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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늦여름은 금방 지나가고, 세상을 온통 울긋불긋 물들이는 가을이란 계절이 중원을
급습했다. 그러나 그 가을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겨울이란 세력의 힘에 밀려 눈물을
머금으며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그렇게 해는 흘러, 어느덧 만력(萬曆) 32년 4월, 봄이다. 봄의 시작인 입춘
(立春)도 이미 넘긴지 오래다. 이제 중원 대륙에서는 동장군(冬將軍)의 권세가 사람을
뒤흔드는 곳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봄은 또 사문도를 부르고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사문도를 낙양으로 불렀던 것
처럼, 조용하면서도 얌전하게 말이다.
“후우...”
무공을 잠시 잃었음에도 수련은 끊임없이 하고 있는 사문도는 요즘 들어서 자주 상념(
想念)에 잠기곤 한다.
‘벌써... 귀환한지 8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렀군. 내 나이도 어느덧 열일곱...’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 그 미리에서부터 밀려오는 막연한 불안감이 사문도의 마
음을 뒤흔들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놈의 내공은... 정말 4개월이나 더 지나야 돌아오는 걸까?’
무의식적으로 내공을 사용하려고 할 때마다 단전을 찢는 듯한 통증을 떠올리며, 사문
도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가에 고소(苦笑)를 머금는다.
‘벌써 4월도 초순을 지나 중순에 접어들고 있다. 이젠... 슬슬 움직여 봐야할 것 같
은데...’
한성도와 약속한 1년이란 시간이 거의 다 됐다. 한성도도 사내라면, 분명 검을 다 만
들어놓고 사문도를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창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사문도에게 다가서며 말을 던지는 이가 있다.
“소궁주님.”
짤막한 말과 함께 사문도의 얼굴을 돌리게 만드는 이는 바로 사파의 뇌, 곽경환이다.
“곽 군사님 오셨군요.”
사문도는 엷은 미소와 함께 곽경환을 환영하는 어투로 말문을 연다.
“벌써 정오가 지났습니다. 점심식사는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후후, 작년 생각을 좀 하느라고 말예요.”
“작년이라... 하하, 소궁주님께는 정말 많은 일이 있으셨던 해지요.”
곽경환의 말대로, 만력 31년은 사문도에게 있어서 유난히도 길었던 해였다.
검을 의뢰하기 위해 낙양까지 갔다가 거기서 천음절맥이라는 희귀한 절맥을 앓고 있는
소녀, 한화경을 만났다. 한화경과 함께 북경까지 올라가던 도중에 녹림(綠林)과의 충
돌도 있었고, 결국 정파의 핵심세력이라 불리는 중원무성에 발을 들여놓았다.
울적한 마음으로 귀환하다가 북망산에서 모용화운을 만났고, 귀환하고 며칠 뒤에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실컷 방랑길을 따라 잘 움직이던 사문도는, 고향 항주(杭州)에서 열린 군웅대회에 의
구심을 품고 참가해서 무당파의 조무환을 꺾고, 자금성 최고의 고수 이세혁을 연달아
꺾어 우승을 하는 쾌거를 울렸다.
거기서 표연공주, 즉 주은비와 합류해서 북경까지 가기로 한 사문도는 남경(南京)에서
부잣집 아가씨 상관연은을 만났고, 몇 개월 뒤에 남양을 습격한 홍무극을 처단하기
위해 장주(長州)에서 철혈쌍검 금문택과 운명의 만남을 가졌다.
장주에서 홍무극을 처단한 뒤에는 금문택을 거두고 있던 천상신의에게 한화경의 천음
절맥을 치유할 만한 실력을 지닌 의원, 화군백(華君伯)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으며 금
문택을 수하로 삼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피해도 막심했다. 단전이 막히는 바람에,
1년이란 시간동안 무공을 쓸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그리고 천진에서 기항, 북경으로 올라가던 길에서 뜻밖의 복병인 흑령을 제거하고 주
은비를 구해내긴 했지만... 대영반 이세혁을 잃는 고통을 감수해내야만 했다.
북경에서 그렇게 열흘 정도 머무르다가 악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귀환하던 도중에
남양(南陽)에서 백마련의 부련주직을 차지하고 있는 부검악이란 자를 만나 따끔하게
일침을 준 사문도는 무사히 악양으로 귀환했다.
“네...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요. 기억하고 싶은 일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일들도
있었고...”
말끝을 흐리는 사문도를 보고, 곽경환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문도의 심중을 파악하면
서 질문해온다.
“소궁주님, 낙양으로 가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만... 검을 의뢰하신지 벌써 1년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네, 가 봐야겠지요. 검도 찾아 와야 하고, 또...”
무슨 안개라도 낀 것처럼, 사문도의 얼굴이 어둡다. 어떤 고민이 사문도의 마음을 채
우고 있는 것인가? 대체 어떤 일들이 사문도의 예전 모습을 말살시키고, 이런 어릴 적
의 모습으로... 뿌리 약한 나무처럼 한없이 약해보이는 모습으로 뒤바꿔 놓았단 말인
가.
먹물처럼 말끝을 흐리는 사문도의 반응에, 곽경환은 칙칙한 흙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쉰다.
“후우... 낙양만 갔다가 바로 오실 것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 네.”
힘겹다. 대답하는 사문도의 모습이, 곽경환의 두 눈에는 너무도 힘겹게만 보인다. 태
산이라도 짊어진 듯이 힘겹게 한마디씩 말을 남기는 사문도를 보고 있노라면, 곽경환
의 기분도 과히 좋을 수가 없다.
“종남산(終南山)... 종남산에도 가 봐야 할 일이 좀 있는 것 같아서요.”
“... 종남산이라면, 장안(長安)의 종남산 말씀이시겠지요.”
“네. 거기서... 잠깐 만나야 할 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사문도의 얼굴에서 자그마한 변화가 일어난다. 마치 짙은 안개
처럼 사문도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고민이 서서히 개이더니, 그곳에서 약간의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다.
“‘화군백’이라고... 나병촌에서 나병 환자들을 봐 주시는 의원이라고 들었어요. 그
분께...”
“천음절맥(天陰絶脈)의... 치유법을 알아내시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만...?”
“...!!”
곽경환이 아침 햇살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가볍게 대꾸하자, 사문도는 두 눈동자로
곽경환의 그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멍하니 바라보다 반문한다.
“그걸... 어떻게...?”
“하하, 저는 소궁주님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소
궁주님을 모시지 않았습니까?”
곽경환이 유쾌한 웃음을 뿌리자, 사문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버릇처럼 검지손가락으로 콧잔등을 한번 긁는다.
“쑥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궁주님 나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병 아닙니까.
다녀오십시오. 낙양에서 검을 받으시고... 바로 종남산으로 가서, 원하는 답변을 얻으
실 때까지 계시다가 돌아오십시오.”
“곽 군사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언제나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 하는 곽경환과 다른 사람은
사문도에게 있어 커다란 자랑이요, 기댈 수 있는 나무다. 이런 가신들이 있었기에, 사
문도는 여태까지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이 잘 버텨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방문에는, 누구를 데리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비단처럼 부드러운 곽경환의 목소리가 사문도의 귓가에서 잔잔하게 부서진다.
“금문택, 강천비. 이들 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요.”
“모용 소저는 여기 두고 말씀이십니까?”
“네. 많이 움직여 봐야 득이 될 거라고는 안 느껴지거든요.”
곽경환은 무공 수위가 장난이 아니게 돼버린 강천비를 문득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
처음 강천비가 귀환했을 때 풍겨온 분위기나 눈빛이나 예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느낌이
와 닿았던 것이다. 무딘 쇳덩어리가 마치 예리하게 잘 갈아둔 칼처럼 변했다고나 할
까. 어쨌든 곽경환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음... 그럼 언제쯤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사시(巳時) 쯤 돼서 움직일 생각이에요. 오늘은 이미 움직이기에는 좀 늦었다
는 느낌도 들고, 문택과 천비 두 사람에게도 준비할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까요.
”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 소집을 하시겠습니까?”
“해야겠지요. 유시(酉時) 쯤으로 해서 전부 좀 불러주실래요?”
“맡겨만 주십시오.”
기분좋게 대답한 곽경환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사문도에게서 발길을 돌
린다.
‘소궁주님께서 사랑을 하신다...? 궁주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과연 뭐라고 하셨을런
지...’
날로 성장해가는 사문도를 볼 때마다 잠깐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무종(謝武宗
)의 모습에, 곽경환은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마치 송곳으로 심장을 찔러대는 듯
한 느낌을 때때로 받고는 한다.
‘궁주님... 주모님과 함께 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느새 소궁주님께서, 이토록 멋
지게 성장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렇게 멋지게 성장하셨습니다.
..’
자신이 봐도 멋지게 장성한 사문도를 생각하자면, 곽경환은 자신의 업보를 조금이라도
덜어낸 듯한 기분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곽경환은 언제나 천마궁의 군사(軍師)로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뻔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왔다. 그 때문에 언제나 남몰래 눈물짓고, 목숨을 내걸어
사문도의 정신적 욕구까지 충족시켜주기 위해 밤을 낮으로 여기고 노력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사문도는 멋지게 성장한 상태다. 게다가 천마궁의 재건이라는 목표까지도
눈앞에 있는 상태가 아닌가.
‘이제야 좀 마음이 놓입니다, 궁주님. 궁주님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든 장본인은, 이
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궁주님의 의지를... 궁주님의 꿈을 소궁주님께 이어드릴 수 있게 돼서...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궁주님...!’
곽경환은 속으로 이렇게 외쳐대면서도 한편으로는 노안(老顔)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을 조심스레 닦아낸다. 그리고는 가슴을 쫙 펴고, 당당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최소한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 한 곽경환이기에, 자신이 봐도 기대 이상의 성취를 이뤄낸
사문도가 떳떳하게 서 있기에 곽경환은 이제 자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천마궁의 혈겁을 딛고, 초대궁주 사무종의 의지를 이어받아 천마궁의 유지를
이어갈 수 있게 됐노라고.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을 임무를 해냈으
므로.
유시 정각이 지났다. 자그마한 오두막집에는 이미 도합 여덟 사람이 모인 상태다.
사문도, 그가 무표정한 눈으로 모인 사람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잔잔한 목소리로 곽경
환과 했던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끄집어낸다.
“다른 분들도 전부 아시다시피, 낙양에 의뢰해뒀던 검이 완성될 날이 다가오고 있습
니다. 그래서 내일 사시쯤에 움직여볼까 생각하는데, 혹시 이의 있으신 분 계십니까?
”
모두들 강철같은 눈빛으로 사문도의 무뚝뚝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10초간 오두막집
이 침묵에 잠기자, 사문도는 머리를 한번 쓸어 올리며 다음 말을 이어나간다.
“이의는 아무도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같이 동행할 사람 두 사람을 선별해 놨
는데... 곽 군사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대본에도 없던 이야기지만, 곽경환은 당황하거나 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다.
“금문택 대협과 강천비 소협. 소궁주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가시겠다고 정오
때 제게 밝힌 바가 있습니다.”
