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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우리 집에 왜 왔니?☆]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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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왜 왔니?]
박미라 시집 / 푸른사상시선 45 / 푸른사상(2014.09.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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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왜 왔니?
박미라
- 예지몽을 꾸었다.
뱀 한 마리가 내 이불을 덮고 천역덕스럽게 누워 있었다 -
등에 담이 들었다
급소를 공격당한 짐승이라니!
낯선 꽃뱀 한 마리 내 등짝에서 놀고 있다
불꽃 모양의 혓바닥에 불꽃 무늬 껍질을 입었다
닿는 것마다 태워버리던 전생을 버리고
뼛속까지 차가운 몸으로 다시 왔지만
불보다 뜨거운 독을 이빨 속에 고스란히 감추고 왔다
곁가지 많은 등뼈를 파고들며 웃는다
차가운 꼬리로 뭐라고 뭐라고 적는다
해독할 수 없는 등짝이 입을 딱딱 벌리며 운다
내가 풀밭이었니? 그러니까 내가 너의 그늘이었니?
아무래도 태울 수 없는 돌무지였니?
입 속을 맴도는 말들이 모래처럼 서걱이는데
열두 길 마음속을 헤집는 차갑고 길고 징그러운 인연
밤은 이미 깊고 불은 꺼졌는데
나란히 앉아서 아홉시 뉴스를 볼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 데어가며 불씨를 살릴 것도 아니면서
속이 훤히 비치는 통증의 복면을 뒤집어 쓴 채
차갑게 웃는 뱀 한 마리
우리 집에 왜 왔니?
우리 집에 왜 왔니
목격
박미라
목장갑 낀 손으로 장어를 움켜쥔다
검고 육감적인 장어의 꼬리가 햇볕을 휘젓는 동안
그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킨다
말라붙은 아침 안개를 벗겨내면서 장어의 재단이 진행된다
바다의 힘줄을 훔쳐 제 힘줄에 잇대는 현장은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하다
제사장의 근엄을 흉내 내듯 작업 내내 입을 열지 않는
그도 가끔은 자신의 목소리가 궁금한 듯
크윽, 신트림을 올린다
이 시간쯤이면 유난히 물기 번득이는 그의 눈동자,
바다의 힘줄뿐이 아니라고 파도의 무늬까지 벗겨온 것일까
새로 바꾼 부엌문 손잡이에 무지개가 어른댄다
여러 개의 실핏줄이 그물처럼 펼쳐진 눈가를 mr 문지르며
날건달처럼 목을 꺾어 칼날을 살피는 사내
오른쪽 귀의 취향
박미라
누군가 숨죽여 울고 있다 앙다문 이빨 사이로 줄줄 새는 울음소리다 아니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다 아니다
큰비가 온다는 전갈이다 빗줄기보다 먼저 도착한 빗소리이다
잠 깨니 창밖은 햇볕이 쨍쨍
낯선 빗소리에 대하여 내 오른쪽 귀에게 묻기로 한다
귀에서 나는 소리를 귀에게 묻는다
이것은 최근에 시작된 내 오른쪽 귀의 취향
달팽이관 가득 빗소리를 쌓아둔 듯
밤낮으로 들리는 빗소리 때문에 세상의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내가 즐기는 소리의 목록에도 빗소리가 있지만 소리로 소리를 지우는 건 뜻밖의 횡포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와 유리컵 깨지는 소리를 혼동한 날부터 시작된
오른쪽 귀의 소심한 반란
색깔을 뒤섞으면 검정이 되듯 소리를 뒤섞으면 침묵이 된다니
몸 속 어딘가의 근육 한 줌은 토악질을 할 때만 반응한다는데
어떤 이름을 생각할 때만 빗소리를 내는 기관이 내 안에 있거나
기어이 큰물을 내어 쓸어버릴 기록 따위가 있다는 것인지
오른쪽 귀를 만지작거리며 고흐의 자화상을 생각하는 한때
창밖에는 햇볕이 쨍쨍
역류
박미라
아껴두었던 독초를 달인다
이것은 천 녕 동안 멀린 불의 줄기이다
얼음보다 차가운 심장의 사내에게 내어줄 뻔 했지만
그때 나는 헝무의 감옥에 갇힌 채
물과 불의 경계를 구분할 줄 몰랐다
목줄기에 매달린 시큼한 비명들을 나무라듯 두드리듯
국지성 호우가 막무가내로 퍼붓는데
네가 남기고 간 우산은 너무 낡았다
흠씬 젖은 것도 아니면서 속속들이 눅눅한 몸으로
확신할 수 없는 길을 되짚어간다
여기쯤에 꽃의 구중궁궐이라는 도로 표지판이 있었지만
이미 치워진 지 오래여서 다행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제자리걸음을 망설임 없이 잊는다
덩굴식물처럼 무성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꾸역꾸역 올라오는 신물을 다시 삼킨다
더 뜨겁거나 더 썩거나 더 고여 있거나
날것들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역류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남은 불씨를 삼킨다
가슴을 뻐개며 지나가는 불길로 잠간 환해지는 몸
꿀에 대하여, 한 마디도 설명할 수 없는 낡은 벌집처럼
조금 쓸쓸하고 뜨거운 병을 이리저리 뒤적인다
돌연사를 꿈꾸다
박미라
강진 백련사로 동백꽃 보러 갔지요
꽃은 이미 지는 중이어서 길 위에 낭자합니다
너무 늦게 온 나는 고개 푹 숙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있었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버릴 것도 같습니다
듣기로는 이맘때면 동백나무 숲에서
수상한 울음소리 들린다고 해요
울고 있는 것이 나무인지 꽃인지 혹은 둘이 함께인지
모르지요 강진 앞바다를 떠돌던 다산의 혼백이
밤바람을 핑계로 다녀가는 길인지도 모르지요
한 시절 정인으로 살았던 그의 발목에 매달려
나 아직 이렇게 울울창창하다고
어린애처럼 눈물 뚝뚝 떨구는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꽃도 잎도 다 그만 두고
다산의 흔적도 백련사 흙담장도 다 그만 두고
순간을 백 년처럼 늙어 흙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제 살점 뚝뚝 떨어지는 환장할 봄날을
이제 그만 견디고 싶은 지도 모르지요
누가라도 선 채로 죽고 싶을 때가 더러 있겠지요
낚시
박미라
한 생이 저문다는 게 무언지도 모르는 채
오직 먹기 위하여 흡, 흡, 죽음을 거듭하는
숭어를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고
흡! 숨을 멈추며 낚싯대를 당긴다
허공 중에 포물선 하나 팽팽하다
흡과 흡이 당기는 목숨의 무늬가 부르르 떨린다
순간 바다쪽으로 휙, 몸이 기운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죽음 직전의 비명이
빠르게 등줄기를 훑고 간다
때 아닌 추위에 정신 아득하다
중심을 잃으면 지는 것이다
뱃바닥 비늘이 소름처럼 일어선
숭어가 온몸으로 좌대 바닥을 두드린다
집채만 한 파도와 캄캄하게 막아서는 암초들을 생각하면
