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시 모음
《1》
가을 기도
허영자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먼산에 타는 뜨거운 단풍
그렇게 눈멀어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2》
가을비 내리는 날
허영자
하늘이 이다지
서럽게 우는 날엔
들녘도 언덕도 울음 동무하여
어깨 추스리며 흐느끼고 있겠지
성근 잎새 벌레 먹어
차거이 젖는 옆에
익은 열매 두엇 그냥 남아서
작별의 인사말 늦추고 있겠지
지난 봄 지난여름
떠나버린 그이도
혼절하여 쓰러지는 꽃잎의 아픔
소스라쳐 헤아리며 헤아리겠지.
《3》
그대의 별이 되어
허영자
사랑은
눈멀고
귀 먹고
그래서 멍멍히 괴어 있는
물이 되는 일이다
물이 되어
그대의 그릇에
정갈히 담기는 일이다
사랑은
눈뜨이고
귀 열리고
그래서 총총히 빛나는
별이 되는 일이다
별이 되어
그대 밤하늘을
잠 안 자고 지키는 일이다
사랑은
꿈이다가 생시이다가
그 전부이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대의 한 부름을
고즈넉이 기다리는 일이다
《4》
꽃피는 날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魂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門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5》
나목에게
허영자
캄캄한 밤은
무섭지만
추운 겨울은
더 무섭지만
나무야 떨고 섰는
발가벗은 나무야
시련 끝에
기쁨이 오듯이
어둠이 가면
아침이 오고
겨울 끝자락에
봄이 기다린단다
이 단순한 순환이
가르치는 지혜로
눈물을 닦아라
떨고 섰는 나무야.
《6》
나팔꽃
허영자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7》
너무 가볍다
허영자
나 아기 적에
등에 업어 길러주신 어머니
이제는
내 등에 업히신 어머니
너무 조그맣다
너무 가볍다
《8》
떡살
허영자
고운 네 살결 위에
영혼 위에
이 신비한
사랑의 문양 찍고 싶다
'이것은 내 것이다'
땅속에 묻혀서도
썩지를 않을
저승에 가서도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표적을 해두고 싶다
《9》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