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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저는 어렸을 때 요즈음 학생들처럼 학원을 많이 다녔습니다. 아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욕심인지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이올린, 피아노, 그림, 컴퓨터, 웅변 등등 5~6개의 학원에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중 잘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굳이 그랬어야 했느냐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컴퓨터 학원에서 가서 과제를 수행하던 중 문득 ‘아, 엄마랑 아빠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 신입 복사로서 본당에서 활동은 하였지만, 그다지 신앙적으로 열심한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1남 2녀 중 막내로, 큰누나와 작은누나랑 각각 10살, 9살 나이 차가 납니다. 어머니께서 당시 조금 늦은 나이인 36세에 저를 낳으셨기에, 또래 친구들 부모님보다는 거의 10살 차이가 났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상황이다 보니, 은연중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과제고, 가방이고 내팽개치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에 계신 어머니께 저는 눈물, 콧물 짜면서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아빠 죽으면 나는 혼자 어떻게 해?”
그때 어머니는 지금 제 나이 즈음 되셨을 텐데, 웃으시고 안아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 엄마, 아빠가 우리 아들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당시의 저는 어렸기에 막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혼자가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가까운 가족이 나를 떠난다는 두려움이 있었나 봅니다. 아이가 울면서 그러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엄마가 위로해주고 잘 마쳤으면 아름답게 끝났을 텐데, 그때부터 어머니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성모님에 대한 신앙 특강을 들으셨는지 아니면 성인전을 읽으셨는지, 엄마가 없으면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면 된다고 말씀하시며, 성모상을 보고 어머니라고 불러보라고 하시고, 레지오 협조단원으로 제 이름을 넣으셨습니다. 솔직히 그때 당시 누나들이 협조단원이 되어 묵주기도와 까떼나를 바치는 것을 보고, 나는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과 누나들을 골탕 먹이는 걸 재미있어했는데 막상 그 대상이 제가 되고 나니 무척 피곤했습니다. 밤마다 졸린 눈을 부여잡고 어머니의 협조단원이 되어서 묵주기도 5단을 바치고 까떼나를 바쳤습니다. 학교 다니느라, 5~6개 학원 다니느라 피곤한 애를 붙잡고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는 압박에 피곤했던 날을 몇 달간 보내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머니와의 추억(?)이지만, 아직도 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느끼게 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에서 홀로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어머니께서는 성모 신심으로 아들에게 풀어주고 싶으셨던 마음이 있으셨나 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종착점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멀다고 느낄 뿐,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종착점에 이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을 기쁘게 살아야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 다음의 세상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모두 현세 다음의 세상에 대한 대답을 저마다 냅니다. 가톨릭교회는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으로 지상에서의 삶이 끝난 다음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당연히 우리는 천국, 즉 하느님 나라의 일원이 되기를 꿈꾸며, 가톨릭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시며,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입니다.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을 소유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느끼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 삶의 끝이 죽음에서 끝난다면 허무함 속에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사랑을 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일원으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레지오 활동으로 성모님의 힘이 되고자 하는 이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토록 귀한 선물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쁜 선물을 더 많은 사람이 알고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기쁜 선물은 다른 사람과 나눈다고 해서 내 몫이 적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나눌 때 성모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될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 4)”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우리는 항상 주님의 선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며 기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04) 미움이란 사랑의 다른 표현
미움이란 감정, 거리두고 바라보기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라는 노래 제목처럼 우리 마음에 생기는 미운 감정은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매우 복잡한 감정이다. 분명한 것은 미움이란 감정이 우리 마음을 괴롭고 답답하게 하며, 타인과의 관계에 큰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미움이 커져 원망과 증오가 되고 가슴 깊이 옹이와 같은 응어리로 남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마음속 이야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누며 자신의 괴롭고 답답한 심경을 공감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 누군가는 판단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가족이나 친구·지인일 수 있지만, 기도 중에 만나는 주님일 수도 있다. 미사나 기도 중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괴로운 마음을 주님께 보여드리고 공감과 위로를 청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그와 더불어 미움이라는 감정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님 앞에 고요히 머물며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임을 헤아려보자. 그렇다. 