강천비의 말이 떨어지자, 모용화운을 비롯한 태무극은 좀 뜻밖이라는 얼굴이다. 강천
비보다는 실력이 그래도 우월한 모용화운 대신에 강천비를 데리고 가겠다니, 사문도의
뜻을 짐작하기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궁주님, 모용화운 소저가 아닌... 강천비를 데리고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제가 다 심사숙고(深思熟考)해서 내린 결정이니만큼, 꼭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인사 변동 계획은 애초에 못을 박아버리겠다는 사문도의 강경한 태도에, 모용화운은
그래도 조금 서운한 표정이다. 그러나 태무극에게 있어서 사문도의 말은 곧 법인지라,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문택, 천비. 거처로 돌아가 내일 떠날 채비를 갖춰 주시오.”
“알겠습니다, 주공.”
“존명!”
강천비와 금문택이 그림자처럼 오두막집에서 사라진다. 곧이어 사문도는 입을 쉴 겨를
도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허공에 흩뿌린다.
“그리고... 지금 귀혼당과 백마련이 치열한 접전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
리라 믿고 하는 이야깁니다. 이제 웅크려 있지만 말고, 차차 움직여 봐야 할 것 같습
니다.”
“!!”
사문도의 발언에 삽시간에 네 사람의 얼굴에서 희색이 돈다. 하지만 사문도는 여전히
별 일 아니라는 얼굴로 말을 이어나간다.
“이제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12년 간, 우리는 1차적으로
귀혼당을 궤멸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 귀혼당은
벌써 4개월째 백마련과 전투를 벌인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마 이번 분쟁은 올해 안
으로는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예측됩니다.
한창 전투가 열이 올랐을 때... 즉 올해 9월 1일, 그때 전면적으로 귀혼당 궤멸 작전
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때가지 만반의 준비를 갖춰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존명!!”
“그럼, 각자 볼 일들 보러 가십시오. 이번 회의는 여기서 끝마치겠습니다.”
12년 간 기다려 온 발언이다. 그 발언이 떨어지자, 사문도의 가신 네 사람은 얼굴에
희열을 가득 머금은 채로 걸어 나가는 사문도에게 고개 숙여 절대복종의 자세를 취하
고 있다.
그리고... 사문도가 조용히 오두막집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그 오두막집은 난데없는
괴성으로 들썩인다.
“드디어 귀혼당 궤멸 작전인가!”
“크핫핫핫! 천마궁 만세다!!!”
“아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뇌명은 감동에 젖어 눈물까지 찔끔찔끔 쏟아내고 있다. 모용화운은 얼떨떨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다가, 복잡한 심정이 얽힌 얼굴을 하며 조용히 오두막집을 빠져나간다.
‘이해할 수 없어. 왜 주군께서 내가 아닌 천비를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시는 건지...
’
뉘엿뉘엿 서편 하늘로 떨어지는 태양에게 물어봐도, 오두막집 주변 울타리를 가득 메
우고 있는 진달래에게 물어봐도 모용화운은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가 없다.
‘안 되겠어. 가서 자초지종이라도 들어 봐야지, 이대로는...!’
네 사람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외면한 채, 모용화운은 사문도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보
기로 마음먹고는 신형을 날린다. 반짝이며 사라진 모용화운의 두 눈은, 모용화운 특유
의 궁금함이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용화운의 그 눈에는, 결코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
호한 의지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충족할 만한
이유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금문택이 부스럭거리며 짐을 챙기는 것을 보고, 사문도는 눈을 감은 채로 벽에 기댄
채로 있다. 금문택은 짐을 챙기면서 그런 사문도를 힐끔힐끔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기분 탓일까?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이, 지금 현재 금문택에게
지나칠 정도로 자극이 되고 있다.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한거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사문도가 던진 질문에, 금문택은 흠칫하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묻은 것 같은 건 없습니다. 다만...”
“모용 소저 대신에 천비를 넣은 게 궁금하오?”
금문택이 사문도의 말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무렵, 사문도는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고
는 맑게 투영되어 있는 두 눈으로 금문택이 메고 있는 두 자루 검을 바라보며 말문을
튼다.
“검을 찾으러 낙양에 간 뒤에, 바로 서쪽의 종남산으로 갈 것이오.”
“종남산이라...”
“천상신의 어르신께서조차 자신보다 의술이 한 단계 위라고 인정하신 분이, 거기 거
주하고 계시단 말이오.”
“...”
천상신의가 언급되자, 금문택은 입을 꾹 다물며 아예 사문도의 답변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거기서... 화군백이란 분을 만나, 하나 여쭈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그게 화운 대신
천비가 따라가게 된 원인이오.”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는 것만으로... 모용 소저 대신 천비를 데려가신다니,
모용 소저가 이 사실을 알면 쉽게 수긍하려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 것이오. 화운은 나름대로 자존심이 강한데다가, 이번 일로 가장 의구심을 품고
있는 이도 화운 바로 그녀일 테니까 말이오.”
사문도는 여기서 잠깐 말을 끊더니,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선을 돌려 덤덤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는 금문택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폭탄선언을 던진다.
“사랑하는 여인의 병을... 치료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가는 거요.”
“!!”
그냥 눈대중으로만 봐도, 금문택의 안색이 많이 흐트러졌다는 것 정도는 너무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 정도로 금문택은 사문도의 발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이다.
“사랑하는 분께서... 몸이 안 좋으십니까?”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는 금문택에게서 시선을 돌린 사문도는,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처
럼 잔잔한 빛을 토해내는 촛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천음절맥이오. 현재 중원의 의술로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는...”
“... 천음절맥이라면...”
금문택은 잠깐 얼굴을 고쳐 기억 속을 일일이 뒤져보다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손을
탁 치며 낮게 소리친다.
“천음절맥이라면 그, 나이 열여덟이 되자마자 지나치게 많은 음기 탓으로 죽어버린다
는...?”
“...”
사문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평소 사문도 답지 않게 유난히도 답답
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 금문택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다.
“사랑하시는 분의... 어디가 그토록 마음에 드신 겁니까, 주공?”
금문택의 질문에, 사문도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슴없이 답변을 내던진다
.
“어머님을 닮은 여인이오. 외모는 기억하고 있는 어머님과 틀릴지언정... 그녀는 분
명히, 어머님의 마음을 가진 여인이오.”
‘주군께서 나대신 천비를 넣으신 이유가... 이거였단 말인가...?’
금문택과 사문도의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것을 본 모용화운은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본의 아니게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주군께서는... 사랑하시는 분을 살리기 위해서...’
모용화운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배신감과 모멸감에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고 있다.
자신 정도라면 어디라도 빠지지 않을 정도라고 믿어 왔다. 자신 정도 되는 사람을 거
절할 사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바로 지금, 그 자존심이 가차 없이 무너진 것이다. 사문도란 사내에게, 너무도
간단하게.
“주공, 그런데... 왜 하필 모용 소저가 아닌, 다른 분입니까?”
금문택의 문 안쪽에서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모용화운은 금문택의 이 질문에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곧 떨어질 사문도의 답변을 기다린다.
“화운은 말이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여인이오. 화운 개개인의 특징을 따져본다손
치더라도,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여인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멋진 여인이오.”
여기서 잠깐 사문도의 말이 끊긴다. 사문도가 자신을 평가하고 있기에, 모용화운은 얘
기를 엿듣고 있다는 자신의 처지는 잊은 채다.
“하지만... 화운은 말이오, 내가 만류해도 꺾을 수 없는 꿈이 있소. 바로 나처럼, 쓰
러진 자신의 터전을 자신의 힘으로 일구고 싶다는... 그런 꿈 말이오.”
“....”
“화운은, 내가 원하는 바... 즉, 무림통일을 이룩한 뒤에는 북해로 떠날 사람이오.
괜히 그런 사람을 곁에 붙잡아 뒀다가, 현재 이루고 싶어 하는 바를 못 이루도록 하고
싶지는 않소.”
“그러나 주공, 모용 소저는 분명 주공을 연모(戀慕)하고 있습니다. 모용 소저를 데리
고 가는 일을 떠나서, 모용 소저는 이번 일로 분명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겁니다.”
그때, 안쪽에서 사문도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그리고 사문도는 금문택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이 묻고 싶던 바를 묻는다.
“후후, 문택. 그대가 화운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는 역시... 아무래도 첫
사랑과 화운의 용모가 거의 흡사해서가 아니오?”
“...”
“화운에게 잘해주시오.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까지 화운에게 신경써줄 수 있는 사람
은... 현재 문택, 당신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오.”
“하지만 주공, 전...”
“자신의 감정이란 건, 속여서는 안 되는 거요. 난 처음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괴롭고 미칠 지경이었소. 그 이유를 아시오?”
“...”
“조실부모 하고, 난 오로지 복수에만 전념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소. 그러다가
문득, 정체 모를 감정이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난 그것이 처음에 사랑
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소.
어쩌고 보면 나란 놈은 정말 어리석은 녀석이오. 미치고 싶을 정도까지 그 사람을 사
랑하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이 사랑이란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니 말
이오.”
금문택은 처음보다 약간 기운이 빠진 얼굴이다. 그러나 사문도의 시선을 외면하지 않
고 있다.
“문택... 그대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인정하기 바라오. 사랑이란 감정에 별로 심취하
지 않아서 잘못 알아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볼 때... 그대는 지금 화운을 마
음에 두고 있는 듯하오.”
사문도의 말이 끊기자, 모용화운은 피가 거꾸로 도는 듯한 기분을 억누르다가 쏜살같
이 신형을 날린다.
‘주군은... 지금, 금 대협과 나를... 어떻게든 이어 줄 생각이야. 틀림없어...
내가 자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행동할 수
가 있는 거지? 대체 왜...?!’
그 둘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모용화운의 두 눈에는, 미세하긴 하나 점차 습기가 번지고
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놓여 있었기에, 사문도만큼은 자신을 이해해줄 줄 알았
다. 하지만 그렇게 믿은 자신이 바보였단 걸 이제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의 대가는, 뭐라 단정하기 힘들긴 하지만 모용화운에게 감당하기 힘들 것이
란 것 하나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문도에게 있어 무엇보다 골치 아프게
된 건 역시, 여인이 한번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닭은 새벽에 어김없이 울부짖었다. 그리고 뜬 해는, 어느덧 시간
을 사시까지 돌려놓았다. 출발 시간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떠날 채비를 모두 갖춘 금문태과 강천비, 그리고 사문도는 모두들의
배웅을 받고 있다.
“8개월 만입니까, 소궁주님?”
“네, 그렇네요.”
“몸조심하십시오. 무사히 귀환하시길 빌겠습니다.”
뇌명의 염려에, 사문도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빙긋 웃으며 뇌명의 투박한 손을 꼭
쥔다.
“염려 마세요. 저 두 사람이 곁에 있다면야, 뇌 아저씨께서도 안심하셔도 상관없을
거예요.”
“하하, 예. 물론 저 둘을 믿어야겠지요.”
뇌명은 뚜벅뚜벅 금문택에게로 걸어가더니, 금문택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강한 어조로 털어놓는다.
“부디 소궁주님의 신변을 잘 맡아주기 바라네.”
“그게 제 소임입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뇌 어른.”
“물론 그래야겠네만, 역시... 그리 걱정이 쉽게 덜어지는 게 아냐.”