이쯤이야 별 것 아니라는 듯
점점 무거워지는 지느러미를 끙! 일으키며
숭어는 없는 바다를 향한다
지금 막 핏빛 석양이 들끓는다고
어디론가 급하게 전화하고 싶어진다
풀
박미라
부드러운 것들은 발톱도 이빨도 몸속에 두고 산다
두 손을 비벼 버석버석 마른 잎 쓸리는 소리를 내며
나, 지금 잘 마르는 중이다
세상의 모든 몸들 속에는 억겁을 돌아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어서 몸의 한 생을 끌고 간다 그러니까, 몸이 지워지는 것은 시간의 발효일 뿐 몸의 주인과는 무관한 일이다 다만, 뿌리가 몸을 기약하는 것은 흙의 일이므로 까닭을 규명할 수는 없다
어둑한 논둑에서 허공을 향해 이빨 허옇게 번득이는 누군가를 본 적이 있는지 그가 머리카락처럼 기다란 손톱을 꼭꼭 씹어 삼키는 걸 본 적이 있는지 그런 날 밤이면 까닭 없이 종아리 얼얼하고 옆구리 쿡쿡 쑤시지 않았는지
부서진 빗장뼈를 추려들고 달려갈 마른 풀 한 포기의 주소를 알고 있는지
어두워질 무렵
박미라
어떤 울음은 촛불을 훅 불어 끈 순간처럼 아득하다
몸을 감춘 채 어둠을 배경으로만 흘러나온다
믿을 수 없지만
지렁이가 울고 있다
모래도 울고 장롱도 울고 어머니도 울지만
지렁이가 운다니,
팽팽히 당긴 비단실을 튕기듯 파르르 떨리는 울음소리를 듣다가
나는 놈을 한 줄기 바람이라고 부를 뻔했다
연초록 이파리라고 우길 뻔했다
저 옥수수 밭에 세상에는 없는 현악기 하나 묻혀 있나 했다
언제라고 밝힐 건 없지만
울음에 홀려
간을 빼주고 심장을 꺼내주고
뜨거운 울음을 날것인 채 삼킨 적이 있다
그날 이후
칼을 물고 세상을 건너가는 종족이 있다는 걸 믿는다
지렁이 따윈가 마음의 풍경에 끼어드는
애 터지는 저녁이다
낯선 섬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린다
박미라
어떤 길로 나서도 바다에 닿는 섬에 와서 흐르는 것들을 생각한다
저 바다 밑에는 얼마나 많은 길들이 잠겨 있는지
길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든 길들은 사라지거나 지워진 것이 아니고
닿을 수 없는 어딘가에 찢어진 깃발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인데
바다는 그 많은 길들을 감당하느라 허옇게 뒤집어지거나 펄펄 끓는 태양을 삼켜 뒤란을 밝혀보기도 하고
빛으로도 어둠으로 달랠 수 없는 길들 때문에 밤이면 소리 내어 울기도 하고
내장을 드러낸 생선들 곁에서 죽은 듯 산 듯 졸고 있는 폐선들은
차마 잊을 수 없는 몇 개의 길을 곱씹는 중이고
없는 길을 찾아 발바닥 부르트던 수평선 쪽으로 녹슨 가슴팍을 보여주는 저물녘
돌아갈 날짜를 정해둔 것은 아니지만 막배 떠났다는 소리에 막막하다 막막하다 중얼거리며 조금 쓸쓸해지는데
민박집집 마당에 널린 다시마 줄기가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길은 아닌지 손 내밀다가
바다 비린내에 문득 속이 뒤집히는 건 여전히 파도 높은 때문이고
여기서는 닻의 방향이 보이지 않는 배 한 척 노을에 걸려 있고
추억은 단단한 등뼈를 가졌다
박미라
녹슨 철길 위에서 할머니 몇 사진을 찍고 있다
올라타, 올라타라니까,
레일 위에서 비를거리며
꿀벌처럼 붕붕대는 늙은 아이들
저 사진을 인화하면
반들거리는 레일과 유리창 환한 기차가 있으리
기차 속 점 하나를 얼른 짚으며
봐, 나야, 나라니까, 혼자서 자지러지거나
사진 찍기 싫다니까, 열일곱 그때처럼 토라지기도 하면서
클클클, 틀니 달각거리는 한 시절이 흘러가리
호르르 꽃잎 지던 저녁이 지나가리
밤 깊으면 홀로 깨어
오지 않는 것들 쪽으로 무릎 꿇는지
패이고 멍든 자국 선명한
침목에 기댄 냉이가 새파란데
모처럼 추억의 배경이 된 철길의 등뼈를 훑으며
굼실굼실 흘러가는
단단하여 한결 쓸쓸한 추억의 등뼈들
등뼈만으로 백악기의 공룡을 불러내는 손이 있다지
해당화
박미라
너무 큰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처럼 칭얼대는
해당화 꽃잎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며
연분홍 살점의 냄새를 더듬으며
턱수염을 쓰윽 문지르던 손을 생각하는데
꽃잎 근처를 더듬대는 팔목에 불같은 통증이 달려든다
솜털처럼 보스스한 이것들이 가시였다니, 여름이 다 거쳐 갔다니,더는 물어야 할 말이 없어
혼자서 노래하며 툭툭 터진 입술만 잠깐 보여주고
벌겋게 긁힌 팔뚝을 감추며 돌아서는데
뿌리가 보이도록 패이고 다시 쌓이는 모래톱에 발을 묻고
입을 열면, 노을 따위 상관없이
여전히 연분홍으로 피고 지는
입을 열면, 제가 겪은 온갖 바다를 발설하게 될까 봐
향기조차 몸 안에 가두고
몰약처럼 슬몃슬몃 흘려보내는
지금 막 발효를 끝낸 술맛 같은 꽃
이파리 사이로 어른대는 붉은 열매를 훔쳐보며
아까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자고
아무래도 갯비린내에 취한 것 같다고
나는 또 그때처럼 일그러지는 입가를 문지르는데
나프탈렌 한 봉지를 한꺼번에 삼킨 듯
빠르게 증발하는 쓸쓸한 냄새들
울음의 온도
박미라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이자
꿈속까지 따라왔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밤이 갑자기 깊어지고
웅크렸던 다리를 펴면서 돌아눕는 울음을 가까이 당긴다
울음의 껍질은 늙은 장수의 갑옷처럼 완고하다
발톱 긴 바람을 끌어들여 껍질의 틈새를 후벼보지만
몸속에 천만 길 벼랑을 감춘 울음의 꼬리를 번번이 놓친다
오늘처럼 급하게 소리를 삼킨 날은
꾸르륵 꾸르륵 늙은 비둘기 소리를 흉내 내며
가슴의 굽이를 헤집다가
소리도 없이 돌아와 눕는 울음의 무게에
가위 눌리는 새벽녘
온몸의 핏줄을 팽팽히 당긴 채 달려드는 사람처럼
펄펄 끓는 전기장판의 코드를 뽑고
아직 식지 않은 울음을 끌어안는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울음이 가본 적 없는 꿈속 이야기를 꾸며대는 것뿐이다
내가 꿈속에서 자주 흐느끼는 건
열전도가 빠른 울음은 전염성도 강한 때문이라고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을 꾸며대는 것뿐이다
애월 일기
박미라
울음을 일상어로 쓰기도 한다기에
푸르르, 바람이 빠질 때까지 가슴 밑바닥을 긁어댄다
죽을 것도 아니면서
죽을 것처럼 무너지는 것들의 따귀를 때리면서 늙어간다는
바닷바람이 현자賢者로 불리는 수상한 고장
사랑을 작파하고 숨어든 내력을 간파 당할까봐
이방의 언어로 지껄이기도 하지만
목쉰 소리가 점점 익숙해진다
온종일 끌고 다닌 몸뚱이에서 소금 버석거린다
눈물의 농도에 따라 소금의 질이 결정된다는 유언비어가 떠돈다
어느 생에선가 눈물로 내건 목숨이 무던히도 질겨서
아직도 끌려 다니지만
죽어도 죽어도 죽어지지 않는 형벌을
그와 나눌 생각은 없다
돌아갈 핑계가 적힌 페이지를 내가 찢어버렸던가
애월,
천지간에 어룽이는 이름이나 부르면서
빈 의자
박미라
문 닫는 지 오래인 함바집 자리에서
풍찬노숙의 내공으로 얻어낸 거무튀튀한 보호색에
몇 군대 골절상을 더하고서야 휴식에 든 의자
켜켜이 쌓인 먼지 위에 몸을 부리자
어긋난 관절의 비음에 눈발처럼 흩어지는 고요
의자와 몸은 서로를 향해 비음의 출처를 묻지만
대답할 말이 없다
