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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5) 관계의 갈등
갈등, 파국 아닌 성장 동력으로 패러다임 전환해야
인간관계에서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발생한다. 관계는 대체로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동안에만 서로의 피난처가 되어주거나, 혹은 서로를 만족시켜 주는 동안에만 지속되며, 그것이 틀어지는 순간 쉽게 단절 혹은 변질된다. 이는 관계가 상대의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의사결정과 협상을 요구하는 ‘긴장’과 ‘갈등’ 속에 놓이게 된다.
갈등을 유발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공통적인 감정은 ‘모욕’과 ‘모멸감’이다. 상대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과 함께 모멸감이 드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마침내 갈등이 시작된다. 더구나 이런 모욕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자주 반복됨으로써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갈등은 증폭되어 두 사람의 관계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대부분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처음에는 미미하지만, 조금씩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긴장이 증폭되어 마침내 또 다른 갈등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갈등은 사회 통합과 화해를 저해하는 요소로 이해되지만, 독일의 철학자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갈등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으로만 작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관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현 사태를 타개하기 위한 변화의 동력이자 근본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갈등은 자기와 타자에 대해 계속 배워가야 할 삶의 토대로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결한 방편이자 화해와 통합을 성취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며, ‘사회화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짐멜에 따르면 화해와 통합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갈등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며, 이것이야말로 통합과 화합을 저해하는 더 심각한 부정적인 요소다.
갈등에 대한 짐멜의 이러한 긍정적 해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갈등으로 인해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갈등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대체로 눈앞의 문제 자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갈등 이면에 내재한 원인과 영향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당장 문제를 해결할 응급처치에만 몰두하고, 갈등으로 빚어진 불안과 고통을 줄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 국면을 타개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눈앞의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문제 너머를 바라볼 ‘용기’가 필요하다. 문제 너머를 바라본다는 것은 당면한 문제의 부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제 상황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며, 문제의 구체적인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문제를 가져온 배경 및 그와 연결된 관계의 패턴 그리고 원인 등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갈등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패러다임이 바뀌면 질문이 바뀌고, 질문이 바뀌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달라진다. 갈등에 대한 창조적인 해석으로의 전환은 갈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며 재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과학과 신앙] (42) 당신의 목걸이
네덜란드의 화가 얀 스틴(Jan Steen)의 미술작품 ‘공증인 앞에서 여성의 보석을 녹이는 금세공인, 연금술사’(1668~1670년경)에는 한 여인이 자신의 목걸이를 금 세공업자에게 팔아넘기는 장면이 있다. 그림 속 슬피 우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서 목걸이가 꽤 비싼 물건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805년에 프랑수아 제라르는 대관식을 위해 예복을 입은 나폴레옹의 부인 조제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특히 이 그림에서 그녀가 가진 부와 권력이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커다란 목걸이로 표현되었다. 에메랄드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행복과 행운을 불러오며, 다이아몬드는 강인함, 순수함,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소유한다고 정말 행복하고 행운이 따르며 강인하고 영원할지는 의문이다. 보석이 가진 의미는 인간이 부여한 미사여구며 보석 판매업자가 구매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는 최고의 광고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는 모두 자연에서 산출되는 광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둘 다 땅 속에 있는 돌이다. 에메랄드는 베릴륨·알루미늄·규소·산소가 주성분인 규산염 광물인 반면, 다이아몬드는 오직 탄소 한 종류로만 이루어진 광물이다. 탄소로만 이루어진 물질 중에는 흑연도 있는데 다이아몬드와 성질이 많이 다르다. 다이아몬드를 이루는 탄소 원자들은 정사면체 구조로 매우 단단하고 투명하며 전기가 통하지 않지만, 흑연은 육각형 벌집 모양의 층상 구조로 결합이 약해 잘 부서지고 전기가 잘 통한다. 다이아몬드는 주로 보석으로 사용되지만 흑연은 연필·샤프심 제조에 사용되며 리튬이온 배터리의 음극제, 원자로의 감속재 등에 필수적이다. 또한 첨단 신소재인 풀러렌, 탄소 나노튜브, 그래핀 등을 제작할 때의 기본 재료로서 다이아몬드보다 활용도가 높다.
물질의 용도와 인류에게 기여하는 가치로만 평가한다면 다이아몬드보다 흑연이 더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흑연은 다이아몬드보다 저평가되어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이용했다. 값비싼 보석과 귀금속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인간 됨과는 무관하게 그 사람을 과대평가하게 해주는 좋은 수단이었다. 석기 시대에는 동물의 뼈, 뿔 등으로 목걸이를 만들었고 철기 시대에는 주로 금이 장신구의 재료로 이용되었으며 유럽에서는 루비·사파이어·에메랄드·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장신구에 사용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단두대에서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 스캔들에 연루되어 시민들에게 분노의 표적이 되었는데 이는 고가의 다이아몬드가 당시 일반 대중과 얼마나 심리적으로 괴리된 것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화려한 장신구로 자신을 장식한다고 그 사람이 잘나고 뛰어난 것은 아니다. 잘나고 뛰어난 것은 남들이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는 것이지 스스로 몸에 치장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더욱 실감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라는 이번 주일 복음 말씀에서 금이 아닌 은 십자가를 착용하고 항상 낮은 자세로 우리 곁에 계셨던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려 본다.