뇌명은 자신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흔들고는 금
문택을 놓아 보낸다.
“잘 다녀오십시오, 소궁주님!”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차 멀어져가는 사문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태청은 고개를 갸
웃거리다가 태무극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태 형님, 소궁주님의 뒷모습... 왠지 낯이 좀 익지 않소?”
오태청의 질문에, 태무극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오태청을 한껏 쏘아보다가 결국 주먹
으로 오태청의 머리를 한대 쥐어박는다.
“어이구, 이거 왜 때리는 거요?”
“이 멍청아! 네놈 눈은 장식이냐? 천마궁도라면 꿈에서도 잊어서 안 될 분의 뒷모습
아니냐!”
이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던 곽경환은 여름햇살만치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사문도
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멀리 사라져가고 있는 사문도의 뒷모습은, 확실히 예전 사무종의 모습과 흡사한 점이
많다. 사무종을 많이 닮으려고 애를 써서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
사무종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소궁주님께서는, 새로운 무림사를 쓰시게 될 것이다. 궁주님께서 이루고 싶
어 하셨던, 정사가 서로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게 되실 것이다.’
곽경환, 태무극, 오태청, 뇌명... 이들 넷이 사문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윽하면서도
부드럽다. 단지 모용화운만 씁쓸한 얼굴로, 사라져가는 사문도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
“유후! 주군, 여기가 낙양 맞는 겁니까?”
“몇 번을 말해야 제대로 알아들을래? 낙양 맞다니까??”
다시 열흘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이들 둘의 대화를 들어보면, 이들이 걷고 있는 거리
는 분명히 낙양의 한 거리다.
“주공, 벌써 술시(戌時)가 넘었습니다. 오늘은 일단 저녁을 먹고 숙소를 결정한 뒤에
, 내일 아침이나 돼서 찾아가시는 게 나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금문택의 조언에,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휘파람을 불고 있는 강천비의 어깨를
꽉 잡는다.
“아, 주군. 이거 좀 놓고 대화를 하셔도 하시는 게...”
“시선 좀 그만 모으고, 저녁 먹을 곳이나 찾아 봐!”
“에이, 참. 그냥 말씀으로 하셔도 되는 일인데...”
사문도는 투덜거리는 강천비를 한대 칠까 생각도 해 보지만, 결국 생각을 고치고 한숨
을 내쉬며 강천비의 등을 떠다민다.
금문택은 멀어져가는 강천비를 부르고는 씩 웃으며 무리한 조건(?)을 내건다.
“어이, 아우님! 저녁밥을 해치울 수 있으면서 숙식까지 가능한 곳으로 부탁한다.”
“아... 형님도 참 까다롭게 구시네. 그냥 저녁 먹고 숙소 찾고 해도 괜찮을...”
“고생하고 싶다면 그러던지.”
바보는 고생을 좀 해봐야 한다는 사문도의 말투에, 강천비는 얼른 심드렁한 표정을 뜯
어고치더니 정중한 어조로 대답한다.
“뭐, 주군과 형님께서 다 원하신다면... 그렇게 합지요. 네네.”
사문도는 번화가를 향해 꽁지가 빠져라 달려가는 강천비를 보고 한숨을 푹 내쉰다.
“휴우... 저놈 머리엔 대체 뭐가 쌓이고 있길래 점점 익살스럽게 변해가는 건지...”
“하하, 그래도 천비는 괜찮은 녀석 아닙니까? 요즘 사파에 저런 충실한 소년이 있는
줄 아십니까?”
금문택과 사문도는 강천비가 사라진 번화가를 바라보면서 내심 빨리 강천비가 돌아오
기만 기다린다.
강천비에게만 신경을 쏟아 부은 덕택에, 사문도는 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언제나 그래왔듯이, 사문도 일행들은 그렇게 다시 하룻밤을 하얗게 재웠다. 그리고 아
침을 어기적거리며 챙겨먹은 뒤, 지금 외딴 골목길을 헤매 다니면서 가고 있는 곳은
한성도의 대장간이다.
“으하하함, 주군... 피곤한데, 좀 더 자다가 가면 안 되는 겁니까?”
“안된다.”
피곤해선지, 기분 탓인지 금문택은 강천비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비해서 사문도의
대답이 너무 무성의하게만 들리는 듯하다.
“이제 진시(辰時)가 겨우 지났잖습니까? 그쪽 분께서는 얼마나 일찍 일어나시는지 모
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이른 시간에 찾아간다는 발상 자체가 결례(缺禮)...”
“혼자 귀환하고 싶다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문도의 반응에,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강천비가 불쌍하게 내비칠
정도다. 금문택은 피식 웃으며 말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주공, 한 대협께서 술을 좋아한다고 하셨습니까?”
“이런, 이런. 술을 깜빡했군.”
사문도는 깜빡했다는 얼굴로 머리를 내젓더니 졸음 겨운 눈으로 하품을 쩍쩍 해대는
강천비에게서 시선을 딱 멈춘다.
“으하하함...?”
“여아홍 세 병 사오는 걸로 당첨(當籤)이다, 천비.”
“제가 말입니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는 강천비의 모습에, 사문도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답답한지 가슴을 몇 차례 두드린다.
“뼈 하나 부러질래, 팔 하나 내놓을래?”
사문도의 싸늘한 얼굴에, 강천비는 찔끔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곧 특유의 웃음을 지으
면서, 조심스레 사문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은자 한 냥을 낚아챈다.
“아... 아하하하. 물론 다녀와야죠, 예. 다녀오겠습니다!!!”
결국, 강천비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멀리 보이는 주막을 향해 쏜살같이 달음질을 친다.
그런 강천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문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혼잣말을 꺼낸
다.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어쩌다가 저 녀석 머리에서 나사가 하나 풀린 건지.”
“제가 볼 때는, 주공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습니다만...”
“웃는 모습이?”
사문도는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금문택에게 질문을 내던진다. 그러자 금문택은 기
분 좋게 웃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는다.
“주공께서 의식하셔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주공께서
웃는 횟수는... 정말 작습니다. 아니, 어쩔 때는 아예 못 볼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주공과 만난 기간이 짧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공의 웃는 모습이...
무척 보기 힘듭니다.”
“... 후후, 웃는 모습이라...”
그제야 사문도의 입가에 옅은 색의 미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사문도의 어깨에서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고 있던 백룡은 사문도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은지, 날갯짓을 하다가
지저귀기 시작한다.
“구우~ 구구구...”
“이제야 일어날 생각이 든 거냐, 백룡?”
사문도가 왼손을 내밀자 백룡은 깡충 뛰어서 사문도의 왼손 약지에 앉는다. 그리고 사
문도가 막 백룡의 등을 쓰다듬어주려던 순간이다.
“크악!!”
별안간 골목길을 달려가던 한 소년이 사문도의 등에 부딪쳐서 쓰러진다. 사문도 역시
바닥에 쓰러질 듯 휘청이지만, 재빠른 금문택의 부축에 용하게 넘어지지 않았다. 백룡
은 놀라 사문도의 손가락에서 발을 떼고 날갯짓을 한 것 말고 다치거나 한 것은 없는
듯하다.
“감히 이 어르신께서 지나가는 길을 막고 서 있다니, 정신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
냐? 엉?”
부딪친 소년이 도리어 코에서 더운 김을 뿜어내며 소리를 지르자, 금문택은 어처구니
가 없다는 얼굴이다. 사문도는 소년에게서 찍힌 등이 꽤나 아픈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어? 이런 싸가지를 봤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은 또 뭐냐? 그리고 얼굴만 반반한 너
, 아프라고 때렸지 웃으라고 때린 거 아니다.”
금문택은 정말로 별안간 당한 일에 화가 울컥 치솟아 오르는 듯, 얼굴을 확 고치고는
냉랭한 눈길로 소년의 얼굴을 노려본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당황하는 티도 내지 않고
있다.
“얼굴 펴라. 주먹 날리기 전에, 엉?”
이제 강천비 또래나 됐음직한 소년이 이렇게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노는 꼴은,
정말 지나가던 개가 봐도 배꼽을 잡고 뒹굴 일이 아닌가?
“소협의 언사가 좀 지나치시군. 더 이상 그런 무례한 발언만 일삼는다면, 나 역시 가
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소.”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라. 감히 이 어르신을 어떻게 하겠다고? 푸핫핫,
지나가던 송아지가 웃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 소년의 폭언(暴言)에 금문택이 보따리에 싸 둔 검을 꺼내들려고
마음먹은 순간, 사문도가 등을 문지르면서 소년의 아래위를 한번 훑어본다.
푸른 옷으로 전신을 덮고 있으며, 말만 거칠게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귀한 부잣집 도
련님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얼굴도 점잖다.
“갑자기 내게 부딪혀놓고, 무슨 망발이지?”
“망발은 무슨 놈의! 왜 이 몸께서 지나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거냐?”
“이 길을 네가 직접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얘기하는군.”
바로 그때, 사문도의 등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곧이
어 술병 세 개를 쥔 강천비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어라? 주군, 아직 안 움직이셨...”
그러다 심상찮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을 보고, 금세 초면의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젖내 나는 저놈은 또 뭐야? 네놈 몸종이냐?”
난생 처음 보는 소년에게서 떨어진 말이 이렇자, 강천비는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
린다.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입 닫으셔, 파리 들어갈라. 개구리같이 입만 커갖고는.”
강천비는 이 말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떨고는 사문도에게 묻는다.
“주, 주... 주군. 바, 방금... 저 자식이 저보고... 개구리 같다고...”
“귀는 제대로 뚫려서 다행이다. 내 귀에도 그렇게 들렸다.”
그러자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의 강천비가 술병을 내려놓고는 눈에서 불을 뿜으며 소년
에게 달려간다.
“야이, 지나가는 강아지만도 못한 놈아! 감히 누굴 욕하는...!”
“잠깐만 멈춰주시오!!!!”
별안간 소년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천비는 주먹을 뻗으려다가 고개를 힐끔
돌려 고함이 터진 곳을 바라본다.
“못돼먹은 조카 녀석이 시비를 건 모양인데, 정말 미안하게 됐소이다. 부디 용서해
주시구려, 소협!”
별안간 나타난 중년인의 모습에, 강천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주먹을 거두고는 열심히
빌고 있는 중년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다.
“아, 백부님! 저놈들이 먼저 제 앞길을 막았다고요!”
“닥치지 못하겠느냐?!”
추상(秋霜)같은 중년인의 태도에, 소년은 움찔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그
중년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문도는 얼굴빛을 고치고는 소리친다.
“... 어르신?!”
“!!”
그러자 허름한 작업복을 걸치고 있던 중년인, 즉 한성도가 두 눈을 치켜뜨며 손바닥을
탁 친다.
“호오, 사 공자 아니오?!”
사문도가 정중하게 한성도에게 예를 올리자, 강천비는 물론이거니와 금문택도 모르겠
다는 얼굴이다. 다만 재미있는 사실은 한성도에게 ‘백부’란 호칭을 사용한 소년은
입술이 석 자는 부어올라서는 곁에서 군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 제작은 이미 끝났소. 그걸 찾으러 오신 것 아니오?”
