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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워싱턴 체제와 일본의 협조외교
1차대전 이후 외교체제(1920년대)
그때 세계는
1920년 : 국제연맹 성립
1921년 : 중국, 공산당 성립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 측의 승리로 끝나고 이듬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강화회의 결과, 패전국 오스트리아와 독일에게는 거의 지불이 불가능한 막대한 배상금이 결정되었고, 독일의 식민지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연합국들에게 분배되었다. 일본은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전 수상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전쟁 권익을 재확인 받았다. 일본은 산둥반도의 독일 권익을 계승하였고, 적도 이북의 독일령 남양군도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국제 평화 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이 1920년에 발족하였다.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국제연맹의 5대국의 하나로서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강화회의 결과,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력 균형을 꾀하는 이른바 베르사유 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파리강화회의 즈음하여 독일 이권의 중국 반환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미 영국 · 프랑스는 일본에 대한 지지를 밀약하고 있었고 베이징 정부도 산둥 처리에 동의를 한 상태였다. 강화회의의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격분한 중국국민은 1919년 5월 4일 산둥반도를 반환하라는 반일데모를 일으켰다. 강화회의의 중국 대표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인을 거부하였다. 5 · 4운동은 한국의 3 · 1운동에서 자극받은 바가 컸다.
파리강화회의를 통해 일본은 강대국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미국 · 영국을 위시한 구미 제국주의 국가 간의 알력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세계대전에 의해 전장화 되어버린 유럽제국은 커다란 타격을 받았지만, 일본과 미국은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미국은 영국에 대신하여 국제사회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미국은 1921년 태평양 질서의 재편과 중국 시장에 대한 열강들의 경쟁 제한을 목적으로 해군 군비 축소 회의를 워싱턴에서 소집하였다. 일본은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 해군대신을 전권대사로 파견하였다. 미국은 워싱턴 회의를 통하여 해군 건함 경쟁을 제한하여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 러시아 세력이 물러간 뒤 극동, 특히 중국을 둘러싸고 일본과 영미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와 함께 군비 확장 경쟁이 격화되면서 각국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었다.
워싱턴 회의에서는 먼저 미 · 영 · 프 · 이 · 일의 5대국 간 해군 군축조약이 맺어졌다. 주력함대 보유량 비율이 미국과 영국이 5, 일본이 3이라면,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1.6의 비율로 정해지고 10년 동안 전함 건조가 금지되었다. 일본 내에서는 반대가 강했지만, 가토가 해군의 반대를 누르고 조인을 단행하였다.
워싱턴 회의.
워싱턴 회의에서는 먼저 미 · 영 · 프 · 이 · 일의 5대국 간 해군 군축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새롭게 '4개국 조약'과 '9개국 조약'이 맺어졌다. 1921년 12월 체결된 4개국 조약은 일 · 미 · 영 · 프의 4개국 간에 태평양의 영토와 제도에 관한 현상 유지를 천명한 조약이었다. 그렇지만 그 핵심은 일본의 식민지적 권익을 보장하고 대서구관계의 기틀이 되어 왔던 영일동맹의 폐기 선언에 있었다. 이 4개국 조약으로 일본은 영일동맹의 폐기(1923.8)에 의해 야기되는 국제적 고립화를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워싱턴 회의에서는 4개국 외에 중국과 이탈리아 등의 5개국을 포함한 9개국 간 중국 문제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었다(1922.2). 중국의 주권 독립, 영토 보전의 존중과 함께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 기회균등의 일반적 원칙이 정해지고 새로운 특수 권익 설정의 금지가 정해졌다. 이에 따라 일본은 중국과의 교섭을 통해 산둥반도 권익을 반환하였고, 21개조 요구 중 일부도 철회하였다.
이상 워싱턴 회의에서 국제협정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는데, 태평양 ·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제반분쟁의 소지를 없애고 열국 간의 협조를 지향했다. 이 새로운 국제협조질서를 '워싱턴 체제'라 부른다. 이로써 일본의 중국 진출에는 미국을 위시한 국제적인 감시와 압력이라는 새로운 장벽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일본 군부와 같은 집단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견제 장치가 만들어졌다. 워싱턴 체제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일본의 외교방침을 보통 '협조외교'라고 부른다. 실상 일본의 중국에서의 특수권익과 독점적 지위는 부정되고 1차대전 후 일본이 챙겼던 산둥성의 이권도 중국에 반환되었다.