빈 의자라는 말을 믿었을 뿐이다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서로의 내력을 짐작하다가
무뚝뚝한 습관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시장에 가고 세무서에 가고 낯선 카페에도 들려라
쿠키쉐이크를 마시고 전철 시간표를 확인해라
모든 스치는 것들을 배웅으로 읽어도 좋다
그늘 쪽으로 돌아앉아 너무 빨리 오는 저녁을 등진다
가리기는 했지만 바꾸지는 못한 물빛 속살이
의붓자식처럼 주춤거리며 초저녁 속으로 숨는데
누군가 흘리고 간 전기세 독촉장이 무릎을 건드린다
나는 너무 늦었거나 너무 빨리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서둘러 떠난 함바집 주인을 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빈 의자의 하루에 대하여
빈 의자에 부려둔 나의 피로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체납고지서를 보내줘야 한다
텅 빈 것들에게도 독촉장은 유효하다
천기누설
박미라
검붉은 구기자들이 비밀지도처럼 널려 있는 청양장 마당
입 꼬리를 올리며 주섬주섬 쥐약 병을 꺼내는 사내
이번 장이 아니면 쥐약 구경도 못한다는 듯
마수걸이 손님을 어르는 사내의 눈알이 쥐눈이콩처럼 까맣다
사내는 국밥 냄새 쪽으로 굽은 허리를 더 깊이 접어보지만
요지부동인 허리가 참나무 장작처럼 무뚝뚝하다
낭창한 허리를 휘감던 날짜를 적어둔 듯
펄럭이는 바짓단 속으로 빗금 선명한 나무다리가 보인다
하여간 국밥 두 그릇 말으라구 혀
딸에게 건너가는 목소리가 부러진 화살 같다
쥐약 병은 왜 소화제 병하고 똑같은지
이걸 어디에 둬야 헷갈리지 않을지
약효를 시험해 봐야 하는데, 사내의 말을 떠올리는데 머리칼이 쭈뼛 선다
빗장뼈 아래 상처를 자해였다고 우기고 다니지만
그러다가도 정말 자해였다고 헷갈리기도 하지만
당장 쥐를 찾아 나설 수도 없고 기왕에 산 쥐약을 버릴 수도 없고
유통기간도 없다는 쥐약병을 들고
있기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쥐를 꼭 잡고 싶은 것인지 약효를 시험하고 싶은 것인지
확신 없는 아침이 밀려온다
Who am I?
박미라
지갑을 두고 나오다니,
신분증이 있고 신용카드가 있고 현금이 있는 지갑
도서 상품권 두 장과 최근에 다시 쓴 유언장이 있는 지갑
어떡하나
저 가로등이 이름을 묻는데
저 신호등이 주소를 묻는데
내 안에는 와온의 노을과 청산도의 초분草墳이 있는데
아주 새것은 아닌 증오와 모서리 흐릿한 그림 여러 장
아직 들키지 않은 욕망도 몇 다발
이것들 아무 곳에도 쓸 수가 없다
꺼내볼 때마다 가슴 무너지는 와온의 노을도
풋것 그대로인 욕망도
햄버거 하나 살 수 없다 버스표 한 장 살 수 없다
어떤 칼을 갈아도 새파랗게 날 세울 증오를
꺼낼까, 꺼낼까, 진땀 나는 손으로
초겨울 바람이 힐끔대며 지나갈 초분의 위치를 그려주고
그 주인의 약력도 적어주면 배표를 건네줄 사람 있을까
지갑을 두고 나오다니,
지갑도 없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나
지갑이 없는 나를 아무도 몰라보는 걸
내 안에 들어 있고 들어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
세상이 돌아보지 않아 온전히 내 것으로 지니고 가는 것들
내가 비틀비틀 걷는 금방 눈치채고
구석에 웅크린 채 숨죽인 이것들
아무리 착착 접어도 지갑에 들어가지 않고
악착같이 내 몸에 따라붙는
이것들 다 무엇에 쓰나
나는 청동기에서 왔다
박미라
허벅지 안쪽에 멍울이 섰다
마음이 쏘다니던 길목이 막혔다
흙장난하듯, 조물거리는 언 손에
흰 피 묻은 민무늬 토기가 잡힌다
달빛이 밝으면 또 다른 사냥터도 찾아낼 수 있겠다
다행히 어둠보다 깊은 잠이 쏟아졌으므로
발굴을 중단한다
뜻밖의 침입자가 있을지도 몰라
오래된 돌칼을 당기면 웅크려 눕는다
달의 형상을 훔쳤다던 ‘거친무늬 거울’속에 그대에게 들베게를 건넨다
먼발치에서 바람의 기척이 들린다
이로써 멍울의 병명을 유추할 수 있겠다
빵에 대한 맹세
박미라
아제르바이젠에서는 빵을 두고 맹세하는 풍습이 있다는데
신 앞에 무릎 꿇거나 하늘을 부르거나
머뭇머뭇 건네는 목숨쯤은 맹세가 아니라는데
아제르바이젠,
이름도 처음 듣는 낯설고 먼 나라에는
맹세로 부풀린 빵이 있다는데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빵에 키스하기 위하여
밀밭 고랑을 누비는 여자
노랑눈썹솔새 소리를 촘촘히 받아 적고
치마폭 가득 바람의 냄새를 가두는 여자
꾸역꾸역 밀려오는 저녁 속으로 맨발을 슬쩍 밀어넣기도 하면서
자신의 빵 속으로 수천 수만의 길을 옮겨 가는 여자
밤마다 빵 속에 감춰둔 밀밭 지도를 남몰래 꺼내보면서
새로운 길을 따라가 보는 여자
밀밭에서 데려온 것들 중 하나가 까르르 웃음 터뜨린 날이면
황금색 껍질의 빵을 내놓는 여자
날마다 똑같은 빵을 굽고 똑같은 맹세를 거듭하지만
내일도 빵을 굽겠다고 맹세하는 여자
자신의 맹세를 확인하듯
천천히 빵을 뜯어먹는 여자
돌처럼 굳은 빵 덩어리를 징검다리 삼아 전생으로 놀러가기도 하는
발효를 끝낸 얼굴이 빵처럼 다정한 여자
아마도 몇 생을 두고 내 이름을 부를
지긋지긋한 여자
세상에는 생각만으로도 가슴 뻐근한 말이 아직 있어서
굳은 식빵 곁에서 입술 깨무는
먼 곳의 여자
석불여래좌상*에게 쓴다
박미라
들키기 위해서 나선 길이다
이게 나야 내 얼굴이야 눈썹을 그리고 코를 풀고 이빨을 닦으면서 작은 꽃밭 가꾸듯 정 붙이고 살았는데
거울을 보면 문득문득 나타나는 얼굴이 있다 내 꽃밭을 헤치고 불쑥 솟아나 한참씩 울먹이는 그대를 숨기고 사느라 나는 늘 숨을 헐떡인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돋는 그대를 세상 천지에 대놓고 들켜버리려고 나선 길이다
누가 봐야 할 텐데 저것들 기어이 만나고야 만다고 허긴 기다림을 당할 게 천지간에 있겠느냐고 모두 수근거려야 할 텐데
천 년쯤은 찰나라고 우기며 솜털 하나 변하지 않았다지만 오른쪽 넓적다리 움푹 파인 걸 보면 밤마다 무릎걸음으로 헤매는 게 분명해
여기 그대의 목을 가져왔어 오늘은 꼭 돌려 줄 거야 다시 나를 부려 세상을 보려 하지 마 그대가 본 것을 내가 봤다고 착각하게 하지 마
나는 이제 무서워 그대의 목이 내 가슴까지 뿌리를 내렸어 더 망설이다가 나는 통째로 먹혀버릴 거야 아무리 뽑아내도 다시 돋아나는 그대의 목을 나 세상에 들켜버리고 말거야 꾸역꾸역 피를 토할 거야 내 몸에서 올라오는 피를 그대 목으로 토할 거야 마음이 정한 주인은 마음의 것일 뿐 이름이야 없어도 그만이야
그대 목을 돌려주고 나 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 갈 거야 마음에 머무는 것들이 영원 하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 끄덕이며 이제 그만 열반에 드시기를
먼지 풀썩이는 맨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하고 돌아간다
* 경주 남산 삼릉계곡에서 천년을 사시는 목 없는 부처
감자 굽는 저녁
박미라
은박지에 싼 감자를 모닥불 속에 던져 넣는다
허리를 꺾은 채 획, 돌아서는 불길
일제히 손바닥을 펴 불길을 막아내는
몇 번이고 뜨거운 것에 데어본 고수들
주춤 물러서거나 슬쩍 몸을 기울여 불땀을 확인한다
감자라고?