한성도의 말에 사문도는 빙긋 웃더니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털어놓는다.
“물론 목적은 그겁니다만, 일단 말씀은 놓으십시오. 전 어차피 어르신 친구 중 한 사
람의 아들일 뿐입니다.”
“말 놔도 된다고? 그럼 그렇게 하지. 핫핫!!”
어느덧 묵은 기분은 다 풀렸다는 듯이, 한성도는 자기 조카의 어깨를 툭툭 친다.
“이 녀석은 내 조카라네. 이름은 한정욱(漢正煜)이라 하고, 나이는 올해 열여섯이지.
”
사문도는 방금 전의 일은 모두 잊으려는 듯, 표정을 고치고는 한정욱에게 손을 내민다
.
“... 사문도라 하오. 묵은 감정은 씻고, 지금이 초면인 걸로...”
“한정욱이오. 만나서 반갑다는 둥의 거추장스런 수식어 따위는 치울 테니, 이해해 주
시오.”
“어허, 어허! 끝까지 무례하게 굴 거란 말이냐?”
한성도가 무례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조카를 보다 못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한정욱은
필요 없다는 듯이 몸을 빙 둘리고 자신이 왔던 길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가는 한정욱의 뒷모습을 보는 강천비는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노려보고 있다. 그에 비해 금문택은 못 미덥다는 얼굴로 한성도
의 조카, 한정욱을 바라볼 뿐이다.
“... 용서해 주게. 화경이를 볼 거라고 며칠 전에 왔다가, 여기 없다는 말을 듣고 삐
져서 저러는 거니까...”
한화경의 이름이 거론되자 강천비는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돌려 한성도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문도는 너무도 담담한 얼굴로 서 있다.
“괜찮습니다. 어르신의 사과로도 충분하니, 염려 놓으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자, 그럼 검부터 찾고 보세.”
한성도가 총총걸음을 재촉하며 대장간으로 발을 돌리자, 사문도는 강천비와 금문택에
게 따라오라고 눈짓을 한번 한 뒤 곧장 한성도의 뒤를 따라 걷는다.
한성도는 뒤에 사문도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층 변한 사문도의 용모
에 속으로 혀를 찬다.
‘전에는 그저 미끈하게 생긴 소년에 불과했는데... 이젠 제법 청년 티가 나는군. 앳
된 모습도 많이 지워졌어.
후우... 무엇보다 놀라운 건, 역시... 무종이의 모습과 많이 흡사해졌다는 것이로군.
그때 무종이 모습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느껴질 정도로 흡사해졌어...’
확실히 1년 전의 사문도와 현재의 사문도를 비교해보면 많은 차가 있다.
한성도를 만났을 적만 하더라도 사문도의 머리는 짧았다. 하지만 지금 머리는 길게 자
라 머리를 가볍게 묶어 뒤쪽으로 흘려야 할 정도로 길게 자라 있다.
게다가 소녀처럼 가냘프기만 하던 얼굴도, 지금은 이제 많이 우직해진 느낌을 가져다
주고 있다. 거기에 광채가 한층 짙어진 눈빛, 모든 것을 다 껴안을 수 있을 듯하게만
느껴지는 어깨 등은 한성도가 감탄을 터트리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검을 넘긴 다음에, 천천히 얘기해 봐야겠다. 과연 무종이 아들은 얼마나 넓은 포부
와 야망을 지녔는지. 어떤 자리를 목표로 달리고 있는지를!’
사문도가 막 대장간에 도착하고 보니, 한성도가 대장간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있는
중이다. 그걸 본 사문도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묻는다.
“여태까지 여기 계셨던 게 아닙니까?”
그러자 낑낑거리며 문을 열던 한성도는 피식 웃으며 손을 탁탁 털고는 입을 연다.
“하하하, 정욱이 녀석과 주막에서 집으로 가던 길이었지. 마침 어제 무기 납품일이었
기 때문에 같이 술이나 하러 간 거고 말이네.”
“... 그럼 어제는 종이 술만 드셨다는 말씀입니까?”
“흠, 종일은 아니고... 술시부터 해시 조금 지나서까지 마셨을 걸세.”
한성도가 팔에 힘을 넣자, 두 팔에서 계란 두세 배는 됨직한 크기의 알통이 불거져 나
와 있다. 한성도는 뒤이어 괴성과 함께 문을 쥔 손에 힘을 가하자, 육중한 철문이 나
무문 열리듯이 드르륵 열린다.
“잠시 기다리게나. 촛불 좀 켜야겠네.”
“그러십시오.”
기분 좋은 사문도의 반응에, 한성도는 냉큼 대장간 안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만년한철... 아버님의 의지가 담긴 철로 만들어진 검...’
한창 부스럭거리던 대장간에 촛불이 하나 덩그러니 켜진다. 곧이어 다섯 개의 촛불이
환하게 켜지더니, 박쥐라도 튀어나올 것 같던 대장간이 환하게 밝아진다.
“이제 들어오게나.”
한성도의 말이 떨어지자 사문도가 냉큼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것은 당연히 금문택과 강천비다.
강천비는 대장간 안은 처음인 듯, 희한한 얼굴을 한 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다.
한성도는 그 모습을 보고는 큭큭거리다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의 성명도 묻지 못했구려. 불찰을 용서해 주시구려. 핫핫.”
여태 아무런 말도 안 걸다가 갑작스레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자, 둘은 당혹스럽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용서라니요?”
금문택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한성도는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트리고는
사문도에게 묻는다.
“이 두 분과 공자의 관계가...?”
“수하입죠. 편하게 대하시면 됩니다. 예, 에.”
사문도가 아닌 강천비에게서 답이 떨어지자, 한성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해서
껄껄거린다.
“재밌는 소년이로고.”
한참을 웃어대던 한성도가 웃음을 그치자, 사문도는 얼른 금문택의 허리를 꾹 찌르고
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성명이나 밝혀 두시오.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사문도의 말에 금문택은 고개를 하번 끄덕이고는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허리를 숙
이더니 정중히 인사를 올린다.
“금문택이라고 합니다.”
“하하, 반갑소. 금 대협이셨구려. 한성도라고 하는 사람이오.”
그러자 이번에는 강천비도 질세라 한걸음 걸어 나오더니, 역시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포권지례를 올린다.
“강천비라고 합니다. 명성 자자하신 한성도 어르신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니, 그런 말은 필요 없소. 뭐, 어쨌든 나 역시 소협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
금문택과 강천비가 인사를 마치자, 이번엔 사문도가 한성도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르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주시겠습니까? 막 사온 술을 보고만 있자니 목구멍이
근질거립니다.”
“아참, 참!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군.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게나.”
한성도는 촛불 하나를 뎅그러니 들고 대장간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 사이 사
문도 일행들은 간이 의자에 앉아 침묵으로 한성도를 바라보고 있다.
한성도가 든 촛불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쪽으로 시선을 계속 움직이고 있는 강천비는,
아직 대장간을 구석구석 돌아보지 못했던 탓에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대장간에서 풍기
는 독특한 쇠 냄새와 풍경들을 뇌리에 각인시키고 있는 중이다.
“저는 대장간에 처음 오는 건 아닙니다만... 이 대장간은 개인 대장간 치고는 규모가
장난 아니게 큰 것 같습니다, 주공.”
금문택의 의문형 어조에 사문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의 지식
을 활용해 입을 연다.
“이 대장간은 자금성에서도 고위 무장들이나 쓰는 무기를 생산하는 곳이오. 그러다
보니 무기에 보다 섬세한 표현을 해야 할 때가 많을 것이오. 그러니 결론적으로 아무
래도 다른 대장간보다는 규모가 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금문택과 강천비는 귀 기울여 사문도의 쑥떡공론을 듣고 있다. 사문도가 뭐라고 더 말
을 이어보려던 찰나, 한성도의 시금털털한 목소리가 대장간을 한가득 메운다.
“캬아, 여기 있었군. 여기 있었어!!”
한성도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자그마한 촛불이 은은하게 흔들리고 있는 곳
으로 쏠린다. 한성도가 촛불을 내려놓은 채로 거무튀튀한 빛을 띠고 있는 검만 들고
나오고 있다. 그것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정성스럽게 말이다.
입을 꽉 대문 채 검을 들고 나오던 한성도는 사문도의 앞에 그 검을 떨어트린다. 그
검이 바닥에 떨어지자 잔잔한 땅울림과 함께, 땅바닥이 갈라지는 육중한 소리가 네 사
람의 고막에 맑게 울려 퍼진다.
“휴우, 다른 검보다 무게가 다섯 배는 더 나갈 것이네. 한손으로 드는데 큰 지장은
없겠지만, 팔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쓰도록 하게.”
사문도는 활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오고 있는 나긋나긋한 햇살에 의지해, 떨리는 손으
로 묵직한 쇳덩어리 같기만 한 검을 쥔다. 왼손으로 검집을 쥐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다.
“집을 한번 벗겨 보게. 완성도 평가는 해 줘야 할 것 아닌가?”
한성도의 재촉이 이어지지만 사문도는 긴장되는 듯 침을 꿀꺽 삼키고는 검의 손잡이
부분을 오른손으로 쥔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검을 쭉
뽑아낸다.
검신이 햇살에 완전히 노출되자, 거무튀튀하기만 한 검에서 돌연 한줄기 빛이 일어난
다.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자, 한성도는 당혹스런 눈길로 사문도를 멍하니 바라
보고 있다.
“혀, 형님... 방금 분명히 빛이 한 줄기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나도 봤다.”
너무도 찰나 간에 일어난 빛이었던지라, 얼핏 잘못했으면 검에서 일어난 빛을 보지도
못할 뻔한 강천비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사문도의 입에서 뭐라고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문도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천천히 검을 돌려보고 있다. 사문도가 그렇게 한창 검을
뒤척이고 있는 찰나, 별안간 한성도가 사문도를 보고 탄성을 터트린다.
“검이 임자를 만났도다. 임자를!!”
“아니, 어르신... 제가 볼 때는... 그냥 잘 다듬어진 검 같습니다만...”
강천비가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꺼내지만, 한성도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다.
“강 소협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로군. 저 검은 지금 기뻐서 날뛰고 있는 중이란 게.
..!”
“... 예?!”
“잘 느껴 보면, 검의 기... 그리고 공자의 기가 둘이 아닌 하나란 것을 알 수 있을
걸세.”
한성도의 말에 금문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의 소감을 읊는다.
“정말... 주공의 기와 검의 기가 전혀 이질(異質)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보통
제아무리 뛰어난 검객(劍客)일지라도 약간의 이질감 정도는 숨기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은... 마치 검과 주공께서 하나가 된 듯한...”
“검신합일(劍身合一)의 경지라네. 검도 검이지만, 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가...
사 공자의 기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야!”
한성도가 기쁨의 탄성을 지르기가 무섭게 이번엔 검을 쥐고 있는 사문도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흡사 달빛을 갈아 뿌려놓은 듯한 은은한 서기가 대장간
안에 고요히 퍼지고 있다.
“아... 이렇게 맑은 느낌의 검은 처음입니다. 세상에 이런 검도 존재할 수 있다니...
!!”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문도가 던진 발언에, 한성도는 결국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
린다.
