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명사, 명사, 동사 순으로 외 2
하갑문
밥상에 가끔 올라오는 하얀 살코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삼겹살 토시살 부챗살 치마살 볼기살 갈매기살
부위별 고기 이름을 퍼즐 맞추듯 떠올려 보아도
가물거리며 잡히지 않는 한 단어
검색의 바퀴는 헛돌고
고기 맛은 뒷전이고
정육점의 붉은 등만 깜빡인다
이 고기 이름은? 하고 물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데
스스로 찾아보려는
감추고 싶은 자존심
한나절이 지나서야 시치미를 뚝 떼고 불쑥 나타난다
그 이름, 항정살!
인정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면서 확인된 것은
이미 명사의 단계로 진화한 금이 간 내 기억력
※ 시작 메모
요즘 기억력이 예전과 달리 깜빡깜빡하고 헷갈린다
아직은 하고 방심하는 사이 안개 서리듯 이미 나를 흠뻑 적시고 있다
동창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얼굴이 둥글고 눈이 큰 그 친구’ 하고
고유명사, 명사, 동사 순으로 까먹는다는 기억의 순서
나도 어느 사이 명사의 단계에 접어들어 푸념을 해본다
겨울 매미소리
여름 내내 지천으로 울어대던 왕매미
일제히 울음이 뚝 끊기고
매운바람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데
어서 길을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숨 가쁜 구급차의 그 왕매미 소리에
줄지은 차선이 꿈틀거린다
한여름을 짓누르던 그 매미 소리는
높은 가지 위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시한부 삶의 기척을 미리 본
마음이 바쁜 매미의 절박함이었을까
왜애앵 왜애앵 우는
왕매미의 비상 소리에 가슴을 조이는
겨울 거리가 잠시 흔들린다
※ 시작 메모
코로나19 시절 빈번하던 구급차 소리가 펜데믹을 지나 뜸하더니 겨울 탓인지 반갑지 않은 불안한 소리가 자주 들린다
지난여름 극성을 부리며 귓가를 때리던 그 왕매미 소리를 닮았다 어쩌면 생명의 다급함을 알리는 절실함에 유사함이 있을 것도 같다
지붕 위에 올라간 박꽃
걸음을 떼기 시작한 푸른 떡잎이
헌 빗자루 사다리 삼아 지붕에 오른다
하늘에 정원이 있다는 걸 알았을까
푸른 마디 손으로 사다리 앙증맞게 잡고
하늘에 떠도는 순한 영혼을 불러 앉히고
도톰한 푸른 잎 하얀 박꽃 사이
엄마 아빠 양손에 잡은
파르스름한 애박의 중립
같지는 않지만 다르지도 않다는
여리고 당찬 배려의 마음
속마음 드러내지 않으면서
담담히 제 표정을 밝히는
초가지붕 위에 두둥실 뜨는 보름달
※ 시작 메모
작고 하얀 박꽃은 소담하고 애처롭다.
높은 지붕을 타고 오르는 식물의 지상성指上性 또는 지광성指光性의 의지 때문일까
앙칼지게 붙잡은 악력이 보통이 아니다
그 작은 꽃이 잉태하여 둥글게 크게 키우는 박꽃의 마음은 모든 어머니의 마음
하얀 꽃과 푸른 잎의 두 인자를 반씩 고루 섞은 아기 박의 파르스름한 표정은 중립의 진심을 드러낸 배려가 아닐까
―《心象》 202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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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갑문 |경남 고성 출생, 2014년 《문학나무》 시 부문 등단,
시집 『텅비었니 가득찼니』.
첫댓글 세 편의 시에 대한 각각의 <시작 메모>가 시 해설을 대신하네요.
하갑문 샘, 좋은 시 계속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