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지도자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공소에서 부터 시작했다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선교회에서 교구장을 필두로
성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교구장이 중국을 통해서 들어오면서
여러 어러움을 겪었던 것이다 조선과 중국 청나라사이에는 국경이 있고
해안은 완전봉쇄된채 모두 육지 국경을 넘어와야 했다
최양업신부는 어렵게 1849년도 상해에서 서품을 받았다
서해안 바닷길을 보러갔다가 1845년 체포된 첫사제인 김대건신부는
1846년도 9월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조선땅에서 여전히 박해시대였고 전국에 8개의 본당이 세어질때까지도
사제가 상주하는 본당이 없을 정도로 전국에 흩어진 대부분은 공소였다
산악지역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소가 이루어졌다
공소는 1989년 세계성체대회이후 본당에 몰려든
예비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공소가 소외되어서 침체기에 들기까지
번성했다
공소를 관리할 만한 평신도봉사자들이 시골에도 남아있었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업의 발달로 도시집중화로 인해서 농촌인구의 감소와
노령화로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공소가 우리 천주교회의 원동력이 되었고 부족한 사제들을 충분히
보완할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회가 프랑스통상교역조건으로 내샌 신앙자유 영향으로
종교자유를 얻었지만 본당운영체제는 사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교구에서 본당신부체제의 확립이었다
한동안 미사는 평신도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드렸고
지금과는 달리 제대는 벽쪽으로 향하고 평신도는 사제의 등을 보고 미사를 드렸다
1990년도 소공동체운동의 일환으로 도시를 중심으로 구역.반모임이 향성되었지만
시골의 공소는 늘 어려움이 있었다
문경만 하더라도 읍내에 있는 문경성당 산하에 2군데의 공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은 본당신부가 공소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또 다른 한번은
공소신자들이 본당에 와서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 나머지는 공소에서 공소예절을 하였고요
그 넓은 지역에 수많은 마을이 있었지만 교통편도 거의 없이 농촌에서 집에서 걸어서
공소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이는 등록신자 2천명에서 100여명 남짓뿐이었다
저는 원래 신자가 2백여명뿐인줄 알았는데 어느주일 교구에서 온 사제가 알려줘서
등록신자가 2천명인줄 알게된다
그 작은 성당에서 봉사하는 레지오단원 몇몇이서
성당관할지역에 있는 성지와 모든 관리를 해왔던 것었다
제생각에는 코이노니아가 예전의 공소역할을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코이노니아에서 하는 것처럼 팀장인 코이노니아 말씀선포자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코이노니아팀에 참여하는 모든사람이 코이노니아팀진행을
맡을수가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코이노니아팀 말씀선포자는 전국단위 말씀선포자 모임이나 아니면 지구모임을
통해서 일년에 한두차례정도의 훈련을 시켜야 하는데 이는 전국 코이노니아가
성서형제회교본대로 운영하는지를 확인해야 하기 떄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레지오처럼 전국말씀선포자모임이나 지구말씀선포자모임에서
정기적으로 코이노니아팀회합이나 지구모임에 참여해서 교본대로 운영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것을 통해서 예비말씀선포자들이 선벌되고 양성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서형제회가 확장에 어려움이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말씀선포자가
양성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