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자치권 발동
막북무쌍 한준 소왕은 요즘 심기 心氣가 상당히 불편하다.
후한 군의 내정간섭 內政干涉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이다.
반초 대장군이 전선 戰線에 처음 나설 때는, 소왕들과 전략적 戰略的인 큰 부분만 협의하고 말았는데,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몇 차례 전과를 올리더니, 그 후부터는 천부장들에게도 전술적인 戰術的인 부분을
지적하더니, 이제는 백 부장의 군사 훈련방법과 병영내 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보육고 천부장은 한숨을 쉬더니,
“한 군 녀석들이 조만간에 아마 십 부장까지 관리할 태세다”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가지연 천부장이 말을 받는다.
“우리 흉노인들은 자신들 하화 족과는 생활 습관 자체가 틀리는데, 왜 자기들 기준으로 만든 잣대를
우리에게 강요하는지 모르겠다”
“그르게 우리 몸에 냄새가 나면 곁에 오지 않으면 되지, 굳이 따라다니며 ‘냄새가 난다’라고 지랄들이야”
“저놈들은 모르겠지만 그놈들이 즐겨 먹는 향료지 뭔지, 그 냄새는 근처에만 가도 역겹고 토하게 만들고,
측간에 가면 똥 냄새보다도 그 향료 냄새가 더 지독한데, 그놈들은 그게 맛있다고 환장하더군”
보육고 천부장은 다시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이제는 이놈들이 우리를 너무 만만히 보는 거 같아”
“맞아, 그저께는 한 군의 백 부장이란 새파란 놈이 저녁에 술에 취해, 우리 천부장을 붙잡고 시비를 걸고,
허튼소리를 했다지”
“이렇게 군기가 허물어지니 문젤세, 문제야”
군영 내의 분위기가 이러니 전투할 의지가 꺽이고, 투지가 사라진다.
그래서 막북무쌍 소왕은 전투는 ‘나 몰라라’ 하고, 전선의 후방 後方으로 물러나 서로 간에 뜻이 통하는
동료들 그러니까, 자기와 친한 천 부장들과 연합군체계의 부당성을 욕하고, 어수선한 시국 時局을 토론하며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준도 이제 긴 수염과 머리카락 대부분이 백발이다.
한의 대장군 반초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말없이 모른 척 지나치고 있다.
반초는 나름대로 이미 계산이 서 있다.
막북무쌍 한준 소왕의 무용 武勇에 대해서는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귀가 따갑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크게 쓰일 데가 있다고 생각하고, 막북무쌍의 심기 心氣를 건드리지 않고자 모른척하고 있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무용이 너무 뛰어나도 위험한 인물이다.’
반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전투는 개인적인 무용 武勇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술로 병법으로 이겨야 한다는 정통 병법가 兵法家다.
이제 그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남 흉노의 호한야 선우는 현재 자신이 처지가 상당히 곤란하다.
명분상 흉노족 최고의 높은 자리인 ‘선우’란 직위에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한의 대장군 반초의 지시도 따라야 하고, 반골 기질 叛骨 氣質이 강한 용장들 특히,
막북무쌍 한준 소왕의 눈치도 보아야 할 분위기다.
최근 네 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한 군에서는 “흉노의 선봉대가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한다”라며 성토 聲討하는 목소리가 크다.
흉노측에서는 “그럼 저들이 선봉을 맡지, 왜 지금에야 와서는 책임 운운하느냐?”
연합군의 양측에서는 패배에 대한 책임 전가론 轉嫁論이 한창이다.
그런데 책임논쟁 責任論爭의 발언하는 형식과 자리가 다르다.
후한군은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서 공개 公開적으로 하는 소리였고,
남 흉노측의 만 부장이나 천 부장들은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서는 입술이 붙은 것처럼, 묵묵부답 黙黙不答으로
일관하다가 회의가 끝난 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기네 막사로 돌아가면서 내뱉는 불만에 불과하다.
