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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산을 걸을때 쯤에 눈치를 챘어야 했습니다.
존제산에 다가갈수록 누군가의 후기에서 힌트라도 얻었어야 했습니다.
선배가 있었다면 호남정맥길에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 배경지 벌교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있어야만 그게 정상이었습니다.
8구간이 끝이 나고서야 [태백산맥]의 그 배경지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무심하게 정맥을 한다는 사람이 눈을 뜨고도 오밤중에 앞 사람의 뒷꼭지만을 쳐다보고 걸은 셈이 되었네요.
언제 읽었는지도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그 내용 또한 안개처럼 흩어져 버렸지만 데모 막으로 바쁘게 뛰어다닐 때이니 90년도 중반인가 봅니다. 태백산맥에 연이어 아리랑을 읽고 한강, 정글만리는 읽지 못했구요.
선암사와 송광사라는 두 거찰을 품고 있는 조계산(해발 884.3m)은 전남 순천시 승주읍과 송광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계산은 비교적 낮은 산으로 산세가 부드럽고 아늑하다.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 장군봉, 깃대봉, 일월석 등이 줄지어 솟아있다. 1979년 12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12월에는 사적 및 명승 제8호로 지정되었다. 작가 조정래가 태어난 곳. 그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와 몇몇 인간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피로 얼룩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현장을 그린 실화 소설이 태어난 곳이다.
마침내 대검은 1992년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내사를 종결한다고 발표했다.
차기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국가보안법상의 이적 표현물과 적에 대한 고무찬양에 저촉되는지를 내사한 결과 작가에 대한 의법조치나 책의 판금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데 단서로 붙인 문구가 희한했다.
'일반 독자들이 교양으로 읽는 경우에는 무관하지만,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불온서적 소지 및 탐독으로 의법 조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검찰당국의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때 이 발표를 접한 조정래는 이렇게 말했다.
"안방에서 어머니가 읽으면 교양물이고, 건넌방에서 대학생 아들이 읽으면 이적 표현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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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中
단순히 문학을 넘어, 이 문학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지식인들의 사투와 그 힘겨운 투쟁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분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지금의 민주주의를, 또 지금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을지 잘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이 분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 아닐까.
책을 읽기 전, 그리고 읽는 중간중간 책의 내용과 주제에 비해 그 제목이 지나치게 서정적인 느낌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 저자인 정규웅 작가님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난세가 아닌 태평성대가 1980년대에 펼쳐졌더라면 이 모든 문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서로 글솜씨를 뽐내고 저마다 후대에까지 남을 문학 작품들을 발표하지 않았을까. 찰나의 순간이라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서로 웃고 즐기며 소설과 책에 대해 논하며 웃고 즐기던 그 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말이다.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한반도에서는 좌파와 우파간의 사상대립이 심각해지는데, 이는 전라남도 보성군의 벌교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숯장수 염서방의 아들인 염상진과 동조자들에 의해서 점령되어 민중들을 착취하던 지역 유지들이 민중들의 증오속에서 처형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그들의 패주로 염상진의 동생이자 건달패인 염상구와 청년단원들이 되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좌파인사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이상을 갖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출신의 이지숙은 야학교사로 일하며 구연동화 수업으로써 계급 투쟁 의식을 고취시키고, 남로당 보성군당 위원장 염상진과 그의 동조자 하대치, 안창민 등은 계엄군 사령관 심재모 중위와 대립하면서 명석한 머리와 냉정한 성격으로 빨치산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염상진은 해방구(공산주의 혁명세력이 국가 권력의 지배를 배제하고 그 세력을 확립한 지역)주민들의 몰이해와 추위, 빨치산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면서도 협조하지 않는 일부 인민군부대의 이기주의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빨치산투쟁을 지도하지만, 토벌대에게 포위당하게 되고 동지들과 함께 수류탄 무덤앞에서 동지들은 염상진의 공산주의혁명의지를 계승할 것을 다짐한다.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때까지 치열했던 이념 대립과 민중들의 한(恨)을 묘사하여, 출판 당시 우파진영으로부터는 좌파에 치우친 작품, 이적물이라고 매도를 당했으나,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지식인들의 대화에서는 모두 표준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다수 주인공들의 대사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그림 그리듯이 세밀하게 표현하여 지역 고유의 특색을 잘 드러내었다.
