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의지 - 아~, 이제 카자흐스탄으로 <9회>
중앙아시아 스탄5국ㅡ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루크메니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이 5국이 말미에 모두 스탄 이란 글자가 들어있다.
스탄이란 페르시아어로 ’땅’ 또는 ‘나라’ 라는 뜻이다. 이들 5국은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될 때 떨어져 나와 독립했다, 인종적으로는 비유럽계 유목. 기마 민족의 후예들이 주류를 이루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가 다수다. 현재는 중국이 넘보고 있는 ‘러시아의 뒷마당’이라고 불린다.
이들 중앙아시아에는 크롬·아연·우라늄·금·텅스텐·몰리브덴·안티몬·수은 등 첨단산업에 필수적인 광물과 희토류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때문에 미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중국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동시에 안정적인 자원공급처도 확보하기 위한 경제 안보 측면에서 중앙아시아 공략에 심혈을 쏟고 있는 중이다.
특히 카자흐스탄 원유(세계부존량의 11%)와 우라늄(세계매장량의 12%),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세계매장량의 12%), 우즈베키스탄의 금 매장량은 세계 4위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동. 유럽을 잇는 중앙아시아는 고대부터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해온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현재 중앙아시아지역에서 경제개발과 투자 등 각종 선물보따리를 안기며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두려는 미·중 경쟁이 치열한 상태다.
지금 카자흐스탄 크졸오르다시 이반주르바 거리엔 1943년에 서거하신 항일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기리는 기념공원(약 323평의 부지에 참배 공간, 전시관 등)이 전액 우리 국비로 조성되었다.
1946년 여름이 되자 우리 수용소 전원이 이동을 하게 되었다. 새로 가게 된 행선지는 카자흐스탄 노보시비르스크였다. 카자흐스탄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위쪽에 위치하고 러시아와 접경을 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로 유라시아 대륙의 요충이요 중앙아시아의 심장이라고도 불리운다.
스탈린 시절 러시아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제 이주 당했던 20만 이상의 고려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나라, 봉오동 청산리 대첩에 혁혁한 무운을 세우시고 3.1 운동 후 독립군 사령관이 되신 홍범도장군의 활동 무대였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감하신 곳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12배, 인구는 약 2,000만, 언어는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
이곳 카자흐스탄 노보시비루스크 노역장에서의 책임 감독은 소련혁명투쟁을 하다 물러난 사람으로 50세나 되어 보이는 러시아인이었는데 어느 날은 뜻밖에 나를 자기 숙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한 쪽 가에 술병이 놓여있었다.
그는 나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자기도 손수 술을 따라 마셨다. 40도가 넘는 독주였는데, 그는 큰 유리잔으로 한 잔 가뜩 담아서는 거뜬히 들이키는 것이다. 술자리를 끝내고 나왔으나 그 술이 얼마나 독했던지 나는 아예 작업을 못하고 누워 있어야했다. 아마도 한대지방에 사는 이들은 독주를 보통으로 마시는 모양이었다.
한 달 여 걸쳐 기차역에서 하역 작업을 마치자 이제는 제재소로 일을 가게 되었다. 제재소는 강물을 따라 시설이 되어있었다. 큰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 물위에 띄어 보내면, 이곳 제재소에서 필요한 양을 건졌다.
나무는 물에 떠내려 오면서 자연스럽게 제재소 쪽으로 내려오게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것을 찍어 당겨 올려만 주면 자동적으로 실려 올라가서는 제재소 작업장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았다.
소련의 제재소는 어디를 가나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주민들이 사는 적당한 장소에 설치되어 있었고, 나무는 그 제재소에 속한 지방민들이 써야할 양만큼만 인양해 쓰면 된다는 것이었다.
제재소를 가면서 아득한 평지 벌판을 바라보니 트랙터 몇 대가 동원되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몇 천 두락이나 되는 것도 며칠이 안 되어 다 가는 것이다. 나로서는 트랙터로 밭을 가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해바라기, 옥수수, 기장, 감자, 채소, 수박 등을 심는데, 모두 기계로 농사를 짓기 때문에 넓은 농토도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직업이 농업인지라 영농방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작업책임자가 말하기를 소련의 모든 농토는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으로 되어있으며, 모든 작업은 협동조합이 따로 있어, 그곳에서 트랙터와 콤바인 등 중장비를 이용하여 계절 따라 밭갈이, 파종, 추수 등을 한다고 했다.
공동으로 경영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데, 5개년 경제계획에 따라 생산을 늘려나가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로서는 처음 듣는 영농방법이었다.
며칠이 지난 뒤의 일이다. 계급이 중위인 여자 군의관이 한 명 왔다. 큰 키에 활달하고 예쁘장한데 안경을 썼다. 나이는 약 25세 정도였다. 각 막사마다 돌면서 청소와 각자의 소지품 정돈, 그리고 우리의 건강상태도 유심히 살피는 것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삽삽하고 꼼꼼했다. 한번은 우리 막사에 들려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고 나서는 말했다.
“황의지 씨!” 뜻 박에도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네” “나를 따라 오세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수용소 정문을 나가 자기가 살고 있는 관사로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그는 가자마자 안경이며 군복을 벗어 놓고 부산하게 음식을 장만했다. 수프를 끓여 식빵을 가져 와서는 먹으라고 했다 권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좀 드세요” “고맙소” 나는 사양치 않고 먹었다.
먹고 나자 통나무를 가리키며 장작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시키는 대로 해 주었더니, 그만하고 나중에 하자며 자물쇠와 열쇠 두는 곳을 알려주면서 언제든지 놀러오라고 했다. 군의관이 나를 부른 것은 장작이 아니라, 딴 마음에서 청한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봉건가정에서 태어나 엄부 슬하에 자랐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삶으로 알고 있었고, 또 가정교훈도 그렇게 받고 자랐기 때문에 그녀를 다시 찾아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장군의 후예 2- 144-158P 참조)
♨출처/남원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