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4년 제 9호(Vol. 09, 2024년 9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서방이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한 러시아에게 가한 가혹한 각종 제재를 러시아가 지난 2년 6개월여간 어떻게 극복하고 버텨왔는지 다각도로 분석했다. 박수련씨(석사, 러시아CIS 경제 전공)가 쓴 '서구의 대러 수출 통제는 성공적인가?'이다. 소개한다/편집자
**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aa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러시아의 군 현대화
아나톨리 세르듀코프 전 국방장관이 2008년 군 현대화를 추진한 이래, 러시아 군수 산업은 러시아 국방 정책의 주요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8년 8월 그루지야(조지아) 전쟁 이후, 러시아는 새로운 군 개혁에 착수했는데, 핵심 방향은 현대전 승리에 최적화된 상시적 군사 태세 구축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는 군 구조와 지휘체계 개편, 네트워크 중심 전쟁에 대한 투자, 신속한 군수(물자) 조달 정책, 첨단 무기 생산 능력 향상 등을 추진해 왔다.
◇서방의 이중용도 품목 수출 제한
러시아가 무기 생산 시스템을 고도화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러시아가 기술 자립을 하지 못한 주요 소재·부품·장비에 대한 서방 수입 의존도가 높아졌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2022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서방의 전방위적 고강도 제재 조치로, 러시아는 첨단무기 생산에 필요한 주요 부품의 조달이 더욱 어려워졌다. 서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간용으로 제조·개발됐으나 군사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이중용도 품목'(dual-use items)을 지정해 엄격한 수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대러 수출 통제국인 미국과 유럽연합(EU)으로부터 제재 대상 우선 순위로 지정된 품목은 크게 4개 영역, 50개로 나뉘는데, 여기에는 반도체 칩과 전자 직접회로, 스위칭 및 무선 항법 보조장치와 같은 특정 전자품목, 볼 베어링과 컴퓨터 수치 제어 공작 기계 부품 등이 포함된다.
이에 따라 크렘린은 첨단 무기 생산에 필요한 서방산 주요 부품 수급에 애로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첨단 무기를 안정적으로 전장에 투입하면서 전쟁 수행 능력을 유지하고, 군수산업은 오히려 활황세를 타고 있다.
◇러시아의 제재 회피 전략
러시아가 이중용도 품목에 대한 서방의 강력한 수출 통제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렘린의 사전 대비와 복합적인 제재 회피 전략이 먹혀들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보면 이렇다.
러시아는 일찍이 새로운 전쟁 대비 전략의 일환으로 전자제품의 중요성을 인식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부터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를 포함한 서방의 전자 기계 장비를 수입했다. 또 전자레인지, 냉장고, 통신기기 등을 수입한 뒤 이 제품에 포함된 반도체를 순항 미사일, 탱크, 드론 등에 탑재해 무기를 생산했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전통적인 우호 세력권인 중앙아시아의 뒷문을 통한 우회 수입을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크렘린은 서방의 수출 통제에 대응하기 위해 교역 관련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 특히 키르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중국 등지에서 생산된 서방의 물품을 우회 수입하는 일종의 '세탁처'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서방 제재 조치를 비웃듯이 중앙아시아를 경유한 이중용도 품목의 러시아 반입은 최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튀르키에(터키), 이란, 세르비아, 아랍에미리트(UAE), 홍콩 등과 같은 제3국을 통해서도 군사 부품과 반도체, 마이크로칩, 전자제품 등을 공급받아 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서방의 대러 수출 통제를 무력화하는 또 하나의 전략은, 제재에 가장 큰 구멍을 내고 있는 중국 지방 정부와의 물물 교환이다. 물물 교환 거래는 현금 흐름이 없으므로 참여 기업과 수출입 품목의 노출 위험이 낮아 제재를 우회할 수 있다.
'유령 거래' 방식도 동원된다. 러시아는 부품의 해외 공급망 확보를 위해 판매 회사와의 거래를 숨기고 제 3국 항구를 중개망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아가 중개인, 대리인 또는 공급업체와 짜고 EU 세관 신고서에 가짜 목적지를 기재하는 방식으로 필요 물자를 빼내거나, 서방이 제 3국에 발송한 물품이 운송 중에 사라지면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고,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유령 무역'을 통해 서방의 제재를 회피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의 자구 노력
러시아 정부의 군수산업 활성화 정책도 제재를 버티는 내성 강화에 한몫하고 있다. 러시아 재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 러시아의 국방비 지출은 총 10조 8천억 루블(약 190억 달러)에 이른다. 이는 소련 해체 이후 처음으로 국내 총생산(GDP)의 6%가 군사비로 지출되는 수치로, 러시아 정부가 국내 군수및 방위산업 육성을 대폭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 회피를 위해 공급망 재설계를 모색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체 무기 생산 능력의 고도화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무기 생산 가속화를 위해 인력을 확보하고, 24시간 생산 체제를 구축하며, 방산기업의 세금 감면및 재정 지원을 통해 주요 부품 개발과 생산라인 확장을 독려하고 있다.
또한, 방산 기업이 군수품 개발및 생산을 신속히 하도록 러시아 국방부와의 계약 절차도 간소화했다. 국방부는 납품 부품 선정이나 신무기 시험 등에 필요한 일정도 단축했다. 또 군산복합체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면서 군사 장비의 생산·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관련 정부 부처 간 조정 시스템도 구축했다.
◇약발 먹히지 않는 대러 수출 통제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지난 2년 반 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 측이 러시아 국방및 안보 분야에 활용될 수 있는 일부 제품·기술에 대해 엄격한 수출 규제를 가했지만, 그 효과는 일단 미미한 것으로 보인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러시아의 정교한 제재 회피 전략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반대로 '제재의 역설' 현상까지 관찰된다. 서방의 대러 제재가 우크라이나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러시아의 '전시 경제'를 활성화시켜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2023년 러시아의 GDP는 서방의 전망과는 달리 3.6%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독일 등 침체에 빠진 유럽의 주요 경제권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러시아 국내 제조업 대부분이 군수산업이거나 군수업체의 유관 업체이기 때문에 '병영국가'인 러시아에게는 '전쟁'이 경제 성장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군사비 지출을 늘려 성장을 촉진하는 정책, 즉 '군사 케인스주의적' 경제 부양책으로 러시아 경제가 도리어 활기를 찾고 있다. 서방의 경제 제재가 러시아 경제에 주는 타격에 대해 회의적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