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무엇인가 3 / 이재무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인간 이재무는 아버지 이관범과 어머니 안종금 사이에서 태어난 육 남매 중 장남이다.
이재무는 시를 쓰고 출판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사무실에 와있다.
하나의 ‘이다’와 수백 개의 ‘있다’로 구성된 존재가 지금의 ‘나’이다.
-졸시, <실존주의>, 전문
과학이 사실을 통해 진실을 구현하는 학문이라면 문학은 상상, 공상, 환상, 경험의 굴절 등을 통해 진실에 이르는 장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은 자신의 경험 현실을 질료로 삼을지라도 그 현실 경험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서는 보편적 감동과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인간의 실존적 구원을 위해서이다. 아무리 첨단과학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 실존과 관련된 제 문제 이를테면 삶과 죽음, 그리움과 기다림, 슬픔과 기쁨, 우울과 권태 등을 그것은 다룰 수 없다. 이와 같은 인간 실존을 둘러싼 질의와 응답은 오로지 인문학, 그 가운데에서도 문학을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첨단 디지털 기술 문명시대에도 우리는 문학 행위를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실존이란 무엇인가? 거칠게 추상화시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로 구성된 무엇이라 할 수 있다. 가령 현재의 ‘나’는 누구, 누구 사이에 난 몇 남매의 몇째 ’이다’와 태어날 적부터 지금까지 무수하게 경험된 ‘있다’의 행위들(집에 있다, 학교에 있다, 시장에 있다, 교회에 있다, 차 안에 있다, 들에 있다, 산에 있다, 강에 있다, 바다에 있다, 외국에 있다, 광장에 있다, 거리에 있다, 부엌에 있다 등등)을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이 하나의 ‘이다’와 무수한 ‘있다’를 벗어날 존재란 없다.
문학 행위란 바로 이 ‘이다’와 무수한 ‘있다’로 구성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언어를 매개 수단으로 하여 다루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문학의 하위 장르인 시문학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다만 하위 장르들은 저마다 나름의 ‘룰’을 지니고 있는데 시문학에서는 이 ‘룰’을 시의 구성요소라 한다. 그러니까 시작 행위는 이 구성요소 예컨대 이미지, 비유, 리듬, 상징, 반어, 알레고리, 역설, 어조, 시점과 거리, 화자, 인유와 패러디, 구성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간접적 혹은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시에도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시문학처럼 스펙트럼이 넓은 장르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시에 대한 기호와 취향은 얼마든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좋은 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는 것”(유종호 평론가)이다. 시의 정의는 시인들 수만큼이나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엘리어트는 “시에 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고 말했다.
본래 과학에서의 패러다임은 절대적, 객관적 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기초된 것으로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었다. 이 말은 절대불변의 패러다임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시대에 따라 사회적 구성원들의 합의가 달라지면 패러다임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에서조차 이러할진대 하물며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인문학에서야 말해 무엇 하랴.
패러다임의 역사처럼 좋은 시의 요건도 시대의 부침을 겪는다. 어느 시대이건 묵시적 합의에 의해 좋은 시와 그렇지 않은 시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시에 대한 공준이 있어 그것이 명료하게 주어지고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하여 좋은 시의 요건 몇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언어의 전이가 들어있을 것 둘째, 공감각적 표현이 들어있을 것 셋째, 구체적 묘사가 들어있을 것 등이다. 물론 이밖에 다른 시의 구성요소가 시 창작 실제에 창의적으로 활용될 때 좋은 시의 조건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구태여 이 세 가지만을 특별히 강조한 것은 이 세 가지의 경우가 다른 것들에 비해 더욱 깊게 시적인 사유와 상상력에 결부되어 있다고 보여 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에 대한 필자의 기호와 취향의 반영으로 보아 무방하다.
언어의 전이란 무엇인가?