우리는 무쇠로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아니라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육신과 마음을 지닌 연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미움이 생기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화해와 용서, 평화와 일치, 너그러움과 관대함인데, 실제로 드는 마음은 미움과 증오, 서운함, 시기와 질투다. 이를 너무 빨리 윤리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미움이라는 감정에 담긴 또 다른 신호를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유독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큰 미움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상대방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기대, 그리고 사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미움은 완성되지 못한 사랑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움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미움의 감정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그것을 넘고자 하는, 곧 보다 큰 사랑 안에서 상대방과의 일치를 열망함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 속에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는 존재,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타인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부정적인 관계와 감정을 넘어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다. 실제로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때는 그동안 미움과 증오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던 가족이나 이웃과 화해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청하며, 그동안의 오해를 씻고,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을 모을 때가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모든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고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하며, 우리는 진정 치유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인간이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이들과 만나 관계를 맺고 친교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 우리 존재 자체에 새겨진 소명임을 의미한다. 관계 안에서 성장하고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타고난 성소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오셨다. 미움과 증오, 원망과 시기, 혐오가 우리 안에 생겨날 때, 그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반응하거나 괴로움 속에 머물기보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가운데 그 감정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이를 사랑의 완성을 향한, 그리고 보다 큰 화해와 일치를 향한 하느님 부르심으로 알아듣고, 우리 안에 그러한 열망을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드리면 좋겠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6)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토대
몇 해 전 선배 신부님과 산책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산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바쁜 일상에서 어떤 재미나 즐거움 없이, 그냥 그렇게 기쁨 없이 하루를 버틴다고, 사람들을 견뎌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견디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를 견디고 있을 수도 있어. 후배가 선배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선배들도 후배들 눈치를 엄청 보며 살아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비굴하리만큼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항상 곁에 있는 가족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에 서투릅니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상처 주고, 쉽게 폭발합니다. 나만 피해를 보고, 나만 인내하며 참아낸다고 오해합니다. 그러고선 후회하고 스스로 아파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나만이 아닌 서로가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무 일 없는 듯 견디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그 인내는 상대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으며, 빼앗기지 않으려는 비굴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인내는 희망이 없으면 버티고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희망,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거라는 굳은 믿음이 오늘을 참아내고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현재하는 ‘지금’에 매여 있기에, 인내가 설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경외심으로 피조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내의 중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바뀜과 수확에 감사할 수 있고 동물의 삶과 그 성장 주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800년 전에 쓴 ‘피조물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서 피조물을 대가족으로 인식하고 태양을 “형제”, 달을 “누이”라고 불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단순한 눈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우리가 부단히 견디며 하느님 약속을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는 맥락에서 인내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인은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로마 15,5)이신 하느님의 인내를 증언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고, 덕이요 삶의 길인 희망의 힘을 길러 줍니다. 인내의 은총을 자주 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동시에 희망의 굳건한 토대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4항>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아들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사흘이 지나서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루카 2,50-51). 어머니는 아들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혼을 내지도,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려 주고 아들의 생각과 의지를 바라봐줍니다.
