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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심형진(沈衡鎭)
1) 축 징병제실시
京畿道 京城府 花洞町
扶桑87)이 온통 봄이니 槿花88)에도 꽃이 피네 扶桑春遍槿花叢
恩雨 내리시는 어진 하늘은 一視同仁하시는도다 雨露仁天一視同
정의를 행하고자 군대의 行伍에 들어가 仗義身編行伍裹
사심을 없애고 마음을 비워 봉공하리라 滅私心罄奉公中
이같은 황은 어찌 보답하리오 皇恩如此那由報
신하의 도리 다른 게 아니라 충성을 다하는 것뿐 臣道無他在盡忠
청년들은 훈련일 기다리고 待到靑年精鍊日
이천만 백성들 기세등등하도다 二千萬衆是羆熊
<출전 : 沈衡鎭, 「祝徵兵制實施」, '國民總力' 제4권 11호, 1942년 11월, 76쪽>
2) 축 싱가폴 함락
玉蘇 沈衡鎭
위엄무쌍한 황군께서 멀리 출정을 나가시어 威武皇軍遠出征
87) 일본.
88) 조선.
칼 앞에 미국을 무찌르고 또 영국을 무찌르셨네 劒前屠米又屠英
정의는 원래 약탈이 있는 곳에 있는 게 아니며 正義元非存略奪
간사스런 영욕을 없애고 평화를 보전하는데 있네 除奸永欲保和平
매가 날아오르니 꿩들이 마침내 숨기가 어려우며 鷹掦雉子終難匿
虎吼에 양떼들이 감히 싸우지를 못하네 虎吼羊群莫敢爭
낭연히 獅港에 천하가 맑게 개니 朗然獅港晴天下
세계에 욱일(승천)기가 더욱 빛나는구나 世界光輝旭日旌
<출전 : 沈衡鎭, 「祝新嘉坡陷落」, '半島の光' 제53호,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2년 4월, 23쪽>
3) 감사황군
황군이 도처에 위명을 떨치시니 皇軍到處振威名
宇內睲塦을 깨끗이 치우시네 宇內睲塦盡掃淸
鯨鯢의 힘이 커 江河가 움직이고 鯨鯢力大江河動
虎豹소리가 높으니 초목이 놀라네 虎豹聲高草木驚
국난 전쟁을 도우고저 양 □이 중하니 國難爭扶兩□重
군의 은혜 보답코저 이 몸을 가벼이 여기네 君恩欲報一身輕
正으로 잔당을 제거하고 세상을 구하시니 正是除殘兼濟世
동양민족이 함께 기뻐함이라 東洋民族共歡情
<출전 : 沈衡鎭, 「感謝皇軍」, '半島の光' 제43호, 1941년 5월, 43쪽>
4) 도(悼) 야마모토 원수
함대를 태평양에 띄워 艨艟泛駕太平洋
혁혁한 皇威를 사방에 떨치며 赫赫皇威躍四方
용감함으로써 백승하고 敵窟을 찌르니 勇以百勝衝敵窟
의로운 장수가 一死하여 군왕께 보답하네 義將一死報君王
남아가 이미 영웅의 일을 다하고 男兒已畢英雄事
우주에 길이 머무르며 일월보다 빛나니 宇宙長留日月光
원수정령이 어둠에서도 우리를 도우사 元帥精靈冥裡助
英米를 섬멸함이 探囊과 같구나 屠英殲美似探囊
<출전 : 沈衡鎭, 「悼山本元帥」, '半島の光' 제67호,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3년 7월, 42쪽>
4. 장지연(張志淵)
1) 병합 후의 조선민족(사설)
조선민족은 종전의 권리를 잃음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문명한 법률 아래에서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안전히 하고 인선(仁善)한 정치 하에서 지식과 산업의 증진을 계도(計圖)하게 되었으니 무릇 병합의 실질은 이전 한국의 악정(惡政) 하에 있던 국민의 통치권을 인성(仁聖)한 일본천황께 위임함에 불과한즉 실은 망국의 유민됨이 아니라 일약(一躍)하여 세계의 일등국민의 열(列)에 참가함에 이른 것이오…… 조선민족은 인선한 정치 하에서 충애심을 함양하여 일등국민되는 지위를 공고하게 하고 법치국민이 되는 권리를 획득하여 총독의 고심(苦心)하는 바를 고부(孤負)치 아니함이 가하지 아니한가.
<출전 : 「朝鮮民族觀(10)-倂合後의 朝鮮民族(社說)」, '매일신보', 1914년 12월 6일>
2) 조선풍속의 변천
총독부에서 신정(新政)을 시설한 이래로는 □□히 구폐(舊弊)를 개혁하고 신화(新化)를 선포함에 있어 조선 구습(舊習)의 풍속도 점차 개량되어 변천하는 경우에 이르렀도다.
그 한두 가지를 시험 삼아 말해 보건대, 첫째는 조선의 관습상 벌열계급(閥閱階級)의 풍습을 타파하여 평등의 사상을 유치(誘致)하고, 그 다음 양반 부녀가 규방에서 갇혀 있던 것을 개방하여 자유로이 문 밖으로 나가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또 일반 부녀자들이 출입할 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 하늘의 해를 볼 수 없게 하던 폐습을 고쳐 얼굴을 가리는 풍습을 없애버리고 마음대로 출입하여 하늘의 해를 다시 보게 하고, 묘지령(墓地令)을 발포(發布)하여 투장(偸葬) 남점(濫占)의 악폐를 제거하며, 산송(山訟)이란 풍습을 간단히 소송이 없게 변화시켰으며, 그 밖의 혼인상제(婚姻喪祭)의 일체의 번문복례(繁文複禮)도 점차 변개(變改)하여 간이(簡易)한 데 이르게 하였으니, 공자가 이른바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게 할 것이요, 상(喪)은 슬픔이 없고 예만 지키는 것보다는 슬퍼하고 예가 부족하게 하는것이 낫다.”(禮與奢也寧儉, 喪與其易也寧哀)라 하신 것이 꼭 신정(新政)과 서로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출전 : 嵩陽山人, 「朝鮮風俗의 變遷」,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
3) 본사의 시회 발기
오는 16일(토요일) 하오 3시에 본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시회(詩會) 발기인회를 개최하는 터인즉, 발기인 되시는 이는 그 시간에 맞추어 오실 것을 바랍니다. 발기인은 본사에서 임의로 추천하였으되, 그 성명은(無順) 박제빈(朴齊斌)·장지연(張志淵)·유근(柳謹)·여규형(呂圭亨)·심종무(沈鍾舞)·이기(李琦)·안왕거(安徃居)·유맹(劉猛)·정봉시(鄭鳳時)·정만조(鄭萬朝)입니다.
<출전 : 嵩陽山人, 「本社의 詩會發起」, '매일신보', 1915년 1월 15일>
4) 만필쇄어(漫筆瑣語) 중 이천오백년제, 신무천황제, 신구학
이천오백년제
황조(皇祖)의 위대하신 제업(帝業)을 제국(帝國) 신민(臣民)의 일제히 추사(追思)하는 바이오, 우리들이 가장 감격함을 이기지 못함은 해내(海內)를 통일하심과 동시에 만고(萬古)에 변하지 않는 국체(國體)를 건정(建定)하신 일이라. 황통(皇統)이 2천5백여 년 연면히 이어져 국세(國勢) 더욱 융성하고 황위(皇威) 더욱 혁양(赫揚)하니 이러한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는가? …… 진실로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된 자 특히 우리 새로 국민된 자(我新府國民)는 이러한 나라에 살고 있음을 어찌 행복이라 이르지 아니할까?
이러한 나라를 창조하심은 곧 황조(皇祖)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아니신가.
신무천황제
신무(神武)는 영웅(英雄)의 신명(神明)한 자질로 동정서벌(東征西伐)하여 해내(海內)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 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천 5백 765년간을 1백 23대 동안 황통(皇統)이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萬歲一系)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아니겠는가.
오늘은 곧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제일(祭日)이기 때문에 특별히 여기에 기술하여 일반에게 제공하노라.
신구학
명치유신 때 맨 먼저 교린수호(交隣修好)하는 일로 사절(使節)을 파견하여 교섭이 빈번했으나 시종일관 굳게 거절하다가 갈등을 일으키고 구미(歐美) 제국의 군함과 상선이 누차 호의를 가지고 왔음에도 일체 배척하여 하늘이 낸 좋은 기회를 앉아서 놓쳐버리고, 캄캄한 동굴 속의 생활을 감내하였으니, 이것은 조선이 야매(野昧)한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종내 자포자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이유다.
아아! 만약 일본과 함께 나란히 구미(歐美)의 언덕으로 가서 실업(實業)의 학문을 강습하고 교육술(敎育術)을 일으켰더라면 지금에 이르러 그 부강과 문명의 발달이 일본을 능가하고 중원에서 사슴을 다투게 되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이것이 식자들이 부심하면서 통한해 하는 것이다.
<출전 : 嵩陽山人, ‘漫筆瑣語’ 「二千五百年祭」·「神武天皇祭」·「新舊學」, '매일신보', 1915년 4월 3일>
5) 송제만필(9)
일찍이 들으니 이토 히로부미 공이 말하기를, “한인(韓人)은 단체성(團體性)이 없다.”라고 하였다.
대개 공이 오랫동안 한국에 있어 한국인의 습성에 아주 익숙한 까닭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어찌 한국인의 병통을 깊이 맞춘 것이 아니랴.
근일 우리 조선인의 집회 결사는 오직 종교계 약간만 있을 뿐이오, 그 밖의 집회는 일체 불허하니,만약 집정자(執政者)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시험 삼아 근래 각 종교의 집회를 보자. 이 종교 저 종교를 논할 것 없이 처음에는 열심히 쫓아다니지 아니함이 없어, 단체를 조직하고 규정을 제정하여 영원히 준수할 것처럼 하다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나 서로 창을 꼬나들고 드잡이질을 하여, 파당(派黨)이 나누어지면 힘을 겨루어 충돌하다가 마침내는 분열이 되고 서로 척이 지다가 각기 원수가 되고야 만다.
지난날 스스로 반석처럼 공고하다고 하던 단체가 전진, 발달할 희망이 없고, 도리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를 이루어 큰 단체 중에 분리된 작은 단체가 있고, 작은 단체 안에 또 분리되어 더 작은 단체가 있어 단체의 단체됨이 실로 단체를 이룬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 명호(名號)를 표방하여 허장성세할 따름이오, 그 실상은 모두 손으로 모래를 움켜쥔 것 같고, 봄날의 얇은 얼음을 밟는 것 같아 장구하게 지속될 모습이 아니니, 슬프도다.
또 집단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각 상점과 회사, 그리고 문예(文藝)나 한묵(翰墨)이라도 불과 몇 명이 모인 곳이면, 곧 서로 경알(傾軋)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남을 밀치고 배제하는 것이 능사가 되어 상점과 회사의 흥체(興替)를 생각하지 않고, 동업의 발전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당파를 만들고 엮는 데 종사한다. ……
오호라, 동종동족(同種同族)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亡國)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출전 : 嵩陽山人, 「松齋漫筆(9)」,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
6) 만록(漫錄) -지리관계(5)
“일대성국(一大盛國)하여 세계열강 가운데 웅비(雄飛)함을 들으니 …… 그러한즉 일본이 실로 동양의패왕(覇王)이라” 그러므로 “우리 동양 사람은 서로 제휴(提携)하여 장벽을 철거하고 한 가지로 모두 함께 의지하여 참으로 동양의 대체의 국면을 잘 보전할 것을 밝힌다.”라고 주장하였다.
<출전 : 嵩陽山人, 「漫錄-地理關係(5)」, '매일신보', 1916년 9월 16일>
7) 낙성 중건에 대한 축사
본사는 지난 해 겨울에 화재를 당해 건물의 절반이 불에 타버렸으니, 그 당시 경색(景色)이 참담한지라 불행이라 이르겠거니와 만 1년이 되어서는 중건(重建) 개축(改築)하여 공사가 다 이루어졌음을 알리니, 이에 동우(棟宇)가 고운 빛을 더하고 금벽(金碧)이 갑절이나 휘황하다. 건물의 제도는 전날에 비해 줄어든 것이 없으나, 견고한 처마와 기둥은 옛날에 비해 더욱 새로워졌으니, 이것은 대개 사장 이하 일반 임원이 마음 속으로 조용히 헤아리고 계산하여 정신과 힘을 쏟은 결과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이에 '매일신보'를 애독하는 일시의 진신명사(縉紳名士)들이 분연(紛然) 답지(踏至)하여 축하하는 글을서술하여 낙성을 찬송하는 노래가 지면을 채우고 흘러넘치니, 재앙이 도리어 복이 되었음이 실로 회록(回祿)의 보응이니, 감히 찬송하여 축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출전 : 嵩陽山人, 「重建落成祝辭」, '매일신보', 1916년 10월 4일>
8) 대정육년시사(大正六年詩史)
여러 사업들 활발히 일어나니 諸般事業勃然興
다투어 자본 투자함은 예전에 없던 일 資本爭投昔未曾
신청하는 것이 많아 사회를 새롭게 하니, 申請仍多新社會
일일이 그 이름 기록하기도 어렵네 果難一一記名稱
(「諸事業績績勃興」, 二月)
기자국(箕子國) 팔정(八政)은 먹는 것이 우선이라 箕疇八政食爲先
농산물 품평 위해 진열을 하고서는 農産品評陳列邊
등수 나눠 우수한 것 상을 주니 分等優良褒賞典
장려함에 감격하여 모두들 기뻐한다 感深獎勵擧欣然
(「各地農産品評會」, 十二月)
이왕(李王) 전하(殿下) 동해를 건너시니 李王殿下渡東溟
관민(官民)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淸路官民陪餞□
오늘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던 바 盛事如今曾罕有
일선융화(日鮮融化)의 서광(曙光)이 빛나리라 日鮮融化曙光熒
(「李王東上」, 六月)
한 소리 폭음에 불꽃 일어나더니 一聲爆響焰烟紅
거함(巨艦)이 정박(定泊) 중에 침몰하였다 巨艦傾沈碇泊中
위문하는 무관(武官)이 성지(聖旨)를 전하니 慰問武官傳聖旨
조원(組員)들 높은 은총에 사례하였네 組員拜辭寵光隆
(「軍艦筑波沈沒」, 一月)
전에 없던 호우(豪雨) 폭풍 많아 無前豪雨爆風多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 各地罹灾洪水過
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御下賜金□恤典
조선 인민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 鮮民一體浴恩波
(「內地大水」, 十月)
<출전 : 「大正六年詩史」,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
9) 화근의 영절(사설)
그 이후 4여년의 세월에 일(日)·한(韓) 양국 정부가 예의(銳意)로 시정(施政)의 개선에 노력함이 광대(廣大)하고 그 효과가 또한 적지 아니하였으나, 본래 복잡한 보호정치(保護政治)의 제도는 아직 한국민중의 행복을 증진하고 공공의 안녕질서를 보장함이 충분치 못하여 비도초적(匪徒草賊)의 자취가 끊이지 않고 불령(不逞)한 무리가 또한 발호하여 민중을 사주, 선동하여 누(累)가 정치에 미쳤으니, 이러한 상태는 명치(明治) 41년 3월에 구한국(舊韓國) 외교고문 수지분(須知分) 씨를 미국 상항(桑港)에서 암살함보다 심하고 명치 42년 10월 26일 북만주(北滿洲) 여행 중에 있던 이등공작(伊藤公爵)이 하얼삔역두(驛頭)에서 흉한(兇漢)의 독수(毒手)에 죽고 같은 해 12월에 이수상(李首相)이 불의의 변을 맞은 것 보다 심하도다.
<출전 : 嵩陽山人, 「共進會觀覽者觀(2) 禍根의 永絶」(社說), '매일신보', 1915년 9월 7일>
10) 환영 하세가와 총독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鞭絲帽影擁車塵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文武紛紛握手新
한수(漢水)의 풍연(風煙) 원래 낯이 익으니 漢水風煙元慣面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 寒梅依舊笑欣欣
<출전 : 韋庵, 「歡迎長谷川總督」(現代詩壇),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
5. 정병조(鄭丙朝)
1) '녹어산관집(漉魚山館集)'(1941) 발췌
도요토미 히데요시 묘에서(豊臣秀吉墓)
장수가 우매한 제후를 공격하는 것은 상정이지만 將家兼弱是常情89)
어찌 무명한 이가 망령되이 출병을 하였던가 豈以無名妄出兵
반드시 영령들은 후회하였으리니 定有英靈應後悔
온산 가득한 소나무, 홰나무도 소리가 없구나 滿山松檜噤無聲
이토 태사의 운에 화답하여 바칩니다(步公爵伊藤太師韻却呈)
무력을 가지고 지난 날 짓누르지 않으셨기에 不必干戈撫昔年
완전히 의심하지 않고 싱글벙글 기뻐하네 洞無疑點也懽然
진작에 풍모를 보니 오나라 계찰과 같이 외교 수완이 있으시어 早把觀風吳季想90)
배를 타고나가 일본의 인연을 넓혔네 一帆要博宿桑緣
문서를 가지고 서로 만년 갈 것을 축원하며 玉帛相將祝萬年
순치보거의 형성이니 어찌 그렇게 하지 않으리오 輔車脣齒豈非然
형제는 위급할 때 서로 구원하여주는 것이니 爲報弟兄急難意
척령이 날아와 물가에 다다르는 도다 鶺鴒飛有到沙緣91)
89) 유약(柔弱)하면 겸병(兼倂)하고 혼암(昏暗)하면 치는 것(兼弱攻昧)은 '서경(書經)'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오는 이다.
90) 고매한 인품으로 중국의 훌륭한 사대부와 교분을 맺고 외교적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뜻이다. 계찰은 춘추시대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넷째 아들로서, 왕위를 전해 주려 함에도 받지 않고 연릉(延陵)에 봉해진 뒤 상국(上國)을 역빙(歷聘)하며 당시의 현인들과 교유하였다. '史記' 卷31.
조선으로 귀국하려 하는데 이토 공작이 三河舘에서 전별식을 열어주었다. 이에 지어 바친다
(將歸鮮春畝公爵宴餞三河舘席上限韻)
오늘 공과 이별하고 차마 돌아가지 못하나니 此日辭公未忍歸
공의 가르침을 받아 지난날의 잘못을 깨우쳤다네 自承公誨悟前非
공 노년이시지만 건강에 유의하시고 식사를 많이 하시더라고 衰年但祝加餐飯92)
창생을 위하시기에 살찔 날도 없을 것입니다 尙爲蒼生貌不肥
히가키(檜垣直右)93) 경기도장관이 사임하고 귀국하는 것을 전별하며 감회를 읊다(檜垣京畿長官直右辭官東歸以詩寄懷)
바라보고 있으면 숙연하고 두려워져 望之肅然畏
함부로 할 수가 없었네 若不可犯者
이미 겪어보니 관용과 온후함을 지녔고 卽之寬而溫
그 말은 따사로왔네 其言藹如也
오직 공자의 학문만을 배웠고 學惟宗尼聖
역학에 더욱 깊었네 尤邃於易理
정치에 있어선 仁愛로 하였고 爲政仁愛至
(천황에 대해) 충성의 마음으로 자식처럼 섬겼네 赤心保赤子
위대하도다 공같이 어진 이는 韙哉如公賢
옛날 사람과는 같지 않네 古之人也非
지우를 입은 것에 감동하여 偏余知遇感
蛩蛩駏虛처럼 서로 의지하였네 蛩駏永相依94)
병 나았단 소리 들리지 않더니 无妄勿藥喜
어찌 갑자기 물러나시는가 胡邃急流退
아득히 강가에서 이별하니 迢迢江海別
아쉬운 마음 병드는 것같이 아프네 忽忽情如痗
공은 수양도 잘 하시고 구휼도 좋아하셨는데 公自頤養好
경기도내 백성들을 (이젠) 누가 진휼할 것인가 畿黎誰賑貸
91) 척령은 새 이름으로 형제의 급난(急難)함을 말한 것이다. '시경(詩經)' 상체장(常棣章)에, “척령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하도다.(鶺鴒在原 兄弟急難)”에서 나온 말이다.
92) 찬반(餐飯)을 더하여 건강에 유의하라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환영전(桓榮傳)에 “태자가 편지로 아뢰기를 ‘願君愼疾加餐 重愛玉體’라고 하였다.” 하였고, 고시(古詩)에 “上有加餐飯 下有長相憶”이라 하였다.
93) 檜垣直右는 후지야먀현의 지사였다가 ‘병합’ 후에 경기도장관이 되었다.
94) 짐승의 이름으로 공공거허(蛩蛩駏虛)를 말하는데, 서로 의지하는 것을 비유한다. '여람(呂覽)' 불광(不廣)에,“궐(蟨)이라는 짐승이 앞다리는 짧고 뒷다리는 길어서 앞으로 넘어지기 때문에 달아나질 못한다. 늘 공공거허를 위하여 감초(甘草)를 먹여 주는데 위험이 닥치면 공공거허가 그를 업고 달아난다.”라고 하였다.
유임을 바랬으나 소원 이루지 못하였는데 寇借未遂願95)
소공이 선정을 펴다 쉬셨다는 감당나무의 노래 이미 전파 되었네 召憩已播謠96)
내가 어찌 사적인 것을 말하리오 我豈敢言私
쾌차하기를 바랐지만 瓊瑤로 보답하지 못하였네 投爪罔報瑤97)
단약이 완성되어 신선되어 但期丹成日
적송자, 왕자교처럼 장수하시길 바라네 壽餘松喬比98)
백성들의 바램에 부응하시어 用副蒼生望
동산위로 부디 일찍 떠오르시길 東山須早起
거듭하여 저녁에는 남쪽 역으로 마중 나가 重迓南郵夕
악수하며 서로 맞이하길 握手笑相視
노래 끝나 고개를 들어보니 吟罷更回首
해는 만 리 밖 구름 너머로 저무네 日莫雲萬里
요양을 지나며(過遼陽)
문득 하루살이가 망망대해에 사는 것처럼 忽覺蜉蝣寄渺茫
바람을 타고 만 리의 요양으로 나왔네 天風萬里出遼陽
바다를 바라보니 광활하고 一望如海呈軒割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 없으니 방향을 모르겠네 四拓無山失方向
땅을 헤아려보니 어디가 고구려이지 발해인지 알 수 없고 按地難徵句渤史
중국이 여진과 몽고 침입, 막지 못 한 이유 알겠네 窺華不阻女蒙王
지금에 더욱 슬픈 것은 정령위는 이미 오래전 일이 되었고 今來悲更令威甚99)
성곽도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라네 城郭人民並已亡
봉천성 유감(奉天城有感)
선양관 밖에 잠시 멈춘 수레에 瀋陽館外暫停輈
95) 寇借는 지방관의 유임(留任)을 열망하는 데 비유한 말이다. 차구는 곧 구순(寇恂)을 빈다는 뜻으로, 후한(後漢) 때 구순이라는 사람이 어느 지방에 가서 선정을 베풀고 기한이 차서 그곳을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말하기를 “구군(寇君)을 1년만 더 빌기를 바란다.”며 섭섭해했다는 고사이다. '後漢書' 寇恂列傳.
96) 선정(善政)을 베푼 수령을 위해 베지 않고 남겨 놓은 나무로, 송덕비(頌德碑)와 같은 뜻이다. 주(周) 나라 소공(召公)이 감당 나무 아래에서 정사를 행하였는데 백성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나무를 보호하면서 감당(甘棠) 시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史記' 燕召公世家.
97) 옛날 무왕이 병을 앓을 때 / 武王昔不豫 손톱과 발톱을 깎아 하수 가에 던졌다 / 剪爪投河湄
98) 적송자(赤松子)와 왕자교(王子喬) 두 사람을 가리킨다. 모두 옛날의 신선이다
99) 정영위(丁令威)는 한(漢) 나라 요동(遼東) 사람인데, 도술(道術)을 배워 학(鶴)으로 화신하여 요동에 돌아와화표주에 앉아 이르기를, “새여 새여 정영위여, 집을 떠난 천 년만에 이제 돌아왔네(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하였다.