“크하하핫! 내가 만든 검을 인정해 주다니, 고맙네!”
“정말 멋진 검입니다. 여태 제가 쥐어봤던 타 종류의 검과는... 그 질적 감각이 비교
조차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검의 매력아 완전 취해버린 듯, 사문도는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눈길로 쇳덩어리 같은
검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어 있다.
“큭큭, 이제 검에 대한 평가는 이 정도면 됐으니... 술이나 한잔 합세. 어떤가?”
“물론 그래야지요. 이렇게 좋은 검을 얻게 됐는데, 어찌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습니까
?”
사문도는 다시 한번 검을 훑어보다가 거리낌 없이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강천비가 사온 여아홍 술병을 하나 쥐고는 공손하게 한성
도에게 권한다.
“어제 술을 좀 드셨다고 하셨으니, 과하게 드시지는 마십시오.”
“하하, 걱정 놓게나. 알아서 마실 터이니 말이네.”
사문도는 한성도가 여아홍을 병째로 마시는 걸 보고서야 다른 병을 쥐고 허리를 돌려
조심스레 여아홍을 목구멍으로 들이킨다.
“크아... 이 맛이다, 이 맛!”
이제 남은 술병은 하나다. 필시 그것으로는 부족할 거라 생각한 사문도는 품을 뒤적이
다가 은자 한 덩어리를 내주며 낮은 목소리로 강천비에게 속삭인다.
“여아홍 다섯 병. 거스름돈은 알아서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사 와 다오!”
“넵, 주군!”
은자를 받은 강천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쏜살같이 달려갔던 주막으로 몸을 날린다.
그러자 그때, 금문택은 사문도가 놓아둔 검을 흘낏 바라보다가 사문도에게 묻는다.
“주공 저 검... 제가 잠깐 쥐어 봐도 되겠습니까?”
금문택의 청원에 사문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연다.
“뭐, 문택 정도라면 쥐는 데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소만... 최대한 정신을 집중시켜
서 검을 쥐어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사문도가 검집을 쥐어 금문택의 손ㅇ르 쥐어준다. 그리고 다시 한성도와 함께 술을 들
이키며 즐겅누 한때를 보낸다.
‘주공께서 놀라실 정도의 검이라면... 대체 얼마나 뛰어나다는 것인가?’
금문택은 사문도의 충고를 잊지 않고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는다. 하지만 그렇게 검을 반 정도 뽑자, 갑자기 검에서 극강한 기운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와 자신의 팔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웃?!’
금문택은 목구멍까지 터져 나오는 비명을 꾹 눌러 참으며 재빨리 자신의 기로 대응하
고 나온다.
검에서 이다지도 고강한 기운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겨우 검의 기운
을 진정시킨 금문택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다.
‘난 아직 수련이 덜 된 모양이군. 이런 데서 검에게 거절당하는 걸 보면...’
결국 금문택은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검을 밀어 넣는다.
“주군, 받으십시오.”
그러자 사문도는 뜻밖이란 눈초리로 금문택을 흘낏 바라보다가 묻는다.
“그대 실력 정도라면 이 정도 검은 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란 말이오?
”
“그건 아닙니다만, 하마터면 검의 기에 되려 당할 뻔 했습니다. 보다 완벽하게 쥘 수
있을 때까지 실력을 키운 뒤에 검과 다시 한번 붙어보렵니다.”
결의에 찬 금문택의 대답에, 사문도는 금문택이 도로 돌려주는 검을 받아 바닥에 내려
놓는다.
“흠, 공자. 그 검의 이름은 뭐라고 정할 계획인가?”
한성도의 기대 어린 질문에도 사문도는 전혀 고만하지도 않고, 이미 생각을 해놨다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대꾸한다.
“단혼... 단혼흑룡검은 어떻습니까?”
[귀거래혜] 30.천방지축(天方地軸)
“단혼... 흑룡검이라...”
“며칠 전에 여기 올라오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원래 단혼검이라 부르기로 생각했었
습니다만... 검집에 멋진 용의 모습을 새겨 놓으셔서 덧붙인 것입니다.”
한성도는 사문도의 기막힌 발상에 혀를 내두르고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캬... 거 참 환상적인 발상일세, 크윽!”
고개를 돌려 트림을 하는 한성도를 보며 미소 짓고 있는 사문도의 모습에서 우아한 미
소가 흐르고 있다.
“어르신께서 혹 생각하신 이름은 있습니까?”
사문도의 질문이 한성도의 얼굴에 괴상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 웃음이 멎을 즈음
되자, 한성도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름을 짤막하게 털어놓는다.
“화문검(華文劍).”
“화문검이라... 느낌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희한하게, 사문도가 화문검이란 이름을 되뇌는 것을 보고 있는 한성도의 얼굴에서는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다. 돼지 쓸개라도 핥은 듯한 인상이다.
‘화문검의 이름 유래를 알겠는가? 화경이의 화(華)자와, 자네의 문(文)자를 넣어 만
든 이름이야.’
여아홍을 물마시듯이 들이켜 그 표정을 무마시켜 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는지, 한성도는
여아홍을 신들린 듯이 들이킨다.
“술 더 가져 왔습니다, 주군!”
강천비가 실실 웃으며 술병 다섯 개를 꺼내자, 사문도는 그 중에서 세 병만 챙기고 두
병은 강천비와 금문택의 앞에 내민다.
“천비는 갔다 왔으니 목이라도 축일 겸 마시고, 문택 그대는 혼자 그렇게 앉아 있으
면 심심할 터이니 이걸로 기분 전환이라도 해 두시오.”
“아, 감사합니다. 주공.”
두 사람이 술병에서 종이를 뽑아내고 여아홍을 들이키려던 순간이다. 한성도가 한숨을
훅 내쉬더니 짤막한 목소리로 사문도를 직시하며 말을 꺼낸다.
“이보게, 공자. 시간이 좀 남는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우리 집에서 쉬어가줄 수 있
겠는가?”
한성도가 뭔가 털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챈 사문도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인다.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야... 뭐,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 무리한 부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네만, 어쨌든 고맙네.”
“아닙니다. 남는 게 시간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 정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야 있습니다.”
술병을 쥔 채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바라보던 한성도는,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대장간 밖으로 몸을 돌린다.
“우리 집에서 얘기하는 것이 좋을 듯싶네. 그리로 가세.”
대장간을 빠져나와 먼저 길을 재촉하고 있는 한성도의 모습이, 사문도에게는 너무도
무기력하게만 보이고 있다. 무슨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할 말이 대체
어떤 말이기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쾌한 얼굴로 술을 즐기던 이 한성도란 중년인이
이렇게 변해버린 것인가?
한성도의 집 문전에까지 도착하자, 강천비는 정말 의외란 눈초리로 고래 등 같은 저택
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다.
“야... 금 형님, 정말 이 으리으리한 집이, 방금 들어간 그 어르신의 저택이란 말이
지요?”
“주공께서 그러셨잖느냐? 황실과 거래를 하는 분이라고 하셨으니, 이런 집을 갖고 있
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러냐?”
“생각헤 보니 그렇네요. 그래도 이건, 정말... 후우!”
북경에서나 보이던 집을 낙양에서도 보게 되자, 강천비는 감회가 새로운 듯하다. 두
사람이 한성도의 저택으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사문도의 전음이 둘의 귓속을 가
볍게 울린다.
(어르신께서 대문을 닫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별채에서 쉬고 있으라고 하셨소. 그 분
부에 따라 주시오.)
그러자 금문택은 대문을 철커덩 닫고는 바로 곁에 멀겋게 서있는 별채로 무작정 걸음
을 옮긴다.
“별채라... 형님, 대체 이 저택은 별채가 몇 개나 될까요?”
강천비는 급히 금문택의 곁에 따라붙으며 질문을 던진다.
“글쎄. 집 규모로 봐서는 열 채도 넘겠다.”
“별채만 열 채 정도라니... 휴, 정말 대단한 갑부로군요. 그런데도 왜 자꾸 황실과
거래를 하는 걸까요? 이 정도 집에서 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 이젠 그만 편히
지내고 싶을 것 같은데 말예요.”
금문택도 강천비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차다. 대강 이유를 들어 보자면, 중원 10대 갑부가 되고
싶다거나,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든다거나, 요긴하게 투자를 할 데가 있어서 정도 아니
겠느냐?”
“음... 솔직히, 그 어르신 얼굴을 봐요. 재물 욕심은 없는, 선한 얼굴이잖아요. 형님
추측대로라면 두 번째 추측이나 세 번째 추측이 가장 유력하겠는데요?”
“역시 그렇겠지? 자, 자. 그 생각은 일단 접어놓기로 하고, 저기로 들어간 다음에 술
이라도 마시면서 얘기를 좀더 나눠 보자. 여기서 쑥덕공론 해봤자, 우리에게 득 될 건
없어.”
강천비는 금문택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러
자 금문택은 짓궂을 얼굴을 하고는 먼저 앞으로 걸어나간다.
“앗? 같이 가요, 형님!”
“난 걷고 있잖아. 왜 혼자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거냐? 고민은 저기서 술이
나 마시면서 하자니까?!”
벌써 4장 정도는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금문택은 어이가 없다는 듯 가슴을 두드린다.
강천비는 황급히 그런 금문택의 뒤를 좇아 열나게 달려간다.
한편, 저택 본채에 도착한 한성도와 사문도는 시비가 두고 간 안주와 함께 술을 마시
고 있는 중이다.
“어르신, 천천히 드십시오. 얹히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렇게 먹어대시는 겁니까?
”
한성도의 얼굴은 이미 저녁놀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취기가 물씬 느껴지고 있다.
꼭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변해버린 한성도의 얼굴에, 사문도는 얘기가 제대로 될까
걱정된 나머지 넌지시 충고를 건넨 것이다.
“큭큭... 자네 말을 들으니, 그 친구가 생각나는군.”
누구를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문도기에, 사문도는 입을 다물고 한성도의 말에 귀
를 기울인다.
“벌써 20년도 더 전의 일이로군. 내가 이렇게 술을 막 마셔대고 있으면, 자네 부친이
날 보고 하는 말이 있어서. 언제나 똑같은 말이었지. ‘체할라, 좀 천천히 마셔라’
는...”
“...”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거야. 지금 자네 모습, 그때 그 친구와 정말 많이 비슷하다고
. 처음 조카를 꾸짖다가 보고, 정말 놀랬다니까.”
한성도는 다시 여아홍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다가, 문득 서글픈 얼굴로 사문도를 직시
하며 현재 자신의 심정을 계속해서 털어놓는다.
“그렇게 친했는데... 피를 나눈 형제만큼 사이가 괜찮았는데, 그 친구는 먼저 가고..
. 나는 그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으니...”
죽은 부친 이야기가, 사문도에게 반가울 리는 없다. 하지만 방금 전에 한성도가 던진
말,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다’는 말이 사문도를 의혹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약속을 저버리셨다니... 선친과 무슨 약속이라도 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한성도는 눈을 감고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사문도가 궁금해 하는 이야기보따리
의 끈을 천천히 끌어 젖힌다.