감자 따위는 먹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돌멩이를 넣었을 지도 모른다
구운 감자 하나를 먹는 것보다
구운 돌 하나를 품는 밤이 훨씬 따듯하다는
조금 모호한 주장을 믿어버리면
구운 것들이 모두 말랑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눈동자를 쓰윽 핥고 지나가던
초저녁 모닥불의 문양이 선명한 얼굴들
덜 익었거니 숯덩이처럼 타버린 감자를 꺼내놓고
모닥불 곁에 주저앉는다
세상 것들을 두루 구워본 무림 고수들이
잘 익은 감자를 고르겠다고 허둥대는 밤이다
눈물을 기다리는 잠깐
박미라
바람 부는 쪽을 자주 쳐다본 탓일까
눈 속에 무엇인가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눈을 감고 눈물을 기다려보지만
슬픔이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니었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눈물은 나오지 않아
생각만으로도 철철철 눈물 흐르던 한 순간을 꺼낼까 망설인다
자신도 모르는 길을 품은 채 여기까지 왔는지
거울 속 붉은 눈동자에는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는 길들이 어지럽다
불타오른다고 믿으며 울었고
틀림없이 누군가 빠졌을 거라고 믿으며 울기도 했지만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날들도 있었는데
눈 속에 들어왔으나 바라볼 수 없는 무엇이
메마른 슬픔을 후벼 파고
방목된 바람을 따라가던 헛된 길 위에서
나는 그저 눈감고
형체 없는 것들에게 바쳤던 뜨거움의 목록을 뒤적일 뿐
아무래도 혼자서는 빼 낼 수 없는 지독한 것이
하필이면 눈 속에 박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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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아니다. 꿈속이다
결국, 꿈속을 건너갈 것이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지긋지긋한, 참혹한,
끝끝내 비루한 그림자들
이제, 나를 좀 내버려두어라
2014년
박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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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詩集 [※우리 집에 왜 왔니?※]
[ 해설 ] -
내면화된 울음으로 낯선 풍경 견뎌내기
오 태 호
1. 꿈속의 그림자 들여다보기
박미라 시인은 낯선 풍경과의 전투에 힘겹게 임하고 있다. 낯선 풍경은 시인의 내면에 내재하기도 하고, 외부에 산재해 있기도 하다. 시인의 심미안이 내부 혹은 외부를 향하여 작동하는 순간 그 풍경들의 낯섦은 시인의 언어로 육화된다. 그리고 그 언어적 풍경이 이번 시집에 채집되어 있다. 이물적 존재감, 천 년의 감각, 몸의 육체성, 울음, 눈물 등이 그 키워드들에 해당한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지금 여기를 ‘꿈속’으로 명명한다. 현실을 꿈속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장주몽적 세계관을 닮아 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혼돈의 양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꿈속을 건너 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왜냐하면 ‘여기 꿈속’은 “어디에도 없고 / 어디에나 있는” 지긋지긋하고 참혹하여 “끝끝내 비루한 그림자들”이 존재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여기 꿈속’을 향해 시인은 “나를 좀 내버려 두”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그 호소가 먹힐 리는 만무해 보인다. ‘꿈속’이라는 공간은 현실 공간에 자리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 부재의 공간이지만, 시인이 분명하게 “어디에나 있는” 실재의 공간으로 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재와 실재를 유동하는 ‘꿈속’ 같은 공간은 ‘억압된 무의식의 공간’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박미라 시인에게 그 공간이 문제적인 것은 그 내부에 지긋지긋하고 참혹하며 “끝끝내 비루한 그림자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꿈속의 그림자들’이 오랫동안 시인의 내면에 흡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다는 것은 그 풍경의 형상이 비참하고 끔찍한 감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비루’하다는 것은 자신을 닮은 그림자의 형상이 비천하고 누추하기 때문이다. 결국 ‘꿈속의 풍경’은 거부하기 어려운 실체로 각인되어 시인에게 ‘지긋지긋하면서도 참혹할 정도의 비루한 형상의 그림자들’로 실재한다. 시인의 시쓰기는 그 그림자들의 세계를 언어로 부려놓는 행위에 해당한다. 시인의 그림자 드러내기 퍼포먼스를 함께 공유하면, 내 안의 꿈속의 형상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유하는 시 읽기’에 젖어들게 된다. 시인의 꿈속 표정이 편재적 보편을 지향하는 특수한 개별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2. 이물적異物的 존재감의 개진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돌과 새, 꽃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바슐라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통상적으로 돌은 단단함의 상징인 물질적 상상력, 새는 자유로운 비상으로서의 역동적 상상력, 꽃(=나무)은 천상과 지상을 매개하고 자연의 생명적 순환을 환유하는 식물적 상상력을 표상한다. 하지만 시인에게 그 이미지들은 자아화된 세계의 풍경을 보여주는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한다.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세계로부터 호출되고 선택된 이미지들인 것이다.
이번 시집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돌과 새의 행간」은 시인의 내면을 장악한 ‘광물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상상력’을 결합한 이물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가 쓸개에서 꺼낸 붉은 돌 하나를 보여준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작은 돌은
뱉어낸 지 오래인 객혈처럼 조금 적막하다
이 일을 정말 그가 계획했을까
제 몸을 조금씩 돌로 만들어, 잘게 부수어
은근슬쩍 지워지고 싶었을까
불붙지 않는 마그마를 품은 채 너무 오래 걸었다
분별없이 떨구는 눈물처럼
한 방울 담즙 따위로 무게를 덜어내는
지상의 나날들은 참혹하거나 지루하여
잔뜩 웅크린 채 돌의 시절을 부르고 있는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노을 빛깔의 날개가 돋을 것이다
죽은 새처럼 보이는 저 돌을 힘껏 던지면
던지는 쪽으로 날지 않고
허공을 맴돌다 아무도 모르는 어떤 별로 돌아갈 것 같은데
사라진 쓸개에 대하여 발설치 않을 것을 혼자 다짐하며
문 앞에서 돌아본 병상 위에
붉은 새 한 마리가 깃털이 빠진 자리를 더듬고 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부리를 가진 미기록 맹금류였다
-「돌과 새의 행간」전문
시의 서사적 이미지를 추적해 보자면, 시인은 ‘그’가 “쓸개에서 꺼낸 붉은 돌 하나”를 보며, 그 작은 돌이 “뱉어낸 지 오래인 객혈처럼 조금 적막하”게 느껴진다고 판단한다. 그 돌은 “분별없이 떨구는 눈물처럼” 내면의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지상의 날들이 “참혹하거나 지루”한 현실이었음을 증명한다. 지나온 “돌의 시절”을 그가 웅크린 채로 기억해 내면 노을빛의 날개가 돋아날 것으로 시인은 상상한다. 그러나 이미 “죽은 새처럼 보이는” 그 돌을 집어던진다면 “아무도 모르는” 미지의 별로 돌이 돌아갈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라진 쓸개”를 발설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병상의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는 “붉은 새 한 마리”가 되어 깃털 빠진 자리를 더듬는 존재로 환유된다. 그는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부리를 가진 미기록 맹금류”로 시인의 내면에 채록되는 것이다.
