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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사람 농사일기인데 집사람 동의 받아서 올려 봅니다.
게시판에서 모두 읽기는 좀 긴듯 하지만 재미있네요.ㅎ
우리가족은 지난 2월 제주의 중산간마을에 있는 시골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눈보라를 뚫고 1박2일로 이사를 오는 과정도 쉽진 않았지만, 농사짓고 사는 것을 꿈꾸며 하나 둘 몸으로 겪어나가는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4.14 토
지난 달, 남편이 처음 “땅 주인이 도지(임대료)를 안 내고 300평 밭 2년동안 그냥 쓰래. ”이렇게 얘기했을 때, 시골 생활이 절로 풀리는구나 생각했다. 임대계약서 쓸 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동네 형님들이 빌린 밭에 보고는 모두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영 빌레밭이라 여기 농사 안 될크라. 맹땅이래 소풀이나 자랍져. 농사하지 맙서. 무사 이런 데를 빌려가...쯧쯧” 바위가 많고 생흙이라 목초나 되지 농사는 안 될텐데, 뭐 이런 데를 빌렸냐는 뜻이다. 그래도 임대료 안 내는데, 뭐라도 해 볼 참으로, 오래 묵힌 밭이니 포크레인을 빌어다 잡목도 걷어내고 큰 돌들도 골라냈다.
포크레인 작업하던 날도 기사님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제라도 그만 두는 게 낫다는 말씀이다. 땅을 빌려주신 분께도 연락드렸더니, 너무 무리해서 꼭 농사지으려 안 해도 된다고 하신다. 이럴거면 뭐하러 빌려주셨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편하게 말씀해 주시니 짜증나지는 않았다. 이미 뽑은 칼, 밭 만들기로 마음먹은데다 이 밭에 농사지으며 농민의 증명서, 농지원부를 만들리라 다짐한 우리는 일단 시작한 거 해 보기로 했다.
흙이 안 좋고 돌이 많은데다, 옆에는 돼지 축사가 있어 냄새도 심하고, 돼지 멱따는 소리도 많이 난다. 돼지들이 즐거워서 내는 소리인지 괴로워서 내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밭에서 돼지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소름끼친다. 밭정리하다 축사에서 던져놓은 새끼돼지 사체를 두 어 구 보고 나서 그런지 더 오싹하다. 이래저래 빌린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정이 붙기는 커녕 마음이 안 가는 밭이다.
미우나 고우나 하나뿐인 우리밭, 서너 평 텃밭농사도 몇 년 해 보았고, 흙살림에 일하며 밭일도 꽤 여러 날 해 보긴 했지만, 내 농사를 계획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하긴 처음이다. 주워듣기로는 돼지감자가 잡초처럼 잘 자라고 흙이 좋으면 좋은대로, 안 좋으면 안 좋은대로 다 자라준다 하여 충북 괴산에 아는 농가에 연락해 돼지감자 씨를 택배로 받았다.
남편과 돼지감자를 심으며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다. ‘돼지감자가 당뇨병에 좋다고 해서 요즘 좀 뜨는 작물이긴 하지만, 이걸 어디다 팔지..생으로도 팔고, 즙으로도 팔고 해야 하나..한 박스에 얼마나 받을까...몇 박스나 나올까...’ 씨 심으면서 벌써 팔 걱정이다. 남편한테, “우리 이거 농사지어서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서른박스 쯤만 나와도 50만원은 되겠지. 포크레인 작업하는데 30만원 들었으니까, 본전은 해야 하는데..” 남편이 하는 말이 명언이다. “음...그건 돼지감자 싹 나고나서 얘기하자. 이 척박한 데서 싹이 날까 의문이다.”
그렇다. 돌이 반이고 돌같이 딱딱한 진흙이 반인 밭이다. 돼지감자를 심고도 이걸 흙으로 덮는지 돌로 덮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자갈밭이다. 예전에는 땅이 있으면, 밭이 있으면 농사지을 수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 내 밭 300평이 생긴다는 사실에 들떴다. 하지만 농사는 땅에 짓는 게 아니라 흙에 짓는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
농대를 졸업하고, 귀농학교를 다니고 흙살림에 5년 일하며 농업판에 대해 좀 감 잡았다 생각했지만, 오만이었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4.18 수
동영 씨네 양파 밭에 일하러 갔다. 창고에서 브로콜리 선별, 포장 작업은 종일 가 본 적이 있지만, 필드에 나가는 품팔이는 처음이다. 한살림에 출하하는 조생종 양파. 양파가 빼곡히 심어진 밭에 방석(앉아서 밭일할 때 다리가 덜 아프게 의자처럼 앉을 수 있는 엉덩이 부착식 방석. 바지처럼 끼우는 구멍이 두 개 있음)을 차고 호미를 하나 들고 들어갔다.
