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1-11 그 후에 유다가
먼저 모세는 유다에게서 세 아들이 태어난 사실을 기록합니다(1-5).
그 다음에 유다의 첫째아들 "엘"이 자식이 없이 죽은 사실과(6-7) 유다의 아들 오난이 자기 형 "엘"을 위하여 계대 하기를 원치 아니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 사실과(8-10) 유다가 자부 다말을 친정으로 보낸 사실을 기록합니다(11).
1. 본문 1절은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입니다.
모세는 요셉에 대한 기사를 계속하기 전에 유다에 대한 약전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기에 한층 더 노력을 쏟는 것은 구속자가 거기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나올 지파에 대한 역사는 계속해서 알려져야 하고, 또 하나도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지파의 영광스러운 고귀함이 찬양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문의 최대 수치가 폭로되고 있습니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유다 자손의 마음을 부풀게 하기는커녕 수치로 휩싸이게 합니다
얼핏 보면 이런 불명예로 그리스도의 위엄이 손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사도 바울이 말한 "비움"(emptying) 도 나타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광에 기여합니다. 이런 내용은 그리스도의 영광은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첫째,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께서 오직 그분 홀로 자기 조상의 비행에서 연유하는 불명예를 충분히 도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조상의 잘못된 행동은 불신자들을 거치게 하는 요인이 되긴 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부요한 은혜가 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울 목적으로 우리 육신을 옷 입으셨다는 사실에서 빛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 태어난 종족이 수치로 얼룩져 있다는 것은 적절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께만 만족하여 그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찾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세상적 광채를 구하지 않도록 하려는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적 야심은 언제나 그런 데에 너무 많이 기울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유다 지파에게 특별한 명예가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는 세상의 구원이 흘러 나올 연원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모세의 해설이 그가 언급하는 자들에게 결코 명예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떤 것은 자신이나 조상들의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 조상들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도 육신으로는 영광을 소유하지 않으십니다. 또 그리스도의 주요하고도 극히 혁혁한 승리는 십자가 위에 있었다는 것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계가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사실에 거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순결에 의해 모두 정결케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땅과 공중에 있는 모든 불순물을 흡수함으로써 세계를 깨끗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본문 2-7절 상반은
"②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③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④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⑤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디는 거십 에 있었더라
⑥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⑦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입니다.
어떤 자들은 "가나안 사람"을 '상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해석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은 가나안인과 끊임없이 투쟁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는데 유다는 바로 그 족속에서 자기 아내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그릇된 욕정을 책망합니다. 유다나 그의 다른 형제들은 하나의 계약 하에 가나안 땅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계약은 나중에 그들의 대적들이 멸절되고 완전히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멸망은 그들로 하여금 약속된 땅을 지배하고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유다의 행위를 마땅히 과실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금지된 연합에 스스로 얽혀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결국 이렇게 하여 태어난 유다의 자식을 저주하십니다. 그래서 이 결합으로부터는 유다 지파의 방백과 머리가 나오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이 혈통에서 나오지 않게 하셨습니다.
또한 유다로 말미암아 악한 손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야곱의 인내의 훈련 중 하나로 계수 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죄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 젊은이가 하나님의 복수로 멸절 당했다고 말합니다.
한창 나이에 요절한 다른 자들에게 대해서는 이 같은 일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직접적인 형벌이 되었던 그 악은 아주 드문 것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련 자체는 거룩한 족장에게 가혹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기업이 약하고 타락된 자들의 소유가 된다는 생각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약속이 비준되는 것을 바랄 수가 없었습니다. 자녀가 많은 대가족이 인간 행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족장이 처한 상황은 특이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비록 그에게 택함받은 복된 자손을 약속하시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저주받은 후손의 증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기약된 은혜를 망쳐 버릴지도 모를 자손이 그의 원 자녀와 함께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했다고 말합니다(7절).
그럼에도 그의 악은 사람들로부터 감춰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나타내려는 의도는 그가 보통 이상의 죄악에 물들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죄악에 탐닉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용납 받을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3. 본문 7절 하반은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입니다.
