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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석희씨가 제주시 애월읍 집 뒤 정원의 소나무 분재 옆에 앉아 쉬고 있다. 태풍에 기울어진 소나무와 향나무가 그의 뒤로 보인다. |
(25)번역가 김석희의 제주 애월 집
대중적으로 이름 알린 책은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애월 집터 살 번역인세 안겨준
힐러리의 <살아있는 역사>는
가장 수입이 좋았던 책이다
“예순여섯쯤 되면 은퇴하고
서당을 차릴까 해요
책읽기와 글쓰기를 가르쳐서
소설가라도 한명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최아무개는 비를 몰고 다닌다!’ 이 연재물을 꾸준히 챙겨 읽는 어떤 독자가 전한 날카로운 독후감(?)이었다. 올해가 유난히 비가 많은 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의 주인공을 만나러 길을 나설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린 것은 사실이었다. 하동의 박남준, 논산의 박범신, 강릉의 김선우, 거문도의 한창훈, 다시 강릉의 이순원…. 정유정이 있는 지리산에서는 태풍을 만나기도 했다.
번역가 김석희의 제주 집을 찾는 여정 역시 세 개의 태풍 틈새를 뚫는 모험이었다. 본디 예정은 8월 말이었는데, 모양 빠지게 15호 볼라벤의 뒤꽁무니를 쫓아온 14호 형 태풍 덴빈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하면서 두 주 뒤로 늦춰야 했다. 2주를 기다렸다가 우산을 쓰고 간신히 제주 출장을 다녀오자 이번엔 16호 태풍 산바가 제주를 거쳐 한반도를 덮쳤다. 태풍에 갇힌 채 집 안에서 기사를 쓰고 있자니 비와 함께한 지난 여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스무살에 떠나 환갑 즈음에 돌아오다
볼라벤과 덴빈이 연이어 할퀴고 간 지 열흘여 뒤, 제주에는 태풍이 남긴 상흔이 뚜렷했다. 건물의 대형 전광판이 파괴되었고, 길 곳곳의 신호등과 표지판이 망가졌으며, 비닐하우스는 보기 흉하게 찢긴 모습이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가인 집’ 역시 파괴되어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고, 집 앞 해안가 도로는 곳곳이 파이고 무너진데다 바위와 경계석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어 위험해 보였다.
김석희가 살고 있는 애월 집에서도 태풍이 훑고 지나간 손길을 만날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하고 앉은 집의 뒤쪽 정원에 그는 수십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그중 키가 큰 향나무와 소나무는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서 지지대를 설치해 놓았다. 된바람이 밤새 마사지하고 지나간 두 나무의 잎들 역시 고산 지대에서처럼 한쪽으로 쏠린 채 펴지지 않았다. 데크 기둥을 타고 오른 다래 줄기는 바람에 잎이 다 떨어져 내린 뒤 새롭게 올라온 어린 잎들이 앙증맞았다. 제주 사람인 김석희조차 “이번 태풍만큼 심한 바람은 평생 본 적이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줄곧 서울과 인천에서 살아온 김석희는 2009년 4월6일 저녁 이삿짐을 실은 배에 타고 인천을 출발해 이튿날 아침 제주항에 도착했다. 1970년 2월 말 대입 시험 재수를 위해 고향 제주를 떠난 뒤 햇수로 꼭 40년 만이었다. 제주시 출신인 그는 2000년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서쪽 애월읍에 집터를 마련하고 2008년 설계와 착공을 거쳐 2009년 집이 완공되는 것에 맞추어 귀향을 결행했다.
“서울이나 인천에 살 때에도 객지에 뼈를 묻을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제주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누이들도 있으니까, 한쪽 귀는 늘 제주를 향해 열어 놓은 셈이었죠. 원래는 예순이 넘어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2006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되시면서 결행 시점을 당긴 것이죠. 그래도 막상 오랫동안 살아온 육지를 떠나려니까 많이 망설였는데, 일을 저지르듯 집을 짓게 되면서 완공 시점에 맞추어 돌아오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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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김석희씨가 애견 천둥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제주/신소영 기자 |
서울대 불문과를 거쳐 대학원 국문과를 중퇴한 뒤 용돈벌이 삼아 소소한 번역은 몇 권 했지만, 김석희가 자신의 첫 번역으로 꼽는 것은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이 4·3을 소재로 쓴 소설 <화산도>다. 1987년 이 소설을 번역하는 한편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신춘문예에 낼 소설을 준비했다. 신춘문예에는 그동안 여섯 번을 응모했는데, 매번 예심은 통과했지만 본심에서 떨어졌다. 그게 더 사람을 약 올렸다. 이번에도 안 되면 산에 들어가거나 아예 제주로 내려간다는 각오로 응모했는데, 그런 오기가 전달됐던지 마침내 당선 통보를 받았다. 1988년 새해 벽두였고, 그해 4월3일에 맞추어 <화산도>도 출간되었다.
