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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천무비 스님 2006년 인터넷 예불문 강설에서 ~~~
저는 예불문 뜻을 조금 알기는 알지만 이번 기회에 더욱 학실히 하기위해서 한 번 더 공부하렵니다.
그리고 이 예불문에 계초심학인문, 발심장, 자경문을 일타스님과 무비스님의 肉聲해설을 곁들여
정리하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집니다! (阿修羅 記)
2006년 12월 25일 예불문 제8강 (반야심경-2)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예, 반갑습니다. 12월 25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般若心經의 경 제목인 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을 공부했습니다.
경전 제목이 한 권의 경전 전체를 대표하는 그런 뜻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드렸습니다. 반야심경의 경전 제목만 그런 것이 아니고, 불교의 경전은 대개 다 그렇게 경전 제목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경의 제목을 살펴보면,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인데
●摩訶는 크다, 위대하다, 훌륭하다, 수승하다, 뛰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이것을 한 가지로 번역할 수 없어서 인도 말 그대로 두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般若도 그렇고, ●波羅蜜多도 그렇습니다.
●바라밀다도 ‘저 언덕에 건너가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저 언덕에 건너간다고 하는 뜻이 앞서 설명 드린 대로 대단히 복잡다단하고 아주 다종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별의별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그 모든 문제들을 다 해결한 그런 상황을 ‘저 언덕’이라 표현했기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꼬집어서 말할 수 없지요. 그래서 ‘바라밀다, 저 언덕에 이르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반야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깨달음의 지혜’인데
이것을 어떻게 쉽게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반야라고 그대로 둡니다.
우리가 그 깊은 뜻을 다각도로 이해하고 또 이해한 대로 설명하기 위한 마음에서
이처럼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낱말들은 불교경전에서는 그냥 둡니다.
그대로 두는 것까지는 또 그런대로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 처음 입문한 사람에게는 친근감이 좀 없고 거리감이 생기지요.
그래서 불교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장애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물건을 시중에 내다팔면 싸구려 물건이 되고
또 그냥 숨겨 놓으려니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를 않고,
알아주도록 하려면 길거리에 내다 팔아야겠는데 그러려니 또 격이 떨어지고,
이러니 문제를 다 해결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다의 뜻은, ‘아주 위대한 지혜로서 저 언덕에 건너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어요.
그 다음 오늘 배우실 대목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여기까지가 한 단락인데
반야심경의 중요한 뜻이 이 한 구절에 다 들어있다
고 볼 수가 있습니다. 뭐 어느 구절 없이 전체의 뜻이 구절구절마다 포함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전체적인 것을 잘 나타내는 그런 내용이기도 하지요.
먼저 ●관자재보살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관자재보살은 잘 아시는 대로 관세음보살을 관자재보살이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본래는 인도말로 ‘아발로키테스바라’인데 두 분의 대역경가가 번역을 다르게 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금강경도 많은 번역본이 있지만 특히 구마라습의 번역이 아름답게 잘 번역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취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 구마라습이라고 하는 三藏法師가 ‘아발로키테스바라’를 ‘●觀世音’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 뒤에 玄藏法師라는 이가 ‘●觀自在’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관자재’로 번역되어진 경전도 있고 ‘관세음’이라 번역되어진 경전도 있습니다.
이 반야심경은 玄藏法師의 번역이기 때문에 ‘관자재보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이든 관자재보살이든 그 깊고 오묘한 뜻을 다 나타낼 수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이해하는 대로 자기가 선호하는 대로 관자재, 또는 관세음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觀自在라고 하면 살펴보는 것이, 또는 관찰하는 것이 자유자재하다는 뜻이지요.
또 ●觀世音이라고 하는 뜻은 세상의 말, 소리를 잘 관찰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이제 ‘관찰한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왜 관찰하는가? 하면은 부처님 깨달음의 마음에는 그 어떤 마음보다도
중생을 생각하는 자비의 마음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혜의 마음도 중요하지요.
반야심경 같은 경전에서는 관세음보살님이 사실 △지혜의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해요.
그러나 다른 경전, 관음경(소위 보문품)이나 그 외 능엄경의 관세음보살 이근원통이나
이런 내용에 있어서는 △자비의 화신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은 지혜의 경전,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지혜의 상징으로서 또 관세음보살을 이렇게 등장시켰습니다.
이곳에서는 觀世音이 아니고 觀自在이지요.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는 중국불교나 일본불교나 또 우리 한국불교나 오히려 불자들이 익히 잘 알고
있고 관세음보살을 신앙하는 그 신앙의 힘이 아주 대단합니다.