언어의 전이는 언어의 옮겨 놓기를 말한다. 언어의 옮겨 놓기는 시적 기능이다. 그런데 이러한 언어의 옮겨 놓기는 문학에서만 작용하는 기능이 아니다. 가령 “그가 떴다 하면 반드시 사고가 발생한다.” “이 옷 빛깔은 좀 튀잖니?”에서처럼 일반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뜨다’는 원래 해와 달의 서술어로 쓰이는데 이것이 사람으로 옮겨간 경우이고, ‘튀다’는 공이나 콩의 서술어로 쓰이는데 옷으로 옮겨진 경우이다. 이것은 언어가 원래의 사물에 쓰이지 않고 다른 사물로 옮겨가는 것으로 복잡한 삶을 언어가 따라잡지 못하는 언어의 빈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좋은 시란 바로 이러한 언어의 전이가 시행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나타난다. 몇몇 사례를 알아보자.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이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송찬호, 시, <나비>, 부분)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문정희, 시, <돌아가는 길>, 부분)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문태준, 시, <가재미>, 부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부분)
인용 구절들 속에서 ‘나비가 흘러 다니다’ ‘ 한 송이 돌’ ‘돋아나던 뻐꾸기 소리’ ‘불빛에 젖은 손바닥’ ‘밤 열차가 흘러간다‘ 등은 모두 언어가 원래의 사물에 쓰이지 않고 다른 사물에 옮겨간 시행들이다. 이러한 시행들이 들어 있어 이 시편들은 독자들의 각별한 주목을 끌게 된 것이다.
공감각
공감각은 동시감각의 속성을 지니며, 어떤 감각에 자극이 주어졌을 때,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의 전이 현상을 말한다. 즉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유발하는 것이다. ‘감각전이’ ‘감각유추’라고도 한다. 본래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감각인상의 종류와 그 원인이 되는 물리적 자극은 원래 1대 1로 대응한다. 하지만 때로는 감각 영역의 경계를 넘어선 감각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를 공감각이라 한다.
올여름엔 시골집에 내려가
개구리 울음소리
실컷 듣다가 오고 싶다 다 늦은 저녁 마당에
멍석이 깔리고 두레밥상에 식구들 둘러앉으면
밥상머리에 겁 없이 뛰어들던 울음소리
된장국에도 물김치에도 물그릇에도
둥둥, 참외처럼 노랗게 떠있던 울음소리
.....
뜰방 벗어놓은 신발 속에 눈물처럼 고이던
개구리 울음소리
(이재무, 시, <울음소리>, 부분)
이 시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여러 사물에 비치는 형상을 그리고 있다. 즉 청각의 시각화 가 이루어진 경우이다. 좋은 시는 읽는 즉시 시의 전경화가 이루어진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인 것이다.
구체적 묘사
묘사란 언어에 의해 사물의 현상을 전달하며, 물체의 독특한 행위와 인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기술적, 의도적으로 그려 나타내는 양식이다. 모든 사물에는 그 사물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특징이 있으므로 그 특징의 인상을 관찰하여 이를 근접하게 표현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물의 모양, 환경, 색채, 비교, 위치, 소리, 감촉, 관계 등에 의해 겉으로 드러나는 인상을 기술하고 내면의 변화를 찾아내 감정의 적절한 환경을 그려내는 심리적 양상도 포함될 수 있다.
길은 한 줄기 구려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금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김광균, 시, <추일서정>, 부분)
이 시는 감정의 적절한 환경을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사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창한 게 아니다. 시적 주체가 가을을 맞이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인간적 비애와 쓸쓸함에 젖는다는 진술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공허한 내면세계를 직접적으로 언술하면 시가 되지 않으므로 시적인 구성요소 즉 비유와 이미지를 동원하여 그림(형상화)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 쓰기의 능력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묘사 능력이다. 이는 타고 날 수도 있지만 학습을 통해 키워나갈 수도 있다. 이밖에도 시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필자는 지면상 이 세 가지 방법만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시는 ‘무엇’보다는 ‘어떻게’를 중시하는 장르이다. 요컨대 기의보다는 기표 우의의 장르가 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모름지기 설명에 의존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 미학적으로 긴장감 있는 시적 표현을 구사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시의 구성요소를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대상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새로운 시적 표현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도로에 그칠 공산이 크다. 아니다.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적 표현은 각각 선후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온다. 즉, 새로운 표현이 새로운 인식이고, 새로운 인식이 새로운 표현인 것이다. 표현과 인식은 한 몸이다.