워싱턴 회의에서 협조외교는 지금까지 일본의 독자노선 정책이 일본의 이익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고 서양 열강에게 불신을 초래하고 중국에 반감을 산 것에 대한 반작용이란 측면이 있었다. 때문에 1920년대 일본은 중국문제에 대해서 불간섭주의, 특히 무력 간섭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군부를 비롯하여 협조외교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많은 일본인은 협조외교가 국제평화라고 하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환상 속에서 국가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연약외교라고 느끼며, 나아가 모욕적으로 여겼다. 더구나 중국이 북벌을 통해 새로운 국민혁명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자, 일본의 권익이 훼손되는 것에 대하여 우려했다. 하지만 1920년대 워싱턴체제하의 일본의 협조외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일본사회 전반적인 민주적 풍토의 확산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75.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배경
쌀소동과 사회운동(1918년 ~ 1922년)
그때 세계는
1922년 :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수립
1923년 : 중국, 제1차 국공협약
다이쇼 시대는 전쟁이전 일본에서 가장 민주적인 시대였다. 번벌전제체제에 대한 도전이 러일전쟁 이후부터 시작되어, 다이쇼 시대(1912~1926)가 되면서 정치적 민주화시대가 열렸다. 당시 일본은 헌법이 국회에서 개설되었지만, 정치는 여전히 사쓰마 조슈 출신으로 형성된 번벌세력에 의해 좌우되었고, 정당들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의회의 선거권은 재산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이러한 당시 사회의 전제성에 대하여 깊은 반기를 높이 든 운동이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일어나는 배경으로 1차대전 후 경제발전, 민본주의, 쌀소동,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1차 세계대전을 통한 일본자본주의의 급격한 번영에 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은 1915년 러시아를 비롯한 연합국에 군수품을 수출하게 되었고 전쟁으로 인한 아시아 · 아프리카 시장에서 유럽제국의 철수는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 · 아프리카대륙 시장에 대한 수출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생사(生絲)의 최대 시장인 미국이 군수산업의 급격한 팽창으로 호황이 일어나자, 일본은 생사를 중심으로 대미수출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요인으로 일본의 무역은 비약적인 팽창을 이룩하여, 주요 공업 부문 생산액은 대전 중 5년간 약 5배로 증가하고 무역액은 약 4배가 증가했다.
이러한 해외시장의 조건변화에 따라 각종기업이 신설되고 기업의 자본금은 놀랄 만큼 늘어났다. 1914년에 비해 1919년에는 회사불입총자본금이 약 3배, 공업자본금은 약 3.3배로 늘었고 자본금 500만 엔 이상의 회사가 62개에서 293개로, 공장수는 32,000개에서 44,000개로 증가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공업부문에서 급격히 신장을 하였고, 1917년에는 공업부문 생산액이 전생산액의 절반을 초과하면서 농업국에서 공업국이 되었다. 이에 노동자수가 1914년 853,964명에서 1919년에는 1,817,102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노동자들도 대규모 공장에 집중되어 1909년 100명 이상의 공장이 43.5%였는데, 1919년에는 55.6%로 증대되었다. 1차대전 중의 이러한 노동자수의 급격한 증가는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근대적 중산계층이 광범위하게 성립되어 시민사회가 성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도시지식인층의 확대에 따라 다양한 문화가 증대하자 저널리즘의 발전이 촉진되기도 하였다. 신문의 발행부수가 급증하고 잡지도 각각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으며 각종 서적도 출판되는 등 활자문화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도시중간층, 지식인을 중심으로 개인주의적 · 자유주의적 · 민주주의적 경향의 사상과 문화 · 정치적 조류가 계속 발전하였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민중의 복리와 여론의 제도적인 보장을 요구하는 민본주의를 주장하여 중산계층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는 주권의 소재가 군주제에 있든지 공화제에 있든지를 불문하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원리로서 민본주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는 천황이 아닌 국가자체에 주권이 있으며, 천황은 국가의 최고기관일 뿐이라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하여 정당내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민중의 여론에 의한 정치를 제창하여 의원내각제, 보통선거법의 실시, 특권세력의 견제를 통해 일본정치를 민주화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중앙공론잡지.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가 주로 실렸다.
1918년 일어난 쌀소동은 노동운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신호탄이 되었다. 쌀소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물가폭등, 특히 쌀값 폭등에 의한 생활고로 민중의 불만이 폭발되어 일어난 사건으로, 7월 22일부터 9월 12일까지 거의 두 달이나 지속되었다. 그런데 정부가 이를 방치한 채 1918년 8월 30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자, 민중의 봉기는 정부 반대투쟁으로 옮겨갔다. 많은 도시에서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력이 마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러 정부는 봉기진압을 위해 군대까지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가 출동한 지역이 107개의 시정촌(市町村)에 해당할 만큼 광범위하였다. 쌀소동에 참가한 계층 대부분은 노동자, 인부, 짐꾼, 실업자 등 무산대중(無産大衆)이었다.
