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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가도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말씀의 의미
최병규 목사님의 글>>
10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이러한 설명(천국에서의 남녀의 혼인)은 “신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막 12:25; 마 22:30)에 의하여 정면으로 거부된다.
10 답변>>
이 부분은 제가 이전에 정리해둔 글로 대신 합니다.
마, 22 :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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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이 세상에서는 육으로 살기에 남녀간에 결혼이 있으나
죽고 난 후에는 천사와 같은 영으로 살기에
결혼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오류는
성경이 말하는 혼인, 장가, 시집이라는 표현 등의 의미가
보이는 이 세상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잊은 데 기인합니다.
저 말씀의 의미를 보면
중생의 가능성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의 기간을 통해 주어지고
육체의 삶이 끝나면 영혼은 선과 악 사이 어느 한 쪽으로 굳어져
더 이상 회개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과의 영적 결합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에서 그가 어떠한 삶을 영위하였는가에 따라 결과될 뿐
그가 죽은 후에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혼인이나 신랑, 신부 그리고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의미는
신성한 진리와
신성한 사랑이 동반하는 삶
곧 성경 말씀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주신 신성한 진리에 따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한 삶을 사는 것에 의해
주님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완성하지 못하면
저곳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의 일이 되고
저 세상에서 부활할 때에는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선한 삶을 산 자의 영은
저 곳에서 마침내 천사의 상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과의 혼인이 시작되는 곳은 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안이고 그 기초는 그의 삶에 두고 있습니다. 혼인은 각 영혼의 인격에 따라 주어지고 그 인격은 이 세상의 삶 안에서 그 모든 틀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보면 영적 혼인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이요 선과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지상에서 이루질 때에 한해서 천계에서도 이어져 그때 사람은 천사들의 상태로 살게 됩니다.>
- 잘못하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게 되오니 천천히 끝까지 읽어보신 후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말씀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이와 달리 영적 의미로 해석할 때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해져 주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 22: 23-3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막 12: 18-27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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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구절의 해석은 아래에 실었습니다.
위 본문에서 주님이 언급하시는 부활은 단순히 저 세상에서 다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 부활 곧 그 영의 거듭남까지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죄의 죽음으로부터 정의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부정은 거듭남의 부정까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부활의 의미를 통해 가르치시려는 궁극적인 것이 그 영의 거듭남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부활을 부정하는 심정 상태는 거듭남의 부정과 거듭남을 위한 모든 노력의 포기까지를 선언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음 뒤 부활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는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일곱 남자가 한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면 그 여자는 일곱 남편 중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의 이 질문에 주님은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까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라며 천국의 혼인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너무 터무니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모세에 의해 이스라엘에 전해진 저 법 안에는 인간의 거듭남에 대한 원리가 담겨있어 이를 깨우쳐주려는 것이 그 본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를 살피기 위해 먼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진리의 영적 결합에 대해 잠시 설명해 봅니다.
천국의 혼인 상태 안에 있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모든 선은 그 선에 알맞는 진리를, 그리고 모든 진리는 그 진리에 적절한 선을 가집니다. 선과 진리의 이 결합은 선과 진리 양측이 서로간에 실지로 얼마나 잘 어울리느냐에 비례해서 천국이 그 안에서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선과 어떤 진리가 있는데 상호관련이 없다면 외적으로는 합쳐진 듯 보일는지 몰라도 이 둘은 진실로 하나된 것이 아닌 바 선한 애정과 올바른 생각, 그리고 거기서 나온 삶의 열매를 남기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선을 행하는 듯 보이나 그것이 주님 말씀 속 진리를 따른 것이 아니라 자기 총명을 따라 행한 것일 수도 있고 또 겉으로는 진리를 열심히 수집하나 그것이 선한 삶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지식의 부요에 그치고 마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처럼 선이 진리 대신 거짓과 결합하기도 하고 또 진리 역시 선 대신 악과 결합하기도 하는데 이 세상 안에서 이러한 상태가 마음에 지속되도록 허용될 경우 그는 천국 대신 지옥과 교류하게 되어 마침내 저 세상에서조차 생명의 부활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과 믿음이 완전히 몰락한 유대교회의 상황이고 이를 경계시키기 위해 본문은 일곱 남편이 죽고 마침내 그들의 아내인 여인마저 죽어버린 상태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교회에는 어떤 남자가 대물릴 자손도 없이 죽을 경우 남자와 제일 가까운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해서 대를 잇게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이 제안한 사건의 경우는 한 여자가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일곱 남편을 가졌다가 결국 자식없이 죽은 그 여인이란 여러 종류 또는 여러 수준의 진리들과 어울렸던 선, 그러나 그 선과 진리 사이에 진짜 하나되는 결합은 없었는 바 그들의 결혼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영적 소산이 없었던 선, 진정한 결혼의 열매되는 사랑과 지혜의 결과가 없는 선을 표현합니다. 이런 종류의 선은 위선임에 틀림없겠지요. 아마도 이 선은 자연적 이타애 또는 덕행의 열렬한 감정일는지 모릅니다. 또 이런 감정은 뭔가 쓸모있다는 여러 가지 계획과 계속적으로 결합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두는 마지막에 지혜롭지 못하고 동시에 선한 열매없는 채로 드러나 결국 선과 진리의 소멸을 재촉하고 영혼은 서서히 악과 거짓으로 굳어져 가게 됩니다. 만일 사람 안에 있는 선이 진리에 대해 진정한 사랑을 지상에서 가지지 않았다면, 또는 지상에서 진리가 선에 참된 사랑을 가지지 않았다면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일 선과 진리의 천국적 결혼이 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후 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생각은 성서를 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영원한 상태는 일시적인 상태의 계속밖에 더 아닙니다. 천국적 상태는 지상적 상태의 계속일 뿐이기에 그러하지요.