조정래가 지은 대하 역사소설. ≪현대문학≫, ≪한국문학≫ 연재(1983, 9∼1989, 11)를 거쳐 1989년 전 10권으로 한길사에서 간행되었다가 출판사를 옮겨 1995년 해냄사에서 재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작품집 ≪유형의 땅≫(1982), 장편 <불놀이>(1983) 등을 통해 6·25전쟁과 그로 인한 분단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의 문학적 중간 결산이다.
1980년대 들어 그 동안 한국사회를 엄혹하게 통제해 왔던 반공 이데올로기의 구속력이 약화되면서 6·25전쟁과 그 전후 과정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여 드러내는 일이 가능해졌는데, 이런 시대상황의 변화가 작가의 오랜 관심과 만나 이 같은 대작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태백산맥]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여순반란사건이 종결된 직후부터 1948년 12월 빨치산 부대가 율어지역을 해방구로 장악하는 데까지를,
제2부는 여순 사건 이후 약 10개월 뒤까지를,
제3부는 1949년 10월부터 1950년 12월까지 6·25전쟁 발발 전후를,
제4부는 1950년 12월부터 1953년 7월 휴전 협정 직후까지의 시기를 각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순반란사건의 종결에서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이후의 한국 현대사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대한 시기에 대한 소설적 탐구인 것이다.
이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기본 동인은 좌우갈등이다. 염상진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과 토착지주 및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 사이의 갈등이 전쟁으로 통치권력의 성격이 수시로 뒤바뀌는 혼돈의 역사 전개를 따라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민중들과 지식인들은 저마다의 길을 택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같은 노선 선택의 양상이 좌우의 갈등과 함께 이 작품을 채우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이처럼 좌우의 갈등과 혼돈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노선 선택은 개인적 차원에 속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한데, 토지모순·민족모순·분단모순 등 갖가지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현실과 그것을 해소하고 새로운 역사를 열고자 하는 시대적 지향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백산맥]은 저마다 순수한 뜻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중심 인물 대부분이 그 뜻의 실현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그림으로써 이 시기 역사 전개의 비극성을 증언하고 동시에 그들이 해결코자 했던 과제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이후 역사의 과제로 남겨졌음을 강조한다. 소설 [태백산맥]은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것이다.
[태백산맥]은 한국전쟁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역사 전개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 작품이다. 한국 전쟁의 전 단계에 해당하는 해방공간(Haebang Period)을 중심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런 의도의 소산이다. 한국 소설에 그려진 해방공간은 좌/우의 대립이란 단순 도식으로 추상화되어 있다.
해방공간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된 왜곡된 역사로서, 그 같은 역사 해석을 뒷받침하는 한갓 소재로서만 문학 작품 속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었다. 싸늘한 적의가 만들어낸 역사의 왜곡, 더 나아가서는, 역사의 무화였던 것이다.
[태백산맥]은 이처럼 무화된 역사를 복원하는 한편, 그것을 딛고 해방공간,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중요 시기를 동적, 총체적 관점에서 그려낸 작품이다. [태백산맥]이 단일 주제를 안고 있는 앙상한 단일성의 세계가 아니라 여러 개의 주제가 겹쳐 있는 중층성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태백산맥 [太白山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벌교쪽에서는 징광산, 보성쪽에서는 존제산이라 불린다. 성벽처럼 웅장하게 솟구쳐 있는 벌교의 진산이다. 해발 704m로 군내에서 웅치면 제암산에 이어 두번째 높은 산으로서 해발 300m 이상의 고지가 무려 65㎢나 되어 가장 넓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릿재를 보듬은 존제산에는 우리들의 슬픈 역사가 있어 가슴 저림을 더 하게 한다. 남북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비극의 현장으로 유명한 산이며, 소설 태백산맥의 중심무대로 외지에 더 알려진 존제산 자락을 작가 조정래는 그의 소설[태백산맥]을 통해「그만 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술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들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 동무였다.」 고 존제산의 산세를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지어 풀이하고 있다.
