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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유애(甘棠遺愛)
감당나무에 남겨진 사랑이라는 뜻으로,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甘 : 달 감(甘/0)
棠 : 아가위 당(木/8)
遺 : 남길 유(辶/12)
愛 : 사랑 애(心/9)
출전 : 시경(詩經) 국풍(國風) 소남편(召南篇)
감당나무에 남겨진 사랑이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은나라 주공(周公)의 덕을 기리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시경(詩經) 국풍(國風) 소남편(召南篇)에 등장하는 구절인 감당(甘棠)은, 주공이 정치를 베풀고 떠난 뒤 백성들이 그가 머물던 감당나무 아래를 아끼고 베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감당나무는 주공의 은혜와 덕정의 상징이 되었고, 나무를 통해 그를 기리는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감당유애(甘棠遺愛)는 누군가가 베풀고 간 큰 사랑이나 은혜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로 누군가가 떠난 뒤에도 그의 덕이 백성들 또는 후대에 깊은 인상을 남겼을 때 사용한다.
벼슬에 종사한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업적이 오랫동안 칭송되는 것이 꿈일 것이다. 지역 곳곳에 수령이나 관리가 백성을 아끼고 그 고장을 발전시켰을 경우 공적을 기린 선정비(善政碑)가 보존되어 있다.
비석은 탐관오리가 억지로 세우게 한 것도 있다고 하니 공덕을 노래한 찬가가 더욱 영광이다. 여기 주(周)나라 소공(召公)을 찬미하는 노래가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감당(甘棠)은 일명 팥배나무라고도 하고 배나무와 비슷하다고 한다. 키가 작고 흰 꽃이 피어 배보다 작은 열매가 열리는 것이 차이라는데 소공이 이 나무 아래서 송사를 듣고 공정하게 판결한데서 유래했다. 감당애(甘棠愛), 감당지애(甘棠之愛)로도 쓴다.
소공은 주나라의 현인으로 칭송받는 주공(周公)의 사촌동생인데 함께 어린 성왕(成王)을 보필하여 초기 기틀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들은 주나라가 다스렸던 지역을 동서로 양분하여 제후들을 관리하고 조정의 치세를 잘 도왔다.
소공이 남쪽을 순시하다가 한수(漢水) 상류 일대의 한 시골 마을을 들렀을 때 팥배나무 아래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 큰 신망을 얻었다.
소공이 죽자 그의 공적을 대대로 그리워했다. 특히 폭군으로 유명한 12대 유왕(幽王)에 이르러서는 한층 더 소공이 사무쳐 이전 순시할 때 쉬어 갔다는 감당수(甘棠樹)를 정성껏 보호하고 민요까지 불리게 됐다고 한다.
그 내용이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소남(召南)편에 있는 감당(甘棠)이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베지도 마소, 소공이 여기서 쉬어 갔다오(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사기(史記)에는 '소공의 정치를 그리워하여 감당수를 베지 못하게 하고, 노래를 불러 칭송하며 감당이라는 시를 지었다(懷棠樹不敢伐, 哥詠之作甘棠之詩)'고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기록했다.
소공(召公)은 중국 주(周)의 정치가로서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燕)의 시조(始祖)이기도 하다. 주공(周公)과 함께 주(周)의 건국과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姓)은 희(姬), 이름은 석(奭)이다. 기원전 11세기 때의 사람으로 주(周) 왕실(王室)의 일족(一族)이다. 소(召, 지금의 陝西 歧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여 소공(召公)이라고 부르며, 소공석(召公奭), 소백(召伯), 소강공(召康公), 주소공(周召公)이라고도 한다. 주(周) 성왕(成王) 때에 삼공(三公)의 위(位)에 올랐으며, 태보(太保)의 직책(職責)을 맡았다.
무왕(武王)을 도와 상(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연(燕, 지금의 河北 북부)을 분봉(分封)받아 전국시대(戰國時代)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인 연(燕)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하지만 소공(召公)은 직접 연(燕)을 다스리지는 않고, 호경(鎬京, 지금의 陝西省 長安縣)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자(長子)인 희극(姬克)을 계(薊, 지금의 北京)로 보내 다스렸다.
