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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운성지(新雲城誌)
(운봉읍․동면․아영면․산내면)
1997
신운성지편찬위원회
일러두기
1. 운성(雲城)이란 과거 운봉현(雲峰縣)의 옛지명으로 행정구역상 현재의 운봉읍․동면․아영면․산내면을 포함하였다. 따라서「신운성지(新雲城誌)」는 과거 4개읍․면의 역사를 총망라하였다.
2. 원래「신운성지(新雲城誌)」는 구성면에서「남원지(南原誌)」의 형식을 따라 구성되었으나 사법․정치․산업을 행정면에, 문학․국악을 문화면에 묶고, 마을유래와 전설․민속편을 따로 수록하는 등 발간 과정에서 다소 다르게 편집되었다.
3. 순 우리말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 ) 속에 한자를 표기 하였다.
4. 본지는 집필위원이 분야별로 분담집필하였으나 편집시 필요에 따라 원고의 본질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때로는 부분적으로 가감첨삭을 하였으며,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수록하였다.
5. 도(圖)와 표(表)는 남원시 공보실과 4개읍․면사무소에서 수집한 최근 자료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6.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는 지명과 유래는 현지 답사를 통하여 고증하고자 노력하였으며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지도에 표기하였다.
7. 본지 구성은「남원지」를 기준으로 하였으며 더러는 참고 문헌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8. 연대 표기는 서기로 하되 묘호(廟號)를 먼저 쓰고 ( ) 안에 서기 연대를 표기하였다.
9. 유적․건물 등은 <문화재>, <행정> 등에서 따로 정리하였으나 필요에 따라 더러는 <마을유래>에 중복 기술하였다.
10. 인물은 문헌에 수록된 경우를 원칙으로 <근대이전>란에 정리하였으며, 그외는 편찬위원회의 조사자료에 의하여 시대에 관계없이 접수순에 따라 <현대>란에 정리하였다. 또한 <행정>란의 역대 기관장과 중복된 경우는 제외하였으며, 증빙 자료의 제시에 한하였다.
신운성지 편찬위원(가나다순)
위 원 장 : 오 재 철
위 원 : 김 경 석 김 기 청 김 현 규 김 재 덕 김 종 원
김 종 인 박 규 진 박 진 기 배 분 남 배 종 수
서 동 규 서 양 호 서 정 구 신 홍 수 양 덕 봉
오 정 민 유 정 열 윤 건 태 윤 영 준 이 병 희
이 세 환 이 인 호 이 장 원 임 명 택 하 창 용
신운성지 집필위원 (무순)
위 원 장 : 김 점 동
편 집 : 이 남 일
운성연대표
제1장 역사 (이남일)
1. 개관
2. 선사시대
3. 삼한시대
4. 삼국시대
가. 지리적 상황
나. 백제와 신라의 국경분쟁
다. 산성축조
라. 행정명칭
5. 고려시대
가. 행정
나. 군사제도
다. 운수제도
라. 원제도
마. 공부제도
바. 황산대첩
6. 조선시대
가. 행정의 변천
나. 운봉현 관아
다. 운봉의 임진왜란
라. 병자호란과 운봉
마. 무신란 : 이인좌의 난
바. 운봉과 병인양요
사. 운봉의 동학혁명
7. 근대이후
가. 행정의 변천
나. 근대 이후 운봉인의 의병활동
다. 운봉의 항일활동
8. 6․25 동란과 운봉
9. 현대
제2장 지리 (고 기 만)
1. 위치
가. 수리적 위치
나. 지리적 위치
다. 관계적 위치
2. 면적
3. 인구
가. 인구 분포
나. 인구 구조
다. 인구의 이동 및 추이
4. 지 형
가. 지형 구분
나. 운봉분지
다. 동면․아영분지
라. 산내면(만수천 유역분지)
5. 산
6. 고개
7. 토양
8. 하천
9. 저수지
제3장 행정 (이 남 일)
1. 행정
가. 변천사
나. 역대 운봉현감 명단
다. 4개읍면 실태
2. 사법
가. 변천사
나. 조선시대 지방의 사법기관
다. 과거의 형법
2. 정치
가. 8․15 광복 직후의 정치 상황
나. 운봉의 정치인
3. 산업
가. 농업
나. 임업
다. 상공업
제4장 마을유래 (이 남 일)
1. 지리산 자락의 운봉현
가. 지리산의 연혁
나. 마을 풍수
다. 교량
라. 마을별 산이름
마. 마을별 고개
바. 지역별 저수지
사. 지역별 하천
아. 마을별 바위
2. 마을 현황
가. 개관
나. 마을이름 유래
다. 마을별 별칭
3. 마을유래
가. 운봉읍
나. 동면
다. 아영면
라. 산내면
제5장 교육 (이 남 일)
1. 운봉향교의 설립
2. 운봉의 교육기관
가. 운봉 향교
나. 사우
다. 서당
라. 학교
마. 유치원 및 학원
제 6장 문화
1. 판소리 동편제의 본고장 운봉(이 용 수)
가. 판소리 동편제
나. 동편제 소리 계보
다. 운봉을 찾았던 명창들과 이에 얽힌 이야기들
라. 운봉 소리의 맥을 잇는 사람들
마.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 형성의 필요성
2. 흥부전(이 남 일 )
3. 문학(배 봉 기)
가. 조선시대 운봉 4개읍․면의 저술과 문헌
나. 운봉 출신 문학계 인사
4. 운봉의 전통축제 (이남일)
가. 황산대첩제
나. 판소리 동편제
다. 흥부제
라. 바래봉철쭉제
마. 운봉향교의 석전대제
바. 지리산 고로쇠 약수제
사. 인월제
아. 봉화산철쭉제
자. 운봉4개읍․면의 날
차. 지리산 뱀사골 단풍제
제7장 종교 (이 정 덕)
1. 개관
2. 불교
3. 기독교
4. 원불교
5. 천주교
가. 가신신앙
나. 무속신앙
다. 공동체신앙
제8장 문화재 (이남일)
1. 운봉 4개읍․면의 문화재 개관
2. 유적
가. 고인돌
나. 유물산포지
다. 고분
3. 산성 및 봉수
가. 산성
나. 봉수
4. 도요지
5. 장승
6. 비
가. 사적비
나. 정려비
다. 일반비
7. 불상과 석탑
8. 전적지
9. 절터
10. 정자
11. 석대
12. 당산
13. 단유
14 제각
15. 경치
16. 지정문화재
가. 실상사 문화재
나. 황산대첩비지
제9장 민속(이 정 덕)
1. 개관
2. 1970년대의 마을생활
3. 1990년대 후반의 마을생활
가. 마을생활
나. 가족생활
다. 문중
라. 일상의례
마. 세시풍속
바. 물질문화
사. 여가생활
4. 특산품
가. 목기
나. 흑돼지
다. 안개꽃
라. 고로쇠
5. 관광산업
가. 흥부민속촌
나. 지리산 여름 국악무대
다. 바래봉철쭉제
라. 뱀사골
마. 뱀사골단풍제
바. 정령치활공장
사. 국립운봉목장
아. 동면중군리 관광농원
자. 민박
제10장 전설(이 남일)
1. 여원치 산신각
2. 구렁이의 보복
3. 자연동 생불
4. 팔량재와 가마봉
5. 쟁기소
6. 반야봉과 실상사
7. 정령치의 유래
8. 산신바위
9. 아기바위
10. 지리산 산신과 노구할머니
11. 지리산 가사어
12. 공안리와 와우혈
13. 상사바위
14. 지리산 정기로 된 주지암
15. 용복계곡의 만장굴
16. 배암사가 와전된 뱀사골
17. 윤흥태수와 거문고
18. 도적을 쫓는 효자정문
19. 호국의 상징 실상사 종
20. 고남산의 제단
21. 베틀바위와 백중놀이
22. 유서깊은 달궁
23. 남악 산신제
24. 운봉의 줄싸움
25. 부연과 민씨의 절개
26. 명석치에 얽힌 유래
27. 개구리혈
28. 황산석정과 당월리 장사
29. 봉낙골집 며느리
30. 도깨비혈
31. 연동마을과 노승
32. 말무덤이 있는 장승백이
33. 변사정과 흥부전
34. 여원재에 얽힌 전설
35. 남바우
36. 운봉과 흥부전
제11장 인물(이 남일)
1. 입향조
가. 운성의 정착조
나. 마을별 정착조
2. 창의
가. 임진창의
나. 병자창의
다. 병인창의
라. 무신창의
마. 항일지사
3. 효자
가. 1758년 이전 효자
나. 1758년~1922년 효자
다. 1922년 이후 문헌에 기록된 효자
4. 효열
5. 과거
6. 음사
7. 진휼
8. 국악인
9. 문학
<부록>
참고자료
신운성지 발간 후원자 명단
운봉향교 향안 명단
<편집> (이 남일)
<운성 연대표>
시 대
왕 조
연 대
내 용
마 한
효왕 30년
BC 84
마한이 달궁에 별궁을 두고 정장군과 황장군으로 지키게 함.
학왕 6년
BC 13
달궁의 별궁 타지로 이동.
삼 국
백제 초고왕 23년
188년 2월
백제가 계림(신라)의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함.
백제 동성왕 6년
484년 2월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계림을 백제가 모산성 아래에서 구원함.
백제 무왕 3년
602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였으나 대패.
백제 무왕 17년
616년 10월
백제가 군사 8천으로 신라 모산성을 공격.
백제 무왕 25년, 신라 진평왕 46년
625
백제가 신라 속함(함양) 등 6개 성을 함락.
백제 의자왕 20년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에 백제 멸망.
남북국
신라 경덕왕 16년
757
모산현을 운봉현으로 개칭.
흥덕왕 3년
828
실상사 창건.
고 려
태조 1년
918
태조 왕건 고려를 창건.
태조 23년
940
천령군(함양)에 속하던 운봉현이 남원부(남원소경 개칭)에 예속.
우왕 6년
1380년 9월
이성계 장군 황산에서 왜구 섬멸(황산대첩).
공양왕 3년
1391
운봉현에 감무를 설치하고 아용곡권농병마사를 겸임함.
조 선
태조 1년
1392
태조 이성계 조선 개국.
태종 10년
1410
운봉향교가 창건.
단종 2년
1454
운봉현(운봉․아영․동면․산내) 인구수 551명.
선조 8년
1575
성산으로 이건한 운봉향교를 당월리로 이건.
선조 10년
1577
운봉 현감 화수산에 황산대첩비 건립.
선조 25년
1592. 4. 15.
임진왜란 발발.
선조 25년
1592. 9.
의병장 조경남이 팔랑치에서 왜군을 격퇴하였다.
선조 25년
1592. 11
조방장 이복남과 운봉현감 남간이 팔량치 성을 개축하여 지킴.
선조 26년
1593. 8. 22.
명나라 장수 유정이 운봉 여원치에 자신의 행각을 바위에 새김.
선조 30년
1597. 8. 16.
함양의 가등청정 군대가 운봉으로 진입하여 남원에 진군. 남원성 왜군에게 함락.
선조 33년
1600
운봉현 폐현. 남원부에 병합.
광해군 1
1611
운봉현 다시 복현.
인조 13년
1635
정몽주를 운봉의 용암서원에 배향.
인조 18년
1640
운봉향교 현 산덕리 600번지 이건.
조 선
효종 6년
1655
운봉 현감 신헌주 서천리에 근민당 중건.
현종 8년
1667. 10
운봉 현감 허제가 황산대첩비각을 건립.
숙종 34년
1708
남원좌영 운봉으로 이동.
영조 4년
1728
운봉 좌영장 손명대 좌영군과 의병과 합세하여 함양의 무신란 반군 진압.
영조 34년
1758
운성지 창간.
정조 18년
1794
운봉읍 산덕리에 덕림서원 설립.
고종 31년
1894. 9. 17.
박봉양의 운봉 민보군이 방아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격퇴.
고종 31년
1894. 11. 14.
관음치 전투에서 운봉 민보군에게 동학군 대패.
고종 32년
1895
운봉현 운봉군으로 승격되어 운봉․아영․동면․산내 4개면을 관할.
순종 1년
1907. 8. 23.
운봉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만성학교 설립.
순종 1년
1907
남원분서 운봉순사주재소 설치.
현 대
일제 침략
하 한국
1911. 6. 26.
서천리 옛 장청 자리에 운봉우편소 설립.
1914. 3. 1.
운봉군을 운봉면으로 하여 남원군에 편입. 운봉면사무소는 옛 근민당을 사용.
1914. 5
산내면 백일리에 남원경찰서 경찰관 주재소 설치.
1917
운봉면 북천리에 운봉금융조합 설치.
1921. 9. 15.
아영보통학교 설립(아영초등학교 전신).
1922. 3
운성지 중집 발간.
1922. 9. 1.
사립 산내학교 설립(산내초등학교 전신).
1922. 10. 6.
인월보통학교 설립.
1923. 3. 26.
아영면 갈계리에 아영경찰관 주재소 설치.
1927. 7.
아영면사무소 갈계리에 준공.
1929. 3. 20.
동면사무소 인월리에 준공.
1930. 5. 5.
동면지서 인월리에 준공.
1934. 3. 31
산내보통학교 산내간이학교(덕동국민학교) 설립.
1944. 9.
일본 경찰 운봉 황산대첩비 파괴.
정부수립 전
1947. 4. 1
운봉 국립종축장 설립.
대한민국
1948. 10. 19.
지리산 전적기념관 개관.
1957. 10
운봉 황산대첩비 복구.
1950. 5. 24.
아영 봉대국민학교 설립.
1951. 9. 1
운봉국민학교 운성 분교(운성국교) 설립.
1951. 11. 10.
운봉중학교 개교.
1952. 4. 3.
인월공립기술학교(인월중학교 전신) 설립.
1952. 4. 9.
전라공업기술학교(산내중학교 전신) 설립.
현 대
대한민국
1956. 8. 23.
아영국민학교 일대분교(일대초등학교 전신) 설립.
1957. 11.
운봉면사무소 건물 신축 이전(서천리 233-4).
1960. 7. 29.
5대 국회 을구 윤정구 당선.
1963. 4. 1.
인월국민학교 지산분교(지산국민학교) 설립.
1966. 11. 15.
운봉국민학교 고남분교(고남국민학교) 설립.
1968. 4. 1.
운봉중대 창설.
1969. 10. 18.
운봉축산고등학교 개교.
1969. 10. 29.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지정. 운봉과 산내 일부지역이 공원권에 편입.
1971. 4. 10.
아영중학교 개교.
1971. 6. 19.
운봉국립 종축장에 호주산 면양 1050두 들여옴.
1991.
운봉면사무소 신축 이전(서천리 347-5).
1994. 1
국립종축원 남원지원이 국립 축산기술연구소 남원지소로 개칭.
1995. 1. 27.
운봉지서가 운봉파출소로 개칭.
1995. 3. 2.
운봉읍 승격.
제1장 역사
1. 개관
과거 운봉현은 지금의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을 포함하였다. 이는 지리적으로 같은 지리산 서북권지역에 속하는 고원지대이며, 남원지역의 하천이 섬진강 수계(水系)인 것과는 달리 이곳 운봉현은 동일한 낙동강 수계이다. 그래서 운봉 4개 읍면의 역사와 생활모습 또한 자연적으로 같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운봉의 역사는 4개 읍면의 역사를 통틀어 함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운봉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지역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 영토에 속하였는데, 한때 백제 영토에 속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무왕 17년(616) 신라 모산성(운봉성)을 공격하고 무왕 25년(625) 10월에는 신라의 속함(함양) 등 6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의자왕 2년(642)에는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성을 빼앗고 마침내 대야주(경주)를 점령하여 신라를 낙동강 쪽으로 밀어붙이기도 하였다. 즉 운봉은 616년 이후부터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약 44년 동안 백제 영역이었던 셈이다. 이는 운봉고원의 서쪽 분지벽을 경계로 남원지역의 백제와 운봉지역인 신라의 접경지대로 국경분쟁이 잦아 국가간의 영역 변화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본래 운봉은 신라시대 이후 무산현(毋山縣), 아영성, 아막성 , 경덕 등으로 불리어 왔다. 운봉(雲峰)으로 개칭된 것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으로 당시 천령군(함양군)에 속하였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남원부에 예속되었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는 감무를 두었다가 후에 현감으로 바뀌었다. 조선조 숙종 34년(1708)에는 남원 좌영이 이곳으로 옮겨와 운봉은 무향(武鄕)의 고을로 발전하여 왔다. 이어 고종 33년(1896) 운봉현이 운봉군으로 승격된 뒤 20년 동안 지속되어 오다가 1914년 행정개편 폐합에 따라 운봉면으로 분리되어 남원군에 속하게 되었다. 그 후 81년 뒤 시군통합 시행에 따라 1995년 3월 2일 운봉면이 운봉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운봉의 명칭을 살펴보면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호(古號)만 하여도 6~7개가 된다. 즉 무산현(毋山縣)․모산현(母山縣)․아영성(阿英城)․아막성(阿莫城)․운성(雲城)․운막(雲莫)․운봉(雲峰)․경덕(景德) 등이다. 운봉현의 고호(古號)가 문헌에 따라 무산(毋山) 또는 모산(母山)으로 간혹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도 한다.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산현(毋山縣)’으로 정조 2년(1778)에 간행된 ‘동사강목’에는 ‘모산현(母山縣)’으로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사가(史家)들의 혼동에 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무산(毋山)이란 높은 산이 우거져 무성함을 말
<그림 1-1> 운봉과 남원지역의 분수계
하고, 아막(阿莫)과 아영(阿英) 역시 높은 언덕이 우거져 무성함을 의미하며 운봉(雲峰)은 산에 구름이 걸릴 정도의 높은 산간 지대, 운성(雲城)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는 수비산성을 의미한다. 운막(雲莫) 역시 높은 지대에 숲이 우거져 무성한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운봉
의 명칭은 경덕(景德)을 제외하고는 옛부터 한결 같이 숲이 무성한 고원(高原) 지대임을 명시하고 있다. 경덕이란 고원지대의 빼어난 경관을 의미하거나 신라 경덕왕을 기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모산(母山)’이나 ‘아막’이 고어로 하늘을 뜻하는 ‘아마’나 ‘어미’에 어원을 두고 표기되었다고도 하였다.
이제 <남원지>와 기타 문헌을 토대로해서 운성(운봉)지역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선사시대
지리산 서북권 지역인 운봉 고원에 인간이 맨 처음 거주한 때를 정확히 밝힐 만한 자료는 충분치 않다. 1960년대 이 후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의 존재가 정설이 되고 있으나 남원지역은 신석기 유물 조차 발견되고 있지 않다. 다만 현재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 시대 이후의 유적을 통하여 비로소 남원지역에 최초 인간의 거주 흔적이 추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운봉 고원에 산재한 지석묘와 유물․고분 등을 통하여 거주 시기와 규모 그리고 분포 지역 등을 추측할 뿐이다. 실제 운봉 고원에는 청동기 시대 이후의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지석묘(고인돌 - dolmen)가 아영면 일대에 발견되고 있으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쳐 사용된 무덤형태로 축조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다. 먼저 운봉 4개 읍면 지역의 지석묘 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아영면 갈계마을에 7기, 봉대마을에 1기, 고인마을에 4기로 현재 발견되어 고증된 총 12기가 모두 아영면에 분포하고 있으며 축조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표 1-1> 고인돌 분포 현황
번 호
유 적 명
수 량
유 적 소 재 지
지역구분
1
갈계마을 고인돌(A)
5
갈계리 갈계마을
아 영 면
2
갈계마을 고인돌(B)
2
갈계리 갈계마을
3
봉대마을 고인돌
1
봉대리 봉대마을
4
고인마을 고인돌
4
청계리 고인마을
선사시대의 무덤인 고인돌은 하부에 석실이 있는 청동기시대의 것과 토광이 있는 철기시대의 것이 있다. <그림 1-2>을 보면 지리산 서북권 지역의 고인돌(지석묘) 분포는 아영면을 흐르는 풍천 지류에 국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조 연대는 전북대학교 박물관팀이 1987년 조사한 남원지방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무덤 하부에 석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 시대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운봉 지역의 지석묘 분포의 특징은 아영면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다.
<표 1-2> 유 물 산 포 지 분포 현황
번 호
유 적 명
출토유물
유 적 소 재 지
지역구분
1
점 촌 유 물 산 포 지
무문토기
매요리 점촌 마을
운 봉 읍
2
신 기 리 유 물 산 포 지
삼국시대토기
신 기 리
3
밤 골 유 물 산 포지
가야계토기
의지리 밤골 마을
아 영 면
4
서 정 이 유 물 산 포지
가야계토기
의지리 서정이 마을
5
봉 대 유 물 산 포 지
가야계토기
봉 대 리
6
아곡리 유물 산포지
삼국시대토기
아 곡 리
7
달 궁 유 물 산 포 지
삼국시대토기
덕동리 달궁 마을
산 내 면
유물산포지의 분포를 보면 고인돌의 분포와 같이 주로 아영면에 위치하며 운봉면의 2 곳도 인접한 곳이다. 이곳에 사람의 거주 시기는 산포지에서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가야계 토기가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곳 모두가 지형적으로 하천을 끼고 있는 평지에 위치하고 역사적으로도 고인돌의 분포와 유사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산내면 달궁 유물산포지 역시 달궁 전설과 함께 <용성지,조선 숙종 28년(1702)>과 <여지도서,영조 41년(1765)>의 문헌에서 기록되는 곳이다.
고분의 분포는 고인돌이나 유물산포지의 분포가 아영면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아영을 중심으로 운봉과 동면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그 위치 또한 지형적으로 하천에 인접한 평지보다 지대가 비교적 높은 구릉지에 분포하고 있다. 이는 고분의 축조 장소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주지의 영역이 아영면을 중심으로 점차 넓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가야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도 이를 짐작케 한다.
결론적으로 현재 발견된 지석묘와 유물산포지 등이 주로 아영면에 집중 분포되고 있으며, 아영면과 동면에 분포하는 고분에서는 주로 삼한시대 가야계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삼국시대 고분이 점차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아영면 일대가 운봉 고원의 최초 거주지 였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기마을 북쪽 유물 산포지에서 청동기시대와 동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무문토기가 발견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해당 유적과 유물이 미발굴되었거나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청동기시대 이 후 유물산포지와 삼한시대 고분 분포가 아영면 지석묘 분포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이곳은 청동기시대부터 인간이 거주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주민의 규모는 지석묘의 일반적인 크기를 10톤으로 볼 때 1톤을 운반하는데 성인 10~15명의 인
<표 1-3> 고분 분포 현황
번 호
유 적 명
유 적 소 재 지
축조시기
지역구분
1
신기리 고분군
신기리
삼국시대
운봉읍
2
매요리 고분군
매요리
삼국시대
3
임리 고분군
임리
삼국시대
4
비전 고분군
화수리 비전마을
?
5
권포리 고분군
권포리 권포마을
가야시대
6
연동 고분군
장교리 연동마을
?
7
백장 고분
대정리 백장마을
백제시대
산내면
8
두락리 및 유곡리 고분군
두락리와 동면 유곡리
삼국시대
아영면
9
월산리 고분군
월산리
가야시대
10
부동마을 고분군
일대리 부동마을
가야시대
11
성내 고분
두락리 성내마을
삼국시대
12
청계리 고분군
청계리 청계마을
?
13
외건 고분군
건지리 외건마을
가야시대
동면
14
내건 고분군
건지리 내건마을
가야시대
15
자래리 고분군
자래리 자래마을
가야시대
16
성산 고분군(A)
성산리 성산마을
가야시대
17
성산 고분군(B)
성산리 성산마을
삼국시대
력이 소요된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따라서 발견된 다수의 지석묘가 여러시대를 거쳐 제작되었다 하더라도 1기의 지석묘 주변에는 적어도 600여명 이상이 움막을 짓고 거주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듯 지석묘와 대형 고분군이 아영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부터 운봉읍 지역보다 아영면 지역에 고위급 세력자들이 집중 거주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고 이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3. 삼한시대
상고시대에 우리나라 남부에 자리잡고 있던 3개 부족사회로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있었다. 만주와 한반도 북쪽에는 고조선(古朝鮮)이 존속할 때에 남쪽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그 뒤를 삼한이 자리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국(辰國)은 목지국(대국)의 부락 연맹체였는데 위만(徫滿)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조선의 이류민(移流民)들을 그 우두머리인 진왕이 보호하자 낙랑인들이 진한이라 부르다가 한(韓)의 칭호가 확대되어 소국(小國-부족국가)의 맹주들에게도 마한. 진한. 변한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한은 본래 족명(族明)인 개마(蓋馬)에서 온 것이라 하며, 변한은 그들이 사용하는 관모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마한은 지금의 충청도와 전라도, 진한은 경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삼한지역 내에 분포한 소국들의 수를
<그림 1-2> 유적 분포
보면 <위지>를 근거로하여 엮은 <후한서>에 의하면 마한은 54국, 진한에 12국, 변한에 12국이 있었다.
남원지역은 전라도의 일부로 당시 마한 지역에 속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운봉지역 역시 마한의 영토였느냐 하는 점에 다소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남원분지와 운봉고원의 수계(水系)가 다르고 두 지역 사이에 형성된 급격한 분지벽(basin wall)을 따라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수비산성(守備山城) 10여 개가 위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삼국시대 백제가 여러차례 신라를 공격하는데 그 공격지역이 바로 이 곳 모산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운봉은 남북국 시대인 신라 경덕왕 16년(757) 때에 모산현에서 운봉으로 개칭되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의 속현으로 삼아오다가 고려 태조 23년(940) 때 비로소 남원에 예속되기 때문이다. 운봉은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 세지역의 접경지대로지금의 행정 구역처럼 뚜렷하게 지역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던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운봉 지역이 경상남도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 동부에 위치한 변한 지역이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그 후 1세기경 변한은 12부족의 연맹체가 6가야로 통합되고, 운봉지역은 그중 가장 서쪽 지역에 치우쳐 위치한 고령가야에 속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기원 후 562년 6가야는 모두 신라에 병합되어 운봉 지역은 다시 신라에 속하게된다. <동사강목> 지리고에는 호남의 운봉․무주․무풍은 신라 땅이라 하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이나 고분에는 모두가 가야계 토기가 발견되고 있으며, 지리적으로나 기후․생활 풍습 등을 비교해 볼 때도 운봉은 남원과 다른점이 많다.
<마한과 달궁 전설>
지금의 산내면 달궁리(덕동리)에는 옛 주춧돌이 남아있는 궁터가 있는데 마한 왕이 진한의 난을 피해와서 왕궁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운성지(雲城誌)- 1758」와「용성지(龍城誌)-1752」, 「여지도서(輿地圖書)-1765」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령과 정령은 둘 다 지리산 기슭에 위치해 있으며 몹시 가파르고 험하여 소나 말이 다닐 수 없는 곳인데 거기서 서쪽으로 남원부까지는 50리 쯤 된다. 옛 승려 청허당(서산대사-휴정)의 황령기에는 ‘옛날 한소제 즉위 3년에 마한의 임금이 진한의 난을 피하여 이 곳에 와서 도성을 쌓았는데 그 때 황․정 두 장수로 하여금 그 일을 감독하고 고개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마침내 두 사람의 성으로 고개 이름을 삼게 하였다. 그 도성을 유지한 것이 71년 이었다....’ 하였는데 무너진 성과 허물어진 벽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그 도성이었다는 곳을 세상에서는 달궁터라고 전한다. 두 고개 안에 긴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는 옛날 남원 땅이었으나 지금은 운봉에 속한다.” 「용성지」.
달궁은 지리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데 유허지의 주춧돌과 무너진 담장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휴정(休靜)대사의 황령기에는 “한소제(漢昭帝) 3년(BC 84-정유년) 마한이 진
<그림 1-3> 운봉 고원의 지형 단면도
한의 난을 피하여 여기에 도성을 쌓고서 황씨, 정씨 두 장군으로 그 일을 감독케 하고 그 재를 수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황령은 곧 남원 황령사로써 황장군이 지킨 곳이며, 정령은 운봉 정령궁으로 정장군이 지킨 곳이다. 이는 모두 두 장수의 성씨로써 재 이름을 붙인 것이며 그들이 주둔한 형세가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운성지」.
황령기는 청허당 즉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으면서 전해오는 달궁 전설을 글로 써서 남긴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꾸며낸 전설이 아니라 할지라도 뚜렷한 역사적 증거가 없는 한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로 다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곳 달궁은 지형이 험하고 협소하여 개관적으로 왕궁터로써 의혹을 갖게하는 산간 오지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강대세력에 밀리는 약소국의 급박한 수비 장소로 험준한 지형을 택할 수 있고, 더구나 대규모적인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던 삼한시대에는 능히 예상할 수 있다 하겠다. 또한 과거 교통로로 보아 경상도 산청과 함양 방면에서 달궁을 거쳐 정령치를 넘어 주천면을 지나 남원으로 통하고, 상류의 심원 계곡을 지나 노고단 기슭의 재를 넘으면 전남 구례로 통하는 산중 요로(要路)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이 지역의 주요 도로로써 이용되었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더우기 정령치마애불상군과 구룡계곡의 덕치산성이 남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삼한 소국들은 혈연적 가부장제 공동체의 사회체제를 이루고 금석병용기의 부족 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그후 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BC 18년 온조왕을 시조로한 백제가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소국들을 점차 통합하여, 4세기 근초고왕 때 이르러 마한을 완전히 통합하고 한반도 서해안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달궁의 마한왕 전설은 남하하는 백제의 세력을 피해온 마한의 어느 소국의 왕 또는 그 지역의 부족장이거나 호족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할 수 있다.