서로를 인내하는 성모님과 예수님
그렇게 어머니 마리아는 평생 아들 예수를 견디십니다. 잉태의 순간(루카 1,26-38)에도, 성전에서 봉헌할 때(루카 2,22-39)도, 어린 시절 성전에서 아들을 잃어버리실 때(루카 2,41-52)도, 카나에서 자신의 청을 거절할 때(요한 2,1-12)도, 걱정되어 찾아갔지만 자신을 외면할 때(루카 8,19-21)도,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십자가 밑(요한 19,25-30)에서도 언제나 아들 예수님을 견디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짓눌려서, 아들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신 걸까요? 아닐 겁니다.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견디어 내신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묵묵히 바라봐주는, 그래서 아들을 믿어주는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서운하지만, 황당하고 당황스럽지만 그분께서는 아들 예수를 기다려 주고 참아내십니다. 또한 그 인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이루시려는 뜻을 지금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지만 반드시 그 뜻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 속에서 성모님은 견디고 버티며 죽음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따르십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참아내고 견디어 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당신의 어머니(요한 2,4)를 견디어 내십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견디어 내십니다(요한 6,60-61; 마태 20,17-28). 자기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 또한 견디어 내십니다(마태 26,36-46). 자신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긴 유다도 인내하십니다(마태 26,14-16). 마지막으로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유다인(루카 23,34)까지도 그분께서는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인내 또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몰이해도, 그리고 그들의 배반도 견디어 내시고, 고통과 죽음을 감수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절대적인 신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견디면서 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복함을 맛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설렘과 기대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 인내를 통해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견디어 냅니다. 나 혼자만 견디고 참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나를 인내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 견디고 있는지, 왜 견뎌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 기다림과 인내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다림과 인내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영성의 샘] 행복하신 어머니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영수가 엄마를 따라서 처음으로 성당을 갔답니다. 그리고 미사 중에 엄마와 함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하고 기도하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생각한 영수는 ‘하느님 할아버지’하고 기도했답니다. 어른들이 ‘아버지’라고 기도하니까 자기한테는 ‘할아버지’가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랬더니 곁에 있던 영수 엄마가 “영수야, 사람들이 기도할 적에는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니까 너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해야 해.”라고 가르쳐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영수가 물었대요. “그럼 하느님은 나한테도 아버지야?”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답해 주었습니다. “물론이지.” 그랬더니 영수도 엄마를 보며 환하게 웃었대요. 그리고는 엄마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말했답니다. “알았어, 누나.”
언젠가 보았던 우스갯소리입니다. 재미나지요? 한 번 같이 웃었으면 해서 유머를 찾았습니다. 사실 신앙인들은 늘 ‘의미’를 추구하지만 가끔은 이런 ‘재미’도 좋은 것 같아요. 재미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예 없어서도 곤란하지요. 그래서 어떤 분은, 사람들을 모으고 뭔가를 하려면 ‘흥미, 재미, 의미’의 ‘삼미(三味)’가 모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없으면 지속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삼미’도 좋지만, 저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것에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에도 행복이 함께 있다고 봅니다. 행복이 아니라, 의무감이나 사명감만으로 신앙을 지켜간다면 그 무게가 얼마나 무겁겠어요? 또 행복하지 않아서 별로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그 신앙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기도를 바치는 것도, 성경을 읽거나 쓰고,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고 봉헌하는 것도 사실은 그 모든 것 안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제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만나고 살아가는 때마다 되도록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행복을 만나기도 하지요.
신앙생활 틈틈이 행복의 거리들을 찾고 누려야
얼마 전에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사무실 여직원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이야?”라고요. 그 직원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거요.” 아직 신혼이라면 신혼이고, 그래서 이즈음이 많이 행복한 나날일 수도 있겠지만 첫 아이를 갖고 낳으며 양육하는 나날들이 마냥 좋은 순간만 있지는 않겠지요. 처음 겪는 일들에 고생도 많고, 놀랄 일도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그 모든 순간이 고생이나 어려움보다는 행복으로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겠지요.
얼핏 보기에 성모님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성모님께서도 무척 행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자녀를 보는 것, 함께 먹고, 자며, 삶의 여러 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 자녀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하거나 참아내고 내어놓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 되니까요. 내가 아닌 자녀가 먹어도 행복하고, 내가 아닌 자녀가 누려도 행복하지요. 성모님의 삶에도 그런 행복이 곳곳에 자리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어머님이시자 첫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모님은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셨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천상의 어머니로서 하느님 나라의 영복(永福)을 누리고 계시니 얼마나 행복하실까요! 그래서 저는 성모님께 공인된 여러 칭호들 외에, 개인적으로 이런 칭호를 드리고 싶어요. “행복하신 어머니!”