쓸개가 없어진 환자 ‘그’를 병문안 간 시인이 쓸개에서 끄집어낸 ‘붉은 돌 하나’를 보면서 상상력을 작동하여, 지상의 참혹하고 지루한 날들이 그 내면의 돌에 버무려져 돌의 시절과 새의 기억을 통해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돌팔매질을 연상하는 것으로 시상은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그’라는 영장류가 실은 ‘붉은 새 한 마리’의 존재감을 지닌 채 살아왔으며, 금강석의 부리를 소유한 “미기록 맹금류”였음을 기록한다. 영장류인 인간의 쓸개에서 꺼낸 붉은 돌 하나의 이미지 추적을 통해 ‘돌과 새의 행간’을 독해하며 그 인간을 맹금류라는 이물적 존재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물적 이미지로의 전위는 시인이 환유적 인접성의 원리를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접한 다른 존재로의 연상을 통해 개별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유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내면에 “Tic라는 이름의 새”(「틱(Tic)에 대하여」)가 존재한다고 진술하는 시에서도 드러난다. 그 새는 “제멋대로 가슴에 터를 잡은 낯선”존재이다. 잘 익은 시인의 잠을 꺼내 먹는 그 새는 “마른 정강이쯤에 걸터앉아 하루를 시작”하며 “돌보다 무거운 새”로서 “느닷없이 무르팍을 후려치거나 가슴을 쥐어박아” 시인을 “쓰러트리는 새”이다. 그 새를 찾으려고 시인이 자신 내부의 것들을 쏟아놓지만, ‘익명의 입맞춤, 노을 한 점, 강아지 한 마리, 국밥, 바람 소리’ 등이 바깥에 부려진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 찼던” 시인을 “혼자 차지한” 새는 “천 개의 바늘로 만들어진 부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된다. 이렇게 보면, ‘그’라는 사내뿐만이 아니라 ‘나’라는 시인 역시도 금속성 부리를 소유한 맹금류에 해당하는 조류적 존재감을 내장한 영장류인 것이다.
시인은「일몰이 내부」에서도 강물 위에 떠 있는 두루미 몇 마리를 보면서 “구름보다 고요한 저 새를 울음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기술한다. “물속에 든 울음의 그림자를 건져 올리면/허공에 떠 있던 울음이 제 그림자 위로 내리”면서 “배경도 울음도 제각각의 심장을 두근대며 순간의 문양을 새기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 하늘 아래의 두루미를 보면서 시인은 “한 생을 천 년이라고 우기”면서 “울음의 배경도 헛꿈이라고 명명하는 저녁”에 흘러가는 것이 ‘자신도 아니고 새도 아닌’ 그 둘의 풍경임을 토로한다. 이렇게 보면 이물적 존재감은 시인의 시작 태도의 본질에 해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음과 배경이 풍경이 되는 모습은 다음 생을 진눈깨비로 희원하는 시「부음」에서도 드러난다. 시인은 봄날 저녁에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니”기에 “눈도 있고 비도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 ‘진눈깨비’가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태어난다면 “진눈깨비로 태어나야겠다” 라고 다짐한다. 경계를 넘나드는 ‘진눈깨비로의 재생’을 “다음 생의 희망”으로 적는 시인은 양가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맹금류적 정체성을 토로하던 영장류 시인은 타인과 자신과 풍경과 세상을 함께 들여다봄으로써 이물적 이미지를 내장한 이중적 존재인 것이다.
3. 천년의 감각에 대한 희원
이종적 존재로서의 시인은 천 년을 욕망한다. 한평생으로 백 년도 살기 힘든 인간에게 ‘천 년’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무한성을 강조하는 시간대로 활용된다.「일몰의 내부」에서 “한 생을 천 년으로 우기”고 싶다고 언급했듯 시인은 ‘천 년의 감각’을 내면화하고 싶은 존재이다. 그리하여 무한의 시간을 내포한 ‘천 년’이라는 시간은 시집의 곳곳에서 시인이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는 더듬이 역할을 수행한다.
“날 것들의 역류 흔적”을 지우려는 시인은 “천 년 동안 말린 불의 줄기”(「역류」)인 독초를 달여 마시면서, 그 “불길로 잠간 환해지는 몸”을 감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천 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은 “지금도 천 년 전의 그 바람을 밀어 올”리면서 “멀쩡한 다리로 절뚝절뚝 헌화로를 지나”는 ‘천 년 전 헌화 노인’을 상상하며 “혀를 깨문다”(「후일담」)라는 진술로 이어진다. 고려가요인「헌화가」를 염두에 둔 ‘노인과 수로부인’의 후일담을 천 년 뒤의 존재인 시인이 새로이 기록하고 있는 셈이다.
‘천 년’에 대한 ‘일종의 강박’은 하루가 저무는 시간대가 되면 시인이 “천 년쯤 후에 누가 나를 옮겨 적”을까를 고민하며 “알 수 없는 울음소리”가 “끊길 듯 이어질 것”(「오드 아이」)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눈과 귀를 버리는데 천 년이 걸린”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시와 자신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천 년보다 더 오래 흘러왔기 때문”(「반갑거나 무섭거나」)이라고 짐작하기도 하고, 열꽃과 꽃에 대한 단상 속에 스스로를 “천 년쯤 묵어 사람 형상을 한 불꽃”(「꽃의 일」)으로 명명하거나, “천 년쯤은 찰나”라고 여기는 목 없는 석불여래좌상에게 “그대 목을 돌려주고”“목 없는 몸으로 가뿐히 내려갈”(「석불여래좌상에게 쓴다」) 것이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렇듯 ‘천 년’은 천 년 전과 천 년 후를 연결하는 마디점으로서의 시인의 몸을 환기하게 한다. 이러한 마디점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죽음’을 예비하고 사유해야 한다.
강진 백련사로 동백꽃 보러갔지요
꽃은 이미 지는 중이어서 길 위에 낭자합니다
너무 늦게 온 나는 고개 푹 숙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있었습니다
죽음이 이만큼만 황홀하다면
서슴없이 그대를 버릴 것도 같습니다
듣기로는 이맘때면 동백나무 숲에서
수상한 울음소리 들린다고 해요
울고 있는 것이 나무인지 꽃인지 혹은 둘이 함께인지
모르지요 강진 앞바다를 떠돌던 다산의 혼백이
밤바람을 핑계로 다녀가는 길인지도 모르지요
한 시절 정인으로 살았던 그의 발목에 매달려
나 아직 이렇게 울울창창하다고
어린애처럼 눈물 뚝뚝 떨구는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꽃도 잎도 다 그만두고
다산의 흔적도 백련사 흙담장도 다 그만두고
순간을 백 년처럼 늙어 흙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제 살점 뚝뚝 떨어지는 환장할 봄날을
이제 그만 견디고 싶은지도 모르지요
누구라도 선 채로 죽고 싶을 때가 더러 있겠지요
-「돌연사를 꿈꾸다」전문
천 년을 욕망하는 시인에게 “순간을 백 년처럼 늙”자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 년을 내면화한 시인은 동백꽃의 죽음을 보며 ‘그대의 버림’을 욕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길 위에 낭자한 동백꽃의 죽음이 ‘황홀한 죽음의 표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백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수상한 울음소리”를 ‘꽃과 나무의 울음’이거나 ‘다산의 혼백’이 다녀가는 것으로 연상하던 시인은 “그의 발목에 매달려” 울어대는 “한 시절 정인”의 삶을 환기한다. 울음소리가 옛 기억을 호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연상은 “순간을 백 년처럼 늙어 흙이 되”기 위해, “제 살점 뚝뚝 떨어지는 환장할 봄날”을 견디지 못해 동백꽃이 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선 채로 죽고 싶을 때가 더러 있”을 것으로 추정하며 ‘동백꽃의 돌연사’를 상상한다.