소공(召公)은 주(周) 문왕(文王)부터 강왕(康王)까지 4대에 걸쳐 정사(政事)를 돌보았는데, 특히 무왕(武王)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주공(周公) 희단(姬旦)과 함께 훌륭히 보필하여 주(周) 왕조(王朝)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소공(召公)과 주공(周公)은 각각 주(周)를 동서(東西)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주공(周公)은 낙읍(洛邑, 지금의 河南省 洛陽)에 머물면서 동쪽 지역과 제후(諸侯)들을 관장하였고, 소공(召公)은 서쪽 지역을 다스렸다. 소공(召公)이 다스렸던 지역에서는 후백(侯伯)부터 서인(庶人)까지 모두 제 할 일을 얻어 실직자가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범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곳곳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는데, 감당(甘棠) 나무 아래에서 백성의 송사(訟事)를 듣고 공정하게 해결해 주어 후대(後代)에도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대하듯 그 나무를 대하며 그의 선정(善政)을 기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어진 정치를 펼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감당지애(甘棠之愛)’, ‘감당유애(甘棠遺愛)’ 등의 성어(成語)가 비롯되었다.
그리고 시경(詩經)에도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지내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꺾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쉬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휘지도 마십시오. 소백께서 즐기셨던 곳입니다.(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蔽芾甘棠 勿翦勿敗 召伯所憩. 蔽芾甘棠 勿翦勿拜 召伯所說)”라는 민요(民謠)가 실려 있다.
감당유애(甘棠遺愛)
감당나무 아래서 백성에 대한 사랑을 끼친다는 뜻으로, 지극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러 하는 말이다. 또한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팥배나무라는 제목(題目)을 가진 짧은 시(詩)이다.
甘棠(감당: 팔배나무)
蔽芾甘棠(폐패감당) 우거진 저 팥배나무
勿剪勿伐(물전물벌)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십시오.
召伯所茇(소백소발) 소백께서 지내셨던 곳입니다.
蔽芾甘棠(폐패감당) 우거진 저 팥배나무
勿剪勿敗(물전물패) 자르지도 말고 꺾지도 마십시오.
召伯所憩(소백소게) 소백께서 쉬셨던 곳입니다.
蔽芾甘棠(폐패감당) 우거진 저 팥배나무
勿剪勿拜(물전물벌) 자르지도 말고 휘지도 마십시오.
召伯所說(소백소세) 소백께서 머무셨던 곳입니다.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 소공(召公)은 성왕(成王)의 당숙(堂叔)이었다. 그들은 주(周)나라가 직접 다스렸던 지역을 동서로 나누어 주공은 낙읍(洛邑; 지금의 하남성 양시)에 머물면서 동쪽 지역과 제후들을 관장하였고, 소공은 호경(鎬京; 지금의 서안 장안현)에서 서쪽 지역과 제후들은 관리하였다. 그들은 수시로 순시하며 주나라 조정의 공덕을 알렸다.
어느 날, 소공은 남쪽을 순시하다가 한수(漢水) 상류의 한 마을을 방문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주었다. 그 곳의 백성들은 매우 감동하여 자자손손 소공의 공을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주나라 역대 왕들의 정치력이 점차 엉망이 되어갔는데, 특히 마지막 유왕(幽王)은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처럼 방탕과 폭정을 일삼는 사람으로서 백성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조상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소공이라는 사람을 더욱 그리워 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관(官)에 소송을 했으나 억울함을 풀지 못했다. 그러자 그 소송을 맡았던 관리가 소공에게 상급심(上級審)을 청하니, 소공이 “내 일신을 움직이지 않고, 백성들을 오라가라 하는것은 나의 선왕 문왕께서 정사하시던 태도가 아니다.” 라고 하며 친히 고을로 내려가 감당수(甘棠樹; 팥배나무)아래서 안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고을 백성들이 그 나무를 특별히 아껴 나뭇가지 하나라도 자르거나 꺽거나 베게 하지 못하게 했다고 전한다. 즉 감당유애(甘棠遺愛), 감당나무 아래서 백성에 대한 사랑을 끼치다, 지극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러 하는 말이다.