쌀소동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 누적되어 온 생활고가 자연적으로 폭발되어 발생한 전국적 민중폭동으로서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쌀소동은 일본의 계급투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획기적 계기가 되었으며, 그 결과 피지배계층의 운동, 즉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하여 급진화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노동자의 집중이 현저히 진전되는 객관적 상황 속에서 전국적인 쌀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노동운동도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파업건수와 참가인원이 1916년의 108건, 8,413명에서 1917년에는 398건, 57,309명으로 격증하는데, 이러한 증가는 1920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은 당시 치안경찰법에 의하여 사실상 파업이 금지되어 있었고 파업이 엄격하게 탄압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증감세였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1912년 노동자의 친목단체로서 결성되었던 우애회가 1919년 8월, 우애회 제7주년대회에서 회명을 '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로 개칭하여 노동조합으로 전환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조직이 되었다. 우애회는 '생존의 권리, 단결의 권리, 동맹파업의 권리, 참정의 권리'라는 노동자의 4대권리를 법제화시키려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각지의 우애회 지부에서 연설회를 통해 보통선거, 치안경찰법 철폐, 노동조합 공인을 관철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쌀소동 이후 급격히 발전한 노동운동은 임금인상, 해고반대와 같은 경제적 요구뿐만 아니라 참정권, 노동3권 등을 획득하려 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러한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운동과 급속히 결합되어 갔다. 정부의 탄압으로 즉시 금지되었지만 노동조합, 학생단체, 사회단체 등을 대동단결시킨 일본사회주의동맹이 1920년 12월 결성되었다. 일본사회주의동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공공연히 결합하여 사회주의자가 사상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진출하려는 최초의 움직임이 표출된 것이다. 이어 1922년 7월에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지도원리로 하는 국제 공산당 일본지부인 일본공산당이 성립되었다.
다이쇼 시대는 1차대전이 끝나면서 공업국으로 급속히 발전하는 가운데 민본주의, 쌀소동,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이러한 다이쇼 시대에 일어난 다양한 사회운동은 당시 사회의 전제성을 비판하고 더욱 민중의 권리가 보장된 사회를 지향했다. 민중적 움직임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보통선거의 채택을 가능하게 한 배후가 되었다.
76. 정당정치의 전개
보통선거법의 채택(1920년 ~ 1925년)
그때 세계는
1925년 : 로카르노 조약 성립
1926년 : 중국, 국민혁명군의 북벌 개시(~1928년)
전국적인 쌀소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하면서 민중들의 대규모 저항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번벌 내각이 총사퇴했다. 이후 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으로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정우회 내각에 의해 정당내각이 수립되었다. 하라는 육 · 해군대신과 외무대신을 제외한 전 각료를 정당원으로 임명한 내각을 조직하였고, 이로써 본격적인 정당내각이 성립하였다. 하라 내각은 본격적인 정당정치의 효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지만, 많은 한계를 지녔다.
하라 내각은 당시의 국민적 요구였던 보통선거와 사회정책의 실시에는 냉담하였고, 선거법을 개정하여 직접국세 3 엔 이상의 납세자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는 선에서 그쳤다.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운동은 점차 높아지고 1920년에는 수만 명의 대시위행진이 벌어졌다. 정부는 보통선거는 시기상조라 하여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보통선거에 반대하는 정우회는 철도의 확충과 고등교육기관의 증설 등 적극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총선거에서 압승하였다. 그러나 이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과중한 증세와 거액의 공채를 발행하여 비난의 소리가 커지면서 하라 수상은 정당정치의 부패에 분노한 한 청년에 의해 1921년에 암살당하였다.
가토 타카아키.
이후 다카하시(高橋) 내각이 들어섰으나 단명으로 끝나고 2년간에 걸쳐 다시 비정당내각이 계속되었다. 1924년 귀족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기요우라 케이고(淸浦奎吾)가 귀족원 의원과 관료 중에서만 대신을 임명하는 비정당내각을 조직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정우회 · 헌정회 · 혁신구락부 등 3당은 연합하여 정당내각 수립을 목표로 하는 2차 호헌운동을 전개했고, 5월 중의원선거에서 압승하였다. 그 결과 헌정당 총재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를 수반으로 하는 호헌3파 내각이 수립되면서 정당내각이 관행화되었다.
