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예술적 구조미, 문학적 잠재력
최종심사 권대근(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신인상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작품의 문학성이 있느냐와 신인으로서 문학적 잠재력을 가졌느냐 여부다. 후자는 전자의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 고려해 볼 사항이다. 예술적 구조미를 가지지 못하는 작품은 우선 당선수필이 될 수 없다. 다음으로는 문학적 관점에서 과연 무엇을 작품 속에서 발견했느냐 하는 것이며, 형상과 인식으로서 문학의 본질을 작품이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가도 중요한 선정 기준이다. 평자는 이와 아울러 수필이란 어떤 글인지 알고 쓰는지, 또는 문장가로서의 능력을 보이는지와 문단 전개능력 등을 살펴보았다. 위의 관점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두 작품은 신인으로서 그 가능성을 보이기에 당선작으로 선했다.
이주현의 <무색단풍>은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무색단풍’이란 제목을 제재로 활용해서 ‘반성적 성찰’이라는 수필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어 문학적 가치가 빛난다고 하겠다. ‘무색단풍’이 의미하는 바는 귀납추리에 의해 쓰여진 수필의 결말부 주제의식의 의미화 부분을 읽어내어야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수필은 매우 전략화된 글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수필에 대한 개념, 수필은‘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란 인식을 뛰어넘는다. “자기 색이 있다는 것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벽이 되기도 한다. 주워 든 나뭇잎을 보면서 친구와의 관계에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고집은 아닌가 돌아본다.”에서 당선자는 반성적 성찰을 보일 뿐만 아니라‘색’이 ‘벽’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고집처럼 부여잡고 있는 색이 있다면 예쁘더라도 떨궈야 할 철이다.”이라고 말한다. ‘예쁘더라도 떨궈야 할’ 이유는 “나무는 살기 위하여 잎을 떨궈낸다. 거목은 겨울에 제 빛을 발한다.”에서 찾을 수 있다. 직접적인 언술보다는 간접적인 진술을 통해 연상과 상상을 통해 주제의식에 도달하도록 한 것이다.
자신이 먼저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음으로써,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자세와 정신은 정말 오늘날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사람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 가슴 깊이 담아두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감동적이다. 수필이 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상은 자신이 아니라, 그가 속한 환경과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당선자는 우리가 고민하는 인간관계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게 만들어준다. 이 수필은 늘 남의 말이 신경 쓰이고 돌아보면 혼자 상처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인간관계의 지침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치유적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총체적 위기의 시대, 수필은 총체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을 보다 심미적 가치를 지닌 삶의 실상으로 구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써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 수필은 문학작품으로서 그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고 하겠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엄숙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씀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가 아닌가. ‘색으로 남지 않고 투과해 버린 일상은 어딘가에서 계속 빛나고 있을 것이다. 기억에 없이 지나간 시간은 무색으로 눈부신 단풍이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서운한 감정이 일순간 녹는다.’는 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의 다른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의 철학을 경험 속의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는 이 수필은 그 깨달음이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어서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다가간다.
친구의 한마디를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인가라는 삶의 한 지향성을 ‘색’과 ‘벽’그리고 ‘유색’과 ‘무색’의 대립항으로 풀어내어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일상사의 포용에서 출발된 지혜가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데서 고무적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따끈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그렇다. 당선자의 말처럼,“색으로 남지 않고 투과해 버린 일상은 어딘가에서 계속 빛나고 있을 것이다.” 여운의 맛을 주는 문장력, 이런 손맛이 있어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김유정의 <희열>은 당선자의 여고 2학년 때 친구였던 ‘희열’이란 친구에 대해 쓴 인물수필이다. 지금은 연락이 두절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한 번인가 더 희열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당선자는 그 이후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당선자는 그 친구가 가끔씩 생각날 때가 있다고 한다. 이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왜 희열은 친구를 한 번 만나고 난 후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를 추적해 보는 데 있다. 그 속사정 속에 주제의식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송 어느 다방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일하고 있다며, 내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오지 말라는 당부도 뿌리치고 기어코 찾아갔다.
낡은 2층 다방에서 만난 희열은 그 작은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양장을 하고 있었다. 대학 새내기로 한껏 멋을 부리고 찾아간 나를 멋쩍은 웃음만 흘리며 쳐다보았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지금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너무나 어색했고 왜 그동안 소식을 끊었는지 나름 짐작이 되었다.
- 김유정의 <희열> 중에서 -
서사적 형식의 스토리는 문학적 사건으로 재배열하지 않으면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개인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글이 출발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발견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 수필의 압권은 처지가 다른 두 사람의 극적 만남이다. 찾으러 오지 말라는 친구 희열의 부탁을 뿌리치고 기어이 친구를 만나고 나서 그 뒤에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 얄궂은 현실, 당선자도 친구도 서로를 찾지 않았다는 데 있는 비극성에 내재된 인간사의 아이러니를 간파하는 데서 이 수필의 묘미가 있다. 언제나 문학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차원에서 김유정의 <희열>은 충분히 존재 의의를 지닌다. 그는 수필을 통해 깨달음의 향기로 이 세상의 매듭을 풀며, 험난한 세상을 헤치고 나갈 묘수를 전하고자 한다.
수필의 본령이 원래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이 작품은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무엇보다도 진리를 찾아내어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전개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수필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인용문의,‘낡은 2층 다방에서 만난 희열은 그 작은 몸에 어울리지도 않는 양장을 하고 있었다. 대학 새내기로 한껏 멋을 부리고 찾아간 나를 멋쩍은 웃음만 흘리며 쳐다보았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지금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너무나 어색했고 왜 그동안 소식을 끊었는지 나름 짐작이 되었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관계단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출신이 달랐지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친구라는 단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가 가능했지만, 사회적 신분이 달라진 둘은 사회에 나와서는‘따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나은 형편에 있었던 당선자가 고아원 출신 친구를 끌어안아 포용해 주었다면 이런 수필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수필의 문학성은 갈등에서 나온다.
수필은 가장 진솔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이다. 수필은 단순히 경험한 것을 이야기로 써서는 안 된다. 수필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주현은 전략적인 서술과 간접화된 언술로 문학적 성취를 견인하였고, 김유정의 수필은 출발선에서부터 달랐던 환경이 졸업 후에도 계속되면서 전개되는 가난의 되물림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두 친구의 우정마저도 갈라놓은 사회적 신분의 격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비록 고아원 출신 친구가 먼저 소식을 끊었지만, 만날 수 없는 그 친구가 보고파서 눈시울을 적시는 당선자의 인간적인 면모가 향기를 내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적인 완성을 향해 가기 위해 두 사람은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자신의 문제에 머물러만 있지 않고 시선을 공동체의 안녕과 공동선에 겨눔으로써 언제나 삶 속에서 작은 행복들을 기대하고 꿈꾸기 때문이다. 문학적 잠재력도 있어 보인다. 따스한 체온과 따뜻한 언어를 전해주는 이들이 등단하여 내어놓을 다음 작품에 더 기대를 건다. 수필은 성찰의 문학인 만큼 자신이 걸어가는 인생길에서 좋은 수필을 위한 노력이 우리들의 기대에 크게 부응하리라 믿는다.
최종심사 권대근(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