사막의 바람 불어오고 해도 근심에 잠긴 듯 부옇네 漠漠風沙白日愁
총독부 虎帳을 새로 하라 엄명하시니 督府令嚴新虎帳
소릉 오래된 이무기 머리에서 포연이 멈추네 昭陵姻歇古螭頭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고 감동이 되어 누대에 오르니 弱懷易感無從樓
逸史에선 자못 완성되지 못한 곳도 많았지 逸史偏多未遽收
어찌 유독 유망민을 안집시키길 좋아하여 豈獨流亡安集好
땅을 개간하며 만주에 살게 하였겠나 廣開阡陌在滿洲
따이렌만에서(大連灣)
봄 물결 일렁이고 바람은 고요한 따이렌성 春波風定大連灣
가장 높은 누대에서 한가하게 있네 得最高樓放矚閒
기와집은 거울처럼 빛나고 누렇고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萬瓦鏡搖金碧影
많은 선박 문채 나는 구름사이 너머에 정박해 있네 百帆人隔彩雲間
토산물의 경매는 매년 증가했지만 土宜競買年增售
(대두유가 해마다 수출이 늘어나 현재 200만 원의 (大豆油年增輸出今收二百萬圓利益云)이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웃나라 대비가 무너지자 손 씻고 돌아갔네 隣備隳都手洗還
머나먼 연경의 상인들 우리를 위로하여 말하길 遞燕官商勞我語
이 길이 동아시아의 관문이라오 是行東亞有收關
러일전쟁터 뤼쉰을 순시하며 즉석에서 쓰다(旅順口巡視日露戰役處走筆口號)
뤼쉰 산마루에 신사를 참배함에 旅順山頂參神祠
바람은 맑고 햇볕은 따뜻하건만 처량하고 슬프네 淸和風日爲凄悲
열렬하고 굉굉한 전쟁, 천하에 이런 일 없었으니 烈烈轟轟天下無
의사는 삼 만이요 충혼을 받친 이는 천 여 명이였다네 此義三萬忠魂千
오래된 역에 가을 열매가 떨어지고 秋實有辭驛長久
잘 보존된 밭은 은하수가 늘어선 것 같다 保田舌有懸河辯100)
전장에서 무너뜨리던 상황 얘기하니 便說戰時狀摧倒
수리는 깍깍 거리며 기뻐 눈을 크게 뜨고 본다네 鷙鷲喜張看噫嘻
손무, 오자서, 한신, 팽월은 진정한 남아로 孫吳韓彭眞兒戱101)
100) 懸河는 은하수이다.
101) 韓彭 : 한신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여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삼걸(三傑)로 칭해졌는데, 뒤에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다 오히려 여후의 속임수에 떨어져 목이 잘렸다. '史記'卷93 팽월은 항우(項羽)를 섬기다 한(漢) 나라에 귀순하여 기공(奇功)을 세우고 양왕(梁王)에 봉해졌는데, 한
장군과 졸병이 하나가 되어 훈련을 하였지 並將卒一副鍊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지만 死國之心奇更奇
나는 동양을 위한 일이었다 말하고 싶네 我試具陳爲東洋
사람들은 조용히 하고 들을지니 진실로 천황폐하의 위업이 아니겠는가 人須靜聽苟非皇
위엄을 빛내시고 한번 성내시어 오랑캐를 쓸어버리셨다네 威赫然一怒掃虜
조정에선 황인종이 화를 당하지 않게 되리라 하지만 庭無乃黃人重罹
(그러나) 흑룡의 재앙이 마침내 아시아에 미치었네 黑龍禍遂致亞洲
하늘과 땅이 진동하여 편안하지 못해지니 乾坤震電不令寧
진실로 잘 아는 사람은 기미를 잘 아는 이라네 誠知能者審機明
원수들 은혜를 뒤집고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더니 讐反恩時求同聲
지금은 병력을 몰아 전쟁을 일으켰었네 而今全歐兵塵遍
(이제) 이 땅 한 구석진 곳에서 발을 닦아 말리고 此地一片乾淨足
천황을 믿어 내 남은 생을 편안히 하고자 하네 以安吾生方信帝
천황은 덕이 하늘처럼 우뚝하여 무능한 이를 쓸어버리시고 德如天巍蕩無能
명군으로서 동서를 보시길 鷄冠으로 하셨네 名君看東西鷄冠
二龍山처럼, 열 겹의 청동으로 만든 담장같이 견고하였지만 二龍山十重銅墻102)
쇠벽을 가루내어 버리는 건 일순간이었네 銕壁粉碎一瞥間
인화가 결국 지리보다 나은 전술이었으니 地利終爲人和勝
나카무라 장군 시원하게 관문을 열어버렸네 中村將軍洞開關
하얼빈(哈爾賓)
남만에서 곧장 북만으로 가면서 南滿直向北滿行
러시아의 평평한 평원이 3천리인가 물어보았네 問露三千一掌平
문득 하얼빈 광활하게 펼쳐지니 却來哈爾賓逾濶
상전벽해의 형상이 아니던가 是否桑田海變成
황폐한 성 외곽에 자리했던 조그만 마을이 荒落濱城一小邨
지금은 만호의 도시가 되었네 而今萬戶又千門
신의 죽음을 보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력을 동원하여 자신을 보호하다가 고조(高祖)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효수(梟首)되었다. '史記' 卷90.
102) 二龍山 : 무송(武松 : 1090~1169)은 양산박 108두령 중 한 사람으로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그는 보병도두(步兵都頭 : 포도대장)로 지목되었고 형 무식(武植)이 서문경(西文慶 : 1087~1116)과 반금련(潘金蓮 :1092~1116)에게 독살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그들을 죽이고 맹주(猛州)로 유배당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어릴적에 다퉜던 장죽산(蔣竹山 : 1090~1128)의 형 장충(蔣忠)과 장몽방(張蒙方)이 목숨을 노리자 이에 반격하여그들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이룡산(二龍山)으로 도망쳐 세력을 확보한 뒤 양산박(梁山泊)에 입단하였고 방랍토벌 때 포도을에게 팔을 잃은 뒤 육화사에 은거하여 송나라 조정에서부터 청충조사(淸忠祖師)라는 칭호를얻었다.
경치도 훌륭하니 마침내 백성도 물자도 풍부해지고 形勝竟招民物盛
하늘 높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네 三竿高揭國旗飜
문자를 같이한다면 의당 국경도 같이 지켜야하리니 同文宜合守邊彊
金城湯池를 빌려 강한 적을 막아야 하리라 寧借金湯助敵强
패자가 나와 동아시아의 힘을 갖지 못한다면 不有覇持東亞力
진나라와 같은 적국의 요구 끊임없이 나오리니 누가 막으리오 秦求無己竟誰防103)
복잡한 하얼빈 시내로 나와 보니 對出三條五劇邊104)
유리처럼 금빛과 푸른 빛이 멀리까지 비치네 玻璃金碧逈超然
새의 발자국 같고 게가 기어간 것 같은 글씨의 액자가 있고 鳥跡蟹行金字額
관공서, 상점도 늘어서 있네 也除官署也商廛
삼월인데도 꽃도 아직 피지 않고 찬바람이 살을 에이는데 三月無花冷撲人
얼음 낀 송화에서 봄이 되었음을 아네 松花氷伴始知春
길을 가득 메운 말과 마차 滿街白馬香車跡
바람 부는 어둑한 거리의 풍량계 위로 먼지가 길게 날리네 五兩風昏十丈塵105)
희극에, 노래 다양하고 戱劇絃歌異派多
등불 켠 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네 燈天人海競繁華
망사로 얼굴을 가린 꽃 같은 여인은 網紗遮護花容女
깊은 눈가 가득히 파도를 보내네 眼角摳深尙送波
(이날 밤에 러시아 극장에 치장하고 놀러온 러시아 여인들이 많았다) 是夜設露國演劇冶遊女露娘爲多
회당으로 초청하여 여행객을 위로해주니 會堂招慰旅行勞
끊임없이 진귀한 음식 상위에 가득하다네 絡繹珍齋一桌高
나를 후하게 대접하는 많은 거류민에게 감사하며 待吾厚認居留旺
더욱 관민의 오랜 우의에 고마울 뿐이네 愈謝官民古義操
이날 관민이 공동으로 단원들을 공회당 연회에 초청하여 (是日官民共同招團員于公會堂宴待甚盛)
매우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출전 : 鄭丙朝, '漉魚山館集' 卷之三, 1941년 3월 30일>
103)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6국이 진(秦) 나라의 요구에 수응하다 못해 이런 말이 나왔음.
104) 복잡한 시가를 표현한 말이다. 당(唐) 나라 노조린(盧照隣)의 장안 고의(長安古意) 시에 “남쪽의 언덕 북쪽의 당(堂)이 북쪽 마을에 연하고 다섯 극(劇)과 세 조(條)가 세 저자를 끼었다.” 하였다
105) 닭털을 장대 끝에 매어 풍향을 알아보는 제구로, 본래는 초(楚) 지방의 방언이었다.
6. 한준석(韓準錫)
1) 환영 하세가와 총독 각하
小坡 韓準錫
고매하고 안연(晏然)히 저 멀리서 오시네 高駕晏然自遠程
환영하여 곳곳에 성이 가득차 누를 정도구나 歡迎處處壓入城
백성의 살림살이를 살피시네 省畊省歛與民産
정치를 베풀고 인덕을 베푸사 즐거운 세상을 평하노니 施政施仁樂世平
일본의 편안한 바람이 구름을 걷어내네 扶桑休連風雲會
사직(社稷)에 심성을 다하야 일월이 밝게 비추네 社稷深誠日月明
취각을 불고 기를 세워 마땅히 명을 받드사 吹角建牙宜勅命
北鮮106)산수가 더욱 맑아지는구나 北鮮山水倍澄淸
<출전 : 韓準錫, 「歡迎長谷川總督閣下」, '매일신보', 1917년 5월 12일>
2) 봉도(奉悼) 다이쇼(大正)천황
小坡 韓準錫
흠명하신 우리 천황께선 欽明大行帝
훌륭하신 덕으로 동아시아를 굴복시키셨네 峻德服東區
선대 왕들의 공덕 크게 밝혔고 丕闡祖宗烈
神聖의 智謀를 공경히 받드셨다네 祗承神聖謨
舊域으로부터 일본은 전하여지고 扶桑傳舊域
社稷은 새로운 도읍에서도 보존되었네 社稷保新都
나라를 안정시키기를 마치 반석과 같이 하셨고 安國喩磐石
백성들 교화시키는데 북채를 잡으셨다네 化民應鼓桴
文을 숭상하여 孔孟을 스승으로 삼으셨고 崇文師孔孟
武를 도야함에 孫吳를 講磨하셨네 鍊武講孫吳
전쟁에서 대승하시어 4부를 설치하셨고 三捷置四府
한번 융의를 걸치시어 북쪽을 평정하셨네 一戎定北樞
행복의 샘이 막 샘솟으려는 때에 福祥泉始達
106) 함경남도 함흥.
장수의 바다는 마르려하였다네 壽考海將枯
彭虫의 악행을 누가 야단을 칠 수 있을까 誰罵彭虫惡
천리마처럼 내달리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네 莫禁□驥趨
남겨진 화살은 천황께서 계시던 곳에서 우는데 遺弓鳴玉几
신발벗듯이 瑤□를 향해 가셨네 脫屣向瑤□
鸞輅107)는 장지로 떠나 鸞輅歸喬岳
龍髥108)께서는 □湖로 아득히 멀어져 가시네 龍髯渺□湖
스산한 바람 赤□를 부르며 悽風號赤□
시름은 蒼梧에 잠기네 愁一沒蒼梧
온 천하 끝없이 한탄하며 率普無窮恨
장강도 함께 오열하네 長江共咽鳴
<출전 : 韓準錫, 「奉悼 大正天皇」, '同民' 제29호, 1927년 2월, 1쪽>
3) 축 동민(同民)
小坡 韓準錫
일본제국대영동에 扶桑帝國大瀛東
풍요로이 사는 백성의 和氣가 융화하니 富庶生民和氣融
海內가 모두 형제라 萬類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要知海內皆兄弟
하나로 같이 돌보시네 萬類雖殊一視同
<출전 : 韓準錫, 「祝同民」, '同民' 제33호, 1927년 6월, 3쪽>
4) 조춘술회(早春述懷)
小坡 韓準錫
聖德이 하늘의 은혜와 같아 聖德如天雨露均
일본과 조선이 一家로 봄을 맞으니 扶桑槿域一家春
깊은 은혜 미미하나마 갚고자 하니 洪恩將欲溳埃報
힘껏 정성을 다하여 이 몸을 잊고자 하노라 庶竭衰誠忘此身
<출전 : 韓準錫, 「早春述懷」, '同民' 제34호, 1927년 7월, 3쪽>
107) 천황의 수레.
108) 천황.
5) 축사이토전권귀조(祝齋藤全權歸朝)
小坡 韓準錫
泰西사절로 天朝에 돌아오시어 泰西使節返天朝
알현하고저 집무실에 열을 지어 늘어서 있으니 報謁楓宸幾列條
엄숙하고 위엄한 儀容에 모두가 悅服하며 儼偉儀容皆悅服
서로 응한 의석은 소리없이 고요하구나 想應議席寂無囂
<출전 : 「祝齋藤全權歸朝」, '同民' 제37호, 1927년 10월, 1쪽>
6) 봉답(奉答) 고수노자(皐水老子)109)
小坡 韓準錫
두 번의 자리에 이르시어 나라를 지키신 대공이여 再莅槿邦執大公
文工筆法이 영웅호걸과 같아 文工筆法埒豪雄
煌煌四字가 마음에 그림을 그리니 煌煌四字出心畫
감동이 평생에 사모하며 극진히 높이는 마음으로 머무르네 感偑平生寓慕隆
<출전 : 「奉答 皐水老子」, '동민' 제81호, 1931년 6월, 5쪽>
7) '삼노우모시선(三老寓慕詩選)'(1937) 발췌
三老寓慕詩選序
小坡 韓準錫 군은 溫厚篤實하며 名利에 있어서는 담박하다.
문화를 補益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至誠으로 일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해이해지지 않았다.
그의 인격은 세상에서 보기 힘들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며 몸가짐이 매우 근엄하고 검속하였다.
오직 시를 즐기는 것만을 운명처럼 여겨 사람을 만나고, 사물들과 접촉할 때 만약 마음에 감흥하는 것이 있으면 곧장
읊어냈다.
또는 ‘시는 뜻이 가는 바로 마음에 있는 것이 뜻이 되고 말로 나온 것이 시가 되는 것’이기에 성정의 바르고 순정함을 따라 한꺼번에 읊어 내기도 하였으며 (이런 시들은) 자구 사이에 진실 된 기가 충만하였다.
내가 매번 군의 시를 볼 때마다 깎고 새기는 수식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시의 기세가 하늘
109) 사이토 총독.
이 만들어 낸 듯 하여 시인의 충후한 뜻을 얻었음을 깊이 알 수 있었다. 근일에 군이 나에게 '三老寓慕詩選'을 갖고 와 부탁하길 자신이 편집한 것인데 寺內·齋藤·南 三總督에게 (수창한) 시를 지어 받치고자 한권을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활자로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고자함에 그 간절하고 정성된 행동이 어찌 평범한 사람들이 미칠 바이겠는가? 더욱 이 책을 엮음에랴.
세 총독의 풍모와 恩威한 자품을 경모할 뿐만 아니라 조선통치 이 십 여년의 과거와 현재의 영향을 엿보아 얻음이 있어서이다.
완연히詩史로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반드시 그렇거니와)그 간행의 공이 매우 위대하여 문화를 보익하고 사회에 공헌이 아주 큼을 알겠다. 진실로 이것은 출판계에서 만나기 드문 일이다.
1937년 學鷗 松田甲이 경성 皆夢軒에서 쓰다
三老寓慕詩選序
小坡 韓準錫 군은 관북지방의 일류시인이다. 그 사람됨이 순정하고 공손하며 소박하다.
그의 시는 성정에 근본하여 꾸밈이 없고 조탁에만 치중한 시어도 없다.
그 여운이 길어 마치 하늘의 구름과 같아 말렸다 펼쳐지는 것이 자유자재였다.
어느 날 君이 우연히 경성에 왔다가 나와 여관에서 만났다.
군이 나에게 말하길 “저는 변방에 거쳐하며 학문을 하는 데도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小坡 제가 魯庵, 齋藤 두 총독과 알게 되어 누차 시로 칭찬을(아니면 시로 칭찬하는 것) 받았습니다.
지금 시를 지어 풍산 南총독에게 바치니 은혜와 사랑하심이 더욱 보태졌으나 도리어 (자신의 시를) 천박하고 보잘 것 없다고 여기고 삼노의 문하로 달려갔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었으나나 영광으로 생각지않고 이를 부끄러워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내가 졸고 중에서 골라서 三老에게 바치는 시편만을 모아 한권을 만들려고 합니다.
인쇄할 때 삼노공과 여러 동지들은 아마도 그 감상을 써주실 것입니다만 그대가 서문을 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 하였다. 내가 “아! 강호의 뜻을 얻지 못한 선비 중에 시명에 기대 이름난 벼슬아치에게 예우 받은 적은 일찍이 많지 않았다. 또한 지위와 명망이 최고이면서 재야의 선비를 사랑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맹헌자가 자신의 집안을 잊은 것처럼 하게 하는 것은 더욱 고금지간에 힘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감히 서문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소화 정축년 초봄 동래 정병조 서문을 쓰다
三老寓慕詩選自序
보잘 것 없는 제가 역대 조선 총독에게서 知遇를 입었으니 일생동안 마음을 향해 경모한 분은 魯庵皐水 豊山 세분 뿐이었습니다. 평소에 삼노의 시 약간을 받들어 수창하였는데 근간에 모아서 한권을 만들고는 '三老寓慕詩選'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문득 供覽해보니 또한 사모하는 마음이 됩니다.
삼노께서는 우리 제국의 거성이며 동양의 위인이셨는데 지금 노암 고수 두 분께서는 이미 작고 하셨습니다.
다듬고 만져 한권의 책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찌 산이 무너진 듯한 슬픔을 이기겠습니까? 이에 기록합니다.
소화 정축년 정월 10일 小坡 韓準錫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삼가 맞이하며(奉迎寺內總督)
1913년 7월 3일 함남 순찰 시에 서호진110)에서 접견하였다
하늘 맑은 함남 서호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치 日晏關河淑景嘉
지방 시찰하시는 높은 수레 하늘 끝 변방까지 두루 하셨네 旬宣高駕遍天涯111)
청구의 바람 깃발을 흔들지만 靑邱風煽揚旗脚
번화한 거리 먼지는 깃발아래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네 紫陌塵晴整纛下112)
큰 기틀 편안히 자리한 천년의 왕국(일본을 지칭) 洪基鞏奠千年國
은혜는 만성을 일가로 고루 적셔주시네 恩渥均沾萬姓家
조야가 모두 태평성세를 증거하며(사실이라고 말하며) 朝野升平從可驗
성안의 모든 이들 환영의 웃음 지으며 생황 켜고 노래하는 소리 뒤섞여 들리는구나 滿城歡笑雜笙歌
동방의 구 정치는 유신으로 회복되었고113) 東方舊政復維新
순무하는 높은 수레 이르는 곳마다 봄이로구나 巡撫高車到處春
천황의 은혜를 받들어 오모를 쓰고 承恩丹闕戴烏帽
청구에 천자의 윤음을 선포하시네 諭旨靑邱宣鳳綸114)
하늘은 천년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준엄하게 명을 내리시니 天降峻命基千世
교화의 바람 크고 아름답게 일어 四隣을 뒤덮네 風動弘休被四隣
온 천하 태평한 세상 노래하며 率普謳歌太平像
길가에서 환영하며 (공이 남기고 가신) 먼지를 바라보네 歡迎街路望餘塵
110) 함경남도 흥남의 외항.
111) 관원이 한 도를 순찰하여 왕의 정사를 선포하는 데에 쓰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강한(江漢)에“王命召虎 乃旬乃宣”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총독의 지방시찰을 가리킨다.
112) 현도는 당(唐) 나라 때 장안(長安)에 있던 관(觀) 이름인데,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 경사에 돌아와 보니, 현도관에 이전에 없던 복숭아나무를 한 도사(道士)가 새로 많이 심어 놓았으므로, 그 복숭아나무를 당시의 권신(權臣)들에 비유하여 풍자하는 뜻으로 시를 지었다. 그 시에 “서울 거리 뿌연 먼지가 얼굴을 스치는데, 사람들이 모두 꽃구경 갔다 온다 말하네. 현도관 안에 있는 천 그루 복숭아나무는, 모두가 이 유랑이 떠난 뒤에 심은 거라오 紫陌紅塵拂面來 無人不道看花回玄都觀裹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는 구절이 있다. ‘紫陌紅塵’에서 紅을 빼고 인용하였다.
113)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화 된 것을 의미한다.
114) 천자(天子)의 조서를 일컫는다.
삼가 魯庵115) 총독에게 바치나이다(恭呈魯庵總督)
1914년 3월 1일
보잘 것 없는 저는 포의의 곤궁함 면하지 못하고 鯫生未免布衣寒
답답한 마음으로 홀로 淮橘을 탄식하였나이다 壹鬱孤懷淮橘嘆116)
부끄럽게도 지우를 입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요 謬蒙知遇是何幸
서쪽으로 멀리 쳐다보며 마음에 아로새기나이다 西望長盱只鏤肝
데라우치 총독이 은혜로이 손수 써주신 시를 읽고 느낌이 있어 삼가 바치나이다(奉讀寺內總督惠贈手題詩有感)
1916년 11월 20일
우리 천황의 성덕이 조선을 적심에 吾皇聖德洽于鮮
백성들 기뻐 복종한 것이 오늘까지 7년이라네 悅服民情今七年
만 리 부상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데 萬里扶桑新日月
사방을 둘러봐도 근역은 옛날 그대로의 산천이네 四望槿域舊山川
동포라고 보시어 기쁘게 여기시며 同胞可見怡如也
이역이라고 하여 어찌 사신 길을 꺼리셨겠는가 異域何嫌習使然
각하의 충훈 전해지니 閣下忠勳播章句
한 집안으로 여기는 기상 실로 편애가 없으셨도다 一家氣像實無偏
데라우치 총독이 총리대신으로 영전하심을 삼가 축하드리나이다(謹祝寺內總督榮轉內閣總理大臣)
1916년
우리 데라우치 공의 덕망은 우러러 보건데 마치 산과 같다네 我公德望仰如山
근역에서 10년간 큰 책무를 맡으시다 大任槿邦十載間
지금 갑자기 천황께서 내리신 은혜로운 명령 받드니 今日忽承 恩命降
오색의 구름 낀 깊은 곳에서 천황의 얼굴 가까이 하시리 五雲深處近 天顔
사이토 총독을 알현하다(謁齊藤實總督)
1919년 9월 24일
넓고 큰 한성부 모퉁이에 사는 潭潭大府漢城陬
115)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116) 남쪽에서 자라는 귤나무를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로 변한다고 한다.
한미한 저를 부르시어 바쁜 중에 가을 속을 같이 걸으셨다네 被召寒蹤忙踏秋
총독의 깃발을 보니 마치 扶桑을 대면한 듯 기쁘나 白旄喜對扶桑面117)
총독의 마음은 사직을 걱정하시느라 수고로우시네 丹慊應勞社稷憂
(총독은) 천황의 성덕에 종사하여 도와드리는 직위이며 配天聖德贊襄職
온 천하 백성들을 순무하시는 직책이시네 率土民情巡撫猷
지금 다행히 얼굴 직접 뵙고 예로서 접대해주시니 今日幸承容接禮
동방에 복성이 흘렀음을 보겠도다 仰瞻東域福星流118)
사이토 총독의 고유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讀齋藤總督諭告有感)
1919년
객사 창가에서 오늘 아침 총독의 반포문을 읽어보니 旅窓朝日讀頒文
한 폭의 아름다운 말은 의미를 충분히 전달해주네 一幅徽言意十分
이로부터 민심은 마땅히 그만두어야 하리니119) 從此民心應自戢
상서로운 바람은 하늘에 가득한 구름을 쓸어버리네 祥風掃盡滿空雲
데라우치 백작의 죽음을 애도하다(哭魯庵伯)
1919년 11월 3일
서호진에서 얼굴을 뵙고 말씀도 들었던 西湖容接聽諮諏
그 한마디가 아직 귀가에 울리는데 시간은 벌써 7년이 지났다네 一話琅然經七秋
정승의 책무를 마음에 담으시고 塩梅責任抱丹慊120)
사직을 위한 근로로 머리가 하얘지셨네 社稷勤勞餘白頭
천당이라면 응당 속세의 일에 감화되어서 일 것이고 天堂應感化龕夢
명부라면 아마도 죽음을 애도해서이겠지 潭府常疑木稼121)憂122)
117) 천자(天子)의 정벌(征伐)에 쓰인 것으로 '서경(書經)' 주서(周書) 목서(牧誓)에 “왼손으로는 황월을, 오른손으로는 백모(白旄)를 잡고 지휘하였다.”라 하였다. 여기서는 총독을 상징한다.