정당내각은 선거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은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제까지 번벌에 의해 좌우된 정치에서 한층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룩했다. 또 1924년 호헌3파는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보통선거의 실시를 약속하면서, 결국 1925년 25세 이상 남성에게 재산에 상관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다. 보통선거법의 제정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주주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호헌3파 내각은 보통선거법과 동시에 치안유지법을 제정함으로써 사회운동을 제한했다. 전국적인 범위로 2개월에 걸쳐 일어난 쌀소동은 경찰과 군대가 동원될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노동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혁명세력과 결합하여 급진화되고 있었다. 지배세력은 이러한 인민의 폭발적인 사회운동에 무력함을 나타내었고, 사회운동이 공산주의와 같은 혁명사상 및 사회문제와 결합하여 정당의 지도를 벗어나 철저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배층 내부에는 위험사상 및 계급투쟁사상의 발전을 저지하기 위해서 보통선거를 시행하여 전제기구의 부분적 개량을 행해야 한다는 논리가 점점 일반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통선거를 채택하여 중산층 등 개량세력을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호헌3파 내각은 반체제운동을 보다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규제할 법적 조치로서 치안유지법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치안유지법은 기존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막는 입법이 더욱 강화된 형태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지향했던 언론, 집회, 결사(노동3권)의 자유는 거의 실현되지 못한 채 미완의 형태로 남았다. 집회, 결사의 자유를 막는 기존의 치안경찰법이 전면적으로 개정되지 않고 치안유지법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보통선거법은 기본적으로 민중의 폭발적인 사회운동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보통선거법은 국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주었으며 그동안 뿌리 깊던 번벌정치를 극복하고 정당정치를 실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77. 일본의 사회주의자들
생디칼리즘과 볼셰비즘(1910년 ~ 1922년)
그때 세계는
1927년 : 중국, 난징에 국민정부 수립
1928년 : 부전조약 체결
일본공산당원 산실인 도쿄 대학교.
당시 일본공산당은 비합법 지하조직이었는데, 당원 대부분이 도쿄대, 게이오대 등 엘리트 집단 출신이었다.
사회주의운동은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순수한 연구발표도 금지되었고 노동조합운동도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결과 '겨울의 시대(冬の時代)'가 계속되었고, 1917년을 경계로 새로운 국내외적 상황을 맞이하였다.
1차 대전 이후 일어난 사회의 변화는 정지되었던 사회주의운동을 재개시킬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활성화시킨 직접적 계기는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보도를 접한 도쿄의 사회주의자 약 30명은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축복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대표자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의 이름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의 사회당 기관지에 보냈다. 러시아 혁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으나, 혁명이란 사실 그 자체만으로 일본사회주의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와세다 대학의 사회주의단체 민인동맹회 회원이었던 다카츠 세이도의 회고에 의하면 "······아마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2년 뒤이겠지요. 노농(勞農) 러시아의 탄생과 존속이라는 사실이 대부분의 학생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센다이(仙台)의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청천벽력과 같이 러시아에 대혁명이 일어나서 순식간에 천하는 노동자의 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었기에 일시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이미 러시아에서는 참으로 그러한 천하가 나타났던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서 어린 자식들을 껴안고 이렇게 외쳤다.
내 아들아 걱정마라. 너희들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총리대신도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러시아 혁명은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희망을 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지식인, 급진적 노동자에게 사회주의를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국내외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 직접 투신하여 노동운동을 사회주의와 결합시키려 하였다. 그와 함께 마르크스주의에서 아나코 생디칼리즘(이하 생디칼리즘으로 칭함), 아나키즘, 길드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해외의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이 연구 · 소개되었다. 이러한 사상 가운데 아나코 생디칼리즘과 볼셰비즘이 큰 조류로서 형성되었으며, 당시 노동운동을 주도한 것은 생디칼리즘이었다.
생디칼리즘은 고토쿠 슈이이가 도입한 이후 사회주의 조류 가운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과 운동 경험을 가진 이론이었다. 명치시대 이래 계속된 생디칼리즘의 경험이 당시 노동운동가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익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더구나 생디칼리스트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榮)는 대역사건(大逆事件) 이후에도 원로사회주의자 중에서 일찌감치 불굴의 활동을 함에 따라 그 주변에 당시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와 지식인이 모이게 되었고 이것은 생디칼리즘이 노동운동의 지배적 이론으로 되는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20년 3월 전후공황이 일어난 후, 노동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대쟁의조차 탄압에 의해 실패로 끝나자 노동자들은 심각한 불안에 빠졌다. 노동자들은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기계를 파괴하고 공장건물을 부수는 등 절망적인 행동을 하였다. 기계파괴 등의 직접행동론을 주장하는 생디칼리즘은 이러한 노동자의 절망적인 상황과 부합되었다. 또한 사회주의단체와 노동단체 등이 결성한 사회주의동맹이 정부의 탄압으로 금지되고 보통선거법 채택을 위하여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 정치운동, 합법적인 운동은 필요없다는 인식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모든 정치운동을 부정하는 생디칼리즘이 발전하는 토양이 되었다.