[과학과 신앙] (41) 또 다른 좁은 문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는 평지보다 바람의 세기가 더 강해진다. 빌딩풍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장애물이 없는 넓은 공간을 지나는 바람이 좁은 고층 빌딩들 사이를 통과할 때 속력이 2~3배 빨라져서 나타나는 것으로, 간판이 날아가거나 유리창이 깨지는 피해를 주기도 한다. 이것은 ‘베르누이의 정리’로 설명되는데, 1738년 네덜란드 출신 스위스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유체(流體)가 좁은 통로를 지날 때 속력은 증가하고 압력이 감소하며 반대로 넓은 통로를 지날 때는 속력은 감소하고 압력이 증가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방정식으로 표현하였다.
빌딩풍의 원인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인 지오반니 벤투리가 1797년에 베르누이의 정리를 이용해 해석한 물리 현상(벤투리 효과)으로도 설명된다. 창문을 닫을 때 문틈 사이로 바람이 더 세게 들어오는 현상, 넓은 강보다 좁은 물길에서 물의 속력이 더 빨라지는 현상, 고무 호스로 물을 뿌릴 때 호스 입구를 손으로 누르면 물이 더 세게 나오는 현상, 날개 없는 선풍기 등이 모두 베르누이 정리의 예다.
베르누이의 정리를 쉽게 말하면 좁은 입구에 많은 공기나 물이 지나가려니 서로 치열해지고 과격해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공기와 물 같은 유체뿐만 아니라 세상일에도 적용된다. 지난해보다 올해 대학 입학 경쟁률은 더 올라갈 듯한데 그 이유는 2007년생인 올해 고3 수험생의 숫자가 작년 고3 수험생보다 약 10%인 4만 5000명 정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황금 돼지띠의 해인 2007년에 태어난 이들은 재물복을 타고난다는 속설 때문에 출산이 반짝 늘어난 결과다.
하지만 이들이 만 4세가 되던 해에는 사립 유치원에 비해 교육비가 저렴한 공립 유치원 입학 경쟁률이 상승했으며 올해 대학 입시에도 이들은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작년도 서울 소재 주요 12개 대학 수시 입학 경쟁률은 평균 22.80대 1이었으며 의대 입시의 경우 작년 전국 39개 의대 수시 경쟁률은 24.04대 1이었다. 성균관대 의대 논술전형의 경우 412.5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의대 진학 희망자는 많지만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좁다 보니 올해 경쟁도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학을 졸업해서도 취업의 좁은 문은 젊은 세대를 힘들게 한다. 세계적인 경제침체, 기업의 투자위축으로 심해진 취업난에 주요 대기업의 채용 경쟁률은 평균 50대 1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선호도가 높은 기업은 100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힘들게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해도 4년제 대학 졸업자 중 대기업 취업률은 10% 내외다.
인간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이런 좁은 문 통과를 위한 경쟁이겠지만 나에게는 통과해야 할 또 다른 좁은 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불의를 극복하고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사랑과 관용·정의를 실천해야 도달할 수 있는 문이며, 나의 의무를 다하고 길을 잃지 않도록 늘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가야 하는 순례의 삶 끝에서 만나는 문이다. 이번 주일 미사 복음 중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루카 13,24)라는 말씀을 좁은 비상구 문 위의 안내표지인 것처럼 가슴에 새겨본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33) 타자(他者)
타자성은 자기 주체성 자각하게 하는 핵심 계기
우리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타자(他者)’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타자는 그 이상의 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타자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으며, 타자는 무엇보다 자기의식과 자기 인식의 주요 계기가 된다. 타자의 개념이 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생활세계를 자기와 타자가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는 ‘의미 지향성의 세계’로 제시한 이후부터다.
부버(Martin Buber, 1878~1965)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와 관계 맺음에 있어서 ‘나-너(Ich-Du)’와 ‘나-그(Ich-Es)’의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전자가 타자를 고유한 인격적 존재로 대하는 태도라면, 후자는 타자를 사물화하고 객체화함으로써 도구적으로 대하는 태도다. 인간은 타자와 관계 맺음에 있어 나와 너의 인격적 존재로 서로 만날 때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를 통해 변화하며 자기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
타자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철학자로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가 있다. 사르트르가 타자를 나와 대립하는 갈등적 존재로 본다면, 레비나스는 타자를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할 초월적 대상으로 본다.