개인적으로 행복할 거리를 찾고자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신앙인의 삶에 행복할 거리가 참 많다고 느낍니다. 행복한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곁에서 행복한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거룩한 덕을 쌓는 것도 중요하고, 신앙인다운 헌신의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미사성제에 경건히 참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틈틈이, 행복의 거리들을 찾고 누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98) 기뻐하십시오!
신앙 안에서 기쁘십니까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신앙에서 기쁨이 없다면 어떨까?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처음 내신 문헌 「복음의 기쁨」에서 말씀하신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항)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기쁨이다. 기쁨 없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기쁨 없이는 신앙을 살 이유도 의미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에서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는가?
성경은 구원을 발견한 이들의 기쁨으로 가득하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다시 발견했을 때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참조) 예수님의 탄생에 큰 기쁨을 맛본 이들은 길 위의 목자들이었고, 나이가 많았던 시메온과 한나였다.(루카 2,15-20; 25-39 참조)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 선언을 통해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기쁨으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
예수님의 비유 속에도 기뻐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기쁨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을 때 찾아오는 기쁨이며(마태 13,44 참조), 회개하는 죄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하느님의 기쁨이기도 하다.(루카 15,1-10 참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며 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루카 15,11-32 참조) 그 기쁨은 작은아들이 저지른 배은망덕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물론 그 기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아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그런데 가장 큰 기쁨은 돌아가셨던 주님께서 되살아나셨을 때 제자들이 느꼈던 기쁨이 아니었을까.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 그분 앞에서는 이제 죽음도 힘을 잃고 말며, 주님께서 친히 그들의 희망이 되어주신다는 것이야말로 제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으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세상 만방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수난과 죽음이 배어있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다시 보며 기뻐할 것이고, 그때에는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기쁨은 수난과 죽음을 관통한 다음에, 곧 수난을 통해 자신을 죽인 다음에 주어지는 기쁨이다.
신자들과 부활 체험을 나눌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낮아지고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삶에서 닥치는 고통과 시련은 근심과 괴로움으로 다가오지만, 신앙 안에서 견디어낼 때 우리는 더 높이 솟아오르는 희망을 발견하며, 고통과 시련이 나를 죽이기 위해 필요했음을 깨닫게 된다. 또한 진정한 기쁨은 나의 의지나 뜻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에 나의 삶을 맡겨드릴 때 주어진다는 것을 배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 주님의 일에도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이 따른다. 그렇지만 주님께 의탁하며 끝까지 감내할 때, 내 손으로 일하지만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가 맺히는 경험이 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임을 인정하게 되고 나를 지우는 것에서 오는 기쁨이 있다.
자신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오늘 어떤 기쁨을 좇아 살고 있는가?
[특집] 성인들이 말하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지금 이 순간, 하느님 뵙겠다는 열망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라”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주제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다. 성경에서는 이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로마 14,17)이라고 했다. 한자로 옮겼을 때 ‘천국’(天國) 또는 ‘천당’(天堂)인 하느님 나라는 시대를 넘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 하느님을 찾는 방법이기도 했다. 성인들 역시 하느님 뜻에 따라 살려는 노력을 열망했다. 사순 시기의 막바지를 보내면서 성인들을 비롯한 교회 역사 안의 저명 신학자들이 제시했던 천국에 이르는 길, 하느님을 찾기 위한 명언들을 찾아본다.
하느님을 찾아서
성 베르나르도, ‘당신 자신을 향해 가세요’
사상과 영성 면에서 교회 생활에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성인 중 한 명인 시토 수도회 수도승, 클레르보 수도원의 원장 베르나르도 성인(1090~1153)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향해 가라”고 했다. 수도자들에게 관상 기도에 전념하도록 고무했던 성인은 “당신에게 제시된 길은 멀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향해 가면 됩니다. 말씀은 당신 가까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당신의 입속과 마음속에 있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신학의 원천 자료는 원칙적으로 성경, 그다음이 「베네딕도 규칙서」였는데, 평소 ‘말씀’에 바탕을 두었던 면모를 비춰볼 수 있다.
