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방 순자
1 친구의 하소연이다. 결혼 전, ‘그저 남자들이란 죄다 이상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아라 웬만하면….’ 엄마의 당부가 있었단다. 그때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박장대소했다. 이상한 존재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을 못 하는 눈치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임을 알았다. 그 말이 남의 얘기만은 아니었슴을 실감한다.
“나 우울해서 빵 사왔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우울하냐고 묻는다. 조금의 연기 섞인 표정으로 다시 얘기했다.
“엊그제 코 땡에 갔었잖아, 그날 우울해서 빵 샀어.”
두번째 얘기에도 똑같은 반응이다. 이어 하는 말이 혼란이다. 사 왔으면 먹어야 한다며 빨리 가져오란다. 근데 왜 우울하냐며 재차 묻는다. 요즘 성격검사가 유행이다.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인가 감성적이어서 공감 능력을 가졌느냐를 구분하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느 쪽이 더 좋은지 그른지를 판가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수많은 내면의 감정이 줄다리기처럼 어느 쪽으로 쏠리냐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성별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2 ‘말 안 해도 알잖아, 꼭 말해야 아는가,’ 확인해 보고 싶은 말이 있어 물어도, 내 안에 너 있다는 식이다. 표현력이 부족한 사람, 표현을 요구하는 나,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낭만이라거나 로맨틱함은 포기하며 살아왔다. 신혼 때 일이다. 일명 선비라 부르는 신랑과 밥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윽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왠지 쑥스러웠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얼른 일어나 부엌을 향했다. 놓고 온 찬이 남아있을까, 들쳐 봐도 눈에 띄는 게 없다. 화장실에서 잠시 시간을 지체한다. 일이 있어 나갔다 온 것처럼 다시 돌아오니 그는 이미 식사를 마쳤다. 밥상을 앞에 놓고 눈치를 보다 눈이 마주쳐 피하길 몇 번인가. 이상한 사람의 눈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그는 아이들 아빠가 되었다.
3 위치가 많이 달라졌다. 주인공보다는 이 인자로서 크든 작든 원하든 원하지 않던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특히 밖에서는 ‘글쎄…’가 발목을 잡는다. 정답이야 어디 있겠냐마는 의견이라도 과감하게 표현해야 하는데 결정 장애처럼 머뭇거린다. 무지갯빛 아름다운 색이 많건마는 바둑돌 잡듯 흑백으로만 요구하는 답변이 머뭇거림의 원인이기도 하다. 부득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라면 민주주의 원칙을 따른다. 불편해도 평화롭게 화합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혹여 반대의견이 있어도 증명하거나 변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측 불가한 상대의 반응에 또 어찌 대꾸해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집에 돌아와 주저리주저리 일과를 이야기 한다. 다정히 시작된 대화는 이성적이지 못한 나의 대응을 지적한다. 곧 후회한다. 말을 주워 담고 싶다. 맞는 말인데 영 기분이 나쁘다. 이상하다. 온전히 내 편이 아닐 수 있겠구나.
4 한동안 썸 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이성에 대한 아리송한 감정 상태를 노래했는데 공감 백배다. 즐거운 리듬인데 왠지 슬픔을 느끼게 한다. 살다 보니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 헷갈리는 건 그 노래나 매한가지다. 아직은 여전히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흥미를 유발하는 일도 해보고 싶고, 가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도 많다. 밖에서 보고 듣고 느낀 거, 얘기 좀 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 울까. 이야기하다 보면 스스로 길을 찾아 생각을 정리 할 수 있을 텐데 그냥 좀 들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의 말은 자신의 관심사에 관해서만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군 생활, 부모, 형제 얘기, 몇 성공한 친척 이야기 등 나는 다 들어준다. 그의 고생담에 항변할 말이 없다. 때론 나도 같이 고생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같은 해에 태어났으면서 십 년은 더 산 사람 같다.
5 코끝을 살짝 스치는 바람이 좋다며 에어컨은 질색하는 사람, 적응이 안 된다. 더위에 강하다고 우쭐댄다. 더위를 참는 게 아니라 즐기듯 한다. 잘 견디는 그를 바라보는 것도 불편하다. 상대의 곤란함에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아 섭섭이가 주위를 맴돈다. 에어컨이 흔하지 않았던 때, 이례적인 불볕더위가 와도 언감생심 에어컨은 그에게는 사치품일 뿐이다. 노래를 불러도 냉장고 세탁기 있는 것만도 호강이라 어르며 달랜다. 세상 만물은 때를 따라 잘도 움직인다. 올해도 여지없이 연일 폭염주의보가 고공행진이다. 오랜 세월 지나면 이성의 벽도 허물어지고 촌수 없는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많은 추억을 함께 공유하는 관계라 한다. 함께 삶의 굴렁쇠를 돌리며 아웅다웅하다가도 넘어지려하면 합을 맞추게 된다.
6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야구선수 사인이 새겨진 공과 방망이를 가져왔다. 공은 없어진 지 오래지만 방망이는 아직도 곁에 있다. 어린아이와 잠깐은 놀아주었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오랫동안 침대 곁을 지키게 했다. 삼자의 편에서 채근했던 그는 결국 가족 편이 되어 단단히 현실을 지키며 버텨왔다. 뾰족하던 산세가 숱한 세월에 풍화되어 등마루가 되듯 갈매기가 날아간 흔적이 얼굴 곳곳에 있다. 가끔, 지인의 이름을 내게 묻는다.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하는 일에 차일피일 미룬다. 주말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슬픔을 연기하는데 그도 동화되어 울컥거린다. 과묵은 여행 가서 버리고 왔는지 말도 많아지고 관심 받고 싶은 사람처럼 내 곁을 어슬렁인다. 이젠 나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 그가 세상에서 제일 만만하다. 나도 그에게 계속 만만한 사람이고 싶다. 한 지붕 아래에서 눈에 안 보여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얼추 알겠다. 왜냐고 물으면 ‘나 보여?’
첫댓글 나도 그에게 계속 만만하고 싶다. 좋아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