소공(召公)은 남쪽 지방을 순시하면서 팥배나무 아래에서 일을 처리하며, 쉬기를 좋아하였다. 그가 죽자 그 팥배나무는 소공수(召公樹)라 불리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 모여 소공(召公)의 인정(仁政)을 기렸다고 한다.
작금(昨今)의 정부 혁신이니 뭐니, 민원 제도 개혁이니 별소리가 정부내에 다 떠돈다. 맞춤 서비스니 찾아가는 행정이니 뭐니뭐니. 행정혁신 제도개혁의 본(本)은 주(周)나라 건국 초기에 벌써 있었다. 근본은 그렇다. 백성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고, 천명(天命)에 대한 두려움이다. 곧 백성의 마음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다
해방 후 실로 여러 곡절을 겪은후 참 민중의 손으로 오늘의 정부가 탄생했고, 많은 사람이 이 정부를 지지하고 지켰다. 그 백성들의 천심이 과연 무얼까? 이를 읽지 못하는 정권은 앞날이 걱정스러울 뿐아니라, 역사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것이다. 기술로 백성을 다스리려는 얕은 잔재주를 버리고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백성과 하나되는 마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새로 다잡아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주성왕(周成王)이 죽음에 임해 아들 강왕(康王)에 이르기를 “주인 노릇하기란 여간 힘드는 게 아니다. 그 바탕은 절제와 금욕에 있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노예들은 반드시 반란과 배신으로 앙갚음을 할 것이라”고 아들을 경계(警戒)해 일렀다.
그렇다 주(周)나라 건국 초기, 군왕은 군왕대로 그리고 정권의 주변의 친인척(주공 소공 등)은 친인척대로 대신(大臣)들은 대신들대로 삼가고 또 삼가며 마치 얇은 어름판을 걷는 것처럼(如履薄氷) 조심하며 소박하고 금욕 절제하는 정치인의 도를 걸었다.
혼란한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공자(孔子)가 왜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모습을 이상적인 정치상으로 여기며 그로 돌아가자고 했을까 바로 여기에 그 답이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왕(成王), 강왕(康王) 사십년은 천하가 실로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한다. 참으로 그리운 시절이다. 우리에겐 이런 정치 모델을 만들수 없는가. 우리 역사상 그리워할 그 시절을 지금 당대에 만들수는 정녕 없는 것인가?
위정자와 감당지애(甘棠之愛)
고금을 막론하고 관직에 종사한 사람이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업적이 오랫동안 칭송되기를 바랄 것이다. 예전 목민관이 선정을 베풀고 지역을 발전시켰을 경우, 백성들은 기꺼이 공덕비를 세워 주었으며 이런 공덕비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많다.
공덕비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도 있지만 탐관오리 자신이 떠나기 전에 아전들을 부추겨 억지로 세운 셀프공덕비가 대부분이다. 지자체들은 이런 셀프 공덕비의 처리를 고민하다가, 주차장 한구석에 몰아놓던가, 창고에 거꾸로 세워놓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깔아 밟고 다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선조가 죽어 묘앞에 세우는 비석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선조의 과(過)는 숨기고 공(功)만 내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자신은 살아생전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은 이미 분수에 넘친다며, 시호(諡號)를 청하거나 묘비조차 세우지 말라던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선 성종 때의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이다.
그는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 3대 청백리로 꼽힌다. 조정에서 참판, 판서 등 38년이나 봉직했지만 자기집 한 채 없었고 죽은 후에는 장례비용조차 모자랄 정도였다. 전남 장성군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는 어떤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가 세워져 있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기념물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로 15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여걸 측천무후는 자신이 죽고나면 남자들이 지을 비문은 보나마나 여자인 자기에게 결코 후한 평가를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 아예 비문을 새기지 말라 했다.
