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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월 X일 (수), 오전 11시 50분, K남고 근처 롯데리아
“이 자식, 나타나기만 해봐라.”
수연이의 분노는 20분 전에 이미 발화점에 도달했다. 남자친구와 만나기로 한 시각은 11시 30분. 지금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냥 보내줄 수가 없다. 기필코 다시는 지각을 못하게 썩어빠진 머릿속에 직접 시간개념을 이식시켜야겠다. 나홀로 2인석에서 SNS로 온갖 욕설을 퍼붓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남자를 1년이나 붙잡고 있다니 애정이 원수다.
그때 차시동 끄는 소리에 이어 출입문 위에 걸린 작은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인제서 나타났나.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친구가 아닌 더 키가 큰 저지 입은 남자였다. 누런 운동화와 저지패션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훤칠한 키와 어깨가 남자친구보다 나았다. 내 정도면 저런 남자 한두 명은 건질 수 있을 텐데.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든다.
시간은 흘러 12시 10분. 매장은 K남고 학생들로 북적이고 남자친구는 아직도 안 왔다. 그녀가 눈여겨보던 저지의 남자는 전화를 받더니 짜증내며 카운터로 갔다. 그가 직원에게 포장된 햄버거 세트를 받아 출입문을 나갈 때 교대하듯 앙숙이 들어왔다. 그 인간이 두리번거리더니 2인석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보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죽을죄를 졌다.”
“그럼, 당장 죽어버려.”
어쩜 이 자식은 1년이 지나도 발전하는 게 없을까. 지각을 그렇게 해댔으면 한번쯤은 10분 전은 안 바라니까 정각에 맞춰줘라. 수연의 남자친구 동현은 1년 전과 마찬가지의 모습으로 손을 싹싹 빌었다.
“알았어, 한 번 더 지각하면 나 진짜 마포대교 난간에 올라간다. 오빠 진심이야.”
“고소공포증 때문에 다리 근처도 못가면서. 지각에 대한 벌로 점심에 한우 쏴.”
“오빠는 아직 돈이 안 들어와서 한우고기는 사줄 수 없어도 한우버거는 사줄 수 있다.”
“또 돈 없데. 오빠, 무슨 빛있어?”
동현은 아이폰 보다 얇은 지갑을 보이며 불쌍한 티를 냈다. 분명 어젯밤에 친구랑 술 마시면서 탕진했을 것이다. 그저 수연은 내 업이오, 하며 한탄스럽게 가난뱅이를 째려봤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동현이 돌아오니 문득 매장을 나갔던 저지가 생각나서 물었다.
“오빠, 매장에 들어왔을 때 나간 사람 기억나?”
“어, 아디다스 입은 키 큰 남자 말하는 거지.”
“그 사람 매장에서 먹는다고 세트 2개 시켜서 기다리다가 전화 받더니 포장해달라고 했거든.”
“별거 아니네. 같이 먹기로 한 사람이 사정이 생겨서 같이 못 먹게 됐나보지. 뭐, 데이터가 있으면 좀 더 알아낼 수 있겠지.”
“에이, 우리는 저 사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아낸다는 거야. 기껏 햄버거 주문하는 모습만 보고 말이야.”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제공하는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 행동 하나하나에도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있거든.”
이렇게 살짝 긁어주면 단순한 남자는 없는 자존심을 세우게 된다.
“네가 저지의 남자를 관찰한 정보를 알려주면 상상이상을 보여주지.”
세연의 관찰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기억을 다시 회고해보면 11시 50분에 매장 앞에 경차 1대가 오더니 (학교 반대방향) 그 남자가 주차하고 들어왔다. 키는 175 정도에 복장은 아디다스 저지, 메이커 알 수 없는 운동화와 모자. 귀나 손가락에 아무 액세서리가 없었고 고가로 보이지 않은 디지털 시계를 왼 손목에 찼다.
그는 카운터로 가서 한우버거 세트 2개 (상대방 것 500원 추가에 햄버거 반으로 잘라달라고 함)를 주문했으며 결제는 현금이었다. 지갑을 꺼낼 때 바지 호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떨어트렸는데 그건 그가 타고 온 경차의 것이 아니었다. 그 후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창가 2인석에 앉았다.