다시 말해서 관음신앙이 대단히 盛하지요.
그것이 한국불교의 특징이기도 한데 석가모니에 대한 이해보다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훨씬 높고 크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면 석가모니 도량은 꼭 집어서 우리가 이야기 할 수가 없어도 관음도량이라고
정해진 곳은 많습니다.
남해 보리암 이라든지 또 아주 유명한 곳으로
의상스님이 창건했다는 낙산사 홍련암 등이 관음도량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이참에 ●관자재보살, 또는 ●관세음보살의 實在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한 번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관세음보살 내지 지장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이니 동방아촉여래니,
삼세의 삼천불이니, 만불이니하는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경전 상에 등장을 합니다.
그 가운데 역시 한 분으로써 관세음보살님인데
이런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실재문제에 대해서
늘 궁금하기도 하고, 믿음에 확신이 서지도 않는
이런 사례들이 많을 줄 믿습니다.
분명히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을 크게 믿고 있고,
또 많은 불자들이 믿어왔고 경전 상에도 자주 나타나지만,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육신을 갖춰서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실재로 이 세상에 살다가
삶이 다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팔십이 되어서, 또는 몇 살까지 교화를 하시다가 저승으로 갔다든지
다음 생을 맞이했다는 그런 실재적인 보살은 아닙니다.
그런 분은 석가모니부처님 뿐이에요.
그래서 예불문에도 모든 불보살의 근본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 뿐이라고 해서
本師 석가모니불이라는 그런 말을 쓰지요.
그러나 아미타불이라든지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이런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우상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 무턱대고 우상이라고 몰아 붙여서 비난하는 사례를 많이 보는데
그건 불교를 깊이 모른 채, 바르게 알지 못해서 하는 소리이지요.
저는 그렇습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불교를 잘 모르고 비난하는 것을 가만히 들을 때,
나 역시 다른 종교를 안다한들 얼마나 알겠나?
그래서 감히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못하고 또 비난하지 않아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전문가도 제대로 모르는데 타종교인이 또는 공부를 설사 좀 했다손 치더라도
아마추어가 어떻게 속속들이 깊은 뜻을 알겠습니까?
잘 알지도 못하고 비난해서는 안 되겠다... 는 그런 생각을 하지요.
불상을 두고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한 입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전 상의 수많은 부처님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해탈을 성취해서
찾아낸, 깊은 마음의 상징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분명히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해탈의 경지,
해탈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내용들입니다. 지혜가 있고, 자비가 있고, 큰 원력이 있고,
큰 실천이 있고 온갖, 불교에서 말하는 수많은 능력과 중생제도를 위한 필요한 부분들이
다 그 속에 갖추어져 있는 거지요.
象徵이라는 말을 썼는데,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다시 말해서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상징이란 어떻게 생각하면 추상적인 내용을 무엇인가 다른 형태를 빌려 가지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까
형상도 생기고 이름도 지어지고 그 분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이 가해지고
거기에 또 첨가되고 또 첨가되어서
심지어는 관세음보살도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그런 논문도 있어요.
문수보살 역시 역사적인 인물이라고까지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사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해탈의 경지에서 찾아낸
깊은 마음의 상징적 존재들을 들추어내서 부각시키다 보니 그런 과장된 표현들이 있는 거지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해탈한 내용을 우리가 어떻게 감각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감각으로 파악이 안 돼요,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을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써 실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미타불을 부른다든지,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을 부른다든지, 문수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을 부름으로 해서 ---> 부처님의 해탈의 경지, 깨달음의 경지 그것을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데서 우리가 그것을 외우고, 또 마음으로 그림으로써 실감하는 거지요.
아미타불은 뭡니까? 영원한 생명이요, 한량없는 빛이요, 이런 뜻이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깨달으신 분의 마음의 한 내용인데
그것은 곧 다름 아닌 우리들 마음에도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불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관세음보살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상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문수, 보현, 지장보살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라는 거지요.