벌교읍, 조성면, 율어면에 둘러싸인 존제산의 능선은 거의 밋밋하게 높이가 계속되고 존재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무등산, 모후산, 백운산 그리고 여자만(순천만)과 고흥반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
순천시에서 낙안면이 외지며 분지 듯 보성군에서 율어면은 외지로 분류되며 지형도 낙안면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두 곳 모두 신(神)이 만들어 놓은 자연산성의 모습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그 안쪽은 평야다.
낙안면 산성과 율어면 산성의 접경지인 주릿재는 낙안면에서는 서문이며 율어면에서는 동문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그곳엔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 문학비가 서 있다. 여순사건과 6.25가 있던 50년 전쯤, 그 누군가는 이 문을 통해서 해방구를 찾고자 율어로 넘어갔을 것이다. 율어 해방구 가는 길, 주릿재는 험하고 고불고불했다. 산은 깊고 넓었다. 이 길이 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이 넘던 길이지만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질적으로 빨치산들이 해방을 찾아 넘던 길이다.
사방이 산으로 싸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마저 원할하지 못했던 이유 하나 때문에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었던 탓으로 이 지역 사람들이 겪은 아픔의 생채기는 깊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아픔이 존제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할 것이다. 산은 고단함에 찌든 현대인들의 삶을 위한 받을 수 있는 그런 고마운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호젓한 산행을 즐겨한다. 어느 산길이건 상념에 젖지 않게 하오리만 존제산은 우리들에게 아예 그런 산행을 허락하지 않고 있기에 이 산에 배인 생채기를 어루만지기는 고사하고 보통의 상념에 조차도 젖어볼 수가 없다. 그것은 존제산이 군사시설보호구역이기 떄문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율어에 있던 염상진 등이 이 존제산을 넘어 조성지서를 기습하는 장면과 신속하게 벌교에서 구원 출동한 심재모의 계엄군에 의해 산으로 퇴각하는 것들이 그려지고 있고, 염상진이 벌교를 습격하는 틈을 타 심재모가 빨치산에는 없었던 통신장비를 이용해 보성경찰서장에게 텅 빈 율어의 빨치산 해방구를 기습하도록 명령함으로써 피아간에 일승 씩을 나눠 가지던 장명이, 하대치가 고흥에서 암약할 밀명을 띠고 벌교의 칠동으로 내려가는 것 등등이 각각 묘사하는 것처럼 이 존재산은 벌교와 조성 그리고 율어는 물론 멀리 화순의 모후산과 백아산, 순천의 조계산으로까지 직접 이어지고 있기에 빨치산들이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 오래도록 지역 양민들을 괴롭혔던 것 같다.
주릿재에서 율어쪽을 봤다. 올라올 때 봤던 낙안면의 모습과 어쩌면 그렇게도 흡사하게 주위는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드넓은 평야는 황토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곳이 모두 인간 최고의 희망을 지니고 있다. 한 곳은 낙안, 즉 영어로 파라다이스며 한 곳은 해방구, 즉 인디펜던스다. 주릿재를 넘어가면 해방이며 주릿재를 넘어오면 천국인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넘어가고 넘어오고 했을까?