성 보나벤투라, ‘모든 계시가 내려오는 태초’
보나벤투라 성인(1217~1274)은 중세의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로 꼽힌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1585~1590)에 의해 ‘교회 학자’로 선포된 성인은 철학과 신학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했고 신앙 진리에 있어서 철학 자체의 한계를 분명히 밝힌 학자다. 신앙의 빛이 없는, 즉 신학에서 분리된 철학은 하느님의 신비, 인간의 신비, 양쪽의 관계, 인류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 올바로 규명할 수 없다고 했다. “세상에는 계시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진리도 있다”고 했던 성인은 “가장 먼저 나는 영원의 아버지께 간청합니다. 그분은 모든 계시가 내려오는 태초이고, 훌륭하고 완벽한 선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빛의 아버지입니다”라고 했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듯이’
가르멜 수도원 개혁가로서, 신비가 이자 교회 학자인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1515~1582)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고독을 얻기 위해 자신의 내부 세계로 몰입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자아 속에서 거치는 기도의 여정을 묵상의 기도·고요의 기도·합일 기도의 여정으로 묘사한바 있다. 인간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 즉 신적인 인간 영혼의 깊이를 세밀하면서도 단순하게 설명했던 그는 하느님을, 아버지를 대하듯이 찾으라고 한다. “우리는 그토록 친절한 손님을 낯설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성인는 “아버지를 대하듯이 우리는 그분과 겸허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밝힌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하느님을 찾는 시간은 현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1567~ 1622)은 하느님을 찾는 시간은 ‘현세’에 있다고 언급했다. 17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영성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이들 중 한 명으로, 그리스도교의 완덕이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있음을 재차 강조했던 그는 “하느님을 찾는 시간은 현세입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시간은 죽음입니다. 하느님을 나의 것으로 하는 시간은 영원입니다”라고 했다. 성인은 ‘현대 영성의 아버지’라 불리며,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직접 세웠다.
성 에디트 슈타인, ‘자신에게 도달하는 길’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1999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십자가의 성 베네딕타 성인(에디트 슈타인·1891~1942)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가르멜회 소속 유다인 수녀로 독일 현대 철학과 여성론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을 연구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가르멜의 삶이란 ‘세상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을 실현하기 고독을 선택한 삶이었다. 그런 삶 속에서 성인은 “하느님을 찾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도 도달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가경자 마들렌 델브렐, ‘영혼의 바닥까지 내려가라’
20세기 프랑스 여성 선교사 마들렌 델브렐 가경자(1904~1964)는 파리 교외 가난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30년여를 살았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자기 자신을 내맡겼던 그녀는 바오로 사도 말씀을 인용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나 자신이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며 “복음을 전하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내려가고 세상 끝까지 나아가라고 조언한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끝까지 간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 영혼의 바닥까지 내려간다면 그곳에서도 당신은 하느님을 찾을 것입니다”고 전했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마리아는 주님께 가는 지름길’
수도회 설립자이자 증거자인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성인(1673~1716)은 마리아와 로사리오(묵주기도)가 주요 신심이었다. 이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이란 책을 저술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 클레멘스 1세 교황에게 교황청 선교사로 임명된 뒤, 프랑스 서쪽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했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께 이르는 성덕의 길을 가르쳤다. 생전에 마리아 영성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런 업적처럼 「황금전설」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가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성모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께 가는 가장 손쉬운 지름길이자 완전한 길이다.”