118) 복을 내려 주는 신(神)이라는 뜻으로 한 지방의 일을 총괄하는 관원을 말한다. 송(宋) 나라 선우신(鮮于侁)이 절동 전운사(浙東轉運使)로 떠날 때, 사마광(司馬光)이 “지금 동쪽 지역의 폐해를 구제하기 위해선 자준(子駿 선우신)이 아니면 불가능하니, 그야말로 일로(一路)의 복성이라 할 만하다.”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山堂肆考'.
119) 사이토(齊藤實) 총독이 1919년 8월부임하면서 독립운동을 진정 시키려 발포한 반포문인 듯하다. 여기서의민심은 독립운동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120)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얻어 정승을 삼고 나서 “내가 술을 만들면 그대가 누룩이 되고, 내가 국을 끓이면 그대가 소금과 식초 역할을 하라.(若作酒醴 爾惟麴蘗 若作和羹 爾惟鹽梅)”고 말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書經 說命下' 국정(國政)을 담당할 만한 정승의 재목을 뜻한다.
121) 현인(賢人)의 죽음을 가리킨다. 목가(木稼)는 상설(霜雪)이 내려 나무에 붙어 있다가 추운 날씨에 응결되어얼음으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송(宋) 나라 신종(神宗) 때에 초목이 모두 목가의 현상을 보인 뒤 며칠이
공사 간에 통곡하며 애도의 글을 지음에 哭以公私略書誅123)
조선은 서글픈 바람이 불고 근심의 해가 비추는구나 悽風愁日海東邱
꿈에 魯庵 백작을 뵙고 깨어나서 감동을 읊다(夢見魯庵伯覺而感吟)
1921년 2월 15일 밤
모습이 그대로인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하여 彷佛儀形降帝閽
기쁘게 무릎을 마주하고 안부를 나누었네 怡然促膝敍寒暄124)
분명히 근래의 일을 말씀하시고 分明說道近時事
고상한 자리에서 모시니 담소하며 온화하게 웃고 계시네 侍坐高筵談笑溫
사이토 총독을 환영하다(歡迎齋藤總督)
1921년 2월 함남 순시 시에
변방도 복이 있어 우리 공께서 오시니 遐藩有福我公來
엄동설한 뒤 그늘진 벼랑에도 봄이 비로소 돌아온 듯하네 寒後陰崖春始回
교화를 베풀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막중한 일을 맡으시니 宣化安民任自重
大東은 이로부터 태평성세가 열리리니 大東從此太平開
皐水125) 총독께서 함흥에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聞皐水總督來咸興)
병인년 가을
서풍이 어젯밤 성을 휩쓸더니 西風昨夜沛城隈
皐水 노옹께서 먼 곳에서 수레타고 오시네 皐水老爺遠駕來
궁벽한 함흥을 가차이 여기시고 순시를 하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何幸僻陬巡察近
너무나 기쁠 뿐만 아니라 온갖 미물까지도 우뢰를 듣고 분연히 일어나듯 하네 喜眉不啻蟄聽雷126)
지나지 않아서 한기(韓琦)가 죽었던 고사가 있다. '靑箱雜記'.
122)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시에 “한 사람은 말 앞의 졸개가 되어, 채찍 맞은 등에 구더기가 생기고, 한 사람은 공이나 재상이 되어, 깊고 그윽한 부중에 거처하네.(一爲馬前卒 鞭背生蟲蛆 一爲公與相 潭潭府中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23) 誄의 오자인듯하다.
124) 寒暄 : 안부를 말한다.
125) 사이토 마코토 총독.
126) 宋 王安石 '寄赠胡先生' 중에 “高冠大带满門下, 奮如百蛰乘雲雷‘라는 시가 있다.
사이토 총독이 전권대사가 되어 일본 조정으로 귀임하는 것을 축하하며(祝齋藤全權大使歸朝)
정묘 가을
태서로 사신을 갔다가 천황의 조정으로 돌아와 泰西使節返天朝
여러 조목을 천황께 보고 올렸네 報謁楓宸幾列條
엄숙하고 위대한 모습에 모두가 열복하였고 儼偉儀容皆悅服
상응하던 의석엔 시끌거리는 사람 하나 없었네 相應議席寂無囂
사이토 총독의 재임을 환영하며(再迎齋藤總督赴任)
1929년 가을
시원한 바람 불어노니 혹염은 떠나가는데 微凉颯動酷炎歸
軒裳(높은 벼슬아치)께서 다시 오시어 덕을 베푸시네 再到軒裳宣德威
온 성의 아이들 웃으며 서로 말하길 滿城兒女笑相語
“노옹께서 우리 집에 오셨으면 좋겠다” 想是老爺知我扉
삼가 皐水 총독께서 내려주신 물품에 답을 하며(恭答皐水總督惠賜品)
1930년 1월
상공께서 제게 이렇듯 진귀한 물품 주시어 相公惠我此珍品
서재에서 절하고 받고나니 너무 기뻐 미칠 것 같았네 拜受芸窓127)喜欲狂
복숭아를 던져주시니 정성된 마음으로 경옥으로 보답하리니 投桃128)報玖129)慇懃意
(주신 물건을) 출입 시에도 가슴에 품고 다니며 어찌 잊으리오 出入懷中豈敢忘
皐水 어른이 조선에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聞皐水老子來鮮)
신미년 가을
청량한 가을에 한양을 다시 방문하시니 淸秋更訪漢陽城
초목 산천 모두 감읍하는 정이 있네 草木山川感遇情
127) 서실(書室)에 앉아 받았다는 뜻이다. 운창(芸窓)의 운(芸)은 즉 다년생인 운향(芸香)이라는 풀인데, 좀을 물리치는 향기를 지녔으므로 장서실(藏書室)을 운각(芸閣), 또는 운창이라고 한다. 표상(縹緗)의 표(縹)는 담청색(淡靑色)의 비단이고, 상(緗)은 천황색(淺黃色)의 비단인데, 옛사람이 이것을 책의 표지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책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128) '시경(詩經)' 대아(大雅) 억(抑)편에, “나에게 복숭아를 던져 주면 나는 그에게 오얏으로 보답한다(投我以桃報之以李)”란 데서 인용된 것으로 올바른 덕이 있으면 그에 대한 반응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129) 報玖 : '시경(詩經)' 詩經·衛風·木瓜 ‘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 匪報也, 永以為好也! 投我以木桃, 報之以瓊瑤. 匪報也, 永以為好也! 投我以木李, 報之以瓊玖. 匪報也, 永以為好也!’가 있다.
조선의 백성들 아직도 치적을 칭송하니 鮮民尙頌至治績
언젠가는 청사에 길이 이름 얻으시리 合得他年靑史名
사이토 자작이 수상이 되시어 친임하는 것을 축하하며(祝齋藤子首相親任)
1932년
扶桑을 한번 바라보니 천기는 맑고 一望扶桑天氣晶
구름을 끊고 나온 달은 비로소 빛을 드날리네 劈雲卿月始揚明
위대한 齋藤 옹의 명성과 덕망이 태산북두보다도 훌륭하니 大爺聲望斗山重
황조에서 등용하시어 태평성세를 기대하시네 徵用皇朝期太平
삼가 皐水 수상에게 바치다(謹呈皐水首相 幷序)
1934년 4월 20일 아들 한창수가 내지견학을 갔다가 皐水 수상 각하를 뵈려고 했습니다. 이때 상공께서는 약간 편찮으시어 방문객을 사절하셨는데 우리 아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2시간 정도를 접견하시고근래 조선의 사정 등을 하문하신 것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물러날 것을 고하려고 하는데 또한 귀중한 기념품을 은혜롭게도 내려주시었습니다.
때마침 비가 오자 상공께서는 집에서 사용하시는 우산을 친히주시며 ‘비에 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처럼 북쪽 변방에 사는 한미한 우리가 외람되게 존귀하신 일국의 총리로부터 특별 은혜의 혜택 을 입은 것은 그 영광을 애초에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하물며 그 부형된 처지에 있으며 어찌 그 황송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기념품과 우산은 정중히 간직하고 아끼어 보호하며 우리 집안 대대로 보물로 삼았으며 시 한수를 엮어 보잘 것 없는 저의 정성을모두 기록합니다.
동도의 소식 우리 아이가 편에 들으니 東都消息聽兒來
皐水 어른을 뵈었다 하네 得謁皐翁壯眼開
萬頃의 은파 바다와 같이 넘실대기에 恩波萬頃濶如海
정성된 마음으로 태산북두 같은 어른께 잔을 올립니다 把獻微忱山斗杯
미나미 지로 대장께서 친히 은혜로이 써주신 것에 감사하며(謹謝南次郞大將親筆惠賜)
갑술 7월 旣望에
우러러 뵙길 태산북두와 같이 한 것 이미 수 년 仰如山斗已多年
공경스레 휘호를 받잡으매 기뻐 잠도 오지 않네 祗奉揮毫喜不眠
졸저의 첫머리에 넣으니 (내 책의)광채가 배가 되는 듯 首題拙集倍增彩
특별한 은혜 깊이 느끼며 대대로 보물로 전해주리라 窈感殊恩世寶傳
병자년 신춘에 삼가 사이토 대신에게 바치다(丙子新春謹呈齋藤內大臣)
昭和의 시대, 천지는 봄을 맞이하네 昭和天地迓新春
어른께서는 보필하는 신하로 계시어 老子方居輔弼臣
오색 구름 서린 깊은 곳에서 천황을 가까이 모시며 五雲深處 天顔近
머리는 백발이지만 뜨거운 충정으로 내각에 계시네 白髮丹忱在協寅
皐水 어른을 애도하며(哭皐水老子)
(1936년 2월 26일 薨去하셨다)
동양의 인물이라 칭해진 이분께서 東洋人物稱斯翁
무슨 일로 갑자기 돌아가셨나 何事奄然不考終
가만히 지난번 말씀드리지 못한 걸 생각해보니 靜憶曩時欲無語
눈물이 날리는 눈과 하나 되어 차가운 바람에 흩어지네 淚和飛雪灑寒風
흉보에 세상사람 모두 놀라니 凶音一出世皆驚
나만 통탄하며 실성한 것이 아니구나 非直惟吾慟失聲
공처럼 공훈과 업적을 쌓은 이를 다시 어찌 얻으리오 如公勳業更何得
불후의 명성 청사에 길이 전해지리 靑史長傳不朽名
빛나는 편지 연이어 쉬지 주셨으니 赫蹄陸續無虛月130)
천리의 교분이 나보다 더한 이는 없으리라 千里神交莫我加131)
이미 남은 여생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니 已矣餘生難再合
유묵을 만지며 눈물을 삼대처럼 주룩주룩 흘리네 摩挲遺墨淚如麻
공과 함께 서리가 내리는 것을 즐겼고 與公一識甘霜餘
깊이 은혜를 입은 것이 바다와 같네 深荷恩光河海如
근역도 내지의 州域과 하나로 보시고 槿鄕把視幷州域
영혼이라고 찾아오시길 바라나이다 庶幾英魂訪我居
130) 얇고 작은 종이. 편지. 여기서는 寺內총독이 준 詩 또는 휘호를 지칭하는 듯하다.
131) 속세를 떠나 자연에 동화된 상태의 차원 높은 교분을 나누자는 뜻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 초왕(楚王)의 사신을 물리치고 복수에서 낚시를 했던 장자의 고사와, 친구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 위에서 물고기의 뛰노는 것을 즐겼던 장자의 고사가 실려 있다.
미나미 지로 대장이 조선총독으로 친임하는 것을 축하하며(祝南次郞大將朝鮮總督親任)
1936년 11년 8월
조선에 총독으로 다시 오시는 걸 환영하니 鰈域再迎熊軾來132)
그늘진 벼랑의 초목은 다시 빛을 발하게 되리라 陰崖草木發榮回
바다와 같고 산과 같은 은혜를 특별히 받았으니 曾荷殊恩如海嶽
미천한 제가 미력이라도 보태어 보답하려는 정성 더욱 간절하나이다 淺誠尤切報涓埃133)
미나미 총독을 알현하고 감회를 쓰노라(謁南總督述感)
병자년 9월 8일
초가을에 총독께서 조선에 부임하시니 總督新秋拜舊緣
접대해주시는 온화한 기운에 문득 따뜻해졌네 接人和氣覺溫然
華美함을 거두어 質實함을 취하며 言外之意를 드러내시니 歛華就實露言表134)
어찌 이리 늦으셨냐는 노래 소리 강토 내에 연이어 울리네 來暮歌聲疆內連135)
갱생부락 시찰 감상을 미나미 총독에게 써서 바치다(更生部落視察感想書呈南總督136))
농촌과 어촌에 오늘 날 갱생부락이 늘었지만 農漁今日更生積
태반은 내용이 허식이라네 太半內容虛飾爲
형식적인 것은 근본책이 아니니 形式此非根本策
실천하여 통치에 들어맞게해야 한다고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不言踐實適當治
1936년 11월 1일 미나미 총독이 북선시찰에 올랐다가 귀임하시던 도중에 前津驛137)에서 잠시 하차를 하셨다.
특별히 접견하시며 휘호도 주셨기에 시 한편을 지어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昭和十一年十一月一日 南總督 北鮮視察歸任途中 於前津驛 暫時下車 而特爲接見 兼贈揮毫 卽賦一絶以表感謝之微衷焉)
삼가 총독을 환영하며 금과 같이 고귀한 말씀에 절하노니 奉迎玉節拜金言138)
132) 수레의 식(軾)을 곰의 형상으로 꾸민 화려한 수레를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여복지 상(輿服志上)에 “삼공(三公)과 열후(列侯)는 녹교(鹿較)·웅식(熊軾)에 검은 깃발을 단 수레를 탑승한다.”고 하였다
133) 한 방울의 물로 바다에 보태고, 한 티끌로 태산에 보탠다는 뜻이다
134)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제37장 대주에 나오는 정자(程子)의 주설(註說)인 ‘下學上達·意在言表’에서 나왔다.
135) 한(漢) 나라 염숙도(廉叔度)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푸니 백성이 노래 부르기를, “염숙도는 왜 늦게 왔는가.(廉叔度 來何暮)” 하였다.
136)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이 진행될 때 7만여 개를 전후한 촌락을 대상으로 갱생부락(更生部落)이 설정되었는데, 이는 1910년의 동리 수 6만 3천여 개를 상회하는 것이었다.
137) 함남 홍원에 있다.
제가 무엇이라고 이 같은 은혜를 입었나요 我是何人荷此恩
공과 같은 자애와 덕망은 고금지간에도 드무니 如公德愛稀今古
깊이 마음에 새겨 잊지 않겠나이다 深鏤靈臺不敢諼139)
미나미 총독이 조선의 고령자 초대연을 개최한다는 것을 듣고(聞南總督全鮮高齡者招待宴開催)
1936년 11월 9일
옛날 태평성세에는 기영회가 있었다고 하던데 昔聞昭代耆英會
오늘, 용산에서 경로연이 열렸네 今有龍山敬老宴
총독의 온정에 모두들 감동의 눈물 흘리니 總督溫情皆感泣
위로의 마음과 성대한 잔치 실은 이전에는 없었네 慰安盛典實空前
三老寓慕詩選을 편집하고 난 후 감상(三老寓慕詩選編輯有感)
근역 팔도 모두 은혜의 빛을 입었으며 槿花八域摠恩光
세 어른의 영명한 풍모는 백세보다도 더 길이 남으리 三老英風百世長
받은 것은 산과 같으나 갚을 길이 없어 受賜如山報無述
三老寓慕詩選 한 권을 지어 앙모의 정을 표하네 選詩一卷是羹墻
<출전 : 韓準錫, '三老寓慕詩選', 井上淸方, 1937년 6월 5일>
7. '경남일보' 게재 친일시문(1909~1913)140)
1) 이등공조화상보(伊藤公遭禍詳報)
고(故) 태자 태사공작(太師公爵) 이등박문(伊藤博文) 씨가 이번에 북만주 여행 중에서 불행히 암살을 입음은 오인(吾人)의 이미 아는 바이거니와 지금 그 상보를 기재하노니140)
138) 옥으로 만든 부절(符節)인데, 천자의 사신을 옥절사(玉節使) 혹은 옥절랑(玉節郞)이라고 한다. 여기서 미나미 총독의 행차를 지칭한다.
139) 靈臺는 마음이다.
140) '경남일보'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되어 한일합병 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함께 발행 허가된 유일한 지방일간지로서, 1909년부터 1913년 사이에 위암 장지연이 주필을 지냈다. 장지
이등공이 지난 10월 18일에 철령환(鐵嶺丸)을 탑승하고 대련만에서 상륙하여 여순(旅順)·봉천(奉天)·장춘(長春)등 각지를 유력(遊歷)한 후 지난 26일 오전 9시에 다수의 수행원과 함께 하얼빈(哈爾賓)[중국 길림성에 있으며, 반은 러시아령이다(在淸國吉林省半是俄領)] 정거장에 도착하니 러시아와 일본양국 관민이 다수 출영(出迎)하고 우리 병사들이 좌우에 파렬(擺列)하였는데 아국(俄國) 대장대신(大藏大臣) 고고스오아우 씨가 열차 내에 내방함에 따라 약 20분간을 담화한 후에 동지(同地) 주재 일본영사천상(川上) 씨의 선도로 일동 하차하여 각국 외교단과 청·러시아 군대와 문무 관리와 기타 환영 제단체가 정렬(整列)한 앞으로 보행하면서 순차 악수를 행한 후 다시 돌아서려할 때에 아국(俄國) 군대의 정렬한 측에서 돌연히 굉폭(轟爆)의 성(聲)이 발하면서 수명의 양장(洋裝)자가 군중을 밀치고 전면에 도출(挑出)하여 3개의 탄환이 우복배부(右腹背部)를 적중하여 이내 곧 쓰러져 혼절한지라 만철(滿鐵)141)총재 중촌(中村) 씨가 공(公)을 둘러싸고 아국 관헌이 일동 구호(救護)하여 기차 내로 환입(還入)함에 일본 의사 2명이 병원에 도착하여 응급치료를 하였으나 한발은 폐부(肺部)를 관통하고 두 발은 복부에 들어가 30분간에 드디어 절명하였는데 일본영사 천상 씨와 비서관 삼괴남(森槐南) 씨와 만철이사 전중(田中) 씨도 또한 모두 탄환을 맞아 급히 치료하는 중이라더라.
이등공의 유해는 동일 오전 10시에 기차로 발귀(發歸)하여 다음 날 아침 8시에 대련에 도착하였는데 군함 추진주(秋津洲)에 탑재하여 본월 2일 신교역(新橋驛)에 도착한 후 군대로써 호위하고 4일 오전 9시에 영남판관저(靈南阪官邸)에서 출구(出柩)하여 대삼은사관(大森恩賜館)부근에 국장례(國葬禮)를 행하였고 상주는 그 사자(嗣子) 박방(博邦) 씨가 현재 프랑스의 수도 파리(巴里)에 있으므로 차자(次子)문길(文吉) 씨로 대주(代主)한다는데 일본 황실에서 국장비로 4만 5천 원을 하사하시고 종 1위를 가증(加贈)하였다더라.
행흉자(行兇者) 포박 이등공을 암살한 자는 즉시 아국(俄國)관헌이 포박하여 일본 영사에게 압교(押交)하였는데 아국(我國)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사람 안응칠(安應七)이라 불리는 자이니, 현재 나이 31세오. 천주교도로서 3~4년 전에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浦鹽斯德)로 왕왕하던 자라 포박할 당시에 또한 그 도당 6~7명 수포(搜捕)하였고 그 외에 혐의 연계자로 피포(被捕)한 자 수십 인인데 그 예심지(豫審地)는 관동(關東) 도독부 고등법원에서 할 터인 고로, 지난 달 31일에 이 수범(首犯)을 여순으로 압송하였다더라.
<출전 : 「伊藤公遭禍詳報」, '慶南日報', 1909년 11월 5일>
연이 주필을 지내는 동안 '경남일보'는 처음에는 실업장려와 민지개발 등을 표명했으나 의병진압에 대한 관찰사와 일본군 수비대의 동정을 게재하는 등 일제 통감정치에 부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일합병 후1910년 10월 11일자에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하여 정간을 당한 후 같은 달 25일 다시 재발행되면서 신문의 논조가 노골적인 친일협력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즉 일본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마다 제호에 일장기를 게재하고 특집호를 발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보도내용으로 신문을 꾸몄는데, 이 시기 위암 장지연이 주필로 있었다. 이번 사료집에 실은 글들은 장지연이 주필로 있던 1909년부터 1913년시기에 게재된 친일시문을 뽑아놓은 것이다.
이후 장지연이 건강상의 이유로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경남일보'는 1915년 경영난으로 폐간되었다.
141)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러일전쟁 후 획득한 중국 동북지역의 침략을 목적으로 설립한 국책회사.
2) 황상폐하우례은전(皇上陛下優禮恩典)
황상폐하께서 이등박문(伊藤) 태사(太師)의 변보(變報)를 접하시고 □□(□□)하심을 불기(不己)하셔서 27일에 즉시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을 명하셔서 대련(大連)으로 전왕(前往) 위문하게 하시고 덕수궁에서도 승녕부(承寧府) 총관 조민희(趙民熙)를 명하여 위무하게 하셨는데 윤, 조 양(兩)칙사와 이총상(李總相)142)은 당일 광제호(光濟号)를 탑승하고 대련으로 발향(發向) 도착하자 태사 영구(靈柩)가 이미 떠났으므로 전속력으로서 해중(海中)에 추지(追至)하여 다만 조례(吊禮)만 요시(遙施)하였고 다음날 28일에는 관보 호외로써 태사의 훙서(薨逝)함을 반포(斑布)하였고 동(同) 오후 3시에는 황상폐하께서 친히 통감부(統監府)에 훈가(勳駕)하셔 조위례(吊慰禮)를 행하시고 3일간 정 조시(朝市) 정 음악의 명(命)을 내리시며 우악(優渥)143)하신 조칙(詔勅)을 특별히 내리시어 관내부로 장수(葬需) 십만 원을 하사케 하시고 절혜지전(節惠之典)을 특거(特擧)하사 문충공(文忠功)의 익호(謚號)를 하사하시니라(道德博文曰文慮國忘
家曰忠) 다음 29일에 황태자 폐하께서 이등태사의 상(喪)에 사제(師弟)의 예로 3월 심상(心喪)의 복제(服制)를 반시(頒示)하셨고
궁내부 대신 민병석(閔丙奭)을 명하사 일본국에 전왕(前往)하여 이등태사의 장례에 참렬(參列) 치제(致祭)케 하시고 승녕부(承寧府) 부총관 박제빈(朴齊斌)은 태황제 폐하의 칙명을 봉승(奉承)하여 장례참석차 같은 날 발정(發程)하였다더라.
○ 각 대표 조위(吊慰)
이등태사 장의(葬儀)에 참여하기 위하여 추밀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씨는 원로대표로 농상(農相) 조중응(趙重應) 씨는 내각대표로, 유길준(兪吉濬) 씨는 한성부민 대표로, 고희준(高羲駿) 씨는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 대표로, 조진태(趙鎭泰) 씨는 실업단 대표로, 정병조(鄭丙朝) 씨는 종교단 대표로 홍긍섭(洪肯燮) 씨는 일진회 대표로 함께 도일(渡日)하였다더라.
○ 연루(連累)자 피포설(被捕說)
이번 이등태사 암살사건에 대하여 행흉자(行兇者)의 거주지의 관계로 모모(某某) 저명자(著名者)들도 혐의로 피체(被逮)한 자 많고 또 기타 각지에 하류 인민 간에도 왕왕(往往)히 언어를 불신하다가 피착(被捉)한 자 많다더라.
吊
伊藤公輓詞
天性英傑與時酬
142) 총리대신 이완용을 뜻함.
143) 은혜가 매우 넓고 두터움을 뜻함.
壯歲功名到白頭
堪恨白山埋骨意
西風吹送吉林秋
1.
身佩安危五十霜
家家爭誦姓名香
不但經綸完事業
文學風流亦擅傷
2.
忘身憂國鬢成華
宇內場各政治家
玉笛聲中懷舊感
可憐寒月照黃花
<출전 : 「皇上陛下優禮恩典」, '慶南日報', 1909년 11월 5일>
3) 관찰사의 면유민인(面諭民人)(1~3)
관찰사의 면유인민144)
본월(本月) 10일에 본도(本道) 관찰사(觀察使) 황철(黃鐵) 씨가 주사(主事) 조명진(趙明晉) 씨를 대동하고 진주(晉州) 수비대장과 산청지(山淸地) 덕산(德山) 수비대에 출왕(出往)하여 산청(山淸) 하동(河洞)단성(丹城) 삼군 인민 600여 명을 취집(聚集)하고 폭도 귀순에 관한 의미로 훈유(訓諭)하였는데 그 대요는 여좌(如左)하니
본사(本使)가 이번 수비대장과 내차(來此)함은 오로지 폭도 귀순 권유에 관함이라. 그러나 대소(大小)인민은 농무번망(農務繁忙)함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많이 취집함은 실로 감사함이라.
