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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충절을 지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연구기사 42
요점: 1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십시오. ··· 여러분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2 사도들은 모든 참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훌륭한 본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한 것입니다. 3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모든 인간 통치자들과 정치인들도 제한된 권위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4 인간 정부는 “위에 있는 권위”라고 불리지만, 성경에서는 네 번이나 하느님을 가리켜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 즉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5 하느님께서는 인간 정부들에게서 모든 통치권을 빼앗아 더 나은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들에게 주십니다. 6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으며 파라오를 홍해에 빠져 죽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거만한 왕을 낮추셨습니다. “바로 그 밤에”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왕국이 메디아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여호와의 천사가 그를 쳤”고 결국 그는 죽었습니다. 7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벤하닷왕과 32명의 시리아 왕들을 전멸시키셨습니다. 8 국제 연합의 193개 회원국이 모두 힘을 합친다 해도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와 그분의 하늘 군대에게는 결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9 지극히 높으신 분께 충실을 유지하여 불타는 가마에서 살아남은 세 히브리 청년들을 본받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
워치타워의 충실한 봉사자들(출처: jw.org)
비평: 1 좋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면 그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의해서 당연히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시한부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 또한 의라는 것은 자신의 이성이 판단한 것이라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나 조직에게 빌려온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사도들은 예수와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스스로 이성에 의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현재의 우리는 비록 직접적인 경험을 갖지 못하나,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음으로써 예수에게서 진정한 감동을 얻을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이성의 판단에 따라 살므로써 오게 되는 박해가 있다면 당연히 기뻐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큰 달러 이자가 붙어 보상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3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평등하다. 다만 이 사회가 약육강식의 동물사회로부터 완전평등을 누리는 신적 사회로의 진화과정에 있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므로 권세를 가진 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시적인 것에 한해서이지 불투명한 것에까지 순종이 요구되지 않으며 심지어 명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양심의 판단에 따라야 할 것이다. 4 인간 정부에 속한 권세들은 권위에 있어서 일반인 보다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이며, 절대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우위란 것은 절대 우위에 의해 언제나 가변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가 바뀌기도 하고 국가가 멸망되어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5 통치권이 바뀌는 방식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지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 왕이나 통치권이 바뀌는 것이 단순히 세력에 의한 교체처럼 보인다. 그러한 방식은 신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어떤 초월적인 방식으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에 의한 것이고 내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오판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즉, 인간이 생각하는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6 시편에서는 파라오가 마치 홍해 바다에 빠져 죽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출애굽기에서는 파라오가 빠진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대국의 왕이 그런 위험한 곳으로 뛰어 들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파라오가 빠져 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군사가 함몰된 것을 강하게 표현한 문학양식으로 볼 수 있다. 참고: <통찰> 2권에서는 파라오가 바다에 빠진 것으로 해설하고 있다.이집트 탈출 —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jw.org) 7 여호와는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승리는 곧 여호와께서 이루신 승리라는 이스라엘의 믿음이다. 8 파수대의 논증에는 뻔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린 것은 사실이지만, 실무적으로 전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러면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UN가입국 139개국의 군사력이 워치타워 군사력과 싸울 때, 여호와께서 도우셔셔 이길 수 있다고 해야 논증이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193개국과 여호와가 직접 싸운다? 이것은 분명한 논증의 오류다. 이 논증의 오류의 종류는 '사실과 당위의 혼동'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이 논증의 오류는 워치타워가 주장하는 아마겟돈이 일어난다는 것이 오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겟돈이 일어나려면 두 군사력이 부딪히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상의 군사력과 하나님의 조직의 군사력의 최종 전쟁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조직이 군사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대신 새로운 국가가 세워짐을 의미한다. 9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 관한 이야기는 꾸며진 이야기로 보인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교훈하는 점은, 비록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당장 보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충절을 지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이야기 다니엘 3장을 읽으면서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 용광로에 집어 던지움을 당했어도 끄떡없이 살아 나왔다는 이야기의 사실성(진실성이 아니라)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문 1 열역학에 관한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현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황당한 내용을 고대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연법칙에 대해서 무지하고 자연법칙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말대가리곰배'란 아이디를 가진 '여호와의 증인 할머니'는 네이버 지식인 개신교란에서 더욱 무식한 티를 내었는데, 어딘가 줏어 들은 이야기로 "빛은 열이 없으니까, 용광로 속에 들어가도 빛만 있고 열이 없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 빛 자체는 열이 없다는 말은 분명히 맞는 말이고, 따라서 줏어 들었으며 파수대나 깨어라에서 주장된 내용을 앵무새로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용광로 속의 빛은 땔감을 때기 때문에 열과 함께 발생하는 빛이지, 빛만 발생한다는 그런 억지 주장은 마치 예수가 오른 발 빠지기 전에 왼 발 딛고, 왼 발이 빠지기 전에 오른 발을 디디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모순적인 주장을 어거지로 하는 것과 다름아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들은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만일 불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서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렸어도 죽은 척 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죽지 않고 부활한 것으로 꾸몄다는 이야기랑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모든 내용들이 꾸며진 이야기는 아니다. 