선우 입장에서는 무엇이라 항변 抗辯을 하던지, 중재 仲裁를 하던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다. 한 군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것이다.
선우의 성년이 된 아들 삼 형제 모두가 한의 선진문물 先進 文物을 배워야 연합군의 결속을 더욱 돈독히
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후한의 수도 장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말이 선진문물 습득이지 실은 볼모로 가 있는 상황이라 선우도 어쩔 수가 없다. 자식들이 장안에 가 있으니,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주위 참모들도 후 호한야 선우의 이러한 고충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후한의 입김을 무시하고 독립할 수 있는 계책이나
조언 助言은 아예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아니, 비밀리에 선우의 자식들을 만나 탈주 계획을 모색하였으나, 막내아들은 긴가민가하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으나, 장남과 차남은 거친 초원보다 이곳 장안이 더 편하고 좋다며 논어를 읽고, 옛 초나라의
시인이자 재상인 굴원(屈原, 약 기원전 340∼278)의 시를 읊고 있었다.
선우의 자식들은 더 이상 흉노인이 아니라, 한족화 漢族化 되어 있었다.
본인들의 생각과 의지가 그러한데, 선우 자식들의 장안 탈주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좌고우면 左顧右眄하던 호한야 선우는 답답한 마음에 뭔가 변화를 모색하기 위하여,
막북무쌍 소왕의 막사를 찾아가 보았다.
군영 곳곳에 한 군의 병사들이 짝을 지어 두 명씩 배치되어 있는데, 막북무쌍 소왕의 막사 근처에는
한 군 병사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보름 전, 저녁에 막북무쌍이 술에 취해 평상복 平常服 차림새로 소피를 보러 가다, 순찰 巡察 중이던 한 군의
백부장과 병사에게 몸을 부딪치게 되었다. 한준 소왕은 수하의 근위병에게 지시하여 한 군 병사 둘을 즉시
밧줄로 결박하게 한 후,
“왜? 우리 진영에 나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돌아다니느냐? 적군의 세작이 아니냐?”라고 문초하면서 흠씬
두들겨 패고는 자신의 막사에 묶어 놓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한 군의 다른 백 부장과 천 부장이 찾아왔으나,
“세작 細作을 잡아 조사 중이다”라며 만나주지도 않았다.
다급해진 천부장은 할 수 없이 흉노의 우현왕을 대동 帶同하여 재차 찾아왔다.
한준 소왕은 한의 천부장과 우현왕으로부터 한 군 병사의 신원 확인을 한 후에도 한 군의 순찰 병패 兵牌를
이리저리 앞뒤로 몇 번이나 뒤집어 보며 또, 재차 확인해 본다.
“병패에 용모 容貌를 새겨 놓은 것도 아니고...”
그러니, 다른 소왕 보다 서열 序列이 한 단계 높은 우현왕이 막북무쌍 소왕의 옆에 서 있기가 체면 體面이 말이 아니다.
우현왕의 머릿속에는 자연히 몇 해 전의 단씨 형제 문초 사건이 떠오른다.
당시에는 막북무쌍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 단씨 형제들을 임의로 데리고 갔지만,
현재 우현왕은 북 흉노 최고의 무장인 막북무쌍 앞에서 감히 무력도 사용할 수 없다.
“적의 세작을 포획한 줄 알았는데... 아니란 말이지?”라며 혼자 말처럼 ‘중얼중얼’하면서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상대방에게 실수했다거나, 미안해하는 느낌은 아예 없다) 들고 있던 병패를 결박당해 있는 병사에게
던져 버린다.
“앞으로 한 병 漢 兵이 우리 흉노 진영에 들어올 때는, 반드시 백 부장이나 천부장 등 책임자가 직접 인솔
引率하여, 보고한 후에 들어오도록 하라”라고 일방적으로 엄포를 한 후에 비로소 풀어주었다.
