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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얻을 자
마 19:23-30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23-30 /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24)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25)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세상에서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27) [백 배의 상;막10"28-31,눅18:28-30]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고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재산을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고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30)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다.
부자 청년과의 문답이 제자들에게 큰 반항을 일으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재물과 믿음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부가시키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23-24)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진 것이 많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낙타의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재물과 탐욕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얼마나 큰 장애물이 되는지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3절에 의하면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많은 부자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에 의존하는 정도가 큽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25-26) 이렇게 제자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유대의 지혜사상에 의하면 재물과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가난과 빈곤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합니다(욥 5:17).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가난은 불편함 이전에 부끄러움과 멸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다보면 자신도 어느 때인가는 귀해지고 부자가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에 부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깊은 동정심과 사랑이 충만한 눈빛으로 제자들을 보시며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격려하시며 믿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이 불가능한 부자들 조차도 천국 시민으로 인도하십니다(마 9:9-13; 눅 19:1-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27-30)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는데 무엇으로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약속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까지 상속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반드시 영육 간에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적 용 :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재물에 대하여 어떤 마음과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현세에서의 약속과 미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일랜드 해협을 항해하는데,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다 ‘이 배가 어떻게 항구까지 무사히 닿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선장에게 물어보니 선장은 앞에 보이는 세 개의 등대를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등대들이 우리의 지표지요. 저것들이 일직선상에 놓여 마치 하나의 등대처럼 보이면 우리는 항구에 가까이 온 것입니다.” 우리 삶의 항해에서 이런 지표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둘째는 우리의 양심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긴 우리의 환경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 세 가지 것을 합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인생 등대가 일직선상에 놓이기까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 설 교 >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능력
우리는 한 주간동안 날마다 태풍의 피해소식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이번 태풍의 이름은 매미인데, 순 우리말로, 여름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를 뜻하고, 북한에서 제출한 이름이랍니다. 1999년까지는 괌에 있는 미국 태풍경보센터가 태풍에 이름을 부여했으나, 미국식 이름만 쓸 게 아니라 태풍위원회 회원국 고유 언어로 각각 이름을 제출해서 돌아가며 쓰자고 하여, 1999년 에는 14개국에서 열개씩 제출해서 140개의 태풍이름을 결정했답니다. 한국은 개미, 나리, 장미, 수달, 노루, 제비, 너구리, 고니, 메기, 나비 등 10개를 제출했고, 북한은 기러기, 도라지, 갈매기, 매미, 메아리, 소나무, 버들, 봉선화, 민들레, 날개 등 10개를 내서, 태풍 이름 중 한글이 14%를 넘는다고 합니다. 태풍이 연간 약 30여 개쯤 발생하므로, 이름이 전부 사용되려면 약 4∼5년이 걸린답니다.
태풍이란, 북태평양에서 발생하는, 중심권 내의 최대풍속이 17m/sec 이상인 열대성 저기압을 말합니다. 열대성 저기압은 발생 지역에 따라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북태평양 남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은 태풍으로 부르고 있으며, 북대서양 카리브해에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은 허리케인(hurricane),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것은 사이클론(cyclone), 호주에서는 윌리윌리(willy-willy)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가 태풍에 대하여 유난히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태풍의 엄청난 위력에 의한 자연 재해 때문입니다. 중심최대 풍 속이 초속 44m이상인 A급 태풍의 경우, 그 위력은 2차대전 중 일본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 탄 1만개의 위력과 맞먹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최근에 발명된 수소폭탄은 원자폭탄의 1,000배 이상의 힘을 가진다고 하는데, 태풍은 그 수소폭탄 100개 이상의 위력을 가진 셈입니다.
풍속이 초속 50m가 넘으면 거리의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날아가고 철제 송전탑이 엿가락처럼 휘는 엄청난 위력이랍니다. 그런데 이번 ’매미’는 12일 북제주군 기상대의 풍속계에 초속 60.0m를 기록해서, 지난 2000년 8월31일에 태풍 ‘프라피룬’이 흑산도에서 기록한 초속 58.3m를 뛰어넘었습니다. ’매미’의 기록은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최대순간풍속 이었습니다. 태풍의 위력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수치는 중심기압인데, 중심의 기압이 낮을수록 바람의 세기가 강해지는데, 매미가 12일 밤 경남 사천시에서 기록한 최저 중심기압은 950헥토파스칼로, 1959년 사라가 세웠던 기록인, 951.5 헥토파스칼을 능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태풍은, 일본 오키나와 해상까지 진출하면 세력이 약해지는 게 보통이고, 내륙에 상륙하면 거의 소멸되는 것이 보통인데, 매미는 한반도에 접근할 때까지 세력을 유지했고, 더구나 내륙에 상륙해서도 힘을 잃지 않고 오히려 파괴력이 강해졌습니다. 이것 역시 이례적인 일이랍니다. 매미는 내륙에서도 초속 40m 이상의 강한 바람을 유지했습니다.