장수가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 하나인 것은 사실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명예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에서 오래 살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경험하면 할수록 그가 여호와께 더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는 많은 불행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여전히 빛납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자신에게 초대하시며 자기 지식으로 우리를 연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주님은 우리를 존귀로 장식하셔서 세상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우리 권세에 복종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행위로서 인간의 수명을 길게 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악인이 어린 시절에 죽임을 당하는 것은 그들의 악에 대해 형벌이 부과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호와가 하늘에서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땅의 지탱을 받을 가치가 없으며 하늘 빛을 공유할 자격이 없다는 심판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존속시키는 한 그의 은택을 힘써 명상해야 합니다. 이것은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인하여 그분께 더욱 즐거이 찬양을 돌리도록 노력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비명횡사는 하나님의 채찍과 저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피를 흘리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라(시55:23)는 교훈은 참입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더 충분히 행사하셨습니다.
그때는 장래 생명에 대한 지식이 비교적 모호하던 때였습니다.
이제는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더욱 명백히 나타나기 때문에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들과 하나님의 옛 백성간의 이런 차이는 다른 데서도 주목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수명을 누리는 자가 여호와께서 기뻐하고 열납하시는 자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타락자의 형벌을 더 악하게 하시기 위해 그들의 생명을 길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장수가 복이라는 것은 일반적 규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인이 아벨보다 몇 세기나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현세적 혜택을 끊임없이 골고루 베푸시진 않으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일한 규칙에 의해 현세적 형벌을 집행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현 생에 관한 한 형벌과 보상의 확실한 범례가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더욱이 성적 타락에서 연유하는 현세의 불행들은 하나님의 최초의 그리고 특별하신 은혜를 꺼버리지 못합니다. 반면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인 사망도 초자연적 치료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자의 구원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첫 열매가 주어진 이후부터는 급속히 생명이 꺼지는 자들도 결코 그 가치가 저하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망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복수는 너무도 뚜렷하여 땅도 그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낸 것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4. 본문 8-10절은
"⑧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 분을 행하여 네 행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⑨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⑩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입니다.
형제의 혼인에 대해 살아남은 동생이 죽은 형의 자손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형수취수법이 그때까지는 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연스런 본능에 의해 이런 식의 경향을 나타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종족 보존을 위해 태어나기 때문에 누구라도 자식 없이 죽으면 거기에 약간의 자연 결손이 생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위해 이름을 얻어 주는 것은 인도적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 때문에 그런 자가 살았다는 것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남은 형제에게 태어난 아이가 죽은 형제의 자식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유일의 이유는 그 가문에 마른 나뭇가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논리를 따라 다말은 결코 홀가분한 몸이 아니라 유다가에 대해 자손을 낳아야 할 의무하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경건의 규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긴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것이 인도적 의무라는 인상이 들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중에 그것을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난의 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형에게 이런 명예가 돌아가는 것을 시기했습니다.
그리고 사후 아버지의 자격의 취득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온 가족의 불명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식을 친구들의 양자로 들여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도 주는 자식을 제 형에게 주지 않으려는 것은 야만적인 괘씸한 행위였습니다.
5. 본문 11절은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 아비 집에 있으니라" 입니다.
모세는 유다가 며느리를 자기 수하에 붙들어 두려고 원하는 한 다말은 다른 집에 개가할 자유가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자기 시아버지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것이 당시에 용인되던 관습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듯이 보입니다. 즉 다말은 그녀를 통해 후사를 일으킬 수 있는 후계자가 있는 한 자기 시아버지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다른 집으로 개가해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어떻든 간에 유다는 다말을 한 곳에 붙잡아 둠으로써 매우 부당한 행위를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그녀를 기만하려고 했습니다. 실로 시종일관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다말을 자기 집에서 떠나 보내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런 야심에 찬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을 며느리에게 불성실하고 잔인한 자로 나타내서는 안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학대는 그릇된 판단에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죽게된 원인을 깊이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무죄한 며느리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의 결혼이 불행한 결혼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는 자신을 위해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지 않습니까?
그의 아들들이 멸망한 이유는 바로 그들의 악 때문이었는데도 그는 다말에게 대해 비호의 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말에게는 어떤 잘못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유다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불상사가 생길 때면 언제든지 우리는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키거나 사면팔방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죄를 떨쳐 버리는데 힘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릿거은 수치심이 우리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조심해야 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명예를 보존하려고 애쓰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유지하려고 주의하지 않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