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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을학기 준비특강 (눅20강)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
말씀/눅12:35-48
요절/눅12: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가리켜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고, 대신할 사람이 없고 혼자 가는 길이고, 언제 벌어질지 모르지만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라 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이 언젠가는 분명 다시 오십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마지막과 주님의 재림을 알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가을학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종말론적 삶이 어떤 것인지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말씀하십니다. 통으로 짠 긴 옷을 입었던 유대인들에게 허리에 띠를 띠라고 하는 것은 일할 준비를 갖추라는 의미였습니다. 방에 들어가고 잠자리에 들 때는 허리띠를 풉니다. 외출할 때나 기동성 있게 움직이려 할 때는 허리에 띠를 띱니다. 또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것은 주변을 밝히고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는 말씀은 주님이 언제 오실지라도 항상 깨어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있어야 합니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 정도로 해야 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당시 관습에 따르면 혼인 피로연은 보통 일주일 동안 열렸고 밤중에 혹은 새벽에 끝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혼인 축하 자리에 참석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종들에게는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전화나 카톡이 있어 연락을 직방 주면 좋은데 당시에는 통신수단이 전무했습니다. 종들은 혼인잔칫집에 간 주인을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종들은 하루종일 일했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몹시 피곤해집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도착하는 새벽 한두 시까지 깨어있는 종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실한 종은 이렇게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립니다. 언제 주인이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돌아오신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주인이 새벽녘에 돌아오는데 종들이 등불을 들고 “주인마님, 잘 다녀오셨습니까?”라고 마중하면 주인이 기뻐 오히려 종들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이고, 아직까지도 자지 않고 깨어 있었네. 기특하기도 해라!” 혼인잔칫집에서 싸가지고 온 음식을 펼쳐 정성껏 대접해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주인은 많지 않습니다. 또 종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어찌 보면 종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축복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리는 종들은 복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단순히 종으로서만이 아니라 귀한 자녀로 영접해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또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과 대접은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깨어있는 삶을 살아온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그의 영혼에 항상 말씀의 등불, 성령의 등불이 켜있어 어둠을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등불, 성령의 등불이 켜있지 않으면 죄 가운데 잠들게 되고 세상 유혹의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안일함과 세상의 만연한 죄악에 굴복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영혼들을 향한 관심이 멀어질 때, 성경을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의 등불은 빛을 밝힐 수 없게 됩니다. 종말을 향해 살아가는 우리가 늘 영적으로 깨어있어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말씀과 성령의 등불을 켜서 어둔 세상을 밝히 비추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기다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39,40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아는 바니 줍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도둑같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오는 것과 도둑이 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둘 다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오고 빠른 시간에 모든 상황들이 종료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40)” 말씀하십니다. 핵심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때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보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
넓게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시작된 시점이 있었고 마칠 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이 모든 우주의 역사도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좁게 생각해보면 나 한 사람의 인생도 시작된 시점이 있었고 마칠 시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그 시점에 도달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건강나이로도 알 수 없고 정신연령이나 행복 지수로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이고 대재벌 총수여도 인간의 평균수명도 채 못 살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인생 마치는 순간이 개인적으로 내가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시점이며 그 시점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말씀을 듣고 좀 속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 한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무리들이 몰려드는 시점이고 소유와 고향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대가에 대한 보상과 영광을 얻을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제자로서 성공하고 영광을 취할 날이 다가오는데 그날을 맞이하고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깨어있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영 못마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는 이 말씀을 우리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인지 모든 무리에게 하시는 것인지 물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현재 인생이 잘 풀리고 여유롭고 영광스럽고 잘 되고 있으면 종말에 대해 생각하기 싫을 수 있습니다. 지금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말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그 순간이 나의 상황과 상관없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오기 때문입니다. 어제 죽은 사람이 어제가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7장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인생은 결혼식장에서보다 장례식장에서 많이 배운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는 태도는 무기력하거나 염세적인 삶으로 우리를 몰아갈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지 않습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는 오히려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만들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종말 또한 팔팔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지금,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영광의 때인 것처럼 생각되는 지금, 준비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3-15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 상, 복을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계시록 2장 10절은 약속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히브리서 11장 6절도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이 주실 상을 기대하면서 간절함과 사모함으로 깨어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종말을 깨어 준비하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4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한마디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영어로 ‘manager’입니다. 관리자, 집사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아니지만 주인의 것을 도맡아 주인의식을 가지고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청지기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스리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잘 경영하고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첫 사람을 지으시고 그를 에덴동산에 두시고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돌보며 관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청지기적 삶에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변했지만 청지기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주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위임받습니다. 