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본관
포천 출신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1456]에 얽힌 인물담이다. 유응부의 시호는 충목(忠穆)이고,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다.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하였으며, 씩씩하고 용감하여 활을 잘 쏘니 세종(世宗)[1397~1450]과 문종(文宗)[1414~1452]이 모두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소재 충목단(忠穆壇)에 모셔져 있고, 노량진의 민절 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 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 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 서원(落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어 있다. 유응부에 대한 포천 지역민의 긍지를 보여 주는 내용이다.
2000년 이근영·이병찬 등이 엮고 포천 문화원에서 간행한 『포천의 설화』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2000년 9월 22일 이병찬이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금주 4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양기성[남, 72]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유응부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장군다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쉬는 날이면 유응부, 유응신 형제가 모시고 나가서, 뛰어난 활 솜씨로 솔개가 날면 쏴서 어머니께 그 기쁨을 전해 드리곤 했다.
한양에 다녀오는 길이라도 산에서 짐승을 보면 잡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관직에 나아가서도 청백리로 지내다 보니 집안에 쌀은 주머니에 한 말 뿐, 문의 창호지도 다 찢어져 돗자리 거적을 치고 살았다고 한다.
가정적으로는 효자일 뿐만 아니라 나라에는 절의 높은 충신으로, 관리로서는 청백리로 살아간 그분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포천군 소흘읍 무봉리에 ‘충목단’이라는 단을 지어 그분을 기리고 있다. 일 년 중 가을에 포천의 유림들이 제향을 지내고 있다.
그분에게는 지금 본관이 두 개인데, 그것은 기계 유씨와 철령 유씨 집안에서 서로 자기네가 유응부 선생의 후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죽은 지 250여 년 만에 복권이 되어 조정에서 유응부 선생의 제사를 올리려고 하는데, 그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때에 철령 유씨들이 자기들이 유응부 선생의 후손이라 하여 임금으로부터 제사를 지내도 좋다는 교지를 받아 갔고, 이때부터 유응부 선생은 철령 유씨라는 본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기계 유씨들도 유응부 선생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선생을 족보에 올리고 제사도 모셨다. 그래서 유응부 선생은 두 개의 본관을 갖게 되었고, 양쪽 집안의 족보에 모두 오르게 되었다.
유응부 선생이 역적으로 몰려서 처형을 당할 때 선생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선생의 동생 유응신이 강보에 싸서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자손들의 일부가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통일이 되어 북쪽 자손들의 본관이 확인되면, 철령 유씨와 기계 유씨 중에서 선생의 자손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응부의 본관이 두개라니 특이한 현상입니다. 내용을 자세히 보니 이해가 갑니다.
유응부의 인물됨이 좋아 보입니다.
휼륭하신 분이시네요.
근디 본관이 두개라니 거참 특이 하네요.
사육신중에 유일한 무장으로 알고 있습니다...과연 철령과 기계중에 어디일까요?...아니면 다른 본관일까요?...^^
재치(財痴) 위현동 님
무장은 처음 알았습니다. 유응부 손이 강성인 모양입니다. 꽤 오래 전인데요, 유응부 후손이 백촌 김윤기가 당시 아들 장모와 간통이 있었다고 비방하다가 결국 벌금에 처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앙숙인 모양입니다.
최근에는 기존 사육신 후손 문중이 제사봉행에 김윤기 문중을 배제하려들자 김윤기 문중이 급기야는 제삿상을 뒤엎는 일도 있었습니다.
碧泉 위윤기 선암 위옥량 (대종회재경청장년회장) 님
사육신은 '대역죄'를 지었기 때문에 거의 멸족되었고요, 관직에 진출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숙종 이후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도 '역적'이 아닌 '충신'으로 추숭받음에 따라 그들의 먼 후손들에게 벼슬을 준 경우는 있었습니다.
아래는 영조실록에 나온 기사로 사육신이 죽고나서 먼 후손들이 관직을 받았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을 수습하여 임용(任用)하게 하고, 이어 분부하기를,
“만일 후손이 없으면 비록 방손(傍孫)이나 외손이라도 일체로 탐문(探問)하여 녹용(錄用)하라.”
하였다. 이때 승지 경성회(慶聖會)가 아뢰기를,
“박팽년은 후손 박경여(朴慶餘)가 있고 성삼문은 단지 외손 박중귀(朴重龜)만 있으므로 숙종(肅宗)께서 임용하여 수령(守令)을 삼았었는데, 이 두 사람이 벼슬에 있을 적에는 육신(六臣)들의 제사를 일체로 차렸었으나, 지금은 이 두 사람이 모두 죽고 그 가문이 매우 빈한하므로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런 명을 내리게 된 것이다.
영조 11권, 3년(1727 정미 / 청 옹정(雍正) 5년) 4월 21일(정미) 3번째기사
아래는 영조실록에 나온 기사로 사육신이 죽고나서 먼 후손들이 관직을 받았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계유씨와 철령유씨 양쪽에서 선대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유응부 선생대에서 같은 집안이라고 나오지 않을까요?
하기야 그랬다면 지금 두 문중에서 서로 다투고 있을 리가 없겠지요...
위이환 대부님, 그 제삿상 뒤엎은 일이 제사 방해로 형사사건이 되어 벌금 500만원에 처해졌다고 뉴스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湖山 위신복 님
본관이 언제까지 가야 밝혀 지나요?
碧泉 위윤기 양쪽 문중에서 밝히려고 했어도 못밝혔으니 지금까지 그러고 있을텐데...
내가 남의 본관 밝히는 일에 매달릴 수도 없고...ㅋㅋ
사육신묘는 노량진에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