박수량처럼 겸손한 마음에서건, 측천무후처럼 자존감 때문이던 무자비(無字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라 불리는 백비를 세웠다해도 '역사의 비문'을 채우는 것은 온전히 남은 자들의 몫이다.
궁궐이나 향교에는 특별히 팥배나무를 심는다. 팥배나무는 꽃과 열매 그리고 단풍이 아름다워서 심기도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임금이나 관료들에게 선정을 베풀라는 의미가 있어서다. 이는 시경의 다음과 같은 노래 때문이다.
蔽芾甘棠 勿剪勿伐 召伯所茇 (폐비감당 물전물벌 소백소발)
蔽芾甘棠 勿剪勿敗 召伯所憩 (폐비감당 물전물패 소백소게)
蔽芾甘棠 勿剪勿拜 召伯所說 (폐비감당 물전물배 소백소세)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베지도 말라 소백이 멈추신 곳이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꺽지도 말라 소백이 쉬신 곳이다.
우거진 팥배나무 자르지도 휘지도 말라 소백이 머무신 곳이다.
이 시는 시경 소남(召南)에 실려 있는 '감당(甘棠)' 즉 '팥배나무'란 사언시이자 일종의 민요다. 이 시에서 감당지애(甘棠之愛) 또는 감당유애(甘棠遺愛)라는 성어가 유래한다.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관리에 대한 믿음의 정이 깊음을 이르는 말이다. 아울러 청렴결백한 인물이나 은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기도 하며, 백성이 시정자의 덕을 우러러 그리워하며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나라 성왕때 주공과 소공(召公, 감당시의 소백)이라는 두 현인이 있었다. 주공은 상(商)왕조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친동생이고, 소공은 무왕의 사촌동생이다. 무왕이 죽은후 그의 아들 성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성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정치를 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엔 주공이 정치를 보좌하다가 뒤에는 주공과 소공이 함께 보좌하게 되었는데, 정치를 위낙 잘해서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어느날 소공이 남쪽 지방을 순시할 때 한수(漢水)상류의 어느 한 고을에 이른 그는 팥배나무 그늘 아래서 그 마을의 어려운 민원을 해결해 준 일이 있었다. 그후 주나라 말년에 이르러 유왕(幽王)이라는 포악한 임금이 나오자 백성들은 소공을 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감당(甘棠) 시는 소공이 예전에 남방을 순시할때 쉬어 갔다는 팥배나무를 정성껏 보호하면서, 그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3000년 전의 소공에 대한 칭송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 팥배나무는 일종의 송덕비(頌德碑)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와 좌씨춘추에도 실려 있으며, 천자문 79~80번째 구의 '存以甘棠 去而益詠(존이감당 거이익영, 벼슬을 맡아 팥배나무 밑에서 정사를 본 소공과 같이 청렴하면, 물러날 때 칭송을 들을 것이다)'은 바로 소공의 일화를 정리한 성어다.
북송의 사상가 소옹(邵雍)이 편찬한 격양시(擊壤詩)에는 '큰 명예와 명성을 어찌 투박한 돌덩이에 새기려 하는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말이 비석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하거늘(大名豈在鐫頑石 路上行人口勝碑, 대명기재전완석, 노상행인구승비)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유래한 '인구승비(人口勝碑)'란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이 돌에 새기는 비문보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록 돌이나 쇠붙이에 새기지 않더라도 구전되는 무형의 공덕비가 더 오래도록 역사에 보전되는 것이다.
요즘은 예전과 달라서 손가락 몇번 두드리면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아직도 낯 뜨거운 글을 돌이나 쇠에 새겨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로 남기려 한다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감당나무의 노래
기원전 11세기에 동이족의 나라 상(商)을 대신해서 들어선 주(周)나라가 고대 중국의 중심으로 번성하게 된 것은 주공(周公) 단(旦), 소공(召公) 석(奭)과 같은 훌륭한 왕실 인척이 왕을 보필을 잘해 기반을 잘 다진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소공(召公) 석(奭)은 주(周) 문왕(文王)부터 강왕(康王)까지 4대에 걸쳐 정사(政事)를 돌보았으며, 특히 무왕(武王)이 죽고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주나라의 서쪽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소공이 다스렸던 지역에서는 귀족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 할 일을 얻어 실직자가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범적인 통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소공은 곳곳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폈는데, 순시를 할 때에는 관청에 들어가 올라가지 않고 관청 밖 감당(甘棠)나무 아래에서 백성의 송사를 듣고 공정하게 해결해 주었다. 그렇게 해서 후대 사람들도 매번 어진 정치를 생각할 때에 소공이 앉았던 감당나무를 마치 그를 대하듯 좋아하며 그의 선정을 기렸다고 한다.