대부분의 번역가가 하나의 언어를 전문으로 삼는 반면 김석희는 영어와 일어, 불어 등 세 언어를 병행한다. 지금까지 300권 가까이 한 것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영어가 절반 가까이에 이르고 일어가 30%, 불어가 20%란다. 책에 따라 분량의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대략 한 달에 한 권꼴. 매우 높은 생산성이다. 그는 높은 생산성의 비밀이 ‘시간과의 싸움’에 있노라고 했다.
“번역은 두 가지 의미에서 시간 싸움이라 할 수 있어요. 첫째,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있으면 그만큼 많은 양을 할 수 있어요. 둘째, 오래 할수록 질도 높아지죠. 사실 제가 젊은 시절에 한 것 중에는 지금 보면 설익었다 싶은 것도 없지 않아요.”
한달 한권꼴, 높은 생산성의 비밀
‘김석희 번역’의 생산성에 감추어진 또다른 비밀은 그가 부인과 함께 작업한다는 데에 있다. 그의 애월 집은 일층에 거실과 침실 등이 있고 이층 양끝에 두 개의 작업실이 있는데, 그와 부인 조혜경씨가 각각 쓰는 방이다. 부인은 영어와 일어를 하는데, 부인이 초고를 잡은 번역 역시 최종적으로는 김석희의 감수를 거쳐서 그의 이름으로 나온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의 눈에는 불편하게 보일 이런 ‘시스템’은 물론 부인의 전적인 동의 아래 굴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소설가인 내 이름으로 나오는 게 책 판매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아내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데에 관심이 없다”고 김석희는 설명했다.
김석희의 ‘대표’ 번역 목록을 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1997년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받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전 15권)가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라면, 그에게 애월 집터를 살 번역 인세를 안겨준 힐러리 클린턴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는 수입이 가장 좋았던 책으로 기억한다. 여기에다가 홋타 요시에의 <고야>와 <몽테뉴>,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존 파울스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 허먼 멜빌의 <모비딕>, 그리고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같은 ‘쥘 베른 컬렉션’ 등 굵직한 타이틀만도 여럿이다. 올여름에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일본 작가 사토 겐이치의 <소설 프랑스혁명>(4권)이 그의 이름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중에서도 그가 첫손에 꼽는 작품은 지난해 나온 <모비딕>이다.
“우선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까다롭기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코피가 안 터진 게 다행이었을 정도예요. 고래와 포경에 관련되는 특수한 어휘들은 애교라 해도,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멜빌이 구사하는 독특한 표현들, 그리고 셰익스피어나 성서에서 유래한 숱한 비유들이 번역자에게는 일종의 시험이 되었죠. 일어 번역과 불어 번역을 참조한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 경험을 보더라도 번역을 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주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도 한둘은 알고 있는 게 좋다고 봅니다.”
부인과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 말고도 김석희 번역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그는 번역을 하기 전에 전체 텍스트를 통독하지 않는다. “다 읽고 나면 막상 번역할 때 긴장과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보통은 전체를 통독하면서 작품의 분위기와 어조를 잡은 다음 실제 번역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김석희 정도의 경험과 내공이라면 이런 방식도 가능한가 보다. 덕분에 번역하는 동안 앞뒤로 몇 번씩 오가면서 어법과 말투를 고치기 일쑤지만, 독자로서의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런 방식을 고집한다. 다음으로, 그는 반드시 역자 후기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자 후기를 모은 책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과 <번역가의 서재>는 그 결과물의 일부다.
