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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한복음 8:3-9
제목: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일시: 2018. 3. 11(2007. 10. 14, 2009. 11. 22)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사람들은 무슨 잘못을 하거나 비판을 받게 되면 종종 “관행이었다”라는 표현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오늘날 “관행”이라는 말은 아주 흔한 면죄부이다. “관행”이라고 말할 때는 물론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정죄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관행”이라는 표현으로 잘못을 덮어버리고 무마하려고 한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다들 그러하니까!” “지금까지 늘 그러했으니까!” “원래 이 바닥은 그게 노말한 거니까.”
II.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핑계일 뿐이다. 죄는 이렇게 자꾸 기어들어가 숨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어둠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의 수치스럽고 적나라한 모습이 너무 뚜렷이 보이고 정확히 들리면 부담스럽고 힘들게 되니까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과 문제에 온갖 악세사리를 달고 해석을 하고 미화를 시켜서 “나름대로” 포장을 하려 한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나름대로”는 옳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나름대로”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말한다. 요즘 사회에서 Me-too 운동으로 변호사들이 바빠질 것 같다. 변호사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피의자들이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을 최대한 부각시켜 잘못과 죄를 무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나름대로 할 말이 있고 자기변호를 하지만 여전히 잘못과 죄는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단지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거부하고 자기 최면을 걸어 놓고 거기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름대로”라는 공간이 외부의 모든 빛을 차단하고 있기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어두움과 미련 속에서 헤메고 있게 된다.
예전에 어머니가 외출을 하시다가 날씨가 춥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신발을 신은 채로 현관에 기다리면서 장농에 있는 빨간색 외투를 가지고 오라고 한다. 그러면 아이인 저는 옷을 찾다가 빨간색을 찾지 못하고 “어디 있는데? 없어!”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면 어머니는 결국 신었던 구두를 벗고 들어와서는 “여기에 있잖아”라고 하면서 외투를 집어 드신다. 그러면 나는 말한다. 그게 무슨 빨간색이야 분홍색이지라고 말한다. 서로 색깔에 대한 개념이 분명치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나름대로”가지고 있는 색깔에 대한 정의가 다름으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
오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다. 그들 “나름대로”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인지에 대한 정의가 있었다. 그들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가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신앙은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의 신앙자들이었다. 그들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던 죄는 숨겨진 죄가 아니라 드러난 죄를 의미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나왔을 때 그 근거는 무엇인가? 율법이다. 모세의 율법이다. 이 여인은 “음행 중”에 잡힌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과 소문으로만 있었다면 드러나지 않았을텐데 현행범이기 때문에 드러난 것이다. 이제 그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먹거리면서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 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려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다그치고 있다. 이 친구들 역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법에 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요8:6).
물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분명히 그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은 잘못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으로 비추어 봤을 때 숨겨져 있던 죄가 드러난 것이다. 예수님도 그 여인이 잘못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는 손전등과도 같다. 그 작은 진리의 손전등도 칠흑같이 컴컴한 세상을 비추기에 유효한 것이었다. 그 손전등과 같은 작은 진리의 빛 조차 우리로 하여금 구분을 하게 한다.
법원에 가면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Justitia 라틴어 Lady Justice영어)라는 상이 있다. 보통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많은 경우 눈 안대를 가리고 있어 공정하게 판단을 내린다고 하지만 가끔 눈에 안대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 대법원에도 정의의 여신이 있는데 오른손에는 저울을 높이 치켜들고 있고 왼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다.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다. 안대를 하는 경우는 객관성을 갖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안대를 안하는 경우는 어찌 보지 않고 마구잡이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는 이론이다.
오늘 본문에서 간음한 여인이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던 죄의 개념을 주님이 바꾸어 놓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법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죄는 드러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라고 할 때는 행위로 드러나고 율법으로 측정할 수 있는 죄를 죄로 생각했다. 법으로 판단 받기 전까지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여인이 음행하는 현장에서 잡히지만 않았으면 죄인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말하지 않았다면 죄인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렇게 드러난 죄가 있을 때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죄인으로 여기고 데리고 온 것이다.
III. 그러나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말하는가? 주님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죄를 사하러 오신 주님이 이제 죄를 정해서 결단을 내려야한다. 계속 답을 내어 놓으라고 다그치는 그들에게 일어나 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여기에서 드러난 죄와 드러나지 않는 죄 사이의 인식을 허물어뜨리신다. 로마서 5장 13절의 말씀을 보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으로 죄를 인식하지만 더 정밀히 보고 관찰하면 이미 죄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시가 있어서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멀리 있는 죄를 망원경으로 보실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시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실 수 있는 현미경을 가지고 계시다. 미숙한 아이들의 감각에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성숙한 어른인 우리들이 보면 눈감고 아웅하기 식의 일이 보인다.