그 중에는 사실도 있고 꾸민 이야기도 있다. 다니엘이 동굴에 사자 입을 봉하였다는 것은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자는 포식을 하고나면 한 동안은 먹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몹시 총애하였다는 대목에서 그가 다니엘을 구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했을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다니엘이 사자에게 던져지기 전에 많은 음식을 사자들에게 잔뜩 줌으로써 다니엘이 동굴에 내려졌을 때, 사자들은 "니 왜 왔노? 귀찮아 저리가"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대할 때 옥석을 가리면서 비판적으로 읽을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깍아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신앙을 건전하게 세워주는 효과를 지니게 된다. 의문 2 세 사람은 이미 지방관리로 임명을 받아 재직 중이었는데 동시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단 2:49). 이 내용을 금신상의 숭배와 시간을 맞추려면 그들이 지방에서도 동일한 의식을 행했으나 이들이 거부하여 다른 바빌론인들로부터 고발되어 느부갓네살 앞으로 끌려 왔다는 내용이 생략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바빌론 왕이 일일히 그러한 고발 내용을 재판하였다는 데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의문 3 느부갓네살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그는 세 사람에게 마땅히 엎드려 사죄를 하고 신의 위치에서 그들을 대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만일 세 친구가 그 뜨거운 불에도 옷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면, 이뿐만 아니라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물이 실제로 포도주로 변하였고, 5천명의 군중을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마술로 증식시켜 군중들에게 배불리 먹였더라면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그러한 기적을 해한 당사자는 왕보다 훨씬 우대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 느부갓네살은 그저 그들을 칭찬한 정도에 머무르고 전혀 그들을 최고의 위치로 올리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예수의 경우 그러한 기적 이야기는 삽시간에 퍼져나갔을 것이며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시관들이 몰려와 예수를 높이 숭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예수께 기적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전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며, 성서의 표현대로 하나의 표적(sign)에 불과한 것이었다. 표적이라는 것은 대단한 권위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표적이 기적이라면,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몰아내는 것이 무엇 때문에 표적이 되겠는가? 그 표적이란 단지 그가 대단한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는 불굴의 신앙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벨론의 신 말둑보다 유대인의 신 야훼가 우위라는 유대인의 정신적 승리를 주장하고자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서산대사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왜의 침략을 받아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에 관한 정신적 승리를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서산대사가 엄청난 뜨거운 방에서 하룻 밤을 지냈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뜨겁기는 커녕 방에 서리가 내려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서산대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의 침략을 받은 우리 민족이 결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 역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을 망정 그들의 신인 야훼가 바벨론의 신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대목이다. 여러분은 서산대사의 서리내린 방의 이야기가 실제라고 믿는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묘사되어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신념을 지켜나가겠다는 뜻이다. 비록 그들 자신이 보호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신념을 지킴으로써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이익이나 불이익에 관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매우 중요한 이타적인 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당장의 이익이나 불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반드시 유익하리라는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다니엘과 함께 바빌론으로 어릴 때 볼모로 왔으며, 바빌론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기름진 음식을 거부하고 채식하였으나 건강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졌다는 점이며, 지방관리로 채용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금신상에 절하지 않아 용광로에 던져졌으나 불에 타지 않고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는 내용뿐이다. 그 이후의 향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것은 그들이 어릴 때 받은 교육이 그후 바빌론에서의 삶보다 오히려 짧은 기간이지만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15세 미만의 어린 자녀들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워치타워 법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 서둘러 침례를 받게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침례라는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녀들이 실제로 정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는 전인적 교육이 되어 있다면, 형식을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 그 형식을 서두르는 것은 워치타워 성원을 한명 더 확보하여 영업활동에 부려먹자는 의도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 세 친구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지만 이러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에서 진일보한 후비판적 믿음을 지향하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다니엘의 세 동무(출처: j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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