본사가 작년에 하동(河東)으로 내차할 때에 하동군에는 귀순한 폭도가 96명 내에 90명은 전비(前非)를 회개하여 영원
히 선량한 인민이 되고 6명은 전비를 복도(復蹈)하여 필경 5명은 피살되고 1명은 종적이 불명하며, 산청군(山淸郡)에는 76명 내에 74명은 전비를 회개하여 역시 선량한 사람이 되고 2명은 종적이 불명하니 하동 6명과 산청 2명으로 하여금 모두 선량한 사람이 못되게 함은 본사의 실로 유감 된 바라.
금번 전
144) 첫 번째 글의 제목에만 ‘民人’이 아닌 ‘人民’으로 되어 있다. 연속되는 글이라서 통합했다.
남(全南) 폭도 대토벌한 결과로 이학증(李學曾), 이백인(李伯仁) 서(徐)모 등이 자칭 대장이라 하고 부하7~80여 명을 영솔(領率)하고 전남으로부터 경남지방으로 도월(逃越)하여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고 하동,단성, 삼가(三嘉), 함안(咸安), 사천(泗川), 삼천포(三千浦), 안마산(安馬山) 등지로 출몰이 무상하며 잔민(殘民)을 협박하여 재산을 약탈하고, 우민(愚民)을 권유하여 입당(入黨)을 위협함에 우민은 곧 피해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재산약탈을 당하여도 감히 일언(一言)을 발하지 못하고 은닉(隱匿)으로만 위주(爲主)하니 이는 멸망(滅亾)을 자초하는 것이다.
내가 작년에 내차할 때에 간절히 훈유하였거니와 대저 인민의 중요한 바는 무엇인가 하면 식(食)이 곧 민천(民天)이니, 민의 부는 곧 국가의 부라. 폭도무리가 인민의 재산에 해함은 즉, 국가의 부를 해함인즉, 민과 국가가 부유하지 않고 천하에 독립국이 어찌 있으리오. 그러나 저 무리가 상이충군(常以忠君)이니 애국이니 하면서 우민을 광혹(誑惑) 선동(煽動)하여 지금까지 수 3년에 우리나라 인민의 성명재산(性名財産)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悲境)에 빠졌는고. 이는 본사(本使)가 말하지 않아도 일반 인민들이 모두 아는 바라.
그러나 저 이학증(李學曾), 이백인(李伯仁), 서모(徐某)등이 지금이라도 전의 죄를뉘우치고 개심하여 귀화하면 역시 일반 양민으로 인정하여 미래의 행복을 함께 누릴게 할 것이니 인민등은 아무쪼록 본사의 이와 같은 성의를 저 무리에게 전달하여 후회가 없게 함을 절망(切望)하노라.
(미완)
황 관찰 귀임. 본도 관찰사 황철(黃鐵) 씨는 산청 하동 단성 등 군인민에게 폭도귀순에 관한 일을 면유(面諭)145)하고 그저께 환임(還任)하였더라.
(이상 1)
관청휘보(官廳彙報) -관찰사(觀察使)의 면유민인(面諭民人) (속)
이번 수비대의 방침으로 말하면 소수의 폭도가 촌락을 침입하면 해촌(該村)의 민력(民力)이 능히 폭도를 포박할만 하되 후환을 생각하여 도리어 선대은닉(善待隱匿)하는 일이 혹 있으면 해당 촌은 폭도의간련(干連)146)으로 인정(認定)하여 필경 오살(鏖殺)147)을 면키 어려울 것이니 일반인민은 이 말을 체청(諦聽)148)하여 후회 없이하고 또한 각각 귀가 후에 대소 촌민에게 일체 애절히 전론(傳論)하되 그 전론여부는 차후 수비대장이 촌촌 순회하면서 인민에게 탐방할 터이니 일개 촌민이라도 불문부지(不聞不知)라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책벌(責罰)은 여기 내참(來叅)한 각 면 동장이 난면할 것이니 삼가 유념할지어다.
또한 금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반 인민에게 특별히 훈론(訓論)할 사(事)가 있으니 대저 오인(吾人)이 발달(發達)을 계도(計圖)고자 할진대 혹은 살육을 먼저 한다 하며 혹은 식산(殖産)을 먼저 한다 하여
145) 면전에서 말로 잘 타이름.
146) 남의 범죄에 관련이 있음.
147) 죄다 무찔러 죽임.
148) 주의하여 자세히 들음.
종종 고론(高論) 탁설(卓說)이 비등(沸騰)하나 오직 본사(本使)는 도로(道路)라 하노니 무엇인가 하면가량(假量) 진주(晉州)에서 조(租) 일석 시가(市價)가 4원이면 여기는 조 1석 시가가 2원 이내라. 진주보다 2원이 헐함은 다름이 아니라 도로의 불통한 결과로 운임이 고등함이니 (미완)
(이상 2)
관찰사의 면유민인 (속)
그 손해(損害)는 즉 이곳 인민의 손해요. 또 수입의 물건은 이에 의하여 등귀(騰貴)한즉 수출의 물건은 헐(歇)하고 수입의 물건은 고(高)하여 양자의 수손(受損)이 어찌 크지 않으랴. 만고(萬苦) 도로가 평탄하여 우마차가 무난 통행하면 매차에 조 5백석은 능히 실을 터이니 여기에서 진주(晉州)에 이르기까지 겨우 80리가량인즉 임전(賃錢)이 매석에 10전내외인즉 불과하리니, 그러한 즉 조 1석에 대하여 1원90전 가량이 생리(生利)가 된 즉 이는 즉 이곳 인민의 소득이라. 수입의 물건도 역시 이에 의하여 헐할것이니 양자의 소득이 어찌 크지 않으랴. 그런 즉 일거양득의 이윤이라. 이와 같은 상황을 확지(確知)하면 여기 인민이 반드시 이의가 없을지니 내년 춘절에는 속히 진주 단성간과 진주 산청간과 진주 산동간에 진주 덕산간에 민력(民力) 부담으로 착수 할 터이니 일반민중은 진력(盡力)을 다함을 절망(切望)하노라.
또 폭도에 관한 자세한 세유(說諭)는 수비대장이 설명할 터이오. 본사(本使)는 약간 박주박효(薄酒薄肴)149)로 미정(微情)을 표하노니 대소민인은 만족하기를 바라노라. (飮)
(이상 3)
<출전 : 「觀察使의 面諭民人」, '慶南日報', 1909년 11월 16일~18일>
4) 경절휴업(慶節休業)
본 군수 박정규(朴晶奎) 씨는 작일(昨日) 각 면장에게 유고문(諭告文)을 발함이 여좌(如左)하니 내월(來月) 3일은 천황폐하 탄생일 천장절(天長節)이라 국민이 전체 휴업하고 축의(祝意)를 표하는날인 고로, 전일(全日) 개시(開市)를 다음 4일로 연기(延期)할 사(事)로 정한지라 이 취지(趣旨)를 일반인민에게 무유(無遺) 시달(示達)하여 국기(日章旗)를 문 밖에 게양하고 성절(聖節)의 의(意)를 표하라하였다더라.
<출전 : 「慶節休業」, '慶南日報', 1910년 10월 27일>
149) 소박한 술과 소박한 안주.
5) 천장절 축하의식
본사의 주최로 오는 11월 3일 천장절의 축하의절은 당지(當地) 성내(城內), 대안(大安), 봉곡(鳳谷),옥봉(玉峰), 각 면·동장과 유지(有志), 신사(紳士)와 협의하여 좌(左)와 같이 정함.
- 당일 오후 당지(當地) 수정봉상(水晶峰上)에 ‘축천장절(祝天長節)’ 4대자(四大字)의 의식으로 천지(千枝)의 등화(燈火)를 괘장(掛張)함
- 당야(當夜)에 각 면·동 신사(紳士) 등은 동(同)장소에서 경축회(慶祝會)를 개최함.
- 당야에 경축 여흥(餘興)은 각 그 기예를 연장(演張)함.
- 당야 12시에 개회함.
<출전 : 「天長節祝賀儀式」, '慶南日報', 1911년 10월 31일>
6) 축 천장절
동쪽 바다 일본에서 해가 떠오르니 태양이 빛나는구나 日出扶桑 赫赫太陽
무지개와 북두성이 정기를 길러 우리 천황께서 나셨다 虹斗毓精 誕我天皇
보위에 오르신지 44년 동안 성수무강하셨네 踐阼四四 聖壽無疆
덕과 은혜가 두루 미치고 위엄이 널리 빛나는구나 德惠被溥 威嚴宣光
뭇 백성들을 어루만지시니 우리 동양의 기초를 세우셨네 撫恤羣黎 奠我東洋
오호라 이러한 해가 만년이 되어 영원하리라 於萬斯年 地久天長
<출전 : 「祝天長節」, '慶南日報', 1911년 11월 2일>
7) 천장절 축하 성황
예보와 같이 그저께 상오(上午) 9시 30분으로 시작하여 천황폐하 어진배하식(御眞拜賀式)을 거행하고 동(同) 11시 도청(道廳) 정전(庭前)에서 일선인이 합동하여 취집(聚集)한 후 향천(香川)장관이 축사한 후 이어 만세를 삼창(三唱)하고 원유회(園遊會)를 열었는데 과자, 다주(茶酒), 고기 등의 모의점(模擬店)에서 다수 환락을 함께하고 일본 예기(藝妓)의 수용(手踊)150)과 조선 기생의 가무로써 일대 희락을 정(呈)하였고 동(同) 하오 6시에는 망월루(望月樓)에서 일선인의 대간친회(大懇親會) 겸 축하식을 설행(設行)하여 경무부장 전전승(前田昇) 씨가 축배를 수연(首演)하고 진주(晉州) 만세(萬歲)를 삼창한 후 식탁에 취(就)하여 일본기생의 수용, 조선기생의 가곡 중으로 일장(一塲)에 굉주(觥籌) 교착(交着)하여 한전
150) 手踊り : 사미센(三味線)에 맞추어 추는 춤. 앉아서 손으로만 추는 춤.
(罕前)의 성황(盛況)을 정(呈)하였더라.
<출전 : 「天長節祝賀盛況」, '慶南日報', 1910년 11월 5일>
8. 기타
1) '대동사문회보' 창간문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읍을 하고서 묻기를,
“대동사문회보는 무슨 목적으로 만든 것입니까?”
하기에, 내가 응답하기를,
“대동사문회가 이행한 사업을 보고하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하자, 또 묻기를,
“대동사문회는 무엇을 위하여 설립한 것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우리 사문(斯文)이 시들시들해져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설립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묻기를,
“무슨 이유로 사문이 시들시들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물었으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조선의 사문으로 말하면, 울연히 일어났다가 찬연히 이루어졌는바, 아주 아름다워서 주(周)나라와 노(魯)나라의 풍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200년이 지나는 사이에 문운(文運)이 점차 쇠해져 왕도(王道)가 크게 쇠미해졌습니다. 이에 시골에서 글을 읽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능히 성인의 글을 읽으면서도 능히 성인의 일을 행하지 못하여, 재주를 감추고 자취를 숨긴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점차적으로 사특한 설이 더욱더 치성해지고, 퇴폐한 풍속이 점점 더 불어나, 마치 홍수가 하늘에 닿는 것과 같아 이미 구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이와 같이 된다면 마침내는 서로 간에 함께 물에 빠져 죽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사문이 점차 시들시들해져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사문이 쇠약해진 것이 과연 그와 같습니까? 제가 일찍이 듣건대, ‘한 사람이 인(仁)에 흥기하면 한나라가 인에 흥기하고, 한 사람이 양(讓)에 흥기하면 한 나라가 양에 흥기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공부가 능히 그 자신의 한 몸만을 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능히 천하의 사람들을 착하게 할 수 있는바, 때에 따라서 잘 행한다면, 한 사람만 있어도 역시 그 도를강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여러 사람을 끌어 모은 이후에 능히 성인의 도를 강구할 수있단 말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룩하여서 임금의 스승이 되는 자리에 있으며, 어질어서 은택을 끼칠 수 있는 직임을 맡고 있다면,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경우에 이르러서는, 시대를 걱정하고 세상을 구하는 방도는 참으로 한 사람의 지혜로써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뜻을 달리 하는 사람은 떼어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은 모으는 의리로써 동지들을 규합하여 서로 제휴하고, 시골에 숨어사는 선비들의 마음을 일깨워 정신을 가다듬게 한 다음, 기질을 변화시켜 후학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방도로 길러 영재를 양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륜이 거듭 밝혀지고 예의를 다시 행해지게 해, 하늘이 준 착한 성품을 되돌리고 양의 기운이 다시 오게 해, 도가 쇠퇴해진 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되고, 새와 짐승과 뒤섞여사는 것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이 대동사문회를 설립한 것이 세도를 만회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조선사문회라고 하지 않고 대동사문회라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현재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천하가 문명(文明)하다고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문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약한 자가 강한 자의 먹이가 되는데, 그것을 일러 우세한 자가 이기고 열세한 자가 지는것이라고 하며, 계명(鷄鳴)151)으로써 이익을 삼고, 학주(壑舟)152)로써 욕심을 삼는데, 그것을 일러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창과 칼로 서로 해쳐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는바, 까마득히 먼 왕도(王道)는 논할 것이 못된다고 할지라도, 패도(覇道)를 가지고 인(仁)과 의(義)인 척하는 것마저 오히려 볼 수가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풍기(風氣)가 점차 실추되고, 도의(道義)가 함께 상실되어, 우리 사문(斯文)이 미치는 범위 안의 5억 명이나 되는 인구가 깜깜한 밤에 부는 비바람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범의 꼬리를 밟으매 사람을 무는 시대153)에는 우리 사문을 부흥시켜서 대동(大東)에 퍼져나가게 하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지금 자그마한 지역에 한 모임을 설립한다고 해서 이 대동의 천지로 하여금 능히 환하게
151) 계명(鷄鳴) : 계명구도(鷄鳴拘盜)와 같은 말로, 비열한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때 진 소왕(秦昭王)이 맹상군(孟嘗君)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 하자, 맹상군은 그의 문객 중에서 개 도둑질 잘하는 사람을 뽑아 진나라 궁중에 있는 호백구(狐白裘)를 훔쳐 내게 하여 진 소왕에게 바치고 풀려난 다음, 또 문객 중에서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내게 하여 관문이 열리게 해 국경을 탈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孟嘗君傳
152) 학주(壑舟) : '장자(莊子)'에 “구렁(壑)에다 배(舟)를 숨겨 놓으면 견고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한밤중에 힘쎈 사람이 등에 지고 달아나 버리면, 우매한 자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이 말은 흔히 모든 사물이 끝까지안전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큰 것을 훔치는 뜻으로 쓰이었다. '莊子' 大宗師.
153) 범의……시대 : 강자가 약자를 해치는 위태로운 시대라는 뜻이다. '주역(周易)' 이괘(履卦) 육삼효(六三爻)에 이르기를, “범의 꼬리를 밟아 범에게 물리니 흉하다.(履虎尾 咥人 凶)”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다시 밝아지게 하는 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성인(聖人)의 도는 해와 달의 광명과 같아, 해와 달이 한쪽 방면에서 떠오르면 천하가 밝아질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찬란하게 다시 밝히는 공을 이룰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하였다.
그러자 다시 또 묻기를,
“이미 사문이 시들시들해져 떨치고 일어나지 못함이 과연 오늘날과 같다면, 이처럼 한창 위급한 시기에 어느 누가 성인의 도를 강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설령 강구하고자 하더라도 어느 겨를에 밝은공효가 크게 징험되겠습니까. 저로서는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옛사람 가운데 배 안에서도 '대학(大學)'을 강론한 자가 있었던 것154)은, 짧은 사이에서도 마음을 바로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과연 학문을 강론하여 그 실제를 구하고 그 실제를 실천하면서 오늘 한 가지 나쁜 점을 고치고 내일 한 가지 착함을 행하여, 점차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나간다면, 7년 묵은 병에 3년 된 쑥을 구한 것155)을 증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에 대한 공효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또 묻기를,
“그렇다면 이 사문회를 설립하였다면 온힘을 다해 행해 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또 회보를 만든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어째서 그런 것을 물으십니까? 성인이 오늘날에 나와서 비록 각자에게 귀에 대고 고해주고 얼굴을 대고 명해 주더라도 오히려 집집마다 가서 깨우쳐주고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제 성인의 문호(門戶)를 설립하고 성인의 경전(經傳)을 강구하고, 형이상학(形而上學)의 도(道)와 형이하학(形而下學)이 기(器)를 구하면서, 크게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부터 작게는 일용사물(日用事物)에 이르기까지를 해박하게 되었을 경우, 요행히 한 경의 장구(章句)를 사숙(私淑)하게 되었으면, 이세상에 나아가 질정(質正)을 해야 하고, 다행히 한 선비가 경행앙지(景行仰止)156)함을 얻게 되었으면,
154) 옛사람……것 : 송나라의 육수부(陸秀夫)가 배 안에서 '대학'을 강론한 것을 말한다. 육수부는 남송(南宋)말년에 원(元)나라와의 협상이 결렬된 뒤 장세걸(張世傑) 등과 함께 익왕(益王)을 세우고 피신하였으며, 익왕이 죽자 다시 위왕(衛王)을 세워 쓰러져가는 송나라를 안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였는데, 피난하느라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도 날마다 '대학장구(大學章句)'를 써서 강론하였다. 그 뒤 원 나라 군대가 애산(厓山)을 격파하자 처자를 장검으로 위협해 바다에 몰아넣고 자신은 위왕을 등에 업은 채 바다에 빠져 죽었다. '宋史' 卷451.
155) 7년……것 : 오래 된 병통을 치료할 수 있는 좋은 약을 얻은 것을 뜻한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지금 천하에 왕을 하려는 것은 마치 7년 묵은 병에 3년 묵은 약쑥을 구하기와 같으니, 이제부터라도 미리 약쑥을저축해 두지 않으면 종신토록 얻지 못할 것이다(今之欲王者 猶七年之病求三年之艾也 苟爲不畜 終身不得)”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56) 경행앙지(景行仰止) : 고상한 덕행(德行)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이르기를, “높은 산처럼 우러러 보며, 큰 길을 행하도다.(高山仰止 景行行止)”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이 세상에다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권과 한 질의 서책을 얻었으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여야 하고. 한 장(章)과 한 편(編)을 저술하였으면 이 세상에 두루 퍼뜨려야만 합니다.
옛날의 일에 대해서는 두루 알면서 오늘날의 세상에는 통하지 못하는 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에 빠져서 옛날을 스승으로 삼지 못하는 것도 역시 도가 아닙니다.
'주역(周易)'에서“물건을 구비하여 쓰임을 지극히 하고, 기물을 이루어 천하의 이로움을 삼음은 성인보다 더 큰 것이 없
다.(備物致用 立成器 以爲天下利 莫大乎聖人)” 하였습니다. 그러니 부득불 시무(時務)를 연구하고 사리(事理를 통달하여, 잘 이용할 만한 한 가지 물건을 얻었거나 우리의 삶을 두텁게 해 줄만한 한 가지 일을 얻었을 경우, 또한 세상에 널리 베풀어야 합니다.
그 나머지 문첩(文牒)이 오가는 것이나 비용(費用)이 출납(出納) 되는 것이나 집회(集會)의 의안(議案) 등은 일일이 세상에 공표하여,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듣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이 회보가 아니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회보가 만약 널리 배포되고 두루 유포된다면, 비단 본회의 동지들뿐만 아니라, 우리 대동(大東)의 동포들이 모두 흥기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회보가 어찌 없어서야 되겠습니까?”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묻기를,
“회보 사이에 시사(詩詞)를 끼워 넣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시(詩)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바르게 하고, 풍화(風化)를 고무시키는바, 시 역시 한 가지 가르침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풍(風)에는 채빈(采蘋)과 채번(采蘩)이 있고, 아(雅)에는 행위(行葦)와 형작(泂酌)이 있는데, 이는 충신(忠信)을 밝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시가 인심과 풍속에 관계됨이 이와 같이 큽니다. 그러니 고금의 시사(詩詞)를 넣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문체(文體)에 각각 같지 않은 점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답하기를,
“순전히 한문(漢文)으로만 쓴 것은 훈고(訓詁)의 체(體)를 써서 노성(老成)한 숙덕(宿德)에게 강론하기 위한 것이며, 언문(諺文)을 섞어서 쓴 것은 언문으로 뜻을 해석하여 몽매한 사람들을 권장하기 편하게 한 것이며, 혹 순전히 언문으로만 쓴 것은 부인네나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한번만 보고서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각자의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감화시킴에 있어서 같지 않은 바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하였다.
그러자 객이 그 말을 듣고 환히 깨닫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대동사문회보를 가지고 목탁(木鐸)으로 삼을 것입니다.”하였다.
이에 서로 간에 문답한 내용을 가지고서 첫머리에 실어 서문으로 삼는 바이다.
<출전 : 大東斯文會, 「大東斯文會報創刊文」, '大東斯文會報' 1호, 1920년 4월 30일>
2)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 일본정신과 유교
문학박사 모로하시 데쓰지 선생 강술
제1강 양자의 관계
본 강의의 목적
일본정신과 유교라는 것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그리고 있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것이 본 강론의 목적인 것입니다. 제2강 이하는 전부 유교에 관한 것이지만, 그 강의에 대해서는, 여러분으로부터 이것을 일본정신이라고 하는 것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각을 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좋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 일본정신의 해부
내용에 들어가서, 지금 가령 일본정신을 해부한다고 제목을 붙여 보았으나, 제 자신은 일본정신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전공하고 있는 여러분에게 조금 물어 보았습니다.
입으로 물어보는 것은 어차피 간단하며, 그 극의(極意)를 전부 다 들을 수가 없지만, 그 때문일까요, 아무래도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조금 좋은 서책이 있으면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더니, 몇 가지의 책을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제시받았음으로, 자신의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읽어 보았으나, 역시 잘 파악이 안 됩니다.
일본정신론의 결정
그래서 지금까지 일본정신론을 하고 왔던 사람들의 입장을 조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제가 추정한 것이지만, 대체로 본질론과 역사론과의 두 가지가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원래 일본정신라고 하는 것이 독특하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예를 들면 감의 씨나 가지 씨라고 하는 것은 어떤 토지에서도 감나무가 되거나 가지 나무가 되어서 꽃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만, 그러한 일본정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본정신의 본질을 천명(闡明)하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며, 그러한 특수한 것은 없어도, 일본이라고 하는 하나의 밭 가운데 들어 왔기 때문에 그와 같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은 것이며, 그 외부를 둘러싼 사정에 따라서 양성된 것을 일본정신이라고 한다면,이것은 앞과 조금이야기가 달라진다.
본질의 문제가 아니고, 역사발달의 변천에 의하여 배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옛날부터 내려 온 국학자 중에는 이 본질론을 취하는 사람이 많으며, 역사가 중에는 역사론을 주로 하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A. 본질론
본질론을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잘 관찰하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국민성격론입니다.
그 둘째는 국민풍격론이며, 그 셋째는 국민이 대외문화에 대한 태도론 입니다.
그중에서 세 번째는 본질론이라고 말해도 역사를 머리에 넣어서 말하는 것임으로, 다분히 역사론의 요소가 있다고 보
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성격론
성격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국민성에 독특한 것이 있으며, 그러한 것이 바로 일본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독특한 국민성이라는 것에는 옛날부터 들고 있었던 것에 국학자들이 자주 말하는 바의,
명(明)·정(淨)·정(正)·직(直)
(1) 밝고 깨끗하고 올바르고 곧은 마음이라는 것, (2) 사물의 불쌍함을 안다는 것, (3) 진심이라는 것,등이 헤아려지고 있습니다. 그중 (1)의 밝고 깨끗하고 올바르고 곧은 마음이라는 것은 수많이 우리나라의 조칙(詔勅) 등에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확실히 국민성의 하나일 것입니다. 밝게 라고 하는 것은 거리낌 없는 요즘 말로 한다면 명랑한 것이겠지요, 깨끗함이란 조금도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또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표리(表裏)가 없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거짓이 없는 것일 것이며, 나아가서 곧은 것은 치우치지 않는, 무엇을 생가해도 순박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무어라고 해도 우리나라 국민성의 한 가지 특색일 것입니다.