따라서 생디칼리즘은 인쇄공 조합인 신우회(信友會), 정진회(正進會)의 지도이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동맹 우애회에도 침투하여 아소 히사시(麻生久), 다나하시 코토라(棚橋小虎) 등 관동의 지도적인 노동운동가도 생디칼리즘에 심취하였다. 1920~22년경에 걸쳐 생디칼리즘은 노동조합운동에 있어서 지배적 경향이 되었다.
이러한 생디칼리즘적인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을 격화시킨 측면이 있으나 노동조합을 효과적으로 유지시키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21년 1월 족립(足立)철공소 쟁의에서는 공장 안의 기계를 모두 파괴하고, 심지어 공장주에게 몰매를 가하기도 했다. 또 4월의 원지(園池) 제작소 쟁의에서는 노동자의 공장관리를 선언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장의 문에 적기를 세워 일순간 공장을 점거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 결과 도쿄 철공조합은 정부의 탄압으로 와해되었다. 이처럼 직접행동에 의한 노동운동은 투쟁에 있어서 규모나 기간, 그리고 격렬함은 한층 전진되었으나, 자본가 측과 경찰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어 조직이 비효율적으로 파괴됨에 따라 강력한 노동조직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노동운동이 생디칼리즘적인 경향을 띠면서 노동조합이 파괴되는 등 결함이 노출되자 당시 논단의 또 하나의 큰 주류였던 볼셰비즘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에 따라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은 《사회주의연구》, 《신사회》 등의 잡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소개하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 《사회주의연구》에서는 1920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러시아 공산당의 형성과정, 볼셰비키의 발생 등 소비에트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등 볼셰비즘에 대한 이해가 크게 진전되었다. 일본의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과 그것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주의에 큰 관심을 보냈다. 그러나 아직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를 초보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였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이룩한 볼셰비키가 완전무결한 지도자의 이미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그 이론도 막연하게 완전한 이론으로 여겼다.
아소 히사시의 경우 레닌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볼셰비즘으로 경도되고 있었고 앞에서 언급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일본사회주의자들의 충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실제의 내용과 무관하게 이념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확신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당시 생디칼리즘과 겨루어 비판하는 유력한 도구였으며 새로운 노동운동의 지도원리로서 많은 노동자, 지식인의 관심을 끌었고 실제로 그들에게 수용되었다. 그 결과 ML회(사카이 토시히코 중심), 수요회(야마카와 히토시 중심), 효민회(高津正道, 다카츠 세도 등), 무산계급사(市川正一, 이치카와 쇼이치 등), 오사카(大阪) LL회(鍋山貞親, 나베야마 사다치카 등) 등 공산주의 그룹이 형성되었으며 총동맹내에도 노사카 산조(野坂參三), 야마모토 겐조 등이 공산주의 그룹을 형성하고, 신인회 건설자동맹에도 공산주의 그룹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1차대전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초기 사회주의에 비해 노동운동 속에 혁명사상을 실천하려 했지만 이러한 일본적인 특수성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까지 진전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단지 당시 일본 현실에 생디칼리즘과 볼셰비즘 중 어느 것이 유효한가라는 논의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이론이 그대로 노동현장에 도입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혁명운동은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남긴 채 막 태동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78. 대중문화의 탄생
중간계층의 성장과 소비문화(1912년 ~ 1931년)
그때 세계는
1929년 : 한국, 광주학생운동 · 원산총파업 일어남
1932년 : 윤봉길, 홍구공원 폭탄 투척
1920년대 일본은 산업화가 진전되고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도시화가 급진전되었다. 1920년에 도시에 사는 인구가 1,000만 명에 달하였고 1932년 도쿄는 근교지역을 합병하여 인구 500만 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오사카는 1903년 인구가 100만 명을 밑돌았으나 1925년에는 21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는 대기업이 다수 증가하여 대기업에 종사하는 중간계층(화이트칼라, 샐러리맨)이 꾸준히 증가하여 하나의 사회계층이 되었다. 이들 중간계층은 소비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대중사회로 진입했다. 이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만큼 교양에 대한 욕구가 강해 당시 신문이나 잡지, 서적의 대량소비를 뒷받침하였다. 중간계층이 증가하면서 전업주부도 탄생하였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는 취업하지 않고 가사에만 전념하는 전업주부가 증가하였다. 전업주부는 공무원이나 교원, 은행원 같은 중간계층에서 많았으며, 노동자계급 중에서도 일부 여유 있는 층에서 증가하였다.