나이 70 먹은 동영 씨 어머니와 그 집에서 50년 째 일하고 계시다는 아흔 넘은 할머니, 그리고 왕초보인 나, 오늘 멤버는 이렇게 셋이다. 할머니는 지팡이가 없으면 못 걷는다. 그래서 한 번 밭에 들어오면 저녁에 일 끝날 때까지 나가지 않는다. 볼일도 고랑 끝에서 스리슬쩍 해결하고, 점심 먹을 때는 두 손으로 짚고 거의 네 발로 기어오신다. 그래서 난 당연히 젊고 기운 센 내가 훨씬 일을 더 잘 할 줄 알았다. 하지만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밥도 반 공기 밖에 안 드시면서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뒤쳐지는 내 고랑의 양파를 슬쩍슬쩍 앞에서 뽑아주신다. 그렇게 도와주시는데도,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다.
한 고랑에 가로로 14개, 20센치 간격이니 고랑 길이를 15m로 잡으면 한 고랑에 1050개다. 한 고랑 나가기가 한 시간은 걸린다. 15m를 가는데 한 시간이라니 달팽이 걸음으로 걸어도 이것보다 느릴까. 쑥 뽑으면 되는 양파지만 500개 뽑고, 2000개 뽑고, 5000개 뽑으니 손가락이 아프고 팔이 쑤신다. 갑자기 악수를 많이 해서 손 아프다는 그 분이 생각난다.
선거철이면 손에 붕대를 감고 나타나, 많이 아플 때는 오른손 아닌 왼손으로 악수한다는 그 공주님. 악수만 해도 손 아픈 사람이 농사일이 얼마나 고된지 알까, 농민의 어려움을 정말 알까. 도시 서민으로 살며 흙살림에서 일했기에 농업판을 조금은 알겠다 싶던 나도, 막상 밭에 와 몸으로 부딪히니 이렇게 막막하고 눈물겨운데, 공주님이 진짜를 알까. 이런 생각에 괜히 막 화도 났다.
어린이집에 애를 9시 반에 보내서 늦게 밭에 나갔고, 또 오후에는 데리러 가야해서 일찍 4시에 나오는데, 아휴 다행이다 싶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농사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든지.
5.22. 화
오랜만에 동영씨네 일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마늘밭이다. 멤버는 지난번 그대로 90세 할머니, 70세 삼촌(제주에서는 이웃 아주머니를 삼촌이라 부른다.) 33세 나. 일을 못하지는 않아서 계속 부르는 건지, 일 할 사람이 없어서 오랜만에 부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시골 내려온 첫해이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해 보며 잘 맞는 농사를 찾아보자는 생각이다. 양파밭에 이어 마늘밭도 처음이다.
마늘 매기(뽑기)는 양파보다 힘이 덜 든다. 크기가 작고 미리 물을 뿌려놔서 흙이 단단하지 않으니 쑥쑥 잘 빠지는 편이란다. 처음엔 할머니보다 뒤쳐졌지만 오후쯤되니 할머니 속도를 따라잡는다. 하지만 할머니는 별로 안 힘들어 하시는 것 같고, 난 죽을 힘을 다해 할머니를 의식하며 쫓아갔더니 기진맥진. 이건 비겨도 비긴 게 아니다. 뭐 그런 거에 경쟁심을 가지냐 할 지 모르지만, 돈 받고 일하는 건데 너무 초보티를 내며 엄살 부릴 수도 없고, 남들만큼만 하자해도 죽을 맛이다.
