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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글씨 |
국 역 |
서체 및 크기 (가로Ⅹ세로) |
조성 시기 |
위 치 |
浮石禁標 |
부석금표 |
해서체 31Ⅹ33cm |
1788.8.20. (정조 12년) |
조계동 주계곡 초입(폐가 인근) |
禁標 |
금표 |
해서체 18Ⅹ40cm |
1788.8.20. (정조 12년) |
조계동 도요터 인근 |
宮禁塲 |
궁금장 |
해서체 20Ⅹ65cm |
조선 초 |
조계동 보광사 인접능선 |
(彰O)宮林塲禁 |
(창O)궁림장금 |
해서체 21Ⅹ83cm |
조선 초 |
우이계곡 만경폭 하단 |
思陵浮石監役 |
사릉부석감역 |
해서체 48Ⅹ47cm |
1699.1. (숙종 25년) |
조계동 구천은폭 중단 |
*조계동과 우이계곡의 금표 및 사릉감역기 바위글씨는 2003년 3월부터 최근까지 발굴된 문화유산 유산으로 조계동내 인평대군의 별서인 송계별업터 그리고 구천은폭(九天銀瀑 李伸書, 경희궁 흥화문의 현판을 쓴 이로 추정) 바위글씨와 함께 서울시에 문화재 등록 요청으로 조사 중이다.
思陵浮石監役記(사릉부석감역기) 바위글씨는 사릉((思陵,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 석물을 조성하기 위해 조계동 부석소의 감역한 관리의 명단으로 숙종 25년(1699년)1월에 새겼다. 기록에는 사릉(思陵)과 장릉(章陵,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의 석물을 조성하기 위해 이곳의 돌을 채취하였고 한다. 바위글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思陵浮石監役 사릉부석감역
司評 李 焌 사평 이 준 奉事 趙正誼 봉사 조정의 書吏 朴興柱 서리 박흥주 石手 趙 金 석수 조 금 歲己卯正月日 세기묘정월일 思陵浮石監役 사릉부석감역 畢 焌 書記 필 준 서기
숙종은, 현종에서 숙종조에 이르는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 1670-1671)과 을병대기근(乙丙大飢饉 1695-1699)으로 6년간 400만명(인구의 25%)이 감소하자 피폐한 민심을 댤래기 위해 민간에서 신격화된 단종을 복위하고 1698년10월에 판중추부사 최석정(崔錫鼎)을 봉릉도감 도제조에 임명하여 장릉(莊陵, 단종의 능)과 사릉의 조성을 총괄케 하였다.
사릉부석감역(思陵浮石監役) 바위글씨
사릉의궤도감의 부석소 기록에는 양주 불암동의 석재가 적당하지 않아 조계동에 부석소를 차렸다고 한다. 1698년 12월 26일부터 봉릉일인 2월 22일까지 55일 동안 각각 연인원 2000명의 석수가 동원되었고문인석, 망주석 장명등을 조계동에서 채석한 석물을 사용하였다. 조각을 했던 대부석소의 인원 편제는석수 1명당 각 육조역, 모조역 1명씩이 붙혀졌고 사릉의 석수는 모두 서울에 거주하던 장인이었으며 일반 석수는 서울과 경기이외 다수 참여했는데 전라, 황해 출신이 많았다. 편수로는 석수 조금(趙金)과 정금(鄭 金) 석수로는 이천량과 최사룡이었다. 석재 운반은 썰매(雪馬), 소나무메(돌 밑에 놓는 나무), 생칡을 이용하여 산 아래 옮긴 후에 우마차를 사용하였다. 주로 전라 함경도의 승군이 참여하였으며 주요 석물을 조각에도 승군 3명(天信외) 참여 하였다. 채석은 매우 힘들어 의원이 배치되었슴에도 한달여간 43명중 13명이 질병으로 떠났다고 한다.
장릉(章陵,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 조성에도 이곳 조계동에서 채석하였는데 1626년 10월22일 조계동 인근에 대부석소를 마련하여 석물 제작에 착수하였고 11월 5일 석물을 배 편으로 용산에서 김포로 이송했다. 부석소에서 제작한 석물은 상석, 고석, 표석과 봉대석, 사대석 석함 등이다.
북한산 조계동 주계곡의 금표는 채석을 금하는 "부석금표(浮石禁標)”라 새겨져 있고 부석금표가 위치한 동북쪽 인접 계곡(도요터 부근의 것)의 금표는 "금표(禁標)"라고만 적혀 있다.
이 금표는 정조12년 무신(1788) 8월에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인데도 관민(官民)이 대부분 이곳에서 석재(石材)를 채취하기 때문에,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이것을 아뢰자 총융청(摠戎廳)에 명하여 경계에 푯말을 세워 금지하게 한 것이다 8월22일에는 해청(該廳)에서 경계를 정하고 오늘 안으로 여섯 곳에 표지를 세울 계획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총 6기의 금표가 조계동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 사도세자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 수원 앵봉에서 채석후 금표를 세웠다고 하나 유실된 것으로 보여 지금까지 확인된 부석 금표는 조계동의 것이 유일하다.