신문의 발행부수가 급증하고 잡지의 경우 지식인, 부인 등 각각 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1920년대 중반에 1일 발행부수가 100만 부 달하는 신문도 등장했다. 도시중간계층은 신문의 열렬한 구독자로서 여론을 형성했다. 다이쇼기에 들어서는 다이쇼 천황의 즉위 소식, 쇼와 천황의 결혼식 같은 황실을 둘러싼 사건도 대중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신문의 발행부수를 늘릴 수 있었다.
출판활동이 보다 본격화되어 출판물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졌다. 각 출판사에서는 독자들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기획활동과 적극적인 마케팅활동을 전개하였다. 주간지와 《중앙공론(中央公論)》, 《개조(改造)》를 비롯한 종합잡지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26년 문학전집 등을 한 권에 1엔으로 파는 엔폰(円本)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가 등장하여 저가 · 대량출판의 선구가 되었다. 강담사(講談社)는 1920년대 출판활동을 주도하여 오락잡지를 비롯 부인잡지, 소년소녀잡지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잡지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강담사는 잡지 《킹》을 창간하고 백만잡지를 목표로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창간호에는 74만 부, 2년째는 150만 부를 판매하여 대량의 발행부수를 기록했고, 이 시기를 대표하는 국민잡지가 되었다.
1925년에는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어 청취자가 26년에는 20만 명이나 되었다. 라디오는 전파를 통해 산간벽지에도 동시간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격차를 축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람의 음성을 통해 청취자의 감성에 직접 호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디어로서 이용자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었다. 1928년부터 일본씨름인 스모가 실황으로 방송되는 등 라디오방송을 청취하는 인구가 급증하자, 정부는 라디오방송을 통제하였다. 방송의 내용을 사전에 검열하였고, 허가하지 않은 방송은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영화도 관객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외국을 인식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레코드가 대량으로 팔리기 시작했으며, 이와 동시에 가요곡이 전국으로 유행되어 갔다. 1927년에 제작된 레코드 '하부노미나토(波浮の港)'는 10만 장을 돌파했고 1931년에 팔린 레코드는 1,600만 장이 넘었다.
하부노미나토(波浮の港)
도시화가 급진전되면 주택지역은 도시 근교까지 확대되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서 통근용 전차와 노선버스가 발달하였다. 서구화된 주택, 소위 문화주택이 보급되어 중간계층의 인기를 얻었다. 예를 들면 1925년 오사카시에서 분양한 문화주택은 15년 동안의 분할상환조건이었는데, 32: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 인기였고 신청자 70% 이상이 중간계층(샐러리맨)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소비의 중심으로서 백화점이 미스코시 백화점을 필두로 설립되어 도시민의 생활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근대적인 소비공간인 백화점은 소비욕망을 일깨우고 유행을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화점은 염가판매, 상품권 발행, 셔틀버스 운영, 무료배달 등 다양한 영업전략을 구사하여 중간계층을 필두로 폭넓은 계층을 포섭할 수 있었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도심의 번화가가 형성되면서 이곳을 산책하는 사람들이 출현하였다. 양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약칭으로 '모보', '모가라'는 유행어도 등장하였다. 남성은 양복에 모자와 지팡이, 여성은 짧은 커트의 파마머리에 화려한 양장을 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을 몸에 걸치고 서양음식과 서양음악, 영화를 즐겼다.