시인이 나무처럼 돌연사를 하고 싶은 이유는 목련나무에게서 “환하게 펼쳐질 꽃잎”이 “봄의 붓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오래전” 자신이 “써두고 온 연서”(「목련나무 아래」)라고 자부하며, 그 꽃잎이 “스스로 수습하여 허공에 남겨둔” ‘자신의 살점’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모든 나무들은 자신의 살점을 연서처럼 몸에 새기고 지상으로 낙화시키는 존재인 것이다. 꽃잎을 오래전에 써둔 자신의 연서로 생각하듯 시인은 ‘오래전’과 ‘오랜 후’라는 시간을 ‘천 년’이라는 기표로 고정화한다. 그러므로 ‘천 년’은 ‘비루한 꿈속’ 같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 무한에 대한 시인의 욕망이 빚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시간감을 압축한 것이다.
4. 시산이 발효된 몸의 육체성
시인은 왜 천 년을 욕망하는가? 시인이 백 년도 못 사는 육신의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자각하면서 그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감을 기록하기 위해 시인은 ‘천 년’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게 ‘몸’이란 무엇이고, ‘몸의 육체성’이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는가.
시인은 타인의 몸과 자신의 몸을 통해 몸의 육체성을 확인한다. 먼저 시인이 “바람에게 몸속을 점령당한 사내”(「통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어둠과 시간이 ‘그’의 몸 내부의 뼈와 살을 저미고 나눈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의 힘줄”인 장어를 재단하는 횟집 주인의 몸에서 힘줄과 쇄골에 “더운 김이 서리”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도, 그의 “유난히 물기 번득이는” 눈동자를 보며 “바다의 힘줄 뿐이 아니고 파도의 무늬까지 벗겨온 것”(「목격」)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몸에 대한 관심과 성찰은 남성만이 아니라 시인의 어머니와 이웃 할머니의 모습에서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시인은 생일날이면 “황홀한 마술”을 펼치던 어머니가 차려준 생일상 앞에서 “윗니 세 개 아랫니 두 개 남은 입”으로 웃으며 “많이 먹어라 맛있다”라고 하자, “주문을 잊어버린 마술사”의 존재감을 아프게 확인한다.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희망이 “그의 후계자가 되는 것”(「생일」)이었다는 고백은 이 시가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에 해당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녹슨 철길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모처럼 추억의 배경이 된 철길의 등뼈를 훑으며 / 굼실굼실 흘러가는 / 단단하여 한결 쓸쓸한 추억의 등뼈들”을 연상하며, “등뼈만으로 백악기의 공룡을 불러내는 손”(「추억은 단단한 등뼈를 가졌다」)을 상상한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지난 추억과 오래된 현실을 환기하는 쓸쓸한 풍경들인 것이다.
몸은 생장소멸에 대해 정직하다. 타인의 몸뿐만 아니라 숭어나, 나무 등 이종적 존재들의 몸도 시인의 관심 영역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숭어 낚시를 하면서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죽음 직전의 비명”을 감지하며 “중심을 잃으면 지는 것”(「낚시」)인 인생의 진실을 깨닫는다. 시인은 나무에게서도 몸속을 본다. “이파리들을 모조리 펼친 그 나무”가 “한 채의 빈 집처럼 고요”하게 “살과 뼈의 경계를 모두 허물”(「그 나무」)며 자신의 몸속을 허물어 “노련하거나 질긴 혹은 무심한 지경에 닿”는 신성한 나무임을 주목한다. 그 나무의 소리는 “비명인 듯”, “숨비소리인 듯”한 ‘처음의 소리’로 숲을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시인은 몸을 시간의 누적이자 발효이며, 울음의 흔적이 새겨진 공간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시인이 보기에 “세상의 모든 몸들 속에는 억겁을 돌아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풀」)으며, “몸이 지워지는 것은 시간의 발효일 뿐 몸의 주인과는 무관한 일”로 인식된다. 시간의 누적과 발효는 몸의 생리적 현상으로서 ‘몸주’와는 무관한 현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에게는 ‘그의 곡기 끊은 몸’을 보며 “마음이 몸을 부릴 수 없다는 건 / 세상에서 가장 치사하고 더럽고 처절한 싸움”(「봄날은 온다」)이라면서, “몸의 갈피마다” “울음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상상한다.
그렇다면 시인 자신에게 몸의 육체성은 어떤 모습으로 현상하는가.
- 예지몽을 꾸었다.
뱀 한 마리가 내 이불을 덮고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었다.-
등에 담이 들었다
급소를 공격당한 짐승이라니!
낯선 꽃뱀 한 마리 내 등짝에서 놀고 있다
불꽃 모양의 혓바닥에 불꽃 무늬 껍질을 입었다
닿는 것마다 태워버리던 전생을 버리고
뼛속까지 차가운 몸으로 다시 왔지만
불보다 뜨거운 독을 이빨 속에 고스란히 감추고 왔다
곁가지 많은 등뼈를 파고들며 웃는다
차가운 꼬리로 뭐라고 뭐라고 적는다
해독할 수 없는 등짝이 입을 딱딱 벌리며 운다
내가 풀밭이었니? 그러니까 내가 너의 그늘이었니?
아무래도 태울 수 없는 돌무지였니?
입 속을 맴도는 말들이 모래처럼 서걱이는데
열두 길 마음속을 헤집는 차갑고 길고 징그러운 인연
밤은 이미 깊고 불은 꺼졌는데
나란히 앉아서 아홉시 뉴스를 볼 것도 아니면서
손가락 데어가며 불씨를 살릴 것도 아니면서
속이 훤히 비치는 통증의 복면을 뒤집어 쓴 채
차갑게 웃는 뱀 한 마리
우리 집에 왜 왔니?
우리 집에 왜 왔니?