“... 약속했어. 만일 그 친구의 아이와 내 아이가 타성(惰性)일 경우에는, 나중에 그
아이들이 장성하게 될 때... 혼례를 시켜주기로...”
“!!”
한성도가 꺼낸 말에 어느정도 취기로 어른거리던 사문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
게 질린다.
“태, 태... 태중혼약(胎中婚約)을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선친과 어르신께서...?!”
“결코 거짓이 아니라네. 취중에 짓ㄱ는 헛소리도 결코 아니고.
자네가 장성산 걸 보니... 아니, 작년에 날 찾아왔을 때부터 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
던 이야기야.”
“...”
사문도는 격한 감정으로 인해 팔이 덜덜 떨리고 있다. 그 와중에도 한성도는 사문도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하려던 말을 털어놓는다.
“천마궁에서 무종이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결코 그 친구의 혈족이 살아남
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왔어. 아니, 당연히 몰살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
“지금 와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어르신?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중원무성주 독고천의 계략에 의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
셨으면서도... 그놈 아들에게 딸을 내주기로 하셨다는 점도 저는 이해할 수 없을뿐더
러, 지금 와서 갑작스레 그 이야기를 꺼내신 것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때 내 입장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네. 화경이는 하루하루 죽어 가는데, 그 아비
란 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기나 하는가? 치료
책도 없다고 하니, 약도 구할 수가...”
“어그래서 생각해내신 것이 독고명응과의 혼인입니까?”
“어디까지나 말해두겠네만, 화경이가 수긍했을 뿐더러 독고명응이 간절히 청혼해 왔
기 때문에 난 거절할 수가 없었어. 죄는 독고천에게 있지만, 그 아들인 독고명응에게
는 무슨 죄가 있겠는가?”
안 그래도 술 때문에 익은 사문도는 한화경의 일에다가 독고명응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열이 북받히는 몽양인지 가슴을 퍽퍽 두드린다.
“후... 좋습니다. 저라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백번 어르신처럼 했을 겁니다. 그
럼, 그 선친과 약속은 그렇다 치고... 지금 와서 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시는 겁니까
? 왜 천마궁 재건 문제로 한창 심란한 제 맘을 몰라주시는 겁니까?”
한층 격앙된 사문도의 반응에도, 급기야 한성도는 텅 빈 술병을 밖에 내던진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려던 찰나, 한성도는 바닥으로 고개를 수그리고는 기가 찬다
는 어투로 다시 말을 갖다 붙인다.
“기가 차서... 나도 믿기지가 않네.”
“대체 뭐가 기가 찬다는 말씀이십니까?”
“검을 완성시키고 화경이를 만나러 북경까지 갔다네. 혼례를 거절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만나봤더니 글쎄, 화경이가 자네 때문에 혼례를 거절했다는 게 아닌
가? 그러니 기가 찰 노릇 아니겠는가?”
방금 한성도가 내뱉은 말에 의해, 분노와 답답함으로 열기를 뿜어내고 있던 사문도의
두 눈동자가 돌연 빛을 잃는다. 사문도의 눈동자에 현재 내비치고 있는 것은 고개를
수그린 채 처연한 모습으로 몸을 떨고 있는 한성도의 모습뿐이다.
“저... 저 때문에 청혼을 거절한 채, 지금 독수공방(獨守空房)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
니까?”
“믿기 힘들지 모르겠어나, 사실이야. 독고명응의 말을 들어봐도, 화경이가 밤낮 자네
생각만 하고 있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고 하더군.”
불현듯 사문도는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그냥 눈을 감아버린다. 머릿
속에서는 온갖 잡음이 웅웅거리고 있어서, 사문도는 흡사 빛 한줄기 안 보이는 구렁
속에 빠진 듯한 느낌마저 들고 있다.
“자네에게 부탁이 있다네. 들어줄 수 있겠는가?”
한성도가 결연한 눈빛으로 사문도의 면전으로 시선을 돌리지만, 사문도는 이마를 짚은
채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부탁이라면, 따님에게 찾아가서 그만 날 잊어 달라는 말 정도만 하고 오면 충분하겠
습니까?”
사문도는 이제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이마를 꾹 누른 채 아무렇게나 말을 내던진다.
그러나 한성도의 입에서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대답이 떨어진다.
“자네가... 자네가 내 딸을 맡아줄 수는 없겠나?”
한성도의 폭탄선언에, 사문도는 눈을 번쩍 뜨고 입을 딱 벌린다.
“바, 방금... 제정신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취중에 하는 말이 아니니 잘 들어주게.
알다시피, 내 딸 화경이는 앞으로 1년도 살 수 없는 몸이라네. 기껏해야 8개월 정도밖
에 시간이 없단 말일세. 그간만이라도 자네가 화경이의 곁에 있어주게나. 화경이가 남
은 기간까지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네.”
사문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간곡하게 청하는 한성도를 보고, 입을 꽉 다물고는 심각
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긴다.
“자네가 어떻게 대답해도 좋네. 안 그래도 훗날이 급한 자네에게, 무리해서라 내 딸
을 데리고 있어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사문돈느 타오르는 열정을 잠재운 채 진지한 눈길로, 젖어가는 한성도의 눈망울을 요
모조모 살피고 있다. ‘한화경을 거절하겠다’는 말이 떨어질 경우에는 금세 구슬 같
은 눈물을 떨어트리기라도 할 듯한 얼굴이다.
시한부 인생인 딸을 어떻게든 치유시켜 주려고, 천하 방방곡곡의 의원들에게 수소문을
한지도 벌써 1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모든 의원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천음절맥은 하늘의 저주로 만들어진 저주받은 병이
니, 모두 마지막이라도 편안히 지내게 해 주라는 말 뿐이었다.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잠든 딸의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오열을 해야 했는지 모른다. 흐느끼고 나서 몇 번씩이나 치유책 찾는 일을 포기해야겠
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성도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사람
처럼 다시 치유책을 찾는데 열중했다.
한화경이 북경으로 떠나고 나서도, 한성도는 계속해서 치료책을 찾아보고 또 찾아봤다
. 이미 어느 의학서적에는 어떤 병의 치료법이 나와 있다는 것까지 알 수 있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는데도 한성도는 책을 뒤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
무지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살아가는 보람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화경이 떠난 지도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약속대로 사문도는 한성도
의 앞에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후후, 저한테서 원하시는 답을 원하고 싶기나 하신 겁니까?”
“??”
한성도는 무슨 말인가 싶어 사문도의 말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왜 따님이 다 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체념하고 계신 건지, 전 알 수가 없습니다
.”
“그, 그건...”
“후우... 말씀은 이제 됐습니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사문도가 딱 잘라 하는 말에, 한성돈느 눈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별안간 몰아치는
전율에 사시나무 떨 듯이 몸을 떨고 있다.
“자, 자네... 진심으로...?”
“사람의 인생이 걸린 일로 농담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리고... 음, 사실 천음절맥
을 치유할 만한 능력을 지닌 분의 거처를 알아냈습니다.”
충혈된 한성도의 눈에서, 다시 한번 불신의 기색이 뒤섞인다. 아니, 믿을래야 믿을 수
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16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천음절맥의 치유방안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써왔다
. 그런데 사문도는 한화경이 천음절맥이란 걸 불과 작년에 알았음에도 벌써 사람을 찾
았다고 하고 있느니, 한성도가 쉽사리 믿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자, 자네가... 어,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 덕택에, 말을 제대로 못하는 한성도를 바라보던 사문도는 헛기침을 몇
차례 하고는 어느 정도 감정이 풀린 얼굴로 말을 지어 나간다.
“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소저(小姐)처럼 착한 사람이라
면, 제가 아닌 누구라도...”
그 순간, 난데없이 입구 쪽에서 쇠그릇을 긁어대는 듯한, 그런 갈라지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때린다.
“백부님, 백부님!!!”
곧이어 한성도가 꼭 닫은 방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정욱이 문틈으로 실실 웃으며 전
표뭉치를 한성도의 앞에 툭 던진다.
“푸핫핫, 엄청나게 땄어요. 어젯밤 꿈이 좋더니만, 역시 엄청나게 벌었다니까요.”
한창 신나게 떠벌리던 한정욱은, 문득 사문도의 얼굴에 잔잔하게 떠있는 색다른 미소
를 보고는 한성도에게 거침없이 물어온다.
“어? 백부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백부님 안답게, 왜 그런 얼굴로 앉아 계신
거예요? 여기 사 소협이란 사람도 그렇고.”
“으하하핫핫핫!! 됐어. 희망이라도 있다면, 난 됐다네. 정말... 정말로...”
한성도는 지금 웃고 있지만, 보기 좋게 구릿빛으로 그을린 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다.
어찌 아니 눈물이 떨어지겠는가. 여태까지 그 희망이라도 찾아내기 위해 살아온 자신
이 아니었는가?
“어? 배, 백부님?!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뭐 잘못이라도...”
얼굴을 감싸쥐고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한성도를 보고서야 사문도는 알
게 모르게 엷은 미소를 짓는다.
‘아버님만큼이나... 정이 대단한 분이시다. 이런 분이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꼬..
.’
한성도의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한번 훑어본 사문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밖으
로 걸어 나간다. 그러자 한성도의 반응에 쩔쩔매던 한정욱이 돌연 사문도를 불러 세운
다.
“소협, 갑자기 백부님께서 왜 이렇게 기뻐하시는지 이유라도 좀 가르쳐 주겠소?”
한정욱의 질문에, 사문도는 눈웃음을 치고는 조용히 입을 연다.
“아마... 어르신의 따님이 말이오, 어쩌면 천음절맥을 치유할 수 있게 됐다는 희망
때문일 것이오.”
사문도는 그 말만 남기고는 다시 바깥으로 발길을 돌린다. 한성도를 달래던 한정욱은
사문도가 남긴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다가 흠칫 놀라게 된다.
‘어르신 따님? 그럼, 누님의 절맥을 치유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한성도는 사문도의 묘한 눈웃음을 떠올리고는 속으로 의구심을 품는다.
‘과연 뭘까, 그 눈웃음의 의미는... 설레 있다고 해야 되나, 기뻐 보인다고 해야 되
나. 대체 어떻게 평가해야 되는 거지?’
하지만 한정욱이 그 묘한 눈웃음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랑’이란 감저
엥 한번도 빠져본 적이 없는한정욱이기에.
별채에서 사문도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다급한 모습이 아닌, 느긋한 모
습이 엿보이고 있다. 성인(成人)이라 술에 그다지 취하지 않는 금문택은 좀 덜한 모양
이지만, 아직 나이가 적은 강천비는 벌써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드러나고 있다.
“형님, 형님. 주군께서는 왜 우리를 떼어 놓으시고 혼자 어르신과 계신 걸까요?”
문틈으로 화원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던 강천비가 던진 질문에, 금문택은 술잔을 놓아
둔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글쎄다. 뾰족한 이유는 모르겠다. 밝히고 싶지 않으신 일이라도 있으신 거 같은데?
”
“헤에... 주군께서 숨기실 일이래 봐야 별 일 있으실까요?”
“사람에게 누구나 비밀이란 게 있는 것 아니더냐? 여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고, 안
그러냐?”