이후로 한 군의 모든 병사는 백 부장이 대동하여, 남 흉노의 천 부장에게 먼저 보고한 후에 흉노군
진영을 출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후한 군과 연합군을 결성한 후, 남 흉노 측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치권 自治權을 발휘한 유일한 사례다.
그 이후로 한 군 병사는 이곳 막북무쌍 소왕의 진영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한 나라 대장군의 별도 지시가 있는 듯하다.
그러니 호한야 선우는 막북무쌍 소왕의 진영 陣營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한 군의 가시권 可視圈에서 벗어난 느낌이라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
흉노의 최고 통치권자라는 선우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면 수하 장수들과 일반병사들은 어떤 심정일까?
해가 중천 中天인데, 벌써 술 단지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요즘, 남 흉노 측 내부에서는 막북무쌍 소왕의 여론 與論이 가장 좋다.
오히려, 자신들의 최고 통치자 선우보다 한준 소왕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병사들이 더 많이 생겼을 정도다.
막사 안은 벌써 7, 8명의 천부장들과 단씨 형제들 비롯하여 백 부장도 네 명이나 들어와 있던 관계로 게르 안이 혼잡하다.
모두가 꺼리고 피하는 한 군 병사를 훈계하며, 엄정하게 대하는 막북무쌍의 당당하면서도 대범한 태도가 진영
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으니, 북 흉노의 현 체제 體制에 불만이 많은 다른 소왕 소속의 천부장도 비번 非番을
핑계 삼아 세 명이나 이곳에 와있었다.
그런 분위기의 막사 안에 호한야 선우가 갑자기 나타나자, 모두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깍듯이 정중히 인사 하는 자, 우물쭈물하며 일어나는 자,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막사 밖으로 빠져나가는 자,
각양각색 各樣各色이다.
각자 소속된 병영 兵營의 직위나 계급에 따라 처신 處身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모두가 선우의 막사로 찾아가 인사를 하거나, 회의한다.
그런데, 선우가 소왕의 막사를 사전 통보도 없이 직접 찾아오다니, 드문 경우다.
그것도 친위대나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선우 단독으로 방문하다니...
한준 소왕도 뒤늦게 선우의 방문을 알아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 쥔 손을 다른 손바닥으로 감싸며
큰 소리로 인사 한다.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와 몸동작으로 선우를 맞이하는 것이다.
“한준 소왕이 대 선우를 뵙니다.”
자리를 함께하고 있던 천부장들에게 선우의 눈길로부터 피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하고자 하는 행동이다.
일종의 의태 연기다.
[ * 의태 연기 擬態 演技]
꼬마물떼새는 연기의 달인이다.
사람이나 천적이 알을 품고 있는 둥지 근처에 나타나면 날개를 다친 척하며, 천적의 눈길을 사로잡아
둥지로부터 멀리 유인하는 의태 행동을 하는 독특한 모성애를 드러낸다.
“하하, 그만 예를 거두시게”
예상외로 선우의 인사 답례가 소탈하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추한 이곳까지 어떤 연유로 이렇게 왕림 枉臨하셨나이까?”
한준은 당황스럽다는 듯이 양팔을 좌우로 벌렸다 내렸다 하면서, 선우의 시선 視線을 자신에게 모으며
계속 큰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그 사이, 막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조용히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근무 시간에 술자리에 있었다면, 그 자체가 징계감이 될 수도 있다.
소왕의 시종 두 명이 술판을 재빨리 정리하고, 숙취 해소에 좋다는 보이차 普洱茶를 끓인다.
찻잔 속의 보이 찻잎에 뜨거운 물을 따르니, 검게 말라 비틀려 있던 보이 찻잎이 본래의 모습으로 펴지면서
부드러우면서도 싱그런 향기를 발산한다.
다향 茶香이 막사 안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호한야 선우는 반 시진 정도 한준 소왕과 담소를 나눈 뒤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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