이번 매미의 피해는 대단했습니다. 인명피해는 사망 107, 실종 23 명 등 130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재민은 4,751세대 12,091명으로 집계가 되었고, 재산피해는 4조 7천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전국에서 주택 등 건물 2천461채가 파손되고, 6천294채가 침수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 하루 동안 지나간 태풍인데, 왜 이렇게 피해가 컸을까요?
태풍 자체야 불가항력적인 자연현상이라 하더라도, 단 하루 동안의 비와 바람으로 이렇게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은, 우리의 재난대처 시스템에 큰 맹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보다 정부당국이 다가오는 태풍의 위력과 이에 대한 국민행동 지침을 적시에 알렸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만이라도 제때에 이루어졌다면 피해의 상당 부분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산항 부두시설과, 항만에 정박한 선박도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또 조선소에 묶여있던 대형 시추설비가 밧줄이 끊어져 인도를 며칠 앞둔 다른 선박을 들이받은 사고까지 일어났습니다. 이런 피해들도 사전경고만으로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경남 마산시의 한 지하층에서는, 밀어닥친 해일로 10여명이 사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시 당국이 태풍의 위력을 감안해 해일이 일어날 수 있고, 그러면 지하실에 물이 밀려든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줬더라면 이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에 피해를 본 지역이 이번에 다시 똑같은 태풍피해를 본 지역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피해가 없게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가림으로 이전과 비슷하게 꾸며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해마다 재난이 겹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자연재해에 대한 경각심 부족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입니다. 강풍을 동반한 태풍이 닥쳐온다는데 승용차를 몰고 태연하게 귀경길에 나선 사람들이 있고, 저지대 아파트 주민들이 아무 의심도 없이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았다가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자연재해에 대한 경계심 해이 라고 밖에 설명할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재난에 대하여 아무런 대비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다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어떠했는지 아십니까? 일본에도 매미가 지나갔습니다. 일본의 남단에 있는 미야코지마 라는 섬에는 9월11일 오전 순간최대풍속이 74미터나 되는 바람이 불어닥쳤습니다. 거기에도 공항이 있는데 공항 관제탑의 창이 다 박살나서 내부의 관제 기계들이 다 부서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섬을 비롯한 일본 전체에서 사망자 단 3 명밖에 없었습니다. 태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철저하게 대비하고 대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가 됩니다. 일본은 같은 태풍을 맞고도 멀쩡한데 우리는 왜 이렇게 피해가 심각할까요?
최근 홍콩에도 두견이라는 A 급 태풍 때문에 초비상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두견은 초속 51미터의 강풍을 동반했습니다. 두견은 홍콩에 오기 전에 대만에서 2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홍콩을 지나서 광동과 심천을 관통하면서는 20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조밀한 도시인 홍콩에서는 단 한명도 피해가 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홍콩의 경우, 태풍이 오면, 시그널 1-10 까지 등급을 정해 시민들의 행동지침을 하달하고, 국민들은 철저하게 따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이번 두견이 왔을 때 시그널 8의 경보를 내렸답니다. 시그널 8의 경보를 내리면, 직장 근무자도 즉시 귀가해야 하고, 식당도 문을 닫고, 학교는 물론 휴교를 하고, 밖에 내놓았던 입간판은 모두 안으로 들여놓고, 주식시장도 휴장하고, 창문은 꼭꼭 걸어 잠그고, 유리창은 파손에 대비해 테이프로 미리 막아두고, 자동차는 버스, 자가용까지 운행이 금지되고, 시민들은 외출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부가 지도하고, 국민들은 그대로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에 강한 태풍이 강타해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부가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 재난을 대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태풍이 온다고, 방송국의 일기예보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은 없고 그냥, 철저히 대비하여야 한다는 원론적인 보도만 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일체의 행동지침이나 명령이 없었습니다. 마산에서는 해일이 밀어닥쳐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다 죽었지만 그 흔한 사이렌 경보하나 없었답니다. 과연 우리나라에 정부가 있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
그리고 국민도 문제입니다. 혹시 정부가 준비에 필요한 명령을 내렸다 해도 우리 국민들은 정부의 말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왜 이모양일까요?
정부는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사회의 기본질서유지와 국민보호라는 가장 기본적인 직무는 소홀히 하면서, 자기들 자리만 지키고 있습니다. 질서를 지키도록 하려면 법과 원칙이 시행되어야 하는데, 법과 원칙은 조용하고 말 잘 듣는 사람들에게나 강요할 뿐이지 집단으로 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양보만 합니다. 국민들이 그런 정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설령 무슨 명령을 한다 해도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파출소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불을 지르고, 군수를 구타하는 이 나라는, 정부가 있다고 할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인 정부의 무책임과, 국민의 대비태만이 이런 큰 재난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입니다. 1000톤이나 나가는 대형 철제크레인을 부러뜨리는 초속 50미터 이상의 바람을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자연 앞에도 맞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별의 별 자신감을 보여도, 자연 앞에서도 꼼짝 못하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실체를 파악하는 기회가 되어야 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합시다.