79. 위기와 일본국가주의의 대두
경제대공황시기(1929년 ~ 1930년)
그때 세계는
1933년 : 미국, 뉴딜정책; 독일, 나치스 정권 수립
1934년 : 중국공산당 대장정(~1936년)
전쟁의 역사로 치닫는 암울한 시기는, 1929년 미국의 윌 스트리트에서 불어온 대공황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공황은 전 세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일본의 피해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컸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0여 년간 한 번도 호황이 없었다. 게다가 대공황이 일어나기 2년 전에는 금융 공황까지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경제 재건을 위해 철저한 긴축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그 여파로 일본의 거의 모든 산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세계 대공황의 쓰나미(津波)가 일본에 몰아닥친 것이다.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 1920년대는 일본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시기였다. 1928년 처음으로 25세 이상 남자라면 누구나 참여하는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대공황 당시 일본 정부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다수당에 의해 내각을 결성했다. 이제 일본도 본격적인 정당 정부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본의 민주화는 막 첫발을 뗀 상태였다. 그래서 대공황의 거대한 위기 앞에서 정당 정부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정부는 대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만으로 급한 불을 끄려는 식의 미봉책을 취했다. 게다가 여전히 자본가와 대기업에 특혜를 주고 정치 자금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숙한 정당 정부는 대공황의 파산위기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인간은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그대로는 살 수 없다. 어떤 희망, 거짓일지라도 희망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이때 일본의 국가주의가 가공 희망을 앞세워 위기의 토양에 급속히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희망이란 건 바로 전쟁이었다. 국가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증폭하고 진실을 호도하여 전쟁을 옹호했다. 그들의 시도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공황의 위기에서 본격화된 국가주의는 태평양전쟁까지 하나의 연결체로서 결합되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학계의 천황'이라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권위를 얻은 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패전 직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과거 서양의 생활양식을 재빨리 흡수하고 서구의 전통에 밝았던 지식인들조차도 그토록 파멸적인 전쟁 속으로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갔을까? 아니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일본 국가주의가 가장 전면에 내세우는 상징과 명분은 천황이었다. 그들은 이를 '국체'라 표현했다. 즉 '신성불가침한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국'이었다. 국체, 즉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국가는 1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절대적인 권위 그 자체였다. 일본에서는 국체를 넘어서는 다른 어떤 종교적 · 도덕적 가치도 없었다. 국체는 위기에 선 일본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익청년에 의해 저격당한 하마구치 수상.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은 "정치가, 자본가, 대지주 등 지배 계급이 자기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국가적 위기가 왔다"고 비난했다. 대표적인 국가주의 사상가 기타 이키(北一輝)는 고도로 집권화된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하며, 전체가 하나로 되는 사회, 즉 계급 갈등이 없고 천황의 직접 지배 아래 아시아의 7억 형제들을 서양 열강의 식민지 굴레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통일된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국가주의는 국민들에게 천황에 대한 감수성을 불러일으키며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동조자를 찾아 모았다. 특히 국가주의 사상은 총력전을 위해 새로운 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믿고 있던 장교들 속으로 강력하게 파고들었다.
국가주의자들은 폭력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1930년 11월 광신적인 우익 청년은 런던 해군군축조약에 항의하여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총리를 저격했다. 1931년 3월과 10월에는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었다. 즉 일부 장교들이 정당 정부를 몰아내고 군부 정권을 수립하려는 쿠데타였다.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닥치면서 일본사회는 합법적인 틀 안에서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채, 폭력행동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외국 기자는 당시의 일본 정치를 '암살에 의한 정치'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80. 천황의 이름으로 열어젖힌 전쟁
전쟁의 서막, 만주사변(1931년)
그때 세계는
1935년 :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침입
1935년 : 독일, 반유태인법 공포
일본 열도에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국체를 앞세운 국가주의가 횡행한 가운데,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만주에 파견된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이 봉천 교외의 유조구에서 만철 노선을 폭파하고, 이것을 중국군의 공격이라 주장하며 개전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상부의 어떠한 지시도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는데, 이후 도쿄의 육군 참모총장과 내각에 사후 인정을 요청했다.