지상에서 이런 천국적 결혼이 사람 안에 없다면 저 세상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이 모든 잘못은 인간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천국에 거처를 둔 사람들은 거기서 천사들 처럼 선과 진리의 결합 곧 선과 진리의 하나되는 혼인 아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랑과 지혜의 하나됨이 천사 또는 천사적 상태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그 천사들에게는 결혼하는 것, 즉 시집가는 일도 장가드는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진리를 담는 그릇인 그들의 이해성이, 선을 담는 그릇인 그들의 의지와 새롭게 하나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상호간의 하나됨이 그 나름대로 이미 지상 삶에서 완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부활은 선과 진리가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 마음으로 승강된 상태를 뜻하는데 이때 그의 영 안에 활동하는 모든 구원의 원리는 자연적 것을 벗어 던지고 영적인 것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인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일어납니다. 이런 과정에서 주목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적 마음에서 영적 마음으로 승강된 모든 원리는 각각의 진리와 각각의 선들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하나되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승강됨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연적 마음에 들어 온 진리는 그 진리로 살아낼 때만이 그 진리에 걸맞는 선과 결합되어 영적 수준으로 올려집니다. 따라서 결혼은 이 세상의 자연적 마음 안에서 또는 지상 삶을 사는 동안 거행될 뿐 이미 영적으로 올려진 마음 또는 천국에서는 거행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 안에서 질서가 잡힌 원리들은 다시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없고 하늘에서 천사의 상태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선함과 참됨의 하나됨은 천사가 되기 위한, 그리고 천사적인 원리에 필수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위 본문을 두고 많은 사람의 경우 주님께서는 천국에 결혼 자체가 존재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신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은 천국에서는 결혼하지 않고 시집 장가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앞에 언급한 것처럼 선과 진리의 결합이 이미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하기에 이에 속하지 않았던 자가 천국에서 그 일을 새롭게 이룰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결혼 자체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에서 결혼은 가장 높은 완전함과 축복으로 존재합니다. 그런 연유로 하늘 나라는 혼인에 비유됩니다. 그래서 혼인의 개념은 천국의 가장 완전한 형태요 천국의 실상을 가장 완전하게 알게해 주는 것입니다.
<각 구절 해석>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해석) 그 당시 사두개인들의 영적 상태는 내적이고 본질적인 예배보다는 외적이고 형식적인 예배 안에 있었기에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부활을 전연 믿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후사가 없이 죽고 세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후사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을 당하여 저희가 살아날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해석) 오늘 날 우리 형편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이상한 법을 허용하시면서 까지 하나님께서 모세와 그의 백성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칠 형제가 한 여인을 취하여 후사를 낳으려 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 여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내면에 관계되는 낱말로 그 영적 의미는 '주님의 계명을 따르기 기뻐하는 사람의 애정'을 뜻합니다. 이 선한 애정이 사람 안에서 활발히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은 악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는데 성경은 이를 자식을 잉태하고 해산하기 원하는 여인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후사를 본다는 표현은 생명의 이어짐(번식)을 뜻하는데 식물로 말하자면 시절을 좇아 열매를 풍성히 맺고 다시 씨를 내는 것이고 이는 곧 우리 영혼 안에서 말씀의 진리(남자)와 진리를 사랑하는 애정(여인)이 서로 결합하여 삶의 선한 결실을 맺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또한 이렇게 선한 애정을 지닌 사람들의 모임이 곧 교회이므로 애정은 경우에 따라 교회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형제가 그 여인을 차례로 취하였으나 자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유대 교회가 몰락해 가는 과정을 그려주고 최후에 그 여인마저 죽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에 사랑과 믿음이 전혀 남아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눅 20:2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해석) 사두개파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이 대답은 마치 혼인은 하늘 나라에는 없고 이 땅에서만 있는 일로 가르쳐지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의 실제 의미는 하늘 나라의 혼인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알고있는 이 지상의 혼인과는 다르다는 것이며 하늘 나라의 혼인은 천사의 상태 바로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천사와 같다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천사와 동등하다고 한 것입니다.(주님의 말씀 중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과 '천사들과 같다'는 것은 영어 문법 중 not A but B 의 용법 즉 A가 아니라 B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풀이하면 사람이 죽어 부활할 때는 시집과 장가를 가지 않고 천사의 상태로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혼인이 없다는 뜻이지 하나님 나라에 혼인이 없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 자체가 주님과 혼인의 상태에서 사는 삶입니다. 이름하여 혼인 잔치라 불리는 것이지요. 어찌 그러한가 하면 성경에 쓰인 혼인이라는 의미의 진수는 신부인 교회가 신랑 되시는 주님과 결합함으로 그분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의 즐거움 속에 살아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늘 나라의 삶은 선(사랑, 의지)과 진리(믿음, 이해성)의 혼인으로도 불리웁니다. 즉 사랑과 믿음 이 양자가 한 몸으로 결합되어 영혼의 성품을 이룰 때 그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지 않거나 이해성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받고 시인하면서도 그 계명대로 따라 사는 삶이 없다면 주님과의 혼인 상태에 들어가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주님과의 혼인이 시작되는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세상 안이고 그 기초는 그의 삶에 두고 있습니다. 