내 것처럼 쓰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과 영혼이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기 것인 줄 착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목숨조차도 그의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목숨도 내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내 재산, 내 사회적 위치, 내 능력과 은사 모두 다 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낳았다고 하는 자녀들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사는 날 동안 일정 기간 위임 받은 것이고 내 것처럼 사용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잘 사용해야 하고 잘 관리하고 잘 경영해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열매를 원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기에 세상에 대한 탐욕, 독점욕, 지배욕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무상한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이 내면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찬 것은 그들이 얼마나 주인처럼 횡포를 부린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다만 위임받은 세상과 공동체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주인의식은 위임받은 것들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게 만들고 세상과 공동체의 주변인으로 살지 않고 주체자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청지기인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비유에서 주인은 청지기에게 종들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도록 했습니다. 주인이 주인의 소유인 종들을 청지기에게 맡겼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소유들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사는 지구입니다. 지구촌에서 살면서 우리는 잘 관리하고 경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연 만물에 대해 우리는 청지기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섬겨야 할 이웃들,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양무리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말씀을 가르쳐서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잘 섬겨서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족을 맡기셨습니다. 가정을 맡기셨고 자녀들을 맡기셨습니다. 또 직장과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속한 공동체마다 섬겨야 할 양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신실하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섬김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각종 능력과 은사와 직분, 사회적 지위를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은사를 불일듯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맡기신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런 경영을 청지기인 우리에게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삶은 멀리 있거나 다른 사람의 삶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상황, 지금 여기서 내게 부여되고 위탁받은 일들에 대해 청지기적 자세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과 일들에 대해 어떤 자세가 특히 요구될까요? 지혜와 진실입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성경 원어로 보면 진실이 먼저 나옵니다. 진실하고 지혜 있는 청지기입니다. 여기 ‘진실’은 ‘충성’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충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는 신실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충성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하십니다. 모세처럼 충성스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충성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초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을 때 가지셨던 마음이 지금까지 같으십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향해 충성스럽다면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충성스러워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요?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은 전근대적이고 전쟁이나 군대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스승과 제자 간에도, 상사와 부하 직원 간에도, 하나님과 우리 신자들 사이에도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끈이 바로 서로를 향한 충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위임하신 일들, 하나님이 맡기신 양들에 대해 바로 이 같은 충성심을 가지고 섬기고 돌봐야 합니다.
다음은 지혜입니다. 충성스러운 것은 좋지만 무지한 충성은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충성스럽되 지혜로워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등극하면서 부와 명예보다도 백성을 올바로 판결하여 섬길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는 그 위에 진정한 왕이 계시고 자신은 청지기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했습니다. 나의 무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놀라운 지혜를 주십니다. 그때 주님이 주시는 지혜는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한 ‘신의 한수’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관리하고 맡은 일을 감당할 때 또 맡겨주신 공동체의 영혼들을 섬기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 같은 하늘의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43,44절을 읽겠습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은 우리의 충성심을 보시고 큰 복을 내려주십니다. 당신의 모든 소유를 다 맡겨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깊은 신뢰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회사에서 사장이 나에게 상으로 내려주는 금일봉보다 사장이 나를 신뢰한다는 것, 그것 자체가 그 어떤 상보다 더 큰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충성스럽고 지혜롭게 섬기는 우리에게 더 많은 역량을 주시고 더 많은 영역과 더 많은 사람들을 맡겨주셔서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최고로 실현하는 삶이 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단지 품삯 좀 올려주고 보너스를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주인의 곳간 열쇠까지 맡기고 집 전체의 경영을 맡깁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에게 때를 따라 영육 간에 섬기는 삶이 결코 고생이나 희생만이 아니고 오히려 큰 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알고 우리가 맡겨진 영역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맡겨 주신 영혼들을 충성스럽고 지혜로 섬기는 삶, 그래서 주님께 인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청지기만 있지는 않습니다. 못된 청지기도 많습니다. 45-48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는 청지기가 있습니다. 그는 주인을 대리한 권세만 누렸지 책임은 다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을 맡겼으면 더 많은 책임의식을 가지고 일해야 하는데 단물만 쏙 빼먹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가 처음부터 주인에 대한 경외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청지기 시늉을 한 것이지 청지기로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목자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지도자라는 타이틀에서 오는 권력만을 행사하며 사람 위에 군림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이 우리 신자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면서 또는 더디 오기를 바라면서 세상의 죄악 됨을 즐기며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생각하지 못한 날에 다시 오시든지 아니면 우리를 생각하지 못한 날에 주님 앞으로 불러 가시든지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불충한 종들을 엄히 때리고(cut him in pieces)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받는 벌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주님이 언제 오시든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은사나 직분을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이고 많이 맡겨주신 사람에게 많이 달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이 많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에게 있는 생명, 젊음, 물질, 시간, 재능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많은 성경 지식도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많이 받은 자임을 인식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특히 맡겨진 공동체 속에서 양 떼들을 섬기는데 책임감 있게 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이 다 듣도록 오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42)?” 과연 우리는 청지기라는 자기 인식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삶을 경영하고 있습니까? 맡겨 주신 양 떼들을 잘 섬기고 있습니까? 재물과 성공을 좇아가는 이 시대에 좀 더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들에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직하게 양 떼들을 감당하며 생명의 양식을 먹이는 영혼의 청지기로 우리를 부르셨음을 깊이 영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 마지막까지 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청지기 사명을 충성과 지혜로 섬기므로 주님께 칭찬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