확실히 고증할 수는 없으나 달궁이 실제 마한의 도읍지였다는 기록을 문헌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 기록을 굳이 사실적으로 추정해보고자 한다면 고대 우리 역사를 잠시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의 ‘고조선편’에 의하면, 단군왕검은 BC 2333년 평양성에 도읍하고 이어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가 나라를 다스린지 1500년, 주(周)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B.C1122)에 은(殷)나라 사람 기자(箕子)를 조선왕에 책봉하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갔으며, 나중에 다시 아사달(阿斯達)에 돌아와 산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기자조선은 그 후 927년간 존속되어 오다가 BC 195년 한나라에 정벌당한 연나라 부장 위만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게 망명을 청하여 고조선의 서쪽지역의 방위를 맡게 된다. 그 이듬해 유망민을 규합한 위만(衛滿)은 준왕(準王)을 내 쫒고 조선왕이 되었다. 준왕은 뱃길로 마한 땅에 도착하여 마한 왕이 되어 익산(금마)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실제 어윤적이 단군 원년(BC 2333)에서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연표를 기술한 <동사연표>에 의하면 6대 마한 왕인 효왕 30년 즉, BC 84년에 익산에 있던 마한의 도읍지를 정유년에 지리산 반야봉 아래로 옮겼다는 기록(丁酉移都智異山般若峯下)과 마한 왕이 진변의 난리를 피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마한 효왕이 진한(진변)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았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그런데 기존 정설에 의하면 위만조선에 밀린 기자조선의 마지막왕 준왕은 남하하여 54소국으로 형성된 마한에 유입하게 된다. 본래 이 지역에는 목지국의 군장(진왕, 마한시대 신지)의 세력하에 진국이라는 부락연맹체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진국의 동북계 지역에는 일찍부터 북쪽 나라에서 남하하여 이주한 사람들로 형성된 집단사회가 있었다. 준왕이 정주한 때부터 진한 내의 이류민 사회는 준왕족이 한씨인 관계로 스스로 한(韓)이라 부르며 목지국의 우두머리인 진왕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진한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한의 칭호는 점차 확대되어 진왕을 맹주로 받드는 모든 소국(小國)에 대해서도 한의 칭호를 붙이게 되었다. 이리하여 후한 말 대방군이 새로 설치될 무렵에는 진한과 아울러 마한․변한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의 마(馬)는 본래 족명인 개마(蓋馬)에서 온 것이라 하며, 변한의 변(弁)은 그들이 사용한 관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위지> 및 <후한서> 등은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한은 지금의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 진한은 경상남북도, 변한은 낙동강 유역에서 전라남도의 동부에 이르는 지방으로 보고 있다.
어윤적의 <동사연표>에 의하면 BC 194년 준왕이 남하하고 이듬해인 BC 193년 금마군 익산에 마한 왕으로 무강왕에 즉위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후 마한의 마지막 왕인 학왕(學王)이 서기 9년(己巳) 백제에게 망할 때까지 203년간 존속하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BC 194년 준왕을 몰아낸 위만 조선은 BC 108년 우거왕 때 한무제에게 정복당하고 낙랑, 현도, 진번 등이 설치되었다. 위만조선의 제후국 세력들은 남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익산에 도읍을 정한 마한을 위협하였다. 마한의 효왕은 그 세력에 밀려 지금의 경상남북도에 위치하던 진한 세력을 자극하고 그 반발로 결국 도읍지를 지금의 지리산 반야봉 아래 달궁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온조왕 27년(서기 9)에 마한이 백제에게 망할 때까지 달궁은 이곳에 도읍지로 유지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왜냐하면 <용성지>에 의하면 이곳에 도성을 보존한 것이 71년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保其都城七十一年也云), BC 84년 도읍을 옮기고 서기 9년 마한이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이 93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막연한 사실만으로 지금껏 전설로만 알려진 달궁 전설을 실제 역사로 간주할 수는 없다. 즉 논증할 수 없는 문헌상의 내용을 가지고 실제 역사로 해석 추정하는 데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본다. 따라서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어져야 할 과제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달궁은 대홍수를 겪게되고 거주지가 거의 매몰되는 사태를 겪게된다. 홍수 지역이 혹자는 현 달궁터자리가 아니라 만복대 부근이라고도 하나 문헌상으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운성지>에 의하면 그 곳에 거주한 가구수는 수십호가 있었는데, 신해년(1731-영조 7년) 홍수에 의한 산사태로 반야봉이 무너져 내리면서 앞 개울이 막혀 온 고을이 모두 침수당하여 남은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하였다. 그때 임금은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만물을 낳으심에 / 모든 곳에 제자리를 얻게 해주었으니 / 하늘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림에 이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랑하기에 살기를 원하여 / 지극한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굶주림과 추위 / 요절하는 일에 / 백성의 부모로서 슬프지 않을 수 없는데 / 하물며 비명에 죽는 것이야 오죽하겠는가!
더욱더 혹독한 것은 / 산이 무너져 깔려 죽고 / 홍수로 침몰 당하여 / 모든 사람이 새알처럼 짖이겨 / 하루아침에 물고기 밥이 되었다.
해골은 쌓이여 언덕을 이루고 / 넋은 흩어져 물거품이 되었으니 / 아 ! 슬프다 원한어린 넋이여 / 살아있는 자라곤 백명 가운데 여나믄이라 / 한사람만 죽어도 마음 아픈데 / 어찌 뼈에 사무치지 않겠는가?
아!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 나의 부덕한 소치에 의한 것이다.
상제를 가벼이 대하여 / 정성이 위로 감격시키지 못한 것이요 / 백성을 소홀히 보호하여 /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한 때문이다.
홍수와 한발이 연이으고 / 굶주림이 날로 거듭하니 / 매양 생각이 이에 이르매 / 밥먹는 것조차 잊을 수밖에 없도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니 / 이 무슨 거듭된 재앙일까? / 오늘날 너희들이 만난 재앙은 / 예로부터 보기드문 일이다.
귀신의 울음소리는 쓸쓸하고 / 원한어린 날씨는 을씨년스럽도다 / 떠도는 나무둥치에 넋을 붙이고 / 무너진 흙모래 속에 뼈를 수습하니 / 산마져 흐느끼고 / 강물도 목메여 우노라.
이사실을 들은 날에 / 나의 마음은 찢어진듯 하도다.
이에 관찰사를 명하여 / 제단을 마련하고 술잔을 올려 / 너희 원혼들을 불러 / 너희 깊은 영혼들을 위로하노니 / 영령이여 이를 아시면 / 이에 흠향하소서. <운성지, 1758 >
4. 삼국시대
가. 지리적 상황
운봉 분지는 서쪽 분지벽과 남원의 요천 사이에 많은 단층선이 지나가고 있다. 따라서 옛날부터 운봉은 정령치에서 여원치를 거쳐 봉화산에 이르는 천연의 국경 방어선을 쉽게 구축할 수 있었고, 삼국시대에는 이 천혜의 요새지 운봉을 경계로 백제와 신라의 지역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이러한 지리적 요건 때문에 크고 작은 내란과 외침의 주요 통로가 되어 자주 시달리니 운봉의 역사는 가히 전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운봉 고원이 삼한시대에 마한과 변한 그리고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백제와 신라, 가야 중 정확히 어느 영역에 속하였는지는 시대에 따라 확실치 않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도 어느 일정 기간 동안 마한과 6가야가 공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운봉 고원은 이 마한과 가야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여러 부족 국가들이 멸망하거나 병합되는 시기가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그 과정 중의 사건이나 변화가 문헌상에 단편적으로 기록될 수도 있어 어느 한 기록만 가지고 역사를 단정지을 수는 없다고 본다.
앞서도 기술하였듯이 운봉지역에서 발굴되는 고분과 산성 주변의 유물들은 가야계 속성을 보이고 있으나, 562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병합되는 대가야와는 문화적 양상이 또 다른 일면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운봉 고원은 정치적으로 마한, 변한, 가야, 신라, 백제 등 주변 강대 세력 중 어느 영역에 속하면서도 그 세력이 미미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토착문화를 형성하였다고 보고 있다.
나. 백제와 신라의 국경분쟁
백제는 BC 18년 온조왕이 나라를 세우고 온조왕 27(서기 9)년 마한을 멸망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346 - 375)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마한 내 여러 잔여 부족국가의 주도권을 잡아 마한을 통합하게 되며, 고대국가로써 백제의 사실상 건국은 이 때로 보고 있다.
고대국가 체제에 들어선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토확장을 위한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이곳 운봉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로 수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룬 곳이다. 운봉고원이 역사적으로 어느 영역에 속하였는지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문헌상의 기록을 차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백제 초고왕 23년(188) 2월 백제가 계림(鷄林)의 무산성(모산성)을 침략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모산성을 계림의 장수 김구도가 방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계림’이란 신라의 국호로써 원래 ‘시림(始林)’이란 이름을 문무왕 3년(663) ‘계림’으로 정하였다. 즉 기록대로라면 운봉은 188년 이전부터 그 후에도 여전히 신라 땅인 셈이 된다. 그런데 모산현이 원래 마한이나 백제의 영역이었다면 백제가 마한을 통합(350년경)한 훨씬 이 후에, 그것도 신라가 대가야를 병합하는 진흥왕 23년(562) 이 후에도 백제가 신라 땅 운봉고원의 모산성을 공격하고 있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연려실기술> ‘역대전고’ 편에 지금의 남원인 대방국이 신라 기림왕(298-310)에게 항복해 온 기록이 있다. 어떤 연유인지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후한(後漢, 25-220)이 남원에 대방군(帶方郡)을 두고 위(魏, 220-265)가 이를 남대방군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이는 근초고왕이 마한을 통합하기 이 전이며 당시까지 대방군은 마한 내의 독립된 부족국가로 아직 백제에 통합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다시 <동사강목>에는 백제 동성왕 6년(484) 2월에 고구려가 계림을 침공하니 백제의 원군과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격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어 여전히 신라 영토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왕 3년(602)에 백제가 모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신라가 날쎈 기병 수천을 보내어 항전하는 한편, 소이(小陁)․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성(현재 지명은 알 수 없음)을 쌓고 오히려 백제 국경을 침략하였다. 그러자 백제는 장수 해수를 시켜 4 만의 보병과 기병으로 4개 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 등의 항전과 장수 귀산과 추항의 죽음을 각오한 항전으로 백제는 대패하였다. 백제 무왕 17년(616) 10월 달솔. 백기 두 장수에게 군사 8천으로 신라 모산성을 공격케하였으나 성패의 기록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무왕 25년(625), 신라 진평왕 46년에 백제는 신라의 속함(함양)․앵잠․기잠․봉잠․기현 등 6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모산성이 남원과 함양 사이에 위치하면서도 이 공격 대상에서 빠진 것은 616년 백제의 공격에 함락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운봉지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의자왕 20년(660) 7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할 때까지 불과 44년간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여러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면 삼국시대 운봉고원은 오랫 동안 백제보다 가야 혹은 신라 영역에 속하였다.
다. 산성 축조
산성은 고대 국가가 형성되면서 이 지역의 세력다툼으로 인한 국경문제의 충돌을 의미한다.
운봉고원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로, 국경분쟁의 방어 요충지로써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운봉과 남원 사이의 분계선에 산재해 있는 13개의 산성(山城)과 신기토성, 팔랑치합미성 등 17개에 이르는 수비산성을 들 수 있다. 정령치 - 칠봉산성 - 노치산성 - 준향음지성 - 준향양지성 - 장교산성 - 고남산성 - 가산산성 - 황산토성 - 청계토성 - 성리산성 - 짓재토성으로 이어지는 산성의 나열은 분명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남원지역과 운봉고원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국경분쟁 지역임을 말해준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부터 분계선을 따라 산성 수비군의 순찰을 위해 산성과 산성 사이를 연결하던 2중 순라로가 잘 닦여 있었다 한다.우리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형태는 산성이다. 처음에 목책이던 것이 토성에서 내구성이 강한 석성으로 발전하여 왔다. 산성의 종류는 산의 정상부를 석축으로 두른 퇴뫼식과 정상에서 계곡까지 축조한 포곡식과 7부 능선까지만 축조한 산복식이 있다. 이곳에 위치한
<그림 1-4> 산성 분포도
산성들은 지형적 특성상 대부분 테뫼식이다. 이 지역의 산성분포를 보면 지형적으로 해발 500m 이상의 운봉 고원과 200m의 남원 평야의 지형적 대립이며 그에 따른 기후, 수계, 국가간의 경계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지대가 높은 운봉 지역은 남원 지역보다 기온이 섭씨 3~4도가 낮아 농사절기도 차이가 났으며, 남원은 섬진강 수계인 반면 운봉지역은 낙동강 수계이다. 그에 따라 교통이 원할하지 못하던 고대부터 자연적으로 풍습 또한 달라지고 지형적인 차이로 나라 간의 경계를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서쪽과 동쪽, 호남과 영남의 관문으로 과거부터 외적의 침입을 봉쇄하기에 천연의 요새지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남원지역의 23개 산성(토성 포함) 중에서 13개가 이곳 경계면에 집중하고 있다.
<표 1-4> 산성 분포 현황
번 호
성 지(城址)
소 재 지
축성시기
지역구분
1
가산산성
운봉읍 가산리
삼국시대
운봉읍
2
황산토성
운봉읍 가산리
삼국시대
3
신기토성
운봉읍 신기리
삼국시대
4
고남산성
운봉읍 권포리
삼국시대
5
장교산성
운봉읍 장교리
삼국시대
6
준향음지산성
운봉읍 준향리
삼국시대
7
준향양지산성
운봉읍 준향리
삼국시대
8
수정산성
운봉읍 주촌리
삼국시대
9
수미성
운봉읍 북천리
삼국시대
10
덕치산성
주천면 덕치리
삼국시대
11
성리산성
아영면 성리
삼국시대
아영면
12
지치토성
아영면 짓재리
?
13
시루봉산성
아영면 청계리
삼국시대
14
팔랑치합미성
동면 성산리
삼국시대
동면
15
성내토성
동면 유곡리
삼국시대
16
연비산성
동면 유곡리
삼국시대
17
정령치차단성
산내면 달궁리
삼한시대(?)
산내면
* 덕치산성은 수정산성에 근접하여 운봉읍에 포함하였다.
라. 행정 명칭
<동사강목> <연려실기술>의 ‘지리전고’ 에서 지금의 운봉을 신라의 모산성 또는 모산현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모산현(母山縣)을 무산현(毋山縣)으로 적고 있으나 이는 모(母)와 무(毋)를 혼돈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아영(阿英), 아막(阿莫), 운성(雲城), 경덕(景德), 운막(雲莫, 조선호남지-1935)이라 불리어 왔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들 명칭이 모두 운봉이 고원지대임을 의미한다.
백제 동성왕 6년(484)까지는 모산성으로 표기하다가 백제 무왕 3년(602)에는 아막성(阿莫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 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16년 지방행정제도 정비를 단행하여 모산현을 지금의 운봉이란 이름으로 개칭하여 천령군(함양군)에 예속시켰다. 남원은 고려 태조 23년(940)에 남원소경이 남원부로 개칭되고 이 때 비로소 운봉현은 순창․임실․장수․장계 4개 현과 함께 남원부의 관할 밑에 들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운봉고원의 여러 산성들 가운데 모산성(母山城)은 어느 성을 말하는 것인가? 운봉고원에 산재한 여러 산성들의 축성 시기는 문헌상으로도 정확하게 고증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산성의 위치나 주변 환경, 성벽의 규모, 유적 등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흔적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추측할 뿐이다. 따라서 앞서 열거한 17개 산성 중에서 유력한 곳은 성리산성과 가산산성, 장교산성, 팔랑치합미성을 들 수 있다.
성리산성은 운봉 고원에서 고인돌과 고분의 분포가 가장 많고 봉화산에서 발원하는 풍천이 이룬 광평의 넓은 평야지대 그리고 함양군 백전면에서 매치(정치)와 지치를 지나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를 거쳐 남원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관장(管掌)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가산산성은 함양군 백전면 - 매치(정치) - 아곡리 방현 - 운봉 - 남원으로 통하는 도로와 팔랑치 - 인월 - 황산 남쪽 - 유치 - 번암으로 통하는 길 그리고 매치 - 아곡리 - 사치 - 번암면으로 통하는 세 갈래의 주요 도로 중앙에 위치한 수비산성으로서의 요충지이다. 또한 광천이 이루어낸 주변의 넓은 들은 가히 운봉 고원의 곡창 지대라 할 만하다. 장교산성은 고려시대 왜구 침입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의 주요 침입로이며 동학혁명의 격전지로서 수비산성의 주요 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팔랑치 합미성 역시 과거 호남과 영남의 관문 역할을 해 왔던 곳이다. 그러나 남원지역이 해발 100m 미만인데 비하여 해발 600m가 넘는 운봉 산성들은 500여 m가 넘는 고도차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백제가 산성을 공략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고도차가 비교적 완만하고 공격로가 긴 성리산성과 가산산성이 백제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여진다.
운봉현(신라 경덕왕 때 모산현을 개칭)은 고려 태조 23년(940)까지 이안군(마리현을 신라 경덕왕 때 개칭. 현재 안의면)과 함께 천령군(함양군)의 속현이었다.
<그림 1-5> 산성의 단면도(성리․가산․장교)
5. 고려시대
가. 행정
신라 후기에 이르러 신라 무열왕조는 중앙관제의 개혁과 지방통치의 강화를 위해 중국화 정책을 추진하여 쇠퇴해가는 지배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실추되어가는 왕조의 종말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왕조 교체 과정에서 격화된 지배층의 분열상이 신라말기의 지방분권시대인 호족시대를 초래하게 되었다.
각 세력간의 지배 복속의 관계를 유지하며 각지에 웅거하던 호족들은 ‘성주’나 ‘장군’을 자칭하면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구축하여 나갔다. 그 결과 진성여왕 6년(892) 주변 호족들을 복속시킨 견훤은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 진성여왕 9년(895) 궁예가 스스로 왕으로 칭하다가 경명왕 2년(918)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게 되니 바로 45여년 동안 대치정국을 유지하던 후삼국시대가 성립된 것이다. 그 후 경순왕 9년(935)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던 신라가 고려에 투항하고, 이듬해 고려태조 19년에 후백제 신검왕이 고려군에 대패하여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통일이 이룩되었다. 후삼국 시대의 운봉의 상황은 어떠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태조 23년(940)에 남원은 소경(小京)에서 부(府)로 격하되면서 운봉과 순창, 임실, 장수, 장계 등을 남원부의 관할 하에 두었다. 이때부터 천령군(함양군)에 예속되어 있던 운봉은 남원부에 속하게 된 것이다.
고려의 건국 초기 정권의 성격은 독자적 세력 기반을 갖춘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회유와 견제의 양면 정책으로 정치 기반을 다져가던 호족 연합정권이었다.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토지 규모와 인구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 지방의 백성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다. 양민 이상을 대상으로 일반행정 구역으로 주․부․군․현이 있고, 상민 이하 천인계급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 행정 구역으로 부곡․향․소 등이 있어 각각 그에 가까운 주․부․군․현에 소속시켰다. 원래 군․현이라 할지라도 부모 및 조부모를 죽이는 자, 조정의 중벌을 받은 자, 또는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으면 향, 소, 부곡 등으로 격하되고 반대로 국가에 공이 있는 자가 있을 때는 격을 높여 주기도 하였다. 원래 전쟁 포로의 정착지이기도 한 향․부곡과 수공업자들의 집단인 소(所)는 고려시대까지는 천민집단이었으며, 이들의 행정 관할은 지방 향리가 맡았다. 따라서 향, 소, 부곡은 지방 행정 조직의 최말단으로 촌락과 향, 소, 부곡이 모여 현을 형성하였다. 또한 자연 마을 단위로 촌(村)을 형성하여 촌주(村主)는 지방의 세력이 있는 자로서 최말단 행정 사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운봉현에는 현 북쪽 15리 아용곡부곡(현 아영면 아곡지역 추정)이 있었으며, 현재 운봉 4개 읍면지역의 여러 촌락과 함께 운봉현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라북도에 산재하는 향, 소, 부곡의 총수는 105개소였는데 이 중 28%에 해당하는 27개소가 남원부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남원지역은 농산물이 풍부하여 지역민의 생활이 안정된 원인도 있으나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인 만큼 잦은 전쟁으로 생겨나는 전쟁포로가 이룬 수용집단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향, 소, 부곡은 통일 신라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어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까지 이어져 왔으나 고려말 감무제가 성행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성종 2년(983)에는 신라 경덕왕 때 개편된 전국 9주를 12목으로 분류하여 중앙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남원을 전주목에 소속시켰다. 또한 각 지방의 각종 병기를 거둬들여 농기구를 만드는데 전용하여 권농을 적극 장려하였다. 성종 14년(995) 9월에는 당나라 시대 10도 제도를 모방하여 다시 전국을 10도로 분류 개편하였는데 남원부는 강남도에 소속되었다.
현종 9년(1018)에는 고려시대를 대표할만한 지방제도가 실시되었고, 이때 강남도와 해양도를 합하여 전라도라는 행정 구역 명칭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강남도의 수관(首官)인 ‘전주’와 해양도의 수관 ‘나주’를 합쳐 전라주도(全羅州道)였다가 주자가 생략되고 전라도로 부르게된 것이다. 당시 전라북도는 1목 1부 5군 37현이 있었다. 5군은 금마군․순창군․고부군․대산군인데 그 중 임실군과 순창군이 남원부에 속하였고 속현으로는 장계현․적성현․거령현․고구현․장수현․운봉현․구례현 등 7현이었다.
운성지에 운봉현이 공양왕 3년(1391) 아용곡권농병마사(阿容谷勸農兵馬使)를 겸하다가 조선 이태조 원년에 감무를 설치한 이 후 현감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남원지, 1994>에 의하면 감무가 설치되지 않고는 아용곡권농병마사를 겸임할 수 없으므로 운봉에는 공양왕 3년에 감무가 설치된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감무관 제도는 고려 예종 원년(1106) 황해도 27개 현 사람들이 중앙으로부터 외관이 파견되면서 과중한 세금을 피해 달아나자 조정에서는 처음으로 감무관을 선발․파견하여 해당 지역민을 설득 안무하는 임무를 담당케하였던 것이다.
남원부에서 가장 먼저 감무가 설치된 곳은 인종 21년(1143) 구례이며, 이어 명종 2년(1172) 임실, 명종 5년(1175) 순창, 공양왕 3년(1391) 장계 순으로, 운봉은 조선조 태조 원년(1392)에 비로소 감무(6품)가 설치되었다. 운봉현의 감무관이 아용곡권농병마사를 겸임하며 아용곡부곡(아영면)은 남원부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나. 군사제도
고려시대 병사제도는 지방 세력을 군사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큰 것이었다. 과거 운봉이 전략의 요충였던 만큼 조정에서도 남원부를 군사적으로 소홀이 할 수 없어 전라도에서 제3의 병참 기지로 하였다. <고려사>의 병제(兵制)에 의하면 남원도에 파견된 군대는 보승(保勝) 205명, 정용(精勇) 800명, 토착적인 노동부대 성격을 띠고 있던 일품은 636명으로 총 1641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원부의 관할 구역 내에 각 촌에는 2품군과 3품군이 촌장과 촌정의 지휘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명목상 군대일 뿐 일반 농민들이었다.
다. 운수제도
또한 고려왕조는 정치적 지배에 앞서 경제적 수취를 통하여 왕권 통치를 강화하려 하였다. 따라서 행정연락과 물자 수송을 위한 교통 수단으로 역참제도(驛站制度)와 조운제도(漕運制度)를 건국 초기부터 잘 정립시켰다. 역은 중앙관서와 각 군․현 간에 공문서 전달, 공무 수행자의 마필과 숙식 제공 그리고 진상품과 관물(官物)의 수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각 도로마다 30리 간격으로 역을 설치하였다. 숙박 시설로는 역원(驛院)이 있었다. 각 역에는 마필이 준비되어 있었고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 등을 두어서 역원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케 하였다. 그리고 수개에서 수십개에 이르는 역을 하나의 도(道)로 묶어 종 6품의 찰방(察訪) 또는 종 9품의 역승(驛丞)을 두어 이를 관장케 하였다. 역졸은 검은 벙거지를 썼으며 다른 군노(軍奴)들보다 낮은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찰방은 관내의 역승, 역졸, 역마를 관장하는 한편 정보를 수집하여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권한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역리(驛吏)는 왕명의 전달과 조세․공물의 수송, 사신의 왕래와 지방 관청의 행차에 따른 손님 맞이, 지공(支供) 등의 심부름을 세습적으로 부담하였다. 역졸의 수는 역의 크기에 따라 5명 내지 10(혹 100)명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성종대에 운수 교통망은 제 22도(道)에 525개소의 역을 설치하여 전국의 교통망을 구체화 하였다. 남원도(南原道)는 오수역을 수석역으로 12역을 관장케하였는데 그중 인월역이 운봉에 설치되어 있었다.
라. 원(院) 제도
고려시대 때부터 설치되어온 원(院)은 일반 여행자를 위한 여관이다. 원의 건물을 원우(院宇)라 하였는데 남원지역에 18개가 설치되었다. 원은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오를 때 사용하기도 하고 관찰사가 도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말을 교체하기도 하였다. 원에는 원주(院主)가 있어서 원을 수리하거나 나그네의 접대를 맡았다. 고려 말엽과 조선 초기에는 토성품관(土姓品官)이나 승려들이 원주 역할을 맡았으나 노역꾼인 차역(差役)과 관리의 심부름꾼인 사객(使客)의 길을 알선하고 불을 밝히는 일에 고용되었으나 제대로 직분이 이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세종 7년(1425)에는 잡역과 알선, 등불 밝히는 일은 면제시켰다. 또한 원의 관리가 법대로 시행되지 못할 경우 고을 수령에게는 관찰사의 문책이 따랐다. 남원부에 설치된 15개 원(院) 중에서 3개 원이 운봉현에 설치되었다.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여원(女院) : 운봉 서쪽 7리 여원치에 소재. 현 이백면 양가리 병막동 여원치마애여래상이 새겨진 암벽 아래에 위치하였다.
중흥원(中興院) : 운봉 동쪽 7리 소재. 현 신기리와 화수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공원(大功院) : 운봉 동쪽 15리 황산 밑으로 현 옥계동 부근에 위치 하였다.
마. 공부제도
당나라 조(租), 용(庸), 조(調) 3세(稅)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 지방으 특산물과 전통적 가내 수공업 제품을 납입하는 일종의 현물 세공이었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운봉현의 공물 특산품은 꿀, 오미자, 인삼, 잣, 송이버섯, 석이버섯, 감, 자초 등이 있었다.
바. 황산대첩
운봉 여원치를 넘어서면 먼저 우뚝 막아서는 듯한 해발 1168m의 바래봉을 마주보게된다. 바래봉의 맥이 북쪽으로 덕두봉까지 이어지다가 옥계동에서 운봉 광천이 맥을 뚫어 좁은 길목을 만든다. 24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인월을 향해 달리면 바로 이 좁은 협로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 협로를 끼고 깍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오른 산이 바로 해발 607m의 그 유명한 황산이다.
과거 여원치와 팔량치 사이의 운봉은 지리적으로 호남과 영남의 관문이자 천연의 군사적 요충지로써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수 많은 전란을 겪어왔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예의를 중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애호민족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꼭 국력이 약하고 자존적(自存的) 응집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본래 남을 해치지 않는 타고난 민족성 때문이라 하겠다. 반면 외침은 수없이 당하여 무려 900여 회에 달하는 국난과 부분적 국토 유린이라는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침략은 받아 왔으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민족적 저력을 항상 지녀왔고 또 우리 민족의 특유의 방식으로 끊질기게 우리의 삶을 지켜왔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우리나라는 거란, 몽고, 홍건적, 왜구 등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그 중 왜구의 침입이 가장 많았다. 왜구가 우리나라를 처음 침범한 것은 신라 17대 내몰왕(奈勿王) 43년(398)부터 비롯된다. 왜구 침략의 주된 목적은 주로 식량인 쌀의 약탈에 있었으나 우마와 문화재도 가리지 않고 챙겨갔으며, 포로들을 노예화하기 위함도 배제할 수 없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 고종 10년(1223)부터 공양왕 3년(1391)까지의 왜구의 침입은 무려 484회에 달하였다. 역대 왕조별 침입 횟수를 보면 고종 7회, 원종 2회, 충렬왕 2회, 충숙왕 2회, 충정왕 10회, 공민왕 74회, 우왕 378회, 창왕 5회, 공양왕 4회 였다. 특히 고려말 왜구의 해적 행위는 극에 달하였는데 공민왕 1년과 8년에는 경성(京城)에 계엄령이 내려지는가 하면, 심지어 우왕 때는 충주와 철원으로 천도설까지 구체화되기도 하였다. 고려 우왕 2년(1376) 홍산(鴻山)싸움에서 최영(崔瑩)에게 대패한 왜구는 우왕 3년(1377) 5월 또다시 대거 지리산 방면으로 침범하였다. 이 때 상황을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주에서 왜적을 대파한 경상도원수 우인열은 또다른 왜적의 공격을 받고 급히 구원을 청하니,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을 급파하여 지리산 아래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대치하고 있던 적진과의 거리는 2 백여보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돌연 왜적 한명이 나타나 엉덩이를 두들기며 아군을 모욕하는 심리전을 폈다. 그러자 활솜씨에 능한 이성계 장군은 단숨에 화살을 쏘아 거꾸려뜨니 적은 크게 놀라 기세가 꺽이고 아군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아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을 몰아치니 적은 크게 패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적은 산으로 기어올라 절벽을 방패삼아 대치하였다. 칼을 내밀고 창을 뻗혀 낸 모양이 마치 고슴도치 등과 같아 우리 군사가 올라가 공격할 수가 없었다. 이성계 장군은 비장(참모)에게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으나 험한 형세에 성공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공정왕(정종)에게 다시 공격케 하였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자 장군 자신이 몸소 말채찍과 칼등을 휘두르며 적을 향해 말을 몰아쳤다. 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그 뒤를 따라 공격하니 적은 절벽에 밀려 떨어져 죽은자가 반수가 넘고 남은 적은 칼날에 섬멸되니 이윽고 대승하였다.