“역자 후기는 우선 저자와 책에 대한 예의라 할 수 있어요. 책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에요. 다음으로, 역자 후기는 번역자로서 저의 흔적을 의미 있게 남기는 방식이기도 하죠. 역자 후기를 쓰면 절반 정도는 저의 책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는 좋은 번역책을 고르는 기준으로 ‘공들여 쓴 역자 후기’를 꼽았다. “내 경험상 공들여 번역한 책에는 역자 후기도 그만큼 공을 들여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번역을 ‘장미밭에서 춤추기’에 견주곤 한다. 요컨대 고통 속의 쾌락이 번역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번역은 지겹다면 아주 지겨운 작업이에요. 그래도 거기에 재미가 없지는 않죠. 무엇보다, 저처럼 소설가를 지망했다가 좌절한 사람에게는 글쓰기의 욕망을 달래 주는 효과가 있어요. 그리고 번역은 항상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재미가 있죠. 문체나 주제나 세계나,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때면 항상 설렘과 긴장이 함께 오는 거예요. 그런 게 번역의 매력입니다.”
아주 지겨운 번역, 아주 재미있는 번역
그럼에도 번역을 하나의 직업으로서 권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일단 회의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현실적인 문제가 있죠. 번역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에요. 그 실력이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낫죠. 그리고 외국어 좀 안다고 누구나 번역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글쓰기 실력이 겸비돼야 하죠.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라도, 소박하게 글쓰기를 겸해서 한다면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번역이에요. 어느 정도 신망이 쌓이면 먹고살 만한 수입도 기대할 수 있구요.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기보다는 수입에 더 많이 의존하는 나라니까 번역에 대한 수요도 앞으로 더 많아질 거예요. 그런 점에서는 전망이 있는 셈이죠.”
올빼미 체질인 그는 새벽 네다섯 시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오 무렵에 일어난다. 20년 전부터 하루 한 끼만 먹어 버릇했다는 그는 공복 상태로 책을 읽거나 번역 작업을 하다가 오후 네다섯 시에 하루의 유일한 끼니를 챙겨 먹는다. 밥을 먹고 나면 집 서쪽 소나무밭이 그늘을 드리운 정원에 나가 나무에 물도 주고 잡초도 뽑으며 한두 시간 노동을 한다. 두 살 반 된 ‘강아지’ 천둥이와 놀아 주는 것도 이 시간이다. 지인들과 술 약속이 있으면 약속 장소로 나가고, 약속이 없으면 다시 이층 작업실로 올라가 책을 읽고 번역을 한다. 자정 무렵 눈이 침침해지면 일층 거실로 내려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 보다가 마음에 드는 영화가 있으면 보기도 한다. 이때 홍초에 물과 소주를 타서 먹는 ‘홍초 칵테일’을 홀짝이며 떡이나 과일 같은 군음식을 챙겨 먹거나 아예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한다. 텔레비전 시청이 끝나면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잠들기 전까지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지금 4권 이후로도 계속 이어지는 <소설 프랑스혁명>과 살만 루슈디의 어린이물 <루카와 생명의 불>을 번역하고 있다. 내년까지는 작업 일정이 꽉 차 있는데, 그중에는 셜록 홈스 청소년판도 포함되어 있다. “손자를 보고 나니까 이 아이가 크면서 읽을 책을 번역하고 싶더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해 9월17일 태어난 손자는 마침 돌잔치를 앞두고 애월 집에 와 있었다. 필살의 눈웃음이 매력적인 이 작은 생명체에게 할아버지 김석희는 푹 빠져 있었다. 물에 닦인 보석처럼 빛나라는 뜻을 담은 한자 이름 ‘하진’(河珍)도 직접 지어 주었다는 그는 돌잔치의 주인공에게 주는 편지를 쓰느라 고심 중이노라고 했다. 지난 연말로 회갑을 맞기도 한 그는 “나름 들끓는 삶이었지만, 손익을 계산해 보면 크게는 안 남아도 그럭저럭 잘 살았구나 싶다”며 “가장 크게 남은 게 바로 이 집과 손자”라고 말했다.
예순여섯 살 즈음 ‘직업으로서의 번역’에서 은퇴할 예정이라는 그는 은퇴 뒤의 계획으로 크게 두 가지를 소개했다. 서당을 여는 게 그 하나고, 위키피디아 한글판을 위한 번역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게 그 둘이다.
“서당이라고 해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게 아니라, 중학생들을 모아 책도 읽히고 글도 쓰게 하고 싶어요. 아이들이 문학적 소양을 지니고 성장하도록 돕고 그 가운데서 시인과 소설가라도 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위키피디아는 영어판과 일어판의 항목들을 번역해서 한글판에 싣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번역하면서 영어판과 일어판 위키피디아의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그 빚을 갚는다는 의미도 있을 것 같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