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텔라의 마음공부 >
마음 다해 듣는 음악
글 | 스텔라 박
“음악은 인간이 현재를 인식하는 유일한 영역이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이발사 집에 가위 없다
내가 처음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것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85년부터다. 올해가 2021년이니 벌써 37년째다. 오락, 교양, 시사, 토크쇼, 음악 등 정말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만큼 여러 종류의 프로그램을 했지만 대부분은 늘 음악을 함께 틀었다.
“이발사 집에 제대로 된 가위 없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틀어주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지만 난 집에 제대로 된 오디오 시스템도 없고, 집에서 음악을 그리 자주 듣지도 않는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나도 10대 때는 소니 사에서 나온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손에서 놓지 않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음악을 들었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들로는 그룹 퀸(Queen)의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 에릭 카멘(Eric Carmen)의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 등이 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니콜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도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들었다. 모차르트의 플루트 콘체르토를 들을 때면 플루트 주자의 호흡 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분위기가 비슷한 것들끼리 연결해 믹스테이프도 많이 만들었다. 그렇게 노래를 골라 만든 테이프를 선물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요즘이야 듣고 싶은 노래를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고 재생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한 번 들었던 음악 제목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데도 긴 시간과 오랜 노력이 필요했고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LP 판을 구입해야 했다.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판이 제자리를 맴돌며 탁탁 튈 때면 얼마나 속이 상했던지, 참 그 무엇이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도 온전히 즐기지 못했었구나, 싶다.
서태지에서 방탄소년단까지
미국에 와서도 나의 음악 사랑은 계속 됐다. 클래식 음악을 가장 좋아했지만 내 직업의 특성 상, 나는 가요와 팝음악의 신곡들을 꾸준히 들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 이민 온 한국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민 오기 이전에 들었던 노래들만을 계속해서 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이민 온 후에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같은 노래에 대해서는 “그게 무슨 노래냐?”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난 순전히 일 덕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에 이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탄소년단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의도치 않게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가요라는 것이, 그리고 내가 방송에서 틀게 되는 팝 뮤직의 가사란 것이,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해 눈물 쥐어짜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슬픈 사랑의 노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해하지 못하고, 헤어짐과 외로움, 그리움, 눈물 훔치는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준다. 슬픈 사랑의 노래를 들으니 꼭 내 얘기 같을 때 대중 문화 상품인 가요 또는 팝송은 비로소 나만을 위한 나의 노래가 된다.
나도 지지리 궁상 떠는 노래들을 어지간히 들었었다. 갈망하던 대상이 내게 눈길도 주지 않을 때면 자동차 안에서 그런 노래들을 크게 틀고 목청껏 따라하면서 가슴 속 응어리를 풀어보려 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음악은 온전히 마음 다해 듣는 것이라기보다는 공부할 때, 운전할 때, 밥을 먹을 때 배경으로 깔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렇게 음악은 늘 깔리는 배경으로서, 나의 삶을 더 아름답고 더 칼라풀하게 장식해주었다.
슬픈 사랑 노래는 이제 그만!
정확히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30대를 넘어서면서였던 것 같다. 3일간 열리는 자아개발 세미나에 1천 달러나 내고 참가한 후, 나는 이제 더 이상 슬픈 사랑의 노래는 듣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다고 떠나간 남자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이 무슨 감정의 낭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당시 난 음악 대신 <신의 길에 이르는 길>의 저자인 람다스(Ram Dass)와 기적수업 교사인 매리언 윌리엄슨(Marianne Williamson)의 오디오북을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사람 치고 그나마 영어를 쫌 하는 것은 순전히 이 두 사람의 오디오북 덕이다.
그리고 명상 수행을 하게 된 이후엔 가능하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려 했다. 운전할 때엔 운전만 하고, 책을 읽을 때는 책만 읽고, 밥을 먹을 때는 밥만 먹고… 그렇다 보니 점점 더 음악을 따로 들을 일이 없어졌다. 하지만 내가 방송국에서 일하는 2시간 동안은 정말 마음을 다해 음악을 들었다.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
5월 초, 새크라멘토 인근으로 리트릿을 떠났었다. 고요함의 끝에서 적멸을 만난 후, 고요와 함께 공존하는 소리를 만났다. 새들의 소리도 은총이요, 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고양이의 가르릉 거리는 소리도 모두 은총이었다.