사물의 불쌍함
또 (2)의 사물의 불쌍함을 아는 마음이란, 자연에 대해서도 자연에 친숙해지는 마음도 될 것이며, 인간계의 도(道)로서는 자비와 정이 되는 것입니다. 가을의 단풍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떠한 때에도 우리국민은 자연을 상대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하고 있습니다. 좁은 뒷골목 연립주택에도 반드시 1평이나2평의 뜰이 갖추어져 있고, 마루(床)에는 분재(盆栽) 같은 것이 장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심이 강하다는 것, 반대로 말한다면 잔인성이 없다는 것, 이것은 확실히 다른 국민과 비교해서 엄청나게 눈에 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의 불쌍함을 마음으로써 우리 국민성의 한 특질을 이루는 것은 이의(異議)가 없습니다.
진심
다음에 (3) 진심이라는 것, 이것은 인생 전반에 대하여 성실한 태도를 갖는 것이며, 또한 신불(神佛)에 대해서는 경건한 숭경(崇敬)의 마음을 품는 것이며, 그것이 동시에 그 사람의 성격에 엄숙함을 더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확실히 우리 국민성의 한 특색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것으로써 곧바로 이것으로 일본정신이라고 해야 될까요. 여러 가지 학자의 연구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어떤 사람에게도 양심이 존재한다. 그것이 선천적인가 경험적인가 하는 것은 별도문제라고 해도, 양심의 존재는 부정할 수가 없다. 만약에 양심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다면, 어느 국민이라 할지라도 그 양심을 완전히 발달시킬 때에, 그 도달점은 반드시 말고 깨끗하고 곧은 성실한 정신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것 역시 반드시 우리나라 유일의 일본정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물의 불쌍함을 아는 것, 진심에이라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풍격론(風格論)
아무튼 이상은 주로 국민성격에서 일본정신을 논하는 것이지만, 또 일면 풍격 상으로 일본정신을 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격과 풍격과는 다른, 성격은 질을 수반하지만, 풍격은 질이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맛인 것입니다.
소쇄담백(瀟灑淡白)
이 풍격 상에서 일본정신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시키면, 이러한 사람들은 거의 똑 같이 일본국민은 말쑥하고 소쇄(瀟灑 : 때를 벗고 말쑥함)하며 담백한 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차(茶)와 같은 것의 취미는 세계 어디에도 가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이쿠(俳句)와 같은 풍정(風情)도 세계의 어떤 곳에도 없는 것으로, 이러한 것이 상당히 일본국민의 풍격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일본의 하나의 국민성인 것입니다.
낙천(樂天)
또 어떤 점에서 말하면, 우리 국민은 원래 낙천주의 국민인 것입니다. 쾌활한 국민이라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마요오슈(萬葉集)와 시경(詩經)
이러한 것도 아무튼 그대로, 일본의 상고(上古)시대와 극히 가까운 지나의 상고 때를 비교하는 재료로서, 예를 들면 일본의 마요오슈(萬葉集)와 지나의 시경(詩經)을 읽어보면, 그 사이에 매우 상위(相違)한 것이 있습니다.
시경의 시(詩)는 여러 남녀의 관계도 있고, 또는 보통문학적인 취미의 것도 있으나, 태반은 시대를 원망하고 시대에 대하여 분개하거나, 비관하고 있는 시가 많다.
그러나 같은 상태에 있고 나라로서는 비슷한 나이를 가지는 시대에 생긴 우리나라의 마요오슈(萬葉集)를 보면, 모든 곳에 얼마나 낙천적이며 유쾌한,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항상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땅을 구하고 있는 것 같은 시가 많은 것입니다. 빈궁(貧窮)문답(問答)이라는 노래와 같은 것이 마요오슈(萬葉集) 안에 있다.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인간의 시이지만, 그 가난 사이에 어딘가 모르게 해학(諧謔)의 맛을 갖고 있으며, 또 낙천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경의 시가 되면, 심각한 세상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별을 보았댔자 북두칠성의 상을 보고, 그것이 국자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칠성, 그것이 백성의 고혈(膏血)을 떠내는 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는 필(畢)이라고 하는 성좌가 있습니다만, 필(畢)이란 마치 라켓과 같은 모양으로, 새를 잡는 그물과 같은 것이나, 그 별을 본 시인은 이것도 제목으로 해서 저런 식으로 그때의 군주는 우리를 그물 치는 것이라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시경의 시는 조금 뭣한 것에도 시대를 분개(憤慨)하고 강개(慷慨)해서 사람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비교해서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 국민은 낙천적인 풍격을 갖고 있는가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일일이 들어 봤자, 그것이 과연 일본정신일까 어떨까, 혹은 그러한 것을 일일이 탐색하지 않아도, 다른 국민이 일본인과 같은 풍격을 갖고 있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 담백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말쑥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낙천·쾌활한 성격을 갖고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해 오면, 또다시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대외문화 태도론
달음으로 또, 본질론을 논하는 방법에, 지금까지 논하는 방법과 조금 달리, 전체로서는 본질론이지만, 본질 속의 하나의 역사 쪽을 가미(加味)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
그것은 뭣이냐 하면, 우리나라의 국민이 외래문화에 대할 때의 태도가 다른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논하는 것입니다.
그중하나에, 어떠한 문화가 들어와도 우리 국민은 이것을 포용해 나가는 포용성을 가지며 그리고 그 문화를포용 해 가는 모습 사이에도 시종(始終) 기초를 우리나라에 둔다고 하는 하나의 자주독립성을 갖고 있다고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점까지 확실합니다.
원래 일본은 섬나라에 나라를 향유(享有)하고 있는 관계로, 자국 내에 발달하는 문화요소의 숫자는 비교적 적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외래문화는 밀어닥치는 파도와 같이 엄습해 왔다.
그것도 그 당시에는 외래문화 쪽이 자국문화보다 항상 큰 힘을 갖고 있었다.
옛날에는 지나문화라는 것이 들어오고, 이어서 인도의 불교문화라는 것이 들어오며, 거기에다가 최근에는 구미(歐美)의 사조(思潮)라는 것이 들어왔다. 어느 것이나 우리나라보다 덩치가 큰 것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의 경우에 어떻게 하든 이것을 잘 포용하고, 또한 저작(咀嚼)하고 있습니다.
유교가 오면 유교를 포괄(包括)한다. 불교가 들어오면 자신의 화로 속에 넣어서 이것을 도야(陶冶)하고, 구미의 문화가 들어오면 이것을 또 자신의 가슴 속에 품고 녹이며, 또한 그 사이에 언제라도 우리나라라고 하는 입장을 잃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
때문에 포용성이 있으며, 또한 자주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같은 지나문화가 조선에도 들어오고, 일본에도 들어와 있다.
그러나 조선에 받아들여진 지나문화와, 일본에 들어온 지나문화와는 그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이 되어 왔으며, 이것은 우리나라에 하나의 자주독립성이 있는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상은 과연 우리나라만의 것일까요. 예를 들면 한 예를 지나라는 나라의 표용성은 아마도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몇 배나 큰 포용성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의 자주성과 독립성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얼마만큼 큰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나에서는 시종(始終) 외래 사상이 들어오며, 바깥과의 접촉을 유지해 온 것입니다.
육지로 이어졌음으로 그 만큼 관계도 밀접하며, 대륙문화가 시종 들어와 있으나 어떤 문화가 들어와도 한 번 이것이 한(漢)민족 속에 들어 와버리면, 얼마 안가서 완전히 그것이 한(漢) 민족화 해 버리는 것은 지나의 5천년 역사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나만큼 포용력이 큰 것은 없으며, 한(漢) 민족만큼 동화력이 강한 민족은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어떻든 20 몇 대 사이에 왕조의 변천은 있었으며 이것은 변화가 매우 많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으로 많은 것으로서 아무리 20 몇 대의 왕조가 변천해도, 국민성에 관한 한, 아무른 변화 없이 도야(陶冶)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자주력이 있는 위대한 국민이 아니면 할수 없는 곡예(曲藝)인 것이다.
그런 점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러한 포용성이 많은 것과 자주독립성이 많다는 것을 가지고 일본 정신만의 특색이라고 보는 것은 좀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독창성
마찬가지로 외래문화에 접촉할 경우에, 이번에는 반대로 단점(短點) 쪽에 대해서 어떤 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정신에는 모방성이 많아서 독창적인 것이 없다.
이것이 하나의 결점이다, 라고. 역시 그럴지도 모릅니다.
일본에서 새롭게 발명한 것은 비교적으로 적다.
지나에 유교가 있으며, 인도에 불교가 있고, 서양에 기독교가 있다는 것과 같은 큰 것이 일본에 있느냐, 신도(神道)는 있지만 그것은 과연 세계적인 다른 3교(敎)와 같은 힘을 갖고 있느냐. 그러한 것은 혹시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역시 생각하기에 따르는 것으로, 조금 일본을 편드는 논의에 빠지는 경향은 있으나, 대체로 진정
한 의미의 독창이라는 것이 어느 나라에 얼마만큼 있을 것인가, 근세에서는 독일국민이 아무튼 독창성이 많다고 일컬어져 있으나, 그것의 가장 독창성이 많다고 말하는 독일의 철학이거나 문예 등이, 희랍·로마의 철학, 문예라는 것을 빼고 과연 얼마만큼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참다운 의미의 독창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많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일본인만이 독창력이 없다고 말하는 부정은 반드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서, 본질론의 연구를 하고 일본정신을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본질적으로 그다지 성공하지 않은 관찰 방법으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B. 역사론
그렇다면 이번에는 입장을 바꾸어서, 역사적으로 가 보기로 합시다. 이와 같은 입론(立論)형식을 취한다고 하면, 말하건대 과거 3천 년간의 역사를 더듬어 온 길을 탐구하는 수밖에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가 옛날부터 항상 통일 된 역사를 갖는 것을 특색으로 한다. 거기에 일본정신의 나타남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외국역사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희랍사라고 라고 해도, 사실은 라틴사이며, 스파르타사이며,마케도니아사이며 그 복합물로서 결코 그 사이에 통일성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지나의 5호(胡)16국의 시대가 되면, 하나의 지나 사(史)가 수십개의 작은 역사로 분할되어 아무런 통일성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통일성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다르다.
상고(上古)때부터 오늘날까지, 3천년의 역사가 완전히 통일성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시대에 있어서는 나라역사 그 자체가 둘로 갈라진 일이 반드시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남북조(南北朝)와 같은 것이 조금 그것에 가깝다.
남조(南朝)의 역사와 북조(北朝)의 역사라는 것이 잠깐(纔) 대립했다. 그러고는 무가(武家)정치가 실시되어, 특히 도쿠가와(德川)의 전성시대를 보게 되어서는 공무(公武)(조정과 무가)라는 두개의 역사 가 약간 대립하는 형태는 있을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긴 역사 가운데 극히 짧은 시대로, 대체적인 시대에서는 우리나라는 완전히 통일성을 유지한 역사였습니다.
때문에 통일성을 유지한 역사의 흔적을 미루어 보아서, 일본정신에 통일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관찰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원성
또 역사관의 제2의 주장은, 우리나라 국사의 영원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논의가 없으며, 어떤 나라에서라도 3천년의 역사를 일관한 상(相)이 있다는 것은 다른 데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특히 유럽 같은 곳에서는 극히 얕고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18세기 말이나, 19세기경으로부터 겨우 국가를 형성한 나라들로, 정도가 뻔 한 것이다. 기껏해야 2백년, 3백년의 역사 박에 갖고 있지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로서는 그것이 3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지나는 놀랍게도 5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나, 이것은 단속적인 역사로서 결코 일관되지 않고 영원성은 없다.
그 사이에 주마등과 같이 왕실이 변천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국가로 생각할 경우에는 단속적이거나 많은 것의 복합
사(複合史)라고 보아야 할 것으로, 결코 한 국가의 영원성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논의도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순진성(純眞性)
더욱 역사관의 주장자 제3의 논점은, 우리나라국사만큼 순진한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풀이 하는 것입니다. 바깥나라에서는, 쟁탈 전란(戰亂)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있음으로서 힘을 써서, 무력을 써서 서로 빼앗는다는 역사를 갖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순진한 모습의 국사를 갖고 있다는것입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긍정할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의 국민성과 연관되는 것이지만, 도대체 세계 가운데서 우리 국민만큼 인정이 두텁고 동정심이 깊은 국민은 아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평화스런 경우에는 백성들의 밥 짓는 연기에 마음 아파하는 진토쿠(仁德)천황의 일이나, 추운 밤에 옷을 벗어 던진 다이고(醍醐)천황의 일 같은 것이 전해지며, 전란(戰亂)의 경우에도 쇼난코(小楠公)가 적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살린 이야기, 켄신(謙信)이 적에게 소금을 보낸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다.
나스노 요이치(那須與一)의 부채과녁 등은 주군의 생명을 존중하는 무사들의 마음의 아름다움과 함께 한폭의 두루마리 그림 같은 장면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서로 모아져서 국사에 순진성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아마도 국민성과도 서로 관련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서 보는 것같은 잔인성이 없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상에서도 순진한 상(相)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 세 가지, 즉 통일성이 있다는 것, 영원성이 있다는 것, 혹은 순진성이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은 역사관에서 주장하는 바의 우리나라 특성으로서, 동시에 그것이 일본정신의 발로(發露)라고 하는 결론에 이끌자 하는 것은, 이것 역시 무리가 아닌 것이라고 믿습니다.
단지 이상과 같은 일만으로써 일본정신이라고 과연 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일본정신이라는 것을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체이며 하나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탐색하는 데에, 우리는 그것을 현실사실 만에 대해서 관찰하느냐. 혹은 그 사람이 희망하는 이상, 이념도 고려하여서 관찰하느냐. 만약에 역사사실만으로 본다거나 지금 이 세 가지의 역사관으로 설명이 될지 모른다.
불완전해도 아직까지 그것으로 설명이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역사라고 하는 것만으로 일본정신이전체를 다 할 수가 있는 것일까, 잠간 우리들 개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신도 이미 50을 지나고 있습니다만, 50년의 자신의 과거역사만으로 저라고 하는 것을 판단한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다지 훌륭한 모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일면에 있어서, 이래저래 사회를 살아가기 위하여 하나의 이념을 갖고 있다. 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한의 이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것이 역시 諸橋 같으면 諸橋라고 하는 모습의 나타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과거 역사만 가지고 우리나라 역사를 찾는다는 것은, 반드시 맞지않는 것이다.
건국의 대 이상에 귀의(歸依)하는 무상신앙(無上信仰)
나라로서는 하나의 이념,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상은 어디에서부터 나오고 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그 나라의 건국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앙으로부터 생겨 나온다.
나라에 대한 하나의 신앙을 국민이 가짐으로서 생겨 나오는 것이다.
물론 그 신앙은 종래의 역사와 관계합니다.
국민에 의해서 얼마간의 부분이나 단속(斷續)적이며,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증명되지 않고 있으면, 그 이상이라고 하는 것은 도중에서 살아지고 공상에 끝나는 것임으로, 한편에서 역사와 관계하나,결코 단순한 역사만이 아닙니다. 건국이래의 대 정신·대 이상·대 이념에 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잊어버려서는 일본정신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관점은 한 바탕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관점(觀點)
이상과 같이 생각해 오면, 일본정신의 관측 방법으로, 저는 대체로 세 가지 방면에서 관찰하고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치 개인의 집안 격식이라는 것에 개인의 혼(정신)이 통일된 것과 같이, 나라의 격식이라는 것에 관해서 관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그 나라의 격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건국사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인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 집 안의 구조상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의 집은 어떤 구조가 되어
있을까, 즉 우리나라로서는 국가조직의 근본에서 생각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본인의 성격이 본인의 정신을 만드는 것과 같이, 국민성격, 풍격이라는 것을 생각해 갈 필요가 있지않을까.
만약에 이러한 세 가지 점을 관찰해 나간다면, 이래저래 일본정신이라는 것을 포착할 수 있지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황실중심
그래서 그중의 첫째, 건국의 특수사정, 및 변천에서 관찰하면, 어떤 결론을 낳는가 하면, 결국 그것은 당연히 황실중심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는데 귀착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신조(神祖)의 조칙(詔勅)에도 “토요아시하라노 치이호아키노 미즈호노쿠니(豊葦原の千五百秋の瑞穗國……”라고 하는 것으로, 황실의 자손이 영구하게 지배하신다는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건국의 정신, 그러한 건국의 사정, 그것은 국민에게 있어서 영원히 변질되지 않는 이념이며, 신념인 것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아도 종래에 얼마만큼 큰 개혁을 만나서도,이 근본은 단한 번도 변화하거나 동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타이카(大化)의 개신(改新), 혹은 명치유신 등은 고금(古今)에 유례없는 일대변화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외국에 있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피를 볼 정도로 참극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사이에 있어서 마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끝가지 원래에 돌아간다는 데 귀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에 돌아간다는 것은 어디에 돌아가는 것인가 하면, 그것은 당연히 황실중심이라는 곳에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타이카노카이신(大化의 改新) 등은 역사가에게 말하게 하면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씨족제도였던 것이 차차 붕괴되어 가서, 씨족을 주로 하고 있는 곳의 봉건제도가 붕괴해 온다.
그러한 하나의 커다란 흐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것도 하나의 원인이겠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아닌 것입니다.
실은 각 방면에 매우 커다란 변혁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최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매우 커다란 변혁을 해서, 지금까지 씨족이 갖고 있었던 토지를 통째로 황실에 돌려드린다고 해서 극히 간단히 처리가 되었다.
또 그것과 버금가는 명치유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도 또한 그 원인에 대해서나 경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으나, 요는 결국 결정한 것은 정권을 무가(武家)의 손에서 빼앗아서 황실에 돌려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변동의 결말은 끝내 황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움직이지 않는 일본정신의 표출인 것이다. 라고, 이렇게 잡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제도변화의 면뿐만 아니라, 민심의 느슨이라고 하는 점에서 대 변혁시대를 생각해 봅시다.
무로마치(室町)에서 아시카가(足利) 뒤에 걸쳐서는 우리나라 국민성은 가장 쇠퇴해 왔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장 쇠퇴해 진 마지막이 어디에 귀착했는가 하면, 어딘지 모르는 그들 사람들의 마음은 역시 쿄토(京都)가 그리워져 왔던 것이다. 그때의 무장(武將)들은 아무래도 쿄토에 가지 않으면 언제까지 기다려도 그 전란을 구할 수가 없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같은 사람이 그 생각이 일어나서, 오다(織田)·도요토미(豊臣)로부터 차차 시대를 경과해서, 도쿠가와(德川)여러분도 역시 황실 중심의 기치(旗幟)를 올려서 세상의 난리를 구하고자 돌아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되자 제도를 파괴한 자는 황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며, 민심의 이완(弛緩)한 자들도 역시 황실 중심으로 라고 하면서 돌아감으로 비로소 그 해결을 구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 일본정신의 표출은 황실중심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념상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생각해도 역사적으로 생각해도 결코 움직일 수 없는 사유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가풍존중
둘째는 집안의 구조, 즉 국가로서의 조직인데, 그 조직에서 오는 일본정신이란 뭣인가 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가풍을 존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씨족제도의 발달에서 나라를 이루고 왔음으로, 그것은 커다란 가족주의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 가족이 앞에서 말한 사정과 관계를 유지하여, 황실을 중심으로 한 가족제도인 것입니다.
이것은 더 설명을 필요치 않는 것으로 본질론으로 말해도, 또 역사론으로 말해도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 특색의 하나이며, 일본정신은 거기부터 솟아, 그기에 표출되어 왔다는 것도 틀림이 없는 점인 것입니다.
경신숭조(敬神崇祖)
셋째는 경신숭조의 사상입니다.
이것은 첫째의 건국사정과 둘째의 나라조직에서 일어난 황실 중심사상과, 가풍존중사상과의 복합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신국(神國)인 것입니다.
천황은 아키추미카미(現人神)이십니다. 또 우리들 조상은 누구나 임금나라에 목숨을 바쳐, 죽어서는 신(神)으로 받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이미 첫째 둘째의 일본사상이 헤아려 진다면, 셋째의 이 경신숭조의 사상이 일본사상에 속에 헤아려지는 것에 하등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사실 또 역사에 대해서 조사를 해 보아도 옛날부터 내려오는 경신숭조의 사상과 사실은 얼마든지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 저는 (1) 황실중심사상 (2) 가풍존중사상 (3) 경신숭조사상의 세 가지로써 일본정신의 정수(精髓)라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를 골라낸 논거(論據)는, 첫째 본질론으로부터, 둘째는 역사론으로부터, 셋째는 이념 론으로부터이며, 상당히 근거가 있는 추론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3자가 일본정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으로서, 우리나라 도덕의 꽃이라고 말하는 무사도(武士道)에 대해서 이 일을 관찰해 봅시다.
무사도정신으로부터의 관찰
무사도는 물론 헤이안초(平安朝)의 말경, 무사계급에서 태어나서, 카마쿠라(鎌倉)·무로마치(室町)·센고쿠(戰國)·도쿠가와(德川)의 몇 시대를 거쳐서 점점 발달한 것이지만, 그 무사도의 정신이라는 것은 건국초기부터 이미 존재한 것으로, 상하(上下) 일관(一貫)된 일본정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무사도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여러 가지 덕목이 헤아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사에게는 용기가 있다든지, 혹은 청렴하며 절제가 있다든지 예의가 바르다든지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으나, 그런데 그 용기라는 것이 발휘되고, 청렴이라는 것이 발휘된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점에서인가를 생각하면, 언제나 우리나라에서는 공(公)에 봉사한다는 생각과 이름을 아낀다는 생각이 기본이 되어, 그 때문에 충실의 덕(德)도 발휘하고, 용감의 덕도 발휘하며, 검소(儉素)강건(剛健)의 덕도 발휘하고 결백청렴의 덕도 발휘하고, 극기심·절제심(節制心)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그 이름을 아낀다는 것은 가명(家名)을 아낀다는 것이 기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앞에서 말한 가풍존중이라는 것에 귀착하고,공(公)에 봉사한다는 일은 처음에는 봉건시대의 주종(主從)의 정의(情誼)라는 것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으나, 국체의 본질상 드디어는 반드시 앞에서 말한 황실중심이라는 곳에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 양자외에 또 하나 무사도에는 신을 공경하는 사상이 매우 많게 나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가(武家)의 가장 전형적인 법률이라고 불리고 있는 호오조 야스토키(北條泰時)가 만든 조에이시키모쿠(貞永式目 :1232년에 정치·법제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편찬한 51개조의 법전) 등의 제1조에서도 경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경신숭조(敬神崇祖)사상은 첫째 둘째의 사상과 인연을 함께하며 무사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본정신의 꽃이라고 불리는 무사도의 모습에서 관찰해도, 역시 일본정신은 위에서 말한 세 사상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 저는 일본정신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황실중심사상, 가풍존중사상, 경신숭조사상이라는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역사론으로 보아도, 본질론에서 보아도, 또한 건국당초의 이념으로 보아도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맨 처음 말씀드린 대로 이 방면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의 淸原 씨나, 국학원의 河野 씨나 다른 사람들의 의론(議論)을 참고로 해서 입론(立論)한 것임으로,논한 바에 오류도 있을 것이고, 불충분한 점도 많을 것이지만, 그것은 더욱 더 여러분들의 비판을 받거나 또 식자(識者)의 가르침을 받고서 고쳐나가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육가의 의무
그러나 마지막에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불행하게도 오늘날 일본학자의 연구가 아직 불충분해서 참다운 일본정신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도, 아직도 교육가나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따로 있을 수 있다. 의사이야기 같은 것을 들어보면, 의사 쪽에는 병원균(病源菌)을 연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티푸스 같으면 티푸스균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다. 일본정신이란 뭣이냐고 하는 연구는 조금 그러한 종류일지 모른다. 티푸스균 같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만, 병원체를 아무리 해도 모르는 병이 있다.
그러나 그 병에 걸리면 열이 어떤식으로 나오며, 몸에 어떤 쇠약을 가져온다는 병의 증상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은 진단 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러한 병에 걸렸을 때는 어떤 영양분을 취하며, 어떤 약을 쓰는 것이 좋은가를 연구하는 학문도 있다.
그 연구는 약학이며, 영양학인 것이다.
오늘날 일본정신이라는 실체는 아직 연구 중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으나 정체는 알 수 없다고 하는 시대인지 모른다.
가령 그렇다고 해서 일본정신이 어떠한 점에서 나타나며, 어떤 경로를 더듬어 왔는지는 역사로 알 수 있다.