이때에 사람들이 부른 노래가 곧 시경 소남편에 나오는 '감당'이란 노래이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마세요/ 우리 소백께서 지내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꺾지도 마세요/ 우리 소백께서 쉬셨던 곳입니다. 우거진 저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휘지도 마세요/ 우리 소백께서 즐기셨던 곳입니다." 여기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떠난 후에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감당지애(甘棠之愛)라고 한다.
6세기 초 중국 양(梁)의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네 글자 250구절로 된 천자문 안에도 ' 존이감당(存以甘棠) 거이익영(去而益詠)'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감당나무를 그대로 두어라. 떠나갔어도 더욱 기려 읊으리라"라며 지도자의 덕을 숭상하는 풍습을 묘사한 내용이다.
다산 정약용도 그의 '목민심서' 맨 마지막 장 해관(解官), 곧 '벼슬을 떠남' 제 육조에서 "이미 떠나간 뒤에도 사모하여 그가 노닐던 곳의 나무까지도 사람들이 아끼게 되는 것은 감당의 유풍이다"라며 관직을 맡은 사람이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칭송이 그치지 않는 것을 성공과 실패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제시한 바 있다.
감당나무는 팥배나무라고 해서 배나무와 비슷하지만 키가 배나무보다 작고 흰 꽃이 피어 배보다 작은 열매가 열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서울의 성균관 명륜당에는 수령 300년이 된 팥배나무, 곧 감당나무가 있었는데, 2010년 6월 이 나무가 고사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
팥배나무는 2008년까지만 해도 봄에는 하얀 꽃, 가을에는 붉은 열매가 열리며 많은 벌과 나비가 노니던, 수세(樹勢) 왕성하던 나무였는데 2009년부터 기둥에 이끼가 많아지다가 결국 말라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원인은 대성전 내 방범 장치와 소화 장치 등을 설치하면서 나무 밑을 무분별하게 파헤쳤기 때문으로 추측된다는데, 300여년 동안 문묘와 함께 했던 팥배나무가 후손들의 무책임과 관리 소홀로 인해 영원히 사라지게 됨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애석해 했다.
그 때문일까. 우리나라에는 숱한 정치가들이 왔다가 가고 있지만 감당나무의 노래를 불러줄 대상이 없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다. 해방 70년, 건국 65주년,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 우리들만의 역사도 이제 상당히 길지만 정치는 안정되지 못하고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는 늘 편이 갈려 싸우고 있고 총리를 몇 번이나 바꿔야 할 정도로 정권마다 맡을 사람을 놓고 골치를 썩인다.
사회에서도 늘 사용자와 피사용자 사이에 순리적인 해결보다는 대립과 투쟁의 논리가 여전히 많다. 그러다 보니 나라는 발전했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꼭 대통령이나 총리 등 고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도백이나 수령들에서도 그가 자리를 뜬 후에 그 덕을 기려 자발적으로 선정비를 세울 만한 그런 대상이 없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많다.
그러나, 지도자가 있어야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국민이 제대로 되어야 훌륭한 지도자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비방하고 흠집을 내는 현재 우리의 풍토 속에서라면 어느 누구도 인재로 자라거나 지도자로 성공할 수가 없지 않을까.
어느 시기건 어떤 상황이건 어려운 때일수록 일단 뽑은 지도자, 일단 모신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을 잘하기 위해 마음을 합쳐 나가야 그 지도자는 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누구건 모든 조건에 맞는 절대적인 재목은 없다는 생각에 다소의 흠집을 문제 삼지 말고 그의 생각과 비전과 행동력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같이 걸어가면 지도자는 자연히 그 속에서 나오지 않을까.