리트릿은 대부분 묵언이었지만 팀 레추가(Tim Lechuga)라는 이름의 뮤지션 수행자와 함께, ‘마음 다해 음악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싱어송라이터인 팀은 <새가 되게 해주세요(Let me be a Bird)>와 같은 깨달음의 노래를 리트릿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었다. 가슴이 활짝 열린 가운데 들었던 그의 노래는 내 전 존재를 전율하게 했다. 소리의 근원은 고요임을 깨닫던 순간이었다.
그는 주저리 주저리, 전혀 힘주지 않고 염불하듯 편하게 이야기를 더하며 몇 곡의 노래를 불렀다. 인도의 현악기인 시타르를 연주하다가 기타를 들고서 코드 몇 개를 이어가던 그가 레너드 코헨의 <할렐루야>를 부르기 시작했다. 왜 그 순간, 그는 그 노래를 불렀을까. 그렇게 코헨의 <할렐루야>는 내게 시절 인연으로 다가왔다.
누군가는 코헨의 노래에 대해 “초상집 가다가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린다.”라고 표현한다. 1984년에 발표한 이 노래는 발표 초기에는 별 주목을 끌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커버하는 가수들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코헨의 대표작으로 남게 된다. 애니메이션 영화인 <슈렉(Shrek, 2001)>에 수록된 이후에 더 유명해져서 영화, 드라마 등에 자주 사용되었다. 그리고 코헨의 사후에는 빌보드 차트에도 당당히 올랐다.
이 노래는 스튜디오 버전과 다른 코헨의 무대 버전이 있다. 코헨 자신이 가사를 계속 바꾸어 가며 부른 결과, 다른 가수들도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다 보니 300가지가 넘는 버전이 생기기도 했다.
코헨은 가수가 되기 전에 시인과 소설가로 등단했었고 가수로 데뷔한 것은 33 세가 넘어서이다. 그리고 82세에 죽기 3 주 전까지 노래를 발표했다. 코헨은 유대인이고 유대교도로 길러졌지만 계를 받은 선승이었고 기독교에의 이해도 남달랐으며 힌두 철학에 관한 방대한 양의 책을 읽기도 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깊이의 영적 탐구를 했던 영성적인 사람이었다.
팀이 코헨의 <할렐루야>를 부를 때, 그동안 의도적으로 멀리했었던 팝뮤직이 또 다른 가슴떨림으로 다가왔다. 그 음악은 내 가슴 속 보이지 않는 버튼을 눌렀고 가슴을 열어 재쳤고 전율하게 했고 결국 음악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할렐루야>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게 했고, 충만한 가슴과 함께 천지와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리게 했으며 그 기쁨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음악이다.
또 <할렐루야>는 음악보다 고요를 추구하던 내게 고요함과 소리의 경계를 허물어트린 노래이다. 그후 나는 고요함에 머물면서도 이 세상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됐고 모든 음악을 죄의식 없이, 그리고 비판 없이 들을 수 있게 됐다.
요즘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했던 것처럼 또다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기 좋은 곡들, 낮 시간에 기분을 업(Up) 시켜주는 노래들, 밤에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편하게 듣기 좋은 발라드 곡들… 그리고 나는 사랑 노래의 가사를 마음 다해 듣는다. 우습게도 사랑 노래를 들으며 내 가슴은 더욱 촉촉해졌고 넓어졌다. 만약 더욱 사랑한 결과가 상처라면, 까짓거, 난 그 상처를 피하지 않고 가슴으로 맞을 것이다. 할렐루야!!!
스텔라 박은 1980년대 말, 연세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재학시절에는 학교신문인 연세춘추의
기자로 활동했다. 미국으로 건너와 지난 20년간 한인 라
디오 방송의 진행자로 활동하는 한편, 10여 년 동안 미주
한인 신문에 먹거리, 문화, 여행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