사람에게 맞닥뜨리는 한계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죽음입니다. 태풍은 가끔 다가오고, 예보도 가능하며, 준비만 잘하면 덜 피해볼 수도 있습니다. 태풍은 바람이 지나가는 지역만 강타합니다. 그래서 태풍이 지나가지 않은 서울지역은 이렇게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예보도 할 수 없으며, 피하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인간 모두에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궁극적인 한계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어떤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아십니까?
행 17: 26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지으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1953년도에 제주도에서 태어나 지금 이 흑석동에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나이는 50세 입니다. 그 사람의 경우, 50년 전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2003년 오늘이란 시간을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50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몇 살에 세상을 떠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사람을 낳은 부모도 모르고 자신도 모르고 부인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시간만큼 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만약, 2023년에 죽는다면 70년 이라는 시간을 할당받은 셈입니다. 거기서 하루도 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시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배당된 시간의 한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의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공간의 한계입니다. 그 사람은 제주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이 고향이라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고향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서울의 흑석동에서 산다면, 반포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방에 있다면 거실에는 없습니다. 단 1 미터 정도의 적은 공간 안에서만 그는 존재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디서 죽게 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죽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한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의 한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공간 속에서만 살다가 갔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제각기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를 지어 온 지구상에 흩어져 살게 하셨고, 그들의 연대를 한정하셨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해 놓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렇듯, 나약한 존재입니다. 사람에게는 이것 외에도 무수한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의 한계, 지혜의 한계, 방법의 한계, 체력의 한계, 기억력의 한계 등 헤아릴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한계가 너무 많아서 눌리고 갇히고 묶여서 몸부림쳐 그것을 벗어나 보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다가 안 되니까, 좌절도 하고 누구는 자살도 하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수 없이 만나는 인간의 한계와 그것을 극복한 비결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해방을 주려 하셨지만, 애굽 왕 바로는 완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열 가지의 재앙을 애굽 땅에 내려서 바로를 굴복시키고 그들에게 해방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방을 얻었습니다. 출애굽한지 사흘 만에 홍해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하여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 마다 그들 앞에 길을 내셨습니다. 광야생활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 주시고,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어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40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남았고 드디어 가나안땅이 건너다보입니다. 그런데 요단강이 마지막 길을 막습니다. 요단강 역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습니다. 강물이 위에서 갑자기 멈춰 서서 건너게 해주었습니다.
강은 그렇게 건넜지만, 여리고성은 매우 견고했고 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주민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주어 도망치게 하셔서 승리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걸음걸음마다 장애물이 가득했고 그들의 한계는 도처에서 드러났지만 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한계를 넘게 해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했고, 오늘 그들이 거기에 사는 것이 그 사실의 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인간의 한계를 때마다 만나게 하시는 것은 인간을 절망케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나약하고 수많은 한계 속에 있지만, 너희들을 만드시고 불러내신 너희의 하나님은 강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는 주인이시니, 하나님을 붙잡아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는 신호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니라” 고 약속하신 뜻이 이것입니다.
행17:27에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그 이유는 하나님은 혹 더듬어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 고 명백히 그 의도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때마다 만나는 한계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수한 한계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누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한계를 느끼십니까? 무엇 때문에 힘드시고 무엇 때문에 포기해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돈 문제입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자녀문제로 한계를 절감하십니까?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문제 중에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한계는 역시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요, 우리들을 위해 부활과 영생을 준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모든 한계는 하나님께로 가는 기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와서 진지하게 질문하기를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해내지 못합니다. 사람자체가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악한 일은 잘하지만, 선한 일은 마음만 먹을 뿐이지 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똑같아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멧도 자신을 구원하지도 못했고 남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입니다.
그런데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인간의 구원의 길이심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께서만 인간의 구주시며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 공로가 구원의 공로요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의 궁극적 한계는 예수님을 의지할 때에만 극복됩니다. 그리고 평상시에 만나는 일반적인 한계도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한계에 부딪치나, 하나님은 수시로 길을 여십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세계선교, 새 성전건축, 모두가 힘든 일입니다. 땅값 비싼 서울에서 돈 많지 않은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손을 내밀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우리에게 한계를 경험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을 혹 더듬어 발견케 하려 하심인데, 그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 우리의 내민 손을 붙잡아주려고 가까이 계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가까이 계실 때는 우리가 한계를 만났을 때입니다. 한계를 만나서 절망하지 말고, 우리를 도우려고 가까이 다가와 계신 하나님을 붙잡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한계 때문에 신음하는 존재들입니다. 서로 동정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가득합니다. 우리 자신을 알고 겸손해 집시다.
우리도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수재를 만난 분들을 힘껏 도웁시다.
인간의 한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의 인간을 구원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기회는 도리어 구원의 하나님을 붙잡고 구원받는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힘든 기회에 하나님을 더듬어 붙잡는 기회가 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겸손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