300년 된 감당나무가 베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그 덕을 칭송할 인재가 없게 되었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라 이제라도 새로운 감당나무를 심고 길러야 할 때인 것 같다. 5년 10년 20년 꾸준히 이 나무를 가꾸면 우리도 그 그늘에서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甘(달 감)은 ❶지사문자로 입 속에 물건을 물고 있음을 나타내며 입속에 머금고 맛봄을 뜻한다. 甘(감)의 음은 머금다의 뜻을 나타냄으로 나아가서 맛있다, 달다의 뜻이 있다. ❷지사문자로 甘자는 '달다'나 '맛좋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甘자는 口(입 구)자에 획을 하나 그어 입안에 음식이 들어가 있음을 표현한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甘자는 이렇게 입안에 음식이 들어와 있다는 의미에서 '만족하다'나 '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甘자의 사전적 의미는 '달다'나 '맛좋다'이다. 그러나 실제 쓰임에서는 甛(달 첨)자가 '달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甘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주로 '먹다'와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甘자를 반드시 '달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甘(감)은 (姓)의 하나로 ①달다(꿀이나 설탕의 맛과 같다) ②달게 여기다 ③맛좋다 ④익다 ⑤만족하다 ⑥들어서 기분 좋다 ⑦느리다 ⑧느슨하다 ⑨간사하다(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가 있다) ⑩감귤(柑橘) ⑪맛있는 음식(飮食)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기쁠 희(僖), 기쁠 희(喜), 즐길 오(娛), 기쁠 이(怡), 기쁠 열(悅), 즐거울 유(愉), 기쁠 희(憘), 즐길 낙/락(樂), 기쁠 흔(欣), 기쁠 환(歡), 즐길 탐(耽)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슬플 애(哀), 슬퍼할 도(悼), 성낼 노(怒), 슬플 비(悲), 쓸 고(苦)이다. 용례로는 군말 없이 달게 받음을 감수(甘受), 콩과에 속하는 다년생 약용 식물을 감초(甘草), 달콤하여 맛이 좋음을 감미(甘美), 단 것과 쓴 것이나 즐거움과 괴로움 또는 고생을 달게 여김을 감고(甘苦), 달콤한 말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듣기 좋게 하는 말을 감언(甘言), 단술이나 막걸리를 감주(甘酒), 괴로움이나 책망을 달게 여김 또는 그런 마음을 감심(甘心), 달고 쏘는 맛이 있음을 감렬(甘烈), 단맛으로 설탕이나 꿀 따위의 당분이 있는 것에서 느끼는 맛을 감미(甘味), 음식을 맛있게 먹음을 감식(甘食), 달갑게 여기어 승낙함을 감낙(甘諾), 좋은 맛 또는 맛있는 음식을 감지(甘旨),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보내던 공문을 감결(甘結), 알맞은 때에 내리는 비로 가뭄 끝에 오는 반가운 비를 감우(甘雨), 죽기를 달게 여김을 감사(甘死), 물맛이 좋은 우물을 감정(甘井), 달콤한 말을 감사(甘辭), 스스로 달게 여김을 자감(自甘), 향기롭고 달콤함을 방감(芳甘), 살지고 맛이 좋음 또는 그런 고기를 비감(肥甘), 단맛을 나눈다는 뜻으로 널리 사랑을 베풀거나 즐거움을 함께 함이라는 말을 분감(分甘),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을 이르는 말을 감언미어(甘言美語), 달콤한 말과 이로운 이야기라는 뜻으로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남을 꾀하는 말을 감언이설(甘言利說), 물맛이 좋은 우물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정선갈(甘井先竭), 물맛이 좋은 샘은 먼저 마른다는 뜻으로 재능 있는 사람이 일찍 쇠폐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천선갈(甘泉先竭),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으로 사리에 옳고 그름을 돌보지 않고 자기 비위에 맞으면 취하고 싫으면 버린다는 말을 감탄고토(甘呑苦吐) 등에 쓰인다.