일을 쉬엄쉬엄 할 수 없으면 재미있게라도 해야 하는데, 할망과 삼촌이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제주에서는 제주 말을 사투리라고 안하고 제주어라고 한다. 그 말이 맞다. 이건 외래어다. 젊은 사람들이 쓰는 말은 그래도 좀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할망들이 쓰는 말은 우리말이 아닌 것 같다. 중간에서 삼촌이 통역해 주지 않으면 90%는 못 알아 듣겠다. 이건 뭐 내가 이주노동자가 된 기분이다, 말이 안 통하는. 진짜 외국인 노동자들도 우리나라 와서 일하면 한국 사람들끼리만 말하고, 소외되는 기분이겠지 막 이해가 된다.
일 끝나고 *만원을 받았다. 오늘은 좀 늦게 갔고, 지난번에 양파 작업한 돈도 안 받았는데 이틀치 품값인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그 때 양파 파지(불량품) 반 자루 받아갔는데, 그게 품값이었나, 그 값은 뺀 건가...또박또박 삼춘께 물어보기도 그렇고 그냥 왔다. 일 배우는 셈 치지 뭐 하며 중얼중얼...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이건 밭에 일한 사람이 아니라 탄광에 일한 사람 같다. 흙먼지에 손과 얼굴이 검다. 계속 코를 푸는데, 검은 콧물이 자꾸 나온다. 진짜 노동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작년에는 애 키우면서 파트타임 일을 두어 가지 했었다. 식생활교육 단체에 비상근 간사로 활동했고, 강의하거나 시험문제를 출제·검토하는 일을 맡으면 하루에 10~20만원을 벌기도 했다. 그렇게 살림하며 슬슬 일하고 6~70만원을 벌어도 이건 아르바이트고 많이 받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농사일 품값이 4~5만원이라는 걸 들어서 알고 있을 때와 직접 일을 하고 그 돈을 받았을 때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이렇게 한 달에 20일을 꼬박 일해도 100만원 남짓 손에 쥐게 되는구나. 몸은 더 고되고, 시간이 훨씬 많이 들지만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고작 이만큼. 요즘 유행하는 말로 멘붕이 온다.
나꼼수나 나꼽살에서 정치판 얘기 들으면 몇 십억도 우습게 취급되던데, 뭐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연봉 2~3천만원도 우습게 보는 친구들이 주변엔 숱했다. 먹물들 사이에 살며 지금까지 나도 모르게 내 안을 채우고 있던 기준과 아집을 이제야 보게 된다. 돈에 대해, 노동에 대해, 먹고 사는 일에 대해 처음부터 새로 알아가는 기분이다.
게다가, 집에는 제주법원에서 벌금내라고 명령서가 와 있다. 3월에 남편이 해군기지 공사하는 구럼비 바위에 들어갔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조사서를 쓰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10만원 내란다. 누구를 때린 것도 아니고, 뭘 부순 것도 아니고, 관광미항 공사하는데 들어갔다고 돈을 내라니, 어이가 없다. 억울하면 정식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단다.
10만원, 재판을 청구하기엔 귀찮고 벌금으로 내기엔 큰 돈이다. 이런 식으로 몸 사리게 만든다 이거지. 자꾸 나대면 벌금 때릴테니까, 조용히 있으라는 협박이다. 화딱지가 나서 2차 멘붕이 또 온다.
그러는 중에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너 밭일 하라고 무릎 뼈가 다 닳도록 절에 가서 기도하고, 공부 뒷수발 한 줄 아냐. 부모 속 다 썩어빠진다. 아빠한테는 밭에서 김맨다 이런 말 하지 마라’ 하신다. 부모님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스무살까지 가문의 영광 우등생, 모범생이던 애가 대학 졸업하더니 엉뚱하게 농사짓겠다 시골가겠다고 택도 없는 말을 10년 동안 하다 올해는 기어이 시골로 와 버렸으니 말이다. 물질적인 효도는 못할지언정 걱정은 끼치지 말고 살아야지 싶다. 그러기 위해서 감정 낭비되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대신, 내가 선택한 시골살이를 잘 해 나가고 스스로도 충실해지는 자존· 자립하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해 본다.
5.27. 일
드디어 오늘이 한림읍 체육대회다. 제주에 와서 육지와는 다른 문화에 종종 깜짝 놀란다.제사나 명절 차례를 여러 형제들이 나눠 지내는 일이나 며느리에게 안방을 내 주고 밖거리(바깥채)에 시어머니는 나가 살며 밥도 따로 해 먹는 문화 같은 것이 그렇다. 합리적인 것도 같고 역시 생활력 강한 제주 여자다 싶기도 하다.