그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서 이것이 정신함양에 가장 사정이 좋다는 영양분과 약을 주는 것이, 우리들 교육가의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2강 이후는, 제가 유교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생각합니다. 마치 약학사·영양학사가 약이나 영양성분을 분석하는 것처럼. 이기 때문에 그것을 채택해야 할 것은 취하고, 쓰야할 것을 쓰면서 일본정신의 함양에 도움 주는 것은 오로지 교육계 일선에 선 여러분의 중대한 임무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2. 유교의 장단점과 그 일본화
일본정신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 다음은 소위 유교라는 것과 이 일본정신과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교라고 하는 것은, 일본정신의 함양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바깥으로부터 온 교로서는 가장 좋은 교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윤상(倫常)157)의 교(敎)
첫째는 황실중심사상을 배양하는데 대한 유교의 기능입니다. 유교본질론은 나중 강의에 차차 나오게됩니다만, 적어도 유교는 윤상(倫常)을 주로 설파한 도덕교인 것입니다. 오륜(五倫) 오상(五常)의 가르침 중 제일 근본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충(忠)과 효(孝)인 것입니다. 이 윤상을 중히 여기는 유교이기 때문에, 황실중심사상을 배양하는 교로서는 가장 합당한 교라고 하는 것을 우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제도
다음으로 가풍존중사상과 유교와의 관계입니다만, 가풍존중의 사상은 우리나라 조직이 고족제도라는 것에 중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교는 다행히도 대 가족제도로써 성립하고 있는 지나국에서 발달한 교로서, 전체가 가족제도를 유지하는데 가장 사정이 잘 되고 있는 교이며, 따라서 갈풍존중사상에 가장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에 답하는 유교의 역할인 것입니다.
보본반시(報本反始)158)
셋째로 우리나라의 경신숭조라고 하는 일본정신에 대해서는, 유교는 보본반시를 강조하는 교인 것입니다.
그 보본반시사상의 근본을 삼는 것은, 임종을 삼가여기고 먼 것을 추종한다는 교로서. 경신이라는 것은 조금 입장이 다릅니다만, 조상을 존중한다고 하는 가장 큰 기능을 하는 교인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당연히 경신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오면, 유교는 일본정신의 세 가지 특성에 가장 알맞은 덕교(德敎)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료(史料)를 탐색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유교는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것도 우리나라 국체연구라는것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치카후사(親房) 경(卿)의 “神皇正統記”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치카후사(親房) 경(卿)의 “神皇正統記는 뒤에 말
씀드리겠으나, 주자(朱子)의 강목(綱目)학문으로부터 다분히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57) 오륜, 오상.
158) 조상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
미토학(水戶學)
다음으로 국체(國體)연구가 활발하게 된 것은 명치유신 전, 바쿠마츠(幕末)부터인데,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미토학이라는 것은 어떤가하고 말씀드리면, 역시 유교의 영향을 다분히 입고 있습니다.
미토(水戶)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의 “신론(新論)과 같이, 혹은 후지타 토오코(藤田東湖)의 “세이키노우타(正氣の歌 : 五言古詩로서 당시의 사기를 고무하고 尊王의 기분을 배양하는 힘이 있었다.)”등과 같이, 이와 같은 정신은 유교가 위주가 되었으며, 앞에 말한 강목(綱目)의 학문이 한편에 들어옴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춘추(春秋)의 호전학(胡傳學) 등이 많이 영향을 주고 있는 느낌인 것입니다.
물론 명치유신에 이르기 위해서는 혹시 국학의 부흥이 있다든지, 신도(神道)의 부활이 있었다든지, 여러 가지 것이 있었겠으나, 적어도 유교라는 것이 일본정신을 융성하게 하는데 중대한 위치를 가지고 있은 것은, 아무도부정할 수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림으로 유교는 본질적으로도 일본정신에 가장 많은 약을 주었으며 영양분을 준 것이며, 역사적으로 관찰해도 가장 많은 약을 주며 영양분을 준 학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의 덕교(德敎)로서 중요한 위치를 주면서 간다고 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유교의 결함, 역성(易姓) 혁명
다만 마지막으로 유교에도 한 가지 결점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결점으로서 많은사람들이 들고 있는 것은, 즉 역성혁명사상이 유교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유교 안에 그러한 사상이 있다고 한다면, 황실중심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사상에 대하여 유교는 근본적으로 반역을 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유교는 가장 황실중심문제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체로서 서로 허용하지 않으며,
일본국가와도 서로 허용하지 못하며, 그리고 또 일본정신과도 서로 수용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탕무방벌론(湯武放伐論)
아무래도 위에 말한 것은 유교 안에 절대 없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선 누구나 드는 것은 맹자의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전에 맹자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은(殷)의 주왕(紂王) 같은 난폭한 임금이 있었는데, 그것을 주(周)의 무왕(武王)이 쳤다, 이것은 윤상(倫常)의 문제로서 이것은 어떠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그것에 대해서, 만약에 인군(人君)이 인신(人臣)을 보는 것이 토개(土芥)159)와 같이 본다면, 인신은 인군을 원수처럼 볼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이 때문에 주(周)의 무왕은 굳이 은(殷)의 주왕을 쳤으나, 그때의 주왕은 이미 인군임의 자격을 상실하고 있었음으로, “필부(匹夫)인 주(紂)를 죽였다고 듣고 있다, 여태껏 임금을 죽였다고 듣지 못했다.”하며, 무왕이 주를 주륙(誅戮)한 것은 필부로서의 주(紂)를 죽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러한 생각은 우리나라에서도 절대로 허용할 수 없으며, 아무리해도 이러한 논의는 변명할 수가 없다.
변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유교라고 하는 것의 단 하나의 예외인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것은 인군(人君)에게 말씀드리는 맹자의 말로서 인신(人臣)에게 가르치는 상도(常道)를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159) 흙과 찌꺼기. 가치 없는 것의 비유.
맹자가 인군을 향하여 직접 교(敎)를 설명한 것으로, 인신에게 설명한 말이 아닙니다.
그 점도 얼마간 생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다행히도 우리나라의 선현(先賢)은, 만약에 오해가 있어서
는 안 된다고 해서, 주의를 주었으며, 옛날부터 맹자가 배에 태어질 때에는 배가 뒤집어지다고 할 만큼이었음으로, 이러한 말이 있기 때문에 맹자가 우리나라의 덕교(德敎)를 해친다고 하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절대로 없었던 것입니다.
삼혁(三革)사상
다음으로 삼혁이라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지나에서는 갑자(甲子)의 해를 혁령(革令)이라고 하며, 무진(戊辰)의 해를 혁운(革運)이라고 하며, 신유(辛酉) 해를 혁명(革命)이라고 하며, 이것을 삼혁(三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혁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의 제도를 고치는 것이며, 혁운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의 기운(機運)이 하나 고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의 왕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삼혁사상은 상당히 지나의 상고시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유교의정신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유교로서는 매우 곤혹 이를 데가 없는 것입니다.
유교의 경전에는 이러한 말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위(易緯)나 시위(詩緯)라고 말하며, 위서(緯書) 안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위서(緯書)라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릅니다만, 대체로 한(漢)시대 쯤까지에 여러 가지 술사(術師)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무리들이 만든 것이겠지요. 삼혁 설은 그중의 하나의 말로서, 유교 쪽에서 그 책임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이 말이 쓰였습니다.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한 기원원년이 신유(辛酉) 해인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으로서는 하나의 혁명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神武천황 4년에 영사(靈祠), 즉 제사 마당이라는 것을 鳥見山 속에 세웠습니다, 그것이 갑자(甲子)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혁령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러한 사실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엔키(延喜) 연간(年間)의 革曆勘文에 의하면, 神武천황의 기원원년이 신유(辛酉)였었다고 하는 말이 가끔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 혁명은 즉 나의 개원(開元)
그런데 여기에 또 다행인 것은 원래 지나의 혁명이라는 것은, 천자의 덕이 쇠약해져서 그 왕조를 전복한다는 것인데, 다행스럽게 우리나라는, 이 삼혁 중의 혁명이라는 말뜻도 크게 변화해 온 것입니다.
三善淸之가 쓴 상주문(上奏文)이 있습니다만, 그 안에 혁명이라는 말을 차차 의미가 변해서, 우리나라에서는 끝내 개원(開元)하는 것이 즉 하나의 혁명이라고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에 신유(辛酉)혁명이라는 말은 쓰도, 소위 피를 보는 혁명이라는 것은 하나도 예상되지 않고, 오로지 신유(辛酉)의 해에 개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太宰春臺가 “자지원만필(紫芝園漫筆)”이라고 하는 책을 쓰고 있으나, 그 속에 무슨무슨 신유년에 개원하고 무슨무슨 일을 했다는 것을 들고 있으며, 더욱이 옛날의 혁명이라는 것은 일본에서는 개원의 뜻으로 말한다는 것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되어 있음으로, 지금까지 일본학자로 유교를 공격하고자 하여, 유교사상에는 혁명사상이 있어서는 안 되며, 우리나라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도 있겠지만, 그것은 대부분 유교를 공격하는 데는 과녁을 벗어나는 논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위에서 말한 위서(緯書) 등에 이러한 혁명이라는 말이 있어도, 우리나라 과거역사는 다행히 이 뜻도 바뀌어, 단지 하나 개원을 하는 원인을 삼도록 했음으로, 이것에 의하여 혁명을 시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러한 점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것입니다.
공양학(公羊學)은 혁명사상을 갖고 있나?
또 하나 이것에 관계하여, 유교의 가르침 속의 하나인 공양전(公羊傳) 안에 혁명사상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한 자도 있는 것입니다.
3백년 계속한 청조(淸朝)가 지금부터 20년 전에 뒤집어졌습니다.
이 청조를 전복시킨 동기의 학리적 설명에는 이 공양학의 혁명을 시인하는 사상이 숨어 있다고 논의를편 것입니다.
그것을 표면적으로 듣고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춘추(春秋)학문 속에 혁명사상이 있으며, 때문에 우리나라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라고 하는 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하게 날조된 설인 것입니다.
역시 지나의 후대(後代)의 공양학 안에는 약간 혁명사상을 건드린 것이나, 공자가 편찬한 춘추, 거기에서 나온 공양학 그 자체에는 혁명사상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 공양학을 해석한 무슨 휴(休)라고 하는 사람의 학설에, 약간 그에 가까운 것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 설이 말하는 바는,공자시대는 주(周)나라이다. 공자에게는 주실(周室)을 전복해서 노국(魯國)의 임금을 천자로 삼겠다, 고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이렇게 설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송신주(古宋新周)
그것은 무슨 휴(休)라고 하는 사람의 주석(註釋)의 문구, “고송신주(古宋新周)”라고 하는 것이 그 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조금 설명하기가 구차하지만, 지나는 혁명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의 혁명도덕이 만들어져 있으며, 즉 하나의 나라가 일어나면, 그것보다 이전의 두 시대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그것들을 제후(諸侯)로 삼지도 않는다. 역시 임금으로서 그대로 둔다.
그것을 두 왕으로서 존중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하(夏)의 임금으로서, 은(殷의 임금으로서 두고 있을 수는없다.
그래서 은(殷)이 망해 버리면, 이것을 송(宋)이라고 하는 나라로 하고, 그 임금으로서 있게 한다.
그것보다 조금 더 앞의 하(夏)라는 나라가 망했을 때에, 그것을 기(杞)라고 하는 임금으로 두어 둔다.
그래서 주(周)나라 시대에는 송(宋)이라는 임금과 기(杞)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왕(二王)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무슨 휴(休)의 공양전 안에 “고송신주(古宋新周)”라고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주나라시대에는 그 이왕(二王)은 기(杞)와 송(宋)인 것이다.
기(杞)가 선임 임금으로, 송(宋)이 신참 임금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송(宋)을 오래된 임금으로 하자, 즉 은(殷)을 오래된 임금으로 하자, 주(周)를 새로운 임금으로 삼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당연히 주(周)나라 다음시대가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송신주(古宋新周)”라는 말이 있으면, 주(周) 시대의 사람으로서는 혁명을 시인하고 있는 논의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무슨 휴(休)의 논의에서 본다면,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슨 휴의 설은 아무튼 공양전의 참 뜻은 아닌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자의 참 뜻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는 것입니다. 공자가 노(魯)나라의 임금을 천자로 삼고자하는, 혁명사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은, 공자의 다른 말로부터 판단해서 곧바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청조(淸朝)가 망할 때에, 무슨 휴의 말을 인용하여 혁명을 일으킨 것은, 당시의 사람들을 위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3백년 계속한 청조(淸朝)도 말년에 가서는 상당히 학정(虐政)도 많았었다.
폭정도 많았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학자가 혁명사상을 고취할 필요상 무슨 일이든 고전에 근거를 구하지 않으면 승인하지 않는 지나의 민족성을 역이용하여, 무슨 휴의 이러한 말을 갖고 와서 혁명을 고취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연히 프랑스 혁명이라는 세계의 일대 돌발사건과 동서가 서로 호응하여, 여기에서 3백년의 청조(淸朝)를 전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기 위해서 하는 한때의 벽론(僻論)으로써 유교 전체가 혁명을 고취하고, 우리나라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논의하는 것은 매우 틀린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생각해 오면 유교의 교 중, 단하나의 결점이라고 생각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사상이라는 것도, 사실은 하등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유교라고 해도 많은 말이있기 때문에, 좋은 말만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유교문화의 한 예(一例)
문학방면의 것이 되면 여러 가지 것을 마음대로 말하기 때문에, 임금을 원망하는 말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역사는 다행히도 남김없이 이러한 것도 소화시켜서 일본화 해 왔습니다.
한 예를 들면, 타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가 부친을 간언(諫言)할 때의 말에, 보천(普天)160) 아래에 솔토(率土)161) 의 바닷가, 왕토(王土), 왕신(王臣)이 아닌 것은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구는 우리나라 국체와 꼭 맞는 말이라고 해서 존중받고 있습니다.
보천(普天) 아래에 솔토(率土)의 빈(濱), 어디
에 가도 우리 왕토(王土)가 아닌 토지는 없고, 우리 왕신(王臣)이 아닌 부하는 없다고 했음으로, 충신의충의(忠義)를 지키는 말로서 극히 걸맞은 것입니다. 그러하니 사실은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원래의 시경(詩經)의 이 말은 그런 의미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완전히 반대의 뜻이었습니다.
보천(普天) 아래, 솔토(率土)의 빈(濱), 왕토(王土), 왕신(王臣)이 아닌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두
편하게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자기만이 이렇게도 힘이 들어서, 고통 받고 있는가 하고, 그가 섬기고 있는 성주(城主)를 원망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한번 우리나라에 들어 와 버리면 완전히 거꾸로 쓰여서, 보천(普天) 아래, 솔토(率土)의 빈(濱), 왕토(王土), 왕신(王臣)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해서 키요모리(淸盛)를 간언(諫言)함으로써 국체의 위기를 구한다고 되어 왔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유교의 일본화의 극단적인 한 예가 됩니다.
이상 여러 논의로써 유교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아도, 또 역사적으로 보아도 가장 우리 일본정신 배양에 사정이 좋은, 또한 힘이 있는 교라고 하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출전 : 諸橋轍次, 「日本精神と儒敎」, '日本精神の解剖', 帝國漢字普及會, 1934년, 1~39쪽>
160) 하늘이 모든 지상을 덥고 있는 한. 천하.
161) 땅이 계속하는 한. 나라의 끝 변토(邊土).
3) 다카하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에로
1.
유교와 불교는 원래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교학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해져서 오래도록 잘 우리나라 고유의 국도(國道)와 국교(國敎)에 융합하며, 오래도록 우리나라의 국민정신·국민도덕의 함양과 계발에 공헌해 왔던 것이다.
불교에 관한 것은 한동안 이것을 미루어 두고 유교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그 왕도이상(理想)으로부터 황도이상으로 진행되었는지의 개략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이 일은 우리 국사에 밝혀진 사적(史績)이며, 일본유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연구를 한 인사는 모두 이미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조선에서 유교단체가 그 결속을 새롭게 하여 일어나서, 종래에 이곳의 지도계급인 자들의 자각아래에 동아신질서 건립의 대업에 한 역할을 하겠다는 정신운동이 구체화하는때를 맞이하여, 조금이라도 일본유도의 제1의제를 밝혀서 이 운동의 목표해야 할 곳에 대하여 사견을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화룡점청(畵龍点晴)에 비교해야 할 것이다.
청(晴)에 점을 치지 않는 것은 죽은 용과 같이 이러한 목표를 향하여 매진하지 않는 조선유교운동은 활동을 하는 힘을 갖고있지 않는 것이다.
유도가 우리나라에 전해 져 온 것은 한적(漢籍)학습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한자의 전래는 먼 옛날일지라도, 應神 천황조에 백제의 문신(文臣) 왕인(王仁)이 천자문과 논어를 갖고 와서 먼저 이것을왕자에게 전수했음을 기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천자문에 대해서는 학자 간에 혹시 의의(疑義)가 있지만 논어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의심하는 자가 없다.
유교는 공자가 지나 고대의 교학을 집대성해서 편집한 것으로서, 그 공자의 말을 가장 믿게 하는 것은 즉 논어임으로, 논어에 의하여 유교가 위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그것이 전해져 온 가장 바른 줄거리를 잡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논어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전해 진 유교는 곧바로 잘 우리나라의 상하 인사에게 받아 들여져 우리나라 정무(政務)상에 대단한 세력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것은 여기에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유교의 전래와 불교 또는 기독교전래와는 그 성질을 반드시 동일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의한 유교는 물론 유교철학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필경은 인륜오상(五常)과 공사(公私)의 도를 공자라고 하는 가장 원만한 인격자의 입으로부터 가장 간결하고도 가장온건하게 또 가장 문장을 우아하게 설파한 것으로서, 거기에다가 충효(忠孝)인의(仁義)라거나 유신(有信)유별(有別)이라거나 예악(禮樂)중용(中庸)라고 하는 덕목은 오로지 이 인생의 각각 관계의 선(善)을 나타나게 하는 명칭으로서, 그 하나하나의 그 구체적 행위의 내용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미 국가사회의 체제를 갖추며 대략 그 실마리를 풀고 있었던 당시의 일본에서 보면, 인륜도덕의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 또 다른 아직도 없었던 신기한 교에 접했다기보다, 오히려 종래의 우리나라 도덕을 시인하여 그 재래의 도덕에 훌륭한 이름을 가르쳐 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까지 주옥보배를 귀하게 여겨 달고 왔던 부인들이, 그 주옥보배의 명칭이나 성질 등을 광물학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한층 더 이것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을 알며 기뻐해서 달고 다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라이 산요우(賴山陽)162)의 의견이 매우 알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라이산요우는 일본정기(政記) 應神 천황 16년(5세기) 을사 봄 2월 왕인이 논어 10권을 헌상했다는 것을 논찬
(論贊)함에 있어서,
道一而巳矣. 道之在天下也猶日月也. 日月者天下之日月也, 非一國所私 有也. 道亦然. 父子君臣夫婦無國無之, 而慈孝忠義有別不雜皆在於自然 非有待於人作也. 我邦列聖保民如子, 不讓堯舜禹湯其風俗尊君親 上相 愛相養, 又有 過 唐虞三代之民 則雖 無 經籍 其道固有在. 特未 有 名 而敎 之曰 仁曰 義者而.
라고 도파(道破)한 것이다.
즉 종래에 이미 당우(唐虞) 3대에도 우수했던 실제의 풍속이 아름다웠던 우리나라는, 다만 유적(儒籍)이 전해오고 학습함으로서 이들 덕목의 이름을 가르침 받고 이것을 채택하며 그 표현을 편리하게 한 것뿐이다.
이러한 관계임으로, 유교는 손쉽게 우리나라에 받아들임으로서 그 사이 불교·기독교가 전해져 올 때 일어나기 쉬운 사상 신앙적인 갈등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완전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배불(排佛) 배 예수의 사상 및 운동은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배유(排儒) 사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직도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논어에 의하여 유교의 씨가 우리나라에 뿌려진 이후, 케이타이(繼体)천황의 조정에는 백제로부터 오경(五更)박사 段楊爾를 보내서 오경을 전하며, 계속해서 유서(儒書)와 한적(漢籍)을 가져오게 되었으며,수나라와 당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지나문화의 숭배와 함께 유교의 교화의 힘은 대(代)를 쫓으며 문장박사·명경(明經)박사가 조정에 두어지고 우리나라의 학문문장이라고 말하면 즉 한학과 한문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서와 한적이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감에 따라서, 천천히 유교의 중요사상 즉 유도(儒道) 속에 직접 채택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즉 나라와 평안시대이며, 요로(養老)령에 정해진 학령(學令)에는 맹자는 대학과 국학에서는 교과서로 삼지 않게
되고, 끝내는 맹자의 한 책은 시행하지 않는 책으로 끝났다.
때문에 지나에도 일본은 맹자를 기피하는나라라고 전해졌다.
오잡조(五雜俎)에도 맹자를 실은 상선은 난파(難破)하여 우리나라에는 도착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있다.
또 管公유계(遺誡)라는 데는 화혼한재(和魂漢才)라는 설과 신국일세(神國一世)가 무궁의 국체의 도리나 기예가 유현(幽玄)하고 미묘해서 멀리 요순(堯舜)이나 주공(周公) 공자의 지혜를초월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유교가 단순한 모양새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설명하고, 중국서적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동안은 우리나라 고유의 풍교(風敎)와 동격이라고 까지는 이르지못하나, 그 도가 즉시 우리나라에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발견되어, 끝내 그 점은 단순히 지나사상으로서 취급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감화나 영향을 주는 것으로 조치가 된 것이다.
때문에 삼선(三善)청행(淸行)이 혁명의 주문(主文)에 올라가도 혁명을 하는데 단순히 우의정을 좌천하는데 그치고 황실의 혁명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나라와 평안 양 조정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정식으로 실시된 소위 정태(正態)정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태평생활이 오래 계속되어서 문인은 침착하며 부인은 화합하고, 외척(外戚)의 권세가 이제 오래되어 섭정(攝政)과 천황을 보좌하며 대
권 하에 옮기는 희생을 하며, 무인들의 세상이 되어서는 드디어 토지와 인민과 병마(兵馬)의 권세를 올
162) 1780~1832 江戶 후기의 유학자, 시문에 능하고 일본외사 등의 저서가 있음.
려서 지위가 낮은 무사에게 맡기게 되었다. 무사들의 집권이 계속하기를 백6십여 년, 우리나라는 변태적인 정치가 실시되어, 아무리 황위(皇位)에 대한 인민의 관념에는 추호도 동요가 없으도 하극상의 세태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인 한 분으로부터 아래에 조정의 신하 및 마음이 있는 무신(武臣)과 함께 통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하니 남송(南宋)의 영종(寧宗) 경원(慶元) 6년에 서거한 주자학은 개희(開禧)3년 권간(權奸) 韓侂誅가 형벌을 순순히 받아 들여서 죽음으로서 그 금기가 풀려서 부활하여 소위 신학(新學)으로서 남송에 유행하고, 일본의 유학 스님 俊芿 법사가 1197년 일본에 돌아오자 그가 싣고 온 한문서적 중에 주자의 저술(著述)도 섞여 있었다.
일본 승려 계에 뿌려진 주자학의 씨앗은 그 후 잘 성장하여 고다이고(後醍醐)천황(1288~1339 재위)의 대에는 유명한 玄惠 법사가 그 학문의 대 강사로서, 구학(舊學) 박사라는 경쟁을 하며 문전성시(門前成市)가 되어, 드디어 조정의 준재(俊才)인 쿠게(公卿)를 통하여 궁궐에 도달하고, 그의 강석(講席)에는 여러 번 천황의 임석도 있어서, 생각지도 않게 주자사상이 조정군신의 정치사상의 지도 원리가 되게 되었다. 주자의 정치사상은 공자의 춘추에 나타난 대의명분론을 골자로 하여 이름으로 실(實)을 구하며, 또 어디까지나 호(胡)와 한(漢)의 구별을 바로하며 양이(攘夷)163)를 국책으로 세운 것이다.
켄무(建武)중흥(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카마쿠라 막부를 넘어 떨이고 쿄토에 환도)의 대사업의 밀모의(密謀議)에 참가한 쿠게(公卿)는 모두 玄惠가 하는 주자학의 청강생이었다.
키타바타케 치카후사·日野資朝·동 俊基164)·藤原師賢, 四條隆資 등은 그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켄무(建武)중흥 사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좌절하며 세상은 또다시 무가(武家)정치가 되며, 특히 문교는 치도(緇徒)165)에 맡겨지고, 동서오산(五山)의 승도에 학자가 배출되어, 선학(禪學)과 겸해서주자학을 이수했다.
그러나 오산 승은 아시카가(足利) 씨의 비호를 받았음으로써 주자학을 이수하면서도 주자의 대의명분론의 참 값의 모습은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오로지 주자학의 철학적 측면인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만 강독하며 유불(儒佛)일치의 현묘(玄妙)를 음미하는데 그쳤다.
