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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롬 8:38-39)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 한 번은 시골에 있는 어떤 농가를 방문했습니다. 농가의 마당 한쪽 편에는 큰 풍향계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화살촉 밑에 표가 하나 달려있었고 그 표에는 무엇이라고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쓰여 있을지 궁금해서 풍향계 밑으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좀 의아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 주인인 농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설마 하나님의 사랑이 바람 부는 대로 바뀐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농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반대지요. 바람이 어떠한 방향으로 불던지 간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거기에 그 말씀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온갖 풍파 속에 살고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 회복’, 곧 언제, 어느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도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세상끝날까지 저와 여러분과 항상 함께 계시며 끝까지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다.
1. 내가 확신하노니
오늘 본문 38절에서 사도바울을 아주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지적인 인식이 믿음의 확신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식이 많으면 갈등과 고민이 많습니다. 차라리 무식한 사람이 큰일을 해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아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확신하는 것이 힘입니다. 내가 아는 지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경험한 사건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정보와 지식은 많은데 믿음과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와 지식이 홍수처럼 몰려옵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은 확신이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까지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흔들립니다. 이 믿음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확신을 전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유혹과 시험이 다가와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뜨거운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뜨거운 확신을 이야기합니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앞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체험이 얼마나 큰지를 고백한 바 있습니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7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세상이 주는 일곱 가지 시련에도 오히려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의 배경에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방해물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첫 번째 장애물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이것은 육체적 죽음을 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말이 “죽인다”는 말입니다. 이 말 앞에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그 공포 속에서 믿음을 배신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여러분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망아!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이 위대한 사랑을 방해할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은 죽음의 힘보다 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죽어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일 때 돌이 수없이 날아오고 온 몸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는 그때,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변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천사처럼 변하기 원합니다. 특별히 미워하는 사람앞에서 천사처럼 변하기 바랍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분노로 이를 가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순간 저는 바로 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수 있도록 영혼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행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순교자의 길로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죽이는 저들의 죄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순교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죽음의 공포도 능히 극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두 번째 장애물은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생명’이 우리를 위협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까? 생명에 해당하는 ‘조에’라는 헬라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뜻도 있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자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삶에 대한 애착을 뜻하는 말입니다. 앞서 말한 사망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대한 삶의 애착’은 우리의 믿음을 뒤흔드는 강력한 유혹입니다.
사단도 예수님을 유혹하면서 풍요한 삶에 대한 유혹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이는 풍요로운 삶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10절)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로마의 황제들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당시 서머나교회에서 목회를 했던 폴리캅감독이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86세 노인인 폴리캅감독을 처형하는 것보다는 각종 회유를 통해 그가 신앙을 부인하도록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폴리캅감독은 재판정에서“그리스도를 저주한다고 말하라. 그러면 석방하겠다”는 로마재판정의 설득에, “나는 평생동안 그분의 종이었고 주님은 나에게 단 한 번도 나를 부인한 적이 없었소. 그런데 내가 어찌 그분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나를 불태워 죽인다고 하지라도 나는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이 죽음은 나의 기쁨입니다”라고 응수하였습니다.
결국 폴리캅감독은 화형을 당했지만 그의 믿음은 후세에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제가 전에 터키를 여행하면서 아시아의 일곱교회 중에 서머나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 교회의 이름이 폴리캅기념교회로 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폴리갑감독의 마지막 장면을 성화로 제작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애착’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누리는 작은 만족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세 번째 장애물은 ‘천사들과 권세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늘의 초자연적인 영계의 존재들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천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방해물이 될 것 같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우리 인간들에 대해서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화를 냈다고 합니다. 또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시기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인 존재인 천사라도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권세자들은 공중권세를 잡고있는 타락한 천사, 곧 악한 영을 말합니다(엡6:12). 악한 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어느 때는 광명한 천사처럼 나타나 유혹합니다. 거짓말하게 하고, 미워하게 합니다. 또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삼키고자 기회를 엿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탄의 유혹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4)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네 번째 장애물은 ‘현재의 일과 장래의 일’입니다. 시간적으로 모든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영어성경(Living Bible)에서는 “오늘에 다가온 두려움과 내일에 대한 염려들”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현재의 일’은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말합니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난한 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도 빌려주지 않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쫓겨 다닐 수 있습니다. 모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현재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면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현재 때문에 미래를 포기합니다.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십계명을 잘 지켰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행했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가 십계명은 문자적으로 지켰지만 그 중심에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무한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있는 그 중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쳐 주십니다. 네가 갖고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대단히 중요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오늘의 부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보물을 위해서 이 땅의 보물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 그 청년은 돈이 많아서 고민하다가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돈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였습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물질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도 오늘의 기쁨, 오늘의 쾌락, 오늘의 돈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세상을 좇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둘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포기하겠습니까? 아무쪼록 '현재 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려고 사탄은 끊임없이 도전해 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은 우리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현재일 때문에 주일성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현재일 때문에 말씀순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현재일 때문에 영원한 미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또 '장래 일'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오게 될 환난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얼마 후에 일어날 일을 알면 불안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고통에 대한 불안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현재에 받는 고통과 미래에 닥치게 될 재앙들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것을 피하지 않게 합니다. 정면으로 그것과 대결하게 합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소상공인들이 월세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또 모두가 경제적 위기감 때문에 매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또 세계경제가 어려워지면 우리나라는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이니까 경제에 커다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역사를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분은 아들을 주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지난 번에 말씀드린 사 41:10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 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렘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담대하게 믿음위에 서서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그 어떤 위협있다 할지라도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다섯 번째 장애물은 ‘능력’입니다. ‘뒤나미스’의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이는 폭풍과 지진과 같은 자연적인 힘을 나타냅니다. 때때로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합니까? 그러나 그 어떤 천재지변이라도 성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는 없습니다.