▶️ 棠(아가위 당)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木(목;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尙(상, 당)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棠(당)은 ①아가위(=산사자山査子). 산사나무의 열매) ②팥배나무(장미과의 낙엽 활엽 교목) ③산앵도나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팥배나무의 열매를 당리(棠梨), 산앵두나무를 당체(棠棣), 팥배나 팥배나무를 감당(甘棠), 감당나무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정치를 잘한 자를 흠모하는 간절한 정을 이르는 말을 감당애(甘棠愛), 선정을 베푼 인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감당지애(甘棠之愛),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감당유애(甘棠遺愛), 주나라 소공이 남국의 아가위나무 아래에서 백성을 교화했다는 말을 존이감당(存以甘棠) 등에 쓰인다.
▶️ 遺(남길 유, 따를 수)는 ❶형성문자로 遗(유)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貴(귀; 많은 보배, 재산, 가진 것, 유)로 이루어졌다. 물건이 어디로 가버리다, 잃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遺자는 '남기다'나 '끼치다', '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遺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貴(귀할 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貴자는 양손에 흙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귀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遺자의 금문을 보면 새집을 떨어트리거나 버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遺자의 본래 의미도 '버리다'나 '떨어뜨리다'였다. 후에 遺자는 '남기다'나 '전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는데, 길 위에 떨어트린 물건을 선조들이 남기고 간 유산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遺(유, 수)는 ①남기다, 남다 ②끼치다, 전하다 ③잃다 ④버리다, 유기(遺棄)하다 ⑤잊다 ⑥두다, 놓다 ⑦떨어지다, 떨어뜨리다 ⑧빠지다, 빠뜨리다 ⑨쇠퇴(衰退)하다 ⑩빠르다 ⑪더하다, 더해지다 ⑫음식을 보내다, 음식을 대접하다 ⑬오줌 ⑭실수(失手), 그리고 ⓐ따르다(수) ⓑ좇다(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마음에 남는 섭섭함을 유감(遺憾), 건축물이나 전쟁이 있던 옛터를 유적(遺跡),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음을 유기(遺棄), 사후에 남겨 놓은 재산을 유산(遺産), 끼치어 내려옴을 유전(遺傳), 죽은 사람의 뒤에 남은 가족을 유족(遺族), 사후에 남겨진 물건을 유물(遺物),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유골(遺骨), 죽은 사람의 몸을 유해(遺骸),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비거나 빠짐을 유루(遺漏), 활자 따위가 책이나 활판 가운데서 빠짐을 유탈(遺脫), 죽음에 임해서 남기는 말을 유언(遺言), 유언하는 글을 유서(遺書), 잃어 버림을 유실(遺失), 죽은 사람이 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을 유지(遺志), 마음에 둠을 유의(遺意),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움을 습유(拾遺), 남김없이 모조리를 무유(無遺), 남편이 죽고 남긴 자식을 고유(孤遺), 자면서 모르는 가운데 정액이 나옴을 몽유(夢遺), 보태어 채움을 보유(補遺), 냄새가 만 년에까지 남겨진다는 뜻으로 더러운 이름을 영원히 장래에까지 남김을 일컫는 말을 유취만년(遺臭萬年), 마땅히 등용되어야 할 사람이 빠져서 한탄함을 이르는 말을 유주지탄(遺珠之歎), 오래 전하여 오늘에 이른 풍속을 일컫는 말을 유풍여속(遺風餘俗),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감당유애(甘棠遺愛), 계책에 빈틈이 조금도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산무유책(算無遺策),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게 함을 보과습유(補過拾遺), 있는 힘을 남기지 않고 다 씀을 이르는 말을 불유여력(不遺餘力), 큰 바다에 남아 있는 진주라는 뜻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현자나 명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창해유주(滄海遺珠) 등에 쓰인다.