- 「우리 집에 왜 왔니?」 전문
시인의 내부에는 뱀이 자리한다. 뱀은 통상적으로 ‘지혜, 다산, 창조, 치유, 부활, 욕망’ 등을 상징하는 파충류이다. 시인에게도 뱀은 그러한 속성을 내포하면서 시인의 결핍된 내부를 장악한다. ‘예지몽’을 꾼 시인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이불을 덮고 천연덕스럽게 누워 있었다”라고 경구처럼 선언한다. 시집의 표제작인 이 작품에서 시인은 뱀의 이물감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등에 담이 들어, “급소를 공격당한 짐승”이라고 자술한다. “낯선 꽃뱀 한 마리”가 등짝에서 놀고 있는 환각을 경험하는 것이다. “불꽃 모양의 혓바닥”으로 “닿는 것마다 태워버리던 전생”을 넘어 “뼛속까지 차가운 몸”과 “불보다 뜨거운 독”을 가진 뱀이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냉열의 양극성을 내장한 뱀이 시인의 몸을 풀밭이나 그늘이나 돌무지로 여기며 등짝에서 울고 웃으며 생활한다. “차갑고 길고 징그러운 인연”을 떠올리던 시인은 “차갑게 웃는 뱀 한 마리”를 상상하며 “우리 집에 왜 왔니?”라고 반복해서 질문한다. 시인의 몸에 냉소적 뱀을 포함하여 다양한 동식물과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내면에 ‘와온의 노을, 청산도의 초분草墳, 새 것이 아닌 증오, 모서리 흐릿한 그림 여러 장, 들키지 않은 욕망 몇 다발’(「Who am I?」) 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의 몸은 낯선 풍경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인은 꿈속에서 “빗줄기보다 먼저 도착한 빗소리”를 “앙다문 이빨 사이로 줄줄 새는 울음소리”(「오른쪽 귀의 취향」)로 듣기도 한다. 하지만 잠을 깨면 현실에서 “창밖은 햇볕이 쨍쨍”할 뿐이다. 이명처럼 들려온 꿈속의 “낯선 빗소리”를 오른쪽 귀에 묻은 시인은 “밤낮으로 들리는 빗소리 때문에 세상의 소리들”을 듣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꿈속의 빗소리가 실제의 소리를 지우는 현실은 “뜻밖의 횡포”로 여겨지고, “오른쪽 귀의 소심한 반란” 속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생각”하는 시인은 ‘오른쪽 귀의 취향’을 수용하게 된다. 꿈속의 현실을 또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인은 ‘낯선 빗소리’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길’ 위에 쓰러지거나 낯선 섬을 방황하면서 ‘낯선 풍경’을 내면화한다. 그리하여 어제 내다버린 “마지막 남은 슬픔”을 오늘 다시 찾으러 나섰다가 시인은 “낯선 길 위에 쓰러”(「이석증」)지기도 하고, ‘낯선 섬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며’ “죽은 듯 산 듯 졸고 있는 폐선들”(「낯선 섬에서 돌아갈 배를 기다리다」)의 풍경을 곱씹으며 길들의 방향을 가늠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렇게 낯선 풍경들 속에서 몸의 감각을 복원하고, 스스로의 육체성을 확인하고 추인하며 승인한다. 시인의 몸은 낯선 풍경을 담아내는 낯익은 숙주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5. 울음에 대한 응시
시인은 울음과 어둠, 침묵과 죽음에 대해 주목한다. 서로를 길항하는 이 이미지들은 어둠으로 수렴되고 울음으로 발산된다. 이미 몇 편의 시에서도 드러났듯 이번 시집에서 가장 강력한 자장을 갖고 있는 이미지는 ‘울음’이다. 시인은 “캄캄하게 웅크린 대추나무”(「선택된 함구증」)을 보면서 “날마다 우는 속울음”으로 목청이 터진 것이라며 “자신의 울음을 분석 중”인 대추나무를 “쓸쓸한 짐승”으로 규정한다. “말 수 적은 것들일수록 어둠을 선호”한다는 동질감을 느끼며 “대추는 천천히 붉어지”고, 시인은 “어둠에 익숙한” 자신의 언어들을 “환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별빛 아래에서 언어를 방목하는 목동인 것이다. 시인은 “구름보다 고요한” 두루미를 보며 ‘울음’이라고 명명하며, “울음의 배경”(「일몰의 내부」)으로 자리 잡고 싶은 욕심을 토로한다.
이러한 울음에 대한 응시는「어두워 질 무렵」에 이르면 지렁이의 울음을 듣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몸을 감춘 채 어둠을 배경으로” 지렁이가 울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아득한 순간’을 경험한다. ‘모래와 장롱과 어머니의 울음’은 이해가 되지만, 지렁이가 운다는 사실에는 낯선 느낌을 받게 된다. “팽팽이 당긴 비단실을 튕기듯 파르르 떨리는”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듣던 시인은 지렁이라는 “놈을 한 줄기 바람”으로 호명하거나 “연초록 이파리라고 우길 뻔”했음을 기록하며, ‘현악기’에 비유한다. 이렇게 지렁이의 울음은 ‘시인의 울음’을 환기한다. 그리하여 “울음에 홀려/간을 빼주고 심장을 꺼내주고/뜨거운 울음을 날 것인 채 삼킨 적”이 있었던 시인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그날 이후/칼을 물고 세상을 건너가는 종족”에 대한 믿음 속에 “모든 사물의 중심에 울음이 산다”라는 진실을 깨닫게 한다. “지렁이 따위가 마음의 풍경에 끼어드는/애 터지는 저녁”이라고 애써 그 의미를 축소해 보지만, 그것은 반어적일 뿐이다. 들릴 듯 말 듯 아득하게 감지되는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통해 시인은 존재론적 울음의 진상을 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지렁이의 울음소리를 복기하면서 마음의 풍경을 읽어내고, 내면의 울음의 흔적과 조우하며 생의 비의를 파악하는 것이다.
시인은 울음의 온도를 재는 체온계적 존재다. 그러므로 지렁이의 울음소리만이 아니라 전기장판의 온도에 반비례하면서 들려오는 자신의 내면의 울음소리를 감지해 내기도 한다. 사물을 포함한 모든 존재태들은 그 자신의 울음의 온도를 드러내고 있기에 시인의 예민한 청각적 촉수는 ‘꿈속’에서 그들의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낸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이자
꿈속까지 따라왔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밤이 갑자기 깊어지고
웅크렸던 다리를 펴면서 돌아눕는 울음을 가까이 당긴다
울음의 껍질은 늙은 장수의 갑옷처럼 완고하다
발톱 긴 바람을 끌어들여 껍질의 틈새를 후벼보지만
몸속에 천만 길 벼랑을 감춘 울음의 꼬리를 번번이 놓친다
오늘처럼 급하게 소리를 삼킨 날은
꾸르륵 꾸르륵 늙은 비둘기 소리를 흉내 내며
가슴의 굽이를 헤집다가
소리도 없이 돌아와 눕는 울음의 무게에
가위 눌리는 새벽녘
온몸의 핏줄을 팽팽히 당긴 채 달려드는 사람처럼
펄펄 끓는 전기장판의 코드를 뽑고
아직 식지 않은 울음을 끌어안는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울음이 가본 적 없는 꿈속 이야기를 꾸며대는 것뿐이다
내가 꿈속에서 자주 흐느끼는 건
열전도가 빠른 울음은 전염성도 강한 때문이라고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을 꾸며대는 것뿐이다
-「울음의 온도」전문
시인은 울음의 온도를 재는 존재다. 시인은 울음의 온도에서부터 울음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이 “전기장판의 온도를 높이자/꿈속까지 따라왔던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실제의 온도와 울음의 온도가 반비례하면서 깊은 밤의 울음이 되새김질된다. 울음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완고한 울음의 껍질’을 만나기도 하지만, “천만 길 벼랑을 감춘 울음의 꼬리”를 시인은 번번이 놓치고 만다. 그리하여 “울음의 무게에/가위 눌리는 새벽녘”에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식지 않은 울음을 끌어안”고 “울음이 가본 적 없는 꿈속 이야기를 꾸며대는 것”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시인이 “꿈속에서 자주 흐느끼는 건/열전도가 빠른 울음”이 내포한 ‘강한 전염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도 꾸며대”면서 꿈속 이야기를 지어낸다. 시인은 현실과 꿈속을 오가면서 울음에 전염된 이종적 존재인 것이다. 울음은 시인의 꿈속 이야기의 발화점이자 현실과의 경계에 존재하는 변곡점으로 기능하며,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가공하게 만드는 숙주적 기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울음의 온도를 재고 전염성 바이러스가 되는가. 그것은 울음이 개별 존재들의 고통스런 본질을 외화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제 몸을 헐어 뿌리를 만들고 뿌리가 닿는 곳까지 물을 만들며 속울음을 울”어대는 ‘맹그로브 숲’에 가서 “속절없는 비명”(「맹그로브 숲에 갔다」)들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등으로 기어”가는 꽃무지애벌레 한 마리를 보며 아직 들어본 사람이 없다는 “꽃무지애벌레의 울음소리” (「꽃무지애벌레」)를 상상하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만 듣지 못할 수도 있는 울음들의 향연을 시인은 꿈속과 현실에서 호출하여 그 고통스런 울림의 내포들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울음에 대한 시인의 감수성은 어둠에 젖어드는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절집에서 여름에 태풍이 지나가는 걸 보면서 시인은 “건너편 산맥들”이 “어둠 속으로 쓰러져 눕는” 풍경을 보며 ‘조금의 슬픔’을 느끼고, “어디선가 숨죽여 우는 사람이 있을 것만 같은 밤”(「여름」)을 감지한다. 시인은 어둠 속 울음에 민감한 여린 감수성의 소유자인 것이다. 지금도 시인은 어느 곳인가에서 울음의 현장을 목도하며 그 의미를 길어내고 있을 것이다. 자신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울음의 진의를 파악하면서
6. 슬픔으로 흘러나올 눈물
울음은 눈물의 청각화된 기표이다. 시인에겐 울음이 소리로 변주되어 자신과 외부를 함께 들여다보는 청각의 도구이자 다른 감각의 기원에 해당한다면, 눈물은 시인이 생의 흔적을 시각을 통해 내면화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눈물과 울음은 그 둘이 거느린 감각들의 선두에서 혹은 후미에서 존재자의 내적 고통을 외화함으로써 계열체적 의미를 부려댄다.