김을 먹을 때 저는 젓가락으로 찍어먹는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손으로 집어다 먹기도 한다. 혜주는 김을 먹을 때 손으로 막 만지고 그리고는 펼쳐 먹는다. 그리고 손을 어떻게 터는가? 공중에 대고 팍팍 털고는 옷에다 쓱 닦는다. 그리고는 깨끗해졌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손을 깨끗이 닦고 오라고 한다. 이미 손가락에 기름이 다 뭍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로 씻고 오는데 흐르는 물에 손을 그냥 두었을 뿐이다. 그러니 물은 기름에 미끄러져 그냥 내려오고 손에는 여전히 기름기가 묻어 있고... 주님은 우리를 씻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늘 그런 식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라고 고발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알고 보면 모든 이들이 똑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죄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증상으로 진단이 바로 나오지 않고 깊은 병이 있을 것 같은 의심이 생길 때 의사는 시티촬영도 하고 조직검사도 하고 더 세밀히 조사해 본다. 그러면 증상으로 나오지 않았던 숨겨진 것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검사를 하게 되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재미난 표현이 있다. water free, tax free, dengue free 등의 말이 있다. 자유롭다는 말이다. 제재를 받지 않고 편안하다는 것이다. 그처럼 sin free 인 사람이 있겠는가? 증상정도를 체크하는 법이 아니라 깊이까지 검사하시는 하나님의 죄의 정의에 넘어갈 사람은 없는 것이다. 누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정의는 사회에서 말하는 죄가 된다. 그러나 사회에서 괜찮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sin free 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요즘 me-too 분위기의 확산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가 드러나고 있다. 안희정 이윤택 조민기... 등등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만이 문제인가? 그들은 밝혀진 사람들이고 안 밝혀진 사람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woman free는 없다. 단지 행위로 나왔을 뿐이다. 알려진 것만 죄이고 알려지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닌가? 내 행동으로 나온 것만 죄인가? 아니면 머릿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가? 주님은 마음속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한다. 탐심을 품으면 이미 도적질한 것이고, 미움을 품으면 이미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수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실수는 없던 것이 나온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들어난 것이다. 실수는 밝혀지게 한 것이 실수인 것이다. 누가 free 할 수 있는가? 그 말은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의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든이가 아무 죄가 없다고? 아니다. 죄인이 하나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면 계속 신경써야 하는 웬수덩어리가 하나 태어나는 것이다. 태어나는 생명은 이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할 영혼이다. 태어나면서 거듭난 자는 없다. 어떻게 한번 태어날 때 born-again 할 수 있는가? 태어나자마자 어떤 패밀리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외모도 성격도 머리도 닮아가듯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아담의 후손으로 죄 가운데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다. 존재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의 문제이지 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5:12)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함량이 미달된 존재요 불량품인 것이다. 로마서 5장14절을 보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이 말은 아담으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이미 그의 모든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유산을 상속받고 싶지 않다. 거절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리얼리티인 것이다.
주님의 답변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게 된다. 모든 이들이 보이지 않은 죄가 예수님의 눈에는 드러나 있음을 알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된다. 죄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죄인이 아닌가? 아니다. 여전히 죄인이다. 그 누구도 죄에서 Free 할 수 없었던 것이다.
IV. 우리는 바로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돌을 다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내가 죄인이구나”라고 하는 인식이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의롭다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가 아니요 sin free 할 수 없는 연약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의 첫 번째 단추가 된다.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해도 들어갈 여지가 있고 대화의 물꼬가 틔어지는 것이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느냐고 버팅기면 관계는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생각이 못 미쳤어” “내가 부덕한 탓이지 뭐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관계를 확 풀어주는 사람이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지식이 가장 유식한 지식이며 이러한 고백은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요 결단이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부르실 때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대답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누가복음 18장 13절에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사순절 기간이라고 한다.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진리가 담긴 시기이다. 우리는 돌을 들 사람들이 아니라 용서받을 사람들이다. 법을 들고 나름대로 꽤 정의로운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바짝 엎드려 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함량미달입니다. 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채워주소서라고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 마지막에 정죄한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용서하시는 예수님만이 그 여인 앞에 남아 있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회개와 용서의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