다. 아침 햇살이 비추자, 구름이 산자락을 타고 서서히 올라간다. 구름이 산마루에 올라서더니 세상 시름 모두 벗어버리고 바람 따라 유유히 떠난다. 무애(無礙) 도사처럼…. 농막 입구에 ’세심정‘이라는 이름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아직 마음을 깨끗이 씻지 못했지만, 적어도 욕심 하나쯤은 내려놓을 듯하다.
구름 카페에 오면 빈계산을 감싼 구름처럼 구름 나그네가 되는 기분이다. 차 대신 바람을 마시고 책 대신 작물의 성정을 읽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진다. 아마도 이곳을 자꾸 찾는 까닭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내 마음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농민신문 원고
첫댓글 유병덕 수필 <구름 카페 2>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김영훈 카페를 찾아오셔서 카페를 활성화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유병덕수필가님,
"구름 카페만 오면 빈계산을 감싼 구름처럼 구름 나그네가 되는 기분이다. 차 대신 바람을 마시고 책 대신 작물의 성정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진다. 아마도 내가 이곳을 자꾸 찾는 까닭은 농사를 짓는 것 보다, 내 마음의 텃밭을 가꾸기 위해서인지 모른다."는 마무리기 아주 마음에 듭니다.
앞으로도 향기 나는 수필 계속 창작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