사실 사르트르의 주장처럼 타자는 우선 나에게 불편하고 거북한 시선으로 다가온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대상화하고 객체화함으로써 나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보고 관찰하는 주체로서 나는 그 시선 속에서 관찰의 대상이 되며, 이는 근본적으로 수치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한 타인의 시선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타인의 세계 속의 한 객체임을 자각하며,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타자는 분명 나를 부자유스럽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다. 우리는 이런 타자와의 갈등과 고통 속에서 타자와 대결하는 가운데 상호 주체적 존재로서 나의 주체성을 자각한다.
이와 달리 레비나스는 불편한 ‘타자의 시선’이 아닌, 윤리적 호소를 하는 ‘타자의 얼굴’에 주목한다. 타자는 불편한 시선으로 갈등 관계를 유발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적극적으로 환대해야 할 존재다. 레비나스는 무엇보다 나의 이해를 절대적으로 넘어서 있는 타자의 초월성과 불가해성을 강조한다. 타자는 지식이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그 어떤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할 절대적 존재다.
타자의 얼굴은 단순한 신체 부위이기보다는 오히려 타자가 나에게 고유하게 다가오는 윤리적 명령의 현현 방식을 의미한다. 즉 그를 환대하고 긍정하며, 그 앞에서 헌신하도록 명령하는 ‘윤리적 부름’이다. 이렇게 타자가 절대적으로 윤리적 책임을 명령하고 호소하기에 우리는 타자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처럼 타자는 나와 전혀 ‘다름’으로 내 앞에 존재하면서 나를 주체적 존재로 초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타자의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오로지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만 삼는다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의 타자성은 바로 인간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주체성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신앙] (37) 농업 혁명을 생각하다
2016년 1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의장을 맡은 독일의 경제학자 클라우스 슈밥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언급했다. 드론·사물인터넷·인공지능·3D 프린팅·가상현실·빅데이터·자율주행 자동차·블록체인·양자 기술 등 놀랍도록 진보한 이 시대의 과학기술은 현대 문명의 커다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이 혁명적으로 전환된 시기는 여러 번 있었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이를 세 가지 물결로 표현했다. 첫 번째 물결은 빙하기가 끝난 약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시작된 농업혁명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200만 년 넘게 사냥과 채집으로 떠돌아다니던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며 곡식과 가축을 기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 물질적·기술적 측면인 문명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정신적·사회적 측면인 문화의 발달을 가져왔고 인류의 야생성은 사라졌다. 농업을 의미하는 agriculture라는 단어 속에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인 culture가 들어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물결은 18세기에 영국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확대된 산업혁명이며 이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세 번째 물결은 20세기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의 정보혁명(디지털 혁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화 중에서 인류에게 가장 의미가 큰 것은 농업혁명일 것이다. 인류사에 등장하는 초기 문명들은 농업을 기반으로 탄생했다. 농업은 인간이 먹고사는 원초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가장 기초 수단이기에 농업혁명이 없었다면 뒤이은 문명의 진보도 없었을 것이다.
농업이란 인간에게 식량이 될 수 있는 자연 상태의 식물과 동물 그리고 토지와 물 등의 환경을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생물이 지닌 에너지를 인간에게 유용한 상태로 전환시키고 모으는 과정이다. 곡식들은 탄수화물 같은 유기물을 생산하여 태양의 빛에너지를 인간에게 유용한 화학에너지로 전환시켜준다. 이러한 과정은 식물의 엽록체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인 광합성에 의해 일어나는데 놀랍게도 식물이 포도당 1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공기 중에 0.03%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는 이산화탄소 분자 6개와 뿌리에서 흡수하는 물 분자 12개가 전부다. 여기에 태양의 빛에너지가 가해지면 엽록체 내부의 여러 효소에 의해 탄수화물인 포도당이 합성된다. 단순해 보이는 이 광합성 작용은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근본이다.
그러나 아직 첨단 과학기술로도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빛에너지를 전환시키는 식물의 놀라운 능력인 광합성이다. 단지 인간은 식물을 통해 빛에너지를 수확할 따름이며 그 일의 최전선에 농민들이 있다. 21세기에도 농업혁명은 진행 중인 것이다.
이번 7월 셋째 주일은 한국 교회가 제정한 ‘농민 주일’이다. 지금 농촌 상황은 농촌 인구 감소 및 고령화, 농업 개방화에 따른 농가 소득 불안정, 기후 변화 등으로 날로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때 이른 폭염에도 묵묵히 땅을 일구고 수확하는 우리 농민들을 위해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할 이유다. “땅이 있는 한 씨 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창세 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