“여인 문제라. 하긴, 그러고 보니 아까 대장간에서 어째 낯익은 사람의 이름을 들었
던 것 같은데...”
강천비가 비실비실 웃으며 하는 말에도, 금문택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강천비를 재촉하
고 나선다.
“주공께서 언급하신 것이냐?”
“아녜요. 저기,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뭐더라... 그, ‘화경’인가 하는 이름
은 말예요, 예전 형님을 만나기 전에 항주에서 두 번인가 들은 적이 있거든요.”
홍알거리며 다시 여아홍을 넘기는 강천비를 뒤로하며, 금문택은 ‘한화경’이란 이름
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어르신께서 언급하셨다면 따님일 확률이 높다. 그 이름을 주공께서 예전에 언급을
하신 적이 있다는 것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사문도의 마음을 태우고 있는 사람이란 게 바로 한성도의 딸
이란 결론이 나온다.
‘이거, 이야기가 점점 흥미로워 지는군. 주군께서 연모하는 분이 누군지 여태 궁금했
었는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그 단서를 얻게 되다니...’
금문택은 한창 한화경이란 존재에 심취해 있고, 강천비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 콧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여아홍을 계속 마셔대고 있다.
“응? 뭐야, 이거. 벌써 다 떨어진 건가?”
강천비가 술병을 이리저리 흔들며 혓바닥을 축이려고 용을 써 보지만, 그런다고 해서
없는 여아홍이 쏟아져 나올 리는 없다.
“형님, 술 다 드셨어요?”
“조금 남았을 건데. 마시려고?”
“흐흥, 네. 마셔도 괜찮겠죠?”
“... 그러던가.”
금문태근 시비가 놓고 간 안주를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한화경이란 미지의 인물에 대한
연구를 막 시작하려던 차다.
“응?”!
갑자기 창호지 문에 인영(人影)이 비치자, 금문택은 얼른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본다.
강천비는 능청스럽게도 술에 떡이 되어가기 일보직전인데도 계속 술만 찾고 있다.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자, 흑의를 걸치고 있는 멋진 사내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
어온다.
“주공 오셨습니까?”
금문택은 얼른 일어서서 인사하지만, 강천비는 배시시 웃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정말 멋지다.
“실례지만... 딸꾹!! 누구십니까?”
딱!! 동시에 사문도의 주먹이 강천비의 정수리에 직격으로 떨어진다.
“끄악!?”
강천비가 정신이 번적 드는지, 자리에 철푸덕 주저앉으며 멍한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
리 돌린다.
“쯧, 한심한 놈. 어째 술도 못하는 녀석이 그렇게 마셔대는 거냐?”
한심스런 눈길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사문도아, 보기 애처롭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
라보고 있는 금문택을 보고서야 강천비는 완전한 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 아아, 주군 오셨군요.”
“쯧쯧, 이제 정신이 좀 드는 모양이로군.”
사문도가 혀를 차며 묻자, 강천비는 쑤셔오는 정수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이맛살을
찌푸린다.
“크... 그런데 왜 이렇게 정수리가 쑤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꼭 한대 맞은 것 같은
...?”
“한대 맞았다. 지금처럼 헛소리 찍찍 하다가 말야.”
금문택이 귀띔해준 말에, 강천비는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술에 RH인 혀를 이리저리
굴린다.
“예? 감히 누가 절 때려요?”
“... 방금 전의 일이 기억도 안 난단 말이냐?”
사문도의 질문에 강천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휴... 넌 앞으로 절대 과음하지 마라. 술도 못 하는 녀석이 그렇게 술을 마셔 봐야
도움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아... 예, 주군.”
강천비의 대답을 받은 사문도는 방에 털썩 주저앉고는 벽에 기대어 버린다. 묘하게 들
떠 있는 듯한 사문도의 태도에, 강천비는 고개를 몇 차례 흔들다가 사문도에게 묻는다
.
“주군,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묘하게 들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만...
”
그러자 금문택도 강천비의 말에 고개를 rM덕이며 함께 묻는다.
“그러고 보니 천비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두 사람의 질문에 사문도는 피식 웃다가 단혼흑룡검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흥
미로운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간다.
“상세한 일은 나중에 종남산에서 밝히도록 하겠소. 일단은 이것만 알아 두시오.”
잠시 말을 끊던 사문도는 피식 웃더니 콧잔등을 한번 긁으며 이야기를 꺼낸다.
“실은 약혼했소. 어르신의 따님과...”
“예에?!?”
“야, 야... 약혼이라면, 그, 그 혼인 전에 하는 거 말씀하시는 것이...?”
금문택과 강천비가 동시에 비명을 내지른다. 그러자 사문도는 아미를 찌푸리고는 계속
해서 말을 해 나간다.
“근데, 이제부터가 관건이오. 사람은 중원무성에 있는데다가, 또 목숨이 8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인지라...”
개었다가 흐렸다가를 반복하는 사문도의 반응에,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주군. 그, 그럼... 종남산 만이 아니라 중원무성에도 다녀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
“그건 아니다. 북경에는 6, 7개월 정도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아. 일단은 종남산이 먼
저다.”
“종남산에, 그다지도 중요한 볼일이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렇소. 부인될 사람의 목숨이 연장되느냐, 시한부 인생으로 죽어 버리느냐가 종남
산에 걸려 있소.”
금문택과 강천비는 문가 더 물어보려고 하지만, 사문도의 저지가 둘보다 한층 더 빠르
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알아 두시오. 어쨌든, 내일 오시(午時)를 기준으로 종남산으로
떠날 터이니, 이제 오늘은 여독도 풀 겸 푹 쉬시오.”
“주공, 저희는 여기 계속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 말에 사문도는 고개를 내젓다가 잠시 한성도가 했던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러나 어디에도 두 사람의 거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음, 일단은 어르신을 뵈러 갑시다. 거기서 각자 오늘 머무를 방을 받은 뒤에 거기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사문도는 다시 한성도의 방으로 걸아가고 있다. 그러나 1년간 마음으로 끙끙 앓던 일
을 이제 고민하지 않게 됐는데도 사문도의 얼굴은 결코 밝지가 않다.
‘이제부터가 진짜 도박이다. 설사 화군백이란 분을 만나게 된다손 치더라도, 천음절
맥의 치유법을 알고 계실지 모르고 계실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게다가, 알고 계신다
고 하더라도 그리 쉽게 치유법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보장도 없고...’
하지만 도박의 주사위를 던지기로 결정해 버린 사문도의 눈동자 한구석에서는 처절하
리라 느껴질 정도로 굳센 오기가 쏟아 내리고 있다.
‘기다려라, 한화경. 날 기다리고 있다고 했으니, 기꺼이 중원무성까지 찾아가겠다.
기꺼이 널 받아들이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죽지만 말고 기다려 다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술시가 넘어갔다. 해시까지는 이제 반 시진도 남지 않았다.
“크핫핫핫, 오늘은 정말 뭔가 되는 날이라니까!!”
자욱한 향냄새와 숨이 탁 막힐 정도로 탁한 공기가 떠돌아다니는 이곳은, 중원에서도
꽤나 알아준다는 도박장이다.
주사위 도박장의 한쪽 귀퉁이에 현재 한정욱이 앙천대소를 터트리며 주변에 널린 은자
와 전표를 자기 쪽으로 끌어 모으고 있다.
세 판을 연거푸 1등을 한 덕택에, 한정욱은 한밑천 단단히 잡게 됐다. 은자 닷 냥으로
도박장에 들어갔다가, 이제 가지게 된 은자는 총 쉰 냥. 가진 돈의 열 배가 돼버린
것이다.
“여보게, 소협! 한 판만 더 하지 그러나?”
“한 판만 더 벌이세. 이번 판에 우리 집 한 달 치 돈을 전부 걸겠네!”
여기저기서 한정욱에게 흥정이 들어오지만, 한정욱은 거드름을 피우며 은자르 차곡차
곡 쌓고만 있다.
“흐흐흐, 오늘은 이만 떨어지렵니다. 너무 오래 있었거든요.”
한 시진에 한 판씩을 했다. 원래 평소 한정욱은 한 판만 하고 떨지는 성격이지만, 한
성도에게서 들은 말... 즉, 한화경이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실컷 즐기기로
한 것이다. 거기서 한정욱은 연전연승(連戰連勝)한 덕택에, 지금 벌어진 입은 양쪽
귀 끝까지 벌어져 있다.
‘이게 정말 웬일이냐? 평소 같았으면 스무 냥도 제대로 못 땄을 텐데. 쉰 냥이나 땄
으니, 역시... 이제 요령이 붙어선가?’
은자 열 냥짜리 전표는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은자 서른 냥을 들고 계산대로 사라지는
한정욱을 보는 사람들의 시산은 가히 뜨겁기만 하다.
“이런 젠장! 또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게 생겼구만. 으휴!!”
“하여튼, 여기 손을 들였다가는 돈이 자기 맘대로 나간다니까!!”
이런저런 소리를 듣고 있는 한정욱은 의기양양하게 은자 서른 냥을 계산대 앞에 턱 내
려놓는다.
“어떻게 해 드릴깝쇼, 손님?”
“흐흐, 은자 닷 냥짜리 전표 여섯 장으로 바꿔주쇼.”
“여기 있습니다요, 손님!”
전표 여섯 장을 움켜쥔 한정욱은 전표의 숫자와 개수를 검사해보고 씩 웃으며 계산대
에 앉아있는 점원에게 한마디 내던진다.
“돈 많이 버쇼. 오늘은 이만 갈 거요."
“예, 예. 살펴 가십쇼, 손님!!”
한정욱은 아첨 섞인 점소이의 배웅을 받으며 도박장을 빠져나간다. 어디론가 가는 길
에도 한정욱은 무슨 상상을 그리 하는지 괴소를 지우지 않고 있다.
‘백부님께 안 들어갈 거라고 해놓고 나왔으니까... 큭큭, 간만에 기루에서 몸이라도
좀 풀어볼까? 금향(金珦)이한테 안 가본지도 꽤나 된 것 같은데...’
현재 한정욱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파락호의 모습이다. 술에다, 도박에다, 여색까지
찾고 있으니 당연한 평가가 아니겠는가?
한정욱이 기루로 향하는 으슥한 골목길에 막 접어들었을 때다. 술병을 입에 문 채로
한성도의 자택으로 가는 길과 기루로 가는 길을 번갈아보던 한정욱은 피식 웃더니 기
루로 가는 길목으로 발길을 돌린다.
‘휴... 왜 내 인생은 완전 개판일까? 간만에 누님이나 마나보려고 올라왔더니, 이게
무슨 꼬라지냐?’
큭큭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는 한정욱의 입가엔 웃음이 걸려있으되, 퀭하니
우수(憂愁)에 젖어있는, 꼭 썩어가는 동태눈 같은 두 눈은 실연당한 사람처럼 음울(陰
鬱)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잘해 주시던 누님인데, 언제 말도 없이 북경까지...’
한정욱에게 있어 부모란 존재는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부친은 태어
나기도 전에 고깃배를 타러 나간 뒤로는 소식이 업고, 모친은 벌써 4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집안에 남아 있던 전 재산으로 막막하게 먹고 지내던 한정욱은, 결국 부친을 기다리는
일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반년 전 이맘때쯤 북상해서 지금 낙양의 한성도에게 신세
를 지고 있는 것이다.