이를테면 시인은 두릅나무 가시가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깊은 눈물 계곡을 지나왔기에 온몸에 가시를 입었나”를 질문하며넛 “당신이 눈물의 유전자를 화학기호로 표기하고 있을 때” 스스로 “해독약의 목록을 작성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맛이 쌉쌀하고 향기 진한 건/차가운 눈물이 발효중이라는 증거”(「가시」)로 인식한다. 눈물의 맛과 향기의 농도가 “차가운 눈물”의 발효를 재는 척도라는 것이다. 시인에게 울음과 눈물과 시간은 발효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유사한 이미지로 공유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발효되고 있을 눈물을 기다린다. 그 눈물은 아마도 냉탕과 열탕을 오가면서 슬픔의 외연을 확장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왜 그런가?
바람 부는 쪽을 자주 쳐다본 탓일까
눈 속에 무엇인가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눈을 감고 눈물을 기다려보지만
슬픔이란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니었는지
한참을 기다려도 눈물은 나오지 않아
생각만으로도 철철철 눈물 흐르던 한순간을 꺼낼까 망설인다
자신도 모르는 길을 품은 채 여기까지 왔는지
거울 속 붉은 눈동자에는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는 길들이 어지럽다
불타오른다고 믿으며 울었고
틀림없이 누군가 빠졌을 거라고 믿으며 울기도 했지만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날들도 있었는데
눈 속에 들어왔으나 바라볼 수 없는 무엇이
메마른 슬픔을 후벼 파고
방목된 바람을 따라가던 헛된 길 위에서
나는 그저 눈감고
형체 없는 것들에게 바쳤던 뜨거움의 목록을 뒤적일 뿐
아무래도 혼자서는 빼낼 수 없는 지독한 것이
하필이면 눈 속에 박힌 것이다
-「눈물을 기다리는 잠깐」전문
시인은 바람 부는 쪽을 쳐다본 탓에 생겨난 ‘눈 속의 무언가’를 제거하기 위해 눈물을 기다린다. 눈물이 흘러나오면 함께 따라나올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 속의 무언가’가 ‘슬픔’이기에 “불러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눈물이 나오지 않자 시인은 “철철철 눈물 흐르던 한순간”을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호출해 본다. 그러자 “거울 속 붉은 눈동자” 속에 “어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는 길들이 어지럽”게 드러난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누군가와 불타오르거나 누군가에게 빠져들었던 적도 있었음을 회상하며 울음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눈물은 외화되지 못하고 “눈 속에 들어왔으나 바라볼 수 없는 무엇”으로서의 내면의 상처가 “메마른 슬픔을 후벼 파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방목된 바람을 따라가던 헛된 길 위”가 아니었는지 자문한다. 그때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감고/형체 없는 것들에게 바쳤던 뜨거움의 목록을 뒤적이”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혼자서는 빼낼 수 없는 지독한 것”이 박혀 있어, 시인은 슬픔이 눈물로 흘러나오길 기다리고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적 실체가 아니라 무형의 지독한 상흔들이 시인의 내면에 박혀 있기에 눈물로 외화되지 못한다. 박힌 것은 뽑아내야 하지만, 뽑아낼 수 없는 것들이기에 눈물로 승화되어 저절로 흘러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이 눈물과 함께 눈 속에 박혀 있던 ‘무언가’로서의 슬픔을 호출해 보고자 하지만 그것은 힘겨워 보인다. 왜냐하면 ‘눈 속의 무언가’를 호출한 슬픔이 메말려버려, 형체 없는 목록으로 형해화되었기 때문이다. 형해화된 슬픔의 목록을 뜨겁게 다시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슬픔의 눈물을 복원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수동적으로 눈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눈물의 기원을 추적해 들어가는 것, 그것이 눈물을 재발견하려는 몽상가의 치유적 탐험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각양각색의 이물적 울음소리를 듣고 기록하지만, 정작 아직 자신의 눈물을 흘리지는 못한다. 타자(=사물과 세계)로의 감정적 투사와 내투사는 성과적으로 수행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외화하고 노출하는 것에는 아직 둔감한 것이다. 창작자의 의도일 수도 금기적 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타자)의 구체적 울음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경청할 때 그토록 ‘기다리던 눈물’이 더욱 아프게 빛나는 언어로 쏟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울음의 온도’를 잴 줄 아는 이물감의 시인이 흘려보내는 진정한 눈물과 슬픔의 교감이 천 년의 감각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이 더 많은 독자와 함께 공명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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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 박미라는 몸이나 사물 깊은 곳에 “어떤 이름을 생각할 때만 빗소리를 내는 기관”, 얼굴이 울지 않을 때도 우는 기관이 있음을 느끼는 시인이다. 그의 귀는, 맑은 날에도 빗소리를 내는 울음, 울음보다 먼저 오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보이지 않는 달팽이관을 가진 귀로 지렁이 우는 소리를 듣기도 하도 지렁이 울음에서 바람소리와 연초록 이파리의 몸짓을 느끼기도 한다. 그의 몸에는 온갖 동식물과 사물이 드나드는 울음의 통로가 있다. 미물에서 생태계와 세계로 연결된 그 울음의 통로에서 그는 세상의 온갖 악기들의 연주를 듣는다. 그의 시는 기꺼이 “모든 사물의 중심”에 사는 울음에게 “간을 빼주고 심장을 꺼내 ”준 기록이다.
- 김기택(시인, 경희대 교수)
▪▪▪ 박미라 시인은 외면하고 숨겨오고 억압해온 자신의 울음을 온몸으로 풀어놓는다. 절벽을 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를 절벽에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울음은 적막하고 쓸쓸하고 슬픈 바위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단단한 바늘로 만들어진 부리와 날개를 가진 새가 되어 반란을 꿈꾼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니지만 눈도 되고 비도 되는 진눈깨비로 양철지붕을 두드리고, 순간을 황홀한 천년으로 휘감는 동백꽃으로 반짝이고, 소심한 오후를 멍이 든 허벅지의 바람으로 밀어 올린다. 차갑고 징그럽고 치사하고 속살을 파먹는 인연들을 사랑의 불씨로 살려내는 시인의 그림자는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귀와 천 개의 손을 가졌구나.
-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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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명 시인∥
∙ 1996년『대전일보』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 시집으로『서 있는 바람을 만나고 싶다』『붉은 편지가 도착했다』『안개부족』이 있으며,
∙ 수필집 『그리운 것은 곁에 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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