혼인은 각 영혼의 인격에 따라 주어지고 그 인격은 이 세상의 삶 안에서 그 모든 틀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보면 영적 혼인은 주님과 결합하는 것이요 선과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결합은 지상에서 이루질 때에 한해서 천계에서도 이어져 그때 사람은 천사들의 상태로 살게 됩니다. 혼인에 들어가는 것은 주님에 의해 천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뜻하는데 성경 안에는 천국의 혼인에 대해서는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벌이고 종들을 보내 각 사람들을 초청하는 부분, 또 열 처녀가 신랑을 맞아들이는 장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 찐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눅 20:27-40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해석)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사람이 죽은 후 저 세상에서 의식을 다시 되찾는 것과 악과 거짓 안에 살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생명의 부활 이 양자를 모두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영혼의 불멸에 관해 직선적으로 계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에 관한 어떤 증거가 구약성서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위 구절에 인용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붙은 떨기에서 선포하셨을 그 때, 이미 위 세 열조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항을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이 열조들은 인간 측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나 하느님 측면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스스로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말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분은 죽은 자에게 하느님이 되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육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영을 두고 하는 말임을 우리는 지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위 세 열조들의 몸은 무덤 안에 있고 그들의 영혼은 하늘에 승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 곧 죽은 상태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일어남, 몸으로부터 영혼의 빠져나옴 등의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의미는 그와 다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 가운데 살던 자가 돌이켜 그 악을 버리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선한 인격으로 돌아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원의 시발을 성경은 가시 나무떨기에 불이 붙는 것을 모세가 목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가시나무'라는 표현은 그 당시 악과 이에서 나온 거짓들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데 하나님은 거기 사랑의 불을 붙이심으로 그들을 가나안 땅까지 곧 천국적인 인격으로 인도하려 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그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일을 두고 하나님은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았다'라는 표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또 야곱으로 이어지는 성경 속 그들의 움직임은 육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의 인성 변화를 그리는 동시에 우리 각 영혼이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식을 낳는 것은 영혼의 영적 상태가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사람 내면에 있는 애정과 이해성의 변화입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말씀의 내적 의미에 있어서 어느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나 구원의 여정의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애정의 세계를 그려주고, 그로부터 출생한 이삭은 청소년기의 영적, 합리적 사고 등의 발달 과정을 그려주며 또 그로부터 출생한 야곱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는 성인의 시기에 이 세상 안에서 활보하는 겉 사람의 변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구원의 과정을 간단히 보면 처음 주님께서 인간의 지밀한 곳에 남겨두신 꺼지지 않는 불씨(성경은 이를 남은 그루터기라 부릅니다)로 말미암아 신앙 여정은 시작되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상태이고 그 후 사람은 이 세상의 유용한 지식과 영적 지식들을 배워 이해성이 열려질수록 저 불씨에 불을 확연히 짚혀 이제 선한 애정이 튼튼한 지성으로 뒷받침이 되는데 이것이 이삭의 상태이며 마침내 그는 겉 사람에까지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속 사람에 복종하도록 그 영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이 야곱의 일생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전 생애 동안 주님은 그 영의 성품과 특질과 환경 등을 세밀히 배려하면서 그의 구원 여정에 관여를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모세에게 하심으로 장차 있게될 가나안 땅으로의 여행 곧 이스라엘을 저와 같은 천국적 인격들로 인도하시겠다는 의중을 모세에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눅 20:27-40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하나님은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사망 가운데 버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그들 모두가 진정한 생명을 얻어(영적 부활) 천국에 들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믿음의 진리 안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지금부터 살고있는 자들인데 이 때를 위해 사람은 사후 그 내적 인간으로서는 결코 죽을 수 없도록 창조되었고 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혼인에 대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 대해, 산 자의 하나님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주는 교훈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저 세상에서의 진정한 부활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연속이라는 점입니다. 사후에 있게될 그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 자신의 사랑과 믿음의 어떠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영원에 이르는 그 사람의 삶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떤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그 성질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으로 결코 우리가 사망에 들지 않도록 온갖 배려를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뜻을 알고 믿음과 사랑의 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