농촌에 젊은 사람이 많고, 한 마을(리)의 규모가 큰 것도 차이점이다. 지난달에는 금악리 체육대회를 했는데, 리 체육대회라는 걸 들어보기도 처음인데다 그 규모에 깜짝 놀랐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2~300여명은 됨직했다. 제주의 농촌 마을은 좀 재미난 면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오늘은 읍 체육대회. 3주 전에 리 사무장님이 “새댁 달리기 잘함수꽈? 400계주 선수 합서.”하셔서 거절 못 하고 얼떨결에 마을 대표로 400m계주를 뛰게 되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마을 대표를 하게 된 것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집 앞 초등학교에서 일주일 전부터 매일 5바퀴씩 뛰기로 마음 먹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4살짜리 아들이 독한 코치 역을 맡아서 내가 좀 쉴라치면, “엄마, 뛰어~!준비, 출발!”하며 계속 재촉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이장님 딸과 달려보기도 했는데 6학년인 하늘이가 나보다 훨씬 더 빨랐다. 내 순번에서 추월당하거나 뒤처지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읍 체육대회는 한림읍 20여개 리가 모두 참여해서 공설운동장에 마을별로 천막을 치고 종일 먹으멍 놀멍, 선수들은 경주하멍 즐기는 잔치였다. 나름 선수단 입장도 하고, 성화 봉송도 했다. 선수단은 선수만 나가는 게 아니라 할망, 할아방, 못 걷는 아기도 다 데리고 나가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고 가운데 나란히 선다. 개회사와 축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땡볕에 쓰러지는 아줌마도 있었다. 오랜만에 국민의례도 해 보았다. 씨름도 구경하고 줄다리기도 응원했다. 이긴다고 황소 한 마리 주는 것도 아닌데, 마을 대표로 나온 아줌마, 아저씨 씨름선수들은 표정이나 풍기는 풍채가 다들 대단했다. 명절에 TV에서 하는 씨름 뭔 재미로 보나 싶었는데, 모래알 튀기는 현장에서 보니 이 맛에 씨름 보는구나 싶었다.
드디어 400m계주. 여기저기서 산만하게 진행되던 경기들과 달리, 운동장 트랙 전체를 활용해야 하는 이어달리기는 장내를 정리하고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진행된다. 10대 1명, 20대 1명, 그리고 30대 이상 2명으로 마을마다 선수를 짜서 나왔는데, 웬 걸 펑퍼짐한 시골 아줌마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날쌔 보이거나 기럭지 길거나. 연습이랍시고 하긴 했지만, 워낙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달리기 경주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진짜 달리기도 전에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나는 세 번째 선수로 뛰기로 했다. 1번 인정이가 꼴등하면 어떡하냐고 계속 징징대더니 1등과 얼마차이 안 나는 2등으로 바톤을 넘겼다. 나랑 동갑이라는 2번 주자는 몸보다 마음이 앞섰는지, 발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응원석 여기저기에서 ‘아~’안타까워하는 탄성이 나왔다. 2등에서 4등으로 뒤쳐진 상태에서 바톤을 받았다. 이미 다 앞서 가 버려서 난 경쟁상대가 없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타조처럼 성큼성큼’ 잘 뛰더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재게 잘 뛰는 사람 옆에서는 느린 내 뜀박질이 비교됐을텐데, 167cm 키로 혼자 뛰니 어쨌거나 잘 뛰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넘어진 선수에게는 미안했지만, 내심 나로써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마을은 예선 탈락하고, 체육대회 하이라이트 400m이어달리기 결승을 마지막에 했다. 관중석에 앉아 구경하는데, 정말 열심히 뛰는 아줌마들과 집중하는 관중들을 보며, 예선 탈락하길 잘했구나 싶었다. 다음번에 또 뛰라하면 못 하다겠다 해야지..거의 프로급들이야..
30~40대의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지키고 살고, 큰 규모의 읍 행사에 각 마을 사람들이 기꺼이 참여해 재밌는 시간을 스스로 만드는 게 참 대단해 보였다. 노인이 더 많은 육지의 농촌에서 전체 읍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이 정도의 행사를 해낼 수 있을까? 군민 체육대회 같은 걸 한다 해도, 읍면 단위의 팀은 리 단위 마을에서 가능한 친밀감이 없을테니 분위기가 또 다를 것 같다.