12시 10분이 되어 전화가 걸려왔고 대화 중에 남자가 짜증을 부렸다. (대화 내용은 안 들었다.) 그러더니 식판을 카운터로 가져가 직원에게 포장해달라고 한 후, 대뜸 근처에 약국이 있냐고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포장된 음식을 받아서 차타고 나갔다.
“여기서 문제는 남자와 먹으려고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남자와 무슨 관계인지, 어째서 한우버거세트를 주문했는지, 왜 먹을 수 없는 사유가 생겼는지. 정도인가.”
그 사이에 동현이 주문한 음식을 들고 왔다. 콜라로 목을 축이며 동현이 말을 이었다.
“일단 상대방의 나이와 성별을 생각해보자.”
“나이?”
수연은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아낼 만한 게 없었다. 분명한 것은 상대방이 햄버거를 시켰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상대방은 햄버거를 좋아하겠지. 하지만 햄버거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 좋아하는 음식이다. 수연은 두 손은 들고 포기를 외쳤다. 이에 비해 동현은 감자튀김을 집으며 뭔가 알아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인트는 이거야.”
동현이 가리킨 것은 큼지막한 한우버거였다.
“상대방이 한우버거를 주문하기 적합하지 않은 성별, 연령대를 소거하면 돼. 성별은 남, 여. 연령대는 고령, 성인, 청소년, 어린이 정도로 크게 나눠볼게.
먼저 상대가 고령일 경우, 한우버거는 크기가 너무 커서 적합하지 않지. 반으로 잘라놓긴 했지만 씹는 힘을 고려하면 다른 종류의 버거를 주문한 게 더 낫겠지. 마찬가지의 이유로 어린이도 제외. 그렇다고 해도 고학년 어린이면 괜찮을 것 같지만 어린이라면 한우버거가 아니라 어린이세트를 사주었을 거야. 장남감이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니까.
그러므로 성인 혹은 청소년이면 한우버거 정도는 적당하지. 그런데 보면 남자는 상대방 것을 잘라달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성인 남자, 청소년 남자가 제외돼. 남자 것을 잘라 달라했다고 보긴 어렵거든. 이제 성인 여자, 청소년 여자가 남았네. 하지만 청소년 여자는 다른 이유로 제외돼서 성인 여자만 남아. 그러므로 상대방은 성인 여자야.”
그녀는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왜 청소년 여자는 빼는 거야. 별로 상관이 없지 않아?”
“남자는 상대방 것까지 미리 시켜서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즉, 상대방은 근처에서 올 예정이었어. 바로 K남고에서. 내가 롯데리아까지 가면서 보니까 이 학교의 학생들만 책가방을 안 매고 등교하고 있었어. 거기서 의문점이 해결됐지. 어째서 남자는 12시 되기 전인 11시 50분에 와서 주문을 했을까? 책가방을 안 메고 학교에 등교했다는 건, 이 날은 수업 없이 다른 학교행사가 있다는 거지.
개교기념일이든 다른 행사이든 대체로 오전에 끝나지. 여기는 K남고에서 가까워서 12시가 넘으면 학생들이 몰려와서 자리가 없겠지. 학교 관계자인 상대방은 미리 이걸 알고 부탁했을 거야. ‘오늘 학교 12시 이전에 끝나니까 그전에 자리 잡아서 미리 주문해 달라.’
근처에서 올 예정에 학교행사를 미리 알고 있고 학교행사가 끝나는 12시 이후에 매장에 올 상대방은 학교 관계자이다. 그리고 학교 관계자 중에서 청소년 여자는 없어. 남고니까.”
수연은 동현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웠다. 이 남자가 시간개념은 없지만 머리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무래도 남들보다 분석력이 뛰어난 것 같다. 동현은 여유롭게 콜라를 마시며 세 번째 추리를 시작했다.
“학교 관계자이면서 성인 여자라면 상대방은 여교사(교생)이겠지. 그녀는 남자에게 햄버거를 주문해달라고 했어. 그것도 양이 많은 한우버거 세트에 500원 추가로 사이즈 업을 시켰지. 그런데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미리 시키면 식어버려서 맛이 떨어지잖아. 그녀가 매장에 도착했을 때 시키면 따듯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햄버거를 미리 주문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 포장을 안 하고 굳이 학생들로 붐비는 매장에서 먹는 걸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걸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바로 허기를 채우는 걸 1순위로 생각하고 있겠지.
