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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겔이라는 아주 유행한 주석가가 있습니다. 주석가 벵겔은 말하기를 “창세기는 바울의 무기였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사건이나 기록을 가지고 설명하고 설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에 유혹되어 빠지게 되었을 때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책망하면서 너희가 성령을 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사실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아니면 듣고 믿음에서냐고 되풀이된 질문을 하면서 ‘믿음으로’를 주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이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이 말씀은 바로 창세기 15:6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겼다는 말씀입니다. 주석가 벵겔의 말처럼 창세기의 말씀을 무기로 삼아서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이 우리들의 무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나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으로 살았던 요셉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과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의 귀감이요 모델이 됩니다. 그들이 지닌 믿음이 여러분과 저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거짓 교사들)이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방인들에게서 부르시고 그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거짓 교사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밥상에 숟가락 하나는 얹습니다. 바로 할례의 언약입니다. 행위를 첨가한 것입니다. 이것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의 유혹이 바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에 다른 어떤 행위를 첨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가 구십 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내 사라는 이미 단산해 버렸고, 더 이상 임신이나 출산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소망이 없는 시절에 깊은 한 밤중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밖으로 불러냅니다.
“하늘을 보아라 저 많은 별을 셀 수 있겠느냐?”(창 15:5)
아브라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저는 셀 수 없습니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그를 데리고 나가 모래와 먼지를 세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네 자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엉뚱합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도무지 논리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맞지도 아니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고대로 받아 드리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 자기의 생각과 경험에 합당한 이야기만 받아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받고 믿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에 분명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간절히 바라는 것들의, 아직 보지도 안했는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라는 젊은 처녀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편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으리라“
처녀 마리아에게 마른 하늘에 번개를 치는 듯한 말에 놀라서 두려웠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때에 다시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때에 마리아가 보인 반응이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낳게 하신 마리아는 자신의 이성으로, 경험으로 납득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나는 두렵고 떨리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마리아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즐기고 있습니까? 듣고 있습니까?
우리 시대는 ‘말씀의 홍수’라 할 만큼 말씀을 쉽게 접하고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는 어쩔 수 없이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여파로 가나안 교인이 너무 많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영상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굳이 예배 드릴 필요를 못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교우들이 시간을 내어서 인터넷 설교를 듣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조심할 것은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듣기를 즐기면서 출석교회의 목사가 하는 설교는 뻑뻑거리며 지루한 설교를 유치하게 생각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 예배를 어쩔 수 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우리는 성도가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진정으로 듣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간절한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한 말씀이라도 주옵소서”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보십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그 순간,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사실을 우리가 고백하는 그 순간, 우리는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의롭다 간주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꿈이나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것이 바로 기독교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영생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그의 일생이 시작되었고, 믿음으로 모든 삶의 과정을 통과했고, 믿음으로 인생의 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는 패배의식이 팽배합니다. 이 번 생애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패배의식입니다. 자신은 흙수저이기에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금수저와 대결해 봐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자포자기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에게 소원이 무엇냐고 하면 ‘돈 많은 재벌이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니,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희망사항을 말하라고 한다면 ‘재벌 2세로 태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떼돈을 벌어서 유산을 물러 받아서 호의호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벌이 못되고, 재벌 2세의 소망은 없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7)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완악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혈통적으로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유대인들이라고 자부심 하나로 교만한 기고만장한 위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 덩어리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여리고성의 세리장으로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나옵니다. 삭개오입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반역자로 로마제국의 앞잡이 되어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보고자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키 작은 삭개오를 위해 자리 하나 내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던 그를 두고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보십시오. 놀라운 사실을 …… 삭개오가 세리장이기에, 돈이 많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까?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뽕나무에까지 올라가고, 평화를 누리고, 그를 영접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갔고, 오라 하면 왔습니다. 이삭을 바치라 하면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이것입니다. 말씀이 핵심입니다. 이 말씀이 능력이 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성도들에게 능력이 됩니다. 죄악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어 줍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양식인데, 이 양식을 먹지 않고는 힘이 빠집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마귀의 권세를 이길 재간이 없습니다.
창세기 12:4 말씀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았고”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성경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는 것 참 귀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새겨지고,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복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1-3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나라를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리니 네가 복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통해서 큰 나라를 이루고, 다른 이방 나라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복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복을 흘려 보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말합니다
'누구 때문에 덕을 봤다', '누구 때문에 어떤 큰 이득을 누렸다', '야 정말 잘 됐다', '수지 맞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내가 누구 때문에 복을 받고 누구 때문에 덕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복을 끼질 수 있는 그런 인생,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잘 될 수 있는 인생 그런 인생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했던 모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목사의 아들이었습니다. 선친이 목회를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목사님의 모친되신 사모님이 어린 세 자녀를 생각하면서 남편의 죽음 앞에 울면서 말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
이때에 남편 목사님께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믿으면 된다. 믿으면 된다”
유언이었습니다. 사모님은 어린 세 남매를 데리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믿음으로 세 남매를 길렀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웠겠습니까? 믿으면 된다. 믿으면 된다는 남편의 유언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자녀를 키워내었습니다.
그 믿음은 헛되지 않게 복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믿음은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두 아들은 목사가 되고, 모든 자녀들이 믿음의 일가를 이루고, 그 후대 자손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며 복음을 흘러보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므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우리는 어디에 견주며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최고의 영광이요 자부심입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믿음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