우왕 6년(1380) 8월에는 진포(鎭浦-금강 입구 옥구군 성산면)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충청, 전라, 경상 3도 연안지방을 마구 약탈, 살륙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 때 원수 나세와 최무선이 화통과 화포로써 왜선을 격파하고 모두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하여 황간(黃磵), 화령(化寧 - 지금의 상주에 속함), 등 여러 현을 침략하여 노략질하고, 상주, 선산(善山) 두 주(州)를 불사르니 전라, 경상, 양광 삼도의 연해 지방이 텅 빌 정도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1380년 9월 육지로 도망한 왜구는 사생결단으로 다시 세력을 규합하여 소백산 줄기를 따라 남하하여 경산(京山 - 경북 성주)을 거쳐 함양의 동쪽 16리의 사근내역(함양군 수동)에 진을 쳤다.
이렇게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북방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이성계 장군을 양광, 전라, 경상 삼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당시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로 삼아 부(副)가 되게 하고 평리(評理) 왕복명(王福命), 우인열(禹仁烈), 임성미(林成味), 도길부(都吉敷), 박임종(朴林宗), 홍인규(洪仁珪), 이원계(李元桂), 이지란(李之蘭)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 장군의 통솔 하에 왜구 섬멸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도 순무사란 고려 외관직으로 원래는 도성에 근무하는 경관(京官)인데 지방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 파견하며 전란이 있을 때인 만큼 그 지역 군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왜구들이 사근내역(현 수동면 화산리)에서 진을 치고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때 고려 장수 배극렴(裵克濂), 김용휘(金用輝), 지용기(池湧奇), 오언(吳彦), 정지(鄭地), 박수경(朴修敬), 배언(裵彦), 도흥(都興), 하을지(河乙地) 등이 힘을 합하여 역 동쪽 3리 지점에서 왜구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패하여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500여명의 군사만 잃게 되었다. 이 때 죽은 우리 군사들이 흘린 피로 냇물이 붉게되어 후에 이를 피내(血溪)라고 하였다.
이 사근내역 전투에서 승리한 왜구는 더욱 사기충천하여 그 해 9월 함양을 노략질하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단숨에 남원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장차 광주땅의 금성산성(담양)에서 말을 먹인 뒤 곧 북상(北上)하리라”는 소문을 냈다. 그러자 조정이 크게 긴장하고 백성들의 민심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이성계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운봉을 향해 1천여 리를 행군하는 동안 왜구에 당한 우리 백성의 시체가 가는 곳마다 즐비하였다. 남원에 도착하니 변안열 등 여러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며 맞이 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전황을 보고 받고 출전 준비를 명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은 왜구들이 운봉 황산의 험한 지리를 이용하여 진을 치고 있어 공격에 여려움이 많으니 다시 남원 쪽으로 진출 하기를 기다렸다가 섬멸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찌기 사근내 전투에서 크게 패한 경험이 있는 장수들은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 장군은 호통치듯 말하였다. “적의 토벌을 목적으로 진군한 군사가 적을 찾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적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작전인가? 여러 장수들은 각자 부서를 정하고 한치도 착오 없이 작전에 임하시오. 내일 아침 여원치를 넘어 운봉으로 진군하겠소”
아침이 밝아오자 장군은 여러 장수를 모아 놓고 승전을 기원하는 맹세를 한 후 운봉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남원을 출발한 군사는 길게 대오를 갖추어 운봉을 넘어 황산에 다다랐다. 황산의 남쪽은 광천이 흘러나가는 좁은 협곡이고 북쪽은 아영의 사창과 인풍리를 지나 함양으로 통하는 울도치(명석치)가 있었다. 이성계 장군은 황산 북쪽에 위치한 울도치가 주변에 바위가 많아 적을 막기에 매우 좋은 위치임을 알았다. 장군은 군사들을 시켜 만약을 대비하여 돌을 쌓아 방어 진지를 구축할 것을 명하였다. 곧 이어 인월을 향해 진군하여 사창리 마을 앞 해발 531m의 정산(鼎山) 봉우리에 올랐다. 황산에서 뻗어내린 봉우리는 그리 높지는 않으나 남쪽으로 인월역에 적이 진을 치고 있는 전황을 훤히 관망할 수 있었다. 동쪽은 풍천이 흐르는 논 밭이 넓게 펼쳐지고 남쪽 산 아래는 낮은 평지와 늪지대가 있었다. 이 평지와 적의 주둔지 사이에는 낮은 야산 줄기가 황산에서 뻗어내리고 있었다. 적은 이 야산과 험준한 산속에 매복하고 우리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적을 찾아내어 섬멸하자면 적의 공격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 먼저 출진시킨 장수들이 풍천이 흐르는 왼편의 평지를 향해 공격하였다가 반격을 가하는 적에게 번번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퇴각하고 만다. 이러한 진퇴를 거듭하자 해가 벌써 기울었다.
이성계 장군은 우측 험한길을 택하여 매복하고 있는 적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과연 매복하고 있던 적의 군사가 대거 튀어나왔다. 이성계 장군은 조금도 당황함이 없이 대우전 20발과 유엽전 50발을 쏘아 얼굴에 명중시키니 적은 모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계속 진군하는 우리 군사에게 적은 집요하게 기습을 시도하였다. 황산천의 진흙탕 속에서 아군과 적을 구별할 수 없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세차례에 걸친 적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뒤범벅이 되어 끝내 일어서는 자는 정작 모두 우리 군사들 뿐이고 적은 모두 섬멸되었다. 싸움에 진 적의 남은 군사가 인월리 쪽 험준한 산 위의 요새에 웅거하고 굳게 지키고 섰다. 장군은 군사를 요해처에 나누어 지키게 하고, 휘하 이대중 등 10여명의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올려 쳤으나 사력을 다해 반격하는 적에게 쫒겨 내려오고 만다. 실로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힘든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인지라 장군은 다시 군사를 정돈하고 진격 나팔을 불어 총 돌격을 명하니 아군은 개미떼처럼 산을 기어올라 적진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적의 장수 하나가 창을 겨눈채 장군의 뒤로 달려들고 있었다. 위급하였다. 이를 본 부하 장수 이두란이 큰소리로 장군을 부르며 말을 달렸다. “ 영공(令公)은 뒤를 보시오. 영공은 뒤를 보시오.” 거듭 소리치며 달렸으나 장군은 미쳐 손을 쓸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명궁 이두란의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랐다. 이어 화살은 달려드는 적장의 목을 꿰뚫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장군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의연히 싸움에 임하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다시 말을 바꿔타기를 여러번. 지략과 용기로 용장다운 기백을 높이 떨치며 전투를 이끌어 나갔다.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적이 쏜 화살이 장군의 왼쪽 다리에 꼿혔다. 장군은 개의치 않고 화살을 뽑아 팽개치며 더욱 급하게 적을쳐 나아갔다. 군사들은 장군이 부상한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싸움은 급박하였다. 숫적으로 우세한 적이 장군을 두어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휘하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고, 그 자리에서 적 8명을 베어 죽이니 감히 적이 달려들지 못하였다.
싸움의 승패는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쳐 있었다. 장군은 하늘을 향하여 포효(咆哮)하듯 소리쳤다. “겁먹은 자들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크게 감동하고 용기백배하여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적의 사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적이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대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겨우 십 오륙세되는 적의 대장은 백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 빠르고 날래기가 어느 누구와 비할 수가 없었다. 말이 달려 지날 때마다 쓰러지는 우리 군사가 부지기수라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적의 대장은 아지발도(阿只拔都)라 하였으며 ‘아지’란 어리다는 뜻이고 ‘발도’란 몽고말로 용감하다는 뜻이었다. 장군은 적장 아지발도의 용맹을 아껴서 생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이두란이 말하기를 생포하려면 많은 우리 군사가 희생될 것이라 하여 만류하였다. 아지발도는 얼굴까지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활을 쏠만한 틈이 없었다. 그러자 장군이 말하였다. “내가 활로 투구를 쏠터이니,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저자의 목을 쏘아라.” 장군은 박차를 가하여 말을 몰아 나갔다. 활을 들어 투구 꼭지를 쏘니 투구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자 아지발도는 황급히 투구를 고쳐 썼다. 장군은 두번째 활을 쏘아 투구를 맞히니 끈이 떨어진 투구는 그만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두란이 활을 당겨 적장의 목을 쏘니 입에서 피를 뿜으며 말에서 곤두박질쳐 죽었다. 순식간에 우두머리를 잃고 놀란 적은 혼비백산하였다. 장군은 때를 놓치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개시하여 적의 정예부대를 모조리 깨뜨렸다. 적이 통곡하여 우는 소리가 계곡을 진동하니 마치 만(萬)마리의 소가 울부짖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가 용기백배하여 북을 치며 거세게 올려치니 그 함성이 또한 천둥소리와 같아 하늘을 울리고 땅을 갈랐다. 아군의 총 공세에 무려 10배나 되는 적은 모두 섬멸되어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흘린피가 내(川)를 이루었다. 적은 겨우 70명 만이 덕두산을 타고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이 싸움으로 적이 흘린 피가 황산천을 붉게 물들여 7일 간이나 마시지 못하고,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이 황산 전투에서 노획한 말이 1,600여 필, 빼앗은 병기와 적의 수급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때서야 적이 두려워 겁을 먹고 싸우지 못한 장수들이 장군 앞에 나와 무릅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부딫쳐 피를 흘리며 살려주기를 빌었다.
이 싸움에서 처명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이성계 장군이 1369년 12월 원나라 요동에 있는 동녕부(고려조에 워나라가 한때 평양인 서경에 두었으나 1290년 요동으로 옮겼다.)를 정벌할 때 활을 쏘아 사로잡은 장수였는데 처형하지 않고 살려주어 그 은혜에 감복한 그는 항상 장군을 가까이 모시며 충성을 다했다. 이번 싸움에서도 목숨을 바쳐 힘껏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아기발도는 어린 나이인데도 어떤 장수보다 용감무쌍하였다. 이에 감복한 여러 왜적들이 굳이 대장으로 추대하여 그 앞에서는 모두 엎드려 충성하였다. 아지발도는 일본에 사랑하는 애첩이 있었다 한다. 애첩은 일본을 떠날 때 눈물을 흘리며 이번 출정을 굳이 말렸다. 그러나 대장부의 앞 길을 감히 아녀자가 가로막자 아지발도는 애첩을 호되게 나무랐다. 애첩은 아지발도의 다리를 붙잡고 통곡하며 말했다. “장군님 이번 출정을 정 포기하지 못하시겠다면 저의 간곡한 소원을 들어주옵소서. 부디 고려에 가시거든 황산이란 곳에 진을 치지 마십시오. 장군님에게는 불길한 곳이 옵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아지발도는 칼을 뽑아 여러 장수들이 보는 앞에서 애첩을 베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이 바로 애첩이 말한 그 황산 싸움에서 맞이할 줄은 진작 알지 못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정벌 도중에 추호도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여러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개선 도중에 장군은 전주 오목대(梧木臺)에서 잠시 머물며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승전의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태조가 개선하자 판삼사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비단 휘장과 광대를 불러드려 천수사(개성 근교의 사찰로 추정) 문전에서 맞이 하며 말하기를 “공이여 공이여!
삼한이 다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 있었다. 공이 아니었다면 나라가 장차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렸다. 목은(牧隱)과 이색(李穡)은 “적을 소탕한 참장
<그림 1-6> 황산대첩 추적도
<표 1-5> 고려조 왜구의 전북 침입 - 전북지역의 독립운동사, 1994
회(순)
내 용
1
회원(會原)의 조선(漕船)을 군산도(群山島)에서 약탈
2
왜구의 배 100여척이 순천부를 침입하여 남원,구례,영암(靈巖),
장흥부의 조선(造船)을 노략질함.
3
전라도도순무사가 왜선 2척을 사로잡음
4
왜가 전라도의 조선 40척을 노략질
5
왜선이 전라도의 조선 200여척 약탈
6
왜적이 검모포(黔毛浦)에 침입,세미(稅米) 실은 배에 방화
7
전라도 회미(지금의 회현) 및 옥구 등지에 침입
8
낭산(朗山) 풍제(豊提) 등에 침입한 왜를 전라도원수 유영과
전주목사 유실이 싸워 격퇴하고 왜적이 약탈하였던 소와 말
200필을 빼앗아 주인에게 돌려 줬다.
9
고부,태산,흥덕, 보안, 인의, 김제, 등에 침입 관해(官廨)를 불지름
10
왜적에 의해 전주 일시 함락. 유실이 귀신사에서 주둔하고
있는 적을 격퇴.
11
진포를 침범하고 강화부를 침범하여 군함을 불사르고 또 한주
(韓州)를 침범.
12
함열현 침범.
13
익주(익산), 전주 침략.
14
전주 불사르고 도륙.
15
도강(道康), 곡성, 남원, 순천부 침범.
16
왜적의 배 500척 진포 어귀에 들어와 주변 일대에서 큰 노략질.
17
왜적이 남원성에 처들어왔다가 물러가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진을 침. 황산대첩.
18
남원을 침범하고 진포에 왜선 50척이 들어옴. 적선 4척 노획.
19
거녕(임실군 지사면),장수 등을 함락시키고 군사를 나누어 전주
침략을 노렸으나 부원수 황보림이 이를 물리침.
20
영동, 주계, 무풍 등을 침탈.
21
전라도 안성소, 소천역에 침략.
22
정읍현 침략.
23
왜선 80여척 진포에 정박하고 가까운 여러고을 침범.
24
왜적 함양에서 운봉을 넘어 남원에 침입. 도지휘사 정지가 공격
하여 58급을 베고 말 66필 노획.
25
절제사 이무가 침입한 적을 쳐 적의 무리 27급을 베었음.
수여! 썩은 나무 부러뜨리듯 삼한의 기쁜 소식 공에게 있네 ...” 하며 시를 지어 축하하였고, 윤소종 역시 “후세를 위하여 공이 태평을 열러 주었소”하며 축시를 지었다.
우리는 이 싸움을 황산대첩(운봉정산전-雲峰鼎山戰)이라 부르며 나세와 최무선의 진포대첩(1380)과 정지의 남해대첩(1383), 최영의 홍산대첩(1383) 등과 고려 4대승첩이라 한다. 이중 전북 지방의 2대승첩이 황산대첩과 진포대첩이다.
지금도 운봉에는 당시 대첩에 얽힌 지명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즉 황산대첩 1년 후
이곳을 다시 찾은 장군은 승전을 기리고자 자신의 이름과 함께 황산전투에 참가하여 생사고락을 같이한 8원수 4종사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고증할 수 없음). 이름하여 지금은 어휘각이라 불리고 있다. 또한 왜구의 흘린 피가 내를 이루며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하여 피바위(血岩)가 황산 아래 냇가에 있으며, 날이 어두워지자 적을 공격하기 위해 달이 서둘러 뜨도록 빌어 달을 끌었다는 인월(引月), 아군의 중군이 주둔하였다는 중군리, 아군의 군마를 매어두었다 하여 군마동, 아군이 화살 공격에 이용하기 위해 바람을 끌어왔다는 인풍(引風)리 등이 있다. 황산에는 왜적을 막기 위해 쌓은 황산토성이 있으며 주변에서 화살 촉이 많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울도치는 돌로 방어 진지를 쌓아 왜적의 공격을 기다리던 고개였다. 고개 위의 돌들이 황산대첩으로 적이 섬멸되자 자신들의 할일을 놓친 아쉬움에 그만 통곡하며 울었다 하여 울도치(명석치)라 유래한다.
또한 이성계 장군이 평생 전장을 누비며 타던 준마가 여덟 마리가 있었다. 운봉에서 타던 말의 이름은 유린청(遊麟靑)이라 하고, 함흥산인데 죽을 때까지 화살을 3대 맞았다. 31살에 죽었는데 석조(石槽)에 넣어 묻어 주었다고 한다.
황산대첩은 왜구의 침략에 고전하던 고려조정에 큰 근심을 덜어주었으며 고려조의 육전승첩에서 가장 통쾌한 승전보였다. 황산대첩이 없었던들 남원이 함락되고 그 여세를 몰아 전주까지도 위태로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상 의미가 크다 하겠다. 그러나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황산대첩이 있은지 2년 뒤인 우왕 8년(1382)에도 왜적은 또다시 함양에서 운봉 팔랑치를 넘어 남원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도지휘사 정지가 도순무사 최해운, 부원수 김종연, 조전원수 김백흥. 진원서, 전주목사 김용균, 양광도 상원수 도흥, 부원수 이승원 등을 독려하여 적을 대파하였으며, 그 결과 적 58급을 베고 말 66여 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밤에 적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도지휘사 정지는 군량이 떨어져 더이상 추격하지 못하자 적은 배를 타고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에도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아 고려왕조는 더욱 쇠퇴하여 황산대첩이 있은지 12년 뒤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종말을 맞는다.
6. 조선시대
가. 행정의 변천
고려 왕조는 14세기 후반에 이르러 권문세족(權門勢族)이 발호하고 대외적으로는 여진족, 홍건적, 왜구 등의 외침으로 인하여 정치체제가 약화되고 점차 왕권이 쇠퇴하여갔다. 이 때 이민족(異民族)의 잦은 외침을 물리치고 명성을 얻은, 이른바 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무장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 세력은 곳곳에서 군공(軍功)을 세워 중앙정계에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우왕 14년(1388) 5월에 요동 정벌군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출동한 이성계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단행하여 우왕과 구세력인 최영(崔塋) 일파를 제거하였다. 이듬해에는 창왕과 조민수마저 축출하고 공양왕을 세워 전제개혁을 이룩하여 경제적 기반과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이성계는 황산대첩 12년 후인 공양왕 4년(1392) 7월 16일에 결탁세력인 정도전(鄭道傳)과 조준 등의 신진사대부의 옹립을 받아 개성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임금이 왕위를 물려주는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민심의 동요를 염려해서 이듬해 2월 15일에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태조가 되었다. 이는 조선이 고조선(古朝鮮)의 계승자임을 밝히고자 하는 자부심과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왕조는 외교정책으로 중국 명(明)을 종주국으로 삼는 사대교린주의(事大交隣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 경제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는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취하였다. 조선왕조의 이러한 일련의 개혁된 제도들은 겉으로는 많은 변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기본은 대부분 고려왕조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지방통치제도는 태종(1400-1418)때에 거의 확립되고 세조(1455-1468) 때에 일부가 수정되었다.
조선의 지방관제는 초기부터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태종 9년(1409) 전라도의 모든 관할 지역의 촌락을 직접 통치화하는 과정에서 남원의 27개의 향, 소, 부곡이 없어지고 하나의 고을로 통합되었다. 이어 태종 13년(1413)에는 남원부가 남원도호부로 바뀌었다. 운봉현은 <신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조 원년(1392)에 감무를 두었다가 태종 13년(1412) 현감(종6품) 1명을, 그 후 1481년경 훈도(종 9품) 1명을 더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운봉현은 선조 33년(1600)부터 10년간 폐현이 되어 남원에 병합되었다가 광해군 3년에 다시 설치되기도 하였다.
1) 운봉 향교의 설립
국가 지도 이념을 성리학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국립학교로 서울에 성균관과 관립교육기관인 사학(중학.동학.남학.서학)이 있었고, 지방교육기관으로 향교가 있었다. 그 고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그 지역에 있어서 학문과 문화의 발전을 의미하며 학풍을 중시하는 문향의 고을로 변모함을 의미한다.
<남원지>에 의하면 운봉향교가 설치된 시기는 조선 태종 10년(1410)으로 운봉읍 가산리에 처음 설치되었다. 자세한 연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후 성산(城山 현 북천리 잿뫼산)으로 옮겨졌다가 선조 8년(1575) 다시 당월리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란을 당하여 건물이 모두 소실되고 주위에 도살장이 들어서게 되자 교육 환경이 좋지 않다 하여 인조 18년(1640) 산덕리 600번지인 현 위치로 옮겼다.
2) 황산대첩비 건립
선조 10년(1577)에 이르러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1574년 운봉 현감에 부임한 박광옥에 의해 전주 감영에 보고하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운봉면 화수리 반월산(화수산)에 <황산대첩지비>를 세웠다. 즉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태조가 승전했던 황산이 오래전에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워 기념하는 것이 좋겠다는 장계를 올려 왕명으로 건립하였다. 이 비의 비문은 김귀영이 지었고, 글씨는 송인이 썼으며, 글씨를 새긴 사람은 남응운이다. 그 뒤 현종 8년(1667) 10월에 이르러 현감 허제가 비각을 세웠는데 전각 3칸, 전문 1칸, 수직료 5칸, 직사 3칸의 규모였다. 승장 1명과 의승이 1개월씩 번갈아 지키며 관리하였다. 1944년 9월 일제(시행자는 남원인 양병일이었다고 함)에 의해 파괴되어 파편만 남아 있던 것을 1957년 10월 전주 이씨 문중에서 귀부와 이수를 다시 맞추고 새로운 비신을 세워 원래의 비문을 다시 새겼다. 비문에는 이성계 장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을 이루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건립당시 황산대첩비를 수호하는 비각, 별창청 같은 건물을 지었는데 지금도 그 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는 1957년(丁酉) 10월 27일 정부의 지원으로 복구되고 이듬해인 1958년 5월 22일 사적 제 104호로 지정되었다.
<황산대첩비명(荒山大捷碑銘)>
자헌대부 호조판서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성균관 동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신 김귀영은 교서를 받들어 짓고, 봉헌대부 여성군 신 송인봉은 교서를 받들어 글씨를 썼으며,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오위도총부부총관 신 남응운은 교서를 받들어 전서를 쓰다.
만력 3년 (선조 8년,1575) 가을 본도 감사 박계현(朴啓賢)이 장계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운봉현 동쪽 16리에 황산이 있는데, 이곳은 태조대왕이 전공을 세운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이 바뀌어져서 길가는 사람이 머뭇거리며 그곳을 가리켜 보고자 해도 그 곳을 구별할 수 없다. 만일 천백년 이후에 높은 언덕은 무너지고 낮은 골짜기가 메꾸어진다면 더욱 혼미하여 그곳을 알 수 없게 될까 두려운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큰 비석을 세워 그 지역을 기록하고자 고을의 노인과 어린사람들이 함께 관아에 찾아와 하소연 하기에 그곳을 지키는 신하로서 감히 이를 보고하지 않을수 없기에 삼가 이 사실을 올리는 바 입니다.”
이에 성상께서 그의 장계를 수긍하여 전라도에 명하여 그일을 주관하고록 하였다. 이 때문에 김귀영에게 글을 짓게하니 나는 임금의 명을 받들매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삼가 살펴보건데 고려 말엽의 국운은 위태로웠다. 태조께서 남원을 출발하여 운봉을 넘어 황산에 이르러 정봉의 위에 올라 산세를 살펴보고서 병영을 설치하고 크게 용맹을 내어 분격한 나머지 열 곱절이나 되는 적을 하루가 못되어 소탕하였다. 이는 근래 2백년 사이에 나라가 평정되어 풍파가 일지 않고 호남 영남은 평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 전투의 승리에 의한 것이다. 남녘 백성들이 이에 감격하고 존경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비를 세워 첨앙하려고 하니 어떻게 이를 그만두게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여 보면 태조의 크나큰 공훈은 역사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해지고 있으니, 천지에 드높고 고금에 휘향찬란하니 이 산으로 더불어 함께할 것이니 굳이 조그만 빗돌에 이를 기록하여야 무궁한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녘의 산 가운데 드높은 산은 무려 수백 곳이 있지만 태조의 위대한 공업이 이루어진 것은 때마침 이 산에 있으니, 이는 하늘이 높은 산을 창조하심으로부터 그 아름다움을 함께 일컬어 높다른 산봉우리를 만세에 우러러 볼 수 있게 함이다.
기수(岐水) 북쪽에 사냥을 하는 것은 수레와 병사를 선별함인데 돌북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고, 회서(淮西)를 평정한 것은 변방을 평정한 것인데 많은 신하들이 이 사실의 기록을 청하였다.
이로 미루어 태조의 무예와 승리의 전공은 드높고 커서 만세에 길이 그 덕화를 입혀주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이 사실을 큰 빗돌에 기록하고 거북과 용이 새긴 전각을 지어 이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과 길가는 나그네들이 우러러 바라보고 고개 숙이어 세상이 다 알고 잊지 않도록 사모하는 마음을 부치도록 함이니, 이 또한 거룩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귀영은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송을 하는 바이다.
송은 다음과 같다.
고려 운수가 다하려 함에
간악한 신하들이 조종을 어지럽혀
밖으로 오랑캐를 불러들였으니
어떻게 난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태조께서 왕명를 받아
병사를 출정하되 군법을 따르시니
그 위엄 빛나고 빛나며
그 정신 위로 하늘에 솟구쳤네.
하얀 무지개 태양을 꿰뚫으니
승리의 조짐 앞서 알았고
하늘이 상서 내려주시고
땅은 승리 소식을 전해 주었다.
황산의 승리여
이에 한번의 노여움으로
무예를 휘날려
우리의 깃발과 우리의 북소리 울려 퍼졌네.
철없는 왜적이 어린 날개짓으로
감히 범에게 대항하려 하다니
제 목숨을 스스로 내주는 격이다.
정수리를 맞춤에
투구가 기울자 이미
예리한 살촉은 목구멍을 꿰뚫었다.
벌떼처럼 개미떼처럼 몰린 왜적들은
하염없이 길을 잃고 통곡하였다.
통곡소리는 만마리의 소울음으로 골짜기에 가득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올라서니
사면에서 이미 무너짐에
어느 누가 감히 대적할 수 있겠는가?
우뢰처럼 번개처럼 공격하니
대나무 깨지는듯 기왓장 무너지듯
피와 살이 낭자하고
사람과 신의 가호로
하루아침에 말끔히 쓸어버리니
삼한이 다시 창조되었고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바다건너 공물을 올린지도
어언 2백여년
남녘의 백성들이 마음놓고 밭갈이 하며
부모 섬기고 자식 기름은
모두 그의 공덕이시다.
이에 사모하고 축원하여
마음 속에 새겨 두었으니
더욱 오랜 세월 흘렀지만
어제처럼 생생하다.
만력이 5년에
빗돌을 마련하여 이를 기록하니
황산은 터전이여
길이 무너지지 않으리며
영원토록 끝이 없이
이 비석과 함께 존재할 것이다.
만력 5년 정축 8월 일 현감 박광옥은 세우다. - 운성지(1758) -
(황산대첩비는 선조대왕 10년(만력 5년,1577)에 세워졌는데, 융희 4년 경술국치로 왜적의 전권으로 단기 4277년(1944) 갑신 7월 15일에 전각과 대첩비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사 을유년(1945) 7월 광복이 되어 정유년(1957) 10월 27일에 정부의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황산비각기(荒山碑閣記)>
황산대첩비는 지난 만력 정축에는 집으로까지 지어져 있지는 않았고 제단이 있었을 뿐이다. 이때문에 서리와 이슬, 비와 눈이 마음대로 씻기고 닦이어 가릴 곳조차 없었는데 관찰사 민공(민진원)이 비각을 세울 마음을 가지고서 내가 부임하던 날 곧 바로 이 사실을 나에게 물어왔다. 나는 태조의 위업을 기리는 비석에 이를 가릴 비각이 없어 태만한 백성이라는 질책을 면할길 없기에 관찰사의 뜻을 따라 나의 힘을 다하니 백성이 부모일에 오듯이 찾아오고 많은 장인이 다 모이여 0월 0일에 이 일을 마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어 비각에 액자를 달았고 그 이듬해 정미년[현종 8년(1667)] 가을에 경건히 낙성 시기를 고하니 어찌 성조의 도움으로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 묵묵히 응함이 아니겠는가?
아! 크나큰 공훈을 이룩한지가 몇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데 이제야 비를 세우고, 또다시 몇년이 흐른 뒤에야 비각을 세우게 되었다. 이 또한 운수에 관계되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성스러운 태조의 위업을 추모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음으로써 더욱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
정미 10월 일에 현감 허제는 기록하노라.
3) 군제(軍制)
조선의 군제 역시 어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방행정제도와 그 보조기구인 역원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각 도의 관찰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은 군직(軍職)을 겸하기 마련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계수관제가 계승되었으며 운봉은 4계수관의 하나였던 남원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세조 12년(1466)에는 지방 방위조직인 진관제가 실시되었다. 육군의 병마절도사영 병영(兵營)과 해군의 수군절도사영 수영(水營) 이 있고, 하부 조직으로 거진(巨鎭)을 단위로 편성되었다. 거진(巨鎭)의 장(長)은 절제사(節制使 - 정3품) 또는 첨절제사(僉節制使,첨사-종3품) 제진(諸鎭, 동첨절제사 - 종4품), 만호(萬戶 - 종4품), 절제도위(節制都尉 - 종 6품) 등이 있었다. 남원은 거진의 하나로 1도호부, 1군, 9현 등 11읍을 관할하였다. 따라서 남원도호부사는 남원진병마첨절제사(종3품)를 겸하였고, 운봉 현감(종6품)은 절제도위(종6품)가 겸하였다. 진관은 평상시에 주진의 관할 밑에 있었으나 전쟁시 각각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여 한 진관이 패하면 다른 진관이 차례로 싸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효과적인 군제가 되지 못한 채 고종 32년(1895) 일제의 을미개혁으로 근대적인 군제가 실시되기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진관제와 별도로 새 군제인 진영제가 실시되었다. 이는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을 겪으면서 지방 군대의 강화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진영제는 인조(1623-1649) 때부터 실시되었는데 고종 32년(1895)까지 지속되었다. 진영은 중앙의 총융
<표 1-6> 조선 후기 전라도의 진영체제
진 영
소 재 지
영 장
속 읍(관호 생략 : 속오겸 / 토포)
중 영
전 주 부
중영장
전주 김제 고부 진안 임실 금구 만경 부안 / 태인 정읍
후 영
여 산 부
부사겸임
여산 임피 옥구 함열 용안 익산 고산 진산 금산 용담
좌 영
운 봉 현
현감겸임
운봉 남원 곡성 장수 창평 옥과 구례 / 담양 순창
우 영
나 주 목
우영장
나주 광주 능주 영광 영암 화순 남평 무안 함평 무장 /
장성 고창 흥덕
전 영
순 천 부
부사겸임
순천 장흥 낙안 보성 진도 강진 동복 흥양 광양 해남
청(摠戎廳 - 수원부), 수어청(守禦廳 - 광주부), 진무영(鎭撫營 - 강화부) 등에 속한 경기 지역의 일부 외에는 모두 각 도의 감영과 병영에 속하였다.각도의 진영은 전영, 후영, 중영, 좌영, 우영의 5영으로 나누었고, 진영장(鎭營將 - 정3품)은 도적을 잡는 토포사(討浦使)를 겸하였는데 후에는 고을의 수령이 이를 겸하였다.