저녁 늦은 시간까지 마을회관에서 이어진 뒷풀이까지 자리해 부녀회 일도 돕고, 동네 아저씨들과 술잔도 나눴다. 선수들에게만 나눠 준 운동복 잠바를 입고 있었더니, “금악 사람 다 됌수다.” 하신다. 젊다는 이유로 시골 와서 참 이쁨 받고 사는구나 싶다.
6.6. 수
옆집 삼촌이 봄부터 말씀하셨다. “밭일 할 수 있쿠과? 6월 되믄 마농(마늘)밭 일해 줌써. 밭이 하영 넓어 마농 붓는 일에 젊은 손 필요핸. 다른 디 먼저 일 잡지 맙서.” 그러더니 어제 저녁 오셔서, 아침 일찍 나가자 하신다.
아침 6시. 동네 할망을 둘 태우고 밭에 가 국수로 아침을 먹고 일을 시작했다. 세 명이 마늘을 특, 상, 중으로 나눠 고무대야에 담고, 담아놓은 마늘은 내가 20kg 포대에 나눠 담는 일을 했다. 3대1로 일하긴 뭐, 괜찮았다. 할망들은 걷기도 어렵고 무거운 걸 들었다 놨다 하기도 어려우니 젊은 나를 불렀구나 싶었다. 성큼성킁 잘 걸어다니며 좌르륵좌르륵 마늘을 포대에 붓고 채워지면 새 포대를 걸고 했다. 뭐 이 정도 쯤이야...
9시쯤 옆집 아저씨와 조카 한 명이 더 와서 5명이 담고 나 혼자 옮겨 붓기 시작했는데, 점점 정신이 없어졌다. 고무대야 13개를 잘 돌려가며 배치해야 한다. 대야가 마늘로 채워지면 가져와 붓고, 빈 고무대야를 하나씩 여분으로 줘야하고 틈틈이 포대를 비우고 또 자리를 옮기면 포대와 빈 대야를 들고 다 따라가야 한다. 이건 뭐 5:1로 마늘밭에서 싸우는 기분. 점점 숨이 가빠지고 목이 타는데, 아무도 쉴 생각을 안 한다. 7시도 안 되어 일을 시작했는데, 12시까지 한 번도 안 쉰다.
혼자 속으로 궁시렁 댄다. 노동조건이 왜 이래~50분 일하고 10분 쉬어야지, 그게 어려우면 100분 일하고 20분은 쉬어야지~나중에는 1kg밖에 안 되는 마늘 든 대야를 들 기운이 없다. 오랜만에 좀 만만한 밭일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점심 먹고나서는 5:1의 5로 들어갔다. 일 안 힘드냐고 묻길래, 체면 차릴 겨를도 없이 힘들어요, 바꿔주세요 했다. 마늘 선별하는 게 어려울 것 같아 힘쓰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정확하게 못 하더라도, 앉아서 하는 일 해야지 머리를 굴렸다. 옆집 아저씨가 내가 하던 일을 하는데, 할망들이 농을 던진다. “대야 빨리 갖다 줍서, 뭐 햄시니 늑장부리우꽈. 간세(게으르게, 느릿느릿)하게..” 아저씨는 “허허..쫌 봐 줘” 누가 주인이고 누가 품 팔러 온 사람인지 모르겠다.
오후에도 쉼없이 1시에서 4시반까지 하고 오후 참을 먹었다. 다들 에너자이져(백만스물하나 백만스물둘 계속 팔굽혀펴기하는 건전지 광고 주인공) 같다. 저녁 6시. 할망들 모시고 집에 가라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네”했다. 그 집 식구들는 잠깐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새벽 두 시까지 일했단다. 내일 비가 온다고 해서..점점 나는 농사일 그렇게까지 못 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농사짓고 살 수 있을까 오늘도 좌절, 마음은 오락가락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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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농사는 땅에 짓는게 아니라 흙에 짓는다는 말이 뭔가 계속 상기되네요^^ 화이팅입니다!!!
낯선땅에 내려와 사람들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는모습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