제2 금표(禁票)와 채석된 돌. 제2 금표는 부석금표(浮石禁票) 표석에서 도요터를 지나 있다. 채석 후 가공을 위해 소부석소(小浮石所)로 옮겨지지 않은 돌이 대부석소(大浮石所)인 조계동 일대에 널려 있다. 대부석소의 석재 채취는 백성들에게 매우 고단한 공역이었는데. 명종 9년(1554년) 경복궁 중건 기록에 보면, “이때에 천재와 지변이 없는 날이 없고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므로 백성이 유리하고 있는데, 토목 공사를 일으켜 재상들은 서울에서 감독하고 포악한 관리는 외방에서 수종하여, 지난해 겨울부터 채석(採石)하고 벌목(伐木)하느라 궁벽한 산중과 넓은 바닷가에서 목도하는 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계속되매, 산골짜기 속에서 죽어가는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서울 안에서는 군민이 부족하여 중들을 뽑아 역사에 내보내게 하였으므로 중들이 도성 안에 가득 했었다.”-출처:국역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궁금장(宮禁塲) “창O 궁림장금(彰O 宮林塲禁)" 표석은 이 일대가 궁의 소유로 산림보전을 위한 출입금지 지역을 알리는 표석으로 보이며, 숙종 26년 (1700) 성밖 조계(曹溪) 근처에 생소나무를 많이 벤 감역(監役)을 죄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사산금표도의 금표 설치 위치와 동일하여 “사산금표(四山禁標)”로 추정되나 정확한 의미는 전문가들의 조사와 발표가 있어야겠다.
동국여지비고 한성부(漢城府) 금제편에 보면 한성부의 경계를,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았다. 숙종 31년(1705년)에 간행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보면 조계동과 우이령 방면의 계곡을 경계로 하였슴을 알 수 있다.
사산의 금표관리는, 영조 36년(1760년) 도성 안의 하수도인 개천을 준설, 소통시키며 세운 준천사(濬川司)에서 하였는데 4산에 암장하는 것과 지형을 파괴하는 것을 감시하고 금표까지도 겸하여 관장하였으며, 고종 19년(1882)에 폐지되어 그 업무는 한성부로 이관되었다.
궁금장(宮禁塲)과 궁림장금宮林塲禁) 바위글씨
최근 북한산 조계동과 우이계곡에서 발견된 금표(禁標) 4기와 사릉부석감역기(思陵浮石監役記)는 이 일대가 조선시대 채석장인 부석소(浮石所)였슴을 알 수 있고 부석금표(浮石禁標) 2기와 사산금표(四山禁標)로 추정되는 금표(禁標) 2기는 주로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지기를 보호하고 북한산의 산림자원과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금산 정책의 표석으로 여겨진다.
(글판독 및 국역:이종헌, 권혁진 / 자료제공 및 탁본:김장욱, 홍하일, 배성우)
인용 및 참고문헌
1.조선시대 자연환경 보전에 관한 연구 오승봉/안동만, 서울대, 한국조경학회지,1995.4.
2.장릉과 사릉의 석물연구 –추봉과 석물연구의 간소화를 충심으로, 김이순, 홍대미술대학원, 2012.2.
3.標石에 대한 考察 - 襄陽의 禁標와 校界를 중심으로-양언석,강원대, 양양문화제26호, 2015.6.
4.황장목과 황장봉산 박봉우, 강원대, 소나무와 우리 문화숲과 문화 총서 1,1999.9.5.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4장 정순왕후 사릉, 문화재청, 2011.
6.조선왕릉종합학술조사보고서 4장 장릉, 문화재청, 2013.
7.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8.국역비변사등록, 국역일성록 한국사데이타베이스
9.아름다운 시간 http://m.blog.daum.net:“禁標”참고
첫댓글 예전 설악지도 보며 금표암...이란 지명이 궁금했는데...
금표에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금표가 훼손되었다는군요. 바위글씨를 문화유산으로 인식해야 하는데 아직도 자연훼손이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서리 말임미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월암동문 바위 등을 추가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인식의 변화가 엿보이는데요. 우리 산서회도 예전에 우이구곡 탐사가 있었던데. . .바위글씨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더만여. 위의 금표 등 바위글씨를 찾느라 한동안 즐거웠슴다.ㅋㅋ
이글 늦게 보았는데, 좋은 자료이군요? 나도 금표(禁標)에 대해서는 생소합니다.
제4번 만경폭은 전에 답사시 유심히 보았는데, 당시 하단부 마모글씨는 접하지 못했습니다.
우이구곡 탐사하시었군여. 탐사 자료 사진을 보다가 혹시나 하고 현장을 방문했는데 금표임이 확인 되었습니다. 건겅하시옵고 늘 관심주시어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