성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하느님 나라 가려면 예수 성심 기도를’
프랑스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에 있는 ‘성모 방문 수녀회’(Ordo Visitationis Beatae Mariae Virginis) 수녀로 네 차례 예수의 발현과 환시를 체험했던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성인(1647~1690)은 예수 성심 신심을 전파하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특별히 예수 성심의 환시를 체험한 것 중 네 번째에서 예수가 성인에게 한 말씀은 유명하다. 여기서 예수는 성체 축일 일주일 후 금요일을 성심을 공경하는 축일로 정하고, 그날 영성체하는 것은 물론 제대 위에 성체를 현시함으로써 성심이 받은 불경을 배상하기 위하여 엄숙히 보상 행위 등을 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배경에서 성인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위해 예수 성심 기도를 추천한다. “짧은 시간에 영혼을 최고의 완전함으로 드높이는 경건한 방법으로 나는 예수 성심 기도 외에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성 소화 데레사, ‘작은 길이라는 영성의 길 찾아’
비오 11세 교황이 “성덕의 으뜸이며 기적의 천재”라 부르며 사후 28년 만에 성인으로 선포한 리지외의 데레사(소화데레사) 성인(1873~1897)은 24세 나이로 죽기까지 ‘작은 길’이라 하는 영성의 길을 걸었다. 「한 영혼의 이야기」라는 자서전에서 성녀는 “나는 천국에 가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다. 곧고 아주 짧으며 작은 길을 찾으려고 했다. … 내가 열망하는 그 길이 성경에 암시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때 영원한 지혜의 입에서 나온 말씀, 아주 작은 사람이 내게 올 수 있다는 말씀을 읽었다”며 ‘작은 길’을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적었다.
[영성의 샘] 요즘 행복하신가요?
5월은 성모님의 달입니다. 부활 시기를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성모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과연 복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을 의미할까요? ‘복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Εὐλογημένη(에우로게메네)는 좋은+말씀(의미)이란 뜻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질문은 “나는 행복한가?”가 아닙니다. “나는 행복한가?”가 아니라 “내 삶은 의미 있는가?”입니다.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의 질문을 함으로써 나는 달성할 수 없는 낭만적 이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으며, 더 중요한 것은 신에게 인간의 조건에서 나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삶은 고통, 질병, 외로움, 아픔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기쁨은 신자 생활에서 중요합니다. 기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전형적인 반응입니다. 즉 하느님을 체험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또한 하나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노래는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6-48)
의미는 어떤 가치가 실현될 때 발생합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경험가치-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의미(기쁨) 체험입니다.
창조가치-무엇인가를 최초로 새롭게 창조할 때 느끼는 의미와 기쁨입니다.
관점가치-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그것에 절망하지 않고 태도나 관점을 바꾸어 바라볼 때 느끼는 기쁨과 의미입니다. 즉 관점이 변했을 때 발생 되는 의미로 이것을 신앙의 세계에서는 ‘회개’라고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행동이 하느님의 행동과 조화를 이룰 때 의미가 발생 됩니다.
근육, 민첩성, 아름다움, 광채, 은혜는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능력을 나타내는 주된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주 느끼셔야 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열정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자신을 설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자신의 선함을 오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아 무력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모 마리아님께서는 십자가 아래에서 그것을 느끼셨습니다.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분초사회’입니다. 분초를 다투며 자기 자신을 자기 스스로 밀어붙이는 성과주의 경쟁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쇼핑하는 인간이야말로 현대인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에는 너무 생기가 넘치고, 살기에는 너무 죽어있습니다.
“삶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적 요소인데, 이 떼어놓기가 설 죽은 삶을, 산 죽음을 낳는다. 자본주의는 역설적인 죽음 충동을 산출한다. 자본주의는 삶을 죽인다. 치명적인 것은 죽음 없는 삶을 향한 자본주의의 노력이다. 성과 좀비나 피트니스 좀비, 보톡스 좀비는 설 죽은 삶의 모습들이다. 설 죽은 자들은 어떤 생기도 없다. 오로지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다. 건강 히스테리는 자본 자체의 생명 정치적 모습이다.”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한병철, 26>
오늘날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유혹하고 모든 것을 소비하도록 유혹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 품는 삶만이 진정으로 생기있고,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5월은 성모님의 달, 우리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는 아름다운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