남원은 진영제의 중심지의 하나로 효종 5년(1654)에 좌영이 설치되었고 각 군현을 여기에 속하게 하였다. 중영은 전주에 소재하였으며 병마절도사를 겸직하는 감사와 또 한사람의 절도사를 두어 5영을 총 지휘토록 하였다. 각 영에는 영장(겸 토포사)이 배치되었는데 남원 좌영은 숙종 34년(1708)에 운봉으로 옮겨지면서 운봉현감이 영장을 겸하였다. 이는 운봉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제압할 수 있는 군사적이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4) 역원제
조선시대에는 군제와도 밀접한 행정 보조 기구로서 교통, 통신제도인 역원제(驛院制)를 두었다.
원(院)은 고려, 조선 시대에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박소로 각지의 요로나 인가가 드믄 곳에 두었으며 인근 거주자 주에서 원주(院主)를 뽑아 이를 위임 관리케 하고 토지를 지급하였다. 운봉현에는 고려시대의 여원, 중흥원, 대공원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역(驛)은 공문서의 전달, 관리의 왕래와 숙박, 관물의 수송을 돕기 위한 기관으로서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모든 역승이 찰방으로 승격되고 그동안 역(驛)의 이속(移屬)과 폐지. 증설의 변화가 있었으나 계수도(契樹道)에 속한 인월역(引月驛)은 고려시대나 크게 변동이 없었다. 역장(驛長, 찰방-종 6품). 역리(驛吏, 역승-종 9품). 역졸(驛卒) 등을 두어서 역원의 관리와 공무를 담당케 하였다. <남원지>의 조선 후기의 인월역 인월체계와 경제구조를 살펴보면, 관리 138명, 남자종 39명, 여자종 3명, 망 4필, 위전답(位田沓) 15석 6두 5승 마지기(落), 복호(復戶) 28결, 보인(保人) 28명, 역졸(率) 14명, 일수(日守) 10명이 편성되어 있었다 <여지도서>. 운성지(1922)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역원(驛院)
인월역(引月驛) : 고을의 동쪽 16리에 있는데 이태조가 왜구를 격파한 곳이며 남원에 예속되어 있다. 오수역리 15인 노비 14인이 있다.
여원(女院) : 고을의 서쪽 7리에 있는데 옛 유허지가 있으며 그 곁의 바위에는 여인상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어디에 근거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중흥원(中興院) : 고을 동쪽 7리에 있는데 폐허가 된지 이미 오래이며 옛 유허지에 기와 부스러기만 남아 있다.
대공원(大功院) : 황산 아래에 있는데 아직도 유허지가 남아있다.
5) 행정 및 호구
지방 행정 보조 기구인 면(面)과 리(里)를 고려시대 이전에는 다 같이 촌(村)이라 하였다. 신라 때는 하나의 주, 군, 현이 상촌(上村-일촌), 중촌(中村-2촌), 하촌(下村-3촌)이라 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한 고을을 동촌(東村), 서촌(西村), 남촌(南村), 북촌(北村)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면(面)과 리(里)를 채택하였는데 <경국대전> 호전(戶典)에 의하면 5호(戶)를 1통(統)으로 통주를 두고, 5통 즉 25호를 1리로하여 리정(里正)을 둔다고 하였다. 그러나 면(面)은 인구수로 정하지 않고 면마다 권농관을 두었다. 조선초기에는 촌, 방(坊), 사(社), 리, 부(部) 등이 널리 쓰였는데 남원은 조선 말기까지 면(面)을 방(坊, 혹은 里)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인 정조 13년(1789) 남원도호부는 47방(坊) 411리에 호구수는 11,157호이며 인구수는 43,411명이었다. 운봉현은 7면(面) 62리 2,105호에 인구수는 7,055(남 : 3,754, 여 : 3,301)명이었다. 운봉현의 면별 리․호구수는 다음과 같다.
<표 1-7> 운봉현의 면별 호구수 - 1789년
면(面)
리(里)
호(戶)수
인 구 수( 남, 여)
읍 내 면
5
420
956 ( 589, 367 )
동 면
12
334
1070 ( 578, 492)
남 면
9
268
963 ( 513, 450)
서 면
9
337
1271 ( 585, 686)
북 상 면
9
231
899 ( 505, 394)
북 하 면
7
271
995 ( 521, 474)
산 내 면
12
244
901 ( 463, 438)
계
62
2105
7055 ( 3754, 3301)
단종 2년(1454)에 발간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운봉현의 호구수는 129호에 인구수는 551명이었다. 남원의 좌영을 운봉으로 옮긴 1708년 호구수는 1368호, 영조 36년(1760)에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2024호로 인구수는 4823명(남 : 2,602, 여 : 2221)으로 운봉현의 인구현황이 7개 면별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22년에는 4843호(운성지 후편), 1957년에는 5437호에 인구수 31,707명(운성지 속편)이었다. 1996년 현재는 5,100호에 인구수 17,040명으로 4개읍면의 인구수는 과거에 비하여 매년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조선시대의 일반사회는 토지가 일부 양반 가문에 집중되어 빈부의 차이가 심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지리산 아래 척박한 운봉은 토지를 갖지 못한 절대 빈곤층이 대부분이어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도는 유랑민들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조정 관리나 양반세가(兩班勢家)의 수탈과 부역, 세금의 징수를 피해 달아나는 자가 비일비재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인구조사는 매우 유동적이고 관리들이 문서로서 조정에 보고하는 인구 조사는 조작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1922년 간행된 운성지의 호구 숫자와 1934년의 호남지에 기록된 숫자가 동일하다. 따라서 문헌상에 나타나는 운봉고을의 과거 인구 현황은 다소 사실적이지 못하다.
나. 운봉현 관아
운성지(雲城誌, 1758)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관공소
내아 (內衙) : 객사의 서편에 있는데 15칸, 행랑 7칸, 성문 1칸이 있다.
근민당(近民堂) : 내아 남쪽에 있는데 10칸이며 일명 주루(籌樓)라 한다. 성문은 동서에 각각 1칸이 있으며 마구 4칸, 대문 3칸, 헐소 1칸, 중대문 3칸, 누문 3칸이다. 숭정 을미(1655)에 현감 신헌주(申憲周) 중건하다.
좌소헌(坐嘯軒) : 근민당 북쪽에 있는데 3칸이다. 숭정 무신(1668)에 현감. 홍제형(洪濟亨)이 창건하다.
향사당(鄕射堂) : 근민당 남쪽에 있는데 5칸이며 지공청 5칸, 대문 4칸, 좌수 1인 별감 2인, 상정도감 1인이 있다.
현사(縣司) : 향사당 뒷편에 있는데 3칸이며 행랑 5칸, 대문 1칸, 호장 1인, 고자 1칸, 관노 12인, 관비 13인이 있다.
작청(作廳) : 근민당 동쪽에 있는데 7칸이며 행랑 5칸, 대문 1칸, 이방 1인, 호방 1인, 예방 2인, 병방 2인, 형방 2인, 공방 1인, 승발 2인, 향리 11인이 있는데 모두 박씨이다. 이 고을에 복역한 자는 오늘날 360여명에 이르며 연공생(年貢生) 1인이며 가리(假吏) 12인이다.
통인청(通引廳) : 작청 서편에 있는데 4칸이며 공생 1인, 통인 7명이 있다.
사령청(使令廳) : 중대문쪽에 있는데 3칸이며 사령 10인이 있다.
본청(本廳) : 근민당 남쪽에 있는데 4칸이며 행랑 3칸, 행수군관 1인, 병방군관 1인, 군관 30인이 있다.
훈련청(訓鍊廳) : 누문 남쪽에 있는데 5칸이며 행랑 4칸, 대문 1칸 천총 1인, 파총 1인, 초관 3인이다.
군기청(軍器廳) : 객사 남쪽에 있는데 6칸이며 행랑 3칸, 감관 2인, 색리 2인이 있다.
관청(官廳) : 관아의 서편에 있는데 5칸이며 관행랑 5칸 감관 1인, 색리 1인 고자 1인이 있다.
대동청(大同廳) : 관청에 있는데 5칸이며 대문 1칸, 감관 1인, 색리 1인, 고자 1인이다.
진휼청(賑恤廳) : 대동청 부속이며 감관 1인, 색리 1인, 고자 1명이 있다.
보민청(補民廳) : 대동청 뒷편에 있는데 도감 1인 색리 1인 고자 1인이 있다.
입마청(立馬廳) : 오늘날은 없어졌다.
객사(客舍) : 관아의 동편에 있었다. 현재 운봉초등학교 자리이다. 대청이 3칸인데 북쪽 벽에 감실을 안치하여 전패(殿牌)를 봉안 하였으며 동헌 3칸, 서헌 3칸, 중문 5칸, 바깥대문 3칸이 있다. 현감 이만지(李萬枝)가 중건하였다.
2) 창고
누상고(樓上庫) : 근민당 동쪽에 있는데 3칸.
군기고(軍器庫) : 청 서편에 있는데 3칸.
관청고(官廳庫) : 청 동쪽에 있는데 7칸.
대동고(大同庫) : 청 남쪽에 있는데 5칸.
진휼고(賑恤庫) : 대동고 좌편에 있는데 7칸.
보민고(補民庫) : 대동고 우편에 있는데 5칸.
사창(司倉) : 관문 서편에 있는데 42칸이며 도청 5칸, 대문 1칸, 감관좌수 겸 색리 1인, 고자 1명 역인 4명이 있다.
외창(外倉) : 북상면 방축리에 있는데 정축년에 동고 14칸, 서고 14칸, 도청 3칸, 대문 1칸을 설치하였고, 도감 1, 색리 1, 고자 1명, 역인 8명을 두었다.
3) 감옥
형옥(刑獄) : 관문 동편내에 있는데 중고 3칸, 남고 3칸, 여고 3칸, 쇠장방 5인, 형방 1인, 쇠장 1명 감고 1명이 있다.
4) 병영
진장(陣場) : 현남 1에 있는데 장대 5칸이다.
대변청 (待變廳) : 관문 남쪽에 있는데 5칸이며 병방 1인, 군관 50, 군뢰 59명, 취각 수 95명이다.
토포청(討捕廳) : 대변청 서쪽에 있는데 병방 1인 군관 80명이다.
진리청(鎭吏廳) : 대변청 동쪽에 있는 3칸으로 진리 1인, 토포형리 1인이다.
지구청(知 廳) : 관문 동쪽에 있는데 5칸이며 행랑 3칸, 대문 1칸, 지구관 2인 기구관 2인 기패관 17인, 수졸 21인 대포수 6인이 있다.
기치(旗幟) : 사명기 1, 정도 2쌍, 순시기 3쌍, 령기 3쌍, 관이령전 1쌍 영장수기 1, 영막 1, 대오방기 5면, 중옥방기 5면, 각기 8면 고초기 5면, 문기 10면, 금고기 1쌍, 수기 1면 시열기 1면, 표모기 1좌, 독 1이 있다.
진속현읍 (鎭屬縣邑) : 남원 장수 구례 곡성 옥과 창평. 토포(討捕)는 순창 담양에 가한다.
5) 비각
비전(碑殿) : 화수산 아래에 있는데 왜구를 물리친 태조의 공적을 기린 비석이다. 전각 3칸, 전문 1칸, 수직료 5칸, 직사 3칸이 있다. 승장 1명과 의승이 1개월씩 번갈아 가면서 지키되 그 전에 한 사람이 거주하였다. 만력 5년(1577) 정축에 현감 박광옥(朴光玉)이 비석을 세우고 숭정(崇禎) 정미(1667)에 현감 허제(許濟)가 전각을 세우고 참판 이정영(李正英)이 칙명을 받들어 전면의 전서를 씻고 예조정랑 김지성(金之聲)이 교칙을 받들어 액자를 달고 유학 오정익(吳廷益)과 출신 류진립(柳震立)이 감독하였다.
6) 운봉 좌영
용성지(1699)에 의하면 좌영 군병수는 남원 - 2687명, 장수 - 459명, 운봉 - 356명, 곡성 - 343명, 창평 - 521명, 옥과 - 390명, 구례 - 179명 등 내장관(內將官)을 포함하여 7읍 합계 장병이 4935명 이었다.
한편 숙종 34년(1708) 남원성 남문 밖에 있던 남원 좌영이 운봉으로 옮겨온 이 후 정조년간(1777-1800) 운봉 좌영의 규모를 살펴본다. 1758년에 간행된 운성지 기록 의하면 <표 1-8>과 같다.
<표 1-8> 운봉 좌영 구성 현황
현감겸좌영장
1
좌수
1
별감
2
군관
30
아전
28
지인(知印)
13
사령
15
관노
14
관비
11
진속천총
1
파총
1
지구관
2
기고관
2
초관
3
기패관
16
대변군관
토포군관
80
진리(鎭吏)
2
군졸
59
취각수
95
군병수는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포수보 : 89명.
어영청정군 : 36, 자보(資保) : 39, 관납보 : 72, 별파진보 : 6.
금위영정군 : 47, 자보 : 50, 관납보 : 89.
병조기병 :192, 보군(步軍) : 222.
금군보(禁軍保) : 160, 보직(洑直) : 1.
호연대보(扈輦隊保) : 3.
사복사제원(司僕寺諸員) : 15.
호조세질장보 : 3.
조군(漕軍) : 17.
감영장포군(監營匠布軍) : 38.
병영교사기패관 : 1.
좌수영수용군 : 3.
수군(水軍) : 8.
본진화포교사(本鎭火砲敎師) : 1.
별대(別隊) : 31, 보 : 42.
보군수졸기수병 : 294, 보 : 294
총 군병 1773명. 이는 남원에서 옮겨오기 전 군병수보다 914명이 적은 수였다.
<표 1-9> 무기(武器)
철갑주
5건
피갑주
5건
조총
170자루
천보조총
12자루
남비개
182건
이약개
182건
화철
182개
화승
495사리
화약
2219근
연환
134100개
흑각궁
100벌
교자궁
100벌
장전편전
803부
통아
63개
장창
50자루
거마조
32좌
능철
300개
나팔
1
대고
2건
중고
3건
소고
5건
대쟁
4건
포관혁
17기
사관혁
8기
<운성지(1758) 참고>
<그림 1-7> 조선시대 운봉 관아
다. 운봉의 임진왜란
1) 전황
조선 선조 25년(1592)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은 반대 영주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막대한 해외무역의 이득을 취하고자 2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1592년 4월 14일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약 1만8천 병력으로 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4월 18일 2군을 이끄는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3군을 이끄는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3로(路)로 나누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 신립 등 죽음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왜군에 대한 방어작전은 모두 실패하였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난길에 오른다.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3군은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방면으로 진격하고, 구로다 부대는 서울에 남아 강원, 경상,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운봉은 과거부터 군사 요충지였던 만큼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조선군과 명군 그리고 왜군의 주요 이동 경로로 양군의 일대 접전은 없었으나 남원성 함락에 따른 군사활동 지역으로 왜군의 점거지역으로 전지역이 초토화되었다. 전란이 끝나자 황폐해진 운봉현은 인구 격감으로 현으로서의 행정 기능을 수행할 수 없어 선조 33년(1600) 남원도호부에 병합되었다가 광해군 3년(1610) 신해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중 운봉의 형편은 어떠했는지 조경남의 「난중잡록」을 통해 아군의 활동 상황과 왜군의 만행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선조 25년, 임진(1592)년 4월 19일>
전라 순찰사 김수가 군사 1천 3백명을 거느리고 운봉에 도착하여 영남의 밀양, 영산, 청도가 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경상감사의 공문을 운봉현에 전달함.
<4월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과 조방장 이지시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향함.
<5월 5일>
본도 순찰사 김수가 함양에서 운봉으로 왔다가 초유사를 만나 경고를 받고 다시 함양으로 돌아감.
<5월 24일>
5월 23일 진주에서 도착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을 운봉 현감이 전라 순찰사에게 급히 달려가 보고함.
( * 운성지에 의하면 운봉현감으로 임진년(1592) 4월 민정봉이 교체된 후후임으로 남간이 이듬해 계사년(1593) 6월에 부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임진년 기록들로 보아 임진년(1592) 6월에 부임한 것이 옳다고 보여진다.)
<10월>
운봉 현감 남간이 본도 관군 5천여명을 거느리고 해인사에 진군하여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함.
<11월>
운봉의 팔량치에 새로 성을 쌓고 조방장 이복남과 운봉현감 남간이 지켰다.
<선조 26년(1593) 6월 19일>
전라병사 선거이와 홍계남이 운봉에 진을 쳤다.
<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 당하여 6만여명이 죽었다. 이빈(李賓)이 선거이 등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함양에서 물러나 원수에 임명된 권율과 함께 운봉에 주둔하였다.
<선조 26년(1593) 7월 6일>
이빈. 홍계남이 운봉으로부터 진을 남원으로 옮김.
<7월 8일>
승의병장(僧義兵長) 유정(惟政-사명당)이 영남으로부터 승병을 거느리고 남원에 진군.
<7월 9일>
도원수 권율은 운봉으로부터 임실로 퇴각하였다가 다시 남원에 입성.
<8월>
권율이 비밀리 운봉 현감 남간에게 명하여 남원좌수 최경지, 도훈도 고경우와 정오장 등을 베게 하였다.
<8월 22일>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은 성주 팔거에 진을치고 있다가 명나라 원병의 총지휘를 맡은 송응창이 이여송과 함께 본국으로 송환되어 돌아가자 단기(單騎)로 서울로가서 환송하고 팔거 본진으로 돌아가는 길에 운봉 여원치 아래 암벽에 다음과 같이 석각(石刻)하였다.
‘천조 정왜도독 예장 성오 유공 정은 모월 모일 여기를 지나다(天朝征倭都督豫章省吾劉公綎某月日過此)’
<선조 28년(1595) 1월 6일>
권율이 남원에서 영남으로 향하였다.
<선조 30년(1597) 8월 16일>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대가 함양에서 운봉으로 진군하였다. 운봉 황산 부근에는 왜병으로 가득차 득실거렸고, 조경남이 밤중에 고촌(고기리)에 내려가 보니 왜병이 넘쳐나 길을 뚫고 진군하기 어려워 황류천을 건너 향로봉의 북쪽 기슭 아래 은신암(隱身庵) 옛터에 주둔하였다. 남원성이 함락되었다. 성을 방어하던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부민(府民) 등 1만여명이 전멸하였다.
<8월 17일>
소서행장의 군대는 임실을 분탕질하고, 가등청정의 군대는 모두 운봉으로 들어갔다.
<8월 18일>
행장의 군대가 전주로 향하자 진우충은 전주성(全州城)를 버리고 달아났다. 운봉에 주둔하던 청정의 군대는 다시 남원으로 향하여 1대는 남원 안신원(安信院 - 남원 동쪽 30리)으로, 다른 1대는 구등굴(九等窟)을 거쳤다. 왜적 5명이 원주(原州)로부터 구등굴에 이르러 조우하더니 왜군 양쪽의 군대가 모두 운봉으로 돌아가 며칠을 머물렀다. 이어 지리산으로 들어가 사찰에 유숙하거나 산꼭대기에서 노숙하면서 난을 피해 숨어들어간 우리 양민을 수색하여 죽이고 약탈하는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8월 20일>
청정의 군대가 운봉에서 장수(長水)를 향하는 도중 남원 동천, 번암, 철천 등지에 머무르면서 차산(差山)에서 대 수색을 벌였다. 이곳은 근방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해 있던 곳인데 남김없이 당하였다.
<9월 19일>
왜군 만여명이 남원에서 운봉으로 향하면서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이 때 운봉․함양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가 추수를 하는데 갑작스레 살해 당하고 약탈당하는 것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11월 24일>
산음과 사천에서 주둔하고 있는 왜군이 함양․운봉을 분탕질하고 살생노략질을 일삼음.
<선조 31년(1598)>
유격 남방위(藍芳威)가 남원으로부터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이동함.
명나라 군사 천여명이 남원에서 운봉을 거쳐 함양으로 갔다. 난방위 군대가 산음에서 적병 40여 급을 베고 운봉으로 퇴진하였다.
<8월 29일>
유정(惟政-사명당)은 군사 50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에서 남원에 도착 후 주포(주생면)에 진을 쳤다. 사천의 왜병 500명이 지리산에 난입하여 두류(頭流), 금대(金臺), 안국(安國) 등의 절을 뒤지며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장장 7년간에 걸친 왜란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싸움터였던 조선의 국토는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또한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국난을 당한 우리 선비와 백성들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전국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애국심의 기개를 만방에 표출하였다. 지리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문향(文鄕)과 무향(武鄕)을 겸비한 운봉은 소읍(小邑)임에도 불구하고 걸출한 의병, 그리고 정절을 목숨보다 귀히 여겼던 절열(節烈)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 중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의병과 절열을 소개한다.
2) 의병
이충신(李忠信) : 본관 양성. 운봉출생. 무과에 급제하여 간성군수가 되었다. 임진년(1592)에 의병을 규합하여 달천 전투에 참여 신립과 함께 장렬히 전사(순절)하였다.
이경신(李敬信) : 이충신의 아우. 훈련판관으로 이순신 휘하에서 참전하여 군선을 관리하고 군비를 갖추는데 전력하여 공적이 많았다. 충신․경신 두 형제가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1990)의 임진왜란 의병 명단에 서식과 함께 2명의 운봉 출신이 수록되어 있다.
서식 : 호 명암(銘巖). 본관 달성. 운봉출생. 봉사(奉事) 충립의 아들. 임진년(1592)에 김천일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병으로 물러났다. 정유년(1597)에 다시 호남과 영남에서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세워 여러 인접 고을에 격문을 띄웠다. 피난민을 규합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몸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팔랑치 합미성 요새를 점거하여 왜병의 북진을 차단하고, 운봉 황산 싸움에서 큰 전공을 세워 운봉을 수호하였다. 그 공로로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지주 황일곡에게 의병 수천을 청하여 천안에서 충성을 다해 싸움(근왕). 잇따른 전란으로 마을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향약 7조를 제정, 사재를 털어 향토부흥에 공헌하였다. 또한 고을 남쪽 엄계마을 명암이란 곳에서 거처하며 자호를 삼았다. 엄계서원에 신주를 모셨으며, 운봉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운성지에 그의 격문(檄文)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코자 함은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이 날뛰어 고을을 도륙하고 한양을 침범하여 임금께서 파천하기에 이르러 모든 신하와 백성이 애통해 함을 어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의 원병이(援兵)이 옴으로써 안도의 숨을 돌리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저 흉칙한 무리가 다시 침략하려는 뜻을 내어 영남을 거쳐 호남을 핍박하여 죽어간 백성이 말할 수 없을 지경이며, 임금의 깊은 근심은 잠못이루는데 그치지 않았다. 때마침 나는 선비들의 추대에 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황산의 요새를 수비하여 팔량치를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아내자 왜적들이 우리군사가 많을 것으로 착각하고 지리산으로 퇴각 했었다.
근래에 하동 등에 산재한 왜적들과 합세한 자들이 머지 않아서 구례와 남원 길로 쳐들어 올 것이 분명하다.
이로 볼 때 모든 이들은 속히 향병(鄕兵)을 징발하여 먼저 남원의 숙성령과 곡성 압나루를 방어하면 왜적이 또다시 황산의 방어처럼 있을까를 의심하여 쉽사리 침략할 수 없게 하고, 곧바로 앞의 고을과 호서지방에 격문을 전하면 사기가 진작되고 원병이 이르게되어 용맹스런 병사가 앞에서 공격하고 노량진 수군이 퇴로를 공격하면 적장의 머리를 곧바로 대궐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호남․영남의 사이에서 적의 상황을 탐지하여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대략 서술하여 인접 여러 고을의 제 군자에게 고하노니 바라건대 속히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기를 바라는 바이다.
변사정(邊士貞) : 운봉 도탄에서 살았다. 중간(仲幹)이며 호는 지명 이름을 따서 도탄(桃灘)이라하고 본관은 장연(長淵)이다. 중종 24년(1529)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충효가 출천(出天)하고 옥계(玉溪) 노진(盧縝)․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학문에 전념한 결과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쌓았다. 벼슬을 사양하고 지금의 산내면 영대마을 뒤를 흐르는 도탄에 은거하다가 선조 16년(1583)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선조 23년(1589) 정여립의 변란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선조 23년(1590) 재차 참봉의 제수를 받았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최경희, 임계영 등이 이끄는 세 곳의 의병부대에 군량과 무기를 제공하였다가 그들이 패하자 분연히 일어나 순천에서 의병을 모아 불과 열흘 만에 2천여 명을 모집하였다. 만헌 정염과 현감 양사형이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니 자칭 “적개장군”이라 하였다. 그는 높은 충성심과 용감한 의병활동으로 많은 전과를 남겼다. 순찰사 권율이 수원 독성(禿城)에 있으면서 구원을 요청함에 의장 임희진과 함께 달려가 구원하였다. 옥산에서 호서지방을 노략질하는 적을 수색하여 20여명을 참획하고 부장 이잠과 함께 황간에서 50여명을 쳐서 베었으며, 진사 김여중과 창원에서 30명을, 함안에서 40명을 베니 이사실을 제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였다. 또한 성주와 대구 등지에서 명군과 합세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진주성 싸움 때 회주와 산음에서 군량 수백석을 모집하여 운반하던 중 성이 함락되어 함께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적의 호남 침범을 막기 위해 영․호남의 관문인 함양 팔랑치 합미성에서 적병을 참획하여 호남지역의 피해를 막았다. 선조 27년(1594)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 병력을 파해 순찰사 권율은 변사정을 남원수어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승려 의영을 시켜 교룡산성을 보수케 하였다. 선조 28년(1595) 첨정에 승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조 29년(1596) 향년 67세에 전장의 피로로 죽었다. 흥부전 발상 고증(1993)에 의하면 변사정은 임진왜란 14년 전부터 전란을 예견하였으며 흥부마을 복성촌이 난을 피하는 명당터로 흥부에게 집터를 잡아주었다고 전한다. 운봉 가산리 용암서원에 배향되었다.
3) 절열(節烈)
민씨(閔氏), 조봉대부 오사종(朝奉大夫 吳嗣宗)의 아내. 참봉 효원(孝源)의 딸이다. 정유재란 당시 지리산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갑자기 왜적을 만났다. 뒤쫓아 오는 왜적을 피해 도망하다가 실상동에 이르렀는데 아래에는 수백척 깊이의 부연(釜淵)에 다다랐다. 6살 되는 남아를 땅에 놓아두고 연못 위 바위 끝으로 달려나가 어린아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 때문에 차마 욕을 당할 수 없으니 차라리 모자의 사랑을 끊고 자결할 것이다” 하고서 마침내 왜적을 꾸짖고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하니, 왜적이 서로 돌아보면서 망연실색하여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때문에 남녀를 쫒을 때 느슨하게 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렸으며 <속삼강행실>에 기재되어 있다.(운성지 상권). 그 후 후손인 지소 오상봉(吳相鳳)은 7세조비인 민씨의 순열비를 양지촌 북쪽에 세웠으며, 부연 북쪽에도 절열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다.
라. 병자호란과 운봉
1) 전황
병자호란은 1627년 후금(후에 청)의 조선침략, 즉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있은지 9년 후인 인조 14년(1636) 12월에서 인조 15년(1637) 1월까지 조선과 청나라와의 싸움이다. 당시 조선은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청의 요구에 응하자는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 척화론자들의 세력이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묵살하자 1636년 12월 2일 청태종은 청.몽고.한인으로 편성된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백마산성 수비에도 불구하고 청은 12월 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1637년 1월 1일에는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세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는 20만의 청군이 집결하였다. 수세에 몰린 조선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현 등이 주장하는 주전파(主戰派)간의 논쟁이 일고 결국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항복을 결정,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만다. 이 후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服屬)되어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할 때까지 230여 년 동안 군신관계가 지속되었다. 정묘. 병자호란 때에 호남지역은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국난을 당할 때마다 전국 각지에서 우국충정의 사민(士民)들이 나라를 구하려고 분연히 일어서곤 하였다. 이곳 남원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활동하였으며 운봉 역시 지리산의 정기와 당찬 기개로 동참한 의병이 있었다. <병자호남창의록>과 병자년 <운성지(1957)>에 수록된 운봉의 창의 인물을 살펴본다.