‘마음의 한 부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 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우상은 아니에요. 우상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깊이 깨달으신 해탈의 마음은 말하자면 초월적인 경지, 무의식의 경지라 할 수 있
습니다.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간과 공간의 구별 없이, 그러면서 또 인간 육체의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 외부에도 존재하는
것,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다 존재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존재, 초월적인 존재라는 표현들을 씁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면 재미는 없는 설명입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불자로서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불자들의 수준이 거의 프로급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구든 프로급의 불자가 당연히 되어야 되고, 누구나 다 포교사, 누구나 다 법사,
누구나 다 반야심경 정도는 강의할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래서 全 불자가 포교사화, 법사화 되는 그런 시대가 와야 한다는 이런 꿈이 제게는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전 군인을 장교화 한다, 정예화 한다’는 표현이 있듯이,
전 불자 예를 들어서 천만 불자, 이천 만 불자이면 이천만 불자 전체를 법사화하자는
그런 운동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너무 큰 꿈을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우리 불교계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프로법사라면 그리고 포교사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고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 있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자재보살 뭐라고 이름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또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아미타불, 아촉불, 무슨 불, 무슨 불...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깨달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깊고 높고 넓은 그런 아름다운 내용들의 한 부분, 한 부분 이지요.
지혜, 자비, 원력, 실천 이런 부분들을 떼 내어 뚜렷하게 부각시켜서
그 내용을 극대화하자는 그런 뜻에서 구체적으로 불상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고
거기에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이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가 오해를 합니다.
이런 보살들이 과거에 역사적으로 있었고 지금도 어디에 계시다는,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없는 존재는 아니지요.
분명히 부처님의 깨달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한 생각을 돌이키면, 다시 말해서
우리 역시 마음의 눈을 뜨면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도 그런 관세음보살이 존재하고,
지장보살이 존재하고, 아미타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날 환히 알게 될 것입니다
.
반야심경 서두에 이렇게 나와 있는 관자재보살은 여러 형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요.
삼십이응신이 대체적으로 설명되어지는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고,
또 흔히 천수천안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을 가진 분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합장하고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이 또 있습니다.
우리는 관세음보살님을 향해서 합장을 하고 있는데 그럼 관세음보살님은 누구를 향해서 합장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겠습니까?
우리야 중생이니까 관세음보살 앞에서 합장 예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은 누구를 향해서 합장 예배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부처님, 또 하나의 관세음보살님,
또 하나의 문수보살님을 향해서 합장하고 있습니다.
합장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의 눈에는, 관세음보살님을 향해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 속에 또 하나의
그런 위대한 부처님이 존재하는 것을 환히 봅니다.
틀림없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합장하고 예배드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관세음보살님은 또 우리를 향해서 합장 예배하는 거예요.
그런 이치를 우리가 알면 간단하지요.
그렇게 되면 어디에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이게 우상이냐, 상징이냐 하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우리가 바로 이해하자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존재의 실상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를
아주 깊이 다루게 됩니다만, 어떤 존재도... 역사적인 존재 아니면 추상적인 존재, 상징적인 존재등
모두가 과연 감각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볼 것인지,
그럼 감각적으로 보여지고 들려지는 것은 확고부동하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는 대답을 못하지요.
이건 뭐 불교의 ABC만 알아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이치입니다.
왜냐? 모든 존재가 그런 원리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억지소리가 절대 아니고 누가 무슨 세상을 잘못 봐서 그런 것도 결코 아닙니다.
정말 제대로 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있다’고도 할 수가 없고
‘없다’고도 할 수가 없어, 없는 가운데도 있고, 있는 가운데 또한 없고,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게 實相이거든요. 모든 존재의 실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여지는데 어떻게 치우쳐서 편협 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는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고 높이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키워가는 그런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이해를 우리가 바로 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자재보살을 열심히 부를 필요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열심히 기도하고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관자재보살님께서, 다시 말해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그 깨달음의 마음속에 지혜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관자재보살님께서,
행한다, 무엇을?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라고 했지요.
깊은 반야, 深般若... 앞에 제목에서는 마하반야라고 했지요?
마하에는 높다, 크다, 많다, 수승하다, 훌륭하다의 뜻이 있듯이 깊다는 의미 또한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금강반야, 심반야, 마하반야, 방광반야라는 말도 있습니다.
方廣般若의 방方은 아주 정확하다의 뜻입니다.
아주 모가 나 있다, 아주 방정하다,
모든 것이 아주 정확하여 0.01mm의 오차도 없는 그런 정확함입니다.
廣은 그러면서 무한히 넓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方廣般若에요.
반야 앞에는 수식어로 붙여지는 말들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관자재보살님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로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깨달음의 지혜의 마음을 활용할 때에~ 이런 뜻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을 보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볼 때 어떻게 보여 지느냐?
오온개공이라고 보여진다는 거지요.