일개 장교가 상부의 명령 없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하극상이다. 물을 것도 없이 군법에 따라 총살감이다. 그런데 일본 관동군은 본국의 육군 참모총장은 물론 현지 파견군 사령관 및 참모장군 등 상부의 어떤 지시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관동군의 이 무모함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당시 봉천(奉天) 영사관의 외교관 모리시마 모리도(森島守人)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모리시마는 당시 본국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만주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관동군 참모장교였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대좌를 영사관으로 불러서 설득했다. 그러자 이타가키 대위는 "벌써 통수권자가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데, 총영사관이 통수권을 무시할 생각인가?"라고 반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동석한 더 젊은 장교 하야 다타시(花谷正) 소위는 칼을 빼들고, "통수권에 간섭하는 자는 누구든지 용서할 수 없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하급 장교들이 상관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이를 설득하는 중앙 정부 관료를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쿠데타로 정부를 장악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거침없는 행동의 배후에는 그들이 말한 '통수권'이 있었다. 통수권은 무엇인가? 제국 헌법은 육해군의 통수, 선전 강화, 조약 체결 등 주요 사항을 천황의 대권으로 규정했다. 천황의 통수권을 앞세우면 의회나 행정부의 간섭 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관동군 장교는 이러한 천황의 통수권을 말한다. '통수권자, 즉 천황이 결정했는데, 너희 외교관 따위가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고 있다. 까불지 마라'는 식의 논리였다. 물론 만주사변은 통수권자 천황이 관동군에게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관동군 장교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일본의 국가주의자는 자신들을, 메이지 유신을 이룩해낸 과격파 지사들을 계승한 최후의 사무라이로 자처했다. 국가주의자들은 일본이 다시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위협받고 있으니,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일찍이 막부의 전제로부터 메이지 천황을 구했던 것처럼 무능한 민간 지배자들로부터 쇼와 천황을 구해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전쟁이라 생각했다. 천황의 직접 지배 아래 아시아의 7억 형제들이 서양 식민지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통일 사회를 꿈꾸었다. 국가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동군 장교들 또한 같은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각 신문은 열렬히 환영했다. 관동군의 행동에 대해 '신속한 조치를 취해 주어 마음속 가득 찬 사의를 표명한다'라고 대서특필했으며, '긴급조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봉천성을 점령하고 우리 군이 당당하게 입성', '찬연하게 빛나는 우리 군의 위용'이라고 일본군의 용맹에 찬사를 보내고, 반면 '포악한 악귀인 중국 패주병' 등으로 중국에 대해서는 극악한 기사를 실었다. 만주사변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정부가 강경조치를 취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일방적 보도로 인해 만주사변은 '만주와 몽골이라는 생명선이 중국에 의해 공격당함으로써 일어난 정당방위'라는 그릇된 인식을 국민에게 심어 주었다.
국민은 관동군의 거사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특히 만주로 파견되는 부대를 열광적으로 환송했다. 예를 들어 홍전(弘前) 제8사단 혼성여단이 출정하는 1931년 11월 15일 아침, 부대가 통과하는 사나가와(品川) 역에는 2만 명을 훨씬 넘는 인파가 모여들어 정작 가족은 면회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11월 26일에는 한 역에 수만의 전송 인파가 쇄도하여 부상한 자가 십여 명에 달한다고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 이후 국민의 열기는 더 뜨거워져 출정할 수 없음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
만주사변 이후 국민의 주요 관심사가 악화된 생활 문제에서 만주의 전황으로 단번에 전환되었다. 국민은 천황을 앞세운 국가주의에 급속도로 빨려들었다. 애국 단체, 국가사회주의 정당, 국수주의 집단 등이 떼 지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산된 경제 속에서 생기와 희망을 잃어버린 일본 국민은 침략 전쟁을 통해 실의를 해소하며 전쟁에 열광했다. 전쟁의 광기는 대대적인 천황 숭배라는 국민적 일체감 속에서 이루어졌다.
정당 정부는 이 사건을 저지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열광 앞에서 군인들을 누를 만한 기백도 자신도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 정당 정부는 만주 파견군이 벌여 놓은 사태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더 강력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간 우익과 청년 장교들이 손을 잡고 국가를 개조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1932년에 혈맹단이라는 엄청난 존재가 드러났다. 이들은 민간 정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내세우기 위해 정 · 재계의 고위층을 차례로 제거할 목표를 정했다.
그들은 이노우에 준노스케(井上準之助) 전 대장대신을 권총으로 사살하고 이어 미쓰이 합병회사 단 다쿠마(團琢磨) 이사장을 사살했다. 또한 5월 15일에는 청년 해군 장교들이 수상 관저를 습격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을 암살했다. 이것을 5 · 15 사건이라 한다. 해군 장교들은 시국을 혼란에 빠뜨려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 내각을 만들어 군국주의 체제를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국가개조의 쿠데타 사건(1932. 5. 15 사건).
5 · 15 사건을 겪으면서 원로, 중신, 정당 지도자, 재벌 등 이른바 일본의 지배층은 자신이 암살당할 수 있다는 절박한 두려움에 떨었다. 비록 5 · 15 사건의 주도자들은 체포되었지만, 이 사건은 정당 정부 지도자들의 권위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5 · 15 사건 이후 전전긍긍하던 정당 정부는 마침내 막을 내리고, 군부가 정치 전면에 대두하게 된다.
국민의 정당 정부에 대한 불만, 전쟁에 대한 지지 열기 속에서 민간 우익과 청년 장교가 앞장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정당 정치는 막을 내리고, 일본은 경제 · 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 전쟁 체제로 돌입하여 만주 점령은 부동의 국책이 되었다. 많은 민간 지도자들도 범람하는 전쟁의 열기 속으로 슬쩍 한몫 끼면서 자신을 시대의 흐름에 적응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