2) 의병
김율(金溧) : 자는 중연(仲淵)이며 호는 호은(湖隱), 본관은 경주이다. 기품(氣品)과 기국(器局)이 뛰어나 일에 임하여서는 돌아서지 않는 큰 용기를 가졌는데, 병자호란을 당하여 국가 사직이 위급하여 교지를 내리니, 백성들은 절개를 다해 목숨을 바칠 시기였다. 같은 고을의 오정직(吳挺稷)과 아우 결치(潔治)와 함께 행장을 꾸려 의병을 모으는 곳으로 달려가 일도(一道)가 합세하여 많은 적을 물리쳤다. 이에 승승장구하였는데 갑자기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온 이후로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으로 생을 마쳤다. 이 사실은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기재되어 있으며, 동면 취암리에 문중에 의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오정직(吳挺稷) : 자는 순보(舜甫)이며 호는 노은(露隱), 본관은 동복이다. 고려 문하시중 문헌공 대승(大陞)의 후에 대제학 정평공(靖平公) 승(陞)의 8대손으로 직장 홍헌(洪憲의 아들이다. 선조 경자(1600)에 태어났다. 문학이 뛰어났으며 고매한 기상을 지녔는데,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같은 고을 김율(金율), 김결(金潔) 형제와 남원에 이르러 여러 의병을 합하여 여산 모의소(募義所)에 이르러 군량을 조달한 뒤, 북쪽으로 진격하여 과천으로 가는 도중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고향에 돌아와 벼슬하는데 뜻이 없어 노봉(露峰) 아래에 은거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노은처사(露隱處士)라 하였다. 이에 관한 일은 ≪병자창의록(丙子倡義錄)≫에 기재되어 있다.
김결(金潔) : 자는 중호(仲湖)이며 호는 만은(晩隱), 본관은 경주이다. 호은(湖隱)의 아우로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달려갔을 때 여러 의병들이 한 곳에 모여 힘을 규합, 청주에 이르러 한 차례 승리를 거뒀는데, 남한산성에서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며 돌아와 문을 닫고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의병을 일으킬 당시에 지은 그의 5언 절구는 아래와 같다.
“대장부 한 목숨 / 어이 두려워 하랴 / 죽음을 두려워 한 자 / 대장부 아니어라 /
나의 소원은 / 나의 절개 다하는 것 / 이 한 몸 사는 걸 / 원하지 않노라“
丈夫豈怕死
怕死非丈夫
所願全吾節
不望全吾軀
그 뒤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울분을 안은 채, 고향으로 돌아온 뒤 7언 절구를 읊었다.
“강화조약(媾成) 소식 듣고 / 호서 땅 내려올 제 / 군복은 벗겨지고 / 북소리도 멈췄어라 / 남한산성 이 수치 / 천추에 한이리라 / 날마다 부심하며 / 통곡으로 가슴 쬔다“
忽聞媾成下湖西
强脫戎衣解鼓鼙
豈忍千秋城下恥
腐心日日欲唬啼
그에 관한 일은 ≪호남창의록(湖南倡義錄)≫에 기재되어 있으며, 문중에서 건립한 창의 사적비가 동면 계암리에 있다.
마. 무신란(戊申亂) : 이인좌의 난
1) 경과
영조 4년(1728) 3월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계기로 소론의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주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청주성을 함락하여 병사 이봉상(이순신의 손자)을 죽이고 이인좌는 대원수를 자칭하며 밀풍군(密豊君) 탄을 왕으로 세워 왕통을 바르게 한다는 명목으로 청주성을 중심으로 진천(鎭川). 죽산(竹山) 안성(安城) 등지로 반란 세력을 넓혀 갔다. 이인좌는 평안병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 통모하여 서울․평양 등지에서 반군에 호응토록 꾀하였다.
정희량(鄭希亮)은 대대로 안음(安陰)에서 거주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순흥으로 이사하였으며 그 지역에서 권세가 당당하였다. 영조 4년 이인좌, 이응보 등과 안음에서 난을 일의켰으며, 창곡(倉穀)을 털어 군량으로 쓰면서 거창에 침입하여 향임(鄕任) 신명우를 죽이는 등 군세가 크게 떨쳤다. 본래 정희랑과 이인좌는 영남, 호서의 병사를 이끌고 청안소사(天安素砂)에서 합세하여 서울로 북상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정희랑이 병사를 이끌고 안의를 진격하니 현감 오수도(吳遂都)는 교전도 하지않고 도주하였다. 다시 거창에 진격하자 거창현감 신정모(申正模) 역시 도주하고 반군들은 읍민들의 환호 속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반군은 여세를 몰아 경북지방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선산과 상주에서 강력한 방어에 밀려 추풍령을 넘으려던 당초 계획이 실패로 돌아 갔다.
한편 경상감사의 계속된 장계에 조정에서는 병판 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로 삼아 종사관(從事官)인 박문수와 함께 긴급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추풍령을 넘으려던 계획에 실패한 정희량은 함양을 거쳐 호남지방을 우회하려고 운봉까지 진군하였으나 팔랑치에서 운봉영장 손명대의 완강한 방어에 부딫혀 거창으로 후퇴하여 이웅보와 숙의한 끝에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이웅보는 우지령(牛旨嶺)을 넘어 지례(知禮)로 향하고, 정희량은 성초역(省草驛)을 거쳐 무주로 향하려 했으나 선산부사 박필건이 우지령을 막고 전라관군이 무주 진격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인좌는 정희량의 북상을 기다리다 늦어지자 남하하는 관군에 대패하고 부하의 손에 잡혀 이인좌군은 진압되었다. 이인좌군이 진압되자 협천이 함락되고, 정희랑과 이웅보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안의․거창이 관군의 손에 들어갔다. 함양은 운봉 좌영군과 창의군에 의해 진압되고 무신난은 평정되었다. 오명항은 박문수를 남겨서 4개 읍을 진무(鎭撫)케 하고 주모자들을 서울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함양군지, 1995)
2) 함양의 진압 과정
<운성지>를 통하여 당시의 운봉으로 진격하던 정희량군이 팔랑치에서 운봉 좌영군과 의병들의 방어 전략과 함양의 반군 진압 상황을 살펴보자.
함양을 거쳐 전라도 운봉 침입을 꾀하려다 함양 접경지역인 팔랑치에서 운봉 좌영군과 남원 인근 지역에서 우국충정으로 모여든 의병들의 반격에 부딫치게 되었다. 당시의 관군과 의병의 반군 진압 상황을 살펴보면,당시 일부 양반들 중에서 집안 가솔이나 주변 장정(壯丁)들을 데리고 자발적으로 운봉좌영군에 합세하여 반군을 섬멸하는데 참가하는 이가 많았다. 이른바 의병들이었다.
운봉에는 1708년 남원에서 옮겨온 좌영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진영제가 실시되던 운봉 좌영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어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원 「용성지」를 보면 남원 좌영군의 규모가 관할 구역인 7읍을 모두 합한 장병이 총 493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적어도 20년 전 남원에 주둔하던 좌영 병력의 숫자인만큼 운봉 좌영군의 병력은 이보다 훨씬 컸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들 병력의 대부분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다가 유사시에 징발되어 요새지에 부방(赴防)하였다. 따라서 좌영관할 구역에 주둔 중인 장병들과 일반 백성들을 소집하여 운봉으로 총 집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3월 안음에서 기병한 정희량은 산음․거창을 점거하고 함양에 이르렀는데 인근의 지방 수령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반란군은 함양에 머물면서 함양군수로 그곳 토착 부호인 최존서를 임명하였다. 반란군이 팔랑재를 넘는다는 소문이 나돌자 호남지방은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명을 받은 운봉 좌영장 손명대는 좌영군에 예속된 각 진(鎭)의 병사들을 긴급히 소집하여 남원부에서 파견된 남원 천총 강만하를 운봉 황산에 진을 치도록하고, 함양 접경지인 정치(매치)를 방어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진사 오상복은 운봉 사람으로 타고난 바탕이 온후하고 부모를 잘 섬겨 효행이 극진하였다. 또한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일찌기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인격 또한 고매하여 대인 관계에 신망이 두터웠다. 좌영장 손명대는 운봉 지리와 계략에 탁월한 진사 오상복을 참모격으로 진압 작전 내내 항상 곁에 두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진사 오상복의 의견에 따라 적정을 살핀 손명대는 진지를 다시 팔랑치와 황산에 방어 진지를 옮겨 반란군의 진격에 대비하였다. 한편 운봉 좌영군에 모여든 의병들의 사기 또한 관군 못지 않게 의기 충천하였다.
운봉 좌영군의 주요 무기로는 1758년 간행된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조총 170자루, 천보조총 12자루, 화약 2219근, 활(흑각궁,교자궁) 200벌, 장창 50자루 등이다. 운봉 좌영내 훈련청에는 장관급인 천총(정3품) 정준규와 파총(종4품) 그리고 초관 3인이 있었고, 진압군의 총지휘자는 좌영장(정3품)인 운봉현감 손명대였다. 손명대는 1등 선봉장으로 박필청을 임명하고 2등 중군(中軍)에 오상복에게 남원부 천총별장으로 추천을 받은 강만하, 선봉장에 장한삼, 독전장에 박기룡, 초관에 최여대(崔汝大), 박신일, 배일대, 3등 지구관 이치달, 지구관 이재방, 기고관 최만흘, 이만점, 파총 김성옥, 호궤감관 임동필, 한량 김윤구, 군관 박완업, 박석빈, 김운채, 서치도, 김호량, 최석태 등을 임명하고, 팔랑치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 반란 진압 작전을 펴는 한편, 관군과 남원 각지에서 몰려든 의병을 배치하여 이들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반란군이 함양에 이르러 장차 남원을 공략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연히 궐기하여 80여명의 의병을 모아 남원 창의소로 달려간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만광과 그의 재종동생 김수태였다. 3월 20일 남원부병(府兵)과 함께 운봉 좌영으로 입소하여 좌영병과 합세하여 200여명이 팔랑치를 향하여 출발하려 할 때, 손명대가 진중 병사와 창의병을 향하여 ‘누가 능히 함양적가태수(咸陽賊假太守 - 僞守) 최존서(崔存緖)를 포박하여 오겠는가? 하고 묻자 김만광과 김수태가 앞으로 나서며 병사 천명만 주신다면 반드시 적을 섬멸하고 최존서를 잡아 오겠습니다.’ 하였다. 손명대는 의병 중에서 김만광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병사 1천명을 주었다. 이어 진사 오상복의 천거를 받은 박상채를 수문장으로, 마을 장정 50여명을 이끌고 온 태윤주, 직접 부장 직책을 자원한 한팔기, 남원 수성장 정희, 이시빈, 진광두, 김상덕, 배왈대 등을 팔랑치와 황산 방어에 배치하였다. 오도창은 남원성을 지킬 계책을 마련하다가 아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최여삼, 태윤주와 함게 팔랑치 방어에 합세하게 하였다. 또한 비분 강개한 한상지는 남원부사에게 달려가 그 자리에서 격문을 지어 전주감영으로 보내었으며, 안야는 스스로 격문을 지어 남원 각처에 띄우고 집안에서 부리던 종 수십명과 가산으로 마련한 군량을 가지고 온 박시채와 남원향교 장의 장우정, 최제현, 최여대(崔與岱), 황대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70여명을 모아 남원성을 지켰다. 또 뒤에서 의병 및 군량 조달로써 보이지 않는 공로를 세운 의병도 많았다. 김만익은 가동(家僮)과 마을의 장사 100여 명을 모집하였고 양곡과 소와 술을 마련하여 운봉 황산 바어에 합세하였다. 그 외 장우현, 최여옥, 한동섭, 황익계 등도 의병과 군량을 모아 다른 70명의 의병 들과 함께 남원성을 지켰다.
함양에서 진격하던 반군은 팔랑치의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방어진지를 뚫지 못하고 며칠 동안 대치하더니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대로 후퇴하였다. 4월 3일, 진압군의 독전장 박기룡은 김만광 등과 함께 합세하여,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려 하자 병사들이 몸을 사리며 진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 나와 현주(玄酒-제사지낼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물)로써 일배(一盃)한 다음 북향사배 후 죽음으로서 하늘에 맹서하니 군사들이 비로소 감동하여 용기 백배하여 찌를 듯한 기세로 함양을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의병 배왈대는 명을 받아 수시로 함양과 진지를 오가며 적정을 살펴 진압군은 적의 동태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치밀한 작전 계획에 의해 총 공격을 시도하니 갑자기 허를 찔린 반란군들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혼비백산 흩어졌다. 진압군은 그 위세를 몰아 함양 관아를 포위하고 최존서를 생포하도록 명하였다. 관아를 들이 치며 방안에 들어서자 방안에는 아직도 담배연기가 남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진압군의 재빠른 공격에 미쳐 몸을 피하지 못하였음이 분명하였다. 관아 내에 숨어 있을 것을 짐작하고 군사를 독려하여 관내를 샅샅이 수색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윽고 군사들은 최존서가 관청 뒤 대밭에 숨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부장 김만광이 군사들과 달려가 주변을 겹겹히 둘러싸고 생포하려 하니, 최후 발악을 하는 최존서가 눈깍짝할새에 김만광의 왼쪽 허벅지를 찌르며 달려들었다. 김만광은 급히 몸을 돌렸으나 미쳐 창끝을 피하지 못하고 그만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여러 군사가 달려들어 창을 빼앗고 최존서를 사로 잡았다. 이어 관아 이곳 저곳에서 붙잡은 반군 포로들이 수십명이 되었다. 진압 작전을 성공리에 마치고 적의 포로를 압송하며 운봉을 지나는 도중에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팔랑치에서 여원치까지 길게 나열하며 환영하였다. 관군과 창의군이 운봉 좌영에 개선하자 손명대는 최존서를 당장 그날로 처형하였다. 이틀 후 수훈을 세운 김만광은 남원부로 돌아가는 도중 다리의 상처가 워낙 깊어서인지 원천방(주천면)을 지나면서 숨을 거두었다.
소권은 그의 아우 소성이 반군 송하와 비밀리에 내통하며 협조하는것을 알고 꾸짖으며 말렸으나 아우는 칼로 소매를 자르고 떠났다. 그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글을 지어서 사당에 고한 뒤 관청에 달려가 이를 알렸다. 그는 죽음을 면하고 고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추정을 기리고자 정조 때에 이르러 정려가 내렸다 한다. 또한 아직 잔당이 임실 호미산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낸 배왈대는 밤길을 타고 180리를 달려가 반군 석망을 사로잡아 돌아 왔다.
한 달여 동안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던 반군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이 후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아 정권은 노론계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의 무신란 진압에 무공을 세운 운봉 좌영장 손명대(孫命大)는 숙종 23년(169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며, 영조 3년(1727) 운봉영장에 취임하였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평전한 공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정3품)에 승진하였으며, 그 후 평안북도의 선천방어사(宣川防禦史-종2품) 등을 거쳐 영조 9년(1933) 제주목사로 부임 도중 전남 강진에서 병사하였다. 운봉 무신란의 공적을 기린 사적비가 운봉 축산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본래 비석은 순조 7년(1808)에 운봉초등학교 동남쪽 빗독거리(비석거리)에 세워졌으나 도로확장 사업으로 25년 전 현 위치로 옮겨졌다.
무신란(戊申亂)에 대해 운봉의 온화하고 그윽한 선비 오상복(吳尙福)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젯밤 동남쪽 반역의 기운 일어
일곱 고을 병마소리 유영을 울리었네
이 몸 또한 그 덕화 입었으니
숲 아래 무슨 마음으로 술취하여 지내랴
오상복(吳尙福)의 호는 휴정(休亭). 본관은 복천(福川). 고려시중대승(大陞)의 후손이다. 숙종 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무신란의 공적으로 좌랑을 증하고 정문충공의 사우에 배향했다.
바. 운봉과 병인양요
고종 2년(1865) 천주교 신자가 2만 3천명에 이르자 고종 3년(1866) 1월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남종삼, 정의배 등을 비롯한 8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를 죽였다. 이 때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은 당시 중국 천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오즈 제독에게 보고하여 1866년 9월에 전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 3명의 안내로 인천 앞바다를 거쳐 양화진, 서강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가더니 10월에 다시 7척의 전함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 왔다. 10월 16일에는 강화부를 점령하여 무기와 양식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한편 문수산성을 지키던 한성근(韓聖根)은 120명의 프랑스군을 격퇴시켰고, 11월 9일에는 정족산성을 지키던 천총 양현수에게 패하여 도주하였다. 11월 8일 드디어 로오즈 제독은 전함대를 거두어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 난을 계기로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정책을 더욱 고집하고 천주교 탄압을 강화 하였다.
이렇게 국난을 당하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으병을 초모하였다. 이 때 운봉의 기개넘치는 선비들이 격문을 돌리며 나라를 돕고자 의롭게 일어섰다. <운성지>에 기록된 의병은 다음과 같다.
오상봉(吳相鳳) : 호는 지소(止巢)이며 본관은 함양이다. 본래 타고난 자품이 훤출하였고, 지론이 정대하여 좌석의 사람들이 숙연케 하였다. 석남․금곡 두 선생에게 예를 물었고 노사 기정진 선생에게 집지(執贄)하여 호를 주어 기록하였고 7세 조비 민씨의 순열비를 세웠으며, 선비 김한충과 유소(儒疏)를 제창하여 만동묘(萬東廟)의 중건을 청하였고, 병인년에 해구(海寇 : 프랑스인)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서양인이 물러가니 그만 두었다. 사림(士林)이 이 사실을 도관찰사에게 알리려 하니 공은 그 추천장을 찢어 버렸고, 비석을 세워 그의 행동을 기리려 하니 그 비를 부셔버리기도 하였다. 도백 이병문(李秉文)이 조정에 등용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겼으며, 갑신에 김문경공․조문열공 두 선생을 문묘(文廟)에 올려 합사(合祀)할 때 어제(御製) 축문은 다음과 같다.
“국왕이 삼가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 오상봉(吳相鳳)을 보내어 감히 고하노라 하였다.” 당시 사람이 추앙하였으며, 복부집(覆部集)이 있는데 노사 기정진이 명명한 책이름으로 그가 서문을 썼고 면암 최익현이 묘갈명을 지었다. 운성지에 그의 척사문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척 사 문(斥邪文)
우(右)에서 통고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디 서생의 한 사람으로 병사(兵事)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서양의 오랑캐가 바다에 정박하게 된 것은 예의동방에 사술(邪術)을 행하려고 한 것이다. 우리 나라는 단군으로부터 오늘날까지 4천수백년이지만 신하는 충성하고 자식은 효도하였으며 배웠던 것은 공자의 도이며 읽었던 책은 주자의 책인데 무뢰한 서양 오랑캐들이 바른 학문을 하는 우리 나라에 사악한 법을 행하게 할 수 있겠는가. 독서한 사람들이라고 이름 붙인 사람들이 이를 말끔하게 없앨 기회를 엿보지 아니하고 어떻게 머리를 숙인채 입을 꼭꼭 닫고 있을 수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이를 우려하고 백성들은 위태롭게 되었으니 오직 우리 바른 학문을 한 사람들은 소리를 함께 하고 조짐을 막는 뜻으로써 장차 관아로 달려가 도내에 통문을 낼 것을 생각하면서 먼저 향교에 고하노니, 이 통문을 밖으로 면면촌촌에 고하여 의리를 지닌 사람으로 하여금 익히 의논하고 널리 도모하여 사악한 법을 막아준다면 매우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는 바이다.
오한두(吳漢斗) : 호는 수헌(睡軒)이며 본관은 동복이다. 온화한 덕과 단아한 기품을 지녔으며 학문이 해박하여 유학자들이 경앙하였다. 병인년에 서양인이 강화도를 침략하여 임금이 걱정한 나머지 교지를 내리니, 완산영에서 혈서를 쓰고서 번개처럼 빠른 격문을 보내었다. 공은 절개와 의리로써 강우진(康祐鎭)에게 의병을 모집 할 것을 권하여 지소(止巢) 오상봉(吳相鳳) 명재(銘齎) 서영철(徐泳喆) 등과 함께 전략을 세워 적을 막았다. 그의 몸은 들녘에 있었지만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그의 충성을 알 수 있다. 운성지에 실린 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격 문(檄文)
우리 나라는 단군의 옛 나라요, 기자의 유허지이다. 태조대왕이 이 나라에 왕업을 일으켜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함께 일컬어졌고 어진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충의로운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배출되었다.
어리석은 서양 오랑캐들이 스스로 ‘하늘을 주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학문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말로써 우리 나라 사람을 유혹하러 옴에 성상께서는 그들의 학문을 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뜻을 잃고서 망명한 간사한 사람과 소인의 무리와 결탁하여 갑자기 큰 바다를 건너 방자하게 창궐하여 강화도를 침략, 통진으로 쳐들어옴으로써 임금님은 걱정을 하게 되었고 팔도에는 소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무릇 혈기를 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감히 의분의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운봉읍은 하늘이 높은 봉우리로 만들어서 태조가 다스렸던 곳이다. 이에 임술란에 있어서는 충의의 장렬한 혼백들이 큰 공훈을 세워 덕을 보답하여 지나간 사적이 분명하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많은 군자들은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경내를 굳건히 지키어, 창업한 이 땅이 개와 염소들에 의하여 짓밟히지 않도록 한다면 종묘사직은 매우 다행할 것이며 백성 또한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오영환(吳永桓) : 호는 은와(隱窩)이며 본관은 동복이다. 사람 됨됨이 정밀하고 엄숙하며 탁월한 행동과 높은 지조가 있었으며 당시 명유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구하면서 산림에 은둔하여 뜻을 높이 가지고서 홀로 몸을 깨끗히 하였다. 상황 병인에 서양인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지소(止巢) 오상봉(吳相鳳)과 진사(進士) 오한두(吳漢斗), 명재(銘齋) 서영철(徐泳喆)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방어하였다. 이 일은 유고(遺稿)에 기록되어 있다.
오방진(吳邦鎭) : 호는 농묵(聾黙)이며 본관은 동복이다. 빼어난 기개와 너그럽고 인자한 성품으로 집안을 근검으로 다스리고 몸을 효우로 닦았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에 서양인이 강화도를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켜 방어하였다. 성재(性齋) 허부(許傅)의 문하에서 유학하였으며, 경학을 강론하면서도 성리서와 가례(家禮) 등을 주로 논하였으며, 영호남의 선비들이 그를 찾아와 학문을 받은 자 많았다. 그에 관한 일은 삼강록과 문헌록에 기재되어 있다.
서영철(徐泳喆) : 호는 명재(銘齋)이고 본관은 달성이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서양인이 강화를 침범하자 당시 주수 강우진이 공을 의병들의 집합소인 전주 홍의소에 천거하였다. 그날로 곧바로 팔을 걷어 붙이고 일어나 한 필의 말을 타고 흥의소(興義所)에 달려가니 29주의 선비들이 많이 모였지만 의논이 분분하여 두서가 없었다. 공은 임실 유림 최봉일과 함께 각 위치를 분정하여 각각 소임을 맡기어 일을 처리하고 결의를 하니, 도내의 많은 유학자들이 하나같이 약속을 따랐다. 당시 도백 이병문이 찬양하여 말하기를 “처음으로 둘도 없는 선비를 보았다. 만일 서영철과 같은 활약이 있었다면 우리 임금의 근심거리를 없애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충효의 집안에는 반드시 충효가 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오성상(吳性相) : 호는 만오(晩悟)이며 본관은 동복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기상과 도량이 단정, 엄숙하였으며, 일에 임하여 의를 처리함에 있어서 물흐르는 것처럼 결단력이 있어 고을사람들의 추앙을 한몸에 받았다. 고종 3년(1866) 병인년양요 때 서양인이 강화를 함락하자 진사 오한두, 지소 오상봉, 명재 서영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방어하였다.
형학일(邢學一) : 호는 갈은(葛隱)이고 본관은 진양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명철하였으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니 당시의 명사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고종 3년(1866) 병인에 서양인이 강화를 함락하자 지소 오상봉, 진사 오한두, 명재 서영철과 동시에 의병을 일으켰다
사. 운봉의 동학혁명
운봉은 당시 좌영(左營)의 주둔지 였던 만큼 지리적으로 동학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천연의 요새지였다. 따라서 운봉 민보군과 난원 동하군 사이에 두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동학사(東學史)에서 외면당하였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학혁명의 이념적인 가치에 치중한 나머지 두번에 걸친 운봉 전투에서의 동학 패전을 진실되게 조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디까지나 사실적이어야 하며 덮어두거나 외면해서는 않된다. 1995년 동학농민기념사업회에서 간행된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을 토대로 운봉 주변의 여러 고로(古老)들을 면담하고 현지를 답사하여 미흡한 기록을 보완 정리하여 보았다. 개인적 의견도 다소 가미될 수도 있어 다소 오류를 범할 염려가 있지만 차기 수정을 전제로 향토사적 측면에서 기록하였다.
고종 31년(1894) 1월 9일 조병갑이 고부군수에 재 부임하자 1월 10일 40세의 고부접주 전봉준은 60여명의 동학농민과 함께 무리한 세미와 만석보수세 등 학정에 항거, 동학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고부성에 진격하였다. 이어 3월에는 무장에서 1차 봉기를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
<동학사>에 의하면 당시 봉기 봉기의 중심 인물은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최경선 등 5명이었으며, 이에 참여한 남원의 동학 접주는 김홍기․이기동․최진학․김태옥․김종학․이기면․이창우․김우칙․김연호․김시찬․박선주․정동훈․이교춘 등 13명이며, 9월의 2차 봉기 때 새로이 참여한 남원 접주는 이규순․장남선․조동섭․유태홍․변한두 등 5명을 기록하고 있다.
농민군의 무장 기포가 있은 뒤 전라감사 김문현의 지시에 따라 남원도호부에서는 속오군 200명을 징발하여 전주성으로 올려 보냈으나 4월 7일 황토현(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에서 관군의 패배로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전주 감영군을 단숨에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 때 판관 민영승이 경기전 태조 영정을 위봉산성으로 옮기게 된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직은 전라도 농민군이 영남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고자 운봉 팔랑치와 장수 육십령에 군대를 배치하였는데 관군의 민간에 대한 토색질과 약탈이 심하였다.
남원 접주 김개남은 이사명․유복만․남응삼 등을 이끌고 6월 25일 남원에 들어왔다.이들 동학 농민군에 동조한 남원의 토착 세력은 김홍기․김우칙․이춘종․박정래․박중래․김원석 등이었다. 남원부사 윤병관은 자리를 비우고 떠나버렸다.
7월 2일 전봉준도 남원에 도착하였다. 격문을 띄워 모여든 동학군들은 삽시간에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에 들어가 군세를 떨쳤다. 교룡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군의 군량 보급은 신정동, 화정동, 향교동, 왕정동, 대산면, 왕치면에서 번갈아가며 자발적으로 공급하였다.
그러나 운봉은 동학군의 침범에 잘 대비하고 있었다. 이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지대가 높아 천연의 요새지였기도 하였지만, 군병과 병기를 고루 갖춘 운봉 좌영의 수성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민보군을 조직한 지휘 능력이 뛰어난 박봉양이 있었다.
운봉 민보군 중에는 통솔력이 뛰어난 인재들이 많았다. 박봉양 외에 서영환, 박봉규, 김사마, 김마전, 박상철 등은 담력과 지략이 남다른 투사들이었다.
동학난의 평정 이 후 주서(注書)의 벼슬을 지낸적 있는 박봉양(朴鳳陽)은 일명 박문달 또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 일목장군(一目將軍)이라 칭하였는데, 용력과 지모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박봉양은 본디 향리로써 상당한 부호였다고 한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처음에는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장수의 동학접주 황내문에 의지하여 그 화를 피해보고자 하였으나 동학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여지자 7월 26일 족당과 머슴 등 가솔 50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고 운봉 경내에서 사람을 모아 그 수가 1200여 명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토비참모관(討匪參謨官)으로 임명하고, 백락중(白樂中)을 토비소모관(討匪召募官)으로 임명하였다. 박봉양은 경내에 의병 50명을 선발하여 주변 산성과 운봉 전역의 요새지를 수비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진주와 함양에 격문을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시의 운봉 방어 병력은 수성군, 원병, 민보군(民保軍)을 합하여 총 5천여 명 이었는데 이들은 37개소에 배치되었다. 민보군은 운봉 점령을 서두르는 동학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준향리 입망치, 여원치, 고남산성, 유치 등 남원과 운봉을 경계로 탄탄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방책을 쌓기 위해 민보군은 주변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 넘기고 공격해 올라오는 적을 향해 굴러내리기 위해 커다란 바위를 새끼줄에 묶어 수 없이 매달아 두었다. 그리고 총알과 화살을 막기 위해 집집마다 대문과 부억문을 떼어다 방패를 세우고 멍석과 빈 가마니, 이엉, 볏짚 등을 쌓아두었다. 아직 허물어지지 않은 산성에는 군량미를 보관하고 샘을 팠다. 요새마다 조총. 활과 화살. 창. 능철. 화약과 대항구라 일컫는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고, 징집한 백성들에게는 쇠스랑. 괭이. 죽창. 몽둥이로 무장시켰다. 또한 민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동학군 공작대에 마음이 돌아선 백성을 회유하기도 하고 협박하여 집안에 있는 소나 가축을 압수하여 영내에 모아두었다. 이는 동학군의 군량으로 쓰일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남원 동학군에 전해지자 남원에 온 전봉준은 운봉에 몰래 잠입하여 현감과 대좌를 청하여 죄없는 백성의 재산을 돌려주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운봉 현감 이의경은 전봉준의 의로운 기개에 눌려 결국 압수한 가축과 재산을 모두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전봉준은 관군이 철벽처럼 지키는 여원치 방어선을 홀연히 넘어갔다. 방어선을 지키던 수비 관군도 방어선을 넘나드는 전봉준을 발견하였으나 기개에 눌려 총을 쏘지 못하고 지난 뒤에야 한탄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일이 있었다. 7월 12일 경 전봉준이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주에는 도집강, 각 읍내에는 도소(집강소)를 설치하도록 협의하고 남원으로 내려오기 2~3일 전이었다. 그러니까 전봉준이 전주에 다녀오던 7월 10일경 동학군 수백명이 함양을 거쳐 안의까지 진출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 백성들 사이에는 새 세상을 갈구하는 동학교도적인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어 대부분 관군보다 동학군 쪽에 마음을 비워두고 있었다. 남원은 이미 동학군 천지가 되었고, 동학군에게 군량미를 헌납하는 지주가 부지기수 였으니, 동학군의 기세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운봉 지역에 대해 동학군의 전면적인 공세는 없었으나 이미 동학군 공작대가 침투하여 민심이 동요되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 모두가 동학군에 호응하지는 않았다.