전국시대도 지나고 도요토미(豊臣) 씨도 멸망하고,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태평시대의 기초를 세운 이에야스(家康)는 민간 유자(儒者)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예우해서 객 스승으로 삼고, 내밀 리에 쿄토 박사 가(家)에 대항하여, 드디어 그 제자 林羅山을 에도(江戶)에 맞이하여 학정(學政)의 주석(主席)으로 삼고, 여기에 주자학으로써 막부(幕府)와 제후들의 정학(正學)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잡은 家康은 문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며, 유학은 존중되고 유자들은 등용되어, 안팎을 통틀어 유교를 정치학의 원리로서 정치가 시행되어 소위 부(富)를 백성에게 소장하는 경제, 즉 백성을 사랑하고 토지를 개간하여 자원을 배양하는 시설이 이루어지며, 문교의 보급과 아울러 우리 국력이 크게 약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막부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유학자들은 林家를 필두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이든, 무로 큐소우(室鳩巢)이든, 寬政 3 박사라도, 그 학파의 주자학이든비주자학임을 불문하고, 막부정치를 집정하는 우리나라 정치의 변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게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현상유지에 만족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호걸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같은 이도 또한 이 범주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켄무(建武)중흥에서 한번 힘차게 부활한 국민의 대의명분사상
163) 오랑캐를 쫓는 것,
164) 日野俊基.
165) 승려의 도당.
은 국내에 평화를 가져오기 하고 문교가 일어나서 유식자가 국가사회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조용히 사색하는 여유를 갖는 세태가 되어서는, 지금까지 억눌려 왔던 국민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사상문제 즉 국체에 따른 정치의 변태에 대한 의문, 나아가서 이에 대한 불만족은 반드시 잠재의식으로부터 뛰어올라서 국가의 가장 큰 사상문제가 될 것이다. 과연 그것은 林家의 문하생의 한 사람인 야마가 소코우(山鹿素行)를 이어서 주자학의 일파인 남학(南學)의 계통을 이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에 의하여 대의명분론으로서 주창되어 일파만파를 일으킨 미토가쿠하(水戶學派)가 되고, 사학(史學)파가 되었으며, 신도(神道)파가되어, 또 한편에서는 국학의 힘ㄴ찬 일어남과 아울러 힘차게 변혁의 기운이 뻗쳐 천
동 지변하는 여러 가지 곡절을 거쳐 결국은 수많은 지사를 태어나게 하고, 마침내는 유신의 대업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때문에 사가들은 명치유신을 왕정복고(王政復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應神천황 16년(5 세기 전후)에 왕인(王仁)이 논어를 헌상한지 명치 원년까지 실로 천5백8십여 년, 대체로 유학이 그 간 우린나라의 학문으로서 상하가 배워서, 또한 학문마저 단순한 지식으로 이를 이해함으로써 만족하지 않고, 매우 성실하게 그 사상마저도 실천 해 나가고자 하는 우리 국민의 성격으로 볼때, 유교의 길은 우리나라 공사(公私)의 실제생활의 규범으로서 준수되어 왔으며, 특히 정치경제는 유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으로, 조정정치의 대 방침이 유도를 채택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헌법 17조를 비롯하여 역대의 조칙(詔勅)에 나타나서 명백함이 해와 별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유도 사상 중에서 특이한 우리나라의 국민정신과 국민도덕에 아무래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곳은 이미 먼 옛
날에 우리가 국민 사상 밖으로 쫓아내어서 그 사상적인 세력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그것의 제일 큰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역성(易姓)혁명(중국 옛날 정치사상으로 천자는 천명을 받고 천하를 통치하나 만약 그 성(姓) 씨 안에 부덕한 자가 나오게 되면 다른 유덕(有德)자가 천명을 받고 새로운 왕조를 연다는것)을 인정하는 사상으로서, 거기에다가 이것은 이미 나라·헤이안(平安)조정 시대의 맹자 취급과 화혼한재(和魂漢才)의 훈계(訓誡)에 의하여 해결 된 것으로 우리나라로서는 이에 대해서는 완전히 면역이 되었으며, 맹자를 강론하며 사기(史記)를 강론하는 누구일지라도 이것을 단순한 한토(漢土)의 정치사상으로 설명하는데 불과한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지나를 가지고 중국이라고 하며 우리나라를 동이(東夷)라고 하는 사상인데, 이것은 석의재자국(惜矣哉自國)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생길 때까지는 우리나라 지식계급에도 마치 칼의 녹과 같이 굳게 녹이 슬어 붙어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지금 아직도 에도(江戶)시대의 유학자들의 견식(見識)이 얕은 것을 통석(痛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맨 먼저 이러한 누습(陋習)을 타파하여 우리나라를 중조(中朝)라고 말한 야마가 소코우(山鹿素行)도 역시 유학자인 것이다.
그러한 것은 어떻던 오늘날에 와서는 지나를 숭배하고 일본을 비하(卑下)하는 사상도 이제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보다도 현실문제로 로서 논의해야 할 것은, 영문을 배우는 사람들의 영국숭배, 미술이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프랑스 숭배라는 도를 넘은 누태(陋態)일 것이다.
우리 국민은 천5백년을 통하여 유교에서 취해야 할 것은 취하고 제외할 것은 빼고 혼연(渾然)히 우리 국민의 교화와 동화함으로써 이러한 구체적인 일본국민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으로, 우리는 오히려 유교의 진수는 우리나라에 와서 비로소 실행 된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최근에 와서 지나 정치당국의 좁은 소견으로 극동의 형세에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변화가 생겨 만주제국이 우리나라의 원조로 세우지고, 왕도국가를 표방하며, 이어서 우리나라 공전(空前)의 대사업인 지나사변이 돌발하여, 유형무형의 국력 총동원을 하게 하였으며, 당당하게 이 사태에 직면해서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가 몇 백 년의 대계(大計)를 확립해야할 중대한 시기를 만났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은 일본에 부속 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그 지리적인 위치가 중요한 것과 그 물적 인적자원이 풍부함으로써 이러한 비상시에 일본에게는 자진해서 빛나는 한 역할을 담당하는 화려한 사태에서게 된 것이다.
이때를 맞이하여 조선의 유교단체가 경향을 통틀어 총동원해서 일치단결 이러한 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한 것이다.
동시에 옛날부터 있었던 지나와 조선의 유교와 일본유교가 그 정치사상의 근본 요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내선의 식자들이 잘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조선의 유교는 말할 것도 없이 지나의 유교 그대로인 채로 단순히 지나의 각각 시대사상이 항상 한 시대 늦게 조선에 나타나는 관계였었다. 그래서 원나라 조정의 종속국이 되면서 주자학으로 일정하게 되었다.
3.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자의 정치사상의 근본은 공자의 춘추에 따른대의명분론인 것이다. 즉 주자는 송나라의 왕실로써 유일한 왕가를 삼으며, 국민은 통틀어 송나라 왕실을 위하여 진충보국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공자의 춘추에서 표시한 대의명분이라는 것은 역시 주나라의 왕실로써 정통 천위(天位)의 소재라고 인정하며 그때의 주왕(周王)을 유일한 군주로 삼으며,힘의 강약에 불구하고 제후(諸侯)들은 모두 주왕에게 신하가 되기로 하고, 어디까지나 주실(周室)에 왕실인 이름으로 주고, 그 이름으로 왕이라는 책임을 물으며, 주의 왕실에 의하여 천하의 재 통치를 기대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나라 켄부(建武)중흥의 사상적인 원동력이 된 쿠게[공경(公卿)] 사이의 유학도역시 주자학으로 그 골자는 대의명분론이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공자의 정치사상을 상세하게 연구하면 두 가지 면이 있는 것이다.
즉 한 면은 공자가 현재의 국가 상태에 맞는 실제적인 정치의견으로서, 다른 한 면은 시대를 초월한 공자가 갖는 종교철학의 근본에서 오는 이상적인 정치사상인 것이다.
공자는 당대의 모든 학문을 이수하고 깊이 고대 정치역사를 연구하며, 지나의 정치적 이상으로 천명한 결과, 지나민족이 수많은 대가족주의의 가족으로 구성되고, 그 전체의 평화와 안녕진보를 위하여 특별히 유덕한 사람을 민의에 의하여 임금으로 삼고, 그 아래에 정부가 조직되어 정치가 실시되고, 이것을 천명(天命)의 군주라고 하는 것을 인식시키고, 아울러 그 이상적 정치가 요순(堯舜)시대에 실현 된 것도 믿게 했다.
바꾸어 말하면 요순시대가 옛날부터 지나인들의 정치이상이었음과 동시에고자의 정치이상이었었다. 따라서 공자의 정치적 이상에는 도덕과 정치와는 일치하고, 대정치가는 대도덕가로서 국가는 덕으로써 다스리는 것으로 하고, 또 임금 자리는 사람에 따르는 것으로 집에 따르는 것은 아니며, 임금 자리의 주고받음도 민심을 통한 천명으로 선양(禪讓)형식이 가장 선미(善美)한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정치적 이상은 서경(書經) 및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언론에 나타나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주역의 혁괘상(革卦象)에 혁(革)을 찬미하여,天地革而四時成. 湯武革命順乎天而應乎人. 革之時大矣哉.라고 있는 것도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당대에는 정치가 이미 쇠퇴하고 왕의 명령이 위엄이 없으며 제후가 서로 침입하여 민생이 곤란에 빠지고 있었으나, 아직 천명이 내려서 임금 자리에 오를만한 대덕(大德)은 나오지 않고, 또 문무(文武) 주공(周公) 이래의 주실(周室)의 존엄과 덕화(德化)는 아직도 민심에 남아 있었다. 때문에 이때의 경국(經國)제민(濟民)의 방책은 어디까지나 군신의 명분을 바르게 하고 주왕을 존경하고 제후를 하여금 시의 예의를 하게하고, 겨우 이름으로 책임을 물어서주실(周室)의 통일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정교(政敎)를 주나라 초기의 융성함을 되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을 인정하여 주실이 왕가임을 부인하여 다른 집안이 이에 대신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함부로 천하가 문란해지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공자의 당대에 직면한 정치사상인 것이다.
때문에 천명론(天命論)이나 선양(禪讓)설은 공자정치론의 이상이며, 대의명분론은공자의 실제적인 정치론인 것이다.
그러하니 맹자시대가 되어서는 시대양상이 한층 내려가서, 주실은 이미 숨이 차서 죽기 일보 전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서, 제후들은 더욱 더 강대해져서 각각 왕을 자칭하는데 사양치 않으며, 아무리 봐도 주실에 의한 왕위 부흥은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민(濟民) 쪽은 식견이 탁월한 유력한 제후를 하여금 선정을 베풀고 그 국력이 왕성 해 짐으로써 다른 제후들
을 복종시켜 마침내 천하통일의 대업을 진행시킬 도리 밖에는 없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시의 제후중에서 천명이 내릴 수 있는 자를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맹자가 혁명을 고취하여 탕무(湯武)의 사업으로써 선미(善美)를 다한다는 연유인 것이다. 즉 맹자는 공자의 시대에 맞는 실제적인 정치사상을 이어 받지 않고, 곧바로 공자의 정치이상을 이어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제환(齊桓)·진문(晉文)을 폄하(貶下)하여 패도(覇道)라고 말하며,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왕도라고 말하고, 왕자는 인의(仁義)로써 천하민심을 얻고 천명은 이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맹자의 사상에 관하는 한은 패도(覇道)와 왕도는 확실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쩌면 오직 인의로써 여러 적국을 복종하게 하고 함으로써 잘 천하를 통일시킨 예는 영원히 지나에는 없기 때문이다.
공자가 그 정치사상의 이상에서 혁명 역성(易姓)을 인정한다는 것은 한(漢)민족의 국가조직의 근본 즉 국체로부터 온 것으로서 이에 우린나라 정치사상과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나라 같은 것은 세계 유일한 특별 국가로 만국에 비교할 수 없는 국체를 갖추고,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누구일지라도 머릿속에 그려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나라의 헌법의 근본에 가로놓여 있는 사상이 우리나라에 응용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은 즉 앞에서 말한 관공(管公)의 유계(遺誡)라고 말한 것에,
凡神國一世無窮之玄妙者, 不可敢而窺知. 雖學漢土三代周孔之聖經, 革明之國風深加思慮也.라고 되어 있는 사유인 것이다.
아무리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文武)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성인됨이 한다고 해도 우린나라 국체는 이러한 것을 사상으로 삼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사상은 곧바로 정치이상이며 또 그것은 잘 국사에 실현되고, 지선(至善) 지미(至美) 참으로 오로지 현묘(玄妙)하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가 도파(道破)한 정치이상은 이것을 왕도라고 말하고, 우리나라 정치는 이것을 황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성립 경로를 상상적으로 그려보기로 한다. 태곳적 아득한 옛날, 우리 큐슈(九州) 한 구석에 옮겨 온 한 민족이 있었다.
이 민족은 유력하고 유덕(有德)한 종가장(宗家長)에게 이끌려온 대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의 전원은 우리집안의 천지의 대신(大神)의 정예(正裔)로 우리 종 가장은 즉 대신(大神)의 지금 세상에 있어서 현현(顯現)이라고 하는 언전(言傳)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민족은 그 개인의 단체력으로 점점 사방을 경략(經略)하여 드디어 본토의 중앙에 진출하여 여기에 일본국의 국기를 세웠었다.
물론 영역이 넓혀지고 인민의 증가함에 따라서 다른 여러 가지 종족도 우리 국내에 들어 왔다.
그러하니 이 대가족의 종가장을 비롯하여 전원은 이들 새로 들어오는 이(異)민족 사람들을 처음부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소외(疎外)하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용하여 그 재능에 따라 각각 요직에 등용하여 환영하면서 한 집안의 의(誼)를 맺었다.
드디어 초대의 천황의 성업(聖業)이 대략 이루어지고 도읍을 정하자, 조종(祖宗)이래의 우리 민족의 사명을 높이 부르짖으며, 천지와 사방리쿠고우 : 六合)의 수도를 열고, 팔굉(八紘)을 휩쓸어서 우(宇)로 한다고 대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 대조(大詔)야 말로 우리나라의 국시를 결정한 것으로, 역대에 여러 가지가 실행되어 드디어 본토도 귀순하여 삼한(三韓)까지도 조공(朝貢)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잘 통치되어 사민(四民)이 태평을 즐기며 또 기후와 풍토가 천혜(天惠)에 풍족하기 때문에, 지나나 조선반도로부터 이러한 것을 듣고 옮겨 오는자가 역대(歷代)로 끊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를 환영하여 그 기능을 쓰고, 또 이것을 겸허하게 배움으로써 문화를 진보시켰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는 소위 야마토(大和)민족 외에 여러 가지 종족 및 귀화인이 잡거하고, 이들이 여러 씨족에 나누어져서 그 장(長)들이 통치하며, 나라의 총가(總家)에 천황을 받들었다.
그리하여 때는 흘러 세상은 바뀌며 씨족은 더욱 더 번성하여 가지가 가지를 치고, 지나나 조선과 같은 종법(宗法)제도가 없음으로 드디어 씨족 간의 연락은 느슨해져 서로가 잊게 되고, 오로지 총가인 황실에 대한 종지(宗支)관계만이 단단히 명기(銘記)되어, 이미 야마토족(大和族)·이즈모족(出雲族)·쿠마소(熊襲)·에조(蝦夷)·츠치구모(土蛛蜘)·귀화인 등이라는 종족상의 차별 관념마저도 없어지게 되어 모두가 모두 야마토민족이 되어 황실을 종가(宗家)로 받들어 모시며, 일생에 한 번 이세(伊勢)신궁에 참배하지 않으면 고향사람들에게 뜨뜻치 못하고, 태묘(太廟) 앞에서 이마를 갖다 대면 다만 고
마움에 눈물이 흐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완전히 우리 대군(大君)이 군림하고 계시는 우리 국토에 알맞은 국민적인 정서로서, 시대에 따른 정치형태의 변화에 의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것이었다.
4.
이와 같이 우리나라와 한토(漢土)와는 그 국가조직의 근본에서, 바꾸어 말하면 양쪽의 국체가 다름으로 그 정치사상이나 정치이상에서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즉시 양국민의 도덕적 사상에도 나타나서, 한토의 가르침이 설명하는 바의 도덕으로서는 위리 국민도덕을 설파하게에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토의 황제라는 것은, 나라를 조직하는 수많은 대가족의 안녕과 행복 즉 외적에 대하거나 내란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최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기 때문에 그들의 총의로서 이러한 것을 택하고 받들게 된 것이었다. 때문에 한토는 가족단위의 민본주의 국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가족의 총화가 즉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 가족은 애국을 잘 알고 있으나, 임금을 사랑한다는 심정은 일차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는 민국이 되면서 애국이라는 가르침이 세우 졌으나, 충군(忠君)이라는 가르침은 세울 수가 없다. 지금의 지나인들에게는 드디어 충군이라는 도덕은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민본주의국가의 성립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임금은 항상 인민을 보육하고 옹호하여 민정을 관리 해 줄 의무를 갖고 민에 의하여 세우지게 된 것은 말하자면 가장 큰 관리인 것이다.
백성은 임금을존경하고 또 임금을 두려워하나 이를 사랑하고 이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받든다는 정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충군과 애국은 완전히 별도의 도덕으로, 만약에 임금이 임금답지 않는 행위를 할 경우에는 용서 없이 그 임금을 그만 두게 해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의(誼)는 군신이고 정(情)은 부자(父子)라고 말한 것은 천고(千古)의 명언이나, 그것은 단순히 지나의 군민(君民)의 이상을 말한 것에 불과하고 지나에서는 아직 한 번도 실현이 안 되었으며, 오히려 우리나라 유랴쿠(雄略)천황의 조칙(詔勅)이 되어서 우리나라 군민(君民)의 심정을 사실과 같이 표현해서 품위 있게 국사에빛나고 있는 것이다.
임금은 끊어져도 나라는 있으며, 우리 가족이익을 위하여 임금을 바꾸는데 주저하지 않기 때문에 애국은 있고 충군은 없고 경군(敬君)은 있으나 愛君은 없고, 충효는 반드시 서로 일치 할 수가 없으며,만약에 충효가 서로 대립할 때는 효를 위하여 충을 버리는 것이 지나의 신민의 도덕인 것이다.
특히 지나에서 신과 민과는 그 뜻을 달리하며, 신은 군을 받들어서 관리가 되는 것이며, 민은 오직 창생(蒼生)으로 통치되어 임금이나 신을 양생하는 것이다. 때문에 신은 관수(官守)가 있는 한 임금과 일체가 되어 그 직책에 순직할 의무도 있으나, 민은 임금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이 없으며, 천하가 태평하면 태평할수록 조정의 일을 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신도 임금에 대하여 너무 분명히 의견을 내세우면서 간언(諫言)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이며, 만약에 할 수 없이 간언을 해도 세 번 간언을 해도 듣지않으면 신(臣)을 그만 두고 가버린다. 가 버리면 신의 의무는 없어진다.
말하자면 군신관계는 오늘날 상사와 부하 같은 것이다.
일군만민이라는 사상은 끝내 한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을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지나의 정치이상에서는 군주된 자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그 지위에 있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할 경우에는 다른 적임자에게 내 자리를 물려준다는 것이 군주다운 최상의 도덕으로 되어 잇는 것이다.
그 유일한 예로 전해 온 것은 즉 요(堯)가 나이가 많아져서 깨끗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舜)에게 물려준 사적(事蹟)인 것이다. 즉 인민 쪽으로부터 군주를 그만두게 할수도 있으나, 군주 쪽으로부터도 자리를 그만 둘 수가 있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송구한 이야기지만 명치대제가 이토(伊藤) 공을 향하여 경(卿)을 사직하게 할 수가 있어도 짐(朕)은 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듣는 것과 같이 황위(皇位)는 나라와 일체 불가분인 것과 동시에 위 한분과 화위와도 일체 불가분인 것이다.
또 지나의 군주는 하늘을 무한한 존귀한 것으로 세우며 제천(祭天)이 국가 제일의 대사(大祀)인 것이다.
왜냐하면 군주의 자리는 천명(天命)으로 이를 주었으며, 천명이 계속하는 한 이것을 보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이라거나 땅이라거나 하는 천황의 지위에 대하여 권력을 갖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천황이 제사를 지내는 제일 큰 대사(大祀)는 아마테라스오오미키미(天照大神)이다.
천조(天祖)야말로 영원한 황위(皇位)의 수호이며 영원히 국토를 저미는 무상(無上)절대의 신령이신 것이다.
지나에서는 신분에 따라 제사지내는 대상을 달리하여, 하늘을 제사지낼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천자 만이다.
제후라고 해도 오직 경내의 산과 강을 제사지내며, 서민은 성황신(城隍神)과 우리 조상을 제사지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천조(天祖)대신이 전 국민의 종사(宗祀)이며 집집마다 이를 제사지내며 받들어서 가장을 비롯하여 가족이 매일 아침 이른 때에 청명심(淸明心)으로 카시와데(柏手)166)를 쳐서 군국(君國)의 대길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행사는 종교를 초월하고, 계급을 초월하며 국민은 그것이 무슨 연유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일본국민으로서는 해
야 할 일로 태어날 적부터의 예속(禮俗)으로 마음 속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매일의 행사가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무심하게도 이러한 것을 하고 있으나, 한 번 지나의 예속에 생각이 미쳐, 하늘은 오직 황제만이 이것을 제사 지낼 수 있는 사실을 알 때, 참으로 고마움에 울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제사 한 가지만 하드라도 양국의 국체의 구별이 명명백백하게 불을 보는 것보다 명백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제사는 사람의 성심성의 가장 순진한 사회적 구현인 것이다.
지나에서는 천하와 중국과는 상대적 개념인 것이다.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중국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중국이외에도 사방에 사람이 살고 있는 사실은 이것을 인정해도, 그들은 번이(蕃夷), 자세하게는동이(東夷)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이라고 부르며 중국 민과는 별종으로 속해서 왕권이 미치지 않는 자들로 두어야 할 자들이다.
사이(四夷)에 대한 지나국의방책은 이러한 것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것을 품는데 그치는 것이다.
이것을 유원(柔遠)이라고 말한다.
즉 중국이 잘 다스려지면자연히 사이(四夷)도 그 성교(聲敎)를 느껴서 따르게 되며 조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공물(貢物)보다도 하사품 쪽이 값에 있어서 훨씬 컸었다.
만약 이러한 유원(柔遠)의 정책을 한 걸음 넘어서 그들을 무력으로써 복종시키고자 했더라면 그것은 이미 전통적인 정책에 위배하는 것으로 그 결과는 먼저 독무(瀆武)167)가 되어 오히려 중국을 피로하게 하고 재앙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은감(殷鑑)168)에 명백하게 한무제(漢武帝)·당태종에 나와 잇는 것이다.
때문에 지나의 영토가 가장 넓었던 원조(元朝)와 청조(淸朝)와는 북호(北胡)인 몽고인 만주인이 세운 조정으로 한(漢)인종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왜 지나인이 옛날부터 중국 이외에 정치를 추진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지나는 자진해서 정치를 사이(四夷)에 펼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와서 나에게 조공을 받치는 예의를 갖추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대외적인 국시였었다.
그리하여 오히려 사이(四夷)로 보아서는 그들이 강성(强盛)할 때 마다 침략을 당해서 커다란 국환(國患)을 입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의 왕도라는 것은 덕치(德治)주의이며 문치(文治)주의로 그 이상인 치세(治世)도 중국내의 선치(善治)로 끝났으며, 이것을 사해(四海)에 미쳐서 동이(東夷),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을 포용하는 대 제국을 세우서 이러한 정치를 편다는 생각은 실제적으로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나라를 창건하자마자 바다 속의 한 고도(孤島)였음에도 불구하고,창업의 군주는 물론 그 신료(臣僚)들까지, 마음의 넓기가 팔굉(八紘)을 압도하고 일시적으로 평안함을 싫어하고 항상 생각이 황화(皇化)의 사방(四方)선포를 도모했던 것이다. 神武천황 동정(東征)의 성업은 대략 이루어져서 도성을 정하고 황성(皇城)을 경영하고자 하자,
兼六合以開都. 掩八紘而爲宇. 不亦可乎. ('일본서기')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천황의 입을 통하여 천조(天祖)이래의 구가통치를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국민의 건국당초부터 대외적인 이상을 발표한 것으로, 여기에도 지나의 왕도와 근본적으로 그 사상을
166) 신을 참배할 때 치는 손바닥이 마주 치게 하는 것.
167) 무 나라를 더럽히는 일.
168) 은나라는 전대의 하 나라가 멸망한 것을 거울삼아 경계하라.
달리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천황은 이러한 웅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내(畿內)를 평정하자 앞서 항병하고 대들었던 자들 마저 그대로 의심치 않고 썼으며, 그중에 강용(强勇)한 자는 발탁하여 친위대장까지 등용한 것이다.