조견오온개공, 비춰본다고 했습니다. 그냥 봐도 좋겠지요,
그런데 환하게 꿰뚫어 본다고 했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전문가적인 안목으로 꿰뚫어 보는 게 照見입니다. 비칠 조照, 볼 견見이지요.
예를 들어서 신문을 볼 때 나이든 사람은 글자가 잘 안보이지요.
그런데 돋보기를 탁 끼고 보면 그것은 조견이 됩니다. 그냥 대충 보면 큰 글자나 보이지요,
그리고 밤에 길이 어슴푸레 할 때 전등을 켜서 보면 길에 무슨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환히 볼 수가 있습니다. 밝은 등불을 앞에다 쫙 비추면 담이 어디에 있고 전봇대가 어디에 있고
장애물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가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인지를 우리가 환히 다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밝은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을 照見이라 보면 됩니다.
비춰 봐야 되지요. 무엇을? 오온이 개공한 것을 비추어 본다는 겁니다.
五蘊을 비추어 보니 개공하더라, 이렇게 해도 좋아요. 결국 뜻은 같습니다.
五蘊이 뭡니까? 色·受·想·行·識, 우리의 몸과 마음입니다.
몸은 사대로 만들어져 있고 정신은 受·想·行·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걸 이제 오온이라고도 표현하고, 또 사대하고 수상행식, 이렇게 하면 여덟 가지 요소가 되겠지요.
내용을 알고 나면 어떻게 표현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이제 오온이 간단하지요? 우리의 육신과 마음의 세계는 여러 가지가 있지요.
受는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고 想은 개념이지요, 어떤 생각인데 길다, 짧다, 크다, 작다, 괴롭다,
즐겁다, 이런 것들이 想의 부분입니다. 뭔가를 받아들이고, 또 감정이 있어서 그것이 한 단계 넘어가면
‘아, 이것은 괴로운 것이다, 즐거운 것이다, 길다, 짧다’는 이런 게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것이 또 진행을 합니다. 의지작용이지요, 그때는 行입니다, 의지활동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요.
그 다음 識은 대상을 분석하거나 분류해서 인식하는 그런 작용을 말하며
이런 것들을 우리가 지식이라고 하지요. 識은 그렇게 이해하면 쉽습니다.
그래서 受·想·行·識인데 이것은 마음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냥 정신이라 해도 좋고 마음이라 해도 좋습니다.
오온 = 몸과 마음,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을, 개공, 다 공했다,
어느 하나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어 다 공한 것으로 비추어 본다 이거예요.
또 오온이 환히 꿰뚫어 비추어 보니까 다 空했더라,
어느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다 空했더라,
그렇게 되면 度一切苦厄한다 그랬습니다.
度는 건너간다, 문제 해결이다! 이말 이지요.
일체 문제입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한다는 말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의 문제, 정치하는 사람의 문제, 공부하는 사람의 문제, 자식의 문제, 남편의 문제, 아내의 문제, 친구와의 문제, 경제, 정치, 문화, 아니면 병고의 문제, 심지어 감기 걸리고 피곤한 그러한 문제까지도 이 속에 다 포함이 됩니다.
어떤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一切苦厄이란 말 속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一切苦厄, 일체입니다. 일체의 문제들을 다 해결한다는 거지요.
그 말도 알고보면 너무 쉽습니다.
왜냐? 일체 문제는 내 몸이 있고
내 마음이 있으니까 있는 거지요.
내 몸과 내 마음이 텅 비어 없는데 --->
내 몸과 내 마음 위에 건립되어 있는 남편의 문제, 아내의 문제, 문화의 문제,
정치의 문제, 경제의 문제, 친구의 문제, 무슨 병고의 문제, 몸에 四百四病 아니라
온갖 팔만사천 병고가 있다한들, 몸 위에 건립되어 있는 병고이기 때문에,
근본인 몸이 송두리째 텅 비어 버렸는데
그 위에 건립되어 있는 팔만사천 병고 내지
온갖 문제들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아무리 나무가 커서 나뭇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무성하다 할지라도 나무가 뿌리 채 뽑혀버렸는데
잎과 열매가 존재할 까닭이 없습니다. 마치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사실은 몸과 마음이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기가 우리에게 어려운 것이지
그것을 비춰 볼 줄만 알면 정말 일체 문제가 다 한꺼번에 해결된다고 하는 거,
이건 뭐 그야말로 너무나도 당연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일체니 모든 것이니 하는 이런 말들을 참 잘 쓰는데,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부분 부분에 하나하나 나아가서 해결하는
그런 뜻으로 일체나 모든 것을 말 한 것이 아니고,
근본을 가지고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지엽적인 것은 저절로 다 딸려 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一切라는 말을 잘 쓰고, 모두라고 하는 諸자를 잘 쓰고, 다 皆자를 잘 쓰고 그렇습니다.