‘흐흐흐, 누님이 지금 내 모습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힘내라고 위로를 해줄까
, 아니면... 같이 지내자고...’
“어이, 거기! 잠깐 좀 서라.”
누군가가 뒤쪽에서 지른 고함소리에 한정욱은 길고 길었던 상상의 바닷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뒤쪽으로 고개를 젖히고는 똑같이 고함을 지른다.
“뭐야? 어떤 자식이 감히 어르신께서 가시는 길을 막으려고 지랄 발광을 떠는 거야?
엉?”
한정욱의 맞고함에 그쪽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다시 고함을 꽥 지른다.
“저 새끼가 미쳤나? 임마, 똑바로 거기 안 서? 앙??”
“뼈 몇 개 정도 날려주자고요, 두목.”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봐서는 분명 숫자가 넷 이상이다. 한정욱은 몸을 완전히 돌려 자
신 쪽으로 다가오는 사내들을 보고, 길에 침을 퉤 뱉는다.
“니들, 뭐하는 새끼들이냐?”
“네놈들 같은 파락호 등쳐먹는 건달님이시다, 왜?”
“오, 건달이라... 큭큭, 시덥잖은 놈들이 씨잘데 없이 한다는 게 건달이냐?”
술병에 담겨 있던 백건주를 한번에 해치운 한정욱은 술병을 바닥에 세우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건달 쪽으로 당당히 걸어간다.
총 여섯이다. 하나같이 우락부락한 얼굴인데다가, 덩치까지 만만찮을 걸로 봐서는 필
시 보통내기들은 아니다.
“가진 거 순순히 나 내놓고, 딱 여섯 대만 맞자. 그걸로 끝내줄게.”
두목으로 보이는 듯한, 검은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청년이 섬뜩한 얼굴로 손가락을 소
리 내어 꺾으며 한정욱을 위협하고 있다.
“사나이다운 기상은 멋진데 말야...”
“흐흐, 뭐 아쉬운 거라도 있는 거냐?”
“응.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게 너희 놈들의 결정적인 실수다. 끄어억~!!”
트림을 하며 큭큭 웃어대는 한정욱을 보고, 건달 두목은 주먹을 허공으로 몇 번 휘두
르면서 웃음을 던진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우리 아버님이 누군지 알고 이러는거냐?”
한정욱의 말을 이들의 신경을 곤두세워 놓는다.
“흐흐, 그래. 잘나신 네놈 아비 이름이나 들어보자.”
이를 악물고 만반의 공격태세를 갖춘 그자의 얼굴에서 살기가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다
. 그러나 한정욱은 계속 어설픈 웃음을 짓다가 선의의 거짓말(?)을 죽 늘어놓는다.
“요번에 새로 동창의 대영반 자리를 맡으신, 양무철(楊珷哲)이 바로 내 아버님이시다
. 이래도 건들래?”
이 말은 분명 먹힐 거라고 생각했다. 동창의 대영반이라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자리란 걸 모르는 백성들은 없다고 봐도 괜찮을 정도로 유명한 자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별안간 한정욱은 눈앞이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는, 저만치 나
가떨어진다. 그자의 주먹이 왼쪽 뺨을 강하게 때렸기 때문이다.
“웃기는군. 네놈 아비가 황제(皇帝)라고 해도, 난 눈 한번 안 깜빡일 놈이다! 빌어먹
을 새끼!”
아직도 분에 겨운 듯이 펄펄 날뛰는 이 사내를, 주변 부하들이 뜯어 말린다.
“그만 해 두시오, 두목. 이번에는 어린 놈 아니오?”
“이러다가 정말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요?”
셋이 뜯어말리자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두목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욕을 퍼부어댄
다.
“빌어먹을 새끼! 난 너같이 권력으로 으스대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 감히, 권력에 기
대 날 어떻게 말아먹을 생각을 해? 참 웃기지도 않아, 젠장!”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한정욱을 보고서 그자는 침을 다시 탁 뱉고는 손가락을 내밀어
한정욱을 가리킨다. 짐을 뒤져보란 뜻이다.
한 청년이 한정욱에게 다가가 짐을 뒤지는 것을 보고 화를 풀기로 마음먹은 건달 두목
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가 근처의 부하들에게 낮게 속삭인다.
“한 놈만 더 턴다. 그 다음엔 어느 주막에 들어앉아. 코 비뚤어지도록 한잔 하자고!
”
“으흐흐, 당연히 그래야죠!”
“혹 모르죠. 저런 놈들은 돈이 많기 때문에, 의외로 더 안 털어도 될 수도...”
“크아아악?!”
바로 그때, 한정욱의 짐을 뒤지던 자가 입에서 게거품을 물더니 아랫도리를 움켜쥐고
는 바닥에 고꾸라진다. 동시에 한정욱이 맞은 볼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비틀비틀거리
며 일어선다.
“크으... 주먹이 제법 괜찮군 그래. 생긴 게 다르니 역시 주먹맛도 건실하단 말야.”
한정욱이 저지른 짓을 보지 못한 그들은 불신(不信)의 눈빛으로 쓰러진 동료와 반대로
일어선 한정욱을 번갈아 바라본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무슨 짓을 했길래 저 녀석이 힘도 못 쓰고 뻗어버렸단 말이
냐?”
한정욱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아 내고는 험악한 눈초리로 건달 하나하나를 노려보다
가 목소리를 깔고 낮게 소리를 지른다.
“네놈 하는 말이 너무 웃겨서, 그만 저 새끼 낭심을 한방 치고 말았다. 그러니 저렇
게 고꾸라지더라.”
낭심을 때렸다니, 굳건하게 서 있는 다섯 건달은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고는 서로 눈빛
을 주고받는다.
“한꺼번에 친다. 인정사정 보지 마라. 고꾸라진 저 친구처럼 안 되려면 말이다!”
“그럽죠, 두목.”
“맡겨만 주슈. 저런 애송이쯤이야 장난감이오.”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한정욱은 트림을 꺽 하고는, 잔잔한 물결 같지만 얼음처럼
차갑기만 한 냉소(冷笑)를 지으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래, 다 덤벼라. 광동성(廣東省) 사나이의 의지를 보여주마!”
한정욱이 태어나고, 또 자란 곳은 명 아래에 있는 광동성이다. 어릴 적부터 고생을 하
면서 자라온 한정욱은, 맷집 하나만큼은 광동성에서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소년으로 자랐다.
방금 전에도 정신을 잃기는커녕 기절한 ‘척’만 하며 상대가 짐을 뒤지러 오기를 기
다렸다. 그리고 짐을 낚아채려던 찰나를 노리고 번개처럼 주먹을 날려 잔인(?)하게 낭
심을 쳐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바닥에는 도합 세 명이 게거품을 문 채 낭심을 움켜쥔 채로 바닥에 쓰러
져 전신을 부르르 떨고 있다. 거기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버린 한정욱은 끈질기게 남
은 셋의 공격에 버티고 있다. 가히 전율스러운 한정욱의 모습에, 건달 셋은 결국 치를
떤다.
‘괴물보다 더한 맷집이다. 이놈은 대체 어디를 때려야 시원하게 고꾸라진단 말야, 이
거?’
오뚝이보다도 끈질기게 달려드는 한정욱의 필사적인 태도에, 그들은 한결같이 속으로
외치고 있다. 오늘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다고.
“흐아압!!”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한정욱이 소리를 지르며 발을 뻗어 한 건달의 면전을 후려 찬
다. 그러자 그 건달은 코가 부러졌는지, 쌍코피를 쏟아내면서 바닥에 고꾸라진다.
“크어억, 코! 내 코!!!”
한정욱은 코뼈가 부러진 건달의 비명도 무시하고괴물같은 맷집으로 계속 두 명의 건달
을 쓰러트리려고 달려들고 있다.
‘공격 기술은 평범한데... 저 괴물보다 더한 맷집 때문에...!!’
건달 두목은 벌써 한정욱을 열 번도 넘게 쓰러트렸다. 그러나 한정욱은 그때마다 계속
해서 일어서면서, 약간 부어오르기만 한 얼굴을 매만지다가 다시 황소처럼 달려들기를
반복하고 있다.
“흐흐흐흐, 분명히 난 말했었다. 광동성 사나이의 의지를 보여주겠다고!”
한정욱은 옷소매로 얼굴 여기저기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소리친
다.
“네놈들같이 뒷골목 깡패 수준밖에 안 되는 놈들이 건달이라고 자칭하는 게 아니다.
진짜 건달이라면, 취객들 삥이나 뜯고 하는 하찮은 일은 안 해. 그걸 알기나 알아? 앙
??”
여유를 부리며 한발씩 건달 두목에게 다가가는 한정욱의 얼굴엔 추호도 용서
치 않겠노라는 결연한 의지가 비치고 있다.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었고, 먼저 막말을
해댔기 때문이지, 자신이 먼저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으흐흐, 너도 화끈하게 터트려 주마. 마누라한테 욕이나 실컷 얻어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친절히 특별 조치를...”
“으아앗!! 죽어 버려라, 빌어먹을 애송아!”
코가 부러져 바닥을 뒹굴던 그 건달이 바닥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주먹만한 바위를 들
고 귀신처럼 눈을 부라린다. 한정욱의 머리를 찍어버리기 위해 죽자 사자 달려들고 있
는 그 모습이, 가히 귀신 이상으로 섬뜩하다.
“흐읍!”
한정욱은 가까스로 그 공격을 피해내긴 했찌만, 머리만 얼른 숙여 피해냈던지라 그만
왼쪽 어깨를 찍히고 만다.
“윽, 빌어먹을!!”
낮긴 하지만, 처음으로 신음을 흘린 한정욱은 울컥 치솟아 오르는 열기를 제어하지 못
하고, 오른쪽 팔꿈치로 그 건달의 코를 다시 찍어버린다.
“끄어억!!!”
결국 그 건달은 코를 짓이기는 듯한 고통을 감당해내지 못하고 핏덩어리를 울컥 쏟아
내더니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러자 건달 두목은 한정욱이 한눈을 판 틈을 놓치지 않고, 겁나게 무서운 속도로 다
리르 쭉쭉 뻗어 공격을 개시한다. 목표는 당연히 한방 찍힌 한정욱의 왼쪽 어깨다.
‘퍽’하고 건달 두목의 발이 한정욱의 어꺠를 찍는다. 그러자 한정욱은 오만상을 찌
푸리고는 급히 오른손 팔꿈치를 요모저모로 이용해 공격을 저지하고 있다.
건달 두목은 안 되겠구나 하고, 발에 힘을 더해 한정욱의 오른팔을 멀리 튕겨 버린다.
감전된 듯한 통증에, 한정욱은 손이 마비됐는지 곧바로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건달 두목의 왼발이 한정욱의 턱뼈를 아래쪽부터 걷어 차 올려 버린다.
비명을 참은 건지, 아니면 지르지 못한 건지 어쨌든 한정욱은 바닥에 큰 대(大)자로
널브러진다. 그렇게 되기가 무섭게, 건달 두목의 오른발이 한정욱의 면상에 직격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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