7월의 뜨거운 여름 운봉의 권포리 등지에서 포섭된 동학농민군은 햇볕에 그을리면서 독굴재를 넘어 함양군 안의면 어느 부락에 침투하게 되었다. 부락 사람들은 동학군을 대환영하며 맞이 하였다. 천막을 치고 집집마다 술과 안주를 들고 나와 동학군에게 주연을 베풀었다. 술판을 벌려놓은지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천막이 무너지면서 앞이 캄캄해지고 무차별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동학군이 술이 취해 방심한 사이 부락 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천막을 덮쳐 공작대를 모두 붙잡은 것이다. <오하기문>에 의하면 이는 조원식의 농간에 의한 것으로 300명이 안의 민정들에게 잡혀 죽고 겨우 십여 명만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재차 항일투쟁을 기치로 내걸고 1894년 9월 12일 동학군의 본격적인 2차 기병을 결정하였다. 운봉은 과거 왜적을 막아내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이곳을 점령하면 삼남을 호령할 수 있어 동학군과 관군 모두 한 치 양보할 수 없는 결전을 각오해야 했다.
9월 17일 전라감사 김학진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남원에는 약 5~6만의 동학농민군 모여 있다고 하였다. 당시 남원부사는 윤병관, 운봉현감은 전년 8월에 부임한 홍순학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9월 17일 남원 부사 윤병관을 김개남의 남원 입성 죄를 물어 파면하고 군무참의 이용헌을 부사로 임명하였으며, 홍순학은 군기를 빼앗긴 죄로 9월 22일 도신을 보내어 파원 압상케 하였다. 뒤를 이어 운봉 현감으로 이의경이 부임하여 동학군 침입에 대비케 하였다. 이의경은 세력있는 지방 호족들과 일치단결하여 장정들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하는가 하면 군량과 군기를 넉넉하게 준비하여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동학군의 기습에 만전을 기하였다. 영남 각 군에 격문을 띄우고 대구와 진주에도 원군을 청하는가 하면, 함양 포군 150명의 원병을 받아 수성군과 훈련을 하며 전력을 다졌다.
마침내 9월 17일 김개남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수백명이 운봉읍 장교리에서 산동면 부절리로 통하는 방아치 아래 부동 마을에 집결하였다. 동학군은 견고한 여원치의 방책보다 허술해 보이는 방아치를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열이 정비되자 동학군은 까막재를 지나 방학산 북쪽 방아치(方峨峙)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동학군이 허술하게 여겼던 방아치 방어선은 관군의 방어 거점인 장교산성을 옆에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박봉양 휘하 민보군 소속 100여 명의 포군이 이미 철벽같은 진지를 구축하고 뒤이어 출동한 수성군과 함양군이 이들을 격퇴시켰다.
결국 동학군은 1차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인근 고로(古老)들의 말을 들어 보면 공격할 길이 남쪽으로 장유치와 여원치 그리고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관음치, 독굴재, 유치 등 많은 공격로가 있는 데 고집스럽게 그 좁은 길을 따라 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분산하여 공격하였다면 당시의 여세로 보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김개남의 휘하 병력은 1만명으로 문헌(전북도사, 1971)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주변 백성들의 일시 가담 유동병력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9월 말경 김개남은 남원의 동학군 세력을 5영으로 나누어 인근 5군에 파견하였다. 즉 전영에 남응삼, 후영에 김홍기, 우영에 김대원, 좌영에 김용관을 임명하고 중영 도통은 김개남 자신이 맡았다.
이어 10월 14일 김개남이 남원성을 출발하여 전주로 북상하면서 화산당접주 이문경으로 하여금 남원을 지키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남원성은 일단 공백이 생기고 남원의 전 군수 양한규가 운봉의 박봉양에게 달려가 남원 장악을 요청하자 박봉양은 10월 24일 민보군 2000명을 거느리고 남원성에 입성하여 3일간 휴진하고 있다가 운봉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며칠 뒤 남원의 잔류 동학군이 인근 지역의 동학군의 지원을 받아 남원성에 들어왔다. 당시 동학군은 34접, 1만여 명으로 병력을 이끄는 자는 유복만․김경률․남응삼․김홍규․김우칙․이춘종․김원석 등이었다. 동학군은 먼저 장수접주 황내문의 요청으로 이춘경․남응삼이 장수에 들어가 민보군을 격파하고 장수를 장악하고 이어서 운봉 진출을 꾀하였다.
동학군의 운봉 진출을 위한 2차 전투는 남원 접주 김개남이 청주 공격에 실패한 11월 13일 동학군이 관음치 부동 마을에 집결하면서 시작 되었다. 방아치 전투에 실패한 동학군을 이끄는 자는 담양의 남응삼과 남원 관노 김원석으로 2차 전투에 심사숙고하고 있었다.
2000여 명의 수성군은 관음재에 진을 치고 있던 박봉양은 일단 부동(가말부락)에 집결해 있던 동학군에 대해 유인 작전을 쓰기로 하였다. 유인하여 전투를 벌일 장소는 고남산 남쪽 관음치(觀音峙) 방어선이다. 말 그대로 산 아래 굽어보이는 모든 미물들의 소리까지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천연의 요새지이다. 이 곳에서는 남원 전역이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 보여 공격하는 동학군의 동태를 샅샅이 관찰할 수가 있었다. 방어 거점으로는, 산 아래 가동. 권포. 매요 3개 마을에 군막을 치고 군병과 군량. 병기를 확보하였다.
당시 권포 마을에는 남원 물래재에서 온 양씨 성을 가진 사람이 훈장을 하고 있었는데 인품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봉양 장군이 막사에서 작전 참모 회의를 할 때마다 함께 배석토록 하여 조언을 듣곤 하였다. 관음치 유인 작전이 결정되고 나자 작전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전투 날짜였다. 양훈장은 천기에도 밝아 승전의 날짜를 1894년 11월 14일로 정하였다. 군사들의 행동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날은 늦가을 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 계속되었고 들녁에는 볏단과 아직도 푸른 풀들이 한길이 넘게 자라고 있었다. 유인 임무를 맡은 부대가 부절리 부동 마을 뒷 산으로 침투하여 동학군 집결지를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남응삼의 동학혁명군 지휘부에서는 관음치 방어벽의 허술함을 숨기기 위한 연막전술로 오인하고 유인부대를 추격하여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결정하게 된 것은 전날 밤에 방아치와 여원치 등의 방어벽에 많은 햇불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낮에도 주변 산에 흰옷을 입은 병사들이 하얗게 산을 덮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햇불은 긴 밧줄에 관솔에 불을 붙여 수 없이 매달아 한 쪽 끝을 잡고 흔들었고, 흰옷 입은 병사는 많은 흰 저고리와 바지를 나무가지에 걸어 놓아 많은 동학군으로 하여금 많은 민보군 병사들로 오인하게 했던 것이다.
관음치 방어벽에는 3개의 대항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대항구라 함은 화포를 말하는데 지금의 대포와는 구조가 다른 것이다. 먼저 직경 1m가 넘는 구덩이를 깊이 파고 대나무를 촘촘하게 역은 발을 가장자리에 펴서 세운 다음, 화약을 쌓는다. 껍질 벗긴 삼대인 마골(麻骨)을 태워 화약을 만들고 이것도 부족할 때는 재래식 변소 바닥을 긁어 모은 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위에 대포알 역할을 할 수 있는 쇠조각이나 쟁기 보습 조각, 돌 등을 다져 넣고 심지를 설치하여 불을 붙이는 것이다. 화약과 포알은 그 양이 생각보다 커서 바지게로 어른이 몇 짐씩 지어다 부었다고 한다.
사기 충천한 동학군은 관군의 술책에 말려 관음치 방어벽을 향해 하얗게 밀려 오고 있었다. 사정거리 안에 왔을 때 세 대의 대항구 심지에 불이 당겨졌다. 심지를 기세좋게 타들어가던 세개의 대항구 중 2개는 화약에 불을 붙이지 못해 불발이 되고, 나머지 한개가 엄청난 굉음을 내면서 동학군을 향해 쇠붙이를 한꺼번에 토해냈다. 이를 신호로 새끼줄을 끊어 매달아 놓은 바위를 동시에 굴러내리고, 총과 화살을 비오듯 쏘아대자 동학군은 맞아 죽고, 깔려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11월 14일 새벽부터 15일 오전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선봉 장정들의 태반을 잃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은 동학군은 사기가 꺾여 남원성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운봉 수성군 역시 상당한 인명 손실을 입었으나 박봉양은 승전 기세를 몰아 뒤를 추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양훈장은 같은 동족 싸움에 섬멸이란 가당치 않다 하여 이들을 만류하였다 한다. 이 전투로 기력을 상실한 동학군은 남은 병력을 남원성 안에 집결 사대문을 굳게 닫고 병력을 재정비하여 성을 지키기에 전력투구 하였다. 그러나 한번 사기가 꺽인 동학군은 오합지졸이 되어 있었다. 유복만은 운봉의 군세가 강하다는 말을 듣고 일찌기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곡성 방면으로 나갔고, 다른 1000여 명도 민재 약탈을 위해 각 촌으로 나가 성 안에는 3000여 명의 동학군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운봉현감 이의경은 11월 25일 박봉양과 함께 수성군과 민보군을 이끌고 불선치를 넘어 부동마을에서 일박한 다음 26일 남원에서 4km 떨어진 남평마을에 도달하였다. 이 때 유치 방어군으로부터 장수접주 황내문이 운봉을 향해 진출하고 있다는 긴급한 전갈을 받고 현감 이의경은 운봉으로 회군하고 박봉양은 황내문의 동학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 번암면 원촌으로 진출하였다. 11월 27일 동학군과 민보군은 원촌에서 격돌하였다. 이 싸움에서 동학군은 패하여 사망 21명 포로 36명을 남기고 나머지는 장수 방면으로 흩어졌다고 하였다. 현재 번암면 원촌 마을에 당시 박봉약 전적을 기리는 박봉양 불망비가 비문이 훼손된 채 남아 있다.
이어 박봉양은 11월 28일 성을 포위하고 남문과 북문을 불태우며 오후 4시경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이 때 동학군 전사자 30여 명, 포로 1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생포된 자 중에서 표자경․최진철․고양산 등 간부급 8명이 즉시 처형되고 나머지는 곤장을 맞고 풀려 났다. 운봉 민보군은 전사자 5명, 부상자 84명이었다. 이어 사인 김택주․오주영 등은 뒤늦게 민병 수백명을 이끌고 들어와 동학군 패잔병 수색에 나섰다.
운봉의 수성군과 민보군의 승리 요인은 운봉이 천연의 요새지이며, 수성군과 민보군의 강한 단결력과 경상도의 인적 물적 지원 그리고 김개남 주력부대의 북상과 유복만 부대의 진영 이탈이 주된 원인이었다.
김개남은 11월 30일 밤과 12월 1일 새벽 사이 태인에서 일본군과 관군에게 생포되어 전주감영에서 효수당하였다. 기세 높게 동학군을 지휘하던 유봉만, 이춘경, 김홍기 등은 곡성 등지로 분산 패주하였고, 김우연은 포로가 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남원성의 사대문 중 동문과 남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어 전주의 풍남문과 흡사하였다. 건축물로는 수백년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재였다. 남원성 탈환에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나 남문을 불태우는 박문달의 성급한 명령이 아쉬울 뿐이다.
장위영군 이두황과 일본군 대대장 미나미 우시로(南小四郞)는 12월 3일이 되어서야 남원성에 당도하였고 박봉양군은 구례 산동원으로 철수 하면서 남원성 상황은 사실상 마무리 되었다.
<그림 1-8> 운봉의 동학전투
박봉양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은 동학 혁명군과의 전투과정에서 주변 지역의 민가에 들어가 적지 않은 민폐를 끼쳤던 것 같다. 12월 5일 나주에 주둔 중인 일본군 제 19대대장 미나미오시로는 박봉양을 서신으로 불러 12월 11일 나주 진영에서 체포하였다. 즉 운봉인으로 참모관(參謀官) 박봉양(朴鳳陽)과 소모관(召募官) 백락중(白樂中-운봉인) 두 사람에게 관할 군병의 민재 약탈의 죄를 물어 12월 31일 서울로 압송하였다. 1895년
3월 재판에서 판사는 그동안 동학군 격파의 공적을 참작하여 두 사람에게 각각 곤장 60대의 태형에 처하였다. 3월 29일 석방된 박봉양은 잠시 내부주사로 임명되어 일하다가 6월에 귀향하였다. 한편 운봉 수성군과 민보군이 소비한 군자금은 모두 8천량이었다 한다.
그렇다면 운봉은 끝내 함락되지 못한 나주와 함께 집강소가 설치되지 못한 곳 중의 한 곳이 되었을까? 그것은 몇가지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첫째 1차(3월) 2차(9월) 봉기에 참여한 동학접주들 중 운봉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다. 둘째 김개남이 남원에 입성한 시기가 6월 25일이며 전봉준이 전라감사 김학진과 각 읍에 집강소를 협의한 것은 7월 12일이며 동학농민군이 안의면에 진출한 것은 7월 10일이며 대부분 피살되었다. 전주협약 이후 사실상 해산한 동학군이 남원에 웅거한 것은 8월 말 이후이고 운봉은 자체 방어를 위해 집결한 병력이 함양에서 지원받은 포군과 민보군․수성군 등 총 5천여 명에 달하였다. 세째 9월 17일 방아치 전투와 11월 14일 관음치 전투에서 동학군이 대패하였다. 네째 운봉은 좌영이 설치된 곳이며 지리적으로 천연의 요새지로 박봉양과 같은 운봉의 부호들이 스스로 동학농민군의 진출을 막고자 하였다. 다섯째 김학진의 무국(撫局)을 종용받은 몇몇 수령들은 거짓 입도를 칭하고 스스로 집강소를 설치하며 동하며 동학군의 경내 침입을 미리 막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운봉에 동학농민군의 진출은 저지되었으며 집강소가 설치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동학군은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의 풍자시를 군가로 사용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군가였다고 한다.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
(금준미주 천인혈 옥반가효 만성고 촉루낙시 민루락 가성고처 원성고)
7. 근대 이후
가. 행정의 변천
<남원지(1994)>에는 한국사를 상고(上古)시대부터 10세기 중반, 이른바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를 고대(古代), 고려왕조시대를 중세(中世), 조선왕조시대를 근세(近世), 조선왕조 말기를 근대(近代)로 구분하였다.
근대라는 개념 속에는 개화(開化)라는 뜻이 들어있으며 그 대상은 서양문명이며 19세기 후반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거쳐 서양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개화기를 맞게된다. 그러나 이는 일제 침략 시기이며 우리 민족사로 보면 나라를 잃고 민족 문화가 말살 당하는 일제(日帝)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살아있기 마련이다. 지배민족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정복당한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근대 이후의 통치제도의 변천과 운봉의 행정 개편, 그리고 그동안 묻혀 있었던 항일 운동사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한다.
고종 31년(1984) 집권한 개화당은 재래의 문물제도를 진보적인 서양법식으로 개정하는 이른바 갑오경장은 동학농민혁명(1894)으로 촉발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조정은 자체해결 능력을 잃고 외국군대인 청을 불러들여 백성을 탄압하려 하자 이를 기화로 일본군의 불법 침입을 야기하고 말았다. 결국 조선은 왕조의 몰락을 자초하고,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에게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통치제도 개편 내용은 역사 문헌상 주지(周知)의 사실이므로 <남원지(1994)>의 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고종 32년(1895)부터 서기 1914년까지 약 20년 사이에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한국사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대폭적인 지방 통치제도의 개편이 단행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지금까지도 거의 대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 고종 32년의 종래의 도(都 - 判尹, 留守), 부(府 - 尹), 대도호부(大都護府 - 使), 목(牧 - 使), 도호부(都護府 - 使), 군(郡 - 守), 현(縣 - 令, 監) 등의 잡다한 모든 고을과 그 지방관의 호칭이 ‘군(郡, 守)로 단일화 하였다.
2) 역시 고종 32년에 8도(道 - 觀察使)가 폐지되고 23부(府 - 觀察使)로 개편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13도(道)로 바뀌었다. 13도의 행정 책임자는 처음에 관찰사(觀察使)였으나 뒤에 장관․지사로 바뀌었다.
3) 광무 10년(1906)에는 모든 월경지(越境地)와 대부분의 두입지(斗入地)가 가까운 이웃 고을에 이속됨으로써 비로소 정리되었다.
4) 1910년에는 면(面), 촌(村), 방(坊), 사(社), 리(里), 부(部) 등 잡다한 면급(面級)의 호칭이 면(面)으로 단일화 되고 특히 면에 관리가 배치되고 청사가 설치됨으로써 정식의 행정기구와 구획 정리되었다.
5) 1914년에는 군(郡), 면(面), 리(里)가 대대적으로 통폐합되어 329군(12府, 317군), 4,336면(61,473 동리)이 232군(12부, 220군) 2,521면으로 대폭 줄었다. 그와 함께 군․면․리의 새로운 이름이 대량으로 창출되었는데, 그 이름들이 대개는 통합된 쌍방의 이름 중 한 글자씩으로 합성함으로써 도무지 생소하고 무의미하며 특히 한국인의 생활 전통과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6) 또한 1914년에는 인구가 밀접한 좁은 지역을 단위로 하는 근대적 의미의 도시인 ‘부제(府制)’가 신설되었는데 이 부(府)는 해방 후에 시(市)로 바뀌었다.
7) 한편 도(道)와 부(府), 군(郡)으로부터 재정, 사법, 경찰, 군사 등의 기능이 분리되었다. 그런데 이는 지방관이 순수 전임의 행정관으로 되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근대적인 조치라고 할는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중앙정부의 권한을 최대로 강화하려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위의 개혁을 통하여 고종 32년(1895) 남원도호부와 운봉현은 군으로 바뀌었으며, 8도제가 폐지되고 그 대신 23부제의 남원부(관찰사)에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원부에는 관찰사가 주재하게 되었으며(5월 26일, 칙령 제 98호) 남원부에 소속된 군은 남원군, 운봉군, 구례군,곡성군, 순천군, 광양군, 임실군, 장수군, 진안군, 담양군, 순창군, 옥과군,창평군, 용담군, 무주군 등 15개 군이다. 건양(1896년부터 사용된 조선의 최초의 연호) 1년에는 23부가 폐지되고 전국이 수도 한성부(漢城府) 외에 13도로 개편되었다. 이 때 군(郡)은 그 규모에 따라 5 등으로 구분하였다(8월 4일, 칙령3,536호). 이에 따라 남원은 1등 군, 운봉은 4등 군으로 분류되었다.
광무 10년(1906)에는 전국의 월경지(越境地)와 두입지(斗入地)가 일제히 정리되어 대개 큰 군의 면적이 많이 축소되었다. 이 때 운봉군은 변동이 없었으나 남원군의 경우는 남원 48방의 1/3이 줄어 34면 344동리로 줄어들게 되었다. <구한국 지방 행정구역 명칭 일람>(조선총독부, 1912)에 의하면, 당시 운봉군은 군내면(6리), 남면(16리), 서면(14리), 북상면(9리) 산내면(26리), 동면(24리) 등 7면 108동리로 구분되었다. 이 때 운봉군의 군청은 군내면 서천리에 소재하였고 서면 면사무소는 권포리에, 남면 면사무소는 공안리에 있었다. 한편 사법권과 경찰권도 종래의 관찰사와 수령의 고유 권한에서 지방통치 제도의 개편에 따라 분리되었으며, 1809년 전국 22개 재판소 중의 하나가 남원에 설치되었다. 1907년에는 다시 3심제 재판소의 체계가 확립되어 광주지방재판소 관할 남원구(南原區)재판소가 설치도어 남원군, 운봉군, 순창군을 관할하였다.
경찰서는 광무 10년(1906)에 지방경무서와 분서로 설치된 후 1907년에는 13 지방경무서 28경찰서, 43분서, 337순사주재소로 정비되어 운봉에는 남원분서 운봉순사주재소가 설치되었다. 이윽고 1914년 4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령(朝鮮總督府令, 1913년 12월 29일 제 111호)에 의하여 전국의 군, 면, 리를 통폐합하고 지명을 개칭하여 329군(12곳은 부- 1896년 폐지?), 4,336면, 61,473동리가 232군(12부) 2,521면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 운봉군이 운봉면으로 축소되어 남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원군은 남원면(面)을 포함하여 19면(面) 186리(里)로 개편되었다. 운봉은 삼국시대부터 운봉현으로 천령군(함양군)에 소속되어 오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남원부의 관할에 있었다. 그러다가 1895년부터 운봉군으로 독립 존속되다가 1914년 일제의 강압적인 행정분리 및 통폐합으로 면으로 축소되어 다시 남원군에 소속된 것이다.
<표 1-10> 1914년 운봉군의 행정개편 내용(1914년)
면
사 무 소
법정리
폐합된 면(행정리)
운 봉 면
서 천 리
17
군내면(6), 남면(16), 서면(14), 상원천면, 장수군 하번암면 각 일부
동 면
인 월 리
9
동면(24), 북하면 일부
산 내 면
백 일 리
8
산내면(26), 상원천면, 달궁리
아 영 면
갈 계 리
11
북상면(13), 북하면(9)
4
4
45
1915년에는 조선 총독부령에 의해 남원군과 전남 곡성군, 경남 함양군의 경계가 재조정됨으로써 산내면 실상리(입석리)의 일부가 함양군 마천면으로 편입 변경되었다.
운봉군은 1914년의 행정개편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답습되어 오다가 1931년 남원면이 남원읍으로 승격되고, 이어 1981년는 남원시로 승격되었다. 남원시․군이 남원시로 통합됨에 따라 운봉면은 1995년 3월 2일 남원시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나. 근대이후 운봉인의 의병활동
근대이후의 의병은 이전의 의병들의 활동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은 수세에 몰린 우리의 관군을 돕기 위하여 활동하였던 것이며, 때로는 조정으로부터 훈장과 칭찬을 받아가며 활동을 하였다. 이에 반하여 근대의 의병들은 비단 일본군 뿐만 아니라 친일 정부와 그 관료들 그리고 관군조차도 적으로 삼아 그들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아가며 힘겨운 투쟁을 하여야 하였다. 이것은 근대 의병이 단순히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원지, 1992>
이 시대 남원지역의 의병은 1907년 양한규(梁漢奎)의 거병이 최초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경남 합천군의 초계(草溪) 군수를 역임한 바 있는 양한규는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약 1천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약하다가 1907년 2월 13일 밤 박재홍․유병두 등과 함께 남원성을 지키던 진위대를 습격하다가 전사하였다. 결국 의병은 패해 흩어지고 파송된 일본 경무청 순검들은 지리산 지역에 대대적인 의병 색출작전으로 많은 의병 가담자들이 붙잡혀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 때 운봉인으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운봉 방아치와 관음치에서 관군 편에서서 동학군을 패퇴시켰던 박봉양(朴鳳陽)이 체포되었다. 근대 이후 일본군에 항거하여 의병 활동을 하던 운봉인을 살펴본다.
박봉양(朴鳳陽) : 본관이 밀양이며 주서(정7품) 벼슬을 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남원을 점거한 김개남 장군이 전봉준과 함께 북상하고, 남응삼(南應三)이 이끄는 잔여 동학군이 운봉을 점령하려 하자 의병과 관군의 도움으로 장교리 방아치와 가동리 관음치 전투에서 패퇴시켜 운봉을 수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남원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공으로 순무영참모관(巡撫營參謀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일본군이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 공략시 관할 군병이 민가를 약탈했다는 책임을 물어 3개월간 투옥되고, 1895년 3월 소모관(召募官) 백락중(白樂中-운봉인)과 함께 ‘법무아문권설재판소’로부터 60대의 태형을 선고 받았다. 그 전적을 기리는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績碑)가 운봉면 서천리에 있다. 또한 대한 독립 의군부의 운봉 대표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1913년에 조직한 국권 회복 비밀 단체이다. 임병찬 의병대라고도 하며 중앙에 원수부를 두고 서울․강화․개성․수원․광주에 5영을 설치하고 각 도․군․면․리까지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 조직에 도․군 대표 329명 가운데 운봉 대표로 참여한 사람이 박봉양이다. 그는 1906년에 남원성 공략을 위해 창의한 의병장 양한규(梁漢奎)의 처남으로 지리산 운봉지역 활동 계획에 참가하다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대한 독립 의군부는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에게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고 각국 공사관에 일제 침략을 규탄하는 문서를 보내려다 1914년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현 운봉초등학교 전신으로 1907년 8월 23일 개교한 사립 운봉만성학교 설립자이기도 하다. 박봉양에 대한 문서 자료로 <박봉양경력서>가 있다. 이는 1895년 9월 2일자 초비군공조사위원총대 군사협판 권재형에게 제출한 박봉양의 공적조사에 해당한 것으로 창의문과 운봉을 고수한 중요 간부의 이름과 전상자 및 노획품목 등이 부기되어 있다.
김석용(金錫容) : 호는 송강(松崗)이며 본관은 김해이다. 고종 29년(1892)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다. 천성이 빼어나고 엄숙한 기상에 애국애족 정신이 투철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1910년 경술국치가 체결되자 종묘사직이 위태로움을 알고 가산을 팔아 동지 50여명을 규합 병기를 정비하여 왜병의 주둔지인 장수 병참기지 습격을 시도하였다. 고남산을 넘어 요천을 건너는 도중 왜군의 복병에 포위를 당하였다. 혼신의 힘으로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많은 동지들이 쓰러지고 본인은 포로가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운성지 속편>.
박성환(朴成煥) : 전북도사(全北道史,1971)에 의하면 박성환은 1915년 운봉에서 출생하였다.그는 함경북도 성진(城津)에 있던 일본군 군수품 창고와 대형수송선을 습격하였다가 사전 발각으로 체포당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후 미결수 생활 3년 6개월만에 치안유지법 위반, 육해군 형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다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았음이 공판기록에서 확인되었다.
다. 운봉의 항일 활동
운봉의 항일 운동은 남원이 중심이되어 이루어졌으며, 면 단위의 작은 고을들은 일부 몇몇 지사들이 야학을 열거나 이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항일정신이 운봉 내에서 자체적으로 표출된다는 것은 극히 미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남원항일운동사, 1985, 윤영근 외>와 1996년 남원신문에 게재되었던 남원의 항일운동 내용을 중심으로 운봉의 항일활동 내용을 정리해 본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뜻밖에 승하하자 일본인의 독살설과 함께 가뜩이나 팽배해 있던 배일 감정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국내 모든 독립단체들이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전날인 3월 1일을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거사일로 정하여 3일 운동은 시작되었다.
남원에서는 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은 3월 2일부터였다. 2일 새벽 4시결 천도교를 통하여 남원 천도교구장 유태홍(이백면 남계리 출신)에게 독립선언문이 전달되고 오전 10시경 남원면 금리 소재 천도 교구에서 경성 천도교주 손병희로부터 수령한 독립 선언서 40매 중 19매를 산내면 대정리 출신인 김성재와 이백면 남계리 출신 유석 등에게 주어 밤을 이용하여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 게시판 등 곳곳에 붙이도록 하였다. 그날 밤 평소 연락처로 삼고 있던 금리 가정집에서 거사 계획을 논의하던 중 남원 헌병청 소속 헌병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유태홍은 징역 1년, 김성재와 유석은 징역 3개월의 형을 선고 받았다. 결국 거사는 일단 무산되고 말았으나 당시의 만세운동의 성격은 중앙으로부터 천도교나 천주교, 기독교나 학생 단체 등에 의해서 전개되는 점조직의 하향성 운동이었다.
그 후에도 남원에서는 독립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고 남아 3월 31일 덕과면장 이석기는 그날 구장회의를 주재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하여 면민을 설득하여 만세운동을 은밀히 주도하였다. 4월 3일 덕과면민은 나무를 심는다는 명목으로 500여 명이 동해골에 집결하고, 이석기 면장의 본가가 있는 사매면민들은 도로보수 명목으로 200여명이 계명당 고개에 모여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분배받자 만세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이석기 면장의 만세운동의 취지와 격문이 낭독되고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은 목청껏 독립만세를 외치며 사매면 헌병주재소로 행진을 했다. 이윽고 남원 헌병청의 기마대와 무장 헌병이 출동하자 일단 해산하고 4월 4일 남원 장날을 기해 남원군민이 합세하여 대대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4월 4일 남원 북시장으로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오후 2시가 되자 이두기가 대형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이형기가 격문을 낭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장에 운집한 2천여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제창하고 헌병청을 향해 행군하였다. 또한 같은날 광한루 앞 광장에서도 천도교, 유교, 기독교가 주축이된 1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일본 왜경의 무차별 사격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수많은 사람들이 현병대에 잡혀갔다. 이날의 함성은 일제의 굴욕 속에 억압받고 짓밟히며 살아온 우리 민족한이 표출된 것이며, 자주독립이 우리 민족에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세계만방에 과시한 것이며, 우리 남원 향토사의 긍지이기도 하였다. 남원에서의 만세 운동은 중앙하향식 운동이 아닌 일개 면장이 주동이되어 단독으로 전개된 순수한 지방농민봉기였다는데 그 의의를 더 할 수 있다.
3․1 운동은 우리민족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이를 계기로 독립의 의지는 더욱 새롭게 불타올랐다. 만세운동 외에도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되기도 하였다. 산내면 박정석은 대산면 옥률리 박권영과 함께 운봉면 박봉규, 박희옥, 유시재, 이교항 등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항일 단채로는 신간회(新幹會)를 들 수 있다. 신간회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1927년 2월 ‘민족 단일당 민족 협동 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 단체이다. 안재홍, 백관수, 신채호, 신석우, 유억겸 등 34명이 발기인이 되어 초대회장에 이상재를 선인하여 출범하였다. 1930년 전국에 지회(支會)만도 200여 개이며, 분회가 조직되어 회원 수만도 4만여 명에 이르는 일제통치 하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합법적인 항일운동 단체였다. 신간회의 출범은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고, 독립운동의 열기가 강했던 남원도지회(支會) 창립에 들어갔다.
