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기의 송와잡설(松窩雜說) : 모재(慕齋) 선생은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즐겨하여, 기묘 제현(己卯諸賢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영수(領首)가 되었다. 평생을 성실(誠實)을 주로 하여 학문을 하였고, 일에 대처함도 확실하여 소홀하지 않았다. 기묘 제현이 배척되어 죽음을 당한 후에 공도 또한 파직되어, 여흥(驪興) 이호(梨湖)에 물러가 살았다. 정자 두어 칸을 지어 범사정(泛槎亭)이라 이름하고, 20년 동안을 가난하게 살면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하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를 가지고 의심되는 곳을 묻는 사람이 먼 곳에서 왔다. 무릇 여러 가지 노래와 시에, 경물(景物)을 보고 뜻을 붙인 것은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그리워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다.
만년에 조정에 돌아와서 드디어 대제학을 맡았는데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초안을 잡을 때에는 홀로 서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고서 정신을 모아 연구하고 생각하면서 여러 날을 신음한 다음에 탈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글은 전아(典雅)하고 명쾌하여 중국 조정에서도 칭찬하였다. 후일 그 임무를 이은 자들은 학력이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지성으로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어서, 막대한 천조(天朝 중국 조정)에 올릴 표문(表文)을 짓는 것도 평범한 일로 생각해 가볍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인재가 나날이 수준이 낮아지고 문장도 예전과 같지 못하다.
윤근수의 월정만필(月汀漫筆) : 퇴계는 벼슬하기 전에 서울을 오가는 길에 여강(驪江)의 범사정(泛槎亭)에 들러서 모재를 뵌 일이 있었다. 《퇴계집》 속에,
“모재를 뵈온 뒤부터 비로소 정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는 말이 있다. 여주의 산승(山僧)이 시축을 가지고 영남으로 퇴계를 찾아가 뵈었는데, 시축 속에 모재ㆍ기재(企齋) 두 노선생(老先生)의 절구가 있었다. 퇴계는 그 절구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두 노인 서거한 지 몇 해나 지났던고 / 二老仙遊知幾年
매화 피는 섣달에 중이 와서 나를 찾네 / 僧來見我臘梅天
예전에 찾아갔던 이 사람은 / 自嗟疇昔登門客
남긴 시에 눈물 뿌리며 백발을 슬퍼한다오 / 淚洒遺篇雪滿顚
2)남효온의 추강냉화(秋江冷話)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에, 우리 나라에서 붙잡혀 간 임산부가 있었는데, 문충공이 돌아오는 길에 비단을 주고 그 여자를 샀다. 배가 돌아오는 날, 큰 바람이 불어 돛대가 부러져 거의 건널 수가 없게 되자, 한 사공이 말하기를, “아이 밴 여인은 신룡(神龍)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니, 사공들이 다투어 그 여인을 잡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는 것을, 문충공은 자기 몸으로써 감싸며 말하기를, “고기 뱃속에 함께 장사지낸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 아니냐.” 하였다. 이윽고 건장한 청년이 돛대를 잡아매어 곧 배가 갈 수 있게 되었다.
경진년 북정(北征 세조 때에 북쪽의 여진족을 정벌한 일) 때에 문충공 신숙주가 상장(上將)이 되었는데, 하루는 막료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 때에 문충공은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여러 사람 가운데 시로써 오늘의 뜻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뽑아서 상객으로 대접할 것이다.” 하였더니, 별시위(別侍衛) 박위겸(朴撝謙)이 곧 읊기를,
10만 정병이 수루를 에워싸고 / 十萬貔貅擁戍樓
달 밝은 변경의 밤에 여우 갖옷이 싸늘하구나 / 夜深邊月冷狐裘
한 마디 긴 피리 소리 어디에서 들려오는고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시름을 불어서다하는구나 / 吹盡征夫万里愁
하였다. 문충공은 기뻐하여 그를 뽑아서 상객으로 삼았다. 박위겸은 이로 말미암아 이름난 시인이 되었다.
3)서거정의 필원잡기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