▶️ 愛(사랑 애)는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본디 천천히걸을쇠발(夊; 천천히 걷다)部와 기운기엄(气; 구름 기운)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음(音)을 나타내는 천천히걸을쇠발(夊)部를 뺀 글자 애(가슴이 가득차다, 남을 사랑하다, 소중히 하다, 아끼다)와 좋아하는 마음에 다가설까 말까(夊) 망설이는 마음의 뜻이 합(合)하여 사랑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愛자는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愛자는 爫(손톱 조)자와 冖(덮을 멱)자, 心(마음 심)자, 夊(천천히 걸을 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 나온 愛자를 보면 단순히 旡(목맬 기)자와 心자가 결합한 형태였다. 이것은 사람의 가슴 부위에 심장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금문에서는 사람의 가슴에 심장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그려져 ‘사랑하다’를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이 변하면서 소전에서는 마치 손으로 심장을 감싸 안은 것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래서 愛(애)는 어떤 명사(名詞)의 밑에 붙어서, 위의 명사의 내용에 대하여 가지는 자애(慈愛), 사랑 등을 나타내는 어미(語尾)의 뜻으로 ①사랑, 자애(慈愛), 인정(人情) ②사랑하는 대상(對象) ③물욕(物慾), 탐욕(貪慾) ④사랑하다 ⑤사모(思慕)하다 ⑥가엾게 여기다 ⑦그리워하다 ⑧소중(所重)히 하다 ⑨친밀(親密)하게 대하다 ⑩역성들다(옳고 그름에는 관계없이 무조건 한쪽 편을 들어 주다) ⑪즐기다 ⑫아끼다, 아깝게 여기다 ⑬몽롱(朦朧)하다, 어렴풋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사랑 자(慈),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미울 증(憎), 미워할 오(惡)이다. 용례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애국(愛國), 사랑하는 마음이나 남녀 사이에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애정(愛情),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애마(愛馬),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호(愛好), 사랑과 미워함을 애증(愛憎), 윗사람의 딸을 높여 이르는 말을 애옥(愛玉), 남을 사랑함 또는 열애의 상대자를 애인(愛人), 사랑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것을 애완(愛玩), 아끼고 소중히 다루며 보호함을 애호(愛護), 본이름이 아닌 귀엽게 불리는 이름을 애칭(愛稱), 어떤 사물과 떨어질 수 없게 그것을 사랑하고 아낌을 애착(愛着), 사랑하고 사모함을 애모(愛慕), 좋아하는 사물에 대하여 일어나는 애착심을 애상(愛想), 사랑하는 마음을 애심(愛心), 사랑하고 좋아함을 애요(愛樂), 겨울철의 날이나 날씨 또는 시간을 아낌을 애일(愛日),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들을 사랑함을 애자(愛子), 귀여워 하는 새 또는 새를 귀여워 함을 애조(愛鳥), 사랑하는 아내 또는 아내를 사랑함을 애처(愛妻), 남의 딸의 높임말을 영애(令愛), 형제 사이의 정애 또는 벗 사이의 정분을 우애(友愛), 아쉬움을 무릅쓰고 나누어 줌을 할애(割愛), 모든 것을 널리 평등하게 사랑함을 박애(博愛), 남달리 귀엽게 여겨 사랑함을 총애(寵愛), 남녀 사이에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을 연애(戀愛), 널리 사랑함을 범애(汎愛),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자비로운 사랑을 자애(慈愛), 이성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여 상대편도 자기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일을 구애(求愛), 어질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 또는 어진 사랑을 인애(仁愛), 자타나 친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든 세상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을 겸애(兼愛),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김을 애지중지(愛之重之),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함을 애국애족(愛國愛族), 남을 자기 몸같이 사랑함을 애인여기(愛人如己), 사람은 덕으로써 사랑해야 함을 애인이덕(愛人以德),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을 애주애인(愛主愛人), 사랑이 지붕 위의 까마귀에까지 미친다는 뜻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그 집 지붕 위에 앉은 까마귀까지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애급옥오(愛及屋烏), 얼음과 숯이 서로 사랑한다는 뜻으로 세상에 그 예가 도저히 있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빙탄상애(氷炭相愛)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