이러한 포용정신은 이미 조선병합당시 명치대제가 명령한 일시동인의 성지(聖旨)가 선례가 되는 것으로 참으로 팔굉일우의 이상에 따르는 것으로, 후세에 와서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그 장점을 채택하고, 조금도 지나와 같이 자국문화에 대한 지나친 자만심을 가지는 흔적이 없는 것도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하는 국민성인 것이다.
지(智)·인(仁)·용(勇)의 삼달덕(三達德)을 표상하는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를 천손(天孫)에게 주신 것으로 생각하여 더욱 더 천황의 마음이 심원(深遠)현묘(玄妙)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지금 불행히도 우리나라와 지나의 장정권과는 서로 싸우는 사이가 되었으나, 원래 이러한 험악한 형세가 된 당초부터 지나에서는 일본인 박해가 잔인했음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지나인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불쾌한 취급을 당한 자는 없으며 완전히 평상시처럼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왜냐, 역시 이것은 양 국민이 갖고 있는 대 외국관념의 근본적인 수용태세에 있는 것으로, 위나라와 같이 팔굉일우의 대 이상을 건국 이래 계속 마음 밑바닥 깊이 품고 있는 국민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지나인에 대한 태도는 오직 당연한 것으로, 그러나 자부심과 배외(排外)심이 굳어 있는 그 나라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
5.
이와 같이 지나의 왕도정치와 우리나라의 황도정치와는 그 사상적 내용을 달리하고 있으며, 또 거기에서 베풀어 진 국민적 이상·국민도덕 상에도 서로 커다란 홈이 그어져서 서로 일치할 수없는 것이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유교교화를 진흥함으로써 현재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일익(一翼)이 되기 위해서는 명백하게 예부터 내려오는 지나와 조선 그대로인 채로 유교를 널리 설파하고 선포해도 그것으로 즉시 조선 민중의 국민정신을 눈 뜨게 하며 국민도덕을 내선일체에 추진한다고 하는 것은 대체로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물론 유교가 가르치는 바는 일반인간으로서 필요한 도덕실천은 어느 나라에도 어느 시대에도 이것을 설명하고 가르쳐야 하며, 또 이러한 것을 가르치면 그 만큼 교화적인 효과는 올릴 수 있는 것이나, 오늘날 조선에서 크게 진흥해야할 유교교화는 그런 미지근한 유교의 가르침이 아니며, 충분하게 일본에 국수(國粹)에 동화한 국민정신과 국민도덕을 계발과 배양 및 함양해 온 황도적인 유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나 유교의 정치사상인 역성(易姓)혁명, 선양(禪讓)방벌(放伐)
을 배제하고, 충효불일치, 효를 충보다 중시하는 도덕사상을 부인하고, 그리하여 우리 국체에 따른 대의명분으로써 정치사상의 근본을 세우, 충효일체로써 도덕의 골자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 지나를 중화로서 숭배하는 것을 폐지하고 우리나라를 중조(中朝)로 삼고, 우리 국사의 정화(精華)를 존중해야 할 것
이다.
이러한 것은 참으로 우리 일본유교도가 품고 있는 정치도덕사상으로서, 그리고 이제부터의 조선유교도도 이렇게 하여 세태에 기여하며 스스로를 살려나가야 하는 것이다.
조선의 유교단체는 황도유도를 선포하고 발양(發揚)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상 왕도유도로부터 황도유도에로의 소견을 대략 설명했으나, 이러한 것은 요는 그것이 틀리는 바는 공자가 우리나라에 태어나지 않는 한 어쩔 수없는 것으로, 이러한 것으로 유도의 결점으로 공자를 문책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우리 일본인이 유교의 대의명분론을 그러한 우리 국체에 맞추어 본다는 것이 공자사상의 조리에 위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추호도 공자사상의 조리에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공자는 그 정치사상의 이상으로서는 천위(天位)천명(天命)설을 취하며 따라서 역성(易姓)혁명 선양(禪讓)을 승인하고 있으나, 주(周)나라에서 태어난 현실의 공자자신으로서는 주왕(周王)으로써 대일통(大一統)의 정천자(正天子)로 세우서, 대의명분은 주실(周室)을 옹호하고 여기에 신절(臣節)을 다 하는데 있다고 했다.
이것은 춘추에 표출된 정치사상의 근본이며 명백하게 백대(百代)에 빛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즉 이 대의명분을 세운 공자로서, 만약에 우리나라에 태어났다면 어떠한 정치사상을 세우고, 대의명분이 향하는 바를 어디에 두었을 것인가를 생각할 것까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유교를 우리나라에서 실시하고자 하는데 그 정치사상을 왕도로부터 황도로 진전시켜야 할 것은 공자 그 사람의 사상의 당연한 조리로서 명명백백하게 추호의 의혹을 곱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선철(先哲)총담(叢談)이 전하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齊)의 한 일화를 적어면서 이 소편(小篇)을 끝내고자 한다.
안사이가 이전에 뭇 제자에게 물어보며 가라사대, 방금 그 나라(지나를 말함)에서 공자를 하여금 대장을 삼고, 맹자를 부대장으로 삼으며, 수 만기(數萬騎)를 거느리며 우리나라를 쳐들어 올 때는, 우리당인 공맹의 길을 배우는 자들은 이를
어찌할 것인가. 제자들이 모두 답하지 못했었다.
안사이가 곧 가라사대, 불행하게도 이러한 횡액(橫厄)을 만난다면, 우리당은 몸을 굳게 지키며, 수완을 발휘하여 이들
과 한판 싸워서 공맹을 사로잡음으로써 나라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 이것이 곧 공맹의 도인 것이다.
(끝)
1939년 11월 18일
<출전 : 高橋亨, 「王道儒道より皇道儒道へ」, '朝鮮' 제295호, 1939년, 10~28쪽>
4) 안인식(安寅植), 황도유학의 본령(本領)
安寅植(명륜전문학교 교수)
황도유학이란 우리나라 고유의 황도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동양도덕의 근원인 유교도덕의 진수를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국체를 명확하게 하고, 인도(人道)를 올바르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또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면, 국체를 중심으로 인륜의 길을 올바르게 할 수 있으며, 또 인륜의 길이 올바르게 되는데 따라서 국체는 더욱 익명(益明)하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국체와 인도와는 서로 순환작용을 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는 것과 함께, 양자가 완전히 융합순화(醇化)되어 최고지선(至善)의 국민도덕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종래에 유교의 설득방법은 인도를 올바르게 하는 점에 거의 점부를 소진하고 있었으나. 국체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있던 것이 결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는 불행하게도 상고시대부터 국체가 가끔 변혁해 온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국체를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참다운 이상이라고 한 대동(大同)태평의 세계는, 한꺼번에 실현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춘추의 대의명분 같은 것도 실제로는 완전히 실시되고 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종래에 지나에서도 조선에서도 같은 궤도를 밟고 온 것이었다. 이제야 다행스럽게도 3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중
심으로, 동양도덕의 근원인 유도의 진수를 받아들이고, 국체와 인도와를 완전히 맺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황도유학의 특질을 표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황도유학의 이상이야말로 참다운 국민도덕의 최고 지선의 길을 완성함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세계진운(進運)에 공헌하는 것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 국체를 명확하게 할 것
황도란 황국고유의 길로, 나라를 세운이래 천신(天神)의 길과, 역대 천황의 어우(御宇)의 길을 가리키는 말로서, 혹은 신도(神道)라고 말하며 혹은 황도라고 말한다, 사실은 황도 즉 신도, 신도 즉 황도로서같은 황국고유의 길인 것이다.
따라서 황도의 근본 뜻을 설명하는 데는, 국체의 존엄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대체로 동서고금을 통하여 지구상에 국가를 건설하는 자가 몹시 많으나, 건국이래 한성(姓)이 전해 내려오는 것은 세계 각국 어느 역사를 보아도 발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3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지며 만세(萬世)일계(一系)의 황통을 받드는 일본국체 같은 것은, 과거에 볼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서도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구한 역사를 갖는 것은 혹시
우연히 기적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존귀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와 같은것은 반드시 특수한 원인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특수한 결과를 생기게 하는 것으로서 결코 우연도 아니며 기적적인 것도 아닌 것이다.
각국의 예를 보면 권력만으로써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상례인 것이다. 때문에 그 권력이 쇠약해 졌을 때나 또는 권력이 더 강한 자가 나왔을 때는 취약하게도 붕괴되는 것이다. 저 유명한 진(秦)의 시황제 같은 이는 모든 수단방법을 강구하여, 1세, 2세로부터 만세에 이르기까지의 야망을 품었으나, 권력만을 믿고 군림했기 때문에 결국 2세에서 망하고, 40년의 짧은 운명에 끝난 것은 가장 현저한 사실(史實)로서, 그 외 어떠한 나라들도 길고 짧음은 있지만 대체로 이러한 부류였던 것이며, 홀로 신국(神國)일본은 나라를 세울 당시 도의를 근본으로 하고 국가를 건설하여, 역대 이러한 도의를 신조로 하고 덕화(德化)를 홍포(弘布)했기 때문에, 외람되게도 교육칙어에 “건국신(建國神)과 역대 천황이 나라를 세운 것은 굉원(宏遠)하며 덕으로서 세운 것은 심후(深厚)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도의입국의 대 정신을 명확하게 납득시킨 것이다.
이러한 도의정신이 국가의 운명을 영원하고 유구하게 한 까닭인 것으로, 국민은 황실을 중심으로 도의를 지키며, 황실은 도의를 중심으로 하고 신통(神統)을 계승하시며, 이러한 것이 일본국체가 만방에 유례없는 이유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에는 인애(仁愛)의 화신(化身)으로써 아래에 미치며, 아래는 충의의 도로써 위를 받들며, 군민일체의 국가가 되어서 역대 천황께서는 지인(至仁)지자민(至慈民)을 하는 것이 자식과 같이 사랑해 주시며, 국민은 충효도의를 다 하여 나라를 위해 살고 나라를 위하여 죽겠다는 국민이 된다.
이러한 국체가 있음으로써 이러한 국민성이 있으며, 이러한 국체와 이러한 국민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에 유례없는 신국일본이 출현한 것이며, 이것을 사람신체에 비유해서 말하면 천군(天君)(두뇌)태연해서 백체(百體)가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한 몸의 주재(主宰)인 명석한 천군과 장건(壯健)활발한 사지(四肢)나 백체(百體)가 합치하여 건강한 몸을 조성(組成)하고, 발끝의 사소한 아픔일지라도 천군이 이것을 직각(直覺)해서 이목(耳目)수족의 기관에 명령하여 이것을 구호하게 하고, 만약에 천군에게 위해를 미칠 우려라도 있을 경우에는, 백체가 총동원하여 혹시 일부분의 희생을 돌보지 않고 천군을 위하여 방위의 임무를 다 하는 것은, 이것이 인체의 천연적인 조직이 원래 그와 같은 것이다.
요컨대 신국일본은 도의입국의 이상적인 발전에 의하여, 만방에 유례가 없는 국체와 세계에서 독특한 국민성이 혼연일체를 이루며, 현재 3천년의 역사를 빛나게 함과 동시에. 미래영원에 걸쳐서 천양(天壤)과 함께 끝이 없는 것은 확신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국체의 본의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황도유학의 본령(本領)의 시작인 것이다.
2. 인도(人道)를 바로잡을 것
대체로 하늘에는 하늘의 길이 있으며, 땅에는 땅의 길이 있고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길을 설파한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설이 엄청 많으나, 특히 수천 년간 동양도덕의 근원이 되고 인류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대본(大本)의 길로서는, 통틀어 유도에 앞서는 것은 없으며, 원래 유도의 근원은 멀리 요순(堯舜)부터 시작된 것이나, 공자에 이르러서 집대성된 것으로서, 그 성덕(盛德)대업(大業)은 생민 이래 여태까지 없었던 대 성인으로서, 그 이륜(彛倫)의 가르침과 인의도덕의 설은 만세의 부자(夫子)로 존중 받고 오늘날에 이르런 것이다. 유(儒)란 원래 주(周)의 초풍교(初風敎)의 지도관의 직무 명이었으나, 공자의 가르침이 잘 천하 풍교의 책임을 받음으로써 그 교를 신봉하는 자를 가리켜 유(儒)라고 부르며, 전국시대에서도 구류(九流)169)백가(百家)의 중용 가를 수위에 헤아리며, 그 후 2천수 백년간에 걸쳐 동양도덕의 중심이 되어서 정치도 교육도 모두 이것을 기본으로 삼은것으로, 이러한 도를 유도라고 말하며 이러한 교를 유교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학문을 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길이야 말로 인간일상에서 당연하게 닦아야 할 도로서, 군신(君臣)부자(父子)의 대륜을비롯하여 부부, 장유, 붕우에 이르기까지 오륜의 길이 확실하게 정해지고, 대체로 인간이 인간다운 사연이 먼저 이것에 따라서 판연하게 구별할 수가 있으며, 누구 한 사람이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한 사람 남김없이 실행해야할 지극히 하기에 간단한 길로서 결코 고원난행(高遠難行)의것은 아닌 것이다. 또 대학의 명덕(明德)신민(新民)의 강령과 수제(修齊)치평(治平)의 조목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관한 근본의 도가 남김없이 포괄되어, 이 수기(修己)에 관한 사항은 소위 도덕학이 되고,
이 치인에 관한 것은 소위 정치학이 되어서 모두 지선(至善)에 그침으로써 목표로 삼는 것으로서, 이것역시 매우 평실(平實)의 학문으로서 은벽(隱僻)괴이(怪異)한 학문과 다른 사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인(仁)의 안택(安宅)에 있으면서 의(義)의 정로(正路)를 하며 충신, 효제, 예양(禮讓), 염치 등의 미덕을 구비하고, 모두 이것이 실천궁행(實踐躬行)을 내용으로 공리공론(空理空論)을 갖고 노는 것은 허용되지않는다. 요는 이 길은 대중지정(大中至正)하여 평범 속에 진리가 있으며, 가장 인정에 맞고 사회실정에
169) 전국시대 이후의 9개 학파.
적절함과 동시에 특히 가족주의국가윤리에서 동양정신의 문화특색을 갖고 만고에 불역(不易)한 대도인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영욕(榮辱)화복(禍福)과 국가의 치란(治亂)흥망(興亡)과는, 모두 이 길을 잘 마지하느냐 않느냐에 의해서 판단됨으로, 마치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은 이 길을 떠나서는 행복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인 것이다.
특히 공자의 손을 거친 춘추의 존왕(尊王)의 대의(大義) 같은 것은, 만세(萬世)군신(君臣)의 대방(大防)을 엄밀히 하고 천하후세의 큰 법을 정한 것은, 우리 국체를 배양하는데 유일한 보전(寶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공부자의 이상이라고 한 대동(大同)태평(太平)의 세계관은 오늘날 대동아공영의 이념에 합치된다고 보아야 하며, 유도의 본령이라고 말해야할 인(仁)의 길은, 천지만물을 일체로 하고 사해(四海)는 동포이며, 천하는 한 집이라는 이상은, 원래부터 팔굉(八紘)일우(一宇)의 대 정신과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그렇게 보면 현재 시국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길인 것이다.
다른 방면에서 생각해 보면 과거에 오랫동안 구미 물질문명이 수입되고부터, 물질편중의 해독은 심한 것으로서, 유물만능주의 아래에서는 정신도덕은 거의 파괴되고, 자가(自家)전래(傳來)의 유보(遺寶)를 버리고 되돌아보지 않으며, 심한 경우에는 성인의 대훈(大訓)이며 인도의 근본인 충효의 길마저도 이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옛 냄새가 나는 진부(陳腐)설”이라고 나무라며, 이러한 것에 순치(馴致)되어모든 악질을 띠는 외래사상은 존귀한 국체를 잊는 것과 같은 마음씨 나쁜 자마저도 전연 없다고 말할수 없다.
이것은 만주사변 이전의 시대상의 검은 그림자였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이웃인 지나같은 것은 4천년의 오랜 문화를 가지며, 공맹의 가르침의 본원지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민국과는, 전통적인 군신의 대의를 파괴하고 민국성립 이래 30여 년간의 정치라는 것은, 오로지 미영의 모방에 지나지않고, 따라서 동양도덕의 극단적으로 퇴폐된 것은 지나만큼 심한 것은 다시없을 것이다.
1, 2의 예를든다면 “한가(漢家) 4백년의 기업(基業)은 태뢰(太牢 : 중국에서 천자가 사직을 제사지낼 때 올리는 제수용 소, 돼지, 양의 희생물)로서 공자를 제사 지내는데 있다”라고 하는 고유의 역사를 무시하고, 민국성립 직후 먼저 공자를 제사지내는 전례(典禮)를 철폐하고 선성(先聖)에 대한 무례를 감행하고 또한 “예의염치는 나라의 사유(四維)170)이며 사유를 펴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라는 것은 관중(管仲)의 말이었으나, 이것이 동양고유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민국의 사람들은 예의염치를 말하는 것은 동양이 떨치지 못하는 원인이라고 말하며, 민국 10년에는 상해에서
200 남짓의 청년여자에게 파렴치운동을 권고하여 나체행렬을 만들어서, 백주에 큰 도시 속을 행진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이 외래의 나쁜 사상에감화되어 인도(人道)를 무시한 것이 지나사변을 일으키게 된 자업자득의 화였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흥아성업은, 우리 동양인 전체에 신 생명을과 신활기를 주었던 것과 동시에, 동양고유의 정신문화를 부흥하고 인도(人道)의 큰 깃발을 흔들며 전 동아에 호소하여, 공통의 신념하에 도의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오늘날 문교보국의 사명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우리 반도는 종래에 오랫동안 유교를 신봉 해 왔던 관계로 풍속과 습관이 남김없이 유교문화에 침윤(浸潤)되어, 이제 도한 인심이 이것에 흠뻑 젖어서 견고하여 빼낼 수 없는 것이 있다.
다만 말엽에 와서
170) 북서, 남서, 북동, 남동의 네 귀퉁이 : 관중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네 가지 대강(大綱). 예·의·염·치의 4덕.
폐습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나, 이것은 정치의 부패에 의한 인심의 타락이었으며 결코 유교의 죄인 것은 아닌 것이며, 진리는 어디까지나 진리로 만고불역(萬古不易)의 인도인 것은 더 이상 의심을 할 여지는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유도를 말하는 데는 종래의 폐습을 그대로 답습할 까닭은 물론 아니며, 또한 지나류(支那流)를 그대로 통째로 삼킬 것은 결코 아닌 것이고, 반듯이 단호한 혁신을 더하여 인도의 대본을천명하고, 반석과 같은 국체 위에 새로운 정신문화를 건설하고 흥아성업에 공헌하고 싶은 것이 오늘날 유도진흥의 목표인 것이며, 이것이 황도유학의 본령의 끝인 것이다.
3. 교육칙어를 익찬하며 받들 것
황도유학의 본령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국체를 명확하게 하고 인도를 올바르게 하는데 있으며,때문에 여기에 황도유학실시방법으로서는, 그 법이 머지않으며 교육칙어의 성지를 익찬하고 받드는 것이 가장 요긴한 것이다.
성지의 내용에 관해서는 더욱이 가설(架設)을 필요할 것 까지 없으나, 고유의 황도정신을 명확하게 하고 유도의 진수를 채택하여, 최고지선(至善)의 표준도덕으로서 국민이 모두 준봉(遵奉)해야 할 금과옥조(金科玉條)의 성전인 것은 이것 역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특히 우리 황도유학을 논의하는 자로서는 여기에 가까이 모범서를 잡고, 각 개인의 수양에 진력하는 것은 물론이며,또 나아가서 국가사회를 위하여 이러한 성지의 선양(宣揚)을 유일한 신조로서 떨쳐 일어나야 되는 때인것이다.
그래서 동경의 유시마(湯島)성당에 있는 재단법인 사문회(斯文會)의 취지서의 한 구절을 빌려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손하게 생각하건대, 명치천황의 교육칙어에 제시하신 바는, 즉 우리나라 고유의 도덕으로서,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비롯하여 천황역대의 조상의 유훈(遺訓)에 연원(淵源)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거의가 유도의 정신과 부합하는 것 같은 것이며, 성현들이 일찍이 유도를 채택하고 수제(修齊)의 도구, 치평(治平)의 법으로서 다스렸다면, 그것이 우리 덕교와 융합하고 혼화(渾和)하게 된 것은 물론 그것이 이루는 바이며, 이것으로써 교육칙어의 성지(聖旨)는 유도를 빌어서 더욱 천명되었으며, 유도의 본의는 교육칙어에 인하여 더욱 더 권위를 더할 것이며, 이러한것이 우리 동지가 서로 도모하고 동우(同憂)상회(相會)하며, 크게 유도를 떨쳐 일어나게 함으로써 교육칙어의 성지를 선양하고자 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이것은 참으로 우리 뜻에 맞는 것으로서, 크게 공명하고 우리 진로(進路)의 목표를 확실히 여기에 정해 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성칙(聖勅)이 가르침을 주신 바와 같이, 고금에 통하고 안팎에 실시하여 어그러지지 않는 진리로서,당시 기초(起草)에 관계한 元田東野의 말과 같이 “저 불마(不磨)의 헌법도 세태에 따라서 수정되는 일이있으나, 이 성칙의 큰 내용에 있어서는 宣於萬歲而不可復易一字인 것이다”고 하는 것과 같이, 만세 후에도 한 자도 바꿀 수 없는 국민도덕의 기준인 것이다. 때문에 교육에 관한 가르치심이나 결코 학생에게 한정한 것은 아니며, 신민(臣民)인 자로서 어느 누구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종신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전인 것이다. 또 거식 날에 축사와 같이 봉독(奉讀)식만으로써 건봉(虔奉)했다고는 말할수 없다.
반듯이 일상생활에서 그 내용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의 실행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유교의 경전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실행하는것을 한 조건으로서 추가해야 할 것이다.
淸水廣治 씨의 교육칙어성지실행방법론으로서 다음과 같이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하면, 어쩐지 칙어의 성지가 충분히 실행되고 있지않다, 이와 같이 실행되지 않고 있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즉 학문의 표준이 정해 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정해지지 않는 근원은 무엇인가 하고 말하면 즉 유학을 폐지했기 때문인 것이다”라고, 이 말은 확실히 긍경(肯綮)171) 속에 있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대체로 유도의 근원지인 지나에서는 공자 이후는 오랫동안 완전히 실시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은 역대의 혁명이 무상해서 국체가 정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며, 저 청나라 말기의 학자 沈子培172)와 같은 이는 “공자의 도는 일본과 같은 국체를 갖고 비로소 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강유위(호 南浦)는 지나 장래를 위하여 훌륭한 입헌군주국의 명안을 만들었으나 막상 군주다운 적임자를 정하기 어려웠음으로 붓을 던지고 “일본 같은 것은 참으로 천혜의 나라이다”라고 한탄했을 정도다.
1928년 즉위의 대전을 할 때 당시 지나공사 汪榮賓은 그 위풍이 장엄해서 화기애애한 것을 보고 “공교(孔敎)의 진수는 오늘에 와서 비로소 보았노라”라고 선망(羨望)하였다고 한다. 존엄한 국체를 중심으로 도덕의 모범국가가 되고, 세계문화에 공헌하는 것은 일본국민의 독특한 자랑으로서 후방에 있어서 유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여기에서 시험 삼아 생각해 보면, 공자의 교가 아무리 대본의 길일지라도 지나와 같이 혁명이 무상한 국체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고, 또 아무리 존귀한 신국(神國)국체일지라도 개인이 기주의 및 잘 못된 자유평등사상을 그대로 통째로 삼켜서는 위험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공자의 도는 충효도의를 근본적인 본의로 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와 같이 국체를 얻음으로서 이상대로 실현되는 것이며, 일본국체는 어떠한 교보다도 오륜오상의 도를 얻고서 더욱 더 건전하게 배양되는 까닭인 것이다.
생각하건대 세계만국 중에서 만세일계의 황통을 받들고 3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갖는 것은 신국일본을 두고서는 더욱이 없으며, 동양 수천 년이래 지나혁명이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2천5백년을 통하여 인류의 존앙(尊仰)을 받는 것은 공자 외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방에 유례가 없는 국체에 만세인도의 대본을 채택하고, 잘 순화 융합하여 혼영일체를 이루고, 국체는 더욱 더 천양(闡揚)되어, 인류역사상 지금까지 없었던 최고지선의 새로운 도덕을 건설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동아공영권의 지도 원리로 삼고 나아가서는 세계 신질서의 건설에도 커다란 공헌을 바침으로써, 대동태평의 이상세계를 동아의 신천지에 건설하고 싶은 것이, 이것 도한 황도유학의 본령의 완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출전 : 安寅植, 「皇道儒學の本領」, '朝鮮' 제347호, 1944년 4월호, 26~36쪽>
171) 사물의 가장 요긴한 곳이나 일의 가장 중요한 대목.
172) 이름 曾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