경전에 보면 일체니, 다니, 모두니 이런 말을 참 많이 쓰지요.
그렇다고 해서 낱낱이 부분에 나아가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이라는 거지요. 그 근본을 알고 있다 이거예요.
여기서는 몸과 마음이라고 오온을 그렇게 말했지만 더욱 축소하면 마음 하나입니다.
마음 하나 텅 비어 있는 것으로 봐 버리면 저절로 몸도 거기에 따라오게 되어 있는 거지요.
이것이 이제 반야심경의 根本 骨子이며 그 밑으로는 이것을 부연한 것에 불과해 좀 더 길게 늘여서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몸이라고 하면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코가 있고 혀 등등 이런 것이 있고, 바깥에는 물질이 있고 소리가 있고, 향기가 있고 맛이 있고, 뭐 이런 등등 여러 가지가 또 있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늙고 병들고 하는 온갖 진행 과정,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행해 갈 때마다 거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또 불교에 들어와서는 부처님께서 처음에 파악하셔서 우리에게 일러주셨던 괴로움이다, 괴로움의 원인이다, 괴로움을 소멸한 경지다, 소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뭐 이런 등등이 불교 안에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앞에서도 반야심경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부처님께서 중간과정에서 설법하신 내용이고, 이 설법 이전에 ‘모든 존재는 있다’라고 하는 차원에서 우리 보통의 상식에 맞는 그런 입장으로 설명한 초기 경전이 많았지요.
거기에서 완전히 다른 각도, ‘있다’고 하던 입장에서 확 바꿔 가지고 ‘없다’고 하는 안목으로 한 번 파악해 보자는 것이 반야부의 입장이고, 반야심경의 입장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제 ‘없다’고 하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게 쉬운 건 아니지요. 이렇게 버젓이 말하는 게 있고, 듣는 게 있고, 따라서 소리도 있고 보이는 대상도 있고, 말하고 보고 하는 ‘주체적인 나’도 있고, 이렇게 전부 ‘있는 것’ 투성이인데 이것을 하루아침에 ‘없다’고 하고 또 空한 것으로 봐야 모든 문제의 해결이라고 했으니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어렴풋이 짐작은 다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확실히 내 살림살이가 되지는 않더라도 이런 강의를 통해서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반야심경을 사경하면서 그러면서 한 순간이라도 정말 우리의 현실하고는 다른 시각에서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는 그런 입장이 한 번쯤은 되어 본다는 거지요. 한 순간이지만 반야심경을 한 번 외우고 쓰고 하는 그 짧은 순간만이라도 그런 입장이 되어 보았을 때,
‘아, 照見五蘊皆空이라, 몸도 마음도
모두가 텅 비어 공하다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일체 문제가 다 해결이야!’
이렇게 우리가 반야심경을 읽고 쓰는 그 순간만이라도 상념에 한 번씩 젖어보고 그런 사고를 해 본다고 하는 이것은 큰 복이고 앞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큰 열쇠를 손에 쥐는 것이 됩니다. 대단한 인연이지요. 우리가 이런 가르침을 만난다는 건 대단한 인연입니다.
오늘 관자재보살에 대한 존재의 어떤 문제를 이해했듯이 아울러 경전 상에 나타나는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존재의 문제를 관자재보살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씀을 드렸고,
그 다음에 행심반야바라밀다, 이것은 깨달음의 지혜로 저 언덕에 건너가는 그런 실천을 우리가 할 때, 그때 몸도 마음도 텅 빈 것으로 비추어 보고, 그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대목까지 공부했습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휴일인데도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을 하셨습니다. 근산님 대해월님 다래님 혜원심님 우담화님 초연화님 尋牛行님 대원성님 관음도님 아라파자나님 대관님 무각님 청비님 청운화님 히말라야님 청정행님 불퇴지님 진공님 짱 아님 大圓慧님 전산스님 백련화님 水流花開님 선법행님 원행님 매화꽃잎님 尋牛婆님 무아심님 가람님 無影樹님 무량화님 은아님 미륵골님 도류님 여울님 환희지님 은우님 날마다좋은날님 꽃물들다님, 등등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 오늘 반야심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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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