3.1 운동 이후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젊은 청년들의 의식 속에는 배움의 해가 거듭할 수록 민족주체의식과 새로운 민족사관, 세계관이 싹텄으며 이러한 젊은이들이 귀향하면서 농어촌 지역에 청년 집단이 형성되고 그들이 추구하는 계몽운동은 지역에 항일정신에 대한 새 바람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지방신문 기자들이 구심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설립준비위원회의 개최지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외일보 등의 지국 사무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남원의 경우도 남원청년회, 신간회, 남원형평사가 조직되었다.
청년회조직은 1926년 6월 13일 금지면 금지청년회를 시작으로 8월 14일 사매용북청년회, 1927년 4월 3일 산동용동청년회 등의 창립으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1927년 8월 12일 남원예배당(현 제일교회)에서 신간남원지회 설립총회와 함께 남원청년총동맹 창립 총회를 갖게되었다. 이들 단체의 주요 활동 내용은 야학과 각종 강연을 통한 계몽운동, 일제의 온갗 수탈과 착취를 일삼는 제도적 개선 운동, 우리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위한 정치적투쟁 등이었다.
남원 형평분사는 조선일보 남원지국장겸 주재기자인 이두용(李斗用)의 도움으로 이이동 등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1926년 7월 28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형평분사에 입회한 청소년들에게 문명퇴치와 지방계몽을 위해 남원지역에 야학을 개설하고 반제국주와 항일운동에 동참케 하였다.
운봉에서는 전북 운봉 독서회 주최로 야학을 개최하였는데 학생수는 백여 명이 넘었고, 수준에 따라 갑․을반으로 나누어 교수하였다. 당시 교사는 양대식, 박기태, 박종암(독립유공자), 박상수 4명이었다.
1928년 6월 27일 전주농업학교 2학년 학생들은 일인들의 학교당국에 차별교육에 대한 항의와 과도한 실습폐지, 학제 개편을 요구하며 강력한 항일 동맹 휴업이 결행되었다. 6월 28일부터는 1학년 학생들도 동맹 휴업에 가담하였다. 학교당국은 1학년 53명, 2학년 39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하고 분개한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계속하였다. 6월 30일 14명의 주동학생을 검거하여 7월 30일 5명에게 징역과 벌금형의 선고가 내려졌다. 그 주동자 5명 중에 운봉사람 최육득 학생이 들어 있다. 전주농업학교 학적부 기록에 의하면 최육득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받았다.(전북지역독립운동사, 1994)
1929년 1월 29일 신간회는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휘말리게 된다. 그 발단은 1929년 1월 25일 전북 이리에서 개최된 전국 신간회, 청년동맹, 형평사의 간부들 205명의 간담회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날로 심해가는 일본의 박해와 탄압, 그리고 독립투사들의 학살 등으로 항일단체가 와해되어 가는 현실을 개탄한 나머지 항일 운동의 활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그런데 그 배포 유인물이 경기 경찰국 형사대에 의해 서울 광화문 우체국에서 발각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경찰은 경기경찰국 형사대에 하여금 3월 12일부터 검거령을 내리고 이 검거 선풍은 무려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이 때 운봉인으로 항일활동을 하던 윤규섭이 체포되어 형을 선고 받았다.
운봉면 북천리 291번지 출생인 윤규섭은 전주고보(전주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29년 2월 조선을 일본패권주의로부터 이탈을 꾀하고자 신간회 간부 이명수의 추천으로 고려공산청년회와 신간회에 가입하였다. 주요 활동으로 전주시내 각 학교와 연계하며 유인물을 살포하며 동맹휴학을 선동하였다. 즉 1929년 7월 전주여자고등학교 4학년생인 임부득과 정보를 교류하며 여성회를 조직하여 적광화 등 전주 시내 각 학교와 연계하여 등사전단을 사용하여 유인물을 출판하여 각교에 배포하였다. 배포한 유인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제군이여, 전투적인 학생제군들이여, 계속 숨통을 조이는 듯한 일본제국주의는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으며, 조선민족에 대하여 온갗 박해를 가하고 있으니, 이제 조선민족을 위해 싸우고, 노동자 농민을 위해 싸우는 용감한 국가의 전사들이 그들에게 학살 당하고 투옥당하니, 우리들의 익을 위해 싸우는 혁명적인 단체가 봉쇄당하고 와해되고 있으니, 언론집회결사연구, 자유를 획득하자.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시키자. 조선 본래의 교육을 실시하라.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하자. 조선민족 해방 만세.”
1930년 선언강령 등의 유인물이 서울 광화문 우체국에서 계속하여 발각됨으로 이것이 단서가되어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전변 사찰계 주임의 총 쥐휘로 전북 일대를 수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체포된 윤규섭은 1931년 5월 14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저작 방조)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1930년대 이두용과 호남지역의 항일독립 운동사 자료집. 이병희)
또한 1929년 3월 12일에 전북 남원청년동맹 운봉지맹에서 정기대회를 개최하려하자 전날 준비위원회 정운태를 소환하여 정기대회를 금지시켰다. 다시 13일에 개최를 강행하려 하자 준비위원회도 금지시켰다. 또한 정운태는 1929년 4월 10일 그동안 지방 치안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핑계로 일본 경찰의 탄압에 의해 금지해왔던 남원 청년동맹 대회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 후 운봉에서 항일운동을 살펴보면 1932년 ‘치안 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을 들 수 있다.
권포리 출신인 정운태, 정운경, 정현수 등 이들 세 사람은 1927년 운봉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선 고학당에 입학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학습한 뒤 귀향하여 권포리에 야학회를 조직하였다. 정운태는 훈련장, 정운경(운종), 정현수는 강사가 되어 20여 명의 학동에게 자주독립정신. 문맹퇴치. 농촌경제 성장을 위하여 교육하였다. 운봉 경찰관 주재소에서 신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고 현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사회 혼란과 전복을 기도한다는 명목으로 1, 2차에 걸쳐 집회 금지 명령을 받자 ‘단발계’(계장:운태)로 명칭을 바꾸었다. 순수한 농민단체로서 활동을 꾀하다가 지주에 대한 소작료 감액 청구, 불경작 동맹, 임금 인상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권포 마을을 중심으로 가난한 농민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농민을 선동한다는 운봉주재소의 지적과 감시가 심하여 다시 ‘위친계’로 명칭을 변경하나 적극적인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 후 정운태는 ‘운봉 청년 동맹 지부’에 가입하여 ‘조선일보 운봉분국’ 기자로도 활동하였다가 붙잡혀가 정운태. 정운경. 정현수 세 사람은 1933년 10월 6일 전주 지방법원 형사부 판사로부터 정운태는 징역 1년 6월, 정운경과 정현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 받았다. 1995년 정현수는 독립유공자로 표창이 추서되었다.<제보 : 정희석(정운경씨 자)>
운봉 지역 출신으로 주요 항일운동의 한 사람으로 또한 이두석을 들 수 있다. 본관은 재령이며 1929년 운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문맹 퇴치와 농촌 경제 건설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고 형 두현을 도와 수양전진계를 조직, 야학당을 개설하였다. 낮에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경지를 확대하여 운동장을 마련하여 청년들의 체력을 연마하고, 여러편의 창가를 지어 애창시켰다. 또한 야학당에 배부된 일본 천황의 사진과 일장기를 불태워 없앴는데 이 사실이 왜경에게 알려져 야학당은 폐쇄되고 학생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에게는 구속 영장이 내렸다. 왜경의 추적을 피해 고향을 떠나 영.호남을 유랑하면서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적지인 일본 땅으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20세 젊은 나이에 왜 호적에 실린 두석을 쓰지 않고 중현이라 고쳐 일본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 후 오오사까, 고오베 등지에서
<표 1-11> 4개읍면의 항일활동 인사
순
이 름
약 력
1
김성재
산내면 대정리 출신. 1919년 3월 2일 독립선언서를 남원 주요 장소에 부착하고 만세운동을 거사하다 남원 헌병청에 검거되어 징역 3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2
박정석
1920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집하다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3
윤규섭
운봉면 북천리 출신. 신문기자. 전주 지역 청년동맹 신간회 간부. 징역 3 년 4 개월 복역.
4
박상수
1927년도 운봉 농민 야학 교사
5
박종암
1927년도 운봉 농민 야학 교사
6
양대식
1927년도 운봉 농민 야학 교사
7
최육득
1927년도 운봉 농민 야학 교사. 전주농업학교 동맹 휴업 주동.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
8
양충식
운봉 출신 항일 독립 운동가
9
안희택
운봉 출신 항일 독립 운동가
10
정운태
운봉 권포리 출신. 1927년 운봉공립보통학교 졸업. 청년동맹 간부. 조선일보 남원 운봉 분국장겸 기자. 단발계 조직 사건 .독서회 사건으로 피검 복역. 1931년 비밀결사. 징역 1년 6개월 복역.
11
정운종
운봉 권포리 출신. 1927년 운봉공립 보통학교 졸업. 청년동맹 간부. 단발계 조직. 독서회 사건으로 피검 복역.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2
정현수
운봉 권포리 출신. 1927년 운봉공립보통학교 졸업. 단발계 조직. 독서회 사건으로 피검 복역.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13
이두석
아영면 아곡리 출신. 1929년 운봉보통공립학교 졸업. 수양전진계 조직. 야학당 개설. 일경에 193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 복역.
독립 운동을 하다가, 1933년 체포 구금되자 탈옥, 다시 1938년 왜경에게 붙잡혀 고오베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취조 담당관의 잔인한 고문으로 정신이상의 불구자가 되면서도 끝내 동지들의 기밀은 말하지 않았다. 1941년 3월 출옥했으나 10리 밖에는 외출할 수 없는 요시찰 인물이 되어 불구의 몸으로 10년만에 귀국했으나 1947년 4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신경기능 마비와 정신이상으로 고통스런 삶을 보냈다. 그가 죽은 후 각계 인사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앞다투어 보냈다. 1977년 3월 독립유공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다. (남원의 향토교육 자료, 1992).
8. 6․25 동란과 운봉
민족사상 가장 비극적 동족상잔이었던 6․25 기간 중 운봉은 큰 전투를 겪지는 않았으나 지리산에 인접하고 있어 지리산 빨치산들의 활동권 안에서 많은 주민들이 연루되어 뜻하지 않은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운봉이 겪은 6․25 전란은 빨치산의 활동 그리고 국군의 빨치산과 전투 과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금은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리산(智異山)은 전라북도 남원군,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과 산청군, 하동군 등 광범위하게 걸쳐 있는 산이다. 옛부터 백두산 지맥이 흘러와 멈춘 곳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두유산(頭留山)이라 하고, 산봉우리가 한양을 향하고 있다 하여 반역산(反逆山)‧불복산(不伏山)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방장산(方丈山), 지혜롭고 기이한 산 등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지역을 안고 있는 지리산은 이름만큼이나 그 속성 또한 천의 얼굴을 가진 명산이다. 주봉인 천왕봉은 1915m로 한라산 다음가는 남한 제2의 고산(高山)으로 둘레가 700리이다.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루며, 남서쪽에 커다란 밥상 모양을 의미하는 해발 1752m의 반야봉, 다시 그 남서쪽에 한 때 피서지로 유명했던 노고단이 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리워 왔었다. 산세가 넓기도 하지만 국내 제일의 다우(多雨)지역으로 대삼림(大森林)이 이루어져 역사적으로 전란을 격을 때마다 의사(義士)들이 은거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결(정감록)에 의하면 지리산의 청학동과 운봉 등과 같이 전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전적기념관 내 전시 홍보 내용과 실록 지리산(백선엽, 1992), 등의 문헌을 통하여 지리산 공비토벌 상황에 대하여 알아본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난 후 패주하던 반란군들은 지리산, 한라산 등으로 잠입하여 사회에 은신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연락, 협조하며 북한의 지령에 의하여 게릴라 활동을 일삼으며 치안을 교란시켰다. 북한은 남부군을 지원하기 위해 1948년 11월 14일부터 1950년 3월 28일까지 10차례에 걸쳐 2,345명의 병력을 남한에 침투시켰다. 6․25가 발발하자 공비들은 하산하여 인민군과 합류하였다가, 국군의 북진과 함께 도주하던 인민군군의 낙오병들이 다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였다. 운봉의 인민군 점령 기간은 전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낙동강 전선이 구축되던 50년 9월 전후부터 인천 상륙 작전이 감행된 후 서울 수복일인 50년 9월 28일 이전 사이로 볼 수 있다. 인천 상륙작전과 함께 아군의 총반격에 쫒기면서 퇴로가 차단된 많은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였다. 지리산에 근거를 둔 이들은 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야합하여 소백산맥을 타고 북상하였다. 한편 전쟁은 북진 그리고 1.4후퇴, 재반격을 거듭하다가, 51년 하반기 7월 10일 휴전회담을 시작으로 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후방은 남부 산악지대에 은거하던 빨치산들이 활동을 강화하고 산악지역에는 소위 <해방구>를 만들어 현물세를 거두어들이는 등 주야로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이 양존하는 양상을 가져왔다.
지리산 지구 빨치산들이 준동함에 따라 제3군단 예하 제9사단과 11사단이 빨치산과의 전투를 전담하다가 전선으로 복귀하고 제 8사단이 1951년 4월부터 작전을 전개하면서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지전사)를 설치하였다. 그 후 토벌 작전이 미흡하여 작전성과를 확대하기 위하여 51년 9월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서전사)를 창설하여 작전을 보강하였다. 다시 51년 11월 16일에는 야전군 산하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임시 편성하여, 백선엽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를 남원에 설치하고 휘하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와 태백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이성우 경무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신상묵 경무관)를 배속시켰다. 당시 지리산의 빨치산 활동은 정부에서도 우려할 만큼 각처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1951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백전투사령부의 제1기 제1단계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빨치산의 근거지인 지리산을 남북에서 크게 포위 압축하여 일망타진하는데 있었다. 순천에서 출발한 수도사단은 백운산 - 형제봉 - 천왕봉을 거쳐서 반야봉과 노고단의 축선으로 북진하고 남원에서 하행한 제8사단은 천마산 - 밤재 - 덕두산 - 삼봉산 - 왕산을 거쳐 지리산의 북쪽으로 추격하였으며, 또한 서전사 예하의 각 부대들은 동서의 주요 퇴로를 차단하여 동시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작전은 이미 빨치산게 탐지되어 남부군사령부와 전북도당사령부의 간부급 소수 인원은 지리산 뱀사골을 탈출하여 장수 백운산으로 은거하였다. 당시 빨치산 세력은 남부군 직속의 81사단, 92사단과 경남도당사령부와 예하 57사단, 전남도당 백운산사령부 파견부대인 704 - 1부대였다. 전북도당과 충남도당의 빨치산 부대에서 지리산 공비를 지원하기 위하여 전북도당 909연대, 장수군당의 무장병력 200명, 충남도당 68사단 100여 명이 지리산 달궁에 도착하여 세력을 보강하여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국군은 빨치산 사살 561명, 포로 969명, 투항 4명과. 소총 193정, 박격포 4문, 경기관총 3정, 수류탄 25발 등을 노획하였다.
백전투사령부의 제1기 제2단계 작전은 1951년 12월 7일부터 12월 15일까지 9일 동안 실시되었는데 이는 지리산을 포위 압축한 수도사단과 제8사단이 다시 회전하여 남북으로 분진하면서 수색 격멸하는 작전이었다. 양사단은 진주 - 하동 - 구례와 산청 - 함양 - 운봉 - 남원으로 이어 추격하면서 공비들을 노령산맥을 타고 깊숙히 잠적케 하였다. 제8사단의 전과는 사살 271명과 포로 98명을 비롯한 각종 소총 60정에 경기관총 6정이었다.
백전투사령부의 제2기 작전은 1951년 12월 16일부터 1952년 1월 4일까지 20일 동안에 걸쳐서 실시된 각개 격파전이었다. 당시 빨치산 부대는 본거지를 잃고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의 잔당과 합류하여 재기를 꾀하고 있었는데, 수도사단은 전북의 운장산 일대를 제8사단은 전북의 회문산 일원을 각각 토벌하자 빨치산들은 다시 지리산 잠입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궤산(潰散)되었다.
이 작전에서 수도사단은 790명을 사살, 포로 478명, 제8사단은 사살 155명, 포로 202명이었다. 이른바 ‘노령병단’ 이라는 빨치산 부대의 주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1952년 2월 백전투사령부의 2기에 걸친 토벌작전을 종료하고 제8사단과 함께 전선으로 복귀하고 수도사단은 서전사를 지휘하다가 3월에 전선으로 복귀하자 서전사가 빨치산과의 전투를 전담케되었다. 그해 8월 5일 서전사는 남부지구경비사령부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51년 7월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이 6개 도당 회의를 개최하여 사단제로 개편된 빨치산 부대의 세력은 소지구당 편성을 완료하고 아군 보급로를 위협하며 자신들의 무기와 탄약 보급에 주력하고 있었다.
국회에서는 빨치산 토벌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고 1953년 2월 초에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작전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후방 공비를 1년 내에 평정할 것.
2. 신설되는 전투경찰은 군부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지리산에서 수행할 것.
3. 각 관계 도지사는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전투경찰 사령관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고, 빨치산 출현이 있을 경우 사령관에게 요청하면 사령관은 즉시 출동하여 공비를 격멸할 것.
53년 4월 18일. 국회의 의결을 거친 법률 제 282호에 의해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창설되어 남부지구경비 사령부에 배속시켰다.
이즈음 이현상의 제 5지구당에서도 이들 작전에 대비하여 4월 30일 지구당 조직위원 및 전라남북도당과 경남도당 위원장을 지리산으로 긴급 소집하여 조직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그 조직위원은 이현상, 박영발, 김삼홍, 김선우, 조병하, 방준표, 박찬봉 등이었다. 이 회의에서 제5지구당 결정서를 통해 각도당, 군당, 면당 유격대별로 분산되어 있는 빨치산을 규합하여 군사부대로 개편하여 긴지회부대를 제5지구당 직속으로 배속하고, 전남부대, 경남부대, 전북부대로 개편된 공비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에 각 거점울 확보하고 철도 및 주 보급로를 공격하여 토벌작전에 대항하였으나 대규모적인 군경의 공세에 궤주하였다. 북한에서 남로당 세력의 몰락은 지리산 빨치산의 세력에 영향을 미쳐 1953년 8월 26일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가 반야봉 남쪽 빗점골(빗기재-횡치)에서 열렸다. 전투경찰에 의한 공비들의 간부가 다수 사살되자 그 책임을 숙청된 박헌영. 이승엽 계열인 제5지구당의 불합리한 운영으로 규정짓고 제5지구당을 해체함은 물론 총사령관인 이현상의 지위가 격하되었다. 그리고 1953년 9월 18일 빗점골 토벌 작전에서 이현상의 사살이 확인되었다. 그 후 지리산 작전은 1953년 12월 제5사단을 백전투사령부로 개편하여 1954년 5월까지 장기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다가 1955년 4월 1일 서남지구사령부는 지리산 빨치산이 완전 섬멸되었음을 공표하였다. 뱀사골에 있는 <지리산지구전적기념관> 전시자료에 의하면 1950년 이 후 5년 6개월 동안 지리산 빨치산부대 토벌 작전 중 소탕된 빨치산 병력은 2만여명이며 아군 피해는 6,300여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록 지리산, 백선엽, 1992)
<표 1-12> 6․25 동란 중 4개 읍면의 인명 손실
인적피해
구분
면 명
운 봉
아 영
동 면
산 내
계
살해
공무원
남
37
7
3
4
51
여
일반
남
5
7
21
48
81
여
3
3
인
적
피
해
상해
공무원
남
9
7
16
여
일반
남
2
4
30
21
57
여
납치
공무원
남
1
1
여
일반
남
4
4
여
행방불명
공무원
남
여
일반
남
8
2
47
57
여
합계
공무원
남
47
7
10
4
68
여
일반
남
19
13
51
116
199
여
3
3
계
남
66
20
61
120
267
여
3
3
<표-11> 6.25 동란 중 4개 음면의 물적 손실
물 적 피 해
면명
건 물
기 타
동상
전파
전소
계
반파
반소
계
교 량
기 타
환산
(만원)
공서
민간
공서
민간
전파
반파
계
운봉면
4
149
153
15
15
1
1
745
2,640
아영면
32
32
36
36
소: 85, 돼지: 168
1,205
동면
13
167
180
2
2
1
1
8,000
산내면
3
357
360
3
8
11
3
3
108
17,000
계
20
705
725
3
61
64
4
1
5
비고
산내면 전소 357, 거주민수 2275인
문헌상으로 <운성지 속편>에 기록되어 있는 6․25 동란 중 인적․물적 손실을 살펴본다. 운봉 4개 읍면 사상자와 납치. 행방불명은 총167명, 불타거나 파괴된 건물이 360호, 교량 파괴가 5개소, 가축 등 기타 피해가 1,106점이었다. 지역별 손실 상황을 살펴보면, 살해된 공무원 수는 운봉이 총 57명 중 3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체 사망자는 근접지역인 산내면이 123명으로 총 사망자의 50%였다. 건물과 교량 파괴 역시 지리산에 인접한 산내면이 가장 많았다.
9. 현대
1960년 4.19 이 후에 출범한 제2공화국에 이르러 시․읍․면장의 직선제와 함께 운봉면의 직선면장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혁명으로 자치단체장은 임명제로 바뀌고 자치단체였던 읍과 면은 군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1973년에는 전국에 대대적인 조정 작업을 실시하여 192개 지역의 행정 관할 구역 및 명칭이 폐치분합되었다. 이 때 운봉 4개 읍면의 각 마을의 명칭이 개칭되기도 하였다. 1981년 7월 1일 남원읍은 시로 승격되고, 1995년 1월 1일 남원군이 시(市)로 통합되면서 운봉면은 운봉읍으로 승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행정편에 수록하였다.
제2장 지 리
1. 위 치
한 마을이 내륙 산지에 위치하느냐 혹은 해안 평야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마을 주민 생활에 미치는 자연적인 영향이 다르다. 또한 마을이 농사를 영위하는 평야 지대에 위치하느냐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 주변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인문적으로 그 마을의 특성과 기능이 달라진다. 이와 같이 한 행정구역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그 행정구역의 특성과 역할이 다르게 나타난다.
한 지역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구 표면의 구면 좌표인 위도, 경도로 표시하는 수리적 위치와 자연 지물과의 관계에서 보는 지리적 위치, 그리고 주변과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상호 관계면에서 보는 관계적 위치로 나누어 고찰한다.
수리적 위치와 자연 지리적 위치는 항상 변하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 위치로서 불변적인 것이나, 관계적 위치는 그 주변이 발전, 쇠퇴함에 따라 바뀌어지기 때문에 상대적 위치로서 가변적이다. 그러나 지리적 위치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그의 잠재적 조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수리적 위치는 큰 규모로 위도는 기후에 영향을 주고, 경도는 표준시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위도상의 위치는 인간 생활에 기후 환경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저위도 지방은 더운 열대 지방으로서, 고위도 지방은 추운 한대 기후로서 인간 생활에 어려운 점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다. 그러나 중위도 지방은 온대 기후로 인간 생활에 적합하여 많은 세계 인구가 온대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인간 생활에 적당한 기후는 인간 활동의 능률을 높여 주고 활동력을 자극하여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루도록 한다. 위도 1°북상하면 연평균 기온이 대체로 0.2~1℃씩 낮아진다.
경도상의 위치는 본초 자오선을 기준으로 동쪽 혹은 서쪽으로 몇 도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지구 자전에 따라 경도 간격 15°가 1시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동쪽으로 갈 수록 시간이 빨라지며, 서쪽으로 갈수록 시간이 늦어진다. 같은 표준시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서쪽 보다 동쪽이 해뜨는 시각이 빠른 것이다.
그러나 1읍, 3개 면(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 규모 내에서는 지역의 면적이 좁기 때문에 기온과 시간의 큰 차이가 없다.
지리적 위치나 관계적 위치는 그 지역의 입지조건이 되고 「거리의 극복」인 교통과 관계되어 생활권의 분화에 의해서 지역 분화가 나타난다. 지리적 위치는 내륙, 해안, 해양과 산지, 평야와 같은 자연 지물과의 관계에서 본 위치로서 그 지역의 산업 활동과 문화, 역사 등의 지역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또한 좁은 지역 내에서는 산지, 고원, 분지, 계곡, 평야와 같은 지형적인 특성과 해발고도에 따라서 각 지점간의 기후 차
(그림 2-1)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과 그 주변의 위치
이가 나타나며, 지역간에 생활양식의 차이를 가져온다.
관계적 위치는 정치적․문화적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매우 복잡하며, 시대에 따라 변화가 많다. 특히 국가나 문화지역의 주변부에 위치할 때에는 관계적 위치의 변화가 매우 크며, 그에 따라서 지역성 또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위치를 수리적 위치, 지리적 위치, 관계적 위치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수리적 위치
정부수립 이후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로(’81. 4. 13공포)남원읍이 남원시로 승격되어 남원군 관할구역에서 제외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에 의거 도농통합형(시․군통합)『남원시』가 설치되어 이전의 남원시와 남원군이 합하여 남원시로 되었다. 1995년 3월 2일 법률 제4789호에 의거 운봉면이 운봉읍으로 승격 설치 되었다. 남원시는 전라북도의 남동부에 위치한다. 남원시 동부에 위치한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동으로는 경상남도, 남으로는 전라남도와 접하여 도의 경계를 이룬다.
<그림 2-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동단은 산내면 중황리 동부의 삼봉산(1,186.7m)에서 남동쪽으로 550m 떨어진 지점이다. 이 지점은 삼봉산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지릉으로 해발고도 1,035m이다. 이곳은 동경 127°40′30″, 북위 35°26′25″이다. 최서단은 운봉읍 장교리 서부의 장치에서 남서쪽으로 300m 떨어진 지점이다. 이 지점은 해발고도 561.8m의 산정으로, 동경 127°29′25″, 북위 35°26′55″이다. 최남단은 산내면 덕동리 남부의 삼도봉(1,499m, 날라리봉)이다. 이곳은 뱀사골계곡의 최상류이기도 하며,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3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동경 127°34′48″, 북위 35°18′21″이다. 최북단은 아영면 구상리 북부의 봉화산(919.8m)에서 북동쪽으로 1km 떨어진 지점이다. 이 지점은 봉화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은 지릉으로 해발고도 955m의 산정이다. 이곳은 전라북도 남원시와 장수군, 경상남도 함양군이 만나는 지점으로 동경 127°35′16″, 북위 35°33′6″이다.
이렇게 보면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경도로는 동경 127°29′25″~ 127°40′30″에 걸쳐서 경도 간격(동서 간격)이 약 11′5″, 위도로는 북위 35°18′21″~ 35°33′6″에 걸쳐서 위도 간격(남북 간격)이 약 14′45″이다.
위도 1′의 경선(자오선)의 길이는 고위도 지역이나 저위도 지역에서 큰 차이가 없이 약 1,850m 이나, 경도 1′의 위선의 길이는 적도만이 대원 또는 대권(Great circle)이고 양극으로 갈수록 작아져서 위도 35°~ 36°대에서는 약 1,500m이다. 따라서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남북 거리 약 27.4km , 동서 거리 16.7km로 남북으로 조금 긴, 송이버섯 모양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위도로는 북위 35°~ 36°에 걸쳐서 중위도권에 위치한다. 남원시 관내의 기상 관측소는 남원기상관측소 뿐이기 때문에 남원 기상관측소의 자료를 보면 남원시의 연평균 기온이 12.1℃, 연평균 강수량이 1,250~1,400㎜ 이다. 이는 동일위도권의 세계 연평균 기온에 비해 약 6.1℃가 낮다(북위 35°30′에서의 연평균 기온은 약 18.2℃임). 우리 나라는 같은 위도에 비해 겨울철 기온이 상당히 낮게 나타나고 있으나 여름철에는 약간 높게 나타나 있어 전반적으로 보아 같은 위도에 비해 기온이 낮은 저온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 이유는 우리 나라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에 접하여 있기 때문에 북서 계절풍(겨울 몬순)과 남동 계절풍(여름 몬순)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커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전반적으로 여름철 기온의 지역차는 작지만 겨울철 기온의 지역차는 크다. 같은 위도대라 할지라도 해안에 비하여 내륙의 겨울철 기온이 낮다. 따라서 전라북도의 연평균 기온은 대체적으로 서해안에서 북동부 산간지역으로 갈수록 약간 낮은 기온 분포를 보인다. 남원기상관측소의 해발고도가 115m 인데 비하여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평야지역의 해발고도가 300~480m, 산지의 해발고도가 ~1,730m로 남원보다는 200m 이상이 높아, 남원의 연평균 기온보다 2℃ 이상 낮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원 지역은 1월 평균 기온이 영하 1℃ 내외, 8월 평균 기온 25℃ 내외, 겨울철(12, 1, 2월) 강수량 100㎜내외, 여름철(6, 7, 8월) 강수량 650~680㎜로 쾌펜(KӦppen)의 기후 구분으로는 온대 동계 소우 하계 고온 기후(Cwa)에 속한다. 이와 유사한 기후 지역은 일본 혼슈(本州)의 남서부 지방(오오사카, 쿄오토 등지), 중국의 화중(華中)지방(청도, 남경 등지), 미국의 아팔라치아 산맥 주변지역(볼티모어, 신시내티 등지), 남미의 라풀라타강 유역(부에노스아이레스, 몬테비데오 등지)등이다.