아침을 든든히 먹었다면 12시에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겠지. 아마도 아침을 걸렀을 거야. 아침을 굶은 이유는 2가지가 있어. 아침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안 좋았거나 늦잠을 자버려서 출근을 늦게 한 경우. 그중 첫 번째 이유는 소거될 수 있어. 몸이 안 좋아서 아침을 먹을 수 없었다면 점심으로 한우버거 세트를 시켰다는 것이 말이 안 되거든. 간단한 샐러드나 죽 같은 음식을 시켰어야 했어. 그래서 ‘그녀는 지각을 해서 아침을 걸렀다.’가 맞다고 생각해.
다음으로 그녀의 통학방법과 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를 생각해볼게. 저지 남자는 자동차 열쇠를 2개 가지고 있었어.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은 열쇠는 자기가 타고 온 경차의 열쇠이지. 경차와 또 다른 차 중에 뭐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자가용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출근할 때 대중교통은 이용하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출근을 늦게 했기 때문에 차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을 이용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자가용을 이용했다면 어떨까? 그녀가 타고 온 차는 학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겠지. 남자가 타고 온 경차가 그녀가 타고 온 차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발생해. 롯데리아에서 식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불필요하게 각자 타고 온 차를 타고 가야하니까.
돌아갈 때는 차 1대만 이용되었을 거야. 그럼 남자가 타고 온 경차가 그녀가 타고 온 차여야해. 남자는 대중교통 또는 도보로 학교 운동장까지 와서 차를 가지고 롯데리아에 주차했다면 차는 학교 반대반향이 아닌 학교방향에서 왔어야 하지. 그런데 차는 학교 반대방향에서 왔으니까. 자가용을 쓰지 않았으니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도보가 정답이지. 도보라면 당연히 집과 학교 사이의 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걸어 다닐 정도로 짧은 거리라는 걸 알 수 있어.”
“대단한데 여자의 출근 방법과 집이 가깝다는 걸 알아내다니. 그런데 남자와 여자의 관계, 남자가 햄버거를 포장한 이유는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대략적으로 추론해보면 남자는 반지를 끼고 있지 않으니까 결혼한 사이는 아니야. 학생이 붐비는 롯데리아에서 남자랑 햄버거를 먹으려고 했으니까 사귀는 사이거나 지인은 아니겠지. 자칫 잘못하면 학생들에게 놀림감이 돼버리고 마니까. 오해가 될 소지를 일부러 만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상대방이 가족 혹은 친척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해명할 수 있고 학생들도 찍소리를 할 수 없어. 남자가 여자의 동생인지 오빠인지 사촌인지 모르겠지만 학교 근처의 약국 위치를 모르니까 근처에 사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근처에서 살지 않으며 부탁을 잘 들어줄 정도로 둘은 친근한 사이임은 분명해.
마지막으로 햄버거를 포장한 이유는 그녀가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원래 롯데리아에 오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은 일로 올 수 없다고 했을 거야. 거기다가 약국에서 뭔가를 사달라고 했는데 아마 소화제나 숙취해소제일 거라고 생각해. 여기서부터는 추측인데 갑자기 교직원끼리 회식약속이 생겨버렸는데 여자는 거절을 어려워하는 성격이거나 교직경력이 얼마 안돼서 거절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못했겠지. 여기까지다.”
“생각보다 꽤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구나. 단지 햄버거 주문에도 많은 정보가 담겨있고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양식이 들어있다는 거지?”
“뭐, 그런 거지. 전문용어로 프로파일링이라고 하는데……. 근데 오늘따라 나한테 말을 많이 시킨 것 같은데? 아, 내 햄버거가!”
연설하는 동안 무방비해진 그의 햄버거는 수연의 손에서 양상추 한 장만 남은 상태였다. 지각한 벌이다.
첫댓글 재미 있었습니다. 한 마디 한다면,,,,,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추리퀴즈 같은 느낌이에요. 재미 있게 글을 쓰시는 것 같고, 이 정도 재능이면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써 보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댓글 감사드립니다. 캐멀먼의 '9마일은 너무 멀다'형식의 안락의자미스터리인데 부족한 부분이 있나보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