6)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여섯 번째 장애물은 ‘높음과 깊음’입니다. ‘높음’은 위에 있는 어떤 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얻은 모든 권세, 부, 명예, 높은 지위 등을 말합니다. ‘깊음’은 반대로 아래에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가장 침체되고 낮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즉 가난, 멸시, 천대, 낮은 지위 등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높은 데 처하거나 낮은 곳에 처하거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빌 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요즘 코로나를 핑계로 얼마나 예배생활,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이 신앙생활이지 요즘은 얼마나 많는 분들이 현실과 타협하며 신앙생활을 적당히 유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진리에 생명을 겁니다. 생명을 걸면 못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적당히 하려고 하니까 핑게가 많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느끼고 체험했다면 어떻게 환경을 탓하고 핑게하고 이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값싸고 연약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는 헌신이 없는데 어떻게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하겠습니까? 이런 신앙으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무슨 기적을 일으키겠습니까? 참 신앙은 죽음을 통과합니다. 모든 시련과 역경을 통해, 마치 조개 속에서 진주가 생겨나듯이, 수많은 쇠붙이와 돌이 녹아서 정금이 나오듯이 신앙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어떤 손해에도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돌에 맞으면 어떻고, 감옥에 가면 어떻습니까? 배고프면 어떻고, 강도를 만나면 어떻고, 내 주위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느냐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14:7-8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여러분, 사랑에 빠진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보이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병들었다든지, 손해를 보았다든지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 보이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는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보일 뿐입니다.
7)일곱번째는 다른 아무 피조물입니다. 이것은 위에서 열거한 여섯가지 이 외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우주의 어떤 세력도, 어떤 존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중에 94장, 주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 송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 부귀와 예수님을 바꿀 수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세상 부귀와 돈과 금과 은을 예수와 바꿀 수 있습니까? 이 찬송가를 지은 사람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1930년대 일입니다. 미국에 대공황이 있을 때 21살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더이상 대학 학비를 댈 수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2학년을 중퇴하고 보험 회사로 들어갑니다. 바리톤의 저음으로 찬양을 잘하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NBC 방송국의 프레드 알렌이라는 사람의 눈에 뜨입니다.
얼마 후, 전국으로 방송되는 무대에서 1천5백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가라 모세"라는 흑인 영가를 불러 대히트를 합니다. 그래서 고정 출연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받았고, 월급도 제때 못 받는 그때에 안정된 출세의 길을 보장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쁘고 즐거웠지만 집으로 돌아오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했습니다.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10년 동안 기도해 왔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한 편의 시가 적힌 종이를 주었습니다. 그 시는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들은 그 시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그 자리에서 곡을 만들며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것이 이 찬송가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 노래를 부른 뒤 방송국에 가서 정중하게 그 자리를 거절합니다.
그 후로 그는 찬양하는 가수로 변신했는데,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 때마다 꼭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가 바로 쉐어 형제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출세와 영광의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복음 전도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이 찬송가를 부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돈에 빠지고 쾌락에 빠져 타락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가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요, 값없이 주신 사랑이요, 조건없이 희생을 치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 자만이 참된 구원을 얻은 자요, 세상을 이긴 자요,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기만 한다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천국가는 그 시간까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탄을 이기며 내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이기고 넉넉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