[보성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율어는 당시 보성군 내에서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으로 꼽힌다. 그것은 빨치산들의 주둔지가 되었던 존제산을 끼고 있고 조계산에 잇닿아 있는 지형 탓으로 반란사건 이전에도 빨치산들의 활동이 활발했었던 때문이다. 율어는 소작인이 많아 계급적 갈등이 심했을 뿐 아니라 6.25때 전남의용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과 같은 열성적인 좌익들의 고향이었떤 때문이기도하다. 그러했기에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 때에도 2천에 가까운 농민들이 경찰관 1명과 우익인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율어를 비롯한 산간지역은 당시 기관의 추적을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산으로 둘러쌓인 율어의 상도지역은 자연히 많은 좌익들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반란사건 전부터 칼과 같은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면소재지를 제외한 마을단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상태여서 경찰관들도 자기 보신 이외에 아무런 치안활동도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율어는 이처럼 좌익세가 강했던 만큼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40여 일 간이나 그들의 지배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12월이 되어서야 경찰 38명과 군병력 50여명으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밤에는 소위 밤손님으로 불리는 좌익들이 밥과 가축, 젊은 청년들을 잡아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에 협조한 자를 통비분자로 잡아가 이 지역의 희생은 컸다.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죽이고 죽는 살상극이 연속되었던 것이다.
지리산 남쪽에서 백운산을 거쳐 조계산 까지는 외길이다.
조계산에서 주 무대인 벌교와 보성으로 가는 길은 선암사 굴목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능선을 타고가다 고동산 너머에서 왼편 수정마을 길을 따라 낙안으로 들어가거나 보성 쪽으로는 고동산에서 계속 남쪽을 타고 내려 빈계재(외서재)를 가로질러 낙안 백이산을 넘어 석거리재를 만나 벌교로 들어가기도 하며 줄곧 앞쪽 능선을 타게 되면 704고지인 벌교 존제산에서 보성의 좌우를 호령하고 호남정맥을 거슬러 장흥으로 가게된다.
다음 광주 쪽으로는 송광사로 넘어가는 길을 통해 보성강을 건너 (현재 주암댐의 중심이 됨) 모후산(말거리재, 유마사)을 지나 빨치산 광주지역 사령부였던 백아산을 거쳐 무등산에 닿게 된다.
습격과 토벌의 반복, 현장의 세대들은 하나 둘 거의 다 가고 한 시대를 겪었던 순박한 사람들의 고통의 현장이 아무아물 전설 속으로 묻혀 가고 있다.
조계산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산길에는 소설 태백산맥의 테마가 깔려있다.
광양 백운산으로부터 시작되는 역 호남정맥이 그렇고 백운산 종주 후 조계산, 모후산, 화순 백아산의 등산로를 이어 무등산까지 테마산행로를 개발하여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남정맥 조계산에서 남진하여 벌교와 순천의 경계인 제석산으로 이어지고 역으로 소설속 안창민과 염상진이 제석산에서 산줄기를 따라 인근 조계산으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고동산과 조계산을 넘어 광양 백운산과 지리산을 오갔을 빨치산 루트를 정맥꾼들이 오늘도 묵묵히 잇고 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8.15해방이후 6.25전쟁까지 민중의 고난사를 적나라하게 조명한 소설로서 그 무대가 보성군 벌교읍시내와 존제산 일원인데, 소설속의 무대였던 현부자네 고가, 양조장, 남도여관, 홍교, 벌교고막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부자네 고가에서 출발하여 홍교를 거쳐 존제산에 올라 주릿재까지 답사를 하자면 우리나라의 암울했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뿐만아니라,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금방 뛰어 나올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현재도 국내외 문학도들과 관광객들의 탐방이 줄을 잇고 있다.
[네이버 여기저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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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작가인 조정래님 만큼 글을 잘 쓰십니다.ㅎㅎㅎ
거꾸로 영알에서 뵙는거죠~^^
읽었긴 했는데 기억에 그닥 남아있는게 없습니다.ㅜ
다시 읽어도 새로운 감동이 일거 같아 호남정맥 계기로 재독 계획을 잡을려고요.^^
영알에서 인사할게요.ㅎㅎㅎ
넵!!^^
그 이전이라도 기회 닿으면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