우리 나라 전체의 기후 구분으로는 남부 내륙 기후형에 속하는데, 이 기후형의 분포 범위는 소백산맥의 동․서사면과 낙동강 중상류의 넓은 내륙지방으로 지형의 고저가 상당하다. 소백산맥 서쪽의 호남지방은 연강수량이 1,100~1,200㎜이나, 동쪽의 영남지방은 900~1,200㎜로서 상당한 지역차를 보인다. 지리산지의 북서사면에 속하는 운봉읍, 동면, 아영면은 겨울에 북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적설량이 많지만 산내면은 계곡으로 적설량이 적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과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도시는 국내에서는 밀양, 울산이며, 외국에서는 일본의 도쿄(東京), 미국의 오클라호마, 중국의 칭다오(靑島), 이란의 테헤란 등지이나, 완주군과 같이 대륙 동부에서 온대 계절풍 기후에 속하는 곳은 도쿄와 칭다오이다.
우리 나라의 표준시는 일본, 중국의 만주 지방, 소련의 동부 시베리아의 일부 지역과 함께 동경 135°여서 본초 자오선 보다는 9시간이 빠르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중앙 경선인 동경 127°35′에서의 지방시는 동경 135°의 표준시보다 30분 늦다. 즉, 동경 127°35′선상{대체로 최남단(삼도봉)과 최북단(아영면 구상리 북부)을 연결한
(그림 2-2)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과 그 주변의 지형.
선}에서 태양이 남중하는 시각은 12시가 아니라 12시 30분이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과 같은 시각에 태양이 남중하는 지역은 이천, 청주, 대전, 순천 등이다.
나. 지리적 위치
운봉읍의 남동부와 산내면은 <그림 2-2> 에서 보는바와 같이 지리산지의 서북쪽 주능선이 된다. 동면, 아영면의 서~북~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는 덕유산지의 남단이 된다. 덕유산지는 장수군 백운산(1,278.6m)을 지나 국도 24호선(광주~울산)이 지나는 동면의 팔량치에서 현저히 낮아져 지리산지와 구분된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지리적으로 크게 3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운봉읍과 주천면 고기리, 덕치리를 포함하는 운봉분지, 풍천천을 중심으로하는 동면․아영면분지, 남원시에서 가장 넓은 면적에 산지가 많으면서도 가장 적은 규모의 평야를 가진 산내면으로 지역 구분이 가능하다.
운봉분지(450m내외)와 동면․아영면분지(430m내외)는 분지벽의 바깥쪽 요천(150m내외)과 위천(250m내외) 하상에 비하여 200~300m 높다. 분지 주위에는 수정봉(805m), 고남산(846.4m), 시리봉(776.8m), 봉화산(919.8m) 등의 산지들이 분지벽을 이룬다. 이들 분지벽이 섬진강과 낙동강의 유역 분수계를 이룬다. 전라북도내에서는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만이 낙동강 수계에 속한다.(심원계곡은 산내면과 같은 만수천의 상류이면서, 지리산지 주능선의 북사면이지만 행정구역이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로 되어있다). 요천에서 분지벽 까지는 급경사를 이루고, 분지벽에는 입망치, 여원재, 장치, 통안재, 유치, 사치재, 새맥이재, 복성이재, 꼬부랑재 등 많은 고개들이 있다. 분지는 황산에 의해서 운봉분지, 동면․아영분지로 나뉘어진다.
황산과 덕두산 사이, 동면과 산내면의 경계부분 협곡이 두 유역분지의 좁은 출구가 된다. 두 분지에는 광천과 풍천천 양안에 충적평야가 분포하는데, 좁은 출구가 분지의 침식 기준면이되어 운반물질의 퇴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산내면은 대부분 지리산지의 일부로, 달궁계곡과 뱀사골계곡이 만나서 북동쪽으로 흐르는 만수천 유역분지를 삼봉산, 백운산 지맥이 막은 하나의 분지이다. 광천이 이 분지의 북동부를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관통하며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임천강으로 유입된다. 만수천은 삼정산과 백운산 사이의 백일리 일대에서 협곡을 이루는데, 이 좁은 출구가 침식기준면이되어 입석리 일대의 충적평야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면, 아영면은 덕유산지와 지리산지 사이의 안부(鞍部)가 된다. 북으로는 멀리 민주지산(1,242m)에서 대덕산(1,290m), 덕유산(1,594m), 남덕유산(1,508m), 백운산(1,279m), 봉화산(920m)에 이르기까지 1,000m 이상의 능선들이 60여㎞에 걸쳐서 있다. 이 산들이 분수계가 되어 금강수계와 낙동강수계를 갈라놓으면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가 된다. 남으로는 반야봉(1,732m)에서 토끼봉(1,534m), 명선봉(1,586m), 삼정산(1,182m)에 이르는 산들이 지리산지의 서북쪽 주 능선이 되면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도계가 된다. 이러한 덕유산지와 지리산지의 사이에 팔량치(513m)가 있다. 팔량치는 동면 성산리와 함양읍 죽림리의 경계에 있으며, 전라북도 인월과 경상남도 함양을 연결하는 국도24호선이 이곳을 통과하여 영․호남의 통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인월역(仁月驛)이라는 역원이 설치 되었다. 88올림픽고속국도는 아영면 아곡리의 사치재(지리산휴게소)와 팔량치에서 북쪽으로 5.2㎞ 떨어진 의지리의 매치를 통해, 아영면을 북동쪽으로 가로질러 경상남도로 넘어간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대부분 산지와 산간분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경지율이 19.3%로, 도 평균(29.3%)이나 남원시 평균(23.7%)에 미치지 못하며, 밭에 대한 논의 비율도 2.23:1로 전라북도 평균(2.3:1)이나 남원시 평균(2.94:1)에 비하여 낮은편이다. 따라서 고냉지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고 있다. 뱀사골과 운봉의 목기 제작은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풍부한 산림자원의 공급이 입지 요인이다. 그리고 지리산의 관광산업 개발과 함께 무공해 식품산업 및 첨단산업 입지의 여건 조성 등이 계속될 것이다. 동부 산지와 서부 평야지대 사이의 결절지로서의 역할과 자연자원, 관광산업, 고원기후가 접목된 새로운 지역적 특화 산업의 개발이 요구된다.
다. 관계적 위치
<그림 2-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개 읍과 3개 면, 45개 리로 구성된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2도(전라남도, 경상남도), 4시․군(장수군, 경남의 함양군, 하동군, 전남의 구례군), 11읍․면(장수군의 번암면, 함양군의 백전면, 병곡면, 함양읍, 마천면, 하동군의 화개면, 구례군의 토지면, 산동면, 남원시의 주천면, 이백면, 산동면)과 접하고 있다.
아영면 서쪽은 장수군 번암면과 접하고, 동쪽은 경남 함양군 백전면과 접하면서 도계가 된다. 동면 동쪽은 함양군 백전면, 병곡면, 함양읍과 접하면서 도계가 된다. 산내면 동쪽은 함양군 함양읍, 마천면, 경남 하동군 화개면과 접하면서 경상남도와의 도계가 된다. 산내면 남서쪽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산동면과 접하면서 전라남도와의 도계가 된다. 산내면과 운봉읍의 서쪽은 남원시 주천면, 이백면, 산동면과 접하고 운봉읍 북쪽은 장수군 번암면과 접한다.
여원치~운봉읍~인월~팔량치를 따라 국도 24호선이 동서로 지나면서 남원과 함양을 연결한다. 이 도로는 전주~남원~함양~진주(산청~의령)~마산~부산을 연결하는 길목으로 부산항을 이용하는 전라북도의 화물과, 노선버스들이 대부분 이 도로를 이용한다. 국도 24호선 북쪽으로 88올림픽고속국도가 지리산 휴게소~인월 인터체인지~매치를 지나 남원과 함양을 연결한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운봉읍을 경유하던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함양~매치~아영~인월~산내~마천을 연결하는 지방도 1,084호선이 아영면, 동면, 산내면을 북에서 남으로 달리며 인월에서 국도 24호선과 교차한다. 산내~달궁계곡의 지방도 729호선은 노고단과 고리봉 사이의 성삼재를 지나는 지방도 861호선에 이어져 전라남도 구례와 연결된다. 운봉~주천면 고기리~육모정~남원을 연결하는 지방도 730호선은 고기리 삼거리와 정령치를 넘어 심원 삼거리(전라북도와 전라남도의 경계)에서 지방도 729호선과 연결된다.
1988년에 완공된 지리산 산악관광도로(산내면~달궁~심원~성삼재~구례, 남원시 주천면 육모정~구룡계곡~고기리~선유폭포~정령치~심원)가 확장․포장 되면서 지리산은 해마다 등산객과 관광객이 늘고 있다.
(표 2-1) 남원시 관내 육로 이정표(km),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남원
운봉
20.2
동면
7.4
27.4
인월
~
함양
14.3
아영
4.5
11.9
31.9
인월
~
장수
34.3
산내
12.8
8.3
15.7
35.7
운봉
~
장수
28.9
주천
47.4
43.0
39.1
31.7
11.7
수지
22.9
46.9
43.1
38.6
22.9
11.2
송동
12.7
21.2
45.2
41.4
36.9
21.2
9.5
주생
14.5
15.2
16.7
40.7
36.9
32.4
16.7
5.0
금지
4.2
18.7
20.4
26.9
44.9
41.1
36.6
26.9
9.2
대강
14.0
18.2
32.7
34.4
34.9
58.9
55.1
50.6
34.9
23.2
대산
27.3
13.3
6.1
18.6
20.3
20.8
44.8
41.0
36.5
20.8
9.1
사매
21.3
35.4
21.4
17.2
21.7
23.4
27.7
46.4
41.1
39.6
27.7
12.2
덕과
2.8
24.1
38.2
24.4
20.0
24.5
30.7
26.7
46.7
42.8
35.9
26.7
15.0
보절
4.2
8.0
24.3
33.4
21.2
20.0
24.7
23.2
26.9
37.8
33.9
29.4
26.9
15.2
산동
17.7
24.2
27.9
24.8
38.9
24.9
20.7
25.2
26.9
27.4
33.8
30.0
25.5
27.4
15.7
이백
13.0
16.9
29.9
27.1
24.0
38.1
24.1
24.0
24.4
26.1
26.6
24.8
21.0
16.5
26.6
14.9
378.0
404.0
363.7
416.8
400.9
377.1
568.2
372.2
308.5
393.1
418.9
451.6
590.8
531.5
465.2
365.6
267.1
※ 제일 아래의 굵은선 안에 있는 수치가 그 수치 상단의 읍․면과 다른 각 읍․면간의 거리를 합한 수치임.
교통의 발달은 경제권이나 교육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관계적 위치로 통합시 이전의 남원시와 이백면과 주천면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서 모든 면에서 남원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은 남․동․북쪽으로는 높은 산지로 둘러싸이고 서쪽은 급경사의 분지외벽으로 이루어져 외부와의 접근성이 좋지 못한 지역이다. 그러나 분지벽에는 많은 고개들이 있고, 이를 통하여 고속국도, 국도, 지방도가 발달하여 외부와의 접근성을 향상시키며, 특히 지리산 산악관광도로는 외지인의 유동을 크게 증가 시켰다.
산내면의 대부분, 동면․운봉읍의 일부가 지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해마다 관광객이 늘면서, 순수 농업에만 종사하던 원주민들이 관광산업에 종사하거나, 관광객
에게 공급 할 지역 특산품의 생산에 종사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표 2-1>은 남원시 관내 각 읍․면간 육로 이정표 이다. 이를 통하여 인구의 크기는 무시하고 단순히 거리만을 계산하여 남원시내 각 읍․면에서 한 읍․면 까지의 거리를 모두 합하면 남원시 관내 각 읍․면간의 접근성을 단순하게 살펴볼 수 있다.
각 읍․면간의 접근성은 남원이 가장 좋다. 다음으로 주생, 보절, 운봉, 금지, 대산, 이백, 송동 순이다. 산내는 가장 낮으며 대강, 아영, 동면, 주천, 수지, 덕과, 산동, 사매 순으로 접근성이 낮다.
<그림 2-3>은 각 읍․면간의 거리와 육로의 연결을 모식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덕과
4.2
보절
2.8
8.0
대산
사
매
산동
아영
9.1
12.2
15.7
동면
4.5
8.3
산내
6.1
남
원 14.9
이백
5.0
11.7
9.1
7.4
31.7(13.7)
운봉
대
강 주생
주천
14.0
4.2
9.5
11.2
금지
송동
12.7
수지
(그림 2-3) 남원시 관내 각 읍․면간의 거리(km)와 관계적 위치
2. 면 적
<표 2-2>는 1읍, 3면, 45법정리의 행정 구역으로 이루어진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면적을 남한․전북․남원시 전체의 면적, 경지 면적과 비교하면서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표 2-2)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면적 개황(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구 분
읍․면
및 비교
면적( ㎢ )
경지면적( ㎢ )
경지율(%)
※논․밭의 구성비
논(%)
밭(%)
운 봉 읍
69.53
19.65
28.3
73
27
동 면
37.48
9.08
24.2
68
32
아 영 면
35.46
12.24
34.5
70
30
산 내 면
103.43
6.60
6.4
56
44
계
246.13
47.57
19.3
69
31
남원시 전체
752.02
178.42
23.7
75
25
전 북 전 체
8042 .46
2357.98
29.3
78
22
남 한 전 체
99,391.82
20,548.14
20.7
63
37
※ 논․밭의 구성비는 경지 면적을 100으로 하여, 그 구성의 퍼센트를 나타냄.
전북 전체와 남한 전체는 1994년도 농림수산통계연보(농림수산부)에 따름.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 전체의 면적은 246.13㎢ 로, 1읍, 15면, 9동으로 구성이 된 남원시 전체 면적의 32.7%, 전북 전체 면적의 3.1%, 남한 전체 면적의 0.25%를 차지한다. 남원시 에서는 산내면의 면적이 가장 넓어 유일하게 100㎢ 이상이다. 운봉읍이 69.53㎢ 로 두 번째로 넓으며, 남원시에서 면적이 50㎢ 가 넘는 곳은 주천면, 산동면 이다. 아영면에 비하여 동면의 면적이 2㎢ 넓으며 대산면과 비슷하다. 이처럼 운봉읍을 제외하면 산간부에 속하는 산내면의 면적이 넓고, 평야부에 속하는 동면, 아영면은 면적이 좁다.
경지 면적은 반대로 되어서 운봉읍, 아영면, 동면 순으로 넓고 산내면이 좁다. 동면, 아영면, 산내면 중에서 가장 좁은 면적의 아영면이 경지 면적은 가장 넓다. 경지율도 아영면이 34.5%로 가장 높으며 남원․전북․전국 평균에 비해 비교적 높다. 운봉읍과 동면의 경지율은 남원․전국 평균 보다는 높으나 전북 평균 보다는 낮다. 산내면이 6.4%로 가장 낮으며 전국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처럼 산내면의 경지율이 낮은 것은 지리산지 서북단 주능선의 산악지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운봉읍, 동면, 아영면은 고원상산간분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논․밭의 구성비로 보면 운봉읍, 동면, 아영면은 논의 비율이 70% 내외로 전북 평균에 비해 조금 낮고 전국 평균 보다는 조금 높다. 산내면은 논의 비율이 56%로 비교적 낮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운봉읍, 동면, 아영면은 논농사 지대로, 산내면은 논․밭혼합농 지대로 구분 할 수 있다.
3. 인 구
가. 인구 분포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읍․면, 리별 가구․인구수를 정리한 것이 <표 2-3>이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총 인구는 17,040명으로, 전라북도 전체 인구 2,009,651명의 약 0.85%, 남원시 인구 109,224명의 약 15.6%에 해당한다. 가구수와 인구는 운봉읍이 1,994가구 6,715명으로 가장 많으며, 남원시 관내 다른 면에 비해서도 가장 많다. 다음으로 동면이 1,252가구 4,152명, 아영면이 1,019가구 3,414명, 산내면이 835가구 2,759명 순이다.
남원시 관내에서 인구가 적은 면은 덕과․수지․대산․사매․산내면 순이다. 아영면은 주천면과, 동면은 금지면과 비슷하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 전체의 1가구당 평균 인구수는 3.34명이며, 운봉읍이 3.37명으로 가장 많고, 산내면이 3.30명으로 가장 적다. 아영면은 3.35명, 동면은 3.32명 이다. 이것은 전북 평균 3.42보다는 낮고, 남원시 평균 3.31보다는 높은 것이다.
리별 인구를 비교해 볼 때, 동면 인월리 1,210명, 서무리1,035명, 운봉읍 서천리 977명 순으로 많으며, 산내면 내령리 106명, 운봉읍 임리 149명, 산내면 부운리 154명 순으로 적다. 그밖에 운봉읍 공안․동천․장교․화수리, 산내면 대정리가 500명 이상, 동면 자래리, 아영면 봉대리가 200명 미만이다. 인구가 많은 리는 국도와 지방도가 만나는 교통의 결절점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전체 평균 산술인구밀도는 1㎢당 69.2로 전라북도 249.3, 남원시 145.2에 비해서 매우 낮다. 동면, 운봉읍, 아영면은 110.8, 96.6, 96.3으로 서로 비슷하지만 산내면은 26.7로 가장 낮다. 이는 운봉읍, 동면, 아영면이 고원상의 산간분지 이지만 산내면의 대부분은 산지이기 때문이다. 경지면적 1㎢당 인구밀도는 전체 평균이 358.2으로, 전북(857)과 남원시(612)에 비하여 매우 낮다. 동면(457.4)과 산내면(418.0)이 높고, 운봉읍(341.7)과 아영면(278.9)이 낮다.
(표 2-3) 각 읍․면, 리별 세대 및 인구현황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읍․면
리
가 구 수
인 구 수
계
남
여
운봉읍
계
1,994
6,715
3,335
3,380
주촌리
67
224
102
122
덕산리
96
311
151
160
공안리
139
506
242
264
행정리
66
231
113
118
산덕리
92
309
152
157
동천리
255
804
413
391
용산리
66
234
116
118
북천리
103
337
161
176
서천리
287
977
492
485
준향리
52
220
111
109
장교리
169
561
281
280
권포리
133
419
207
212
임 리
39
149
77
72
신기리
93
316
162
154
매요리
102
314
150
164
가산리
77
273
131
142
화수리
158
530
274
256
동 면
계
1,252
4,152
2,116
2,036
중군리
55
229
128
101
인월리
383
1,210
611
599
서무리
314
1,035
528
507
취암리
99
334
173
161
건지리
107
332
160
172
유곡리
93
314
151
163
상우리
73
245
137
108
성산리
77
264
136
128
자래리
51
189
92
97
아영면
계
1,019
3,414
1,702
1,712
아곡리
77
253
115
138
봉대리
58
195
96
99
인풍리
126
411
194
217
갈계리
84
265
130
135
청계리
152
466
254
212
월산리
118
405
182
223
성리
63
219
106
113
구상리
60
214
117
97
일대리
108
373
196
177
의지리
106
355
176
179
두락리
67
258
136
122
산내면
계
835
2,759
1,428
1,331
중황리
139
469
234
235
백일리
97
334
173
161
대정리
219
708
363
345
장항리
139
471
255
216
입석리
91
286
146
140
내령리
36
106
47
59
부운리
52
154
83
71
덕동리
62
231
127
104
계
5,100
17,040
8,581
8,459
나. 인구 구조
농가의 비율은 산내면과 아영면이 높고, 동면과 운봉읍이 낮다. 전업농의 비율은 아영면이 높고, 운봉읍, 동면, 산내면은 84~81%로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도시에 가까울수록 전업농가의 비율이 낮고,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전업농가의 비율이 높아진다. 아영면의 전업농가 비율이 높은 것은 남원시 관내 읍․면 중에서 산내면 다음으로 접근성이 낮으면서, 산내면과 달리 지리산 산악 관광도로의 영향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표 2-4)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인구밀도와 농가수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계
운봉읍
동 면
아영면
산내면
산술 인구 밀도(명/㎢)
69.2
96.6
110.8
96.3
26.7
경지 인구 밀도(명/㎢)
358.2
341.7
457.4
278.9
418.0
가
구
수
계
5,100
1,994
1,252
1,019
835
농가
계
3,350
1,251
695
761
643
전업(※비율)
2,851(77)
1025(82)
583(84)
725(95)
518(81)
겸 업
499
226
112
36
125
비 농 가
1,750
743
557
258
192
농가 : 비농가
66 : 34
63 : 37
56 : 44
75 : 25
77 : 23
※ (전업농가/전체농가)×100
인구의 증감은 자연적 증감(출생-사망)과 사회적 증감(전입-전출)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자연적 증감에 따른 인구 피라미드는 저개발국가에서 볼 수 있는 다산 다사의 피라미드형, 선진국에서 볼 수 있는 소산 소사의 종형 또는 방추형이 있다. 사회적 증감에 따른 인구 피라미드는 전입이 활발한 도시 지역의 별형과 전출이 활발한 농촌 지역의 표주박형이 있다.
(표 2-5)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성․연령별 인구구조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연령별
구 분
운 봉
동 면
아 영 면
산 내 면
계
남원 전체
계
계
6,715
4,152
3,414
2,759
17,040
109,185
남
3,335
2,116
1,702
1,428
8,581
54,060
여
3,380
2,036
1,712
1,331
8,459
55,125
0~ 4세
계
253
200
96
130
679
6,584
남
124
106
40
70
340
3,474
여
129
94
56
60
339
3,110
5~ 9세
계
334
207
155
106
802
6,463
남
164
105
86
54
409
3,403
여
170
102
69
52
393
3,060
10~14세
계
446
317
278
182
1,223
8,965
남
225
173
152
89
639
4,508
여
221
144
126
93
584
4,457
15~19세
계
783
481
424
293
1,981
11,186
남
398
260
205
149
1,012
5,620
여
385
221
219
144
969
5,566
20~24세
계
793
438
382
341
1,954
11,682
남
458
236
228
201
1,123
6,441
여
335
202
154
140
831
5,241
25~29세
계
427
322
175
222
1,146
8,296
남
235
192
111
139
677
4,484
여
192
130
64
83
469
3,812
30~34세
계
350
243
137
143
873
7,102
남
208
139
71
98
516
3,736
여
142
104
66
45
357
3,366
35~39세
계
354
245
186
144
929
7,121
남
205
129
95
83
512
3,636
여
149
116
91
61
417
3,485
40~44세
계
322
225
172
116
835
5,739
남
165
116
94
61
436
2,980
여
157
109
78
55
399
2,759
45~49세
계
355
238
189
162
944
5,880
남
152
121
90
82
445
2,900
여
203
117
99
80
499
2,980
50~54세
계
443
250
225
159
1,077
5,882
남
181
115
94
67
457
2,529
여
262
135
131
92
620
3,353
55~59세
계
506
286
247
239
1,278
6,531
남
230
133
111
106
580
2,977
여
276
153
136
133
698
3,554
60~64세
계
461
227
229
174
1,091
5,961
남
213
98
97
88
496
2,584
여
248
129
132
86
595
3,377
65~69세
계
326
183
201
140
850
4,432
남
148
86
94
56
384
1,975
여
178
97
107
84
466
2,457
70~74세
계
237
133
157
91
618
3,289
남
115
61
73
39
288
1,458
여
122
72
84
52
330
1,831
75~79세
계
162
76
88
59
385
2,156
남
64
28
37
25
154
837
여
98
48
51
34
231
1,319
80~84세
계
91
52
43
38
224
1,134
남
30
16
21
16
83
347
여
61
36
22
22
141
787
85세 이상
계
72
29
30
20
151
782
남
20
2
3
5
30
171
여
52
27
27
15
121
611
대도시는 소비재 공업이 발달하여 단순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농촌으로부터 여성 노동력의 전입이 활발하여 여자의 비율이 높은 반면 농촌은 남자의 비율이 높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도 농촌 지역이라는 특성에 따라 성비가 101.4로 남초 지역이다. 산내면이 107.3으로 성비가 가장 높고, 운봉읍이 98.7, 아영면은 99.4로 여초 지역이지만 성비의 불균형이 그리 큰 것은 아니다. 농촌은 노년층(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은데, 여성의 평균 수명이 길어 노년층에서 심한 여초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소년층(0~14세)은 성비가 113으로 남초, 청․장년층(15~64세)은 105.1로 남초이지만, 노년층은 72.8로 심한 여초(女超)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청․장년층 중에서도 44세 미만은 성비가 124.2로 심한 남초(男超) 현상이 나타난다. 반면에 45세 이상은 여초다.
유․소년층의 인구 비율이 16.4%, 청․장년층의 인구 비율이 70.5%, 노년층의 인구 비율이 13.1%로, 유․소년층의 비율이 낮으며, 노년층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에 농촌의 인구 감소로 인한 노동력 부족 문제와 인구의 고령화로인한 노인 문제, 세대간의 성비 불균형 문제 등 인구 문제의 해결이 시급하다.
<그림 2-4>는 <표 2-5>를 이용하여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 전체의 인구 피라미드를 그린 것이다. 연령별 인구의 상대적 비율이 아닌 인구의 절대적 수치를 이용하여 표현하였다. 전형적인 농촌의 표주박형과 노년층의 여초, 청․장년층의 남초 현상이 잘 나타난다.
다. 인구의 이동 및 추이
<표 2-6>은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인구변화를 정리한 것이다. 1994년에 비하여 1995년에 운봉읍 24가구, 동면 12가구, 아영면 2가구, 산내면 25가구씩 가구 수가 증가 하였다. 그러나 인구 수는 모든 읍․면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이처럼 가구수가 증가하는 것에 반하여 인구수가 감소하는 것은 가구당 인구수의 감소를 초래한다.
(그림 2-4)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과 전체의 인구 피라미드
(표 2-6)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세대수 및 인구 추이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계
운봉읍
동 면
아영면
산내면
세 대 수
1994년
5,038
1,970
1,241
1,017
810
1995년
5,101
1,994
1,253
1,019
835
인
구
수
※1992년
19,283
7,614
4,640
3,957
3,072
18,627
7,337
4,503
3,792
2,995
1993년
계
9,388
3,637
2,321
1,909
1,521
남
여
9,239
3,700
2,182
1,883
1,474
성 비
101.6
98.3
106.4
101.4
103.2
1994년
계
17,745
6,995
4,350
3,558
2,842
남
8,997
3,490
2,254
1,784
1,469
여
8,748
3,505
2,096
1,774
1,373
성 비
102.8
99.6
107.5
100.6
107.0
1995년
계
17,041
6,715
4,153
3,414
2,759
남
8,581
3,335
2,116
1,702
1,428
여
8,460
3,380
2,037
1,712
1,331
성 비
101.4
98.7
103.9
99.4
107.3
※ 남원시 행정지도(1995. 8) 이용
인구이동은 전입보다 전출이 많다. ’95년의 순 이동은 운봉읍이 -232명으로 가장 많고, 산내면이 -65로 가장 적다. 여자 보다는 남자의 이동이 많고, 전입 인구수는 도외보다는 도내가 많으나 전출은 도내보다도 도외가 더 많다. 1960년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전라북도의 인구가, 1966년 2,521,207명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하여, 1995년에는 2,009,651명으로 감소한 것을 잘 나타낸다. 이동율은 전입에 있어서 산내면이 가장 크고, 아영면이 가장 작으며, 전출에 있어서는 동면이 가장 크고, 아영면이 가장 작다. 순 이동율은 동면이 -4.5%로 가장 크고, 산내면이 -2.4%로 가장 작다.
전라북도의 인구는 일반적으로 ’65~’66년을 정점으로 감소한다. <표 2-8>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인구도 모든 읍․면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특히 ’80년에는 남원군 대부분의 면에서 10% 이상의 인구가 감소하였다. 이것은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는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표 2-7)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인구 이동(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계
운봉읍
동 면
아영면
산내면
전
입
계
1,503
550
406
243
304
성 별
남
794
287
205
123
179
여
709
263
201
120
125
시도간
도내
826
312
209
142
163
도외
677
238
197
101
141
전
출
계
2,094
782
592
351
369
성 별
남
1,126
419
321
183
203
여
968
363
271
168
166
시도간
도내
975
387
297
125
166
도외
1,119
395
295
226
203
순 이 동
-591
-232
-186
-108
-65
※이동율
(%)
전입
계
8.8
8.2
9.8
7.1
11.0
도내
4.8
4.6
5.0
4.2
5.9
도외
4.0
3.5
4.7
3.0
5.1
전출
계
12.3
11.6
14.3
10.3
13.4
도내
5.7
5.8
7.2
3.7
6.0
도외
6.6
5.9
7.1
6.6
7.4
순 이 동
-3.5
-3.5
-4.5
-3.2
-2.4
※ 1995년도의 (이동인구/전체인구)×100으로 나타냄
이 때에도 산내면은 -0.4%, 동면은 -3.8%로 다른 모든 면에 비해서 인구 감소율이 가장 작았으며, 운봉읍과 아영면은 -15% 내외로 인구 감소율이 컸다.
’90년대에도 운봉읍과 아영면의 인구 감소율이 동면과 산내면의 인구 감소율에 비하여 지속적으로 높다.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 모두 인구 이동에 의한 인구 감소보다 총 인구의 감소가 더 크다. 이것은 <그림 2-4>에서 보듯이 출산 적령기라고 할 수 있는 25~40세 사이의 인구가 적어, 출생율이 낮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촌향도라고 표현하는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전출은 생산 연령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표 2-8)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의 인구증가율 추이
(1996년 남원시 통계연보)
계
운봉읍
동 면
아영면
산내면
1977년
-2.2
-0.3
-3.7
-4.0
1980년
-15.3
-3.8
-14.5
-0.4
1983년
-1.3
-0.2
-1.7
-0.7
1987년
-0.8
-0.8
-3.9
-2.5
1989년
-3.8
-3.8
-3.5
-2.3
1993년
-3.4
-3.6
-3.0
-4.2
-2.5
1994년
-4.7
-4.7
-3.4
-6.2
-5.1
1995년
-4.0
-4.0
-4.5
-4.0
-2.9
평 균
-4.03
-4.46
-2.48
-5.21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